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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2 04:59:44

화담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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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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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華譚
(244 ~ 322)

서진동진의 인물. 자는 영사(令思). 서주 광릉군(廣陵郡) 강도현(江都縣) 출신. 삼국시대 손오의 좌장군, 녹상서사 화융의 손자. 손오의 황문시랑 화서의 아들.

2. 생애

할아버지 화융과 아버지 화서가 등윤에게 모두 살해당했을 때, 화담의 어머니는 18세에 불과한 젊은 나이임에도 수절하고 일과 양육을 병행하면서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은 화담을 키웠다. 장성해서는 학문을 좋아하여 공부할 때 게으름 부리는 일이 없었고, 기민하고 지혜로운 말솜씨로 이웃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에 양주자사(揚州刺史) 주준이 그를 불러 종사사(從事史)로 삼았고, 그의 재주와 기량을 마음에 들어하여 하급자임에도 손님과 친구의 예로써 대하였다.

태강 연간(280년 ~ 289년)에 주준의 뒤를 이어 부임한 양주자사 혜소가 화담을 수재로 천거하였다. 화담은 다른 지역에서 천거 받은 자들과 함께 도성 낙양에 들어가 무제 사마염으로부터 친히 압박 면접을 받았는데, 말문이 막혀 쩔쩔매던 다른 이들과 달리 화담은 뛰어난 말솜씨를 뽐내며 황제와 조정의 신하들을 감탄시켰다. 같은 군 출신인 정위 유송은 화담을 보고는 탄식하였다.
"우리 마을에 이와 같은 인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 하였다니!"
무제 사마염의 책문이 끝난 뒤,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박사 왕제(王濟)가 나서서 화담을 시험했으나, 그 역시 이내 화담에게 말문이 막혀 물러나고는 예를 갖추었다.

황제와 조정의 대신들 앞에서 능력을 인증한 화담은 낭중에 제수받고, 승진하여 태자사인, 본국중정(本國中正)을 역임하다가 어머니가 사망하여 관직을 그만 두고 모친상을 치렀다. 상을 모두 마친 후에는 복직되어 견성(鄄城)의 현령으로 부임하였고, 재직 중에 〈장자찬(莊子贊)〉이라는 글을 지어 공조에게 보여주었다. 이때 연속(廷掾)인 장연(張延)이 그 공조 대신 답하는 글을 지었는데, 그 문장이 심히 아름다워 화담은 이를 마음에 들어하면서 장연을 천거하였다. 이후 상서랑으로 옮겨졌다.

영녕 초년에 겹(郟)의 현령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팔왕의 난으로 인해 경내에 기근이 들었기에, 화담은 마음을 다하여 고통받는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도 왕융은 이를 미담으로 여기고 곡식 300석을 보내 화담을 도왔다. 화담은 이러한 행적 덕에 다시 승진하여 여강내사에 임명되고, 수원장군을 겸하였다.

태안 2년(303년) 12월, 반란자 장창의 부하인 석빙(石冰)과 그 무리가 육규(陸珪) 등 여러 현들을 점거하자, 화담은 사마 저돈(褚敦)과 별동대를 파견해 석빙의 도독 맹서(孟徐)를 격파하여 용맹함으로 이름을 높였다. 그 공으로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지고, 식읍은 1,000호에 이르렀으며, 비단 1,000필을 하사받았다.

영가 원년(307년) 2월, 반란을 일으킨 진민이 강동의 사대부들을 핍박하여 뛰어난 인재들이 그 곁에서 떠나갔다. 진민이 임명한 단양태수 고영과 안풍태수 주기(周玘)도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하던 중, 화담이 격문으로 그들을 비판하자 비로소 정동대장군 유준에게 관군에게 호응하겠다는 서신과 함께 그 증표로 머리카락을 잘라서 보냈다.

화담은 군을 엄정히 다스리면서 상관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이 많았다. 본래 화담과 사이가 좋지 않던 양주자사 유도(劉陶)는 화담이 법을 거역했다는 것을 빌미로 그를 체포하고 수양(壽陽)으로 압송해 하옥시켰다. 그러나 화담과 평소 친하게 지내던 진동장군 주복(周馥)이 나서서 변호해준 덕에 풀려날 수 있었다.

영가 4년(310년) 11월, 동해왕 사마월이 자신에게 먼저 보고하지 않고, 곧바로 회제 사마치에게 수양 천도를 권했다는 이유로 크게 분노하여 주복을 중앙으로 소환하였다. 주복은 당연히 응하지 않았다가 이내 회남태수 배석과 역양내사 감탁에게 공격당하자, 수양의 백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 와중에 화담만이 주복을 가까이 하니, 주복이 감탄하여 말했다.
"내 듣기로 화령사(華令思)는 장자원(臧子源)과 같다 하였는데, 오늘 보니 과연 그러하구나!"
주복은 남은 무리로 저항했지만, 2개월만에 무너져 수양을 버리고 도주하다가 항(項)에서 신채왕 사마확에게 사로잡혀 분사하였다. 동해왕 사마월은 감히 숨어있는 주복의 무리를 색출하고 모두 주살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감탁이 화담을 살려달라 청원하여 죽음만은 면할 수 있었다. 화담의 처형을 막은 감탁은 사람을 보내 말했다.
"화후(華侯)께선 무사하십니까? 저 감탁이 그대를 위해 기꺼이 힘쓰겠습니다."
하지만 화담은 답하지 않았다. 감탁은 다시 사람을 보내 비단 2필을 선물했으나, 화담은 그마저도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사신이 허탕치고 돌아온 것을 본 감탁은 화담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안타까워 하였다. 이후 기첨(紀瞻)이 낭야왕 사마예에게 화담을 천거하려 했지만, 고영의 방해로 인해 화담은 수 년간 관직에 진출하지 못 했다.

건흥 원년(313년) 4월, 낭야왕 사마예가 직접 화담을 불러 군자좨주로 삼았다. 화담은 박학하고 업무에 능통하여 그의 부서에 사고가 터지는 일이 없었다. 그는 관리로 일하면서 30권의 책을 저술하고 《변도(辨道)》라 명명하였는데, 사마예가 이를 친히 읽었다고 한다. 이후 승상 군자좨주, 영 군대중정(領郡大中正)을 역임하였다. 화담은 간보, 범요(范珧)를 조정에 추천하고, 나이가 70세에 가깝다며 은퇴를 청했지만 은퇴는 거부당했다.

건무 초에 비서감 직책을 수여받았고, 대흥 초에는 전군(前軍)에 임명되었으나 병에 걸려 다시 비서감으로 옮겨졌다. 화담은 동진에서 출세하지 못 하여 포부를 이룰 수 없었으나, 사람 보는 눈이 있어 조정에 여러 인재들을 추천하였다. 진릉(晉陵)의 주봉(朱鳳), 오군(吳郡)의 오진(吳震) 모두 그의 천거를 받아 좌저적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화담은 평소 사위인 대막을 그 형인 대연보다 높이 평가하여 대연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대연은 원제 사마예의 총애를 받아 대막보다도 중용받았기에, 대연이 이를 이용해 화담의 출세길을 방해하니, 화담은 승진하지 못 했다. 바라는 관직에 오르지 못 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화담은 결국 원제 사마예에게 넌지시 말했다.
"신은 이미 늙어 비각(秘閣)에서 죽을 운명인가 봅니다. 급암(汲黯)의 말을 오늘 다시 깨달았습니다."
화담은 급암의 고사를 통해 간신배의 농간으로 벼슬길이 막혔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따진 것이다. 그 뜻을 알아차린 원제 사마예는 불쾌해 하였다.

영창 원년(322년) 정월, 대장군 왕돈이 무창(武昌)에서 조정에 반기를 들고 거병하였다. 이때 화담은 병이 무척 심해 비서성으로 출근하지 못 하니, 조정에서 그를 면직시켜 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 화담은 집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광록대부, 산기상시로 추증되고, 금장자수(金章紫綬)를 하사받았다. 시호는 '호(胡)'.

정로장군 사마를 지내던 아들 화화(華化)가 일찍이 급상의 난을 토벌하다가 전사하는 바람에 그 동생인 화무(華茂)가 후사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