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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00:58:56

사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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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주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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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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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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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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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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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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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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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西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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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제 사마의의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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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차남 3남
,경황제,
사마사追, 帝
,문황제,
사마소追, 帝
,여남문성왕,
사마량八王
4남 5남 6남
,낭야무왕,
사마주
,연왕,
사마경
,평원왕,
사마간
7남 8남 9남
,부풍무왕,
사마준
,양효왕,
사마융
,조왕,
사마륜帝, 八王
帝표는 황제, 追표는 추증, 八王은 팔왕의 난 관련인물
사마경, 사마간과 사마륜은 시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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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부군[추존][2]사마랑창무정후하간평왕[3]의양왕
장무왕
의양성왕[4]하간평왕[5]
동평왕
고조 선황제[추존]세종 경황제[추존]제헌왕[8]동래왕[9]
북해왕[10]
제무민왕
태조 문황제[추존]세조 무황제(초)비릉도왕[12]
효혜황제(2)민회태자
진헌왕진왕[13]
효민황제(4)[14][15]
성양회왕
성양상왕
초은왕
동해충왕
시평애왕
회남충장왕진왕[16]
한왕
신도회왕
청하강왕[17]
장사려왕
성도왕화용왕[18]
오효왕효민황제[19]
발해상왕[20]
예장왕효회황제(3)[21]
대애왕
제헌왕[22]
성양애왕청하강왕[23]
요동도혜왕동래왕[24]화용왕[25]
광한상왕북해왕[26]
낙안평왕
연왕 기[27]
사마영조
낙평왕
여남문성왕[28]사마수
여남회왕
낭야무왕낭야공왕중종 원황제(5)[29]
무릉장왕
동안왕
회릉원왕
연왕 경연왕 기[30]
부풍무왕순양왕
신야장왕
평원왕
양효왕
조왕[31]
안평헌왕안평정왕남궁현왕[32]
안평왕 돈[33]
의양성왕[34]
태원성왕하비왕[35]
사마익남궁현왕안평왕 우[36]
하비헌왕하비왕
태원열왕하간왕
상산왕안평왕 돈안평왕 우[37]
패순왕
동무대후팽성목왕팽성원왕
고밀문헌왕동해효헌왕
신채무애왕
고밀효왕
남양왕진원왕 보[38]
범양왕
사마순제남왕중산왕
사마진초강왕초정왕초왕
초민왕
단수현후안평정후[39]
안성정후임성왕 릉임성왕 제
서하무왕
안평정후 안평정후[40][41]
경조부군 이전[추존][43]
정서부군 - 예장부군 - 영천부군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3] 친부는 의양성왕[4] 친부는 안평헌왕[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13] 친부는 회남충장왕[14] 여기까지 서진[15] 친부는 오효왕[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23] 친부는 진무제[24] 친부는 제헌왕[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26] 친부는 제헌왕[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29] 여기부터 동진[30] 친부는 진문제[31] 윤통(閏統)[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37] 친부는 남궁현왕[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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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서진 종실 27인
<rowcolor=#ece5b6> 이름 출생연도 가족관계 책봉 식읍(호)
사마부(孚) 숙달(叔達) 180 사마팔달 삼남 안평왕(安平王) 40,000
사마망(望) 자초(子初) 205 부(孚)의 차남 의양왕(義陽王) 10,000
사마홍(洪) 공업(孔業) 불명 망(望)의 차남 하간왕(河間王) 없음
사마무(楙) 공위(孔偉) 불명 망(望)의 사남 동평왕(東平王) 3,097
사마보(輔) 불명 불명 부(孚)의 삼남 발해왕(渤海王) 5,379
사마황(晃) 자명(子明) 불명 부(孚)의 오남 하비왕(下邳王) 5,176
사마괴(瓌) 자천(子泉) 불명 부(孚)의 육남 태원왕(太原王) 5,496
사마규(珪) 자장(子璋) 235 부(孚)의 칠남 고양왕(高陽王) 5,570
사마형(衡) 자평(子平) 불명 부(孚)의 팔남 상산왕(常山王) 3,790
사마경(景) 자문(子文) 불명 부(孚)의 구남 패왕(沛王) 3,400
<rowcolor=#ece5b6> 이름 출생연도 가족관계 책봉 식읍(호)
사마권(權) 자여(子輿) 불명 규(馗)의 장남 팽성왕(彭城王) 2,900
사마태(泰) 자서(子舒) 불명 규(馗)의 차남 농서왕(隴西王) 3,200
사마수(綏) 자도(子都) 불명 규(馗)의 삼남 범양왕(范陽王) 없음
사마수(遂) 자백(子伯) 불명 순(恂)의 장남 제남왕(濟南王) 없음
사마손(遂) 자제(子悌) 불명 진(進)의 장남 초왕(譙王) 4,400
사마목(睦) 자우(子友) 불명 진(進)의 차남 중산왕(中山王) 5,200
사마릉(陵) 자산(子山) 불명 통(通)의 장남 북해왕(北海王) 4,700
사마빈(斌) 자정(子政) 불명 통(通)의 차남 진왕(陳王) 1,710
<rowcolor=#ece5b6> 이름 출생연도 가족관계 책봉 식읍(호)
사마량(亮) 자익(子翼) 불명 의(懿)의 삼남 부풍왕(扶風王) 10,000
사마주(伷) 자장(子將) 227 의(懿)의 사남 동완왕(東莞王) 10,600
사마간(幹) 자장(子良) 232 의(懿)의 육남 평원왕(平原王) 11,300
사마준(駿) 자장(子臧) 232 의(懿)의 칠남 여음왕(汝陰王) 10,000
사마융(肜) 자미(子微) 불명 의(懿)의 팔남 양왕(梁王) 5,358
사마륜(倫) 자이(子彛) 불명 의(懿)의 구남 낭야왕(琅邪王) 없음
사마기(機) 태현(太玄) 불명 소(昭)의 칠남 연왕(燕王) 6,663
사마유(攸) 대유(大猷) 248 소(昭)의 차남 제왕(齊王) 없음
사마감(鑒) 대명(大明) 246 소(昭)의 육남 낙안왕(樂安王) 없음
}}}}}} ||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낭야무왕(琅邪武王)
司馬伷 | 사마주
시호 (武)
작위 남안정후(南安亭侯) → 동무향후(東武鄕侯)
→ 남피현백(南皮縣伯) → 동관군왕(東莞郡王)
→ 낭야군왕(琅邪郡王)
최종직위 대장군(大將軍) 겸 개부의동삼사(開府義同三司)
성씨 사마(司馬)
(伷)
자장(子將)
가족 부친: 사마의(司馬懿)
생몰기간 227년 ~ 283년
재위 서진의 동완왕
265년 ~ 277년
서진의 낭야왕
277년 ~ 283년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서진의 황족이며 자는 자장(子將)으로 사마의의 4남.[1] 어머니는 복태비, 아내는 제갈탄의 딸인 제갈태비, 사마사, 사마소와는 이복형제다. 친 동생으로는 사마경, 사마준, 이복동생으로는 사마간, 사마륜 등이 있으며, 훗날 사마소 후손의 왕통이 끊기면서 그의 후손인 원제 사마예로 제위가 넘어가기 때문에 나라중시조다.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2. 생애

위나라 조방(애제)의 정시(240~249) 연간에 남안정후에 봉해졌고 영삭장군이 되어 (鄴)을 지켰으며 산기상시, 동무향후, 우장군 등을 역임했다. 이 후 연주제군사와 연주자사를 감독했으며 오등작이 부활하고서는 남피, 정로장군이 되어 가절을 받았다.

정사 삼국지》 〈위서〉 삼소제기(三小帝記)의 주석으로 인용된 《한진춘추》에 따르면, 260년 고귀향공 조모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자 당시 둔기교위로 있던 사마주는 거문에서 저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모의 측근들이 꾸짖자 거느린 무리가 모조리 달아나자 물러섰다. 그러나 당시 조모가 거느렸던 군사의 수준을 보면 사마주의 병사와 급이 거의 다르다. 조모는 실권이 없는 황제라서 급조한 환관들과 노복들이었지만 사마주가 이끄는 병사는 정예병이었다. 마음만 먹었으면 조모를 제압을 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던 것. 그래서 사마주가 조모의 친위 쿠데타를 묵인해서 물러난 게 아니냐는 설도 존재한다. 특히 사마주의 공로와 그가 받은 봉지의 괴리감를 보면 더욱 더 흥미로운 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마주 정도 되는 인물이 조모에게 겁을 먹고 도망갔다기보단 차마 황제를 해칠 수 없어서 스스로 물러난 것에 가깝다고 보인다. 그나마 사마씨 성을 가지고도 조위에 거역하지 않은 최후의 양심, 혹은 황제에게 함부로 공개된 장소에서 해를 가하는 것을 꺼리는 계산이라고 하겠다. 물론 조모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양심이나 계산이 없던 둘째 형에게 피살당한다.

265년에 조카 사마염선양을 받아 서진이 세워지자 동관군왕에 봉해져 1만 6백 호를 식읍으로 받아 동안왕이 되면서 중앙으로 들어가 상서우복야, 무군장군이 되었으며, 외직으로 나가 진동대장군, 가절, 서주도독제군사가 되어 위관을 대신해 하비를 수비했다. 또한 277년에 낭야왕(瑯揶王)이 되어 개부의동삼사가 더해지고 280년 사마염의 오나라 정벌에서 수만 군대를 이끌고 참전해 도중으로 나아갈 것을 명령받았으며, 오나라 손호의 항복을 받았다.

이 공로로 아들 2명이 정후가 되었다가 도독청주제군사, 대장군이 되었으며, 지위와 공이 높았지만 공손하고 검약했다. 수하 관리들도 힘을 다하여 백성들을 교화시켰으며, 283년 여름 5월 1일 사망했다. 향년 57세. 시호는 무왕(武王).

유언으로 어머니 무덤 곁에 묻히는 것과 아들 넷에게 봉국을 나누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의 유언은 모두 시행되고 그의 뒤는 장남 사마근이 이었다. 팔왕의 난 이후에 서진이 전조의 유총에게 망하자 사마근의 장남이자 사마주의 장손 낭야원왕 사마예동진을 세운다. 즉, 사마주는 진나라의 중시조로 볼 수 있는 인물이다.[2]

다만 사마근을 빼고는 자식 복은 좋지만은 않았다. 차남과 삼남인 사마담, 사마요는 다퉈서 사마요가 결국 봉작을 잃었는데, 사마담은 극악의 잔인한 술 주정에 찬탈자 사마륜에게 가담한 놈이었고, 사마요는 문앙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다. 근데 사마요는 자기 팔자도 그닥 좋지는 못해서 팔왕의 난에 휩쓸려 끔살당했다.[3] 그나마 사마륜의 부하 손수를 공격해 죽이고 왕의 지위를 받은 뒤, 추가로 벼슬을 받고 죽은 사마최만 좀 나았을 정도.

3. 가족 관계

4. 미디어 믹스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파일:external/san.nobuwiki.org/607.jpg
삼국지 8,[4] 9, 10, 11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330.jpg
삼국지 13, 14

삼국지 8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정사에선 나름대로 공로가 많은 것에 비해서 삼국지연의에선 존재감이 별로 없기에 일러스트도 평범하고, 능력치도 평범한 편이다. 대부분 무난하게 낮으면 60대, 높으면 70대인 상황. 이런 평범함 때문인지 삼국지 11에선 특기마저도 없다. 그러나 극후반부에 갈수록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인재난에 시달리는 삼국지 시리즈 특성상 이런 무난하고, 어느 하나 떨어짐이 없는 능력치는 도리어 장점이 돼서 먼치킨들이 난무하는 군웅할거 같은 초반부에선 꿈도 못꾸는 능력치로도 올라운더로써 활약할 수 있다.

특히 오나라가 멸망하는 280년대에도 살아 있는데, 이 시점에 가면 재야인물들은 하나도 없고, 인재가 많아봐야 20명 내외밖에 안되므로 초특급 인재로 활약할 수 있다. 사실상 양호, 문앙, 두예, 왕준 같은 드문 인재들과 대면하지 않는 한 고전할 일이 없을 정도로 인물이 부족한 시대이기 때문. 게다가 위에 기재된 인재들이 모조리 다 사마주와 같은 세력에 있기에 대면할 일도 없다. 쉽게 말해서 좋은 시대에 태어나서 유용하게 쓰이는 인물. 극후반 시나리오는 삼국지를 플레이하는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셀렉율이 가장 떨어지는 만큼 인지도는 매우 낮다. 삼국지 12편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5]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3/무력 45/지력 55/정치력 62라 별 볼일 없는 무장이다. 병법으로는 제사, 누선, 투석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3/무력 53/지력 62/정치력 65/매력 69에 명사 특기 포함 특기가 4개.(농업, 화시, 반목, 명사) 하지만 70넘는 능력치가 없는 걸 보듯이 특기가 있어도 별 도움은 안된다. 극후반에나 나오는데 명사 특기는 본인이 직접 플레이해서 도적들을 설전으로 바를 것이 아닌 이상, 등장하는 모든 세력이 모두 황제이기 때문에 효용도가 초반에 비해 많이 낮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1/무력 52/지력 61/정치력 66/매력 62인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무특기다. 사마씨 중 유일하게 수군 병종 적성이 무려 A다.

삼국지 13에서의 일러스트는 오른손에 검을 든 상태에서 소리치고 있으며 능력치는 매력만 빠진 상태에서 전작과 같다. 특기는 연전 1 단 하나. 전수특기도 당연히 연전이고 전법은 기공약화. 다만 수군을 이끌었다는 기록이 있건만 동백 따위도 있는 수영 특기가 없다. PK로 한다면 수영 특기를 추가해주자.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3, 무력 52, 지력 62, 정치 65, 매력 61로 전작과 달리 통솔력이 2, 지력이 1 상승한 대신 정치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신중, 주의는 명리, 정책은 수군육성 Lv 2, 진형은 안행, 전법은 혼란, 강습, 시람,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은 모두 없다. 수상전에 능했다는 기록으로 드디어 수상전용 전법이 생겼지만 능력치가 잡장급이라 내정에 종사하는 문관에 가깝다.

4.2. 삼국전투기

전투외편 8-5에서 얼굴만 비춘다. 검은 더벅머리. 아마도 루인 라이트인 듯.

전투외편 8편에서 얼굴만 나오면서 언급되었다. 사마염의 명으로 도독서주제군사로 임명되어 하비에 배치되었다.

삼국 통일 편에서도 또 얼굴만 나오면서 언급되었다. 오 정벌 당시 도중 루트로 공격했다고 언급됐지만 육로로 진군한 장군들 중 결국 끝까지 유일하게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1] 사실 3남 ~ 6남일 수 있는데, 보통 생몰년도가 있고 친형제 사마량을 형으로 보기에 4남으로 보는 편이다.[2] 사마사-사마소-사마염 계열의 황실 본가는 팔왕의 난, 영가의 난 때 죄다 몰살당했다.[3] 애시당초 이 사건은 누구라도 팔자 좋게 살아남기가 매우 힘든 사건이였다.[4] 8은 색조만 조금 다르다.[5] 그것도 본편을 포함해서 PK에서도 아예 등장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