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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4:44:24

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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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 제4대 황제
손호 | 孫皓
출생 242년
손오 단양군 건업현
(現 장쑤성 난징시)
즉위 264년 9월 3일
손오 단양군 건업현
(現 장쑤성 난징시)
사망 284년 4월 12일 (향년 42세)
서진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재위기간 손오의 황제
264년 9월 3일 ~ 280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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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ece5b6> 본관 부춘 손씨
호(皓)
부모 부황 문제
모후 소헌황후
형제자매 4남 1녀 중 장남
배우자 정실 황후 등씨
후궁 미인 장씨, 부인 장씨
자녀 34남
원종(元宗), 호종(皓宗)
별명 팽조(彭祖)
작호 오정후(烏程侯) → 귀명후(歸命侯)
제호 말황제(末皇帝)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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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흥(元興, 264년 ~ 265년)
감로(甘露, 265년 ~ 266년)
보정(寶鼎, 266년 ~ 269년)
건형(建衡, 269년 ~ 271년)
봉황(鳳凰, 272년 ~ 274년)
천책(天冊, 275년 ~ 276년)
천새(天璽, 276년)
천기(天紀, 277년 ~ 2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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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즉위 이전2.2. 폭군이 되다2.3. 오나라 멸망 후
3. 가족 관계4. 평가5. 미디어 믹스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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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오나라의 4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는 원종(元宗), 호종(皓宗).

손권의 삼남이자 황태자였던 손화[1]의 아들이며, 손휴에게는 조카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119회와 120회에서 등장한다.

사실 손호의 치세 기간은 엄밀한 의미에서 삼국 시대가 아니다. 이미 263년에 촉이 멸망하여 손호가 즉위한 264년에는 이미 삼국 체계가 끝난 상태였고, 얼마 가지 않아 위나라도 멸망하면서 재위 기간 동안 서진과 함께 존속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면 그의 치세는 서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유선손권에 묻혀서 그렇지 재위 기간이 16년으로 꽤 길다. 손권도 사실 황제로써의 재위 기간은 23년밖에 안 되니 아주 더 길지도 않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아버지 손화가 승상 손준의 명령으로 자결한 후, 적모 장비(張妃)도 손화를 따라 죽었으므로, 친모인 하희에게 양육받았다.

경제 손휴 시대에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졌다. 서호의 백성 경양이 손호의 관상을 보고는, 매우 고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다. 손호는 속으로는 기뻐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수신기》에 따르면 오나라 손량 오봉 2년 5월에 양선현의 이리산에서 큰 돌이 저절로 섰다. 이는 손호가 허물어졌던 선조의 가문을 계승하여, 다시 그 지위를 복위할 때임을 알려준 것이다. 오나라 손휴의 영안 4년 안오현의 평민 진초가 죽은 지 이레 만에 다시 살아나 무덤을 뚫고 나왔다. 오정후 손호가 망하였던 자신의 가문을 이어 받아, 제위에 오를 징조였다.

손휴가 죽을 때, 촉나라가 멸망했고, 남쪽의 변경인 교지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국가가 혼란스러웠기에 사람들은 훌륭한 군주를 얻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만욱은 손호의 옛 친구였는데 그는 손호가 총명하다며 복양흥, 장포 등과 협의해 손호를 제위에 올리길 희망했다.

사실 만욱의 추천을 제외하고도 당시 황족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손호가 가장 적임자에 가까웠다. 당시 황권과 비교적 가까웠던 황족은 기록 상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2][3][4]
이들 황족 중에서 차기 황제가 나와야 하는 상황인데, 손화의 아들인 손호를 즉위시킨다는 것은 이궁지쟁에서 손화파에 속했던 오군 육씨를 비롯한 강동 토착 대호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으며, 손호를 제외하고는 다른 황족들은 큰 결격사유가 있었다:
즉, 차기 황위로 결격사유가 제일 적은 황족들은 손화의 서자들이였으며, 그 중에서 손화의 서장자였던 손호가 자연스럽게 선택된 것이다. 만욱의 증언처럼 손호 개인도 어느 정도 황제의 자질을 갖춘 인물로 평가되었으니 금상첨화였다.

결국 복양흥과 장포는 손휴의 아내, 주부인에게 손호를 후사로 삼도록 하라고 권유하였다. 주부인은 "나는 지아비를 잃은 과부인데, 어찌 사직의 걱정을 알겠습니까? 단지 오나라가 멸망하지 않고 종묘가 의지할 곳이 있으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손호를 제위에 올렸다. 황제가 될 당시 손호는 23세였다.

2.2. 폭군이 되다

손호는 즉위 초에는 선정을 베풀어서 현명한 군주로 칭송받았다. 그런데 이게 3개월도 못 갔다. 그는 보천의 건의로 건업에서 무창(어저우)[5]으로 천도하고 토목 공사를 자주 일으키며 향락과 주색잡기에 빠졌다. 또 국고가 바닥나는데도 사치를 부렸고, 화리를 공격하러 가면서 수많은 후궁들을 데리고 진군하다가 추위를 이기지 못한 병사들의 반란 모의를 듣고 돌아오기도 했다. 손호의 애첩들 가운데 어떤 여자는 사람을 시장에 보내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기도 했다.

266년 손호가 무창(武昌)에 있을 때, 오흥군(吳興郡)의 시단이라는 사람이 자기 백성들이 고달파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10,000여명의 백성들을 이끌고 손호의 이복동생인 손겸을 협박하여 건업으로 가서 손겸을 황제로 세우려고 했다가 정고제갈정에게 토벌되었다. 손호는 동생을 독살하였고 그의 모자를 모두 죽였다. 또 다른 동생 손준(孫俊)은 장승의 외손자[6]로 곧 손화의 적자였는데, 총명하여 말재주도 뛰어나 멀리서까지 칭찬이 자자했으나 손호는 그도 죽였다.[7]

당시 화핵의 상소를 보면 손권이 죽은 이후부터 권신들[8]이 정권을 전횡하며 안정과 생존의 근본을 잃게 되었고, 한 순간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여러 차례 군대를 일으켜 창고에 쌓아놓은 것을 기울여 다 사용하였으며, 병사들은 수고하고 백성은 빈곤하게 되어 한시도 안정을 얻지 못하게 되었으며 지금 생존하고 있는 자들은 부상을 입고 남은 무리들이고, 고통과 슬픔이 있는 백성뿐이라서 군용물자는 텅 비게 되었고, 창고는 부실하며 베나 비단을 내리는 것은 추위와 더위를 막기에 넉넉하지 못하며, 게다가 산업을 잃어 가가호호가 곤궁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관청의 공급에 의지하여 구제되고 있다고 했다.

또 그는, 경도(都)의 많은 관원들이 각자 백성을 징용하면서 백성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있어 항상 규정된 한계 가까이 이르고, 추수할 달이 되면 기한 내에 부세를 납입하도록 질책하며 관원들은 백성들의 파종할 시기를 빼앗았지만, 금년의 세금을 재촉하고, 만일 체납하는 자가 있으면 재물을 기록하여 몰수했기에 백성들이 빈곤하며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 했다. 지금 창고는 부실하고 백성은 노역을 하고 있으며, 굶주린 자가 먹을 수 없고, 수고로운 자가 휴식할 수 없으며, 공로 있는 자가 상을 받을 수 없으니, 군주는 백성의 세 가지 희망을 저버렸기 때문에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공을 세우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손호는 재위기간 동안 숙청도 밥 먹듯이 해서 그가 죽인 인물들은 다음과 같았다.

그가 총애했던 간신들은 다음과 같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손호 자신이 죽였다.

특히 오나라의 황족들을 많이 살해했다. 숙부 손분이 손호에게 처형당한 것을 마지막으로 손권의 일곱 아들들은 전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15] 참고로 그 후손들까지 생각해보면 장남 손등의 기록에 남아 있는 유일한 아들인 손영은 손준 정권에 반하다가 실패해 이전에 벌써 자살했고, 차남 손려와 칠남 손량은 기록에 있는 아들이 없으며[16] 사남 손패의 아들들은 손호에 의해 유배[17], 오남 손분은 손호에게 본인과 아들들이 전부 도륙, 육남 손휴의 아들들 또한 손호가 2명은 죽이고 나머지 2명은 유폐[18], 삼남 손화의 아들들이자 손호의 형제들 중에서는 적자인 이복동생 손준은 손호에게 피살, 역시 서출인 손겸[19]도 손호에게 피살당해[20] 손호가 죽였다는 기록이 없는 형제는 손덕이 유일했다[21]. 또한 손책의 후손들 또한 피를 많이 봤는데 손책의 아들은 알려진 것은 손소가 유일하고[22] 손자는 알려진 것은 손봉이 유일함으로, 손봉이 주살당한 것은 손책의 가문이 멸족당한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손호 치세까지 살아 있었던 손책과 손권의 후손은 손호에게 거의 씨가 말랐다는 것이다.[23]

화핵육개 같은 자들이 이런 행위를 막기 위해 상소문 수백장을 올렸지만 손호는 모두 무시했다. 나중에 육개는 육항이 외지에서 많은 병사를 이끌고 있어 어찌하지 못했지만 육개와 육항이 연달아 죽자 그의 가족을 모두 귀양보내고 화핵 또한 얼마 못가 면직시켰다.

그리고 손호는 신하들을 모아놓고 주연을 베풀면, 항상 모두가 취해 쓰러질 때까지 마시게 했다. 그때 환관들을 시켜 이들을 감시하게 했고, 거나하게 취한 신하들에게 황제의 뒷담을 유도하는 등 속마음을 떠보게 했다고 한다. 여기서 불평불만을 하거나 폭언을 하는 신하들을 골라냈으며 정도의 차이에 따라 목을 베거나 벌을 주었다고 전한다.

후궁은 수천 명이나 되었는데 오나라는 제대로 된 후궁 제도가 없었으므로 손호는 후궁들에게 황후의 인새를 마구 나누어 주었다. 또, 궁 안으로 물살이 센 물을 끌어들여 궁녀들 가운데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모두 죽여 그 물로 흘러가도록 했다. 또한 형벌도 아주 가혹해서 사람의 가죽을 벗기거나 발을 끊거나 사람들이 곁눈질하고 쳐다보는 걸 싫어하여 사람의 눈을 뽑았다고도 한다.

설영 같은 경우는 손호 정권에서 높은 직위에 올랐다는 까닭만으로 진수에게 의심스럽다는 평을 받았을 정도. 진수는 손호가 부당한 형벌을 남용하였으므로, 죽거나 쫓겨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아래 사람마다 두려워하여 모두 하루하루 생명을 보존하기를 원하고, 아침에 저녁의 일을 헤아리지 못했으며 사납고 미련하며 잔혹한 법령을 마음대로 시행하여, 충성스럽게 간언하는 신하를 주살하고 참언하고 아첨하는 자는 승진시켰으며, 그 백성들을 학대하여 부리고, 음란하고 사치스러움이 극에 달했으니, 마땅히 허리와 머리를 분리시켜 백성들에게 사죄시켜야 했고 은혜를 지나치게 베풀었다고 했다.

손성 역시 손호의 죄는 떠돌이 도적같고 잔학함은 주왕걸왕을 넘어섰으니 그냥 닥치고 효수해서(...) 원혼들에게 사과했어야 한다며 귀명후라고 우대한 것은 잘못이고 천벌을 행하여 죄 지은 자를 쳐서 억울하게 죽은 백성들을 조상(弔喪)하지 않았으니, 사납고 혹독한 자에 대한 계율이 없게 되었다며 당시 서진 정권을 깠다. 진수와 손성은 하다못해 후주 유선에 대해서도 암군, 혼군이라고 까긴 했지만 참수, 요참하라는 말까진 하지 않았는데 손호는 볼 것도 없이 바로 인수분해해서 천하에 사죄시켰어야 한다고 했다.

다만 <손호전>의 주석에 따르면 서진의 시중 유준(庾峻)[24] 등이 손호의 시중 이인(李仁)에게 이게 정말 사실이냐고 물었는데 이인은 전해진 게 잘못된 것이며 천하의 악이 모두 그의 탓으로 돌려지기 때문이고 또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들 손호가 죄인을 벌할 권리가 있고 곁눈질하는 건 신하로서 오만무례한 것인데 죽인다고 해도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해 물은 사람들이 수긍했다고 한다. 그외에도 오나라의 신하인 오언 역시 손호는 영명한 군주로 훌륭한 신하들의 보필을 받았으나 하늘의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다. 육기 역시 변망론에서 손호 치세 중기까지는 자신의 아버지 육항 등을 비롯한 현명한 신하가 손오를 지켰으나 자신의 시기에 그런 사람들이 없어져 망했을 뿐이라며 손호에 대한 비판을 삼갔다. 오언이 간신배도 아니고 타인에게 아첨하지 않는 성품의 소유자인 것을 감안했을때 손호의 악명이 승자인 진과 후대 사서에 지나치게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상광이란 점술사가 손호에게 수레를 타고 낙양에 입성할거라 예언을 하자,[25] 나라 사정은 생각지 않고 서진을 공격할 생각을 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2.3. 오나라 멸망 후

결국 280년사마염(晉)에게 대공격을 받아 오나라는 멸망한다. 손호는 왕준, 사마주, 왕혼에게 각각 사자를 파견해 항복 의사를 전했다. 그는 '한나라가 천하를 통치할 능력을 상실하고 구주가 분열되었을 때, 내 조상들은 강남을 차지했는데 지금 대진은 천자가 일어나 은덕을 사해에 펼쳤으며 어둡고 우매하여 구차하게 편안하려고 하여 천명을 아직 깨닫지 못했으나 오늘에야 이르러서야 천자의 육군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감히 천조의 넓은 도량과 빛나는 은덕에 기대 머리를 숙여 귀순하겠다'고 했고 이게 받아들여져 백성들을 구제하기를 희망할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강표전>에 따르면 외삼촌 하식에게 '하늘이 오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망하게 했고 무슨 얼굴로 선대 4명의 황제를 뵈어야 하느냐!'고 편지를 보냈고, 신하들에게는 '자리에 있는 여러 해 동안 정교가 흉패하여 마침내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속에 궁핍하도록 만들었으며 스스로 궁실에 거하면서 무거운 질병을 끌어안고 계책이 부족하며 생각하는 바가 중도를 벗어나 많은 것이 황당하고 참람했고 주변의 소인들로 인해 참혹함이 생기고 포학한 독이 횡류하니 충성스럽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해를 입었으며 어두워서 깨우치지 못하고 그 막힌 바를 찾아보니 내가 그대들을 저버린 탓이라고 했고 초나라를 버리고 한나라를 섬긴 장량진평처럼 서진의 조정에서 출사하라'고 편지를 보냈다. 최소한 자기가 나라를 망쳤다는 자각은 있었던 듯 하다.

280년 3월 15일, 왕준이 가장 먼저 도착해 손호의 투항을 접수하고 그의 결박을 풀어주며 관을 불태웠다. 사마주는 손호가 자신에게 인수를 주었기 때문에 사자를 파견해 손호를 돌려보냈다. 서진군에게 붙잡힌 손호는 가족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옮겨 5월 1일에 낙양으로 압송되었으며 사마염은 그에게 귀명후(歸命侯)의 칭호를 내렸다. 또 손호의 태자 손근을 중랑으로 임명하고, 아들 중에서 왕으로 봉해진 자는 낭중으로 임명했다. 의복과 수레, 밭 30경을 주고 해마다 곡물 5,000석, 돈 50만 전, 비단 500필, 솜 500근을 주도록 했다. 《진서》 <무제기>에 따르면 오의 옛 명망 있는 사람들은 재능에 따라 순서대로 발탁하고 옛 오나라 황실인 손씨와 대장 중 사망한 가솔은 수양(수춘)으로 이주시켰다.

그래도 진나라에 끌려가서 바보짓만 한 유선과는 다르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예를 들면 낙양에 끌려가 사마염 앞에 무릎을 꿇은 손호에게 사마염이 '짐이 이런 자리를 만들어놓고 그대가 오기를 기다린 지 오래다.'고 하자 손호는 '신도 남쪽에서 이런 자리를 만들어 놓고 폐하를 기다렸습니다!'고 받아넘겼다.

가충에게 왜 사람 얼굴을 벗겼냐는 조롱을 받자 "남의 신하가 되어 그 임금을 해치려드는 무리는 그같이 벌해야 마땅하다"고 쏘아줬다고 한다.[26] 이는 위나라 황제 조모사마소를 토벌하기 위해 궐기했을 때 가충이 이끄는 병사에게 조모가 살해당했던 사건을 은근히 암시하는 것으로 우회적으로 가충을 공격한 것이다. 또한 중원뿐만 아니라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가충이 불충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일설에는 이것을 질문한 자가 가충이 아니고 왕제라고 하며 사마염과 왕제가 바둑을 둘 때 질문한 것이라고 하는데 왕제가 손호에게 "듣기로 당신은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사람의 발꿈치를 자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던데 왜 그런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손호가 대답하길 "신하가 군왕에게 무례하면 그것은 낯짝이 없는 짓이다. 그래서 그의 얼굴 가죽을 벗기는 것이 가장 적합한 벌이다." 그리고 당시 왕제의 두 발이 곧게 펴져서 사마염에게 닿을락말락 하니 그것도 추가로 조롱하는 패기를 보여준다.

세설신어》에서 나온 일화로, 또 한 번은, 사마염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연회를 베푸는데, 가무로 흥을 돋구고 있었다. 이때 손호에게 "듣기로 너희 오나라의 음악이 괜찮고, <이여가>(爾汝歌)[27]를 즐겨 부른다는데, 귀명후(손호), 그대가 한 수 불러주면 어떤가?" 그때의 가치관으로 보자면 손호는 항복했음에도 일국의 군주였으니 배우처럼 노래하게 시키는 것은 모욕적인 일. 하지만 손호는 정말로 노래를 부른다.
옛날에는 와 이웃이었는데, 지금은 의 신하다. 에게 술 한잔을 올리니, 는 만수무강하라.
(昔與爲隣, 今與爲臣, 上一杯酒, 令壽萬春)

당연히 일국의 황제에게 하기에 너무나도 무례한 내용이다. 하지만 손호의 이 대응을 좀 더 해석하자면 는 스스로 짐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너(汝)라고 부르겠다. 이건 가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이니,[28] 의 잘못이다.[29] 네가 야자타임이라며 노래를 시켰으니 시킨대로 했다 자신의 체면을 지키면서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 수 있는 뛰어난 대응으로, 이런 것을 볼 때 여러모로 대비되는 촉한과 동오의 최후 군주스러운 일화들이다.

낙양으로 간 지 4년 만인 284년에 죽었고, 북망산에 묻혔다. 그리고 그의 무덤 바로 옆에는 훗날 백제의자왕이 묻히게 된다. 또한 유선이나 고구려연남생, 연남산 형제도 여기에 묻혔다.

손호가 죽은 이후에도 오나라의 유민들은 스스로 손씨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중원은 반드시 망하고 오나라가 반드시 부흥할 것이다'라고 노래를 부르며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진나라의 골칫거리가 되었다는 기록이 진서 오행지, 송서 오행지에 전한다. 또한 이 때문에 손호의 후손들을 옹립한 반란도 서진이 망할때까지 꾸준히 일어났다고 한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동진 원제 사마예가 건업에 도읍한 318년까지도 손호의 후손을 옹립한 반란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 보건데 적어도 손호가 벌였다던 이런저런 악정들이 옛 오나라 유민들의 손오에 대한 그리움을 지울 수준까지는 아니었고 후대의 사관에 의해 과장되었다는 증거로 볼 여지도 있다. 실제로 사마염 역시 촉의 유민들은 순종적인데 오나라 유민들은 (옛 나라를 그리워하며) 반항이 심하다고 짜증을 낸 적도 있다.

3. 가족 관계

4. 평가

손침을 제거한 것 빼고는 손휴 정권은 딱히 잘한 게 없었고 촉이 위에게 항복했을 때인 264년에 손휴는 죽는다. 이 위급 상황에 황제에 등극한 것이 20대 초반이던 손호로 예전 황태자였던 손화의 아들이다. 손호는 오나라에 힘을 북돋아 줄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손호는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들 어떠랴. 어찌됐던 간에 긴 관점에서 보면 어차피 진나라에 질 터였다.

일반적으로 손호를 부도덕적이고 강압적인 군주라 비난받는데 물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도 몇 개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많은 부분이 망국의 군주는 부도덕하며 마땅히 망할만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점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손호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잔혹하거나 성급한 행동은 나오기 마련이다.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의 평가#

무제 사마염 앞에서 처신을 최악으로 하고도 사마염이 그를 죽이기는 커녕 오히려 일국의 군주다웠다며 대놓고 우대했다. 무능함을 확신하게 해준 유선조차도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고, 후손들도 집단이주시켜 계속 감시하고 있었던 것과 대비된다.

배송지손권이궁지쟁에 대해서도 어차피 태자인 손화가 제위를 물려받으면 그 다음은 손호니까 오의 멸망은 정해져 있었음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30] 단, 이는 손화를 폐한 것이 옳았다는 말은 아니며, 이궁지쟁보다 손호가 끼친 악영향이 동오 멸망에 더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 사관인 진수가 오 멸망의 정당성을 위해 손호를 폭군으로 날조했을 가능성도 의심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손호가 오나라 멸망 당시 폭정으로 국내 인심을 다 잃었다기엔, 상당수의 오나라 장수들이 오멸망전 당시 목숨을 걸고 싸워서 순직한 경우도 많고[31], 살아남은 손호 시기에 봉직한 신하들이 "손호가 나름대로 영명한 군주였고 지금 진나라에 퍼진 손호의 폭정은 과장이 많으며 오나라는 무조건 손호가 폭군이기 때문에 망한것만은 아니다"는 주장을 했음에도 동시기인인 진수가 삼국지 본전에 이를 싣지 않고 무시했다는 정황증거가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사서, 진서, 건강실록에 이들의 주장이 실림으로써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손호가 포악했고 신하들을 자주 숙청하긴 했어도 진수가 손호에 대한 일말의 긍정적인 평가마저도 모조리 거세하려 했고 오나라 유신들의 항변을 모조리 무시했다는 의혹을 지우긴 어렵다. 진수가 자신이 섬기던 옛 군주 유선에 대해선 현명한 신하가 있으면 도리를 따르는 군주라고 실드를 친 것과는 대조적인 행적이다.[32]

물론 즉위 석달만에 복양흥장포 같은 공신들을 죽이고 삼족을 멸하는 스케일의 사건을 날조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고[33], 나라 꼴이 개판인데 5,000명의 궁녀를 두는 등의 막장 행각도 검증이 된다는 사실 또한 감안해야 하긴 한다. 다만 오 멸망 후 거둔 전리품에 5,000명의 궁녀가 있었으며, 이들은 고스란히 사마염이 흡수해 거대 하렘을 건설했다고 분명히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중화 문화권에서 전통적으로 1, 3, 5, 7, 9의 위계를 쓰기 때문에 훗날 백제의 의자왕이 궁녀 3,000명을 거느렸다는 낭설이 돈 것처럼 손호의 5,000 궁녀 이야기도 그 숫자에 맞춘것이 않았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사실 사마염의 1만 궁녀 기록 역시 진서를 쓴 당나라 쪽에서 사마염의 무능함과 음란함을 부각하기 위해 과장한 이야기고, 사마염 치세까지만 해도 순조롭게 천하가 복구되고 있었다는 연구결과도 현대에 나오는걸 보면 이들의 악명이 후대에 지나치게 씌워졌을 가능성도 무작정 배제하긴 어렵다.

물론 손호가 나라를 중흥시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긴 하지만 여러모로 오나라가 열세인 상황에서 본인의 군사적 능력이 부족했고 정치를 아주 잘했다고 보기엔 어렵다. 서진의 박사 진수는 "손호의 헛된 명성은 화하를 경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손호에게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있으면 진나라인들은 겁을 먹었다"고 평가했던 걸로 보아 재위 당시 대외 원정에서 손호가 위협으로 여겨졌던 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손호는 손책의 재래라는 평가를 즉위 전에 받았었는데 사실 손책이 생전에 보여준 이런저런 행적을 곱씹어 봤을때 손호는 '무보다 문에 치우쳤던 손책'이라고 보면 그 행보가 의외로 납득될만도 하다. 육개나 화핵이 지적한 국정의 난제가 꼭 손호를 비판하기 위해서 과장이 있었을지는 모르나 아예없는 내용을 지어낸 것도 아닐테고 말이다. 이 시기 일어난 반란이 적지 않았으며, 특히 교주 같은 경우는 아예 진나라 쪽으로 넘어갔었던 적도 있었다.[34] 잦은 토목 공사, 자주 바꾼 연호, 여러 번 이루어진 천도, 많은 숙청 등으로 보았을 때, 황제로서의 중앙 집권이나 권위에 다소 집착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35]

손호는 재위 기간 내내 왕권 강화를 위해 손씨 친족들을 많이 죽였다. 이외에도 잦은 숙청, 잦은 천도, 잦은 연호 교체 등 전형적인 왕권 강화 행보과 무리한 외정을 추진해 중신들과 작지 않은 마찰을 빚었다. 그러나 오나라의 멸망이 단순히 폭군 손호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위나라-오나라 간 국경은 천혜의 요새인터라 지형에 기대에 세력이 불리함에도 버티고 있었던 상황에서 촉-오 국경까지 적대적인 진나라에 의해 개방되었고 따라서 촉나라가 진나라에 복속된 이후로 오나라는 훨씬 불리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36] 이런 안보적인 불안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손호는 무리하게 외정을 추진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본디 손오는 개척개발정권으로써 내외적으로 끊임없는 군사활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이미 개국군주 손권대부터 군사적인 비용 부담 문제로 인해 태자 손등이나 중신 육손이 황로술적인 여민휴식[37]을 주장할 정도였으나 손권은 손오가 처한 안보적 환경을 감안했을때 군사적인 활동을 중지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거부하고 본인의 개인기로 어쩔땐 조이고 어쩔땐 풀어주며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손호대에 와선 촉이 멸망하면서 외부 안보적인 여건이 더욱 나빠지며 이미 이전부터 문제라고 지적된 군대를 혹사시키는 군사적인 압력과 비용 문제가 가중되었는데다가, 내부적으로는 이런 상황을 타파하고 국력을 신장하기 위해 교주 등에서 중앙집권을 추구하며 정부의 장악력을 더욱 강화하려는 시도가 반발을 맞았다. 결국 손오가 무너지게 된것은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군사적으로 불리함이 가중될 수 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물론 손호가 정치를 더 잘했으면 오나라도 좀 더 버티고 좋았겠으나 무조건 손호 개인만의 잘못은 아닌 것이다.[38]

사서상의 정황으로만봐도 중신 육개나 정봉 등이 손호를 폐출하려는 시도나 손호를 빼고 정무를 보자고 담합을 했다는 것[39]으로 보면 국내 사정이 혼란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토목 공사와 사치를 하면서 서상으로 대표되는 오행감응설 미신을 밀어붙이며 황제와 황실의 권위를 무리하게 강화하려는 손호가 조정 중신들과 상당히 마찰을 빚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상소문을 보면 손호 주변의 친위세력을 간신들로 규정하고 이들을 처벌할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손호가 왕권강화를 위해 기용한 측근세력들과 기존 대신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오가 멸망하는 그 순간 대신세력이 손호의 친위세력을 대표하는 잠혼을 간신이라며 처단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 발생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또 실제로 금석문 등의 고증에 따른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 손호가 서상(瑞相)[40]을 정교하게 가다듬으면서 오나라 황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했던 시도가 발견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서에 손호가 미신을 좋아했다고 기록된 이유일 것이다.[41]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예술에도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노래를 잘하고 변론을 잘하며 뛰어난 서예가이기도 했는데 행서, 예서, 소전, 비백(飛白)에 능통했다고 한다. 손호의 서적은 당나라 시기까지 전해졌다고 하며, 남조 양나라의 유견오는 그의 저서 '서품'에서 조조, 두예와 함께 역대 명서예가 9등급 가운데 5등급으로 올렸다. 그는 "위무제(조조)의 필묵은 웅장하고 오주(손호)의 체재는 치밀하다"고 평가했다.

손오의 승려 강승회와 관련된 일화도 있는데, 손호는 재위기간동안 법령을 엄혹하게 하고 불교를 비웃으며 믿지 않았는데 부처를 조롱하다가 큰 피부병을 앓고 난 후 불교에 귀의하고 회심함으로써 병이 나았다고 한다.

작은할아버지인 손익의 군주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손익은 부하들을 매질하는 일이 많았는데 손호는 이보다 한 술 더 떠서 신하들을 죽여댔다.

5. 미디어 믹스

5.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파일:external/kongming.net/028-Sun-Hao.jpg
삼국지 9, 10, 11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519.jpg
삼국지 12, 13, 14

6탄까지는 능력치가 조금 구린 정도였지만 7부터 능력치는 백하팔인 중 하나에 낄 정도로 나빠졌다. 그러다가 12탄부터는 다시 쓸 만하다. 손호가 백하팔인인 건, 악정을 한 건 둘째치고 곽마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서 바로 사마염에게 항복한 게 크다. 이런 행보로 인해 백하팔인이 된 또다른 인물로는 마막이 있다. 그러나 14편에 스탯이 백하팔인 시절로 복귀했다.

촉한이 멸망한 이후인 264년에 즉위하기 때문에 시리즈에 따라서 일반적으로 최대 263년까지의 시나리오만을 다루는 삼국지 시리즈의 특성 상 손호가 초기부터 군주로 등장하는 시나리오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단 9탄은 제외. 삼국지 3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동오의 황족인데도 상성이 110대로 동오의 상성인 125와는 살짝 거리가 있는 편. 한편으로는 동오를 멸망시킨 사마씨가 30대라 거의 대척점에 있다.

삼국지 3에서의 능력치는 육전지휘 69/수전지휘 23/무력 70/지력 62/정치력 51/매력 46로 이 시리즈에서만은 반장과 비슷한 능력치이다. 정치력이 50대이니 개발로 사용해도 좋으며 무력이 70, 육전지휘가 70에 고작 1 부족한 69이니 전쟁으로 사용해도 좋다. 후반부 인재 부족을 생각하면 꽤나 유용하다.

삼국지 6에서 그나마 무력과 매력이 70대 후반으로 무기 좋은 거 하나 껴주면 거의 90 가까이는 상승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0/무력 31/지력 40/정치력 10. 혼란과 매도가 있다고는 하지만 누가 당해줄까. 몽충이 있으니 후반기 시나리오, 영웅집결에서 배 셔틀이나 시키자.

삼국지 9의 if 시나리오 중 하나인 264년 서촉 동란 시나리오에서 손호가 군주로 등장한다. 진나라와의 규모, 인재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며, 무엇보다 이때가 되면 S급 장수들은 육항 빼고 모두 사망한 상황에다 새로 등장하는 장수들은 B급인 모경, 육경, 양직 3명뿐이고, 발탁 무장마저 군주의 의리과 야망를 그대로 이어받는지라 오 처지에서는 암담함의 연속. 그러나 넓은 땅떵어리에 비해 인재 수는 부족한 위나라이고 등애와 종회는 지들끼리 싸우나 바쁘므로 막상 해보면 쉬운 세력이다. 일단 수춘만 뚫리면 중원차지는 일도 아니며, 사마소, 가충, 양호, 왕준 등은 육항과 관직빨로 어떻게든 대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빠르게 등애와 종회를 먹고 흡수하면 인재의 양과 질 모두 위나라를 앞서게 된다. 연합시스템을 이용할지 흡수해버릴지는 플레이어 선택.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3/무력 28/지력 30/정치력 5/매력 4로 백하팔인의 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총합 80은 유선보다도 낮을 정도.[42] 특기는 2개 있지만 일제 특기는 통솔력이 13인 손호에겐 진주 목걸이일 뿐이고 나머지 하나는 폭군답게 주호.

삼국지 11에서도 백하팔인의 자리를 지켰으며, 능력치 중 정치력과 매력이 각각 6, 3이다. 당연히 특기도 없다.

삼국지 12에선 짤린 줄 알았으나 PK에서 등장했다. 그런데 능력치가 엄청나게 버프되어 나왔다. 전작에서 28, 31이던 무력과 지력이 70대로 올라갔을 뿐더러 정치력 또한 23으로 올라갔다. 능력치 평균이 전작보다 무려 3배 가까이 올라간 것이다. 특기도 많은 편이라 그런대로 쓸 만하다. 전법은 공성강화로 백도어용으로 쓸 만하다. 일러스트도 평범한 살찐 폭군이던 전작들에 비하면 묘하게 멋있어졌는데, 자세히 보면 무서운 얼굴로 오른손에 도검을 든 채 노려보고 있다.

무력은 조금 오버하게 버프한 것으로 보여도 지력은 위의 일화들과 같이 군주로서의 자질은 마이너스지만 개인은 상당히 똑똑한 면모를 보인 것을 볼 때 적절한 고증에 가깝다. 사실 무력과 정치력 또한 권신에 휘둘려 막장테크를 타던 오나라에서 토목 공사 등의 정책을 실천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으며, 호족 세력 등이 어마어마한 집권 구조에서 암살당하지 않고 통치했다는 걸 보면 이해할 만한 수치다. 물론 증조할아버지큰할아버지가 워낙 먼치킨에 소문난 미남이기까지 했으니....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1/무력 73/지력 71/정치력 23. 특기는 수영 5 단 하나. 전수특기도 당연히 수영이고 전법은 특공지휘.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13, 무력 28, 지력 31, 정치 6, 매력 4로 삼국지 11때 처럼 다시 백하팔인급으로 되돌아왔다! 정확이 말하면 통솔력이 28, 무력이 45, 지력이 40, 정치력이 17 하락한 것이다. 개성은 사역, 징세, 저돌, 낭비, 악명, 주의는 아도, 정책은 침략황폐 Lv 1, 진형은 어린, 학익, 전법은 도발, 친애무장은 만욱, 잠혼, 혐오무장은 누현, 보천, 위소, 유평이다.

전기제패 모드인 '오평정전'에서 군주로 등장한다. 해당시기 생존한 무장 중 곽마의 반란과 연관된 수윤과 곽마를 뺀 오나라 장수 모두 가지고 시작하며 도황과 등수는 곽마 반란 진압중이라 이벤트로 돌아오지 않고는 내정 50%의 효율로 쓸 수 밖에 없다. 80대는 부재 중인 도황과 승상 장제 뿐이며 장제도 이벤트로 사망하고, 70대 무장도 3~4명이 전부이기에 능력치 차이가 진나라에 상대도 안된다. 병력, 훈련도도 격차가 크다. 일단 황제이니만큼 시작하지마자 모두 고위관직에 임명하여 능력치를 최대한 보강하고, 가충의 트롤링 2번째 이벤트에서 가충 말을 따르게 이벤트조건을 충족시키면 할만해진다. 문제는 이벤트 조건이 손호가 직접 싸울 것과 2번째 가충 이벤트 보기 전까지 땅 1개는 빨리 먹어야한다는 것이다. 오언과 심영, 장제를 한도시에 모아 약한 땅을 먹고 병력은 최대한 전진배치를 하면서 금은 박박 긁어서 건업에다 모아야 한다. 이렇게 버티다보면 도황이 오고 산월족이 합류하게 된다. 도황이 합류한 즉시 승상관직을 주고 손자병법서를 하사하면 통솔 95를 찍고 도황과 산월무장 5명으로 승리조건 달성하면 된다.

5.2.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공명전에서 오나라의 뒤치기로 공명이 북벌중단 후 복귀하고서 강릉으로 공격해 들어갈 때 원군으로 등장한다. 강유와 일기토가 있고 일기토를 볼 경우 사로잡힌 뒤 촉한과 오가 화친하면서 석방된다.[43] 삼국지 공명전 GBA판에서는 손호가 손등으로 교체됐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무력, 지력, 통솔, 민첩, 행운 능력치의 총합이 100도 되지 않아 이 게임에서 유일한 백하일인으로 군림하고 있다. 병과도 노병계로,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5.3. 삼국전투기

손호가 어느 정도 재평가를 받기 이전에 연재한 작품이라 암군이자 폭군 손호로 등장한다.[44] 물론 재평가된 것이 무조건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 참작의 여지가 있다는 것 정도라 폭군으로 그려낸것이 아예 틀린 모습은 아니다.

개 같은 성격 때문에 개로 패러디되었고, 소개컷에서는 작가 공인으로 '개놈'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손견이 정말 호랑이 자체로 그렸던걸 보면, 손호가 개인 것은 아마 이런 의미도 있어서라 보는 의견도 있다. 눈가의 점 등으로 보아 바우와우바우로 추정되었고, 영안 전투(3)에서 성장한 모습이 나오며 확정되었다. 전투외편 8-3편의 타이틀 컷을 차지하기도 했다.

영안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태자인 손완이 너무 어려 복양흥과 장포가 새 황제 후보를 찾을 당시 만욱의 추천을 받아 황제가 됐으며,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구휼 활동을 하는 등 훌륭한 정책을 펼쳤지만 3개월도 안 되어 폭군으로 돌변하고 오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가기 시작하는데,[45] 손호가 원래 폭군 체질이었거나 손화의 복수를 위해 작정하고 오나라를 멸망시켰다는 뉘앙스의 서술이 있다.[46] 그래서 댓글들 사이에서도 손호가 일부러 오나라를 망친다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전투외편 8편에서 손호 이야기가 조금 더 묘사된다. 손호는 제위에 오르고 폭정을 펼쳤는데, 우선 손휴의 부인과 아들들을 전부 처단했고, 뜬금없이 무창으로 천도하기도 했으며, 주색과 사치를 일삼아 국고가 거덜날 정도였다고 한다. 손호는 마음에 안 드는 신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였기에 승상이었던 육개 정도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신하들은 상소는 커녕 눈도 못 마주칠 정도였다고 한다.

손호의 흥청망청한 생활에 백성들만 뼈빠지게 노역과 조세를 부담해야 했으며, 이러한 노역에 지친 백성들이 산적이었던 시단을 중심으로 밀집해 난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너무나도 간단히 제압했다고 묘사되었다. 손호는 시단의 난을 제압하고 무언가 자신감이 생겼는지 수도를 무창에서 건업으로 도로 되돌리고 후궁을 엄청나게 늘리며 궁까지 새로 지었다. 그의 재위 16년 중 이제 겨우 3년차였지만 그 동안 나쁜 군주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고 묘사되었다.

268년경, 시단의 난도 제압하고 후궁도 뽑고 궁도 새로 지은 손호는 자신감이 넘쳤고, 이에 의욕이 넘친 손호는 합비 공략을 결심하여 정봉에게 합비 공략을 명하지만 실패했다. 이듬해 육개가 죽은 뒤에는 그의 가족들을 죄다 건안으로 유배를 보내기도 했고, 270년경에는 다시 정봉을 합비로 보냈다. 정봉은 이번에도 실패하지만, 그 손호도 차마 정봉은 죽이지 못하고 대신 애꿎은 도군을 처형했다.

폭정을 펼치면서도 황제 노릇을 16년 동안이나 한 까닭은 백성과 소호족에게 강했으나 대호족과 서진에게 눈치를 봤다며,[47] 최훈은 아예 원래는 손오가 270년에 사마준, 양호 등이 대오전선으로 전진 배치되어 서진한테 망했을 것이지만 독발수기능의 난으로 인해 10여년 더 숨이 붙었다고 기술한다. 작중에선 내추럴 본 폭군으로만 묘사되며[48] 아예 멍군으로 불린다. 폭군이라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인지 상어 이빨이 특징이다.

서릉 전투 편에서는 무슨 자신감인지 화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점쟁이의 말만 듣고 대군을 끌고 북진하려 했지만 폭설 때문에 무산됐다.[49] 보천이 진에 투항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자길 못 믿고 거기서 투항을 하냐며 난감해했다.

육항의 분전으로 보천의 난이 제압되자 손호는 이 승리를 기점으로 제대로 미쳐 날뛰게 되었다고 묘사되었다. 자신을 빼고 정치를 하려 하였다는 빌미로 만욱과 유평을 제거하려고 하였고 이미 죽은 정봉 대신 그 아들 정온을 처형했다.

삼국 통일 편에서는 오언이 건평에서 진이 함선을 건조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병력 증원을 요청했지만 서릉과 강릉에 병이 잔뜩 있는데 뭘 굳이 증강하냐며 거절했다. 그 밖에는 손호의 패악질이 끊이지를 않아서 점점 스스로 고립되어 갔다고 언급되기도 했다.

진에서 본격적인 오 정벌에 나서며 여기저기서 패전소식만 들려오자 왜 하나같이 힘도 못쓰고 무너지냐고 화내기도 했다. 신하들은 이에 이게 다 잠혼 때문이라고 말했으며, 손호는 잠혼 때문인 거냐고 반문하기만 했지만 신하들이 알아서 잠혼을 쳐죽였다. 이후 도준이 돌아오자 그에게 진의 수군을 막을 방법이 있냐고 물었다. 도준은 대선으로 진의 작은 함선을 제압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출항 당일 병사들이 전부 도망가며 작전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고, 결국 손호는 왕준이 오자마자 바로 항복을 선언했다. 이 와중에 오 멸망 후 손호를 초대한 사마염이 자리를 만들어놓고 기다린지 오래라고 하자 손호 역시 자기도 자리를 만들어놓고 기다린지 오래됐다며 해맑게 받아치는 건 덤이다.

5.4. 삼국지톡

손책여포를 합친 듯한 외모로 등장하자마자 사마염에게 처형되었다. 부친 손화처럼 1회성 등장인물로 나온 지라 삼국지 덕후들에겐 그저 기막힐 따름.

6. 둘러보기

오서(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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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화는 남로당쟁 당시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나 장사왕으로 봉해져 유배를 갔으며, 나중에 제갈각이 주살당할 때 제갈각의 조카가 손화의 아내라는 점 때문에 손준에게 살해당했다.[2] 참고로 손권의 장남인 손등의 가족은 이미 손준에게 반기를 들다가 죽은 손영 정도밖에는 알려진 바가 없고 손권의 차남인 손려와 막내 아들인 손량의 경우 사망 시에 나이가 너무 젊어서 자식을 못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손량은 조카인 손호보다도 연하였는데 그 자식이 있었어도 너무 어려서 고려조차 안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3] 이들 중 제위에 오른 손호를 제외한 나머지 황족들은 손호 치세에 손호에게 대부분 살해 혹은 유폐당한다.[4] 사실 이 부분 또한 이궁지쟁에서 손권의 행보가 비판받는 점이기도 하다. 제위를 손량이 아니라 손휴에게 바로 물려줬으면 황제의 권위가 약해질 여지가 적었을 것이고, 이는 결국 손휴가 손량을 견제할 필요가 없어져 손량이 더 장수할 기회를 줄 수 있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손휴가 요절하는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도 손량이 훌륭한 후계자가 되어 즉위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5] 삼국시대의 형주 강하에 속했으며, 강하군의 중심지인 지금의 우한이 무창으로 불리게 된 건 유송시대 이후.[6] 즉, 제갈근의 외증손자였다.[7] 적자인 손준이 왜 손휴가 붕어할 때 같은 손화의 아들이지만 서출인 손호보다 제위 승계에서 밀렸는지는 의문인데, 손호의 동생이라는 사실로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것은 그 역시 나이가 너무 어려서 그랬을 확률이 높다.[8] 제갈각, 손준, 손침 등.[9] 손호 성격 상 나머지 둘도 곱게 살려두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10] 그리고는 또 그녀가 그립다고 그녀의 모습을 닮은 목제 리얼돌을 만들었다...[11] 손권의 오남.[12] 손소의 아들, 손책의 손자.[13] 손호의 옛 친구에 즉위의 1등 공신이였음에도 죽였다.[14] 장굉의 손자다.[15] 손등, 손려, 손휴는 병으로 요절, 손화, 손패, 손분, 손량은 처형당했거나 타의에 의한 자살.[16] 둘 다 엄청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을 감안하면 아들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17] 손호가 손패에게 가진 원한을 생각해보면 곱게 갔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18] 손호 성격을 감안하면 곱게 살려두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다만 손휴는 전대 황제고 손휴의 아들들은 당연히 서자 출신인 손호보다 정통성 면에서 높을 수밖에 없다. 전제 국가에서 자신보다 정통성이 높은 황족은 숙청 0순위인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실이기 때문에 손호 같은 폭군이 아니었어도 결국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19] 손겸이 손호의 동복 동생인지 이복 동생인지 여부는 불명이나 손호에게 잔악하게 살해당했던 점, 손호가 다른 이는 몰라도 어머니 하희와 외가 식구는 끔찍히 챙긴 점으로 보아 이복 동생일 가능성이 높다.[20] 사실 이 경우만은 엄연히 반란이기에 손호 같은 폭군 아니여도 죽일 수 밖에 없었다.[21] 손덕의 행방은 불명이다.[22] 손책이 20대 중반으로 매우 요절했음을 감안하면 독자일 가능성이 높다.[23] 이로 인해 손광의 손자인 손수는 270년에 서진으로 망명하기까지 한다.[24] 다만, 이 시점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인 유민이 맞을 것이다.[25] 실제 역사를 생각한다면 항복하여 그렇게 된다는 뜻인데, 손호는 자신이 이겨서 그렇게 된다는 의미로 착각한 것이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델포이 신탁에서 "전쟁을 일으키면 (자신의) 거대한 왕국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예언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 전쟁을 했다가 패배했다는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의 일화와 비슷하다.[26] 출처: 《자치통감》.[27] 汝자를 넣어서 부르는 노래.[28]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여가>라는 제목 자체가 '너(汝)'라는 글자를 넣어서 부르는 노래다.[29] 당연히 만수무강하라는 말(令汝壽萬春)도 정말 잘 살으라는 의미가 전혀 아니고 '잘 먹고 잘 살거라 원수 놈아!'라는 의미다.[30] 단, 이것은 매우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다. 손화가 정상적으로 제위를 계승했다면 이변이 없는 이상 손화의 적장자인 손준이 제위를 계승했을 것이며 손호가 계승할 경우는 큰 변수가 있지 않는 이상 없다. 애시당초 손휴가 5년만 더 살았어도 손호 대신 손준이 제위에 올랐을 확률이 높았으며, 손휴가 10년만 더 살았으면 손휴의 장자인 손만이 제위에 올랐을 것인 만큼 손호의 즉위는 여러 if들이 알맞게 터진 행운이였다.[31] 물론 손호의 잦은 숙청 때문인지 오멸망전 이전에 도망간 장수들은 많은데, 일단 오멸망전이 발발하자 대부분의 장수들은 열심히 싸운편이다. 이 당시 항복한 오나라 장수들만 해도 대부분 진나라 군대와의 큰 전투 이후 패해서 사로잡히거나 대세가 기울어졌을때 항복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32] 이에 대해서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손호의 망국 당시 일화를 소개하며, 손호의 비범한 면모 역시 거세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손호가 어찌되었든 망국의 군주였고, 촉한정통론의 비호 역시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33] 복양흥과 장포의 숙청도 사실 따지고 보면 이들이 꼭 좋은 평가를 받은 신료들만은 아니고, 선제의 고명대신으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며 황제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권신에 대한 견제일 공산도 크다. 당장 이들과 비슷하게 강남 외지 출신으로 온갖 무리수와 깽판을 두다가 나라를 혼란시킨 제갈각의 예도 있었고 말이다. 어쨌거나 이 때문인지 손호가 재위 내내 조정 중신들과 마찰을 빚기는 했어도 치세 말까지 허수아비 황제인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다.[34] 손휴 사망 직후, 교주에서의 폭정에 못 견딘 사람들이 봉기하여 진나라에게 교주 땅을 넘겼다. 이후 오나라가 다시 어찌어찌 탈환했으나, 279년에 곽마라는 인물이 교주에서 난을 일으킨다. 교주에서의 이러한 정세 변화가 간접적으로 오의 멸망을 앞당기게 하였다.[35] 한반도에도 명군의 자질이 있다가 망한 군주로 광해군이나 궁예가 있다. 권력 강화를 위해 미신의 권위를 빌리며 숙청과 무리한 천도를 감행하는 함정에 빠지는 게 비단 손호만은 아니었단 이야기다. 광해군과 궁예도 말기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동정 여론은 작지 않았다는 정황 증거 역시 많다.[36] 실제로 전대 황제인 손휴도 촉의 멸망 이후 나라 걱정을 하다가 요절했다.[37] 본래 중국 전한의 황로학파가 내세운 사상으로서 전한 초기 문제경제의 정책이었다. 쉽게 말해 나라가 힘들고 지친 상태이니 특별한 일 벌이지 말자는 것으로 전한이 등장하기 전인 진나라가 통일전쟁을 끝내고도 토목공사를 여럿 벌이는 등 삽질을 벌인 끝에 멸망하고 그 뒤에 이어진 초한전쟁으로 전중국이 아작이 나면서 전한 초에는 나라꼴이 말이 아니니까 진나라에서의 교훈과 현실을 감안해 내놓은 대책이다. 무슨 일을 벌여봐야 백성들을 더 힘들게 할 뿐이니 차라리 국가적으로 큰 사업을 되도록 줄이자는 것이었다.[38] 때문에 손오의 멸망을 분석한 육기의 논문 변망론에서는 외부적으로는 서진의 침공, 내부적으로는 곽마의 난이 동시에 터진것이 손오 멸망의 주된 원인으로 보고 있다.[39] 모두 불발로 끝났다. 역모의 뉘앙스로 보기도 어려운 게, 육개는 죽을 때까지도 나라 걱정이었으며, 정봉은 흉신 손침을 축출한 핵심 인물이었다. 물론 손호 입장에서는 역모가 맞기는 맞았다.[40] 서상은 복(福)되고 길(吉)한 일이 일어날 조짐(兆朕), 상서(祥瑞)로운 조짐(兆朕)을 뜻하는 말로, 국가의 정통성과 집권 정당성을 각종 상서로운 징조들을 통해 정당화하고 왕실의 위상을 강화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41] 이런 천인감응론적 미신을 손오를 멸망시킨 사마진도 집권의 명분으로 잘만 써먹었으면서 정작 손오에 대해서만 군주가 미신을 좋아해서 망했다는 식의 서술을 넣은것만 해도 패자인 손오에 대한 승자인 서진의 이중잣대적 폄하가 보이는 대목이라고 하겠다.[42] 물론 유선은 총합 85 중 매력이 64로 매력빨이 절대적이긴 하다.[43] 234년 공명의 6차 북벌 직후의 이벤트로 다뤄진다. 즉, 손호는 원래대로라면 이 시기엔 태어나지도 않았어야 한다.[44] 비슷한 이유로 마막도 등산을 하다가 지친 등애를 보고도 성문을 열어제끼고 전투 없이 항복한 천하의 개쌍놈으로 등장한다.[45] 손호를 추천했던 만욱 본인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며 당황했고 복양흥과 장포는 손호를 제위에 올린 걸 후회했다가 손호에 의해 삼족이 주멸됐다.[46]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손화의 복수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오나라에 대한 최고의 복수인 셈이다. 해당 편의 마지막 컷에서 "아니면... 어쩌면... 흠... 에이 설마 아니겠지." 라고 떡밥을 던졌다. 또한 손호의 성장한 모습이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손화가 휘둘리기만 하다 죽었다고 한탄하는데, 손호는 그런 손화를 보고 비통한 눈물을 흘리며 손화를 부른다. 이는 작품 내에서 손호가 유일하게 슬픔을 표하는 장면이다.[47] 다만 손호의 재위 기간에도 서진에게 시비는 많이 걸었고, 위의 이여가에 대한 일화나 교주를 두고 다툰 점을 미루어 볼 때 서진에 대한 것은 다소 애매하다.[48] 물론 최훈도 미심적은 부분에 대해서 지적하긴 하지만 작중 묘사는 그냥 폭군의 묘사다.[49] 작 중에서는 오나라 입장에서 하늘이 도왔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사실 진짜로 왔다면 진 입장에서도 골치를 썩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진에서도 꽤 큰 사건이 터졌던 찰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