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대막리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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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대막리지 | 연남산 | |||
* 삼국사기, 연남생 묘지명, 연헌성 묘지명, 연남산 묘지명 원문 기준 각각 가장 높은 관직명 기술. | ||||
연씨 집권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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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4대 대막리지 | |
국적 | 고구려 → 당 |
이름 | 연남산(淵男産) |
이명 | 천남산(泉男産) |
아버지 | 연개소문 |
형제 | 연남생 연남건 |
아들 | 연광부(淵光富) |
사망지 | 당 장안에 있던 사택(私宅) |
묘지 | 당 낙양현(洛陽縣) 평음향(平陰鄕) |
생몰연도 | 639년 ~ 701년 3월 27일 (향년 6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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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침엔 북궐에 나아가 황제의 일을 돕고 밤엔 남궐에 나아가 황제 옆에서 우울하게 생황을 연주하니 그를 따를 자가 아무도 없었다....
- 본인의 묘지명 발췌. 조국 패망 후 당에서 생활할 때의 모습이다.
- 본인의 묘지명 발췌. 조국 패망 후 당에서 생활할 때의 모습이다.
고구려 말기에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한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이다. 형제로는 두 형인 연남생과 연남건이 있고 아들로는 연광부(淵光富)가 있다.
아버지 연개소문 사후 큰형인 연남생이 권력을 물려받았지만 의심과 불화로 작은형인 연남건과 힘을 합쳐 큰형 연남생을 몰아내고 고구려의 권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쫓겨난 연남생이 불러온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으로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이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자 성을 나와 항복하였고 이후 일생을 당나라에서 살다가 죽었다.
2. 생애
2.1. 고구려에서
남산의 고구려 관직 | |
고구려 관등 | 소형(小兄) 대형(大兄) 위두대형(位頭大兄)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 |
고구려 직위 | 중리대활(中裏大活) 중군주활(中軍主活) |
639년(영류왕 22)에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연개소문이 견제 세력을 모두 척살하고 완전히 독재 정권을 굳히면서 연남산 역시 당시 고구려 최고의 권세가의 일원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얻었다. 낙양 북망산 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에 따르면 고작 15세에 소형(小兄)이 되었고 18세에 대형(大兄)이 되어 국정에 참여하였으며 성인의 관례도 치르지 않은 나이에 2천리나 되는 영토를 다스렸다. 23세에는 위두대형(位頭大兄)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일찍 벼슬을 지낸 것은 연남산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666년 아버지였던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이 죽고 맏형인 연남생이 뒤를 이어 대막리지가 되었는데 666년에 연남생이 지방에 나가 여러 성을 순시하던 중에 동생들을 의심하여 수도에 밀정을 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에 보장왕의 명을 칭하여 연남생을 수도로 불렀으나 연남생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연남생을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함께 수도에 머물던 연남건과 더불어 정변을 일으켜서 연남생의 아들 연헌충을 살해하고 수도 평양성 일대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변방에 머물던 연남생은 수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국내성에 들어가 두 동생과 권력 투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에 666년 연남생이 국내성 일대 영토를 당나라에 바치면서 투항하는 사건이 터졌다. 당나라에 투항한 연남생은 당나라군의 앞잡이가 되어 고구려 원정의 인도자가 되었으며 과거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냈던 방어선과 후방 보급을 맡았던 지역 상당수가 연남생을 따라 당나라에 붙고 시작한 전쟁이었으므로 전황은 훨씬 암울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668년에는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까지 나당연합군이 몰려와 포위하기에 이른다. 668년 9월 전세가 완전히 넘어갔다고 판단한 보장왕은 연남산을 성 밖으로 내보내 당나라군에 투항할 의지를 보였다. 당나라 대장군 이세적은 투항한 연남산을 크게 우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남산의 작은형 연남건은 끝까지 당나라군에 맞서 항전하다가 승려이자 심복인 신성의 배신으로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사로잡혀 12월에 유배를 갔다. 이로써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2.2. 당에서
남산의 당 관직 | |
당 작위 | 요양군 개국공(遼陽郡 開國公) |
당 품계 |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1] |
당 직위 | 사재소경(司宰少卿)[2] 원외 치동정원(員外 置同正員) 상호군(上護軍) 영선감 대장(營繕監 大匠) |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당나라 조정은 연남산을 사재소경(司宰小卿)에 봉하였으며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이후로 연남산의 작위는 요양군 개국공(遼陽郡 開國公)에 이르렀다. 묘지명은 나라를 잃은 충격 때문인지 연남산은 여생을 우울하게 살았다고 서술한다. 결국 연남산은 701년 3월 27일에 훙(薨)했고 아들 연광부가 4월 23일에 낙양현 평음향에 장례지내고 702년 그의 기일 때 묘지명을 세웠다. 묘지명의 분량도 그렇고 묘사도 그렇고 맏형 연남생의 묘지명과는 완전히 정반대다. 분량은 적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확실히 적힌 형과는 달리 당나라에서 살다 죽었다는 내용밖에 없다. 그나마 그의 죽음은 훙(薨)으로 표현돼 당나라가 예우를 챙겨준 것으로 보인다.
3. 가족
아버지는 당연히 대막리지 연개소문. 어머니는 누군지 모르지만 형들과 동모(同母)일 것이다.작은아버지 연정토가 있다.
맏형 연남생과는 6살 터울이다. 맏형과 어머니보다 늦게 죽었다. 장안에서 진행된 연남생과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가했는지 의문이다.
아들로는 연광부가 있는데 당나라에선 연 자가 피휘해야 하는 글자이므로 천광부(泉光富)로 남아있다. 그는 아버지 남산의 무덤을 만든 것까진 기록이 있는데 그 본인은 이후로 별 다른 기록이 없다. 맏형 남생은 증손까지 기록이 남았는데 본인은 아들 대에 기록이 끊겼다.
4. 묘지명
연남산 묘지석 탁본 |
- 연남생, 남산 묘지명은 글의 순서가:
- 조상 소개.
- 고구려에서의 역임 직위.
- 당에서의 생활.
- 사후 이야기.
순인데 연남생은 수려한 묘사와 고려 멸망 후 요동에 돌아가 앞잡이 역할도 하고 사후 시호까지 챙겨주면서 많은 활동을 하고 간 반면 남산은 별다른 활동이 안보이고 우울하다, 고국을 그린다, 슬퍼했다 등 부정적인 묘사가 많다. 남산의 묘지명을 쓴 아들이 보기에도 그닥 좋은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 않았나 보다. 이는 남산이 고구려 멸망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 한성을 지키지 못해 투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5. 기타
[1] 문관의 종이품 관계(官階)[2] 종4품상(從四品上)에 해당하였다. 궁중의 선식(膳食)을 담당한 관직[3] 천자는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는 졸(卒), 평민은 사(死)로 죽음을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