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에 대한 내용은 동명성왕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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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유사》에서는 북부여의 시조라고 전해지는 해모수를 계승한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졸본에 도읍을 정해 부여를 건국하고, 훗날 고구려 건국에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 고주몽이 졸본부여를 계승했다고 한다. 이는 해석상의 차이로서 논란이 있는 부분이며, 졸본에 도읍을 정해 부여를 건국한 인물은 일반적으로 주몽(추모)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주몽을 부여의 건국자로 보는 이유는 단순히 이름이 동명으로 같아서 그렇게 보는 것뿐이며 이에 대한 근거가 미흡하다. 오히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를 보면 주몽이(졸본부여에 도착하여) 졸본부여왕의 왕위를 계승했다고 나온다.# 즉 졸본 도착 이전 졸본부여라는 나라는 이미 있었으며, 주몽은 졸본부여를 계승한 계승자이지 건국자는 아니었다. 또한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는 온조왕으로 이 해석이 타당하다.
1세기 후한 시대의 저서인 《논형》(論衡) 권2 <길험>편에 부여 <동명왕 설화>가 처음으로 언급된다.
북이(北夷) 고리국 왕의(영품리왕 추정) 시비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죽이려 하니, 시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저에게로 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자 돼지 우리에 던져두었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으니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에 두어 말이 밟아 죽이도록 하였으나, 말이 또한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왕이 하늘의 아들[天子]인가 여겨, 그 어미가 거두어 기르도록 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소와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았기에 왕은 나라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풀어버리니 추격하던 병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왕 노릇을 하였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했을 때, 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고, 버렸으되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고, 성장하자 왕이 죽이려 함에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가 되어 주었다. 이는 천명이 그 죽음을 마땅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돼지와 말이 목숨을 구해줘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된 것이며,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는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동명이 활을 잘 쏘았기에 왕은 나라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풀어버리니 추격하던 병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왕 노릇을 하였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했을 때, 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고, 버렸으되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고, 성장하자 왕이 죽이려 함에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가 되어 주었다. 이는 천명이 그 죽음을 마땅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돼지와 말이 목숨을 구해줘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된 것이며,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는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옛 기록(古記)에 이르기를 “《전한서》에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4월 8일 천제(天帝)[1]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 요나라(大遼) 의주(醫州) 지역에 있다.에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을 일컬어 나라 이름을 북부여(北扶餘)라 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다. 그 후 왕은 상제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기게 되고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 아래에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북부여조-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북부여조-
《주림전》(珠琳傳) 제21권에 쓰였으되, “옛날 영품리왕(寧禀離王)의 몸종이 태기가 있어 점쟁이가 점을 쳐 말하기를 ‘아이를 낳으면 귀히 되어 반드시 왕이 되리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 자식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몸종이 말하기를 ‘하늘로부터 기운이 뻗쳐 내렸으므로 내가 아이를 밴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그가 아들을 낳게 되매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돼지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덥히고 마굿간에 버린즉 말이 젖을 먹여서 죽지를 않고 필경은 부여왕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동명제(東明帝)가 졸본부여의 왕이 된 것을 말함이다. 이 졸본부여는 역시 북부여의 별개 도읍지이므로 부여왕이라고 한 것이다. 영품리는 부루왕의 다른 칭호이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주림전-[2] 인용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주림전-[2] 인용
고려 시대 이후의 문헌에서는 동명왕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여기고 두 사람을 구분하지 않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 및 '<모두루 묘지명>' 등 고구려의 금석문에서 자신의 시조를 오직 추모(주몽)로 표기하고 있을 뿐 동명이라 한 예는 없고, 고구려 당대 인물인 <연남산 묘지명>에서는 동명과 추모를 서로 다른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다.
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 朱蒙孕日臨浿水而開都 威漸扶索之津力制蟠桃之俗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연남산 묘지명> 금석문 中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연남산 묘지명> 금석문 中
2. 분석 및 현대의 인식
한국 역사학계에서 초기에 이병도는 이 설화는 삼국사기에 실린 고구려 추모왕 설화를 중국인들이 고구려와 부여를 혼동하여 국명을 서로 반대로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이병도, 부여사, p217) 하지만 후속연구를 통해 오히려 이 설화 쪽이 고구려 추모왕 건국설화보다 더 원형적인 모습을 갖고 있음이 밝혀졌다.결국 고구려, 부여의 설화가 구분되지 않았던 이유는, 전체적인 줄거리가 비슷한 데다 부여의 동명왕과 고구려의 동명성왕(고주몽)은 왕명도 같아 구분하기 쉽지 않고, 고구려가 부여에서 파생되어 길게 존속했다는 점에서 비중이 상대적으로 덜한 부여의 동명이 고구려의 주몽으로 귀속되어 두 인물이 한 명으로 보이는 착시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바라보아진다. 이에 대해 '동명왕'이라는 호칭 자체가 당시에 '태조'를 뜻하는 부여계 고유어라서 부여와 고구려 양쪽에서 '동명' 왕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이 있다.
조선 후기 이러한 현상에 의문을 품은 정약용 등의 실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비판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한민국에 들어서도 기존의 동일인물설에 비판이 가해지는 상황이다. 일단 부여가 고구려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건 참이기에 부여 건국설화가 고구려 건국설화보다 앞선다는 것 역시 사실이며, 고구려 <주몽 설화>는 부여 <동명왕 설화>를 모티브로 했다는 것이 현대인의 시선이다.
3. 기타
- '주몽이 동명성(금성)을 뜻하는 말'이며 그러므로 주몽이 동명왕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당대 기록인 《위서》 <고구려전>에서는 오히려 '주몽'을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고 풀고 있을 뿐 금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한 언어적 유사성을 통해 접근하는 이러한 가설은 역사적 근거가 하나도 없는 경우, 굉장히 조심해야 하며, 실제 고대 언어의 음가나 의미를 확신할 수 없는 경우, 심각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 당대 사료에서 주몽 = 동명설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등장한 이상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한다.
- 일본의 기록인 《일본서기》와 《속일본기》, 《신찬성씨록》에서 백제의 태조로 도모대왕이라는 인물을 언급한다. 백제 역시 《삼국사기》 등에 의하면 왕실의 기원을 부여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 도모가 주몽이 아닌 <동명왕 설화>의 부여 시조 동명왕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도모와 관련된 설화에 부여 <동명왕 신화>에는 존재하지 않고, 고구려 <주몽 신화>에만 등장하는 하백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가 있어 도모왕은 부여의 동명왕보다 고구려의 주몽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도모왕을 제1대 왕으로 하고, 근구수왕(근귀수왕)을 제16대 왕으로 하는 기록이 《속일본기》에 나오는 것을 보면 도모왕은 기원전 1세기 때의 인물이 되므로 도모는 주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백제와 고구려가 <동명왕 설화>를 자신들의 시조 설화에 차용하거나 족보의 가장 위에 위치시켰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후대에 "동명=주몽"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백제에서도 동명=주몽=도모가 삽입되었을 수도 있다.
- 고구려의 <주몽 설화>는 <동명왕 설화>와 거의 비슷하다. 많은 부분을 차용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주몽 설화>에서는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와 그의 아들 해부루가 주몽의 혈족으로 묘사되었고, 강의 신인 하백이 추가되었다. 이후에는 아예 동명과 주몽이 같은 인물이라는 인식까지 생겨났다. 이렇게 된 건 외부에서 졸본부여에 정착한 계루부 세력의 왕가가 졸본부여의 왕위를 계승했기에 부여계 백성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동명왕 설화>를 차용해 계루부의 시조인 주몽의 신성성을 강조할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이었던 걸로 보인다. '고구려'란 국명 자체도 동명왕의 탄생지인 고리국의 '고리'에서 따왔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주몽 설화>에서 북부여는 고구려가 계승해야 할 부모국이라기보단 시조 주몽을 괴롭힌 적대국으로 등장한다. 설화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 고구려는 이후에도 북부여와 많은 전쟁을 벌여야 했다. 또한 해모수-해부루로 이어지는 북부여의 계보는 북부여가 아닌 고구려에서 후대에 전해진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예를 들면 해부루 또한 천손임에도 불구하고, 주몽이 나라를 세우게 된다는 계시가 있자 천도를 해야 했고 그 후손인 북부여 왕족들도 찌질하게 묘사되는 등 아무리 봐도 주몽보다 못한 2류 천손 정도로 묘사되었다. 이에 대해 <동명왕 설화>가 고구려에서 왜곡하지 않은 순수한 북부여의 시조 설화였다고 한다면 고구려에서 <동명왕 설화>를 찬탈하여 <주몽 설화>에 써먹은 뒤, 북부여와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해모수-해부루-금와왕 설화>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후대에 북부여, 동부여는 쇠약해지다 고구려에게 멸망하고, 역내 세력권은 모두 고구려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던 만큼 고구려 우위가 아닌 설화는 거의 남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 유류와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 또한 동명왕 사당을 세우고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일단 한성백제를 건국한 두 지배층 중 하나인 고구려인들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기원후 2세기 후반에 내려온 이들[3]로 드러나고 있으니, 온조왕의 아버지가 동명성왕이 아닌 이 동명왕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4] <비류시조설>에 따르면 비류와 온조는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의 아들로 나오는데 이에 의하면 비류와 온조는 동명성왕 주몽과는 혈연 관계가 없고 해모수-해부루-우태의 후손이 된다. 계보를 동명왕~연타발-소서노-비류/온조로 보아 비류와 온조를 동명왕의 혈연적 후손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정작 졸본부여 군주였던 연타발의 시조에 대한 기록은 없다. 백제는 훗날 성왕이 부여의 이름을 따서 '남부여'로 국호를 바꾸기까지 했던 만큼 부여를 다소 적대적으로 보았던 고구려에서와는 다르게 백제에서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소위 우태-비류계 왕실로 비정되는 고이왕계 왕실 또한 동명왕 사당에 참배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음이다. 비류계 백제 건국 사화는 온조계 건국 사화와 주몽, 소서노, 우태를 놓고 입장이 크게 달랐으나, 적어도 전승만 보면 우태는 부여 건국자인 동명왕의 후예였고 굳이 따지면 온조-초고계 왕실에서도 중요했을 인물이므로 국가 통합 이데올로기 상으로도 문제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1] -고구려조-에서는 제(帝) 뒤에 자(子) 자가 있다.[2] 당(唐) 고종 총장 원년(668)에 도세(道世)가 지은 《법원주림》(法苑珠林)을 가리킨다.[3] 이것도 하북위례성을 서울 강동구 일대가 아니라 임진강 유역에 군집한 고구려계 적석총 유적으로 보면 성립하는 견해다. 가장 오래된 고분이 아무리 올라가도 2세기 후반이고, 하남위례성 정도 시점도 고고학적으로는 3세기 중후반기 한계인 상황이니, 고구려인들이 정말로 삼국사기 초기 연대대로 기원전 1세기 초반에 경기도 및 서울 일대에 정착한 근거는 현재 없음이 갈수록 확실해져 가고 있다.[4] 현재로서는 과연 한성백제의 창업자가 온조인지 자체도 대단히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확실한 건 비류계 사화와는 달리 우태를 계보에서 삭제하고 적대국의 건국 시조인 주몽을 역으로 강조하면서 소서노의 비중까지 축소를 마다하지 않는 온조계 사화를 보면, 적어도 근초고왕 이후에 확립된 백제 왕실의 혈통적 선조가 주몽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