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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8 01:21:21

금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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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제3대 군주
金蛙王 | 금와왕
파일:46_금와왕과_유화부인.png
1854년《조선정벌기(絵本 朝鮮征伐記)》에 나온 금와왕 삽화.
<colbgcolor=#6A5445><colcolor=#fbe673> 출생 기원전 90년경 추정
부여
사망 기원전 24년 이후(70대 추정)
동부여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제3대 군주
기원전 59년 ~ 기원전 24년 추정 (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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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A5445><colcolor=#fbe673> 성씨 해(解)
금와(金蛙)
부왕 해부루왕
배우자 유화부인?
왕자 태자 해대소
왕자 주몽, 갈사국왕 이외 명
왕호 금와왕(金蛙王) }}}}}}}}}

1. 개요2. 일생
2.1. 출생 설화2.2. 유화부인과 만나다2.3. 고구려와의 관계2.4. 죽음과 사후
3.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부여군주. 해부루의 아들이며 대소왕의 아버지.

부여의 건국 설화와 고구려의 건국 설화에 모두 등장하는 인물로 대소왕의 아버지이며,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과 그 어머니 유화부인을 거두어준 인물로도 유명하다.

삼국사기》에는 아들이 7명이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2. 일생

2.1. 출생 설화

삼국유사》에서는 금와왕의 탄생 설화를 다루고 있다.## 금와왕의 아버지 해부루왕은 나이가 들어도 후사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해 고심하던 중에 산천에 제사를 지내며 아들을 점지해줄 것을 빌었다.

그랬더니 해부루왕이 탄 말이 곤연(鯤淵)이라는 곳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보고 눈물을 흘렸다. 해부루왕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돌을 치웠더니 금빛 개구리 형상의 아이가 나타났다.[1]
바위에서 발견이 된 걸로 보아 해부루왕이 유기된 아이를 발견하여 양아들로 삼은게 아닌가 추측된다.

이에 해부루왕은 하늘이 자신에게 아들을 주었다고 기뻐하며 아이를 거두어 금와(金蛙)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들로 삼았다. 후에 금와는 장성하여 태자가 되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여의 군주가 되었다.

2.2. 유화부인과 만나다

파일:46_금와왕과_유화부인.png
1854년 우타가와 사다히데(歌川 貞秀)의 그림책 《조선정벌기(絵本 朝鮮征伐記)》. 금와왕이 유화부인을 만나는 모습을 묘사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재위에 오른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의 우발수를 지나다가 유화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유화부인은 스스로를 강의 신인 하백의 딸이라 소개하였으며 자신이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와 야합하였다가 중매도 없이 외간 남자와 놀아났다며 벌을 받아 우발수로 쫓겨났다고 말하였다.

금와왕은 유화부인을 거두어 방에 두었는데 햇빛이 계속해서 유화부인을 비추더니 유화부인이 임신을 하여 큰 을 낳았다. 금와왕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알을 짐승들에게 던져주었으나 짐승들이 이를 먹지 않고 오히려 감싸돌며 지켰다. 결국 알을 깨뜨리려고 하였으나 알이 깨지지 않아 다시 유화부인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이 알에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였다.

금와왕의 장남인 태자(太子) 대소는 추모의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추모는 유화부인의 도움을 받아 엄사수를 건너서 졸본 땅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니 기원전 37년 2월의 일이었다.

이후 기원전 24년 부여에 남아있던 유화부인이 죽었는데 이에 금와왕은 태후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고 신묘(神廟)를 세웠다. 이 때문에 유화부인이 부여로 넘어가면서 금와왕의 여인이 되었을 것이라고도 하고, 유화부인이 금와왕의 조부인 해모수의 아이를 낳았으므로 금와왕이 의붓할머니로 대접한 것이라고도 한다. 왕후가 아닌 태후의 예로 모신 것을 보면 후자의 의견이 더 맞는거 같다.

2.3. 고구려와의 관계

기록에서 당시 고구려와의 관계를 볼 수 있는 기사가 있다.
14년(기원전 24) 가을 8월,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돌아가셨다.
그 나라 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고 신묘를 세웠다.
겨울 10월,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을 갚았다.
<삼국사기>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북부여에서 죽자 금와왕이 장사 지내주었고 고구려가 이에 보답했다는 내용. 이를 미루어 짐작하면 이때까지 고구려와의 사이가 별로 나쁘진 않았던 듯하다.

다만, 추모 신화가 부여의 동명 신화를 차용한 것을 감안하면, 유화 부인, 주몽과 금와 사이에 개인적인 안면 인식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우며,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주몽과 부여왕 사이엔 어떤 관계도 없었을거라 추정한다. 어쩌면 유화 부인을 성스럽게 생각했던 후대 고구려인들이 만든 기사일 수도 있다. 유화부인은 고구려 신앙에서 어머니 신으로 받들어졌기 때문이다.

금와의 부여를 '동부여'라고 표현하였는데, 해부루-금와-대소로 이어지는 부여는 후에 '북부여'라고도 불린다. 위 기록에서 금와의 부여를 '동부여'라고 한 것을 현대 학자들은 후대 고구려인들의 각색이 들어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단순히 고구려가 부여에게 조공한 사실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있다. 다만 고구려와 부여 사이가 험악하지 않았던 건 사실인 듯하다.

2.4. 죽음과 사후

금와왕이 언제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부여에서 살던 예씨 부인과 아들 유리가 기원전 19년에 고구려로 넘어간 것을 보아 이 즈음에 군주가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금와왕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훗날 금와왕이 죽자 장남이었던 대소가 그 뒤를 이어 부여의 군주가 되었다.

대소왕은 훗날 고구려와 대립하던 중에 대무신왕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서기 22년에 죽었는데 그 막내동생이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추종 세력을 이끌고 부여를 빠져나와 동남쪽에 갈사국을 세웠다. 갈사국은 46년 뒤인 서기 68년에 손자 도두가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사라졌다.

한편 대소왕의 사촌동생은 서기 22년에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낙씨 성을 받고 대무신왕으로부터 부여의 왕으로 책봉되었는데 이후에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부여(위구태왕, 부태왕 등이 다스린 나라)가 이 사람의 후손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전자의 거점은 연나부, 후자의 거점은 소노부로 미묘하게 다르기에 확실하지 않다.

3. 대중매체에서

파일:금와왕1.jpg
파일:금와왕2.png


[1] 《삼국사기》에서는 개구리가 아닌 달팽이(蝸) 형상이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 蛙와 蝸의 발음이 서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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