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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馬韓王[1]삼국사기와 진서 마한열전 등에 등장하는 마한왕들. 마한왕이라는 점만 확인되고, 이 인물들이 마한의 어느 국가의 군주나 이름인지는 건마국을 건국한 준왕 외엔 알려지지 않는다. 굳이 말하면 목지국 혹은 건마국 둘 중 한 거수국의 우두머리겠지만 이조차 문헌 사료는 없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게다가 초대인 준왕 외엔 기년이 고고학 성과와 일치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신라와 백제에 대해 고고학으로 밝혀낸 이때까지 성과를 종합해보면, 삼국사기 초기 기년은 신뢰성이 극히 낮을망정 사건과 계보에 대해선 어느 정도 신뢰성을 인정 받고 있으므로 초대 마한왕 외엔 모두 목지국의 거수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 초대 마한왕
- 다름아닌 한씨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준왕이다.
3. 신라 박혁거세 시기 마한왕
4. 백제 온조왕 시기 마한왕
5. 이후 기록에서 나타나는 마한왕
무제 태강 원년(280), 2년(281)에 그들의 임금이 자주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조공하였고, [太康] 7년(286)·8년(287)·10년(A.D.289)에도 자주 왔다.
武帝 太康元年·二年, 其主頻遣使入貢方物, 七年·八年·十年, 又頻至.
진서 동이열전 마한(馬韓) 中
武帝 太康元年·二年, 其主頻遣使入貢方物, 七年·八年·十年, 又頻至.
진서 동이열전 마한(馬韓) 中
진서 마한열전에 의하면 마한왕이 서진과 교류한 기록이 있다. 271~290년 기간에 마한의 이름을 하고 사신이 8번 왔는데, 그 중 6번은 백제, 2번은 침미다례의 맹주인 신미국이 보낸 걸로 해석된다.[2] 즉 이 당시 마한왕은 막 목지국을 마한 수장국 위치에서 끌어내린 백제의 고이왕과 책계왕인 것이다. 다만 침미다례의 경우 횟수는 엄연히 6:2로서 한성백제에 비해 밀리긴 하지만 침미다례의 맹주 또한 마한왕을 자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가 246년 기리영 전투에서 위나라에게 패한 후 위상이 떨어진 목지국을 270년 이후 어느 시점에 전광석화같이 급습해서 함락한 후 마한의 맹주를 자처했으나, 침미다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목지국이 망한 이상 이제 자기네가 마한이라고 자처한 것. 그러나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목지국의 친위 세력들이 망하지 않고 충북 및 충남 북부 일대에서 여전히 백제에게 저항하고 있었고 침미다례가 목지국의 저항에 어떤 지원을 한 행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다, 침미다례의 영향력은 전남 서남부에만 국한되어 있었고 전북 서부 건마국 세력, 전남 중부 및 동부는 우호적으로 백제에게 포섭되어가고 있었기에 이걸 두고 마한이 백제에게 영토를 잃은 다음 침미다례가 마한을 계승했다고 보면 안 된다.
마한왕을 겸하는 목지국 거수가 270년 이후 어느 시점에서 마한 소속 거수국인 한성백제국에게 하극상을 당한 다음 위신을 잃었고 한성백제가 목지국을 타도하기도 하였거니와 그 시점에서는 마한 내부에서 가장 강한 구성국[3]자격으로 마한 맹주를 자처했으나, 기존 마한에 속했던 여러 구성국들에 속하던 침미다례는 독자적으로 서진에 사신을 보내 한성백제를 맹주로 인정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애매한 관계는 적어도 근초고왕이 372년에 원정을 나서기 전까진 정리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마한왕 타이틀을 놓고 벌인 경쟁에선 엄연히 한성백제가 우위에 있었으나, 침미다례 또한 마냥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그러나 372년 정벌 후 침미다례 또한 어쩌는 수 없이 백제를 마한의 맹주로 인정하게 되면서 옛 마한 내에서 백제왕의 마한왕 자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거수국은 없게 되었다.
하지만 한성백제는 마한왕보다는 백제왕 타이틀로 중원 정권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했고, 당시 정통 중원 정권이던 동진 역시 이 시기 한성백제가 보내온 사신을 '백제왕이 보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시기 동진 정권은 사마씨가 아니면 누구든 왕으로 책봉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관철 중이었기에 정식 책봉호는 진동장군 & 영낙랑태수 에서 그쳤지만, 여하튼 백제왕이란 실체가 있다는 것 정도는 확실히 인지하게 된 걸로 보인다. 즉 이 시기부터 마한왕이란 호칭은 국제 외교 무대에서 쓰이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침미다례가 마한 칭호를 쓰는 건 기를 쓰고 틀어막았고 전라도 동부가 옛 마한 시대부터 얽힌 인연을 청산하고 대가야 연합에 가맹하자 이를 인정하지 않고 군사력으로 응징하면서 마한왕의 권위를 백제국 아닌 다른 세력이 가져가는 건 철저하게 틀어막긴 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백제왕이 마한왕 칭호를 쓰면 어쨌든 백제국이 목지국을 상전으로 섬겼다가 하극상을 벌여 타도했다는 사실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기에, 백제 왕실 입장으로선 마한왕 칭호는 대단히 달갑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마한왕이란 타이틀은 마한 전체를 직접 지배화하는 시점까지 옛 마한 거수국들을 복종시키는 용도로만 활용했다가, 옛 마한 거수국들의 완전한 해체가 달성되면 언젠가는 버려야 할 호칭들 중 하나였다는 것.
그래도 백제가 옛 마한 영역을 통합할 명분은 어쨌든 마한왕이었기에 적어도 옛 마한 내부에선 명목상으로는 썼을 개연성이 있으나, 잔존한 마한 전체를 직접 지배화하는 데 성공한 6세기 초반 무령왕 이후부터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그 시기엔 '백제왕'이란 타이틀도 동아시아 국제 사회에서 권위와 명분을 굳히게 된 상황. 때문에 성왕은 마한 자체를 백제가 정복한 대상으로 거명하게 되는데 고로 마한왕이란 칭호 자체는 최소한 무령왕 혹은 성왕 때부터 완전히 부정되어 없어졌다고 보면 된다. 세계사적으로는 어느 순간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해체와 황제위 폐지에 그닥 신경쓰지 않게 된 오스트리아 제국 황실을 떠올려보면 되겠다. 성왕은 그러면서 남부여로 국호를 바꾸며 한술 더떠 백제국이란 호칭 자체도 극복하려 했는데, 다만 이 조치는 마한 부정 시도와는 달리 실패한 건 의미가 크다 할 수 있겠다.[4]
한편 북사에 따르면 신라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으나 바다로 도망쳐 신라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볼드체 친 구절은 목지국 문서에 서술된 “진한은 언제나 마한 사람을 임금으로 삼는다”와 일맥상통한다. 게다가 온조왕~고이왕까지 신라와 전쟁한 기록이 기년도 죄다 틀리는 건 차치하더라도 전쟁터마저 아예 신라가 맹주국인 진한과도 무관한 오늘날 충북 일대인 보은, 괴산 및 그 주변이다. 이 지역들은 목지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마한 일대지, 진한이 아닌 것이다. 백제고고학에서는 주로 천안 청당동에 소재한 목지국 및 목지국을 강하게 지지하는 마한 거수국들과 백제가 충돌한 기록으로 해석된다.
고고학적으로는 비류왕 재위기인 4세기 전중반에 충북 일대에서 목지국의 마지막 저항이 소멸되고 목지국 자체도 완전 초토화된 걸로 나온다. 이는 거의 한 세대 가까이 치열하게 투쟁한 것으로서, 이 시기 백제는 침미다례가 대놓고 백제의 마한 영도국 자격을 부정하던 시기였음에도 침미다례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목지국 잔여 세력에게 남방 역량을 집중한 것이다.
문헌과는 달리 실제로는 백제국 VS (한때 백제국의 상전이었던 목지국 & 진천, 보은, 충주 등등 목지국의 직접적 친위 세력들)의 싸움이었던 걸로 드러난다. 신라 김씨 족단이 실제로는 충주에 소재한 세력이었으나 더는 백제에게 버틸 수 없게 되자 진한 사로국으로 망명했다는 강종훈 교수의 연구와 위 언급, 그리고 최근 충주금릉동에 대한 고고학 연구 성과가 묘하게 주목되는 상황이다. 즉 백제와 신라가 초기에 충북 일대에서 대결을 벌인 일화들은, 그 당시엔 마한 거수국이었던 김씨 족단이 목지국과 같은 편에서 백제와 벌인 전쟁이었다는 얘기. 충주 지역은 고구려가 백제에게서 빼앗았다가, 다시 신라가 고구려에게서 빼앗게 되는데, 이후 신라 왕실이 국원(國原)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아예 왕이 나서서 서라벌 주민들을 상하 가리지 않고 충주 일대에 집중적으로 사민할 정도로, 충주 지역을 소중히 여겼다는 점도 더 생각해볼 부분이다.
6. 청주 한씨 족보 등에 나오는 마한왕
청주 한씨 등 기자조선의 군주들을 시조로 삼는 일부 성씨 족보에는 역대 마한왕계가 기록되어 있으나, 이러한 족보들은 조상을 높이기 위해 계보를 창작하는 경우가 많아 신빙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게다가 그걸 감안하더라도 마한왕 계보는 일단 건마국 준왕 계통이 끊긴 이후에도 목지국을 통해 적어도 기원후 3세기까지는 이어졌고, 천안 용원리에서 이어진 목지국 마한왕의 방계 계통은 무려 5세기 후반까지도 연속되는데 아래 족보는 기년이 완전히 틀린 삼국사기 온조왕조에 맞춰 작성되어 있다. 적어도 현재 밝혀진 마한사 및 백제사에 미뤄보면 신뢰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기년과 무관하게 몇몇 인물은 실제로 있었을 개연성까진 부정할 수 없지만.대수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1 | 무강왕 | 준 | 기원전 194년 ~ 기원전 193년 | 별칭은 애왕. 고조선의 군주였던 준왕과 동일 인물이다. |
2 | 강왕 | 탁 | 기원전 193년 ~ 기원전 189년 | |
3 | 안왕 | 감 | 기원전 189년 ~ 기원전 157년 | |
4 | 혜왕 | 식 | 기원전 157년 ~ 기원전 144년 | |
5 | 명왕 | 무 | 기원전 144년 ~ 기원전 113년 | |
6 | 효왕 | 형 | 기원전 113년 ~ 기원전 73년 | |
7 | 양왕 | 섭 | 기원전 73년 ~ 기원전 58년 | |
8 | 원왕 | 훈 | 기원전 58년 ~ 기원전 33년 | 우평, 우량, 우성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
9 | 계왕 | 정 | 기원전 33년 ~ 기원전 17년 | 백제 온조왕에게 멸망 당했다. |
7. 의문
삼국사기만 보면 마한은 기원후 1세기에 멸망했지만, 238~246년도[5]에 파악된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삼한 78개 소국이 나와 있고, 백제와 신라 역시 이런 소국들 중 하나였다.따라시 해당 기사의 마한 정벌은 온조왕이 일부 마한소국을 병합한 것을 과장한 것으로 파악하거나, 후대 기록을 소급한 것으로 풀이된다. 백제의 마한 정복 기사는 책계왕 때 기사를 온조왕 때 기사로 소급한 것으로 보는 연구가 있는데[6] 고고학적으로도 3세기 중반부터 쇠락하지만 그 여력은 유지하던 목지국의 쇠퇴가 갑자기 3세기 후반, 즉 고이왕 혹은 책계왕 재위기 때부터 낙차가 급격히 커지는 게 관찰된다. 웅천 목책을 허물게 한 건 책계왕 이전 백제 임금들 치세에 일어났고, 목지국 급습은 고이왕 혹은 책계왕 때 이뤄졌다고 보면 큰 무리가 없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6세기에 백제가 마한을 완전 병합했다고 봤던 예전 해석은 분명한 오류다. 마한은 백제에게 국가 대 국가로 맞서다 영토를 잃고 병합당하던 관계가 아니었다. 백제는 목지국을 쓰러뜨린 3세기 후반 이후에도 명목상으론 마한의 일부였다. 다만 맹주국이 그 시기를 기점으로 목지국에서 백제국으로 바뀌었을 뿐. 요즘 후기 마한국의 맹주로 잘못 오해되는 침미다례도, 실제로는 전남 서남부 일대에나 그 세력을 미칠 뿐 그밖 지역은 명목상으로도 통제하지 못하던 군소 세력에 불과했다. 다만 다른 두 전남 세력(광주 세력, 전라도 동부를 위시한 일명 전라도 가야 세력)과는 달리 그나마 백제와 어느 정도 협상을 진행할 정도 실력은 있어 이름을 남겼을 뿐이었다.
한편 마한왕은 신라본기와 백제본기 양쪽 모두 마치 상전인 것처럼 행동한다. 물론 둘 다 결과는 신라와 백제에 굴욕 당하는 것으로 끝나긴 하지만. 그런데 마한왕이 진한, 변한에도 정치적 우위가 있었다면 의문인 것이, 고고학적으로는 경주를 비롯한 경상도 지방의 목관묘, 목곽묘 부장품이 동시기의 마한지역의 분구묘, 주구토광묘의 부장품과 비교하면 양과 질 모든 면에서 경상도 지방이 우세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목지국의 영역이자 충남 서북부 마한 최대 무덤유적인 아산시 탕정 밖지므레 유적의 주구토광묘의 부장품을 보면 철제 무기류 부장량이 경주 덕천리 목곽묘에 크게 딸린다. 이렇게 된 건 기원전 1세기 한사군 성립 이후 서한 제국이 건마국이 주도하던 마한을 경계해서 마한에 대한 철 공급을 통제한 게 원인인 걸로 분석되고 있다. 그나마 기원후246년 마한은 신분고국과 목지국이 마한 내부에서 동원 가능한 세력을 총동원해서 이런 짓을 저지르는 중원 정권에게 기리영 전투로 정면 도전해볼 배짱과 실력은 있었으나, 기원전 1세기 건마국은 당시 한창 서슬 퍼렇던 한무제와 한선제의 서한 제국에게 결코 그럴 수 있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마한 일대가 이 시기부터 진변한보다도 철기 생산 능력이 떨어지고 철공 관련 발전 속도도 뒤쳐지고 만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목지국이 맹주가 된 건 삼한 시기 소국들은 한반도 북서쪽 한사군과의 교역이 무척 중요했고, 진, 변한 소국들은 연안 항해로 저기까지 올라가려면 전라남도를 돌아 목지국이 통제하는 아산만을 통과해야 했기에 목지국 및 목지국 지지 세력의 의견을 무시하기 어려웠던 데 이유가 있었다. 즉 목지국과 마한왕이 우위를 보인 것은 국력이 압도적으로 우위라서가 아니라 지리적 위치상 경제적, 외교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런 전통이 수백 년 이어지면 권위도 쌓일 수밖에 없었다.[7]
8. 기타
신찬성씨록에도 이름은 신(信)인, 후손으로는 수경(須敬)이 있어 그의 후예가 일본에 귀화했다고 전하긴 하지만, 해당 인물은 마한왕이 아닌 초한쟁패기의 인물인 한왕 신을 의미한다.백제 왕자인 임성태자를 시조로 섬기는 오우치 씨는 자신들의 족보에서 백제 성왕 혹은 위덕왕을 백제국 마한황제제왕(百濟國 馬韓皇帝齊王)이라고 칭했다.
9. 관련 문서
[1] 또는 서한왕(西韓王)으로 등장한다. 이는 신라 기준으로 마한이 서쪽에 위치했기 때문.[2]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백제사 시리즈 제3권 이현혜 교수 기고분 참조[3] 경기도 전체를 직접 지배화했고 영향력은 황해도 남부, 충청 북부 일대까지 미치고 있었다.[4] 남부여란 국호 변경 자체가 옛 마한 거수들의 후손인 대성팔족을 비롯한 백제 귀족들에겐 영 달갑지 않은 일이었을 개연성이 크다. 그들이 수백 년 동안 익숙하게 마음에 받아들인 국호는 어디까지나 백제였지 남부여는 아니었고, 남부여는 어디까지나 백제 왕실한테만 의미가 큰 호칭이었기 때문이다.[5]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사 시리즈 제5권 참조[6] 충청남도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백제사 시리즈 참조[7] 한성백제 또한 이미 3세기 중반에는 경기도 전체가 직접 지배지였기에 천안 목지국을 능가하는 마한내 최강국이었으나(프랑스 내부에 프랑스왕보다 영역을 더 많이 갖고 있었던 잉글랜드 군주와 상황이 비슷했다. 그나마 프랑스 바깥 잉글랜드 점유지는 프랑스왕과 상관 없는 영역이었으나, 한성백제 영역은 아예 전체가 이론적으로는 마한왕이 백제국 거수에게 내준 영역이었다. 때문에 이 부분에서는 한성백제 거수가 잉글랜드 군주보다 상황이 불리했다.), 마한왕이란 타이틀에 그때까지 있었던 권위를 무시할 수 없었던지라 적어도 십수 년 정도는 망설여야 했다. 염려대로 행동을 감행한 이후 충북 일대는 그렇게 쉽사리 무너지지 않고 저항을 불사했으며 침미다례는 백제를 마한왕으로 인정하길 거부했기에 상당히 지난한 협상, 위협, 군사적 행동을 수백 년 감행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