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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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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a1111><colcolor=#fecd21> 미주랑
美周郞

周瑜
주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ZhouYu.jpg
최종 직위 도독(都督) 겸 편장군(偏將軍)
겸 남군태수(南郡太守)
성씨 (周)
이름 (瑜)
공근(公瑾)
생몰 기간 175년 ~ 210년
고향 양주(揚州) 여강군(廬江郡) 서현(舒縣)[1]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2.1.1. 원술 휘하에서2.1.2. 손책 휘하에서
2.2. 손권 휘하에서2.3. 적벽대전2.4. 남군 공방전2.5. 죽음
3. 삼국지연의4. 평가
4.1. 연의의 희생자4.2. 과대평가설
4.2.1. 용병가에 불과하다?4.2.2. 계책을 받기만 한다?4.2.3. 천하이분지계는 상상에 불과했다?
5. 가족 관계6. 예술인으로서7. 기타8.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며 는 공근(公瑾)으로 양주 여강군 서현 사람.

손책손권 휘하의 전략가로, 세간에는 적벽대전의 주연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외모, 성격, 무예, 전술, 통찰력 등 출중한 능력으로 오나라를 이끈 당대의 천재였다.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주유의 집안은 고조부 주영(周榮)이 한장제, 한화제 때 상서령을 지냈고 증조부 주흥(周興)은 한안제 때 상서랑을, 종조부 주경(周景)과 주충은 양대에 걸쳐 삼공 중 하나인 태위직을 지냈으며, 또다른 당숙 주상(周尙)은 단양태수를 지냈고, 아버지 주이(周異)도 낙양령을 지낸 명문가였다.

정사 삼국지》 <주유전>에서 주유의 조상 내력을 소개한 뒤 첫머리부터 나오는 말이 주유는 건장하고 기상이 굳세며(瑜長壯) 자태와 용모가 빼어났다(有姿貌)는 것인데, 열전 첫머리에서부터 잘생긴 외모가 언급되는 것에서 보이듯 상당한 미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탁 토벌전 당시 손견이 의병을 일으킬 때, 손견은 집과 가족을 구강군 수춘현으로 이주시킨다. <손책전>에 따르면 10세였던 주유는 마찬가지로 10세인 손견의 아들 손책의 명성을 듣고 정중하게 찾아가[2] 손책과 만난다. 주유가 손책에게 구강군 서현으로 이주해 살 것을 권하자 손책이 이 말을 따라 모친 무열황후를 데리고 서현으로 옮겨가서 살면서, 주유 등 여러 사대부들과 친교를 쌓는다.

주유는 동갑인 손책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주유는 손씨 가문과 인연이 생겼는데 어찌나 사이가 가까웠는지 길 남쪽의 큰 저택을 손책에게 주고 손책의 모친 무열황후에게도 절을 했다. 또한 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까지 도우며 살았다.

한편 주유는 음악에 정통하였다. 《강표전》에 따르면 주유는 장간과의 만남에서 조조의 세객으로 나선 장간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자신이 기나 사광 같은 고대의 대가들에 미치지는 못하나 좋은 곡을 분별할 줄은 안다는 말로 화두를 떼며 자신의 뜻을 밝히는데, 이러한 화법에서도 드러나듯 그 스스로도 음악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했고, 이 때문인지 <주유전>에 따르면 주유가 어려서부터 음률에 정통했기에 비록 술에 거나하게 취해 있어도 악사들의 연주에 틀린 것이 있으면 반드시 돌아봤다고 하며 강동에서는 '곡조를 틀리면 주랑이 돌아다본다.' 라는 말도 있었다.

주랑이라는 별명이 《삼국지연의》에서는 아름다울 미(美)가 붙은 미주랑으로 업그래이드됐고, 속이 좁게 묘사되는 점과 용장 손책과의 브로맨스와 예술을 포함한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엄친아라는 이미지가 후대에는 나르시스트적인 이미지로 재해석되기도 하나, 사서 상에서 묘사되는 주유는 신체가 장건하고 기백이 있는 잘생긴 외모로 묘사되고 있기에 미남이라고는 해도 선이 굵고 다부진 상이었을 것이며, 악사들의 연주 실력에 불만을 표하며 개성을 강렬하게 드러낼 때 이외에는 대단히 자제심이 뛰어나고 자신을 깍듯이 낮추며 주변을 배려하여 존경받던 군인이자 정치가였기에 이러한 연예인 같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3]

2.1.1. 원술 휘하에서

손책은 아버지 손견이 죽자 원술 밑으로 들어가 벼슬살이를 한다. 원술군과 유요군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손책도 참전하여 병사를 받아 강동으로 온다. 이때 주유가 숙부인 단양태수 주상에게 안부를 물으러 방문했는데 마침 역양에 있던 손책이 주유에게 편지를 보냈다. 주유는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손책에게 귀순하여 유요와 싸워 이기는 데 도움을 주었고 손책 자신은 왕랑이 있는 회계로 나아가면서, 주유에게는 단양군을 지키게 했다.

주유의 삼촌인 주상은 원술에게서 임명된 단양태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미 한나라 중앙정부가 임명한 정식 단양태수였던 주흔193년에 원술에게 밀려 단양군에서 축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웅기》에서 원술의 후원으로 양주자사가 된 진우가 193년에 조조에게 패한 원술과 틀어졌다가 축출되는 것에서도 보이듯, 당시 원술의 영역인 여남군과 인접한 양주의 치소 소재지였던 구강군 일대는 원술의 간접적 영향 아래 있는 구역이었고, 손책과 주유가 구강군으로 이주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주유의 숙부인 주상은 반동탁연합 당시 원술에게 합세했다가 이후 원소, 조조 연합에 밀려 양주로 달아난 원술이 진우와 주흔을 축출하면서 단양태수의 자리를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4]

따라서 손책과 주유는 일찍부터 원술의 영향력 아래에서 자라다 나이가 어느정도 차자 곧 원술을 위해 일했다고 볼 수 있으며, 원술의 명령을 받은 손책이 194년에 유요를 격파하자 주유는 숙부가 있는 단양으로 복귀했으며, 단양으로 복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술이 사촌동생 원윤을 단양태수로 삼아 주상을 대신하게 하니 주상은 주유와 함께 수춘으로 돌아왔다는 <주유전> 기록에서도 보이듯 이 당시의 주유는 손책의 친구였다고는 하나 원술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같은 동료인 손책과 협력했던 관계였지 손책 휘하에서 충성을 바쳤다고 보기는 어려운 위치였다.

이후 <주유전>의 기록은 주유가 손책에게로 귀순하는 198년의 시점으로 넘어가는데 이 기간 동안 수춘에서 원술을 모시던 주유는 원술이 실패를 거듭하며 몰락하는 과정을 그대로 지켜봤을 것이다.

2.1.2. 손책 휘하에서

<주유전>에 따르면 주유가 수춘으로 돌아가자 원술은 주유를 부장으로 임용하며 가까이 두고 싶어했지만 주유는 원술에게서 끝내 성취할 것이 없음을 보았기 때문에 강동으로 갈 생각으로 거소현의 장이 되길 청했고,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원술은 이에 동의했으며, 주유는 거소를 통해 강남의 손책에게로 가버린다. 이 해가 198년의 일로 손책은 직접 나와 주유를 영접했으며 건위중랑장의 자리에 임명하며 그 자리에서 즉시 2천명의 군사와 50필의 말을 주유에게 주었다.

<손책전> 주석 《강표전》에서 이들을 단금지교로 칭한 만큼, 후대에는 주유와 손책의 사이가 대표적인 미소년 간의 브로맨스로 받아들여졌다.
청나라 시대에 원매가 저술한 자불어(子不語) 23권에 수록된 쌍화묘(雙花廟) 이야기에서 손책과 주유가 같이 잤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날 삼국시대에 주유와 손책은 모두 미소년으로서 사이좋게 지내 같이 잤고, 그들은 대개 세상의 영웅이었는데, 너는 또한 더러운 소년으로 여기는 것인가?
當日三國時,周瑜、孫策俱以美少年交好同寢宿,彼蓋世英雄,汝亦以為惡少年乎?
자불어 23권 쌍화묘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이상해보이지만 고대의 전장 막사가 1인 1실하기 힘든 환경이기도 했고, 수면이라는 암살에 노출당할 수 있는 가장 무방비한 상태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최측근에 대한 의리와 끈끈한 우정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손책과 주유가 같이 잤다는 내용이 언급되는 쌍화묘가 브로맨스가 주제인 이야기다보니 청나라 때도 그런 쪽으로 받아들여진 듯하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이 주유에게 엄청난 상을 하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공근은 영준하고 빼어난 재능이 있으며 총각 시절부터 나와 더불어 친분을 맺어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다. 일전에 단양에서 무리와 배, 식량을 발하여 큰일을 이루어낸 것 같은 경우는 논공행상을 통했다고 해서 충분히 보답한 것이 아니다.
당시 주유는 24세였고, 오군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주랑(周郞)이라고 불렀다.

199년에 주유는 주호군과 강하태수에 임명되고 손책과 함께 여강태수 유훈을 무찔러 여강을 점령했다. 이 당시 유훈의 본진 환성을 함락시키면서 교공의 두 딸을 포로로 잡았는데 모두 절색으로 언니 대교를 손책이, 여동생 소교를 주유가 아내로 삼았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이 주유에게 장난을 걸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공의 두 딸이 비록 떠돌게 되었으나 우리 둘을 사위로 삼았으니 역시 충분히 기뻐할 만할 것이다.
이어서 유훈을 돕는 강하태수 황조도 격파했다. 돌아오면서 예장여릉을 평정했다.

2.2. 손권 휘하에서

200년에 손책이 죽고 남동생인 손권이 그 뒤를 이었고 주유와 장소는 국정을 주관하게 된다. <주유전>에 따르면 손권의 직위가 아직 장군일 때, 손권 휘하의 장수들과 손님들은 손권을 대하는 예절이 간단했다. 그러나 주유만이 일찍부터 손권에게 존경을 다하여 신하로서의 예절을 지켰다.

202년, 세력을 키운 조조가 손권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라고 했을 때 장소, 진송 등은 결단을 하지 못했지만 주유가 반대했고 무열황후도 주유에게 동의했다.
공근의 말이 옳다. 공근은 백부(손책)와 같은 나이로 한 달이 적을 뿐이다. 나는 그를 아들과 같이 볼 터이니 너는 그를 형으로 섬겨라.
이렇게 무열황후 또한 손권으로 하여금 주유를 형의 예로 받들도록 했다.

206년에 주유는 손유 등을 통솔하여 마둔과 보둔을 쳐 그 우두머리를 효수하고 포로 1만여 명을 잡아왔으며, 황조가 등룡을 보내 시상현을 공격하자 이를 쳐 등룡을 사로잡아 오로 압송했다.

208년, 손권이 강하의 황조를 토벌하고, 주유를 전부대독으로 임명했다.

2.3. 적벽대전

형주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고 수십 만의 병사를 가지게 된 조조는 강동으로 눈을 돌린다. <오주전>에 주석으로 달린 《강표전》에 따르면 조조가 손권에게 편지를 보냈다.
요즘은 죄상을 들어 죄지은 자들은 토벌했고, 군기가 남쪽으로 향하자 유종이 항복했소. 이제 수군 80만을 단련하여 바야흐로 오(吳) 땅에서 손장군과 자웅을 가려보려고 하오.
손권은 이 편지를 들고 있다가 모든 신하들에게 보여주자, 모두가 두려워하고 놀라서 얼굴빛이 달라졌다.

손권이 신하들을 불러 모아 논의하는데 모두들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항복을 주장했다.
1) 조조는 황제를 옹립하여 명분이 있다.
2)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리적 이점인 장강은 이미 조조가 형주를 얻었기에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3) 유표의 몽충 1천 척을 비롯한 잘 조련된 수군을 얻었으니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
그렇게 믿었던 장소를 필두로 신하들이 항복을 주장하니 손권은 심기가 불편했다. 그러나 노숙만이 반대하며 손권에게 파양에 있는 주유를 불러들이게 했다.

파양에서 도착한 주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제시하고 조조를 이길 수 있다며 항전을 주장한다.
1) 수전에서는 우리 오군을 이길 수 없다.
2) 북쪽에는 아직 마초, 한수 같은 배후의 세력이 남아있다.
3) 지금은 겨울이라 말에게 먹일 마초가 없다.
4) 중원의 사람들이 이 먼 곳까지 왔으니 반드시 질병이 돌 것이다.
5) 조조는 한나라의 승상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역적이다. 한왕조를 위해 조조를 제거해야 한다.
6) 장군은 아버님과 형을 이어 강동을 점거해 땅이 수천 리고 군사는 날래어 이용하기 충분하다.
그리고 조조가 이를 무릅쓰고 시행한다면 손권이 조조를 사로잡는 일은 마땅히 오늘에 있으니 청컨대 정예병사 수만 명을 얻게 하여 주면 하구에 주둔하였다가 손권을 위해 조조를 격파하겠다고 말한다. 이에 결심한 손권은 늙은 도적 조조가 한 왕실을 폐하고 자립하려 한 지 오래인데, 몇몇 영웅들은 이미 없어졌고 오직 나만이 존재한다며 나와 조조는 형세로 보아 둘이 동시에 서있지 못하고 그대는 마땅히 쳐야 한다고 말했으니 나와 아주 일치하고 이것은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준 것이라 말한 후 칼을 뽑아 앞에 놓은 책상을 베며 말했다.
제장과 관리들 가운데 감히 다시 마땅히 조조를 맞이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이 탁자와 같게 되리라!
그리고 회의를 끝마쳤다.

그러나 배송지가 보건데 조조에게 대항할 방침을 세운 것은 노숙이었다. 당시 주유는 파양으로 파견되었었는데, 노숙이 주유를 불러서 손권에게 권하도록 했다. 주유가 파양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노숙과 은밀히 생각을 합쳤기 때문에 함께 공훈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유전에서는, 손권이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계책을 묻자, 사람들의 의견을 제지시키고, 혼자만 거절할 계책을 말했다고 했다. 이것은 노숙보다 앞서 도모한 것이 아니므로, 노숙의 공을 가로챈 것이다라고 했다.

회견이 끝난 후, 밤에 주유가 손권을 찾아와 말한다. 조조군이 80만이라는 소리는 아무래도 무리이며 조조가 원래 거느리고 있던 병사는 많아야 16만 명, 거기다가 아직 확실하게 항복하지 않은 유표의 병사 8만이 다라고 하며 자신에게 5만의 병사만 주면 이들을 무찌르겠다고 한다. 자기들 가족만 생각하며 항복을 주장한 장소, 진송 등에게 실망했던 손권은 주유를 위로하며 "주유랑 노숙이랑 정말 고마운데 5만은 무리다. 일단 3만 준비할게."라며 주유와 정보를 좌ㆍ우 도독으로 삼고 노숙을 천군교위로 삼았다. 손권은 일단 3만을 준비하긴 했는데 오주전(손권전)에 따르면 주유와 정보에게 각각 1만씩 주고 건강실록에 따르면 나머지 1만은 손권은 스스로 장군이 되어 중군 1만으로 이어나가게 했다.

주유는 성격이 너그럽고 넓어서 대체로 인심을 얻었는데, 오직 정보와는 화목하지 못했다. 《강표전》에 따르면 정보는 자신이 연장자라고 주유에게 자주 모욕을 주었는데 그럼에도 주유가 깍듯이 대하자 결국 감복하여 친하게 지내고 존중했다. 정보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공근과의 사귐은 마치 향기나는 맛있는 술을 마시는 것 같아 스스로 취함을 느끼지 못한다.
주유가 겸양으로 사람을 감동시킨 것으로 그만큼 성격도 좋았다.

한편 조조에게 피난 중인 유비군은 노숙과 상의하여 제갈량을 손권에게 파견하여 힘을 합치게 된다. <선주전>에 주석으로 달린 《강표전》에 따르면 제갈량을 오에 보낸 후 유비는 노숙의 말에 따라 번구에서 머물렀고 조조의 군사가 남하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손권의 원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주유의 배가 도착했고 유비가 사람을 보내 주유를 위로하자 주유가 말했다.
군임(軍任)을 맡고 있어 직무를 이탈할 수 없으니 만약 위엄을 굽혀 방문해 주신다면 실로 바라는 바에 부합할 것입니다.
유비가 관우, 장비에게 말하길, 이 자리에서 이미 힘을 합치기로 했는데 부르는 것을 안 갈 수는 없다면서 직접 배를 타고 주유를 찾아간다. 유비가 주유에게 병사 수를 묻자 주유는 3만 명이라고 답한다. 유비가 너무 적다고 실망[5]하자 주유는 "내가 적 격파하는 거나 보라"며 자신감을 드러낸다.

유비가 전에 만난 노숙을 불러 함께 이야기하자고 하나 주유는 이번에도 노숙은 명을 받아 움직일 수 없으니 직접 찾아가든가 제갈량과 함께 오는 중이니 2~3일 기다리라고 한다. 유비는 노숙을 부르려고 했던 자신에게 부끄러워하는 한편 한 군대를 이끌 주유의 엄정함을 확인한다. 그러나 유비는 주유가 딱히 조조군을 격파할 것이라고 믿지는 않아서 관우, 장비와 함께 2천 명을 이끌며 후방에 따로 남는다.

그런데 <선주전>, <무제기>에선 조조군을 격파한 것으로 되어 있고 손성 역시 강표전은 오나라 사람들이 전공과 명성을 독차지하려는 말이라며 이 기록을 오류라고 지적했다.

이후 조조군과 손유 동맹군은 적벽에서 대치한다. 강표전에 따르면 조조는 주유가 나이가 어리면서도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 설득시키기로 하여 유명한 말재주꾼인 장간을 보낸다. 주유는 장간을 우선 떠본다고 "멀리 강호까지 몸소 찾아오시다니, 조씨를 위해서 설객을 하시기 위해서입니까?"라고 말하자 장간은 부인한다. 주유는 말했다. "나는 현을 듣고 소리를 맛보면, 좋은 곡을 분별할 정도로는 할 수 있습니다." 연회가 끝나고 주유는 일이 생겼다며 나중에 보자고 한다. 3일 후 주유는 군영의 여러 곳을 보여주며 장간에게 "옛 위인들이 날 설득하려고 해도 난 거절했을 텐데, 왜 자네 같은 애송이가 남들을 설득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까?"라고 말한다. 장간은 단지 웃을 뿐,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돌아와서 주유의 아량과 고상함을 칭찬하고 말로써 주유를 이간시키는 것을 그만 두었다.

적벽에서 대치 중이었던 조조군은 과연 질병에 걸렸고 첫 교전에서 패하여 장강 북쪽으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주유의 부장 황개가 화계를 제안한다.
지금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기 때문에 오랜 시간 싸우는 것은 불리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조조군의 배는 앞뒤가 서로 이어져 있으므로 불을 질러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유는 몽충과 투함 수십 척에 풀을 가득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부어 휘장을 씌우고, 위에 깃발을 세워 위장시켰다. 그리고 먼저 편지를 써서 조조에게 황개가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알렸다.

황개는 항복하는 척하면서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그때 마침 동남풍이 매우 사나워 해안 위의 진까지 불길이 번졌다. 순식 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 퍼졌고, 불에 타 죽거나 익사한 병사와 말의 수는 셀 수 없었다. 유비는 주유와 힘을 합쳐 추격하여 조조군을 대파하고 그 주선을 불태웠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북쪽으로 달아났다.

《강표전》에 따르면 주유가 위군을 격파했을 때, 조조는 "나는 도주를 수치로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후에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적벽에서의 패배는, 정확히 질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배를 불태우고 스스로 철수했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주유에게는 그와 같은 위명을 주게 되어 버렸어.
주유의 위신이 높았기 때문에 조조는 그를 폄하한 것이다.

2.4. 남군 공방전

주유와 정보는 남군(강릉)으로 진격하여 조인군과 대치하고 유비군도 참여한다.

<주유전>에 주석으로 달린 《오서》에 따르면 유비가 주유에게 말했다.
만약 장익덕이 천 명을 거느리며 경을 따르고, 경이 2천 명을 나눠 나에게 추가해줘, 서로 도우며 하수로부터 들어가서 조인의 후미를 끊으면, 조인은 내가 들어간 것을 듣고 필시 달아날 것이오.
주유가 2천 명을 그에게 더해줬다.

장비가 공격에 참여하여 조인의 후미를 끊으러 간다. 이후 유비와 주유는 같이 강릉을 포위하고 <이통전>에 따르면 관우 역시 북쪽 길을 끊었다.

도중 감녕이 적군에게 포위당하자 주유는 여몽의 계책을 사용하여 능통은 본진을 지키고 여몽과 주유는 감녕을 구출한다. 주유와 조인은 결전을 치를 날을 정하고 정면대결을 벌이나 주유는 직접 말을 타고 지휘하던 중 날아오는 화살에 오른쪽 겨드랑이에 부상을 입는다. 주유가 부상이 심해 누워있다는 소식을 들은 조인은 주유군을 공격하지만, 주유가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맞서자 패한다. 주유는 1년간의 공방과 유비와의 연합 끝에 조인을 무찌르고 남군을 얻는다.

손권은 주유를 편장군과 남군태수로 삼았다. <선주전>에 주석으로 달린 《강표전》에 따르면 주유는 남군의 남쪽 땅을 쪼개 유비와의 동맹 강화를 위해 유비에게 준다. 조조군에 복종했던 유표의 관원, 병사 중 다수가 배반하고 유비에게 와서 투항했다. 유비는 주유가 나누어 준 땅이 부족하다고 여겨 다시 손권에게서 형주의 4군을 빌렸다.

이후 유비가 또 다시 땅을 빌리러 손권에게 온다. <방통전>에 주석으로 달린 《강표전》에 따르면 제갈량은 주유의 계책을 우려하여 유비에게 가면 안 된다고 간언했으나 유비는 손권의 도움에 의지하는 게 급하니 어쩔 수 없이 손권에게 간다. 유비가 또 땅을 빌리려하니 주유는 유비에게 또 땅을 빌려줬다간 뒷통수를 맞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비는 용맹하여 영웅다운 자태를 갖고 있으며, 관우장비처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오랫동안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주유는 손권에게 유비를 잡아두자는 계책을 제안한다. <여범전>에 따르면 여범 또한 유비를 오랫동안 머무르게 할 것을 은밀히 요청했다.
제 생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유비를 오군으로 불러놓고, 그를 위해 궁전을 성대하게 짓고 미녀와 진귀한 완구를 많이 주어서 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6]
이 주유의 계책은 결국 손권이 북방의 조조를 견제해야 하며 유비는 잡아둘 수 있을 만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실천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손권이 주유의 계책을 거절한 것은 주유를 내부의 경쟁자로 여겨서라는 주장도 있다. 형주 공방전 문서에서 애초에 오나라가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다는 건 철저히 오나라가 자기들 유리하게 언급한 내용이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단락을 보면 손권은 형주 공격 무렵에 어째 주유를 견제하는 것 같은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적벽대전 이후의 주유는 능력, 경력, 지위를 모두 갖춘 젊은 지휘관이자 강동을 구한 수호신이고, 조조의 남진 당시 군주인 손권도 찍어누르지 못한 주화파 인사들을 주유가 단숨에 찍어누르며 주전 여론을 대세로 만들었던 적이 있어서 손권이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물론 여기에 대한 반론 내용도 있으니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로 보자.

삼국지집해》에 나오는 여러 학자들의 주에 따르면 노숙이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자고 손권에게 권하자 주유가 유비는 효웅이니 마땅히 토지로써 기초를 삼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손권은 결국 주유가 죽은 다음 노숙의 말을 따르고 유비에게 형주(남군 강릉)를 빌려준다.

《강표전》에 따르면 유비가 되돌아갈 때, 손권은 화려한 배에서, 장소, 진송, 노숙 등 약 10명과 함께 연회를 열어 유비를 배웅했다. 나머지는 자리를 뜬 뒤, 손권만 남아 유비와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서 유비가 주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공근의 문무주략은 만인의 영걸이라, 그 기량이 광대함을 돌아보면 오랫동안 남의 신하로 있지 않을까가 두려울 뿐이오.
유비는 손권에게 주유에 대한 의혹을 심으려고 한 셈이다. 주유가 유비를 견제하는 걸 뻔히 아는 상태인데 유비라고 주유에 대해서 곱게 말해줄 이유는 없다.

이후 유비는 과거 주유 휘하에 있었던 방통에게 그때 진짜 주유가 자신을 묶어두려 했다는 대답을 듣자 안도하며 말한다.
하마터면 주유의 손을 벗어나지 못할 뻔 했구려! 천하의 지모 있는 선비들은 그 소견이 대체로 같소이다. 그때 공명이 내가 가면 안 된다고 간언하며 그 뜻이 홀로 독실했으니 또한 이 일을 우려한 것이었소.

2.5. 죽음

마침 장로유장익주를 약탈하자 주유는 손권에게 지금이 촉을 얻을 때라고 청하고 손권의 승낙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주유의 천하이분지계.
저는 분위장군(손유)과 함께 촉을 취하러 나가기를 원합니다. 촉을 얻고 장로를 병합한 후에 분위장군을 남겨 그 땅을 단단히 지키도록 한다면, 마초와 동맹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와 장군과 함께 양양을 점거하여 조조를 추격한다면, 북방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때 주유가 제시한 이유를 보면 정말로 천하통일을 꿈꾸었던 듯하다. 서천 점령 후 한중장로를 병합하고 마초와 동맹을 맺은 후에 우선 양양을 치기로 한 모양이다. 강릉으로 돌아온 주유는 다시 병마를 조련하며 서천 정벌을 준비했으나, 병에 걸려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행장을 꾸려 강릉을 출발했지만 결국 파구에서 죽었다.

그리고 당연히 삼국지연의와 달리 제갈량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한 화병으로 죽은 게 아니다. 실제 유언도 "하늘은 왜 주유를 낳고 제갈량을 또 낳았는가"가 아니다. 죽음의 원인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유언은 다음과 같다.
길고 짧은 것이 인생이니 진실로 애석해할 거리도 못 됩니다. 다만 제 작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주군의 명을 다시는 받지 못함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노숙을 추천하는 말을 이어간다.
현재 조조와 적이고 유비는 가까이 공안에 있으며 변방 지역과 가까이 있고 백성들은 아직 귀의하지 않았으니, 응당 훌륭한 장수를 얻어서 진무시켜야만 합니다. 노숙은 지혜와 지략이 있어 이 일을 맡기에 충분하니 저를 대신하도록 해주십시오. 제가 죽은 그 당일이라도 해도 걱정할 일 따위는 없을 것입니다.
노숙전에 주석으로 달린 강표전에 따르면 병을 앓고 있던 때의 주유의 편지에서 유비를 조심하라고 하는 듯한 뉘앙스가 있다.
지금 조공(조조)이 북방에 있어 국경 지대는 소란하고, 더불어 유비를 (형주에) 머물게 하여 마치 범을 기르는 형세와 같으니, 천하의 일은 아직 어찌 결착이 날지 알 수 없습니다. 이야말로 지존의 근심을 풀어 드릴 날이 아닐까 합니다. 노숙은 충렬한 자로, 직무에 임해서는 일을 확실히 처리하니, 주유의 후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주유의 사망 당시 나이가 35세로, 오나라의 요절징크스의 도독 첫 주자가 되고 말았다. 단금지교[7]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교분을 자랑한 손책과 함께 스타트를 끊은 셈인데, 손책은 암살 시도로 인해 화살로 상처를 입고 치료를 거부하여 죽었고 주유도 남군공방전 당시 치명상을 입혔던 화살 부상이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니 둘 다 무기로 인한 부상 후유증으로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오나라의 기후, 병균 같은 문제들로 인해 발생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듯.[8] 손권은 소복을 입고 크게 슬퍼했고 주유의 영구가 오나라로 돌아오자 무호로 가서 맞이했다. 후에 고인이 된 장군 주유와 정보의 집안 손님들에겐 부세와 요역을 지지 않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주유가 이른 나이에 죽자 손권은 눈물을 흘리며 "공근은 왕자(王者)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홀연히 생명이 다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면 좋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후에 손권이 황제가 되자 "주공근이 없었다면, 나는 제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유의 죽음은 동오에 치명적인 손실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손권을 비롯, 동오의 인사들 사이에는 대대적인 확장이나 접전을 꺼리는, 소위 말하는 안전주의적 근성이 팽배했다. 주유가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뻗어나가는 팽창주의적 정책을 지지하던 보루였는데, 덜컥 죽어버리니 안 그래도 소극적이던 성향의 동오는 더더욱 얼어붙는다. 이후 천하이분지계를 포기하고 위와 촉 사이에서 적당히 간만 보며 편을 지속적으로 바꾼 것도 이러한 탓이 큰 셈.

장지는 고향인 합비성 인근 여강에 모셔졌다.[9]

3. 삼국지연의

「旣生瑜, 何生亮(기생유 하생량)」
하늘은 이미 주유를 낳았는데, 어찌하여 또 제갈량을 낳았단 말인가!
57회에서 주유가 탄식하며 남긴 말.
丈夫處世兮立功名(장부처세혜립공명)
대장부 세상을 사는 것은 공명을 세우기 위함이요
立功名兮慰平生(입공명혜위평생)
공명을 세우는 것은 평생의 위로가 되리.
慰平生兮吾將醉(위평생혜오장취)
평생의 위로가 되면 내 장차 취하리로다.
吾將醉兮發狂吟(오장취혜발광음)
내 장차 취하여 미친 듯 노래 부르리.
장부가(丈夫歌)[10]

여기에서는 미(美) 자가 더 붙어 미주랑(美周郞), 즉 잘생긴 주랑이라고 불린다.

연의에서 손책이 유언으로 "안의 일은 장소에게 묻고, 밖의 일은 주유에게 물으라."고 했는데 정사에서 무열황후동습한테 물으니 동습이 안은 장소에게 맡기고 밖은 자신에게 맡기라고 한 말을 바꾼 것이다.

정사에서 주유는 바로 항전을 주장했지만, 연의에서는 주유가 일단 화전론과 부전론 양측의 얘기를 들어보며 결정을 보류하다가[11] 노숙의 소개로 제갈량을 만난다. 이때 제갈량의 속셈을 알아내고자 전쟁을 주장한 노숙과 달리 항복을 주장하자 반대하는 노숙을 제갈량이 "여포, 원소, 원술, 유표가 조조에게 맞섰다가 모두 망해버린 지금 이 천하에 조조를 당해낼 수 있는 인물이 없는데 당신(노숙)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며 비웃는다. 이에 노숙이 크게 격분하자 제갈량이 알았어, 알았어 하듯이 단 두 여인만 바치면 조조는 제 발로 물러갈 것이라며 동작대의 완공을 기념한 시인 동작대부의 내용을 바꿔 조조가 이교 자매를 원한다[12] 말해 주유를 격동시키는 바람에 감정에 휘말려 항전을 결심한다. 이후 모든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손권에게 나아가 항전에 대해 결정을 촉구함으로써 조조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적벽대전에 처음으로 군사들을 지휘하러 나갔는데, 대부분의 장수가 이에 묵묵히 응했지만 손견 때부터 손가의 가신으로 살아왔고 무장들 중엔 최고참인 정보는 자신이 아닌 주유가 총지휘권을 갖게된 것에 불만을 품어 병을 핑계로 아들 정자를 내보냈다. 주유도 정보가 꾀병을 부린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며 "몸이 불편하신 것은 참으로 안 된 일이지만 자신을 대신하여 장자(長子)를 보냈으니 과연 충신이라 할만하다. 가까운 시일 내에 문병을 가겠다."며 오히려 칭찬하고 정보의 자리에 정자를 서게 한 다음 훈련을 시작했다. 아들로부터 주유의 일처리와 언행을 들은 정보는 다음 날 주유에게 나아가 잘못을 빌었고, 주유도 용서했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추가되었다. 덧붙여 정사에서 주유와 정보는 공동 도독이었지만 연의에서는 주유가 대도독, 정보가 부도독으로 정보의 직급을 낮췄다. 정작 이후 적벽대전 장면에서는 정보보다 황개가 더욱 부각되지만.

이후 유비군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제갈량과 협동전선을 펴는데, 최고의 지휘관이었던 정사와 달리 연의는 유비 세력 측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제갈량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역으로 설정되었다. 그 결과 지휘관보다는 지략가의 면모가 더 부각되었고, 시종일관 유비측을 방해하려는 악역으로 나온다. 주유가 유비를 붙잡아두려고 했던 걸 제갈량이 간파한 적이 있었을 뿐 그 외엔 만난 적이 거의 없는데, 이를 부풀려서 둘을 대립관계로 만든 것.

정사에서 손권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했던 "조조의 100만 대군은 거짓말"이란 격려는 제갈량의 권유에 의해 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여기서부터 자신보다 제갈량이 손권의 속을 잘 꿰뚫는 데에 부담감을 느낀 주유의 제갈량 암살작전이 시작된다. 다만 처음에는 노숙의 반대 섞인 권유도 있고 그 개새끼는 우리 개새끼 논리에 따라 제갈근을 이용해 포섭하려 했지만, 제갈량이 미리 간파하고 역으로 제갈근을 포섭하려 했기에 실패한다. 제갈근이 주유에게 돌아와 실패했다고 보고하면서도 '걔한테는 걔의 주군이 있고 나한테는 나의 주군이 있다'고 명답을 내놓아 충성심을 표현하자, 주유는 형이 그러니 동생도 알 만하다며 맞장구를 치지만 역시 제갈량을 죽이기로 한다.

이에 제갈량에게 '조조의 군량고를 습격해 달라'고 해놓고선 적은 군사를 주어 사지로 몰아넣는 함정을 파지만, 그걸 걱정해서 찾아온 노숙에게 제갈량이 '님은 육상전밖에 모르고 주유는 수상전밖에 모르지만 난 수상전 육상전 올라운더라 문제 없음'이라고 도발하자 여기에 넘어가 자신이 직접 조조군의 군량을 털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그것까지도 내다본 제갈량이 '아서라, 조조가 평생 잘하는 게 군량털기인데 방비가 없겠냐, 괜히 나섰다가 군사만 잃을라' 라고 충고하자 엄청나게 빡친다. 아무것도 모른 채 둘 사이를 오가며 하수임을 인증한 노숙은 덤.

주유는 제갈량에서 유비로 목표를 바꾸고, 정사에도 나왔듯이 회의를 하자며 유비를 초청한다.[13] 주유가 제갈량과 제법 친한 노숙까지 따돌린 상황이라 제갈량은 뒤늦게 함정이라는 걸 알아챘지만, 유비의 호위를 맡은 인물이 다행스럽게도 관우였기 때문에 주유는 암살을 포기하고[14] 관우가 낌새를 채고 유비에게 나가자고 할 때도 황망히 보내준다. 그리고 이 분노를 애꿎은 조조군의 사자의 목을 베고 채훈이 이끄는 조조군 측 수군을 박살내서 화풀이한다(...).

이에 조조는 동오에 가까운 형주 출신이라 경험이 제법 있는 채모장윤을 불러 수군을 본격적으로 육성하고, 이를 알게 된 주유는 친구라는 핑계를 대고 자신을 설득하러 온 장간을 이용해 원격으로 채모와 장윤을 베어버린다(자세한 내막은 장간 참고), 덧붙여 위의 "장부가"는 장간을 속이기 위해 벌인 술잔치에서 검무를 추며 부르는 노래다. 하지만 이것마저 제갈량이 눈치채자 주유는 단단히 화가 나서는, 그 유명한 "10일 안에 화살 10만 개 만들기"를 요구한다. 물론 다들 알다시피 제갈량은 이를 멋지게 해내고(자세한 내막은 제갈량 참고)[15], 결국 주유는 그제서야 진심으로 제갈량과 합동전선을 펴게 된다. 때마침 장간에 이어 채중채화가 간첩으로 왔지만 주유는 이에 속아넘어간 척 하면서 감녕에게 감시를 맡기고, 제갈량도 알고는 있었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간첩이 있는 상황인 만큼 노숙에게만 이야기하는 식으로 주유의 입장을 배려했다.

한편 원래 정사에서는 황개가 화공과 사향계를 먼저 제안했고 주유는 그것이 옳다고 여겨서 받아들였다. 그러나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자신을 계속 죽이려다 포기한 주유의 심경을 배려해 각자 손바닥에 속마음을 적고 맞춰보니 둘 다 火를 써서 같은 생각을 했더라는 식으로 각색되었다. 두 세력의 동맹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로 보인다. 대신 황개는 주유가 화공에 대해 비밀에 붙여서 몰랐기에 나중에 찾아가서 나름대로 생각했다며 제안하고, 이후 주유의 자세한 계략인 연환계의 일환으로 조조에게 항복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고육지계를 자청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음 날 주유가 장기전을 방침으로 명령을 내리자 이에 황개가 정면으로 항명하고, 사전에 모의한 대로 험한 말이 오고가고 주위에서 만류하다가 결국 황개가 곤장 50대를 맞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때 감녕은 연환계인 것을 모르고 황개가 경력으로나 연령으로나 원로라며 옹호하다가 같이 맞았다. 감녕은 이를 간파하고 있었고 역시 꿰둟어본 감택이 감녕에게 억울하지 않느냐 묻자 그저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그 순간 채중과 채화가 들어오자 노발대발하고 이를 갈며 주유를 원망하는 연기를 하였는데 이에 채중과 채화가 넘어가서 자신들이 간첩인 걸 드러내게 된다. 자세한 것은 감녕감택 문서 참고. 한편 제갈량은 이번에도 전부 알고 있었지만, 주유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주유 대신 온 노숙에게 연환계임을 설명해주고는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입단속을 시킨다. 이에 노숙이 주유에게 가서 "공명 역시 공(주유)께서 과하게 행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고 "제갈량도 모르는 계책이라면 반드시 성공하겠구나!" 하고 주유가 좋아하자 노숙이 안쓰럽다는 듯 말없이 쳐다보는 장면이 있다. 개그성 장면이긴 하나 본의 아니게 캐릭터가 폄하되었다.

이후 주유와 황개의 연환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감택이 자청하여 조조에게 황개의 편지를 전달하고, 조조가 이를 믿지 못하자 장간이 다시 나선다. 그러자 주유는 다시금 본인이 직접 나서서 장간에게 "네가 우리 기밀을 빼돌려서 일이 다 어그러졌으니 책임져!"라며 짐짓 분노한 척 외딴 곳에 감금하고, 이후 방통에게 장간이 탈출하는 길목에 대기했다가 우연을 가장해 만나 조조에게 투항하도록 부탁한다. 그 전에 감택이 황개와 감녕을 만나 셋이서 거짓 투항 이야기를 꺼내 채중과 채화를 속였기에, 조조는 얼씨구나 하고 배를 연결하여 연환계가 완성된다.[16]

이렇게 서로 만반의 준비를 하던 중에도 국지전이 벌어졌는데, 이때 주유는 다 좋은데 바람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동시에 부러진 깃대에 맞아 몸져눕는다. 이에 제갈량은 문병을 가서 그 문제를 확실히 짚고, 주유는 서로 간의 악감정보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17] 그의 계책을 받아들여 동남풍을 빌기 위한 제단을 만들고 그의 신호에 맞춰 군사를 내기로 한다. 이후 정말로 제갈량의 계책에 의해[18] 동남풍이 불자 조조군을 공격하라고 하면서도 별도로 서성과 정봉을 보내 제갈량을 죽이라고 한다. 하지만 제갈량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앞서 유비가 주유의 초청을 받아 왔을 때 부탁을 해두었고, 무사히 동오에서 몸을 빼내 도망간다.

이후 적벽대전이 마무리되고 본격적으로 삼국시대가 열리기 전에 형주를 정복할 때, 정사에선 주유군과 유비군이 협력하여 강릉을 점령하고 주유가 유비군에게 땅을 빌려줬다. 하지만 연의에서는 주유가 조조와 치고받아 대군을 박살내 놓자, 제갈량이 또 주유의 성깔을 이용해 주유와 형주 군대를 기진맥진하게 만들고[19] 그 틈을 타 남군과 형주, 양양을 꿀꺽[20]하는 것으로 바뀐다. 결국 주유는 군사는 군사대로 낭비하고 소득은 하나도 없는 원통함을 견디지 못하다가 조인과의 대결에서 입었던 부상이 악화되어 금창이 터진다.

이후 시간이 흘러 감부인이 사망하여 유비가 홀아비가 되자, 형주를 돌려받을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유비와 손부인의 혼담을 주선하고 손권도 이에 응한다. 하지만 제갈량이 3단계에 걸쳐 원대한 대비책(교공, 오국태, 손부인 등 참고)을 마련해 뒀기에 군사만 잃고 손부인도 형주도 잃게 되어[21] 2차로 금창이 터진다.

주유의 천하이분지계는 연의에선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서천 공략의 계획조차 형주를 먹으려는 가도멸괵의 계책으로 각색되었고, 그마저도 제갈량이 "얘가 이렇게 뻔한 계책이나 내놓는 걸 보니 드디어 죽을 때가 되었나보다."라며 비웃고 역관광을 해버리는 바람에 간신히 아물어가던 금창이 3차로 터져 피를 토하고 쓰러진 이후 사경을 헤매게 된다. 결국 죽기 전에 손권에게 글을 올려 노숙을 후임자로 추천한 후, 그 유명한 기생유 하생량이란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망한다.

4. 평가

흔히 "주유가 오래 살았으면 삼국지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이야기가 오랫동안 회자되는데, 딱히 빈말은 아니다. 주유가 살아서 서촉 공략이 실현됐거나, 노숙이 오래 살아서 오와 촉의 동맹이 지속됐다면 확실히 역사가 달라졌을 것은 자명하다.

특히 주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조의 자랑거리인 조인을 쳐부순 바 있다.[22] 완벽하게 위나라를 공략하는 데 성공한 몇 안 되는 전쟁이다. 또한, 적벽대전에서 위의 대군이 전멸하지 않은 상태였고, 남군 군세를 총괄하는 인물은 명장[23] 조인이었다.[24] 그 조인으로 하여금, 삼국시대 최대 요충지 중 하나인 강릉성을 버리게 만든 인물이 바로 주유다.[25]

또한, 손권이 막장으로 빠지는 것을 제어했을 수도 있다. 흔히 주유 하면 손책과의 관계를 떠올리기 쉬운데, 주유는 손책뿐만 아니라 손책의 아우인 손권과도 사이가 좋았다. 손권은 주유를 친형님으로서 예우를 갖춰 대했으며 무열왕후 오씨도 주유를 친형으로 섬겨라했다. 그리고 손책이 죽고 손권이 승계자가 되자 주유는 손권을 지원했다.

주유가 장수했다면 서촉 정벌 계책이 실행되어, 유비의 촉 정복이 꽤 힘들어졌을 것이다. 유비는 형주를 기반으로 촉 정복에 나섰는데 주유가 살아있었다면 이것에 제약이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26]

주유의 통솔력을 오나라 대도독들 중 역대 최고로 놓는 경우가 많고, 어쨌든 천하이분지계라는 원대한 전략을 세울 정도의 안목도 있었다. 그리고 적벽에서의 활약상 등은 주유의 용병술을 분명히 보여주는 부분들이며, 주변 인물들을 다루는 인간적인 매력이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것도 주유의 강점 중 하나다. 적어도 당대 최고 지휘관 중 하나인 조조와 맞상대했다는 점에서 그의 군재는 의심할 나위가 없다. 손권도 "주유가 없었다면 나는 제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4.1. 연의의 희생자

연의에서의 주유는 여러모로 평가를 깎아먹은 게 사실이다. 외모도 띄워주고 전체적으로 지략면에서는 버프를 받은 부분도 있지만, 그렇게 버프를 받은 부분조차도 '이렇게 뛰어난 주유의 머리 위에 서 있는 공명'을 위한 밑밥이다. 이교 드립이나 군량털이 작전 등 제갈량을 시험하거나 함정에 빠뜨리려고 계책을 내 놓고 정작 자기가 말 몇 마디에 발끈해 대는 걸 보면 단무지가 따로 없어서 계략을 짤 때와의 괴리감이 매우 심하다. 그리고 이렇게 식견이 좁아지는 이유도 공명에 대한 두려움과 질투감으로 보여질 여지가 역력하다보니 연의만 읽은 이들에게 주유의 이미지는 뛰어나지만 제갈량 손바닥 위에서 노는 열폭가 정도다.

애초에 후대인 현재는 제갈량이 손에 꼽는 명재상 중 한 명으로 꼽히지만, 정사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당시의 주유는 제갈량에겐 관심 가질 이유조차 없을만큼 제갈량과 위상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주유는 (위나라 입장에서 보면 그게 그거였겠지만) 어찌 됐건 당시까지만 해도 유비군과는 비교가 안 될 큰 세력의 구축을 공신으로서 물심양면 도운것도 모자라 선대 군주인 손책의 둘도 없는 친구이기까지 하여 세력 내에서 군주 손권 다음가는 위상이었고, 군주인 손권마저 그런 위상임에도 자신을 지지하며 본인이 손책의 뒤를 잇는 것을 신하들 사이의 잡음없이 무탈하게 이루어지도록 도움을 준 주유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던데다 거기에 더해 어머니인 무열황후의 명을 따라 형님으로까지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오나라에 있어 절대적인 존재임에 더 해 상징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여기에다 깎아내려진 연의와는 달리 인격적으로도 오히려 강릉 땅을 유비군에게 내어주는 것을 노숙과 함께 주도할 정도로 대인배였으며, 지휘관으로서도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안목이 탁월한 매우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이렇게 남 부러울 것 하나 없던 주유가 이제야 난세에 갓 뛰어든, 제대로 된 근거지 하나 없는 세력의 군사 역할을 하고 있었던, 주유 본인과는 급이 다른 제갈량을 시기하거나 질투하긴 커녕 신경 쓸 필요 자체가 없었다. 차라리 유비를 견제했다면 모를까.

그런데 제갈량을 띄워주기 위해 위에 적혀있는 일화들처럼 뜬금없이 제갈량을 질투하고 시기해 공공의 적인 조위를 토벌하는 것마저 뒤로 미뤄둔 채 끊임없이 제갈량을 견제하면서도 매번 당하기만 하다 끝내 기생유 하생량 같은 말이나 내뱉고 분사하는 사람으로 묘사해 놓았으니 주유는 연의의 피해자 중의 피해자인 셈.

4.2. 과대평가설

주유가 연의에서의 주유가 너무 인격적으로 격하되고 비하된 것은 맞지만, 그에 대한 반동으로 주유를 너무 대(大)지략가로 띄워주려는 평가도 다소 있는데, 이를 경계하려는 의견도 있다.

4.2.1. 용병가에 불과하다?

정사에서의 주유는 적벽 이전까지 각지의 토벌에 종사했다. 여기서는 딱히 지략을 썼다기보단 견실하게 군 운용을 한 케이스이며 적벽대전에서 보여준 면모 역시 큰 틀에선 변함없다.

하지만 연의에서 주유를 무작정 대지략가로 띄워줬다고 보긴 힘들고 흥미진진한 재미를 배가시키기 위한 문학적 과장으로 봐야 할 듯 싶다. 군을 견실히 운용하는 것이야말로 군권을 총괄하는 총사령관으로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이는 주유뿐만 아니라 동시대 일류 사령관인 '조조 & 유비 & 제갈량 & 사마의 & 육손' 등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런 식의 군 운용은 외부 관점에서 쉽게 티가 나지 않아서 소설적 묘사에 있어선 밋밋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적당한 각색이 소설에선 필수적이다.

이런 식의 문학적 각색 버프는 주유뿐만 아니라 제갈량 같은 인물들도 받았다. 관중과 소하에 비견되는 명재상 제갈량은 이런 정사에서의 모습이 천재 지략가로 묘사된 연의에서의 제갈량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나지만, 뛰어난 정치력 같은 면모는 문학적으로 다이나믹하게 옮기기 힘든 측면이 있다. 따라서 독자들이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쉬운 지략적인 측면에 버프를 줘서 제갈량이 뛰어난 인물이라는 걸 독자가 쉽게 인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갈량과 주유는 연의에서 변질된 부분이 거의 동일하다. 정사에서의 주유와 제갈량은 귀신 같은 '책략가'라기보다, 판을 짜는 전략과 군대를 강하게 육성하는 (혹은 국력을 키우는) 것 등에 재능을 보였다. 정사만 봤을 때 제갈량은 재상, 주유는 도독으로서 강점을 보이지만 연의에서는 둘 다 지나치게 책략가 같은 모습으로 과장됐다. 각색이 들어가는 소설에서는 책략가의 면모가 훨씬 흥미롭게 표현하기 좋다. 그리고 정사에서 제갈량과 큰 접점 없이 일찍 죽은 주유는 제갈량의 라이벌로 쓰기 좋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4.2.2. 계책을 받기만 한다?

원래 적벽의 화계는 주유가 혼자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황개의 계책을 주유가 받아들인 것이며, 연의와 달리 정사에선 유비군이 같이 적벽 전투와 남군 공방전에 참여했고, 그 병력의 수도 손권군에 비해 적지 않았으며. 또한, 남군 전투 때 주유의 용병술이 워낙 탁월해서 '유비-주유 연합군'이 강릉을 빼앗았지만, 주유전에는 주유가 직접 계책을 제시했다고 볼만한 기록이 안 보이고, 대신 '여몽 & 감녕'의 계책을 주유가 들어주는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지휘관으로서 계책의 타당성을 잘 판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가정 전투 때 왕평의 간언을 무시한 마속을 생각하면 쉽다. 혹은 원소와 그의 책사들을 보면 된다. 본인 혹은 참모들의 계책이 옳고 그른지(유효한지)를 판단하기 위해선, 결정권자인 지휘관 본인의 능력이 반드시 받쳐줘야만 한다. 따라서, '황개의 화계'가 적중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주유는 실로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 그리고 참모들이 낸 수많은 계책 중에서, 주유가 '황개의 화계'를 선택한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같은 논리로 조조 역시 수많은 명장들을 휘하에 두고서 찬반 양쪽의 의견을 듣고 그 중 하나를 명확하게 택하고 실천[27]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계책을 직접 내야지만 뛰어난 지휘관인 것인가? 참모들의 계책을 잘 판단하는 것도 지휘관으로서 굉장히 중요하다. 천하의 나폴레옹베르티에라는 명참모를 옆에 뒀다. 결론적으로, 주유는 군 최고 통솔자로서 매우 훌륭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감녕전과 여몽전에 따르면, 이릉에서 감녕이 조인에게 포위되는 상황이 나온다. 당시 감녕의 병력은 '1000~2000명 미만'이었고, 조인의 병력은 '5000~6000명'이었다. 이때 여몽은 능통을 본진에 두고, '본인 & 주유 & 정보 & 노숙' 등이 가면 조인의 포위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몽은 땔나무로 험한 길을 미리 끊어놓으면, 후에 조인군이 도주할 때 그곳을 기병들이 지나갈 수 없어서, 말들을 버리고 갈 것이라고 했다. 주유는 여몽의 계책이 옳다 생각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계책을 통해 조인군의 절반을 죽였고, 조인군의 기병들은 땔나무 때문에 말을 버리고 도주했다. 덕분에 주유는 군마 삼백필을 획득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주유가 여몽의 계책을 실행해서 이뤄낸 것이므로, 이것을 주유의 공적에 넣을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의 일반적인 통례에 따르면, 부하의 공적을 상관이 공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대부분의 의견은 '병력 차이상 감녕을 구할 수 없다'였다. 즉, '여몽의 계책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것이 중론이었던 것. 그런데 주유는 여몽의 계책이 옳다고 판단하고, 그것을 실행에 잘 옮긴 것이다. 결론적으로, 육상전에 대해서도 상당한 이해도를 갖출 정도로, 주유는 아주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이후 유비를 놀이와 사치에 빠지게 하여 꼭두각시로 삼는다는 방통의 계략을 듣고, 이를 건의했으나 손권의 거부로 무산되었으며, 오히려 제갈량이 이 계략을 간파하고 유비에게 간언함으로써 유비 측의 경계심을 사게 만들었다.

4.2.3. 천하이분지계는 상상에 불과했다?

또한, 그의 대전략인 천하이분지계 역시 어느 정도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대전략'은 큰 틀을 짜놓는 것일 뿐이다.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예로, '위앙의 변법 & 소진의 합종 & 장의의 연횡 & 범수의 원교근공 & 조무령왕의 호복기사'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대전략들은 성공했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도 빛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실패했다면, 후대 사람들이 과대망상으로 평가(폄하)했을 것들이다. 제갈량의 융중계도 국력차를 생각하면 과대망상에 불과했다는 폄하가 현대까지도 거듭 나오고 있지 않은가.

다만 유비의 경우, 유장의 초청으로 촉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인심을 베풀며 유장 측 세력을 포섭하는 사전 작업을 하고도, 촉을 점령하는 데 3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그런데 주유의 경우, 그의 군사적인 능력에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주유의 촉 공략은 유비와 달리 순수 군사력으로만 이뤄내야 했던 것이었으므로, 유비군의 행보보다 힘겨울 공산이 크다. 따라서, '유비보다 불리한 조건 + 오군의 특성상 원정 능력이 떨어짐'이라는 약점은 아무리 주유라 할지라도 극복하기 힘든 문제일 것이다.[28] 그리고 주유가 아무리 잘났다하더라도, 오군을 촉까지 끌고 가서 그 험준한 산맥을 뚫고 정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촉 세력을 완전히 흡수해야만 한다. [29] 이를 봤을 때, '군사적인 방법'으로 촉을 오의 세력으로 만들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30] 직접적인 비교는 당연히 무리지만, 후에 오 최후의 명장 육항이 3만 명을 이끌고, 나헌이 단 2천 명으로 지키는 영안을 6개월 이상 포위했지만,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따라서 이런 지적은 충분히 나올수 있는 것이다.

5. 가족 관계

의형제 손책의 존재감이 강해 묻히지만 주유의 조카 주준이 주유의 공적 덕분에 편장군에 임명된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친형제도 있었다.

아내는 미색으로 찬양받던 교공의 두 딸 강동 이교 중 동생인 소교. 하지만 손책의 아내가 된 언니 대교와 마찬가지로 정실이 아닌 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손책은 대교와 결혼하기 전부터 자식이 있었고, 두 명 다 죽은 후 남편과 합장되지 못했다. 주유의 자식들이 소교의 자식인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자식들도 아버지처럼 박복한 면이 있는데, 장남 주순은 주유의 풍모가 있었고 손권의 딸인 손노반과 결혼했으나 수명까지 아버지를 닮아 요절. 차남 주윤은 죄를 지어 평민으로 떨어질 뻔까지 했으나 아버지의 공덕으로 겨우 유배형에 그쳤다. 딸 주씨는 225년에 손권의 장남 손등에게 시집 갔으나 손등이 요절하면서 과부가 된다.

원말명초대의 후손으로 주서란 사람이 있는데 나관중의 먼 친척이자 고향 친구였고 같이 과거를 봤는데 주서만 붙고 나관중은 떨어졌다. 그래서 주서에 대한 열등감으로 연의에서 주유를 폄하한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현대 인물 중에선 영화 배우 주윤발이 주유의 후손이다. 아이러니하게 주윤발은 주유의 주적이던 조조를 연기한 적이 있다.

6. 예술인으로서

주유는 삼국시절 남쪽 지역을 대표하는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그런만큼 다재다능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예술적 소양이 뛰어났는데, 시와 문장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특히 음악에 관하여 그를 따를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가 중요한 회합에 갈 때마다 악사들을 대동했고, 음악을 몹시도 즐겼다고 한다. 본인도 금, 피리, 생황 등 악기연주에 능하여, 음률에 매우 밝았다. 불같은 군 사령관으로서의 모습을 많이 보인 것과 달리, 평소의 그는 의젓하고 친절한 성품의 호남으로 상대에게 좀처럼 화를 내거나, 면박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고곡주랑의 고사도 그의 예술적 소양과 더불어 성품이 잘 드러나는 부분인데, 음악을 연주하던 악사들이 박자가 틀리게 되면 틀렸다고 나무라지 않고, 웃으며 쳐다보았다고 한다. 그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어서 여성 악사들은 주유에게 연주를 하게 되면 일부러 박자를 틀리게 연주하여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고 한다. 이단(李端)이라는 당나라 때 시인이 남긴 청쟁(聽箏)이라는 시에서도 주유가 돌아보게 하려 했던 여인들이 심경이 잘 나와 있다.
鳴箏金粟柱(명쟁금속주),

素手玉房前(소수옥방전)。

欲得周郎顧(욕득주랑고),

時時誤拂弦(시시오불현)。
금속주(金粟柱) 위에서 쟁(箏)을 퉁기는

옥방(玉房) 앞의 하얀 손

주랑(周郎)이 돌아보게 하려고

때때로 줄을 잘못 퉁기네

7. 기타

삼국지 대표 미남. 주유 외에도 외모가 좋았다 기록된 삼국지 인물은 꽤 있지만, 연의의 미주랑 일화를 기반으로 한 이미지 덕에 실제로 미남이라 기록이 남은 삼국지 인물 중에는 제일 유명하다. 재미있게도 위, 촉, 오 창립자들의 오른팔이자 세력의 대표 인재들인 순욱, 제갈량, 주유 모두 정사에 기록된 미남이다.[31][32] 아무튼 연의나 정사나 잘생겼다고 인증해서인지 삼국지 매체에서도 대부분 미남으로 묘사된다.

조조와 더불어 사서에서 관우와 장비를 부하로 삼고 싶다는 뜻을 직접 내비친 인물이다. 조조의 관우에 대한 집착이야 잘 알려졌고, 장비는 중랑장 벼슬로 포섭 시도를 했다는 것도 나와있다. 주유 같은 경우는 극진히 대우를 했다거나 하는 건 없지만 천하이분에 대해 논할 때 유비를 무력화시키고 관우와 장비를 부리면 크게 전력이 될 거라고 하거나 남군 공방전 때는 아예 자기 휘하 병력 2천을 따로 나눠주고 유비로부터 장비를 단기 알바로 써먹은 기록이 나와있다.

연의에서 나오는 주유의 유언이라고 볼 수 있는 “하늘은 왜 주유를 낳고 또 제갈량을 낳으셨는가” 라는 발언은 현대에도 패러디되어 각종 드립의 소재로 쓰인다. 본래 의미인 1인자 vs 그 1인자와 라이벌 격인 2인자의 구도에서도 많이 쓰이지만, 심지어는 별볼일 없는 대상(가칭 A)을 두고 “왜 하늘은 A를 낳고 B,C,D,E….Z를 낳으셨는가” 와 같은 식으로 경쟁에서 밀려난 A를 조롱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 이런 글에는 '하늘 다산왕이네', '많이도 낳았네'식의 댓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예시

8.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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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후이성 허페이시 루장현[2] 보통 손권 일가가 살던 곳이 조언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여강군이나 구강군에 그런 지명은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 조언(造焉)은 배방(拜訪), 즉 '예를 갖춰 방문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진서》 49권 완적(阮籍)에 관한 열전에서도 조언이라는 말은 방문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3] 사서상 외모가 아름답다고 묘사되는 쪽은 손책이었는데 손책은 강동을 평정한 호쾌한 상남자 이미지에 가려진 화려한 외모만큼이나 관심을 즐기는 연예인 기질과 병적인 자기애가 강하고 변덕스러웠다.[4] 조정이 임명한 정식 단양태수는 원술에게 쫓겨난 주흔이었고, 주상을 단양태수로 임명한 주체로 보이는 원술이 다시 원윤을 단양태수로 임명해 주상을 대신하게 하자 주상은 단양에 돌아온 주유와 함께 원술이 있는 수춘으로 순순히 복귀했으니 주상이 정식 단양태수였다거나 원술의 눈치를 보다 훗날 단양군을 들고 손책에게 붙었다는 해석은 창작이 아니라면 오독이며 이후 주상의 행적은 전하지 않지만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이 시점까지 주상의 행보는 명백히 원술파에 속한 사람이었고 이러한 주상의 행보에는 일찍이 공족 자제들과 무리지어 어울리기를 좋아하던 원술과의 교분이 배경이 되었을 수 있다.[5] 유비가 아무것도 안 하다 복병 배치하고는 죽이지도 못하는 연의와는 달리 실제로는 적벽대전에 참전하였으며 군사를 2만 명이나 데리고 왔다. 그런데 형주에서 도망다니며 2만 명 힘들게 데리고 왔는데 훨씬 큰 오나라에서 3만 명밖에 동원이 안 된다 하니 실망할 수밖에 없다.[6] 이해하기 쉽게 풀이하면 유비를 방구석 니트족으로 만들어 오나라 감시하에 지내게 하고, 관우와 장비는 딴 맘 품지 못하게 서로 떨어뜨려 놓은 뒤에 내(주유)가 써먹으면 천하통일 할 수 있다는 이야기. 참고로 주유가 유비를 연의에서처럼 기를 쓰고 죽이자는 것이 아니라 잉여인간으로 만들자고 건의하는데, 이는 유비를 죽였다가는 관우와 장비를 자기 수하로 거둘 가능성 자체가 막힌다는 걸 자각함과 동시에 당대에 유관장의 의리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이임이 잘 알려져있다는 증거다.[7] 쇠도 끊어낼 정도의 교분이라는 뜻으로 그만큼 교분의 두터움을 이르는 말이다. 참고로 《정사 삼국지》에서 단금이 언급되는게 두 번 있는데 하나는 《강표전》에 나오는 손책과 주유의 관계고 다른 하나는 배송지가 평가한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이다.[8] 손견은 전장에서 바로 전사했기 때문에 자연사 요절 징크스와는 거리가 있다.[9] 지금의 안후이성 허페이시 루장현 여성진 신광사구[10] 원문은 모종강본 버전이고, 나관중 버전은 원문이 다르다. 뒷날 안중근 의사가 지은 '장부가'라는 제목의 시의 시작 부분도 연의의 장부가와 똑같다. 단 안중근의 장부가는 '대장부가 세상에 처하니 그 뜻이 크도다.'로 시작한다.[11] 문관들과 무관들이 제각각 몰려와 주유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편들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하기야 동오 최고의 용병술사이자 손책의 유언을 이어받은 중신이라 발언권이 강할 테니 이렇게 찾아오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12] 원래는 '두 다리(二橋)를 동쪽과 남쪽으로 이어두고'였는데 교씨(喬)와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하여 '두 교씨(二喬)를 동남에서 데려와서'로 바꾸었다. 그것도 모자라 원문에도 없는 '아침저녁으로 함께 즐겨 보리라'라는 말까지 넣었다.[13] 다만 정사에서 이 회의가 함정이라는 언급은 없다.[14] 술잔을 던져서 기습 신호를 보내려 했으나, 칼집에 손을 얹고 자신을 노려보는 장수가 안량, 문추를 베었다는 관우임을 유비에게서 듣자 식겁하여 포기한다. 부하들이 왜 잔을 던지지 않았냐고 묻자 '관우가 버티고 있는데 내가 뭘 어쩌냐, 내가 손을 썼으면 유비가 죽기 전에 내가 먼저 죽었을 거다.' 라며 격분했다.[15] 간단히 요약하면 10일 째 되던 날이 안개가 낀 날이었는데 배 몇 척을 이끌고가 조조군의 화살 세례를 받아 화살 10만 개를 얻어냈다. 큰 소리로 '승상 화살 잘 쓸게 ㅎㅎ.'라고 말한 건 덤. 정사 유수구전투 당시 손권이 조조군 앞에서 화살을 맞아 기울어진 배를 돌려서 무게중심을 맞춘 부분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16] 다만 항복과는 별개로 연환계는 충분히 해볼만한 행동이었다. 조조군 자체가 하북에서 온 병사들이고 뱃멀미가 심했기 때문에 조조는 늘 걱정이었다. 애초에 항복과는 별개로 방통은 봉추라고 불리던 명사였기 때문에 황개, 감녕, 감택들과는 별개로 생각하였고 당시 계절도 북서풍이 부는 계절이었다. 이는 후술하듯 주유가 시름시름 앓는 장면에서 특히 알 수 있는데 주유가 전투에 나서고 승리를 거둬 기뻐했으나 순간 자신의 얼굴을 때리는 바람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주유는 동남쪽에서 서북쪽을 보며 조조에 맞서고 있었고 주유의 얼굴을 때렸다는 건 곧 북서쪽에서 자신들 쪽으로 바람이 불어온단 뜻이기에 화공이 성공적이지 못함을 의미한다. 제갈량이 이를 알고 자신이 동남풍을 불러올테니 기다려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까지 나오므로 애초에 조조 입장에서는 화공이 일어나도 크게 번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17] 물론 대부분의 판본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꼴보기 싫은 제갈량의 도움을 받으려니 속이 쓰린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다(…).[18] 동남풍을 불렀다는 것은 당연히 연의 한정이고, 실제로는 겨울에 잠시 서북풍이 동남풍으로 역류하는 현상이 있을 뿐이다. 적벽대전 문서 참고.[19] 유비가 형주 인근에 군사를 모아둔 것에 대해 주유가 추궁하자 '너네(동오)가 못 먹을 것 같아서 도와주려고 대기하고 있었던 거임'이라고 둘러대고, 이에 주유가 "내가 못 먹을 것 같냐?"라고 빡쳐서 몸소 전투에 나서게 했다.[20] 남군은 조인이 주유와 싸우러 나간 틈을 타서 뺏어먹었고, 형주와 양양은 조인의 병부(총사령관의 징표)를 이용해 남군을 도와달라고 거짓 요청을 보내 성을 비우게 하고 뺏어먹었다. 쉽게 말해 비어 있는 성을 3번이나 날로 먹은 셈이다.[21] 판본에 따라 손부인을 피신시키던 형주 군사들이 뒤쫓아온 주유에게 대놓고 비웃는 말로 나온다(...).[22] 좋은 예가 주유의 강릉성 공략. 강릉 전투 막판에 주유가 매복에 걸려 화살에 맞자 조인은 대세를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주유가 멀쩡하게 말을 타고 지휘하여 아군의 사기를 지키고 적의 기세를 흔들자 조인은 그대로 말려들었다.[23] 혹은 신장, 신이 내린 장수[24] 조인은 연의의 영향 때문에 평가절하된 감이 있지만, 조조의 체제에서 명실상부 최고의 무장이었다. 실력도 탑급인데다가 세력 초창기부터 종군한 친인척이었기 때문에 그 위상은 더할 나위가 없었다. 게다가 명장 서황 등을 부장으로 두고 있었다.[25] 심지어 주유의 공성이었다. 후에 강릉성은 '장합 & 서황 & 조진 & 하후상 등이 이끄는 대군(+ 조비와 강하에 있는 문빙의 지원)'의 공격을, 주연이 수천 명의 병력으로 반년 넘게 수성해낸 곳이다. 오히려 강릉성의 오군이 위군을 패주 시키기도 했다. 즉,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도 적을 패주 시킬 정도로 강릉성은 요새 중의 요새인 것. 따라서 주유가 힘으로 이런 강릉성 및 그 일대를 눌러버린 것은, '주유의 완승 & 조인의 완패'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26] 만약에 주유와 노숙 이 둘이 장수 했었다면 손권의 말년의 막장은 어느 정도 제어되었을지도 모른다.[27] 가령 관도대전 당시 후방의 유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몇몇 장수들은 유표가 후방을 칠 가능성을 역설했으나 순유곽가는 유표의 본질(연의 한정)을 꿰뚫어보았고 조조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반대로 원씨 가문은 아버지 원소나 아들 원담&원상이나 오락가락, 잘해도 악수 중의 악수를 두는 모습을 보인다.[28] 조조가 강남을 정벌할 때 수군을 걱정했던 것처럼, 주유는 먼 육지(+ 산지)에서의 싸움을 걱정했을지도 모른다.[29] 강릉 앞에서 조조의 군대와 맞서는 가운데 일을 진행시켜야 하며 강릉성 혼자 물자를 대기는 무리므로 보급을 위해 장강 남쪽에 물길을 공유하는 유비군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데 천하삼분이라는 계획이 있는 유비군이 상황이 어렵다는 식으로 제대로 협조를 할 리가 없다.[30] 유비는 그 자신이 이미 당시에 한나라 복권의 아이콘이라고 할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어서 촉 지방을 무리없이 차지할 수 있었지만 오나라는 그냥 침략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마디로 아무런 명분도 없는 셈. 거기다 오나라의 특징이 호족 연합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가능성은 정말로 거의 없었을 것이다.[31] 물론 당시 명문가 출신들이 모두 다 외모가 뛰어났다고 평가받지는 않은 만큼 타고난 유전자 빨이 제일 중요하겠다만, 셋 모두 다 명문가 출신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좋은 환경에서 좋은 관리를 받아 외모가 준수하다고 추측할 수가 있다. 그나마 제갈량의 경우 셋중 가장 집안이 딸리고 20대 초중반 시절에는 손수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나머지 둘보다는 고생을 좀 했다.[32] 주윤발이 주유의 직계 후손이라고 하며, 주윤발의 얼굴을 보면 주유가 확실히 미남이었다는 기록에 믿음이 실린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