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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대제 손권의 아들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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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ece5b6> 손오 제3대 황제 손휴 | 孫休 | |||
출생 | 235년 | ||
손오 단양군 건업현 황궁 내전 (現 장쑤성 난징시) | |||
즉위 | 258년 11월 30일 | ||
손오 단양군 건업현 (現 장쑤성 난징시) | |||
사망 | 264년 9월 3일 (향년 29세) | ||
손오 단양군 건업현 (現 장쑤성 난징시) | |||
능묘 | 정릉(定陵) | ||
재위기간 | 손오의 황제 | ||
258년 11월 30일 ~ 264년 9월 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B0000><colcolor=#ece5b6> 본관 | 부춘 손씨 | |
휘 | 휴(休) | ||
부모 | 부황 태조 모후 경회황후 | ||
형제자매 | 7남 4녀 중 6남 | ||
배우자 | 경황후 | ||
자녀 | 4남 1녀 | ||
자 | 자열(子烈) | ||
작호 | 낭야왕(琅邪王) | ||
시호 | 경황제(景皇帝) | ||
연호 | 영안(永安, 258년 ~ 2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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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손오(孫吳)의 제3대 황제. 손권의 6번째 아들로 이전 황제 손량에게는 이복형이 된다.[1] 어머니는 경회황후 왕씨. 자는 자열(子烈)이고, 연호는 영안(永安). 아들로는 손만, 손공, 손망, 손보가 있다.2. 정사 삼국지
258년 10월에 손침은 자신을 제거하려 한 황제 손량을 폐위시키고 10월 18일에 낭야왕 손휴를 황제로 삼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봤듯이 손침은 손휴를 허수아비로 세우고 더욱 더 막장 행각을 펼쳤고 손휴는 손량을 폐위한 손침과 그 일파들이 두려워 계속 상을 주었으나 속으로는 손침과 그 일파들을 쳐낼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그리고 그때가 당도해 손침이 역모를 꾀한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12월 8일 손휴는 좌장군 장포, 정봉 등과 모의해 손침을 척살하고 그 일족을 멸했다. 패악질을 해대던 손준과 손침이 황족이라는 것을 부끄러워 하여 황실 족보에서 삭제하고 손씨 성을 없애고 고(故)씨로 바꾸고 고준, 고침으로 부르게 했다. 호적에서 파고 대놓고 고인드립을 칠 정도였으니 손휴가 손침, 손준 일파에 대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다.
260년, 포리당(浦里塘)[2]을 만들다 백성들의 원망을 샀으며 263년에 촉한이 위의 대규모 침공을 받자 구원병을 내주어 정봉 형제에게 각각 수춘과 면중으로 진격케 해 촉을 구원케 했으나, 결국 촉은 멸망했다. 264년에 과거 촉 땅이었던 파동군 영안현을 공격했다가 나헌에게 막혔으며 우방이자 위의 침공을 막아줄 방파제 역할을 했던 촉이 망하자 손휴는 오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다가[3] 30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이후 태자 손만이 즉위했어야 했으나, 승상 복양흥과 장포가 짜고 그의 조카 손호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손호는 손휴의 아내 주부인을 핍박하여 죽이고, 손휴의 네 아들을 오의 작은 성에 몰아넣고, 그 중에서 손만과 손공을 죽였다.
3. 평가
손침에 의해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되었지만 거짓말같이 손침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꼭두각시 황제가 권신을 역으로 제거해버리는 데 성공한 손휴의 사례는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4] 손에 꼽는다.그러나 손휴의 치세는 전반적으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손휴 시대 전반은 손준, 손침 형제의 전횡으로 인해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외에도 당시 오나라는 포리당 같은 거대 토목 공사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도 심했고 심심하면 정변이 일어나 궁궐에 칼부림이 그칠 날이 없었던 데다가 손준, 손침의 횡포를 수습한 이후 황제가 "큰 돼지랑 공작좀 가져와라~"라고 명령을 내리자 또 징발될까봐 겁난 수공예인들과 백성들이 교지에서 반란까지 일으키는 상황인 데다가 복양흥과 장포 같은 용렬한 인물들이 실권을 장악하여 백성들의 욕을 대놓고 얻어먹던 상황이었으며, 복양흥은 "농민 1만 명을 징벌해 병사로 만들자."고 제갈각, 손준, 손침 이래로 큰 타격을 입은 백성들 입장에서 기겁하는 소리가 나올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가히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의 손침을 제거한 것 빼고는 손휴 정권은 딱히 잘한 것이 없었다. 라는 평가가 잘 맞는다. 손휴 개인의 인품은 괜찮았고 명군의 자질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손준과 손침 형제의 전횡으로 파탄난 오나라를 수습하고 다시 반석에 올려놓기에는 손휴 정권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홍대용은 《담헌서》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오휴(吳休)는 아첨한 자의 수단에 빠져서 위소, 성충(昭冲)의 무리와 더불어 글 읽로 강논함을 기쁘게 여겼다. 그러나 그가 복양흥, 장포(興布)의 무리에게 답한 말들은 또한 명백하고 절실하였으니, 대개 그의 천품(天禀)은 좋았던 것인데 가르침과 인도함을 착하게 못한 것이 애석하다. 흥포의 무리는 자기들의 허물을 행여 말할까 두려워해서 굳이 간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임금을 그르치고 자신의 은총(恩寵)만 받으려고 하는 소인의 무리는 모두 이와 같으니, 두렵다.
4. 기타
손오의 황제로서는 재위 기간 내에 유일하게 연호를 고치지 않았다. 어차피 재위 기간이 10년이 안 돼 연호를 교체할 계기가 생기지 않았던 듯. 손준과 손침을 징벌했지만 그 둘에게 제거된 이전의 권력자인 제갈각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듯 하다. 복권은 시켜줬지만 공로를 세우는 비석을 세우자는 말엔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5]사람들이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피휘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이름자를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예가 손완의 이름자. [6]
어림에 따르면 손휴는 꿩 사냥을 좋아했는데, 그 계절이 되면 새벽에 나갔다가 저녁에야 돌아오곤 했다. 신하들이 모두 이를 말리면서 간언했다.
이것은 하잖은 짐승이니 어찌 심히 탐닉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손휴가 대답했다.비록 하잖은 짐승이지만 굳은 절조가 사람보다 낫기 때문에 짐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오.
《수신기》에 따르면 동오(東吳)의 경제 손휴(孫休)가 병이 나 박수 무당을 찾았다. 마음에 드는 박수를 찾아낸 손휴는 그를 시험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에 거위를 죽여 뜰에 묻고는 조그마한 집을 지어 그 안에다 침상과 탁자를 들인 다음, 부인들이 신는 신발과 의복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박수를 불러와 그것을 보게 한 다음에 말했다. "만약에 이 무덤에 묻힌 죽은 부인의 모습을 말할 수 있으면 후한 상을 내리는 동시에 그대를 믿고 내 병을 맡기겠노라." 그러자 박수는 하루가 다 지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손휴가 박수를 재촉하자 그제서야 그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실은 귀신은 보이지 않고 단지 무덤 위에 흰 거위 한 마리만 보입니다. 그래서 소인이 즉시 말씀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귀신이 거위의 모습으로 변한 것인가 의심스러워서 말입니다. 그래서 거위가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렸지만, 무슨 연유인지 조금도 모습을 바꿀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서야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5. 삼국지연의
113회, 119회, 120회에서 등장한다.6. 미디어 믹스
6.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1 |
삼국지 12, 13, 14 |
상징색은 빨간색이다.
삼국지 3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취급은 그저 그렇다. 그래도 황제이지만 손침을 쳐냈기 때문에 후반기 장수 중에선 준수한 편.
삼국지 9의 능력치는 통솔력 64/무력 39/지력 79/정치력 72로 전투 관련 능력치는 우울한 편이지만 투함과 혼란, 덫 때문에 해전에서는 꽤 위협적이다.
삼국지 10의 능력치는 통솔력 57/무력 42/지력 79/정치력 75/매력 83에 특기는 농업, 기술, 혼란, 반박, 논파. 총 5개다. 농업, 기술 특기를 가지고 있어서 내정에 적합하며 손침을 잡은 후 말빨로 처발라버린 것을 반영하였는지 논파 특기를 가지고 있다는 게 특이점.
삼국지 11의 능력치는 통솔력 57/무력 39/지력 78/정치력 75/매력 81로 후반기 장수치고는 비교적 준수하지만, 수군 적성이 A인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병종 적성은 모두 C이며 무특기이므로 전장에서 활용하기는 어렵다.
삼국지 12의 일러스트는 손침을 죽이라고 명을 내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오나라 황제들 중에서 칼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57/42/78/76. 특기는 농업 3, 설파 2, 수영 1. 전수특기는 농업이며 전법은 기동강화.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57, 무력 39, 지력 78, 정치 75, 매력 83으로 전작에 비해 무력이 3, 정치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문화, 농정, 학자, 주의는 명리, 정책은 태학 Lv 4, 진형은 충차, 투석, 전법은 충차, 투석, 시람, 친애무장은 복양흥, 장포, 혐오무장은 손침, 이형이다.
6.2.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7 중 진나라 IF 스토리에서 등장, 클론 무장 치고는 오의 최종 보스로 등장하는 위업을 이룬다. 사마사 암살 사건이 해결된 후, 위나라가 통일을 위해 몇 년간 힘을 비축했다가 사마사가 촉으로, 사마소는 오로 진격. 형주를 치고 건업으로 진격해 오가 사실보다 더 빨리 멸망하게 된다. 손권 사후 개판이었던 후계 구도 때문에 사마사, 사마소 형제의 우애 띄어주기 용 비교 대상이 되는 굴욕도 겪는다. 하지만 정봉과 연사의 오나라 잔존병이 성도에서 쫒겨온 강유와 연합해 적벽에서 결전을 치른다.6.3. 삼국전투기
네기시 소이치로 등장한다. 처음에 손침에게 빌빌대는 유약한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역시나 크라우저 2세로 변신하여 손침을 SALHAE했다. 역사대로 손준과 손침을 고씨로 개명시키지만 그냥 한자표기 없이 고씨라고만 나와 단순히 원래 있던 고(高)씨로 개명시킨건지, 아니면 원래대로 고(故)씨로 개명시킨건지 불명이나 박수동의 만화 고인돌의 주인공인 고인돌이 "고씨는 뭔 죄냐!!??"라며 따지는 게 포인트라는 것은 高(고)씨가 맞는 모양이다. 사족으로 복양흥과 장포도 각각 알렉산더 쟈기, 카뮤로 분장하고 나왔다. 손침을 주살한 이후 쟈기, 카뮤 모드로 완전 고정이 돼 버린 수하들 둘과는 달리 손휴는 네기시 모드와 크라우저 모드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모습을 보였다.전투외편 6편에서 처음 등장. 손침이 손량을 폐출시키고 새로 옹립한 황제다. 손휴는 손침을 승상으로 올리고 그의 형제들을 모두 요직에 임명하며 알아서 기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자기 심복들인 복양흥과 장포도 승진시켰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손침은 승상직을 내린 답례 겸 충신 코스프레를 할 생각으로 손휴에게 술과 고기를 보냈지만 손휴는 술도 못 마시고 고기도 못 먹어서 돌려보냈다.[7] 이에 손침이 분노해 장포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역심을 드러내자 손휴는 계속해서 상을 내리거나 손침을 욕한 사람을 잡아다 바치는 등 그의 비위를 맞춰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위화감이 들 정도로 빌빌거리는 손휴의 태도에 손침은 역으로 두려움을 느껴서 일부러 무창으로 튀려고 했다. 손휴는 손침의 부탁을 전부 들어준 뒤 자기도 부탁이 있다면서 손침을 신년회에 초대했다. 이후 정봉의 도움에 힘입어 연회에 마지못해 참석한 손침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손침을 처형할 때 정사에도 적힌 손휴의 명대사를 했다.
전투외편 7편에서는 그의 치세 중 일어났던 몇 가지 이야기가 언급됐다. 단양 근처에 간척사업을 위한 댐을 짓자는 의견이 올라왔기에 손휴는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대했지만 복양흥만이 이를 당당하게 밀어붙였기에 뭔가 근거가 있어서 그랬으리라 생각한 손휴가 이를 허가하여 사업이 실행됐는데, 그 사업의 결과 인적, 물적 손해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발생하여 오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손휴는 크라우저 모드로 변신해서 복양흥을 두들겨팼다.
또 한편으로는 독서와 학술 담론을 좋아했던 손휴가 충직한 학자였던 성충, 위소와 교류했는데, 질투심에 불타는 장포의 방해 때문에 손휴는 결국 그들과 교류를 끊어야 했다고 언급되기도 했다.[8]
검각 전투 편에서는 사신으로 보냈던 설후에게서 촉의 내부사정을 전해듣고 이제 촉도 시간문제 아니냐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촉이 위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해 오에게 구원 요청을 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정봉에게는 수춘을 공격해 촉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유평에게는 강릉으로 가서 주적과 상의에 촉으로의 지원 노성을 결정하게끔 지시했다. 위급하다 뭐다 해도 첩첩산중에 있는 촉이 무너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촉에게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영안 전투 편에서는 촉이 진짜로 망해버리자 심하게 쇼크를 받은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적극적으로 도울 걸 그랬다며 후회하는 건 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손휴는 정확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인지하여 옛 촉의 땅을 수복하기로 결정, 종회의 반란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로 정하고 보협에게 영안을 공격하게 한다. 보협의 패전 소식을 들은 후에는 제대로 열이 뻗쳐 아끼던 에이스 카드인 육항에게 다시 영안 공략을 명한다. 그러나 육항까지 영안 공략에 실패하자 2배로 쇼크를 먹어 그대로 쓰러져버리고 자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여 복양흥과 장포를 불러 태자인 손완을 보좌해줄 것을 부탁한 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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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맏형인 손등하고는 26세 차이로 나이만 보면 아들 뻘이다. 참고로 손권하고 손등이 27세 차이다. 큰 형 손등은 손휴가 어릴 때 요절했고 둘째 형 손려는 그가 출생하기도 전에 사망했다.[2] 관개, 간척을 위한 댐이다.[3] 안 그래도 위태하던 삼국의 균형이 제대로 무너진 데다 위-오 사이 국경과는 달리 촉-오 사이 국경에는 이렇다 할 장애물이 없어 오나라가 위나라를 상대로 버틸 수 있던 장벽이 없어진 거나 다름없으니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오멸망전 당시 오나라가 속절없이 무너진 이유도 촉-오 루트를 통한 서진의 침공 때문이었다.[4] 북주의 무제 우문옹이 권신 우문호를 제거한 것, 북위의 효장제 원자유가 권신 이주영을 제거한 것 정도가 있다. 그러나 효장제는 이주영의 친척들에 의해 실권을 되찾지 못한 채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5] 사실 제갈각이 공로도 있지만 말년의 과가 지대한 인물이기에 당연한 것이다. 손준도 그 이후 처사가 문제였지 제갈각 제거 건으로는 거의 안 까인다.[6] 사실 중국의 경우 이런 경우가 제법 많다. 사람 이름을 짓거나 강 이름을 짓거나 할 때 새로운 한자를 만들어서 지어주는 경우는 중국과 한국에 두루 있는 경우이다. 훈에 사람 이름, 물 이름 등이 들어간 경우가 대개 이런 경우로 그래서 중국의 경우 최근 현재 있는 5만여자를 제외한 신설 한자를 만들어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7] 이때 깨알같이 손휴가 좋아하는 음식이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와 치즈타르트라고 언급되기도 했다.[8] 물론 그와는 별개로 손휴는 또 크라우저 모드로 변해서 장포를 두들겨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