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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지명/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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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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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촉(蜀) 지방1.2. 파(巴) 지방 및 북부1.3. 남중(南中) 지방
2. 촉군(蜀郡)3. 문산군(汶山郡)4. 한가군(漢嘉郡)5. 건위군(犍爲郡)6. 강양군(江陽郡)7. 광한군(廣漢郡)8. 동광한군(東廣漢郡)9. 자동군(梓潼郡)10. 파서군(巴西郡)
10.1. 탕거군(宕渠郡)
11. 파군(巴郡), 일명 신파군12. 파동군(巴東郡)13. 부릉군(涪陵郡)14. 한중군(漢中郡)15. 무도군(武都郡)16. 음평군(陰平郡)17. 주제군(朱提郡)
17.1. 남광군(南廣郡)
18. 건녕군(建寧郡)19. 운남군(雲南郡)20. 월수군(越巂郡)21. 영창군(永昌郡)22. 장가군(牂牁郡)23. 흥고군(興古郡)24. 같이보기

1. 개요

기원전 107년에 처음 자사를 설치할 때, 이 방면을 맡는 자사의 감찰 구역이 원래 예주 이남의 남부 지방을 가리키던 지방 이름인 양주(梁州)와 겹치는 부분이 있었는데, 양(梁)이 위나라를 가리킨다고 여겼는지 익주(益州)라고 명명하였다. 현재의 쓰촨성·충칭시·구이저우성·윈난성산시성·간쑤성의 남부 일부에 해당한다.[1]

익주는 세부적으로 촉(蜀)·파(巴)·한천(漢川)·남중(南中) 지방으로 구분되었다. 각각 진(秦)나라 때의 촉군·파군·한중군 영역과 한무제 때 새로 군이 설치된 지역들에 해당한다. 촉 지방과 파 지방은 현대의 쓰촨 분지에 해당하며, 당대에도 이를 통칭해 파촉(巴蜀)으로 부르기도 했다. 분지라는 지형의 특성상 한천 지방이나 파촉은 사방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출입이 어려운 곳이었고, 이에 진나라 때부터 유배지로 악명이 높았던 곳이었다.

1.1. 촉(蜀) 지방

본래 진(秦)나라가 설치했던 촉군은 한나라 때에는 촉군·광한군·건위군 3군으로 나뉘었는데, 이를 통칭해 삼촉(三蜀)이라고 불렀다. 『삼국지연의』에선 '서천(西川)' 지방으로 언급되나, 이는 후대의 별명으로 당대에 쓰인 표현은 아니었다. 현대 쓰촨 분지의 서부에 해당하며, 진나라 때부터 수리시설이 정비되어 상당한 개발이 진행되어 왔기에, 다른 지역보다 높은 수준의 안정적인 생산력을 자랑했다. 관중 지방에 재난이 끊이지 않았던 초한전쟁 중에 유방항우에게 번번이 패배하면서도 병력이 부족한 적은 있었으나 물자가 부족한 일은 없던 것도, 촉 지방과 한천 지방의 생산력에 기댄 것이 컸다. 특히 고대부터 촉 지방의 비단은 높은 품질로 유명했기에, 삼국시대에도 촉한의 주요 특산품으로 자리매김했다.

한천 지방에 진입하는 것 자체에 절망(...)하고 있던 유방은 끝내 파촉까지 들어오지는 않았으나, 신-후한 교체기에 익주에서 할거했던 공손술은 촉군 성도현을 수도로 삼았으며, 후한 이후 익주자사의 치소는 모두 촉 지방에 있었다.

1.2. 파(巴) 지방 및 북부

후한 말 파 지방은 오두미교의 근거지였고, 유언이 당시 오두미교의 교주 장로를 한중태수로 임명했기에, 오두미교 교단은 한천(漢川) 지방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한천'이란 전통적으로 한중군의 별명으로 사용된 이름인데, 『삼국지연의』에선 '동천(東川)' 지방으로 언급되나, 이는 후대의 별명으로 당대에 쓰인 표현은 아니었다.

유장이 장로와 반목하면서, 장로가 태수직을 맡고 있던 한중군은 한녕군으로 개명되어 오두미교의 신정국가(...)가 되어버렸고, 유장은 장로 세력이 그대로 파군까지 장악하는 것을 막고자 195년에 파군을 분할해 영녕군과 고릉군을 설치하고 각각 태수들을 임명해 보냈다. 당시 파군태수로는 방희를 임명해 보내 장로를 막게 했으나, 유장은 곧 방희와도(...) 반목하였고, 200년에 방희가 성도를 포위했다가 화해를 청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방희가 유장과 화해를 결정한 이유는 기록에선 정기와의 일화 때문이라고 설명하나, 실제로는 장로의 위협 때문이라 추측된다. 방희의 치소가 위치한 낭중현은 오두미교의 총본산이었으므로 실제로는 장로의 영역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이에 방희는 한창현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창현 또한 나중에 조조가 차지한 것을 보면 방희는 결국 201년 이후에 장로의 공격을 받아 임지에서 쫓겨난 것으로 판단된다.

장로는 유장이 '파서군'으로 명명한 지역을 장악하고는 내부적으로 이를 '파중(巴中)'으로 불렀다. 215년에 조조가 장로의 항복을 받은 뒤에, '파중'을 나눠 파서군과 파동군을 설치했으며, 한중군을 나눠 새로 서성군을 설치하면서 서성군에 상용도위부를 두었는데, 이 무렵 한중군에서 방릉군도 분할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광한속국도위부에 소속된 저족 집단이 조조에 협력해 장로와 장로에 예속되어 있던 관중제장의 잔여 세력을 공격했기에, 광한속국도위부를 음평군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유비가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하면서 한천 지방 전역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 시점에는 상용도위부가 상용군으로 승격된 상태였다. 조조는 유비의 북상을 염려하여 무도군·음평군의 주민들과 저족 집단을 옹주 우부풍으로 이주시켜 2군을 무인지대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군웅할거 시기에 파 지방은 파서군·파군·파동군·부릉군·탕거군 5군으로 분할되었고, 한천 지방은 한중군·서성군·상용군·방릉군 4군으로 분할된 것이다. 그러나 220년에 서성군·상용군·방릉군이 위나라에 점령당해 형주에 소속되었다. 이후 탕거군이 폐지되었고, 229년에 제갈량이 폐지된 무도군·음평군 지역을 점령하여 다시 군·현을 설치했다.[7] 따라서 촉한 시기에는 파 지방은 4군이 되었고, 한중군·무도군·음평군 3군이 익주의 북부를 구성하는 형세가 되었는데, 실제로도 당대에 무도군과 음평군 지역을 한중군과 한 지방처럼 묶어서 통칭하는 경향이 있었다.

촉한이 멸망한 뒤 263년 말 무도군을 옹주로 이속하고, 음평군을 자동군에 동광한군을 광한군에 병합하였으며, 한중군·광한군·동광한군·자동군·파서군·파군·파동군·부릉군을 분할해 양주(梁州)를 설치했다.

1.3. 남중(南中) 지방

익주 남부지방의 익주군·월수군·영창군·장가군 등 4개 군은 당시에 '남중'이라는 지방 명칭으로 불렸는데, 후한 때부터 이 지방에는 '8성(姓)'으로 통칭되는 대호족들이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214년에 익주를 얻은 유비는 이 남중 호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건위속국도위부를 주제군으로 승격시키고, 등방을 주제태수로 삼으면서 안원장군과 내항도독(庲降都督)직을 겸임시켰는데, 남중 4군에 대한 방비를 맡긴 것이었다. 등방이 죽은 뒤인 221년에는 이회를 내항도독의 후임으로 임명하면서 교주자사를 겸임시켰다.[8]

유비가 죽자, 남중 호족 중 하나였던 옹개가 교지군의 사섭을 통해 손권의 후원을 받아, 손권에게 영창태수직을 임명받고는 남중 호족들을 선동하여 촉한에 반기를 들었다. 정작 영창군에서는 여개왕항이 옹개의 진입을 막아냈으나, 장가태수 주포가 반란에 합류했고, 익주군의 호족 맹획 등도 이에 동참했다. 월수군에서는 수족고정이 옹개에 협력했다. 225년에 제갈량이 직접 이 반란을 평정하러 출정했는데, 결국 내분이 일어나 옹개와 주포가 죽고, 고정 또한 사로잡혀 처형당했으며, 이때 맹획은 칠종칠금의 고사를 남기며 제갈량에게 항복했다. 반란이 평정되자, 제갈량은 이때 군공을 세워 활약한 병사들만 성도로 데리고 돌아가고, 그렇지 못한 병사들은 남중의 호족들에게 배분했는데, 이를 빌미로 호족들을 내항도독의 직할부대장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내항도독이 남중 호족들을 직접 통솔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남중 4군을 재편해 건녕군·운남군·월수군·영창군·장가군·흥고군으로 만들었고, 여기에 주제군을 더해 남중 7군이 되어 이를 내항도독의 관할 구역으로 삼았다.

229년에 촉한이 오나라와 천하를 분할하는 맹약을 맺었는데, 이때 교주가 오나라의 영역으로 인정되면서 교주자사직을 둘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이회는 건녕태수로 임명되었는데 내항도독은 그대로 겸임하였고, 이후 이회의 후임자들도 건녕태수와 내항도독을 겸임하게 되었다. 촉한이 멸망한 뒤에는 내항도독을 남중도독(南中都督)으로 고쳤다. 이후 서진 때인 271년에 남중 지방에 영주(寧州)가 설치되었는데, 건녕군·운남군·영창군·흥고군 4군만이 소속되었다. 282년에 영주를 폐지하여 익주에 합병했는데, 303년에 남중 7군을 분할해 다시 영주를 설치했다.

혹자는 내항도독이 관할하는 내항도독부(庲降都督部)가 남중 지방의 이민족들을 제어하기 위한 특별자치구역이라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화양국지』에 기록된 내항도독과 내항도독의 예하로 편성된 호족들의 역할과 상충하는 것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망상일 뿐이다. 내항도독은 어디까지나 군사분야에서 작전통제권을 갖는 관직이었을 뿐, 이를 통해 건녕태수가 행정영역에서 다른 6군 태수를 지휘하거나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내항도독이 남중 지방의 정치에서 특별했던 것은 225년 이후 남중 호족들이 내항도독의 예하부대장으로 편성되면서 내항도독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게 된 것에 있었다. 『화양국지』에서는 내항도독이 설치됨으로 인해 이민족들이 특별한 자치를 누렸다는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도리어 남중 호족들이 직접 이민족을 관리하게 만들어 그들의 직할부대로 편성하게 했다는 내용만 있을 뿐이다. 특히 후한은 이민족들을 직접 통치하는 것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중원 내지에 산재한 이민족들조차 군·현에 직접 예속시키기보다는 그저 이민족 작위를 책봉하여 조세와 징집의 의무만을 부과했기 때문에, 삼국시대에 내항도독부의 설치로 남중의 이민족들이 특별한 자치를 누리게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남중 지방이 남만족들이 우글거리는 두메산골의 별천지처럼 묘사했는데, 역사적으로 익주 지방의 이민족들은 '남만'이라고 부르지 않고 '서남이'라고 통칭했으며, 남중지방은 한무제 이후로 줄곧 군·현이 운영되어 왔기에 각색이 과한 것이다. 특히 남중 호족인 맹획이 남만왕(...)으로 둔갑하여 남중 반란의 주모자인 것처럼 묘사했으나, 실제 반란의 주모자는 옹개였고 그 주모자들이 내분을 일으켜 모두 죽으면서 맹획이 반란군을 이끄는 입장이 되어버렸던 것에 가깝다.

2. 촉군(蜀郡)

진(秦)나라가 기원전 316년에 사마착을 장수로 삼아 촉나라를 정복하고, 기원전 314년에 촉군을 설치했다. 221년에 유비가 황제가 되었으나, 성도현은 촉한의 임시 수도였기에 촉군태수가 윤(尹)으로 격상되지는 않았다.[9]
소속 진(秦)→[한]익주자사부→[219]한중국(漢中國)→[221]익주→[서진]익주
치소 성도현
분합 [후한]북부도위→[188]문산군→[197]북부도위→[214]문산군: 면제도·전저도·문강도·잠릉현·광유현
출신 성도현: 조겸·조온, 두경, 장예
봉작 유비: 한중왕(219~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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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산군(汶山郡)

전한 때인 기원전 107년에 촉군과 인접한 산간 지역에 거주하는 강족들을 예속시키려는 목적으로 문산군을 설치하였으나, 기원전 67년에 문산군 운영을 포기하여 이미 현이 설치된 지역들을 촉군에 합병시켰고, 이 지역의 경비는 촉군의 북부도위(北部都尉)가 관장하게 했다. 후한 초기 각 군에 설치된 도위가 모두 폐지되었는데, 이때 촉군의 북부도위도 폐지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24년에는 다시 문산군 설치를 시도했으나 오래 유지되지 못하여 촉군북부도위부로 편성되었다. 유언이 188년 무렵에 북부도위부를 문산군으로 승격시켰는데, 197년에 다시 촉군북부도위부로 환원되었고, 214년에 유비가 다시 문산군으로 승격시켰다.
지명 [-107]문산군→[-67]북부도위부, [124]문산군→[후한]북부도위부→[188]문산군→[197]북부도위부→[214]문산군
소속 [-107]익주자사부→[-67]익주자사부 촉군→[30]폐지?, [124]익주자사부→[후한]익주자사부 촉군→[188]익주→[197]익주 촉군→[214]익주→[서진]익주
치소 [전한]문강현, [후한]면제도
전입 [후한]촉군 면제도·전저도·문강도·잠릉현·광유현
설치 [삼국]도안현·백마현·평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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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문산군(8현 16,000호): 문산현, 승천현, 도안현, 광양현, 흥락현, 평강현, 잠릉현, 광유현 }}}}}}}}}

4. 한가군(漢嘉郡)

전한 때인 기원전 111년에 작도(莋都)를 복속시키기 위해 침려군(沈黎郡)을 설치했었는데, 기원전 97년에 침려군 운영을 포기하여 이미 현이 설치된 지역들을 촉군에 합병시켰고, 이 지역의 경비는 촉군의 양부도위(兩部都尉)가 관장하게 했다. 후한 초기 각 군에 설치된 도위가 모두 폐지되었을 때 양부도위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123년에 옛 침려군 지역에 속국도위(屬國都尉)를 설치하여 촉군속국도위부(蜀郡屬國都尉部)가 형성되었다. 184년 무렵에 촉군속국도위부를 한가군으로 승격시켰는데, 188년 무렵에 유언이 다시 촉군속국도위부로 환원했고, 221년에 유비가 다시 한가군으로 승격시켰다.
지명 [-111]침려군→[-97]양부도위부, [123]속국도위부→[184?]한가군→[188]속국도위부→[221]한가군
소속 [전한]익주자사부→[-97]익주자사부 촉군→[30]폐지?, [123]익주자사부 촉군→[184?]익주자사부→[188]익주 촉군→[221]익주→[서진]익주
치소 한가현
출신 신도현: 위계
현 미상: 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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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촉군속국도위부(4성 111,568호 475,629구): 한가현, 엄도, 사현, 모우현
서진 한가군(4현 13,000호): 한가현, 사양현, 엄도, 모우현 }}}}}}}}}

5. 건위군(犍爲郡)

전한 때인 기원전 135년에 야랑국(夜郞國)을 복속시키면서 설치한 군인데, 당시 촉군의 일부가 함께 분할되면서 설치되었기에 삼촉(三蜀) 중 하나로 불리게 되었다.
소속 야랑국→[한]익주자사부→[219]한중국(漢中國)→[221]익주→[서진]익주
치소 [-135]폐현→[-130]남광현→[-86]북도→[107]무양현
분합 [삼국]지강도위→[213]강양군: 강양현·한안현·부절현
전출 [214]남광현→주제군
출신 무양현: 양홍, 장익, 양희
남안현: 비시
봉작 유비: 한중왕(219~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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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건위군(12현 109,419호 489,486구): 북도, 강양현, 무양현, 남안현, 자중현, 부현, 우비현, 남광현, 한양현, 존마현, 주제현, 당랑현
건위군서순군(西順郡), 북도→북치현(僰治縣), 무양현→집성현(戢成縣), 부현→부신현(符信縣), 한양현→신통현(新通縣), 존마현→잔마현(孱䣕縣)
후한 건위군(9성 137,713호 411,378구): 무양현, 자중현, 우비현, 남안현, 북도, 강양현, 부절현, 남광현, 한안현
서진 건위군(5현 10,000호): 무양현, 남안현, 북도, 자중현, 우비현 }}}}}}}}}

6. 강양군(江陽郡)

원래 건위군 관할의 지강도위부(枝江都尉部)였는데, 지강도위가 언제부터 설치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유언이 설치한 것으로 추측된다. 213년에 지강도위부를 승격시켜 강양군으로 개편했다. 후에는 295년에 신락현(新楽県)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지명 [삼국]지강도위부→[213]강양군
소속 [삼국]익주 건위군→[213]익주→[서진]익주
치소 강양현
전입 [213]건위군 강양현·한안현·부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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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강양군(3현 3,100호): 강양현, 부현, 한안현 }}}}}}}}}

7. 광한군(廣漢郡)

전한 초기인 기원전 201년에 촉군과 파군의 일부를 분할해 설치했다. 266년에 신도군(新都郡)으로 개명했다.
지명 [-201]광한군→[266]신도군→[277]신도국(新都國)→[283]신도군
소속 [한]익주자사부→[219]한중국(漢中國)→[221]익주→[263]양주(梁州)→[서진]양주
치소 [전한]자동현→[후한]낙현
분합 [217]자동군: 자동현·부현·가맹현·백수현
[224]동광한군→[263]광한군에 병합→[266]광한군: 처현·광한현·덕양현
설치 [삼국]양천현
폐지 [266?]양천현
출신 면죽현: 진밀
봉작 유비: 한중왕(219~221)
사마해: 신도왕(277~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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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광한군(13현 167,499호 662,249구): 자동현, 십방현, 부현, 낙현, 면죽현, 광한현, 가맹현, 처현, 신도현, 전저도, 백수현, 강저도, 음평도
광한군취도군(就都郡), 낙현→오락현(吾雒縣), 십방현→미신현(美信縣), 광한현→광신현(廣信縣), 자동현→자동현(子同縣), 부현→통목현(統睦縣), 음평도→최로도(摧虜道), 전저도→치치도(致治道)
후한 광한군(11성 139,865호 509,438구): 낙현, 신도현, 면죽현, 십방현, 부현, 자동현, 백수현, 가맹현, 처현, 광한현, 덕양현
서진 신도군(4현 24,500호): 낙현, 십방현, 면죽현, 신도현 }}}}}}}}}

8. 동광한군(東廣漢郡)

224년에 광한군 처현·광한현·덕양현을 분할해 설치했다. 촉한이 멸망한 이후에 폐지되어 광한군에 합병되었으나, 266년에 동광한군을 다시 설치하면서 이를 광한군으로 명명했고, 기존의 광한군은 신도군으로 개명했다.
지명 [224]동광한군, [266]광한군→[277]광한국(廣漢國)→[280]광한군
소속 [224]익주→[263]폐지(광한군에 합병), [266]양주(梁州)→[서진]양주
치소 [224]처현, [266]광한현
전입 [224]광한군 처현·광한현·덕양현
설치 [삼국]오성현, [서진]오성현(재설치)
폐지 [266?]처현·오성현
봉작 사마찬(司馬贊): 광한왕(277~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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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광한군(3현 5,100호): 광한현, 덕양현, 오성현 }}}}}}}}}

9. 자동군(梓潼郡)

'梓'는 '자'와 '재'로 발음할 수 있는데, 현대에는 '재'로 발음되는 경우가 많아 간혹 이를 '재동군' 또는 '재동현' 등으로 표기한 경우도 보인다. '梓'자는 '杍'와 '榟'의 전서체 표기가 중복되면서 정립된 글자이므로, '杍'에서 기원한 것일 경우는 '자'로, '榟'에서 기원한 것일 경우에는 '재'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 할 수 있다. 왕망이 '子同'으로 개명한 것을 볼 때, '杍'의 전서체에서 기원했음을 추론할 수 있으므로, 梓潼은 '자동'으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 217년에 유비가 자동현·부현·가맹현·백수현을 분할해 자동군을 설치했다. 263년에 음평군이 폐지되어 자동군에 병합되었으나, 269년에 다시 음평군이 설치되어 환원되었다.
소속 [217]익주→[219]한중국(漢中國)?→[221]익주→[263]양주(梁州)→[서진]양주
치소 자동현
분합 [263]음평군 병합→[269]음평군 재설치
전입 [217]광한군 자동현·부현·가맹현·백수현
설치 [217?]검문현·소환현, [삼국]한덕현, [서진]황안현·무련현
폐지 [서진]소환현
출신 부현: 두미, 윤묵, 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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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자동군(8현 10,200호): 자동현, 부현[11], 무련현, 황안현, 한덕현, 진수현, 검각현, 백수현 }}}}}}}}}

10. 파서군(巴西[12]郡)

원래 진(秦)나라가 설치한 파군인데, 195년에 유장이 파군을 분할해 영녕군과 고릉군을 설치했다가, 201년에 파군을 파서군으로 영녕군을 파군으로 고릉군을 파동군으로 개명했다. 그러나 파서군으로 개명된 파군은 이미 장로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201년 이후에 유장이 임명한 파서태수였던 방희를 완전히 쫓아낸 것으로 추측되며, 장로의 오두미교 세력은 파서군으로의 개명을 수용하지 않고 내부적으론 이 지역을 '파중(巴中)'으로 불러왔던 것으로 보인다. 215년에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한 뒤, 조조는 파중을 나눠 파서군과 파동군 2군으로 재편했다.
지명 [진]파군→[201]파서군
소속 진(秦)→[한]익주자사부→[219]한중국(漢中國)?→[221]익주→[263]양주(梁州)→[서진]양주
치소 [진]강현→[195]낭중현
분합 [195]영녕군→[201]파군: 강주현·지현·임강현·점강현·평도현
[195]고릉군→[201]파동군: 어부현·구인현·부릉현
[215]파동군→[218]탕거군→[226]파서군에 합병: 탕거현·선한현·한창현
설치 [193]남충국현(충국현 분할), [서진]평주현·창계현·기협현
폐지 [서진]선한현
출신 낭중현: 주군, 황권, 마충
안한현: 염포
충국현: 초주, 장억
탕거현: 왕평
한창현: 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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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군: 강현, 낭중현, 지현, 어현, 구인현, 임강현, 부릉현, 안한현, 탕거도, 강양현, 점강현, 북도
전한 파군(11현 158,643호 708,148구): 강주현, 임강현, 지현, 낭중현, 점강현, 구인현, 안한현, 탕거도, 어부현, 충국현, 부릉현
임강현→감강현(監江縣), 안한현→안신현(安新縣), 부릉현→파정현(巴亭縣)
후한 파군(14성 310,691호 1,086,049구): 강주현, 탕거도, 구인현, 낭중현, 어부현, 임강현, 지현, 부릉현, 점강현, 안한현, 평도현, 충국현, 선한현, 한창현
서진 파서군(9현 12,000호): 낭중현, 서충국현, 창계현, 기협현, 남충국현, 한창현, 탕거현, 안한현, 평주현 }}}}}}}}}

10.1. 탕거군(宕渠郡)

215년에 조조가 파군(파서군)을 나눠 설치한 파동군(巴東郡)으로, 218년에 유비가 이를 점령한 뒤에 탕거군으로 개명했는데, 당시에 원래 파동군이었던 고릉군과 혼동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26년에 폐지되어 파서군에 합병되었다. 서진 때인 296년 무렵에 다시 탕거군과 선한현이 설치되었다. 『화양국지』에는 연희(延熙) 연간인 238~257년 중에 탕거군이 다시 설치되어 잠깐 운영되었다고 쓰였으나, 이는 서진 때 다시 탕거군을 설치해 운영했던 것을 잘못 기재한 것으로 판단된다.

11. 파군(巴郡), 일명 신파군

원래 195년에 설치된 영녕군(永寧郡)으로 파군의 강주현·지현·임강현·점강현·평도현을 분할해 설치되었다. 201년에 영녕군이 파군으로 개명하고 원래의 파군은 파서군으로 개명되었는데, 이에 따라 신파군(新巴郡)이란 별칭이 생겼다.
지명 [195]영녕군→[201]파군
소속 [195]익주→[219]한중국(漢中國)→[221]익주→[263]양주(梁州)→[서진]양주
치소 강주현
전입 [195]파군 강주현·지현·임강현·점강현·평도현
설치 [221]낙성현·상안현
폐지 [254]평도현·낙성현·상안현
출신 강주현: 감녕
봉작 유비: 한중왕(219~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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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파군(4현 3,300호): 강주현, 점강현, 임강현, 지현 }}}}}}}}}

12. 파동군(巴東郡)

원래 195년에 설치된 고릉군(固陵郡)으로 파군의 어부현·구인현·부릉현을 분할해 설치되었다. 201년에 파동군으로 개명되었고, 새로 파동속국도위를 설치하여 부릉현을 관할하게 했다. 214년에 파동군을 폐지하여 파군에 병합하고 강관도위(江關都尉)를 설치해 옛 파동군 지역을 관할하게 했다가, 216년에 강관도위부를 고릉군으로 승격시켰다. 219년에 손권이 형주를 점령했을 때 무현도 점령된 것으로 보이며, 손권은 무현과 형주 의도군 자귀현을 고릉군으로 구성하고 유장을 익주목으로 임명해 그 고릉군에 주둔시켰다. 222년에 유비가 손권과 화해하면서 손권이 만든 고릉군은 폐지되어 형주 의도군에 합병되었다. 269년에 태창현을 설치하고, 북정현·태창현을 형주 무릉군 건평도위부로 이속했다.
지명 [195]고릉군→[201]파동군→[214]강관도위부→[216]고릉군→[221]파동군
소속 [195]익주→[214]익주 파군→[216]익주→'[219]한중국(漢中國)?→[221]익주→[263]양주(梁州)→[서진]양주
치소 영안현
분합 [201]파동속국도위→[218]부릉군: 부릉현·영녕현
전입 [195]파군 어부현·구인현·부릉현, [216]형주 의도군 무현·북정현
설치 [189?]영녕현, [216]양거현·한풍현, [269]형주 무릉군 건평도위부 태창현
전출 [219]무현→형주 의도군, [269]북정현→형주 무릉군 건평도위부
폐지 [서진]한풍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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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파동군(3현 6,500호): 어부현, 구인현, 남포현 }}}}}}}}}

13. 부릉군(涪陵郡)

201년에 설치된 파동속국도위부(巴東屬國都尉部)에 근원을 둔 군으로, 214년에 파동군이 폐지되어 파군에 소속되었다가, 216년에 다시 고릉군이 설치되어 고릉군 소속이 되었다. 218년에 부릉군으로 개편되었다.
지명 [201]파동속국도위부→[218]부릉군
소속 [201]익주 파동군→[214]익주 파군→[216]익주 고릉군→[218]익주→[219]한중국(漢中國)?→[221]익주→[263]양주(梁州)→[서진]양주
치소 부릉현
전입 [201]파동군 부릉현·영녕현
설치 [201]한발현·단흥현, [218]한부현, [250]한평현
폐지 [서진]단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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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부릉군(5현 4,200호): 한부현, 부릉현, 한평현, 한가현, 만녕현 }}}}}}}}}

14. 한중군(漢中郡)

진(秦)나라초나라 땅을 빼앗아 기원전 312년에 설치했다. 유방이 이곳에 한왕(漢王)으로 봉해진 것이 한나라 국호의 유래이다. 194년 무렵에 유장과 반목하게 된 한중태수 장로가 한녕군(漢寧郡)으로 개명하며, 이곳을 오두미교 신정국가(...)로 마개조 했다. 215년에 조조가 장로의 항복을 받은 뒤에 다시 한중군으로 환원되었다.
지명 [-312]한중군→[24]한중국(漢中國)→[27]한중군→[194?]한녕군→[215]한중군
소속 진(秦)→[한]익주자사부→[219]한중국→[221]익주→[263]양주(梁州)→[서진]양주
치소 [진]남정현→[전한]서성현→[후한]남정현
분합 [215]서성군→[220]형주 위흥군: 서성현·안양현
[215]서성군 상용도위부→[219?]상용군→[220]형주 신성군에 합병: 상용현·석현
[215?]방릉군→[220]형주 신성군: 방릉현
설치 [219]남향현, [서진]포지현·황금현·흥도현
봉작 유비: 한중왕(219~221)
출신 서성현: 염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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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군: 남정현, 서성현, 성고현, 상용현, 석현, 운양현, 방릉현, 저현, 전양현, 안양현, 장리현, 무릉현, 형산도(荊山道·연혁 미상)
전한 한중군(12현 101,570호 300,614구): 서성현, 순양현, 남정현, 포중현, 방릉현, 안양현, 성고현, 면양현, 양현, 무릉현, 상용현, 장리현
한중군신성군(新成郡), 양현→양치현(鍚治縣)
후한 한중군(9성 57,344호 267,402구): 남정현, 성고현, 서성현, 포중현, 면양현, 안양현, 석현, 상용현, 방릉현
서진 한중군(8현 15,000호): 남정현, 포지현, 포중현, 면양현, 성고현, 서향현, 황금현, 흥도현 }}}}}}}}}

15. 무도군(武都郡)

전한 때인 기원전 111년에 설치했다. 전한 때에는 익주자사부 소속이었지만, 후한 때에는 양주(涼州)자사부에 소속되었다. 219년 한중 공방전에서 패퇴한 조조유비가 계속 북상해 올 것을 염려하여 무도군과 음평군의 주민들을 우부풍 괴리현의 소괴리로 옮겼기에, 2군은 무인지대가 되어 사실상 폐지되었다. 229년에 제갈량이 진창현을 공격하면서 양동작전을 펼쳐 옛 무도군과 음평군 지역을 장악하고 군·현을 다시 설치했는데, 이때 다시 익주로 편입되었다. 촉한이 멸망한 뒤에 다시 옹주 소속이 되었다.
소속 [전한]익주자사부→[후한]량주자사부→[219]폐지, [229]익주→[263]옹주→[269]진주(秦州)→[서진]진주
치소 [전한]무도도→[후한]하변도
폐지 [219]상록현, [서진]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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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무도군(9현 51,376호 235,560구)[13]: 무도도, 상록현, 고도현, 하지현, 평락도, 저현[14], 가릉도, 순성도, 하변도
무도군낙평군(樂平郡), 무도도→순로도(循虜道), 고도현→선치현(善治縣), 하지현→낙평정현(樂平亭縣), 하변도→양덕도(楊德道)
후한 무도군(7성 20,102호 81,728구): 하변도, 무도도, 상록현, 고도현, 하지현, 저현, 강도
서진 무도군(5현 3,000호): 하변현, 하지현, 저현, 무도현, 고도현 }}}}}}}}}

16. 음평군(陰平郡)

후한 때인 108년에 설치된 광한속국도위부(廣漢屬國都尉部)에 근원을 둔 군으로, 원래는 광한군 소속이었다. 저족이 주로 살던 지역으로 보이는데, 215년에 조조장로를 공격할 때 이 지역의 저족 집단들이 조조를 지원하여 장로와 장로에 예속되어 있던 관중제장의 잔당을 공격했기에, 장로가 항복한 뒤에 속국도위부를 음평군으로 승격시켰다. 219년 한중 공방전에서 패퇴한 조조유비가 계속 북상해올 것을 염려하여 무도군과 음평군의 주민들을 우부풍 괴리현의 소괴리로 옮겼기에, 2군은 무인지대가 되어 사실상 폐지되었다. 당시에 원주민이었던 저족들 또한 관중 지방으로 이주했는데, 이때의 사민 조치가 관념상으론 무도군과 음평군을 통폐합하는 조치였던지, 한중 공방전 중에 '음평군' 소속으로 언급되던 저족 수장 강단이 235년에는 '무도군' 소속 저왕(氐王)으로 등장한다. 사실상 폐지된 2군 지역은 옹주자사가 수비를 담당했다. 229년에 제갈량이 진창현을 공격하면서 양동작전을 펼쳐, 옛 무도군과 음평군 지역을 장악하고 군·현을 다시 설치했다. 촉한이 멸망한 뒤에 음평군이 폐지되어 자동군에 합병되었으나, 269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지명 [108]광한속국도위부→[215]음평군
소속 [108]익주자사부 광한군→[215]익주→[219]폐지, [229]익주→[263]폐지, [269]진주(秦州)→[서진]진주
치소 음평현
분합 [263]자동군에 병합→[269]음평군 재설치
폐지 [219]전저도
출신 저족: 강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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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광한속국도위부(3성 37,110호 205,652구): 음평도, 전저도, 강저도
서진 음평군(2현 3,000호): 음평현, 평무현[15] }}}}}}}}}

17. 주제군(朱提郡)

원래 건위군에 소속된 지역으로, 전한 때 이 지역의 경비는 건위군의 남부도위(南部都尉)가 관장했는데, 후한 초기 각 군에 설치된 도위가 모두 폐지되었을 때 남부도위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107년에 옛 남부도위 관할 구역에 속국도위를 설치하여 건위속국도위부(犍爲屬國都尉部)가 형성되었다. 214년 유비가 익주를 차지한 뒤에 남중 지방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위속국도위부를 승격시켜 주제군으로 개편했고, 등방을 주제태수로 임명하며 내항도독을 겸직하게 했다. 등방이 죽은 뒤에 내항도독은 교주자사 이회가 맡게 되었으나, 주제군은 계속 유지되었다. 225년 남중의 반란으로 인하여 치소가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맹획군이 주제에 성채를 건설했습니다.
지명 [107]건위속국도위부→[214]주제군
소속 [107]익주자사부 건위군→[214]익주→[서진]익주
치소 [214]남창현→[225?]주제현
남광군: 남광현
분합 [241?]남광군→[250?]폐지: 남광현 및 월수군 잠가현·안상현·마호현
전입 [214]건위군 남광현
설치 [214]남창현, [서진]당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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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건위속국도위부(2성 7,938호 37,187구): 주제현, 한양현
서진 주제군(5현 2,600호): 주제현, 남광현, 한양현, 남진현, 당랑현 }}}}}}}}}

17.1. 남광군(南廣郡)

『화양국지』에 따르면 연희(延熙) 연간인 238~257년 중에 9년 동안 남광군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고 전해진다. 주제군 남광현을 포함하여 월수군 소속인 잠가현·안상현·마호현 등, 도합 4개 현이 소속되어 운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위키백과 중문판에는 241년 이후에 운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동진 때 남광군이 재설치되면서 임리현(臨利縣)·상천현(常遷縣)·신흥현(新興縣) 등이 신설되었다.

18. 건녕군(建寧郡)

원래 전한 때인 기원전 109년에 한무제전(滇)나라를 복속시켜서 설치한 익주군(益州郡)이다. 225년 제갈량이 남중의 반란을 평정한 뒤에 익주군을 재편하여 건녕군을 설치했다. 271년에 영주(寧州)에 소속되었다. 서진에서 평낙군(平樂郡)을 설치해 흥천현(興遷縣)·평낙현(平樂縣)·삼차현(三沮縣)을 두었으나, 평낙군은 성한 소속이 되면서 폐지되었다.
지명 [-109]익주군→[225]건녕군
소속 전(滇)→[한]익주자사부→[271]영주(寧州)→[서진]영주
치소 [전한]전지현→[225]미현
분합 [225]운남군: 농동현
전입 [225]장가군 동병현·무단현
설치 [삼국]존마현·신정현·수운현·영구현, [서진]담고현(재설치)·누강현(재설치)·동락현
전출 [225]무절현·분고현→흥고군, [서진]승휴현→흥고군
폐지 [삼국]담고현·누강현, [서진]동로현·건령현·동병현
출신 유원현: 이회
현 미상: 맹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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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익주군(24현 81,946호 580,463구): 전지현, 쌍백현, 동로현, 동뢰현, 연연현, 유원현, 수미현, 곡창현, 진장현, 야롱현, 미현, 곤택현, 섭유현, 율고현, 불위현, 운남현, 전당현, 농동현, 비소현, 분고현, 무절현, 승휴현, 건령현, 내유현
익주군취신군(就新郡), 무절현→유절현(有棳縣), 승휴현→승북현(勝僰縣)
후한 익주군(17성 29,036호 110,802구): 전지현, 승휴현, 유원현, 율고현, 분고현, 무절현, 건령현, 곡창현, 목미현, 미현, 곤택현, 동뢰현, 동로현, 쌍백현, 연연현, 농동현, 진장현
서진 건녕군(17현 29,000호): 미현, 곤택현, 존마현, 신정현, 담고현, 무단현, 동뢰현, 누강현, 목마현, 곡창현, 연연현, 진장현, 쌍백현, 유원현, 수운현, 영구현, 전지현 }}}}}}}}}

19. 운남군(雲南郡)

225년 제갈량이 남중의 반란을 평정한 뒤에 설치했다. 271년에 영주(寧州)에 소속되었다. 후에는 313년에 하양군(河陽郡)을 설치해 하양현(河陽縣)을 두었고, 양수군(梁水郡)을 설치해 양수현(梁水縣)을 두었다.
소속 [225]익주→[271]영주(寧州)→[서진]영주
치소 농동현
전입 [225]익주군 농동현 및 영창군 엽유현·야룡현·운남현 및 월수군 수구현·청령현·고복현
설치 [서진]운평현·영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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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운남군(9현 9,200호): 운평현, 운남현, 농동현, 청령현, 고부현, 야룡현, 엽유현, 수구현, 영녕현 }}}}}}}}}

20. 월수군(越巂郡)

'巂'은 지명을 가리킬 때 '전'으로 읽을 수 있어 '월전군'으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越巂'는 이 지역에 존재하던 이민족을 지칭하는 것인 만큼, '월수'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 전한 때인 기원전 111년에 한무제남월 정복을 위한 목적으로 공도(邛都) 등 서남이를 복속시켜서 설치한 군으로, 익주자사부에 소속되었다. 223년에 남중의 반란으로 치소를 안상현으로 이전하였다가 240년에 환원했다. 후에는 월수군 일부와 장가군 일부를 떼어서 303년에 진녕군(晉寧郡)을 설치했다.
소속 서남이→[한]익주자사부→[서진]익주
치소 [전한]공도현→[223]안상현→[240]공도현
설치 [223]안상현, [삼국]잠가현·마호현·신도
전출 [225]수구현·청령현·고복현→운남군, [241?]잠가현·안상현·마호현→남광군
전입 [250?]남광군 잠가현·안상현·마호현
폐지 [삼국]영관도·대작현·작진현, [서진]삼봉현·천현·소기현·잠가현·안상현·마호현·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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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월수군(15현 61,208호 408,405구): 공도현, 수구현, 영관도, 대등현, 정작현, 회무현, 작진현, 대작현, 고부현, 삼강현, 소시현, 난현, 비수현, 첨가현, 청령현
월수군집수군(集巂郡)
후한 월수군(14성 130,120호 623,418구): 공도현, 수구현, 영관도, 대등현, 청령현, 비수현, 삼봉현, 회무현, 정작현, 천현, 소시현, 대작현, 작진현, 고부현
서진 월수군(5현 53,400호): 회무현, 공도현, 비수현, 정작현, 대등현 }}}}}}}}}

21. 영창군(永昌郡)

후한 때인 69년에 서남이인 애뢰(哀牢)[16]가 내부하자 익주군을 일부 분할해 설치했다.
소속 애뢰→[69]익주자사부→[271]영주(寧州)→[서진]영주
치소 [69]전당현→[후한]불위현
설치 [삼국]옹향현·영수현·남부현
전출 [225]섭유현·야룡현·운남현→운남군
출신 불위현: 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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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영창군(8성 231,897호 1,897,344구): 불위현, 전당현, 비소현, 섭유현, 야롱현, 운남현, 애뢰현, 박남현
서진 영창군(8현 38,000호): 불위현, 영수현, 비소현, 옹향현, 남부현[17], 전당현, 애뢰현, 박남현 }}}}}}}}}

22. 장가군(牂牁郡)

기원전 111년에 한무제남월 정복을 위한 목적으로 서남이를 복속시키고자 건위군을 분할해 설치했는데, 설치 당시에는 폐현에 치소를 두었으나, 그 해에 차란(且蘭)이 한나라의 통치에 저항하자 차란을 학살하고 고차란현을 설치하여 장가군의 치소를 옮겨왔다. 서진 이후인 303년에는 장가군과 월수군을 분할하여 진녕군(晉寧郡)을 설치했고, 311년에는 장가군과 주제군·건녕군을 분할하여 야랑군(夜郎郡)을 설치하였으며, 313년에는 평이군(平夷郡)을 설치했다.
소속 [한]익주자사부→[서진]익주
치소 [-111]폐현→[-111]고차란현
분합 [225]흥고군: 완온현·심봉현·누와현·구정현·진승현·서수현
설치 [삼국]병거현, [서진]만수현
전출 [225]동병현·무단현→건녕군
폐지 [삼국]담고현·누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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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장가군(17현 24,219호 153,360구): 고차란현, 심봉현, 폐현, 누와현, 평이현, 동병현, 담지현, 완온현, 무렴현, 야랑현, 무단현, 누강현, 서수현, 도몽현, 담고현, 진상현, 구정현
장가군동정군(同亭郡), 무렴현→유렴현(有斂縣), 야랑현→동정현(同亭縣), 구정현→종화현(從化縣)
후한 장가군(16성 31,523호 267,253구): 고차란현, 평이현, 폐현, 무렴현, 담지현, 야랑현, 동병현, 담고현, 누강현, 무단현, 완온현, 심봉현, 누와현, 구정현, 진승현, 서수현
서진 장가군(8현 1,200호): 만수현, 차란현, 담지현, 야랑현, 무검현[18], 병거현, 폐현, 평이현 }}}}}}}}}

23. 흥고군(興古郡)

225년 제갈량이 남중의 반란을 평정한 뒤에 설치했다.
소속 [225]익주→[271]영주(寧州)→[서진]영주
치소 [225]완온현→[서진]승휴현
전입 [225]장가군 완온현·심봉현·누와현·구정현·진승현·서수현과 익주군 무절현·분고현, [서진]건녕군 승휴현
설치 [275]율고현(재설치), [삼국]한흥현, [서진]도당현(재설치)
폐지 [삼국]율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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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흥고군(11현 6,200호): 율고현, 구정현, 완온현, 누와현, 무절현, 분고현, 승휴현, 심봉현, 한흥현, 진승현, 도당현[19] }}}}}}}}}

24. 같이보기

파일:실제 지도 후한 13주.png

[1] 지금의 간쑤성 남부 지역인 무도군은 이 당시 익주에 소속되었으나, 익주가 지나치게 넓어서였는지 후한 때는 양주(涼州)에 소속되었는데, 삼국시대에 제갈량이 점령하면서 다시 익주로 편입되었다.[2] 유언이 익주목으로 부임하면서 면죽현을 치소로 삼았으나, 194년에 큰 화재가 발생하면서 성도현으로 옮겼다.[3] 유장장로와 반목하면서 취한 조치이다. 201년엔 기존의 파군을 파서군으로 개명하고, 영녕군을 파군으로 개명했으며, 고릉군을 파동군으로 개명했다. 이를 통칭하여 '삼파(三巴)'라고 부른다. 새롭게 파군으로 개명된 옛 영녕군은 '신파군(新巴郡)'이란 별칭을 얻었다.[4] 고릉군 설치 이외엔 모두 조조가 한중을 장악한 뒤에 취한 조치이다. 방릉군이 설치된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이때 조조가 설치한 파동군은 고릉군과 다른 지역으로 218년에 유비가 점령하면서 탕거군으로 개명했다.[5] 조조가 양주(涼州) 무도군과 함께 폐지했다.[6] 기존의 광한군이 신도군으로 개명하고, 옛 동광한군은 광한군으로 재설치되었다.[7] 무도군은 전한 때 익주자사부 소속이었으나 후한 때 양주(涼州)자사부 소속으로 바뀌었는데, 이때 다시 익주 소속으로 변경되었다.[8] 이 자사직은 태수가 아닌 이회에게 자사의 감군(監軍) 권한을 마련하기 위한 것일 뿐, 실제 남중을 교주로 분할한 조치는 아니다.[9] 손권이 황제를 칭할 때 천하를 분할하는 맹약을 하면서 사례교위부 지방의 함곡관 이동 지역은 오나라의 영역으로 인정했던 만큼, 관념상 촉한이 정식 수도로 둔 것은 경조윤 장안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0] 76,256구[11] 『진서』 지리지에는 부성현(涪城縣)으로 오기(誤記)되었다.[12] 현대 중국어에서 브라질을 음차한 명칭 역시 이 한자를 쓴다. 헷갈리지 말자.[13] 『화양국지』에는 전한 때의 무도군 소속 9개 행정구역 목록이 기재되어 있는데, 판본에 따라서 무도현(武都縣)·평락현(平樂縣)·가릉현(嘉陵縣)·수성현(脩城縣)으로 표기되어 있다. 다른 판본과 비교해 보면, 후대에 임의로 '현(縣)'자를 붙인 것으로 판단된다.[14] 『화양국지』에는 저현 대신에 천가현(泉街縣)이 기재되어 있으나 오류로 보인다.[15] 『진서』 지리지에는 평광현(平廣縣), 『화양국지』에는 무평현(武平縣)으로 오기하였다.[16] 라오스인의 기록상의 첫 조상이다[17] 『화양국지』 일부 판본에는 남리현(南里縣)으로 오기되어 있다.[18] 『진서』 지리지에는 무렴현(毋歛縣)으로 오기하였다.[19] 『화양국지』의 일부 판본에는 도당현의 옛 이름 도몽현을 운몽현(雲夢縣)으로, 도당현을 당도현(唐都縣)으로 오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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