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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지명/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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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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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삼보(三輔)1.2. 농우(隴右) 지방
2. 경조군(京兆郡)
2.1. 상락군(上洛郡)
3. 빙익군(馮翊郡)4. 부풍군(扶風郡)
4.1. 한안군(漢安郡)4.2. 시평군(始平郡)
5. 신평군(新平郡)6. 북지군(北地郡)7. 안정군(安定郡)
7.1. 안동군(安東郡)?
8. 농서군(隴西郡)9. 천수군(天水郡)10. 남안군(南安郡)11. 광위군(廣魏郡)12. 같이보기

1. 개요


현재의 산시성(섬서성) , 간쑤성 , 닝샤 후이족 자치구 남부, 칭하이성 동부이다.

194년에 양주(涼州)를 분할해 설치한 옹주(雍州)는 원래 등 하서회랑 지역의 변경지대에 설치되었다. 213년에 조조구주를 회복한다는 구실로 사례교위와 양주자사(涼州刺史)를 폐지하여 양주 전역을 옹주에 병합하고, 사례교위부의 관중 지방을 옹주에 소속시켰다. 220년에 조비가 선양을 받은 뒤 사례교위와 양주자사를 다시 설치했는데, 홍농군만 사례교위부로 복귀하고, 무위군·금성군·서평군·장액군·서군·서해군·주천군·돈황군을 양주에 소속시켜, 이전의 양주와 옹주가 뒤바뀌었다. 서진 때인 269년에는 농우 지방인 농서국·천수군·남안군·약양군·금성군·무도군을 분할하여 진주(秦州)를 설치했다.

이 문서는 220년에 재편된 옹주에 관해 다루고 있으므로, 220년에 옹주에 소속된 지역의 연혁을 서술한다.

1.1. 삼보(三輔)

기원전 104년에 한무제가 경조윤·좌빙익·우부풍을 설치하고, 군(郡)이 설치되지 않은 관중 지방에서 태수와 비슷한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이 관직명들은 각자의 관할구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도 쓰이게 되었는데, 세 관직을 통칭하는 삼보(三輔)라는 별칭이 붙자 자연히 삼보 또한 관중 지방을 의미하는 지명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진(秦)에서 처음 군(郡)과 현(縣)을 도입했을 당시에는 군은 지방에 설치된 군사기지에 가까운 개념이었고 현은 중앙 직할의 행정구역으로 민정을 담당했다. 그러나 진나라의 영역이 점차 확장되어 중앙에서 모든 현을 직접 관할하기 어렵게 되자 점차 군에 민정 업무를 위탁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군이 여러 현을 관할하여 그 지방의 민정까지 총괄하는 행정구역 단위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군현제가 확립되었음에도 수도가 위치했던 관중 지방에는 군을 설치하지 않았었기에, 관중 지방의 현들은 여전히 중앙 조정에서 직접 관할했다. 중앙 조정에서 조세와 호구(戶口) 분야를 담당하던 내사(內史)가 그 업무의 성격상 직할지의 현들에 민정 지침을 내리는 일들이 잦았고, 이에 한나라 때는 내사가 관중 직할지에서 사실상 태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착각하여 이를 '내사지(內史地)'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사는 직할지의 현들만 관할하던 것이 아니라, 전국의 현을 대상으로도 같은 일을 했었다.

초한전쟁 초기 유방삼진(三秦)을 멸망시키고 수도를 한중군 남정현에서 약양현으로 옮기면서, 삼진 지역 80여 현을 하상군(河上郡)·위남군(渭南郡)·중지군(中地郡)·농서군·상군 5군으로 나눴다. 농서와 상군은 원래 진나라 때도 있었던 군이므로, 실질적으론 군이 설치된 적이 없었던 관중 지방을 3군으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 초한전쟁이 끝나고 수도를 장안현으로 옮기자, 기원전 198년에 다시 진나라 때처럼 관중 지방을 중앙 조정의 직할지로 편성하여 3군을 폐지했는데, 이때부터 내사가 기존의 조세와 호구 업무에 더하여 관중 지방의 민정까지 총괄하게 되었다. 진나라 때는 각 현들의 관할 영역이 넓은 편이었기에 전국의 현 숫자도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고, 전한 때에는 현의 규모가 축소되어 현이 늘어나긴 했으나, 군국제가 시행되던 특성상 각 왕국·후국이 행정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기에, 중앙 조정이 직접 통치하는 권역이 줄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군국제가 경제무제 재위 중에 해체되면서, 자연히 내사의 업무는 폭증했다. 경제 때인 기원전 155년에 치속내사를 분리하여 전국의 조세와 호구 분야의 임무를 전담하게 했지만, 이마저도 버티기 힘들었는지 기원전 143년에는 별도로 대농령(大農令) 관제를 마련했다.

군국제가 완전히 폐지된 무제 때인 기원전 135년에는 관중 지방을 양분하여 좌내사(左內史)와 우내사(右內史)가 각각 담당하게 했다. 기원전 104년에는 아예 관중 지방을 다시 3구역으로 나눠, 우내사를 경조윤으로 고쳐 옛 위남군 지역을 맡기고, 좌내사를 좌빙익으로 고쳐 옛 하상군 지역을 맡겼으며, 주작도위(主爵都尉)를 우부풍으로 고치고 옛 중지군 지역을 맡겼다. 원래 주작도위는 이십등작 제도의 운용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이 조치로 그 업무를 대홍려(大鴻臚)로 이관했다. 전한 때 삼보는 지방관이 아니라 엄연히 중앙 조정의 관료들이었기에 모두 장안에 있었는데, 삼보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도위(都尉)인 경보도위·좌보도위·우보도위는 각자의 임지에 주둔하여 업무를 수행했다.

기원후 4년에 왕망이 삼보를 통폐합하여 남부의 전휘광(前輝光)과 북부의 후승렬(後丞烈)로 고쳤다. 9년에는 전국의 태수를 대윤(大尹)으로 고쳤는데, 옛 삼보 지역에는 경조대윤(京兆大尹)을 두어 전휘광과 후승렬을 관할하게 했다. 14년에는 전휘광과 후승렬을 6위군(尉郡)으로 제편해 각 위군에 대부(大夫)를 임명하고 경조대윤의 관할을 받게 했다. 경조대윤과 6위대부는 중앙관으로 상안현(장안)에서 근무했다. 모두 신나라가 망하면서 환원되었다. 후한 때에는 수도가 낙양으로 정해졌음에도 광무제가 관중 지역에 옛 황제들의 능묘가 있음을 이유로 다시 삼보를 임명했지만, 관직 이름만 특별할 뿐 완전히 태수와 동일한 대우를 받아 하남윤과 차등이 있었고, 지방관으로 전환되어 각자의 임지로 부임했다.

190년에 동탁이 수도를 다시 장안으로 옮겼으나, 삼보의 위상에 특별히 변화된 점은 기록에 없다. 오히려 동탁 사후에 삼보는 이각곽사 등의 놀이터(...)가 되어 황폐해졌으며, 삼보의 난을 통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이각과 곽사가 몰락한 뒤에도 삼보는 관중제장으로 불리는 군소 군벌들이 할거하는 상태로 유지되었다가, 동관 전투 이후로 그들이 도주하거나 제거됨으로써 다시 안정을 찾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마등·마초 부자를 서량(西凉) 지역의 수장처럼 묘사하고, 마초와 한수를 제외한 관중제장들을 한수의 수하들로 묘사하고 있으나, 대부분 관중 지방의 독립 군벌이고 한수 정도만 농우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애초에 '서량'이라는 지방 명칭은 실제로 후한 말에는 쓰이지도 않았다.

조비가 선양을 받은 뒤에, 삼보 지방은 공식적으로 수도권 지위를 잃었다. 삼보는 사례교위부로 복귀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관직들도 폐지되어 모두 태수가 임명됨으로써 각각 경조군·빙익군·부풍군으로 격하되었다.[3] 촉한이 정식 수도인 장안을 회복하기 위해 분발하기는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2. 농우(隴右) 지방

진(秦)나라 때 현재의 류판산맥인 농판(隴阪) 이서에 군(郡)을 설치하면서 이를 '농서군(隴西郡)'으로 명명했다. 전한 이후로 농서군이 분할되면서 '농서'는 농판 이서 지방을 가리키는 지방의 이름으로도 쓰이게 되었는데, 이를 달리 '농우'로 표현하여 농서군과 구분하기도 했다. 삼국시대에는 농서군·천수군·남안군·광위군·금성군·서평군이 해당되는데, 이 중 금성군과 서평군은 220년에 양주(涼州)에 소속되었다. 269년에 진주(秦州)가 신설되자 서평군을 제외한 농서국·천수군·남안군·약양군(광위군)·금성군과 무도군·음평군이 진주에 소속되었다. 『진서』 지리지에 따르면 조비가 즉위 초에 옹주를 분할해 진주를 설치했다가 잠시 폐지되었으며 삼보는 사례교위부에 소속시켰다고 전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그 사실을 찾을 수 없을뿐더러 진주자사로 임명된 인물 또한 찾을 수 없으며 삼보는 옹주로 편성된 것만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진주 분할 구상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던 것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2. 경조군(京兆郡)

기원전 104년에 우내사를 삼보(三輔) 중 하나인 경조윤(京兆尹)으로 고치고 옛 위남군 영역을 관할하게 했다. 경조(京兆)란 '서울'을 뜻하는 한자 단어이고, 윤(尹)은 재상급의 고위 관리를 의미하므로, 경조윤이란 지금 말로 바꾸면 '서울장관', 즉 서울특별시장 같은 의미로 쓰인 관직명이다. 사마의의 아버지 사마방이 이 직책을 역임한 바 있다. 이처럼 원래는 관직명이었는데, 간혹 '경조윤이 관할하는 지역'이라는 의미로도 쓰여서 지명처럼 여겨진다. 왕망이 삼보를 폐지하고 전휘광과 후승렬이 관할하게 했다가, 기원후 14년에 6위군(尉郡)을 설치했을 때 옛 경조윤 관할지는 주로 광위군(光尉郡)과 익위군(翊尉郡)에 소속되었으나, 신나라가 망하면서 환원되었다. 경조윤은 전한 때 중앙관이었고, 경보도위(京輔都尉)의 치소는 화음현이었다. 후한 때 경조윤은 지방관이 되어 장안현에 치소를 두었다. 220년에 조비가 선양을 받으면서 경조군으로 격하되었다.
지명 [-205]위남군, [-135]우내사→[-104]경조윤, [14]광위군·익위군→[23]경조윤→[220]경조군→[221]진국(秦國)→[222]경조군→[235]진국→[244]경조군
소속 [진]관중, [-198]내사지→[-104]삼보→[-89]사례교위부→[-4]경사→[9]경조대윤→[23]사례교위부→[213]옹주→[서진]옹주
치소 장안현
상락군: 상락현
분합 [266]사례교위부 상락군: 상락현·상현 및 풍향(형주 위흥군 석현 분할)
전입 [189]량주자사부 안정군 음반현(교치), [220]빙익군 고륙현
설치 [267]사례교위부 상락군 거양현·풍향현
전출 [265]지양현→부풍국
폐지 [삼국]양릉현, [서진]장릉현 및 사례교위부 상락군 거양현·풍향현
출신 현 미상: 엄상
봉작 조례(曹禮): 진공(221~222)
조순: 진왕(235~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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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지관중 직할지(41현[4]): 함양현, 빈양현, 중천현, 영진현, 하규현, 고릉현, 남전현, 두현, 지양현, 운양현, 폐구현, 태현, 미양현, 임진현, 회덕현, 미현, 희현, 상현, 옹현, 약양현, 정현, 여읍현, 적도, 괴리현, 순읍현, 합양현, 두양현, 호치현, 견현, 칠현, 상락현, 아현, 하양현, 익양현, 무성현, 괵현, 풍현, 선사공현, 호현, 진창현, 징현, 무공현
소속 지역 및 연혁 미상: 학현(郝縣), 오취현(吳炊縣), 상림현(桑林縣), 용추현(容趨縣), 하방현(下邦縣), 추성현(秋城縣), 간하현(干下縣), 한현(旱縣), 신택현(新澤縣), 낙정현(樂定縣), 서환현(西奐縣), 무남현(武南縣), 독도현(督道縣), 신읍현(新邑縣), 신무현(信武縣), 말음현(抹陰縣), 기도현(杞桃縣), 귤읍현(橘邑縣), 신량현(新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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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경조군(9현 40,000호): 장안현, 두현[6], 패성현, 남전현, 고륙현, 만년현, 신풍현, 음반현,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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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상락군(上洛郡)

266년에 경조윤 상락현·상현 및 사주 홍농군 노지현 3현과 함께 형주 위흥군 석현의 일부를 분할해 설치했으며, 사례교위부에 소속되었다. 267년에 거양현과 풍향현이 설치되었으나, 280년대 이전에 모두 폐지되었다.

3. 빙익군(馮翊郡)

'馮'자는 고문헌에선 '의지하다'라는 의미로 쓰였는데, 나중에 이 글자가 주로 성씨 풍(馮)으로 쓰이게 되면서 의지하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는 ''자로 분화되어 버렸기에, 보통 馮자를 '풍'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 이에 보통 좌빙익(左馮翊)을 '좌풍익'으로 읽고 빙익군을 '풍익군'으로 읽는 경우가 많으나, 잘못 통용되는 것으로 사실은 '빙(憑)'으로 읽는 것이 옳다.

기원전 104년에 좌내사를 삼보(三輔) 중 하나인 좌빙익으로 고치고 옛 하상군 영역을 관할하게 했다. 왕망이 삼보를 폐지하자 좌빙익 지역은 대체로 후승렬이 관할하게 되었는데, 기원후 14년에 6위군(尉郡)을 설치했을 때 옛 좌빙익 관할지는 주로 사위군(師尉郡)과 열위군(烈尉郡)에 소속되었으나, 신나라가 망하면서 환원되었다. 좌빙익은 전한 때 중앙관이었기에 장안에서 근무했고, 좌보도위(左輔都尉)의 치소는 고릉현이었다. 후한 때 좌빙익은 지방관이 되면서 고릉현에 치소를 두었는데, 삼보의 난으로 인해 197년에 임진현으로 치소를 옮겼다. 220년에 조비가 선양을 받으면서 빙익군으로 격하되었다.
지명 [-205]하상군, [-135]좌내사→[-104]좌빙익→[4]후승렬→[14]사위군·열위군→[23]좌빙익→[41]좌빙익국(左馮翊國)→[54]좌빙익→[220]빙익군
소속 [-198]내사지→[-104]삼보→[-89]사례교위부→[-4]경사→[9]경조대윤→[23]사례교위부→[213]옹주→[263]진국(晉國)→[265]옹주→[서진]옹주
치소 [후한]고릉현→[197]임진현
분합 [223]북지군: 대우현
설치 [159]하규현
전출 [220]고륙현→경조군
폐지 [삼국]운양현·아현
봉작 사마소: 진공(263~)→왕(26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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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좌빙익(24현 235,101호 917,822구): 고릉현, 약양현, 책도, 지양현, 하양현, 아현, 속읍현, 곡구현, 연작현, 부현, 빈양현, 임진현, 중천현, 합양현, 대우현, 무성현, 심양현, 회덕현, 징현, 운릉현, 만년현, 장릉현[7], 양릉현, 운양현
경조대윤 사위군(10현): 고릉현→천춘현(千春縣), 약양현→사정현(師亭縣), 하양현→기정현(冀亭縣), 아현→달창현(達昌縣), 속읍현→속성현(粟城縣), 연작현, 중천현→조천현(調泉縣), 합양현, 징현→범애현(氾愛縣), 만년현→이적현(異赤縣)
경조대윤 열위군(10현): 책도→환현(渙縣), 지양현, 곡구현→곡훼현(谷喙縣), 부현→수령현(修令縣), 빈양현, 대우현, 장릉현→장평현(長平縣), 양릉현→위양현(渭陽縣), 운양현, 삭방자사부 상군 칠원현→칠장현(漆牆縣)
후한 좌빙익(13성 37,090호 145,195구): 고릉현, 지양현, 운양현, 대우현, 빈양현, 만년현, 연작현, 중천현, 임진현, 합양현, 하양현, 아현, 속읍현
서진 빙익군(8현 7,700호): 임진현, 하규현, 중천현, 빈양현, 속읍현, 연작현, 합양현, 하양현 }}}}}}}}}

4. 부풍군(扶風郡)

기원전 104년에 주작도위를 삼보(三輔) 중 하나인 우부풍(右扶風)으로 고치고 옛 중지군 영역을 관할하게 했다. 왕망이 삼보를 폐지하자 우부풍 지역은 대체로 전휘광이 관할하게 되었는데, 기원후 14년에 6위군(尉郡)을 설치했을 때 옛 우부풍 관할지는 주로 경위군(京尉郡)과 부위군(扶尉郡)에 소속되었으나, 신나라가 망하면서 환원되었다. 우부풍은 전한 때 중앙관이었기에 장안에서 근무했고, 우보도위(右輔都尉)의 치소는 미현이었다. 후한 때 우부풍은 지방관이 되면서 괴리현에 치소를 두었다. 220년에 조비가 선양을 받으면서 부풍군으로 격하되었다.
지명 [-205]중지군, [-104]우부풍→[4]전휘광→[14]경위군·부위군→[23]우부풍→[220]부풍군→[265]부풍국(扶風國)
소속 [-198]내사지→[-104]삼보→[-89]사례교위부→[-4]경사→[9]경조대윤→[23]사례교위부→[213]옹주→[서진]옹주
치소 [후한]괴리현→[266]지양현
한안군: 견현
시평군: 괴리현
분합 [189]한안군→[삼국]한흥군→[214]부풍군에 합병: 견현·두양현·진창현·옹현·유미현
[194]신평군: 칠현
[266]시평군: 괴리현·무릉현·시평현·호현·무공현
설치 [266]시평군 괴성현
전입 [265]경조군 지양현
폐지 [삼국]안릉현·순읍현, [서진]두양현·유미현 및 시평군 무릉현(시평현에 합병)
출신 미현: 법정, 맹달
무릉현: 마등·마초·마대 일족
시평현: 마일제, 사손서
봉작 사마량: 부풍왕(265~277)
사마준: 부풍왕(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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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우부풍(21현 216,377호 836,070구): 위성현, 괴리현, 호현, 주질현, 태현, 욱이현, 미양현, 미현, 옹현, 칠현, 순읍현, 유미현, 진창현, 두양현, 견현, 호치현, 괵현, 안릉현, 무릉현, 평릉현, 무공현
경조대윤 경위군(10현): 위성현→경성현(京城縣), 칠현→칠치현(漆治縣), 순읍현, 호치현→호읍현(好邑縣), 안릉현→가평현(嘉平縣), 평릉현→광리현(廣利縣), 삭방자사부 북지군 순고현, 삭방자사부 북지군 의거도→의구현(義溝縣), 삭방자사부 북지군 익거현, 삭방자사부 북지군 대요현
경조대윤 부위군(10현): 괴리현→괴치현(槐治縣), 태현, 미양현, 미현, 옹현, 유미현→부정현(扶亭縣), 두양현→통두현(通杜縣), 견현, 무릉현→선성현(宣城縣), 량주자사부 안정군 음밀현
후한 우부풍(15성 17,352호 93,091구): 괴리현, 안릉현, 평릉현, 무릉현, 호현, 미현, 무공현, 진창현, 견현, 유미국, 옹현, 순읍현, 미양현, 칠현, 두양현
서진 부풍군(6현 23,000호): 지양현, 미현, 옹현, 견현, 진창현, 미양현
시평군(5현 18,000호): 괴리현, 시평현, 무공현, 호현, 괴성현 }}}}}}}}}

4.1. 한안군(漢安郡)

189년에 우부풍 견현·두양현·진창현·옹현·유미현을 분할해 설치했다. 213년에 사례교위가 폐지되면서 옹주에 소속되었다. 213년 이전에 한흥군(漢興郡)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이고, 조비가 선양을 받은 220년 무렵에 폐지되어 부풍군으로 환원된 것으로 보이나, 모두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다.

4.2. 시평군(始平郡)

266년에 부풍국(扶風國) 괴리현·무릉현·시평현·호현·무공현을 분할해 설치되었다. 267년에 설치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부풍왕의 식읍을 조절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평군이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 만큼, 『진서』 지리지에 기록된 연도인 266년 쪽이 올바르다고 판단된다. 이 무렵 괴성현(蒯城縣)이 설치되었다. 277년에 시평왕 사마유의 식읍이 되어 시평국(始平國)으로 개편되었다. 사마유가 책봉된 해에 죽었으나, 새로 사마위가 시평왕에 책봉되어 군으로 환원되지는 않았다.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으나, 서진 때 무릉현이 폐지되었다.

5. 신평군(新平郡)

194년에 우부풍 칠현 및 안정군 순고현을 분할해 설치되었다.
소속 [194]사례교위부→[213]옹주→[서진]옹주
치소 칠현
전입 [197]우부풍 칠현 및 안정군 순고현
설치 [서진]분읍현(재설치)
전출 [서진]순고현→안정군
봉작 유찬: 신평왕(25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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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신평군(2현 2,700호): 칠현, 분읍현 }}}}}}}}}

6. 북지군(北地郡)

진(秦)나라가 서융 중 하나였던 의거(義渠)를 정복하고 그 땅에 설치한 군이었다. 후한 때인 26년에 팽총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흉노를 끌어들여 와 북지군 일대가 흉노에게 장악되어 사실상 폐지되었다가, 50년에 다시 복구했다.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으나 후한 말에 폐지되었는데, 이때 이미 강족이 대부분 거주하고 있었다. 215년에 조조오르도스 지방을 포기하여 병주의 4군을 폐지하고 신흥군으로 교치했을 때 북지군 또한 폐지된 것으로 짐작된다. 223년에 옹주 빙익군 대우현 지역에 다시 북지군을 설치하고 이양현과 부평현을 소속시켰는데, 아마도 북지군 출신 이민자들로 새로운 북지군을 구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한 때 북지군은 크게 지금의 간쑤성 동부의 농동(隴東) 지역과 지금의 닝샤 후이족 자치구 북부의 황하 유역 지역으로 나뉘는데, 후한 말 교치된 이양현은 전자인 농동 지역에 있던 현이었고 부평현은 후자인 황하 유역에 있던 현이었다.
소속 진(秦)→[전한]삭방자사부→[26]흉노, [50]량주자사부→[213]옹주→[215?]폐지, [223]옹주→[서진]옹주
치소 [진]의거도→[전한]마령현, [50]부평현, [223]대우현→[서진]이양현 대우
전입 [223]빙익군 대우현
설치 [223]이양현(재설치)·부평현(재설치), [서진]영주현(재설치)
폐지 [215?]이양현·부평현·영주현·익거현·염현·참련현, [서진]대우현(이양현에 합병)
출신 이양현: 부손
영주현: 부섭·부간·부현 3대
봉작 유심: 북지왕(259~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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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지군: 의거도, 음밀현, 안무현, 팽양현, 방거현, 이양현, 노현, 욱질현, 오지현, 귀덕현, 경양현, 조나현, 제도, 약반도, 장무현(長武縣·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북지군(19현 64,461호 210,688구): 마령현, 직로현, 영무현, 부평현, 영주현, 구연현, 방거현, 제도, 오가현, 순고현, 귀덕현, 회획현, 약반도, 이양현, 욱질현, 의거도, 익거현, 대요현, 염현
북지군위융군(威戎郡), 영무현→위융정현(威成亭縣), 부평현→특무현(特武縣), 영주현→영주현(令周縣), 제도→통도(通道), 오가현→오가현(吾街縣), 약반도→연년도(延年道), 이양현→이음현(泥陰縣), 욱질현→공저현(功著縣), 염현→서하정현(西河亭縣), 순고현·의거도·익거현·대요현→경조대윤 경위군
후한 북지군(6성 3,122호 18,637구): 부평현, 이양현, 익거현, 염현, 참련현, 영주현
서진 북지군(2현 2,600호): 이양현, 부평현 }}}}}}}}}

7. 안정군(安定郡)

기원전 114년에 북지군을 분할해 설치했다. 삼보의 난을 전후하여 안정군은 관중제장 가운데 양추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관 전투 이후 다른 관중제장 세력들이 패망하거나 장로에 의탁한 것과 달리, 양추는 투항하여 지위를 유지했다.
소속 [한]량주자사부→[213]옹주→[서진]옹주
치소 [전한]고평현→[후한]임경현
안동군: 삼수현?
분합 [삼국]안동군?→[214]폐지(속국도위?): 고평현·삼수현
전입 [서진]신평군 순고현
설치 [196]서천현, [서진]음밀현·도로현
전출 [189]음반현→경조윤(교치), [194]순고현→신평군
폐지 [서진]팽양현·경양현
출신 임경현: 호준 일족
조나현: 황보숭 일족
오지현: 양곡
현 미상:양관
봉작 유요: 안정왕(238~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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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안정군(21현 42,725호 143,294구): 고평현, 부루현, 안비현, 무이현, 조나현, 경양현, 임경현, 노현, 오지현, 음밀현, 안정현, 참련현, 삼수현, 음반현, 안무현, 저려현, 원득현, 순권현, 팽양현, 순음현, 월지도
고평현→포목현(鋪睦縣), 무이현→무녕현(撫寧縣), 임경현→감경현(監涇縣), 오지현→오정현(烏亭縣), 삼수현→광연정현(廣延亭縣), 안무현→안환현(安桓縣), 조려현→향례현(鄕禮縣), 월지도→오가현(吾街縣), 음밀현→경조대윤 부위군
후한 안정군(8성 6,094호 29,060구): 임경현, 고평현, 조나현, 오지현, 삼수현, 음반현, 팽양현, 순고현
서진 안정군(7현 5,500호): 임경현, 조나현, 오지현, 도로현, 순고현, 음밀현, 서천현 }}}}}}}}}

7.1. 안동군(安東郡)?

『삼국지』 무제기에서 214년에 안동군과 영양군을 폐지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안동군이 언제 설치되었는지나 어느 현이 소속되었는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213년 구주 통폐합을 기록한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가 『속한서』 백관지에 인용되어 있는데, 이때 옹주는 22군이 소속되었고 그 목록에 장액속국도위와 동안남(東安南)이 나열되고 있다. 이에 '동안남'를 '남안(南安)'의 오기(誤記)로 보고, 무제기의 '안동(安東)'도 '남안'의 오기로 보아 남안군과 영양군을 폐지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남안군이 214년에 폐지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장액속국도위가 독립된 행정구역이 아니었던 만큼, 기거주에서 '안동'과 '남안'을 '동안남'으로 오기한 것을 군 1곳으로 오인하여 22군을 맞추기 위해 나중에 임의로 장액속국도위를 덧붙인 것 같다.

안동군 폐지 기사는 하후연이 흥국 전투에서 승리한 일과 안정태수로 부임한 관구흥이 교위 범릉(範陵)에게 배반당한 일 사이에 서술되어 있다. 흥국 전투 이후 하후연이 고평현에서 도각(屠各)을 격퇴했으므로, 조조는 214년 무렵에야 고평현 일대의 안정군 북부를 장악할 수 있었다. 또한 범릉은 관구흥에게 자신을 속국도위로 삼아달라는 요구를 했는데, 참고로 안정군에는 전한 때부터 최북단의 삼수현에 속국도위가 설치되어 운영되어 왔었다. 이런 점들을 연관지어 보면, 안동군은 삼수현·고평현과 북지군 북부의 현들을 분할해 운영하던 것으로 보이고, 안동군이 폐지되면서 안정군으로 합병되자 범릉이 이전 안동군 지역을 속국도위부 영역으로 삼아 독립을 꾀한 것으로 판단된다. 범릉의 요구가 실제로 관철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실현되지 않았더라도 215년에 오르도스 지방을 포기했을 때 안정군 북부지역과 북지군도 함께 포기된 것으로 여겨진다.

8. 농서군(隴西郡)

진(秦)나라가 서융 중 하나였던 의거(義渠)를 정복하고 그 땅에 설치한 군이었다. 247년에 강유가 농우 지방 4군의 강족들을 봉기시켰을 무렵부터 촉한이 임조현 일대를 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254년에 적도와 하관현을 추가로 일시 점령하여 3현의 주민들을 익주로 사민했으며, 임조현 일대는 262년 후화 전투 때까지 촉한의 영역으로 남았다.
지명 [진]농서군→[265]농서국(隴西國)
소속 진(秦)→[한]량주자사부→[213]옹주→[269]진주→[서진]진주
치소 [진]적도→[111]양무현→[124]적도→[254?]양무현
전출 [188]저도→남안군
폐지 [220]백석현, [서진]부한현·장현·하관현
출신 적도: 왕국
부한현: 송건
임조현: 동탁
봉작 사마태: 농서왕(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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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서군: 적도, 서현, 난간현, 약양도, 상규현, 기현, 저도, 고도현, 임조현, 환도, 면저현, 양무현, 아양현, 하변도, 무도도, 여도, 성기현, 부한현, 강도, 유중현, 변도(辨道·연혁 미상), 융도(戎道·연혁 미상), 박도(薄道·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농서군(11현 53,964호 236,824구): 적도, 상규현, 안고현, 저도, 수양현, 여도, 대하현, 강도, 양무현, 임조현, 서현
농서군엽융군(厭戎郡), 적도→조로현(操虜縣), 저도→정도현(亭道縣), 여도→덕도(德道), 대하현→순하현(順夏縣), 양무현→상환현(相桓縣), 서현→서치현(西治縣)
후한 농서군(11성 5,628호 29,637구): 적도, 안고현, 저도, 수양현, 대하현, 양무현, 임조현, 부한현, 백석현, 장현, 하관현
서진 농서군(4현 3,000호): 양무현, 수양현, 임조현, 적도 }}}}}}}}}

9. 천수군(天水郡)

기원전 113년 농서군을 분할해 설치했다. 후한 때인 74년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개명했다가, 220년에 조비가 선양을 받자 옛 이름인 천수군으로 다시 고쳤다. 『전략』 같은 역사 기록에서 조차 마등의 아버지가 '천수군의 난간위'를 지냈다고 서술하는 등, 시기상 한양군일 때임이 분명해도 보통 천수군으로 기록되었고, 마찬가지로 『삼국지연의』에서도 한양군 시절일 때도 천수군으로 등장한다.
지명 [-113]천수군→[74]한양군→[220]천수군
소속 [한]량주자사부→[213]옹주→[269]진주→[서진]진주
치소 [전한]평양현→[후한]기현
분합 [188]남안군: 환도·용사현·난간현
[193]영양군→[214]한양군에 합병→[228?]광위군: 상규현
전입 [214]영양군 상규현
설치 [삼국]신양현
전출 [228?]아양현·농현·약양도·평양현→광위군
폐지 [삼국]망원현
출신 기현: 강유, 양부
현 미상: 염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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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천수군(16현 60,370호 261,348구): 평양현, 가천현, 융읍도, 망원현, 한견현, 면저도, 아양현, 약양도, 기현, 용사현, 성기현, 청수현, 봉첩현, 농현, 환도, 난간현
천수군진융군(塡戎郡), 평양현→평상현(平相縣), 융읍도→진융정현(塡戎亭縣), 망원현→망정현(望亭縣), 기현→기치현(冀治縣), 용사현→기덕현(紀德縣), 청수현→식목현(識睦縣), 난간현→난순현(蘭盾縣)
후한 한양군(13성 27,423호 130,138구): 기현, 망원현, 아양현, 약양도, 용사현, 성기현, 농현, 환도, 난간현, 평양현, 현친현, 상규현, 서현
서진 천수군(6현 8,500호): 상규현, 기현, 시창현, 신양현, 현신현, 성기현 }}}}}}}}}

10. 남안군(南安郡)

188년 한양군 환도를 분할해 설치했는데, 확인되진 않으나 한양군 용사현·난간현과 농서군 저도 지역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214년에 안동군과 영양군이 폐지되었는데, 이 안동군을 남안군의 오기(誤記)로 보아 이때 남안군이 폐지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제갈량의 첫 번째 북벌 당시 촉한에 호응한 군으로 언급되는 만큼, 228년 전에 남안군을 다시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발견되지 않으므로 이 의견이 옳다고 하긴 어렵다.
소속 [188]량주자사부→[213]옹주→[269]진주→[서진]진주
치소 환도
전입 [188]한양군 환도·용사현·난간현 및 농서군 저도
설치 [188?]신흥현·중도현
폐지 [삼국]용사현·난간현·저도
출신 환도: 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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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남안군(3현 4,300호): 환도, 신흥현, 중도현 }}}}}}}}}

11. 광위군(廣魏郡)

193년 한양군 상규현을 분할해 영양군(永陽郡)을 설치했으나, 214년에 영양군을 폐지하여 다시 한양군에 합쳤다. 제갈량의 첫 번째 북벌 이후인 228년 무렵에 상규현을 제외한 옛 영양군 지역과 농판 주변 일대에 광위군을 설치했다. 당시 농우 지방의 3군이 모두 촉한에 호응하여, 옹주자사 곽회가 상규현에 고립되었는데, 부풍군과 연결되는 지역을 별도로 분리하여 다른 3군이 촉한에 호응하더라도 농서 지방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차단당하지 않게 하려는 목적으로 해석된다.
지명 [193]영양군, [228?]광위군→[265]약양군(略陽郡)
소속 [193]량주자사부→[213]옹주→[214]한양군에 합병, [228?]옹주→[269]진주→[서진]진주
치소 [193]상규현, [228?]임위현
전입 [193]한양군 상규현, [228?]천수군 임위현·상규현·청수현·평양현·농현·아양현·약양도
설치 [193]면저도·청수현·한견현
전출 [214]상규현→한양군
폐지 [214?]한견현, [서진]농현·아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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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약양군(4현 9,320호): 임위현, 평양현, 약양도, 청수현 }}}}}}}}}

12. 같이보기

파일:실제 지도 후한 13주.png

[1] 215년에 오르도스 영역을 포기하면서 함께 폐지된 것으로 추측된다.[2] 한중 공방전 패전 이후, 유비가 북상할 것을 대비해 무도군과 익주의 음평군 영역을 방기하면서 군민과 저족 등 기존 주민 일부를 우부풍의 소괴리로 옮긴 것이다. 이 2군은 이후 229년에 촉한이 점령하여 복구하고 익주에 편입시켰다.[3] 마치 수도를 세종시로 정하면서 수도권이 '서부권'으로 불리게 되고 서울특별시가 서울광역시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4] 발견된 지명은 42곳이다.[5] 80,800호 246,200구[6] 『진서』 지리지에는 후한 이전 이름인 '두릉현'으로 표기되었다.[7] 50,057호 179,469구[8] 『삼국지』 하후연전에 따르면, 장합이 위수 남쪽의 길을 이용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해당 길목이 반드시 군대가 지나가지 못할 길은 아니라 판단된다.[9] 마이진설을 지지하는 의견 중엔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가정고진이 삼국시대의 가정이라 쓰였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으나, 해당 서적에서 실제로 확인되진 않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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