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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재의 산시성(섬서성) , 간쑤성 , 닝샤 후이족 자치구 남부, 칭하이성 동부이다.
194년에 양주(涼州)를 분할해 설치한 옹주(雍州)는 원래 등 하서회랑 지역의 변경지대에 설치되었다. 213년에 조조가 구주를 회복한다는 구실로 사례교위와 양주자사(涼州刺史)를 폐지하여 양주 전역을 옹주에 병합하고, 사례교위부의 관중 지방을 옹주에 소속시켰다. 220년에 조비가 선양을 받은 뒤 사례교위와 양주자사를 다시 설치했는데, 홍농군만 사례교위부로 복귀하고, 무위군·금성군·서평군·장액군·서군·서해군·주천군·돈황군을 양주에 소속시켜, 이전의 양주와 옹주가 뒤바뀌었다. 서진 때인 269년에는 농우 지방인 농서국·천수군·남안군·약양군·금성군·무도군을 분할하여 진주(秦州)를 설치했다.
이 문서는 220년에 재편된 옹주에 관해 다루고 있으므로, 220년에 옹주에 소속된 지역의 연혁을 서술한다.
- 치소(治所): [213]경조윤 장안현
- 양주자사: [후한]한양군 농현→[194?]한양군 기현
- 진주자사: [269]천수군 기현
- 188년: 양주(涼州) 한양군을 분할해 양주 남안군 설치.
- 189년: 사례교위부 우부풍을 분할해 사례교위부 한안군 설치.(213년 이전에 한흥군으로 개명)
- 193년: 양주(涼州) 한양군을 분할해 양주 영양군 설치.
- 194년: 사례교위부 우부풍을 분할해 사례교위부 신평군 설치. 양주(涼州)를 분할해 옹주 설치.
- 213년: 양주(涼州)와 옹주를 옹주로 통합함. 사례교위부 경조윤·좌빙익·우부풍·홍농군·한흥군·신평군이 이속됨.
- 214년: 안동군·영양군 폐지.
- 215년?: 북지군 폐지.[1]
- 219년: 무도군 폐지.[2]
- 220년: 옹주를 분할해 양주(涼州) 재설치. 홍농군이 사례교위부에 이속. 한흥군 폐지.
- 223년: 빙익군을 분할해 새로운 북지군 설치.
- 228년 이후: 천수군을 분할해 광위군 설치.
- 229년: 촉한이 옛 무도군 지역을 점령하고 군·현을 복구해 익주에 소속시킴.
- 263년: 익주 무도군이 이속됨.
- 266년: 경조군을 분할해 사례교위부 상락군 설치.
- 269년: 옹주 농우 지방을 분할하여 진주(秦州) 설치. 음평군이 양주(梁州)에서 진주로 이속함.
1.1. 삼보(三輔)
기원전 104년에 한무제가 경조윤·좌빙익·우부풍을 설치하고, 군(郡)이 설치되지 않은 관중 지방에서 태수와 비슷한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이 관직명들은 각자의 관할구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도 쓰이게 되었는데, 세 관직을 통칭하는 삼보(三輔)라는 별칭이 붙자 자연히 삼보 또한 관중 지방을 의미하는 지명으로도 쓰이게 되었다.진(秦)에서 처음 군(郡)과 현(縣)을 도입했을 당시에는 군은 지방에 설치된 군사기지에 가까운 개념이었고 현은 중앙 직할의 행정구역으로 민정을 담당했다. 그러나 진나라의 영역이 점차 확장되어 중앙에서 모든 현을 직접 관할하기 어렵게 되자 점차 군에 민정 업무를 위탁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군이 여러 현을 관할하여 그 지방의 민정까지 총괄하는 행정구역 단위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군현제가 확립되었음에도 수도가 위치했던 관중 지방에는 군을 설치하지 않았었기에, 관중 지방의 현들은 여전히 중앙 조정에서 직접 관할했다. 중앙 조정에서 조세와 호구(戶口) 분야를 담당하던 내사(內史)가 그 업무의 성격상 직할지의 현들에 민정 지침을 내리는 일들이 잦았고, 이에 한나라 때는 내사가 관중 직할지에서 사실상 태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착각하여 이를 '내사지(內史地)'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사는 직할지의 현들만 관할하던 것이 아니라, 전국의 현을 대상으로도 같은 일을 했었다.
초한전쟁 초기 유방이 삼진(三秦)을 멸망시키고 수도를 한중군 남정현에서 약양현으로 옮기면서, 삼진 지역 80여 현을 하상군(河上郡)·위남군(渭南郡)·중지군(中地郡)·농서군·상군 5군으로 나눴다. 농서와 상군은 원래 진나라 때도 있었던 군이므로, 실질적으론 군이 설치된 적이 없었던 관중 지방을 3군으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 초한전쟁이 끝나고 수도를 장안현으로 옮기자, 기원전 198년에 다시 진나라 때처럼 관중 지방을 중앙 조정의 직할지로 편성하여 3군을 폐지했는데, 이때부터 내사가 기존의 조세와 호구 업무에 더하여 관중 지방의 민정까지 총괄하게 되었다. 진나라 때는 각 현들의 관할 영역이 넓은 편이었기에 전국의 현 숫자도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고, 전한 때에는 현의 규모가 축소되어 현이 늘어나긴 했으나, 군국제가 시행되던 특성상 각 왕국·후국이 행정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기에, 중앙 조정이 직접 통치하는 권역이 줄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군국제가 경제와 무제 재위 중에 해체되면서, 자연히 내사의 업무는 폭증했다. 경제 때인 기원전 155년에 치속내사를 분리하여 전국의 조세와 호구 분야의 임무를 전담하게 했지만, 이마저도 버티기 힘들었는지 기원전 143년에는 별도로 대농령(大農令) 관제를 마련했다.
군국제가 완전히 폐지된 무제 때인 기원전 135년에는 관중 지방을 양분하여 좌내사(左內史)와 우내사(右內史)가 각각 담당하게 했다. 기원전 104년에는 아예 관중 지방을 다시 3구역으로 나눠, 우내사를 경조윤으로 고쳐 옛 위남군 지역을 맡기고, 좌내사를 좌빙익으로 고쳐 옛 하상군 지역을 맡겼으며, 주작도위(主爵都尉)를 우부풍으로 고치고 옛 중지군 지역을 맡겼다. 원래 주작도위는 이십등작 제도의 운용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이 조치로 그 업무를 대홍려(大鴻臚)로 이관했다. 전한 때 삼보는 지방관이 아니라 엄연히 중앙 조정의 관료들이었기에 모두 장안에 있었는데, 삼보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도위(都尉)인 경보도위·좌보도위·우보도위는 각자의 임지에 주둔하여 업무를 수행했다.
기원후 4년에 왕망이 삼보를 통폐합하여 남부의 전휘광(前輝光)과 북부의 후승렬(後丞烈)로 고쳤다. 9년에는 전국의 태수를 대윤(大尹)으로 고쳤는데, 옛 삼보 지역에는 경조대윤(京兆大尹)을 두어 전휘광과 후승렬을 관할하게 했다. 14년에는 전휘광과 후승렬을 6위군(尉郡)으로 제편해 각 위군에 대부(大夫)를 임명하고 경조대윤의 관할을 받게 했다. 경조대윤과 6위대부는 중앙관으로 상안현(장안)에서 근무했다. 모두 신나라가 망하면서 환원되었다. 후한 때에는 수도가 낙양으로 정해졌음에도 광무제가 관중 지역에 옛 황제들의 능묘가 있음을 이유로 다시 삼보를 임명했지만, 관직 이름만 특별할 뿐 완전히 태수와 동일한 대우를 받아 하남윤과 차등이 있었고, 지방관으로 전환되어 각자의 임지로 부임했다.
190년에 동탁이 수도를 다시 장안으로 옮겼으나, 삼보의 위상에 특별히 변화된 점은 기록에 없다. 오히려 동탁 사후에 삼보는 이각과 곽사 등의 놀이터(...)가 되어 황폐해졌으며, 삼보의 난을 통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이각과 곽사가 몰락한 뒤에도 삼보는 관중제장으로 불리는 군소 군벌들이 할거하는 상태로 유지되었다가, 동관 전투 이후로 그들이 도주하거나 제거됨으로써 다시 안정을 찾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마등·마초 부자를 서량(西凉) 지역의 수장처럼 묘사하고, 마초와 한수를 제외한 관중제장들을 한수의 수하들로 묘사하고 있으나, 대부분 관중 지방의 독립 군벌이고 한수 정도만 농우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애초에 '서량'이라는 지방 명칭은 실제로 후한 말에는 쓰이지도 않았다.
조비가 선양을 받은 뒤에, 삼보 지방은 공식적으로 수도권 지위를 잃었다. 삼보는 사례교위부로 복귀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관직들도 폐지되어 모두 태수가 임명됨으로써 각각 경조군·빙익군·부풍군으로 격하되었다.[3] 촉한이 정식 수도인 장안을 회복하기 위해 분발하기는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2. 농우(隴右) 지방
진(秦)나라 때 현재의 류판산맥인 농판(隴阪) 이서에 군(郡)을 설치하면서 이를 '농서군(隴西郡)'으로 명명했다. 전한 이후로 농서군이 분할되면서 '농서'는 농판 이서 지방을 가리키는 지방의 이름으로도 쓰이게 되었는데, 이를 달리 '농우'로 표현하여 농서군과 구분하기도 했다. 삼국시대에는 농서군·천수군·남안군·광위군·금성군·서평군이 해당되는데, 이 중 금성군과 서평군은 220년에 양주(涼州)에 소속되었다. 269년에 진주(秦州)가 신설되자 서평군을 제외한 농서국·천수군·남안군·약양군(광위군)·금성군과 무도군·음평군이 진주에 소속되었다. 『진서』 지리지에 따르면 조비가 즉위 초에 옹주를 분할해 진주를 설치했다가 잠시 폐지되었으며 삼보는 사례교위부에 소속시켰다고 전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그 사실을 찾을 수 없을뿐더러 진주자사로 임명된 인물 또한 찾을 수 없으며 삼보는 옹주로 편성된 것만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진주 분할 구상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던 것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2. 경조군(京兆郡)
기원전 104년에 우내사를 삼보(三輔) 중 하나인 경조윤(京兆尹)으로 고치고 옛 위남군 영역을 관할하게 했다. 경조(京兆)란 '서울'을 뜻하는 한자 단어이고, 윤(尹)은 재상급의 고위 관리를 의미하므로, 경조윤이란 지금 말로 바꾸면 '서울장관', 즉 서울특별시장 같은 의미로 쓰인 관직명이다. 사마의의 아버지 사마방이 이 직책을 역임한 바 있다. 이처럼 원래는 관직명이었는데, 간혹 '경조윤이 관할하는 지역'이라는 의미로도 쓰여서 지명처럼 여겨진다. 왕망이 삼보를 폐지하고 전휘광과 후승렬이 관할하게 했다가, 기원후 14년에 6위군(尉郡)을 설치했을 때 옛 경조윤 관할지는 주로 광위군(光尉郡)과 익위군(翊尉郡)에 소속되었으나, 신나라가 망하면서 환원되었다. 경조윤은 전한 때 중앙관이었고, 경보도위(京輔都尉)의 치소는 화음현이었다. 후한 때 경조윤은 지방관이 되어 장안현에 치소를 두었다. 220년에 조비가 선양을 받으면서 경조군으로 격하되었다.지명 | [-205]위남군, [-135]우내사→[-104]경조윤, [14]광위군·익위군→[23]경조윤→[220]경조군→[221]진국(秦國)→[222]경조군→[235]진국→[244]경조군 | ||
소속 | [진]관중, [-198]내사지→[-104]삼보→[-89]사례교위부→[-4]경사→[9]경조대윤→[23]사례교위부→[213]옹주→[서진]옹주 | ||
치소 | 장안현 상락군: 상락현 | ||
분합 | [266]사례교위부 상락군: 상락현·상현 및 풍향(형주 위흥군 석현 분할) | ||
전입 | [189]량주자사부 안정군 음반현(교치), [220]빙익군 고륙현 | ||
설치 | [267]사례교위부 상락군 거양현·풍향현 | ||
전출 | [265]지양현→부풍국 | ||
폐지 | [삼국]양릉현, [서진]장릉현 및 사례교위부 상락군 거양현·풍향현 | ||
출신 | 현 미상: 엄상 | ||
봉작 | 조례(曹禮): 진공(221~222) 조순: 진왕(235~2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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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대윤 익위군(10현): 신풍현, 선사공현→선리현(船利縣), 화음현→화단현(華壇縣), 정현, 호현, 하규현, 좌빙익 임진현→감진현(監晉縣), 좌빙익 무성현→환성현(桓城縣), 좌빙익 심양현→제창현(制昌縣), 좌빙익 회덕현→덕환현(德驩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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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락군(3현 17,000호): 상락현, 상현, 노지현 | }}}}}}}}} |
- 장안현(長安縣): 옹주자사(213~) 및 경조군 치소
전한의 수도였으나 후한은 수도를 낙양으로 정했다. 190년에 동탁이 다시 장안으로 천도하여 후한의 수도가 되었으나, 삼보의 난 도중 헌제가 장안에서 탈출하면서 196년에는 허현에 임시수도가 마련되었다. - 소속: [한]사례교위부 경조윤→[서진]옹주 경조군
- 위치: 《34.32383, 108.88207》 산시성 시안시 웨이양구(陕西省西安市未央区) 한장안성유지(汉长安城遗址)
- 아성(阿城): 《34.28441, 108.81956》
- 패성현(霸城縣)
- 지명: [진]지양현(芷陽縣)→[-171]패릉현(霸陵縣)→[220]패성현
- 소속: [진]관중→[한]사례교위부 경조윤→[서진]옹주 경조군
- 위치: 《34.36034, 109.06953》 산시성 시안시 린퉁구 마어가도 중리우촌(陕西省西安市临潼区马额街道冢刘村)
- 지도정(枳道亭): 《34.34895, 109.00417》
- 패릉(霸陵): 《34.25255, 109.11612》
문제의 무덤으로, 지양현이 패릉현이 되었던 것도 이를 관리할 능현(陵縣)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왕조들에서 이름을 바꾼 것도 당연한 일. - 두현(杜縣)
- 지명: [진]두현→[-65]두릉현(杜陵縣)→[220]두현
- 소속: [진]관중→[한]사례교위부 경조윤→[서진]옹주 경조군
- 위치: 《34.18450, 108.92208》 산시성 시안시 옌타구 두청가도(陕西省西安市雁塔区杜城街道)
- 패상(霸上): 《34.32359, 109.03690》
- 두릉(杜陵): 《34.18102, 109.02259》
선제의 무덤으로, 두현이 두릉현이 되었던 것도 이를 관리할 능현(陵縣)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며, 위나라 때 환원되었다. - 정현(鄭縣)
- 신풍현(新豐縣)
고제가 태상황을 위해 조성한 읍이 있어 신풍현이 되었는데, 아마도 189년에 옮긴 신풍현 치소가 그 읍에 해당하는 듯. - 지명: [-231]여읍현(驪邑縣·麗邑縣)→[-200]신풍현
- 소속: [진]관중→[한]사례교위부 경조윤→[서진]옹주 경조군
- 위치: 189년에 음반현이 신풍현으로 교치(僑置)되면서 신풍현 치소를 이전했다.
- ~189: 《34.39895, 109.25768》 산시성 시안시 린퉁구 친링가도 위츠촌(陕西省西安市临潼区秦陵街道鱼池村)
- 189~: 《34.44956, 109.37344》 산시성 시안시 린퉁구 셰커우가도 시야오촌(陕西省西安市临潼区斜口街道西窑村)
- 홍문정(鴻門亭): 《34.41441, 109.27544》
홍문연이 벌어진 곳이다. - 남전현(藍田縣)
- 소속: [진]관중→[한]사례교위부 경조윤→[서진]옹주 경조군
- 위치: 《34.23927, 109.14697》 산시성 시안시 바차오구 시왕가도 둥리촌(陕西省西安市灞桥区席王街道东李村)
- 남전관(藍田關): 《33.95802, 109.46652》?
- 요관(繞關): 《33.88808, 109.55619》
- 장릉현(長陵縣): 서진 폐지
- 소속: [전한]사례교위부 좌빙익→[후한]경조윤→[서진]폐지
- 위치: 《34.46370, 108.89930》 산시성 셴양시 징양현 가오좡진 왕지아바오촌(陕西省咸阳市泾阳县高庄镇王家堡村)
- 장릉(長陵): 《34.43479, 108.87665》
고제의 무덤으로, 장릉현은 원래 이를 관리할 목적으로 만든 능현(陵縣)이었다. 위나라 때는 조용히 묻어갔으나(...) 서진 때 얄짤없이 폐지되었다. - 고륙현(高陸縣)
- 지명: [-350]고릉현(高陵縣)→[220]고륙현
- 소속: [진]관중→[한]사례교위부 좌빙익→[220]경조윤→[서진]옹주 경조군
- 위치: 《34.53090, 109.07739》 산시성 시안시 가오링구(陕西省西安市高陵区)
- 지양현(池陽縣)
- 소속: [한]사례교위부 좌빙익→[삼국]옹주 경조군→[265]부풍국→[서진]옹주 부풍국
- 위치: 《34.53773, 108.83005》 산시성 셴양시 징양현(陕西省咸阳市泾阳县)
- 봉작
- 황백성(黃白城): 《34.67340, 108.95790》
- 장평관(長平觀): 《34.49057, 108.84511》
- 만년현(萬年縣)
- 소속: [한]사례교위부 좌빙익→[삼국]옹주 경조군→[서진]옹주 경조군
- 위치: 《34.62017, 109.27412》 산시성 시안시 옌량구 베이툰가도 신펑촌(陕西省西安市阎良区北屯街道新丰村)
- 봉작
- 번조: 만년후(192~195)
- 만년릉(萬年陵): 《34.70520, 109.21198》
한나라 태상황 부부의 무덤으로, 만년현은 원래 이를 관리할 목적으로 만든 능현(陵縣)이었다. - 음반현(陰槃縣·陰盤縣)
- 소속: [한]량주자사부 안정군→[189]사례교위부 좌빙익→[삼국]옹주 경조군→[서진]옹주 경조군
- 위치: 원래 안정군에 있었으나, 189년에 좌빙익으로 교치(僑置)되었다.
- ~189: 《35.34301, 107.73623》 간쑤성 칭양시 닝현(甘肃省庆阳市宁县)
- 189~: 《34.39895, 109.25768》 산시성 시안시 린퉁구 친링가도 위츠촌(陕西省西安市临潼区秦陵街道鱼池村)
- 여산(酈山): 《34.38135, 109.25387》
진시황릉. 원래는 신풍현 소속 지역이었겠지만, 신풍현이 이동한 만큼 여기에 표기한다. 위양현(渭陽縣): 삼국시대 중 폐지- 지명: 익양(弋陽)→[-153]양릉현(陽陵縣)→[168?]위양현
- 소속: [전한]사례교위부 좌빙익→[후한]경조윤→[삼국]폐지
- 위치: 《34.46260, 108.95570》 산시성 셴양시 징양현 가오좡진 루지아촌(陕西省咸阳市泾阳县高庄镇芦家村)
- 봉작
- 동백: 위양군(190~192)
- 양릉(陽陵): 《34.44387, 108.94077》
경제의 무덤으로, 양릉현은 원래 이를 관리할 목적으로 만든 능현(陵縣)이었다. 선사공현(船司空縣): 후한 폐지남릉현(南陵縣): 전한 말 폐지봉명현(奉明縣): 전한 말 폐지희현(戲縣): [진]관중→전한 폐지(신풍현에 합병)풍현(酆縣): [진]관중→전한 폐지(장안현에 합병)
주나라 때의 풍경(豐京)이다.
2.1. 상락군(上洛郡)
266년에 경조윤 상락현·상현 및 사주 홍농군 노지현 3현과 함께 형주 위흥군 석현의 일부를 분할해 설치했으며, 사례교위부에 소속되었다. 267년에 거양현과 풍향현이 설치되었으나, 280년대 이전에 모두 폐지되었다.- 상락현(上洛縣): 상락군 치소
- 지명: [진]상락현(上雒縣)→[후한]상락국(上雒國)→[220]상락현(上洛縣)
- 소속: [진]관중→[전한]사례교위부 홍농군→[후한]경조윤→[266]사례교위부 상락군→[서진]사주 상락군
- 위치: 《33.86989, 109.93246》 산시성 상뤄시 상저우구(陕西省商洛市商州区)
- 상현(商縣)
- 소속: [진]관중→[전한]사례교위부 홍농군→[후한]경조윤→[266]사례교위부 상락군→[서진]사주 상락군
- 위치: 《33.69952, 110.29559》 산시성 상뤄시 단펑현 단펑가도 구청촌(陕西省商洛市丹凤县丹凤街道古城村)
거양현(拒陽縣): 267년 설치→서진 폐지풍향현(豐鄕縣): 267년 설치→서진 폐지
3. 빙익군(馮翊郡)
'馮'자는 고문헌에선 '의지하다'라는 의미로 쓰였는데, 나중에 이 글자가 주로 성씨 풍(馮)으로 쓰이게 되면서 의지하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는 '憑'자로 분화되어 버렸기에, 보통 馮자를 '풍'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 이에 보통 좌빙익(左馮翊)을 '좌풍익'으로 읽고 빙익군을 '풍익군'으로 읽는 경우가 많으나, 잘못 통용되는 것으로 사실은 '빙(憑)'으로 읽는 것이 옳다.기원전 104년에 좌내사를 삼보(三輔) 중 하나인 좌빙익으로 고치고 옛 하상군 영역을 관할하게 했다. 왕망이 삼보를 폐지하자 좌빙익 지역은 대체로 후승렬이 관할하게 되었는데, 기원후 14년에 6위군(尉郡)을 설치했을 때 옛 좌빙익 관할지는 주로 사위군(師尉郡)과 열위군(烈尉郡)에 소속되었으나, 신나라가 망하면서 환원되었다. 좌빙익은 전한 때 중앙관이었기에 장안에서 근무했고, 좌보도위(左輔都尉)의 치소는 고릉현이었다. 후한 때 좌빙익은 지방관이 되면서 고릉현에 치소를 두었는데, 삼보의 난으로 인해 197년에 임진현으로 치소를 옮겼다. 220년에 조비가 선양을 받으면서 빙익군으로 격하되었다.
지명 | [-205]하상군, [-135]좌내사→[-104]좌빙익→[4]후승렬→[14]사위군·열위군→[23]좌빙익→[41]좌빙익국(左馮翊國)→[54]좌빙익→[220]빙익군 | ||
소속 | [-198]내사지→[-104]삼보→[-89]사례교위부→[-4]경사→[9]경조대윤→[23]사례교위부→[213]옹주→[263]진국(晉國)→[265]옹주→[서진]옹주 | ||
치소 | [후한]고릉현→[197]임진현 | ||
분합 | [223]북지군: 대우현 | ||
설치 | [159]하규현 | ||
전출 | [220]고륙현→경조군 | ||
폐지 | [삼국]운양현·아현 | ||
봉작 | 사마소: 진공(263~)→왕(264~265)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서진 이전 연혁 펼치기·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전한 | 좌빙익(24현 235,101호 917,822구): 고릉현, 약양현, 책도, 지양현, 하양현, 아현, 속읍현, 곡구현, 연작현, 부현, 빈양현, 임진현, 중천현, 합양현, 대우현, 무성현, 심양현, 회덕현, 징현, 운릉현, 만년현, 장릉현[7], 양릉현, 운양현 | |
신 | 경조대윤 사위군(10현): 고릉현→천춘현(千春縣), 약양현→사정현(師亭縣), 하양현→기정현(冀亭縣), 아현→달창현(達昌縣), 속읍현→속성현(粟城縣), 연작현, 중천현→조천현(調泉縣), 합양현, 징현→범애현(氾愛縣), 만년현→이적현(異赤縣) | ||
경조대윤 열위군(10현): 책도→환현(渙縣), 지양현, 곡구현→곡훼현(谷喙縣), 부현→수령현(修令縣), 빈양현, 대우현, 장릉현→장평현(長平縣), 양릉현→위양현(渭陽縣), 운양현, 삭방자사부 상군 칠원현→칠장현(漆牆縣) | |||
후한 | 좌빙익(13성 37,090호 145,195구): 고릉현, 지양현, 운양현, 대우현, 빈양현, 만년현, 연작현, 중천현, 임진현, 합양현, 하양현, 아현, 속읍현 | ||
서진 | 빙익군(8현 7,700호): 임진현, 하규현, 중천현, 빈양현, 속읍현, 연작현, 합양현, 하양현 | }}}}}}}}} |
- 임진현(臨晉縣): 빙익군 치소
- 지명: 대려(大荔)→[-221]임진현→[서진]대려현(大荔縣)
- 소속: [진]관중→[한]사례교위부 좌빙익→[서진]옹주 빙익군
- 위치: 200년에 현을 옮겼다.
- ~200: 《34.77930, 110.11311》 산시성 웨이난시 다리현 차오이진 쯔양촌(陕西省渭南市大荔县朝邑镇紫阳村)
- 200~: 《34.79725, 109.93905》 산시성 웨이난시 다리현(陕西省渭南市大荔县)
- 봉작
- 빈양현(頻陽縣)
- 연작현(蓮勺縣)
- 중천현(重泉縣)
- 소속: [진]관중→[한]사례교위부 좌빙익→[서진]옹주 빙익군
- 위치: 《34.81360, 109.71027》 산시성 웨이난시 푸청현 쳰얼향 중취안촌(陕西省渭南市蒲城县钤铒乡重泉村) 고성
- 봉작
- 부함: 청천후(淸泉侯·278~)
- 합양현(郃陽縣)
- 하양현(夏陽縣)
- 지명: 소량(少梁)
- 소속: [진]관중→[한]사례교위부 좌빙익→[서진]옹주 빙익군
- 위치: 《35.38499, 110.42111》 산시성 웨이난시 한청시 지촨진(陕西省渭南市韩城市芝川镇) 일대
- 봉작
- 호분: 하양자(264~)→후(265~)
- 속읍현(粟邑縣)
- 하규현(下邽縣): 30년 폐지→159년 재설치
- 소속: [진]관중→[전한]사례교위부 경조윤→[30]폐지, [159]좌빙익→[서진]옹주 빙익군
- 위치: 《34.62462, 109.67983》 산시성 웨이난시 린웨이구 샤오이진 베이저우촌(陕西省渭南市临渭区孝义镇北周村)
운양현(雲陽縣): 214년 이전 폐지
무위호군(撫夷護軍)의 관부가 위치한다. 214년 하후연이 아귀와 천만을 격파한 뒤에 그 둘의 부락민들을 미양현으로 옮겨와서 안이호군(安夷護軍)과 무위호군을 설치했다고 하는데, 무위호군이 위치한 운양현이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이미 그 이전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간혹 운양현을 '무이호군'의 독자 영역으로 보아서 좌빙익과는 독립된 군급 행정구역으로 표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기준을 적용하려면 안이호군이 위치한 미양현도 같은 잣대로 독립시켜 표시해야 하지만 그런 경우는 없다. 단순히 아귀와 천만의 저족 부락민들을 옛 운양현 지역으로 옮겨와 호군의 예하부대로 재편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소속: [진]관중→[한]사례교위부 경조윤→[후한]좌빙익→[삼국]폐지
- 위치: 《34.92633, 108.47769》 산시성 셴양시 춘화현 스리위안진 멍지아촌(陕西省咸阳市淳化县十里塬镇蒙家村)
아현(衙縣): 삼국시대 중 폐지약양현(櫟陽縣): 후한 폐지
'櫟'은 '력'·'로'·'약'·'조' 등으로 발음할 수 있는데, 지명에 쓰일 때는 '약'으로 발음한다. 원래 새왕(塞王) 사마흔의 수도였는데, 유방이 삼진(三秦)을 멸망시킨 뒤에 장안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수도로 썼다.책도(翟道): 후한 폐지곡구현(谷口縣): 후한 폐지부현(鄜縣): 후한 폐지
211년 동관 전투 이후, 양흥은 좌빙익에서 약탈 활동을 하다가 정혼의 계책으로 밀려나 부성에서 농성하다 패망했는데, 아마도 양흥의 근거지로 추측된다.- 지명: 부성(鄜城)
- 소속: [진]상군→[전한]사례교위부 좌빙익→[후한]폐지
- 위치: 《35.57101, 109.61327》 산시성 옌안시 뤄촨현 투지진 차오마촌(陕西省延安市洛川县土基镇曹马村)
무성현(武城縣): 후한 폐지심양현(沈陽縣): 후한 폐지회덕현(褱德縣): 후한 폐지
삼국시대 중에 재설치되어 한동안 운영된 것으로 추정하는 의견이 있다.징현(徵縣): 후한 폐지운릉현(雲陵縣): 전한 말 폐지
4. 부풍군(扶風郡)
기원전 104년에 주작도위를 삼보(三輔) 중 하나인 우부풍(右扶風)으로 고치고 옛 중지군 영역을 관할하게 했다. 왕망이 삼보를 폐지하자 우부풍 지역은 대체로 전휘광이 관할하게 되었는데, 기원후 14년에 6위군(尉郡)을 설치했을 때 옛 우부풍 관할지는 주로 경위군(京尉郡)과 부위군(扶尉郡)에 소속되었으나, 신나라가 망하면서 환원되었다. 우부풍은 전한 때 중앙관이었기에 장안에서 근무했고, 우보도위(右輔都尉)의 치소는 미현이었다. 후한 때 우부풍은 지방관이 되면서 괴리현에 치소를 두었다. 220년에 조비가 선양을 받으면서 부풍군으로 격하되었다.지명 | [-205]중지군, [-104]우부풍→[4]전휘광→[14]경위군·부위군→[23]우부풍→[220]부풍군→[265]부풍국(扶風國) | ||
소속 | [-198]내사지→[-104]삼보→[-89]사례교위부→[-4]경사→[9]경조대윤→[23]사례교위부→[213]옹주→[서진]옹주 | ||
치소 | [후한]괴리현→[266]지양현 한안군: 견현 시평군: 괴리현 | ||
분합 | [189]한안군→[삼국]한흥군→[214]부풍군에 합병: 견현·두양현·진창현·옹현·유미현 | ||
[194]신평군: 칠현 | |||
[266]시평군: 괴리현·무릉현·시평현·호현·무공현 | |||
설치 | [266]시평군 괴성현 | ||
전입 | [265]경조군 지양현 | ||
폐지 | [삼국]안릉현·순읍현, [서진]두양현·유미현 및 시평군 무릉현(시평현에 합병) | ||
출신 | 미현: 법정, 맹달 무릉현: 마등·마초·마대 일족 시평현: 마일제, 사손서 | ||
봉작 | 사마량: 부풍왕(265~277) 사마준: 부풍왕(277~)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서진 이전 연혁 펼치기·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전한 | 우부풍(21현 216,377호 836,070구): 위성현, 괴리현, 호현, 주질현, 태현, 욱이현, 미양현, 미현, 옹현, 칠현, 순읍현, 유미현, 진창현, 두양현, 견현, 호치현, 괵현, 안릉현, 무릉현, 평릉현, 무공현 | |
신 | 경조대윤 경위군(10현): 위성현→경성현(京城縣), 칠현→칠치현(漆治縣), 순읍현, 호치현→호읍현(好邑縣), 안릉현→가평현(嘉平縣), 평릉현→광리현(廣利縣), 삭방자사부 북지군 순고현, 삭방자사부 북지군 의거도→의구현(義溝縣), 삭방자사부 북지군 익거현, 삭방자사부 북지군 대요현 | ||
경조대윤 부위군(10현): 괴리현→괴치현(槐治縣), 태현, 미양현, 미현, 옹현, 유미현→부정현(扶亭縣), 두양현→통두현(通杜縣), 견현, 무릉현→선성현(宣城縣), 량주자사부 안정군 음밀현 | |||
후한 | 우부풍(15성 17,352호 93,091구): 괴리현, 안릉현, 평릉현, 무릉현, 호현, 미현, 무공현, 진창현, 견현, 유미국, 옹현, 순읍현, 미양현, 칠현, 두양현 | ||
서진 | 부풍군(6현 23,000호): 지양현, 미현, 옹현, 견현, 진창현, 미양현 | ||
시평군(5현 18,000호): 괴리현, 시평현, 무공현, 호현, 괴성현 | }}}}}}}}} |
- 미현(郿縣)
192년 이후 마등·마초 세력의 근거지. - 소속: [진]관중→[한]사례교위부 우부풍→[서진]옹주 부풍국
- 위치: 《34.27720, 107.81211》 산시성 바오지시 메이현 창싱진 야오상촌(陕西省眉县常兴镇尧上村) 야오상진한유지(尧上秦汉遗址)
- 봉작
- 만세오(萬歲塢): 《34.28350, 107.81930》
미오(郿塢)로도 불린다. 190년에 동탁이 쌓은 성으로 그 크기가 장안성과 비슷했다고 전한다. - 미양현(美陽縣)
안이호군(安夷護軍)의 관부가 위치한다. 안릉현(安陵縣): 삼국시대 중 폐지- 소속: [한]사례교위부 우부풍→[삼국]폐지
- 위치: 《34.44500, 108.81510》 산시성 셴양시 웨이청구 디장가도 쑨지아촌(陕西省咸阳市渭城区底张街道孙家村)
- 안릉(安陵): 《34.42305, 108.84143》
혜제의 무덤으로, 안릉현은 원래 이를 관리할 목적으로 만든 능현(陵縣)이었다. 안릉 주변으로 원제의 위릉(渭陵·《34.39050, 108.73900》), 성제의 연릉(延陵·《34.37488, 108.69791》), 애제의 의릉(義陵·《34.40093, 108.76455》), 평제의 강릉(康陵·《34.39799, 108.71223》)이 조성되어 있으나 따로 능현을 설치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원제 이후에는 황릉을 조성할 때 능현을 설치하는 제도를 폐지한 것으로 보인다. 위성현(渭城縣): 기원전 200년 폐지→기원전 114년 재설치→후한 폐지
진(秦)나라의 수도 함양이었으나, 기원전 206년에 항우에 의해 파괴되었다.- 지명: [진]함양현(咸陽縣)→[-206]신성현(新城縣)→[-114]위성현
- 소속: [진]관중→[-200]폐지, [-114]우내사?→[전한]사례교위부 우부풍→[후한]폐지
- 위치: 《34.41219, 108.85463》 산시성 셴양시 웨이청구(陕西省咸阳市渭城区) 진함양성유지(秦咸阳城遗址)
주질현(盩厔縣): 후한 폐지태현(斄縣): 후한 폐지
폐현된 이후 태정(邰亭)으로 불렸는데, 『속한서』 군국지에는 미현(郿縣)에 소속된 지역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미현에 합병된 것으로 보인다. CHGIS나 『중국역사지도집』 등은 『태평환우기』를 토대로 후한 때에 태정에 무공현(武功縣)이 설치된 것으로 비정하였으나, 군국지의 기록과 충돌하기에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된다.욱이현(郁夷縣): 후한 폐지호치현(好畤縣): 후한 폐지괵현(虢縣): 후한 폐지
4.1. 한안군(漢安郡)
189년에 우부풍 견현·두양현·진창현·옹현·유미현을 분할해 설치했다. 213년에 사례교위가 폐지되면서 옹주에 소속되었다. 213년 이전에 한흥군(漢興郡)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이고, 조비가 선양을 받은 220년 무렵에 폐지되어 부풍군으로 환원된 것으로 보이나, 모두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다.- 견현(汧縣): 한안군 치소
- 소속: [진]관중→[한]사례교위부 우부풍→[189]한안군→[220?]옹주 부풍군→[서진]옹주 부풍국
- 위치: 《34.89141, 106.85296》 산시성 바오지시 룽현(陕西省宝鸡市陇县)
- 두양현(杜陽縣): 서진 폐지
- 소속: [진]관중→[한]사례교위부 우부풍→[189]한안군→[220?]옹주 부풍군→[서진]폐지
- 위치: 《34.74692, 107.62548》 산시성 바오지시 린유현 자오셴진(陕西省宝鸡市麟游县招贤镇)
- 옹현(雍縣)
- 소속: [진]관중→[한]사례교위부 우부풍→[189]한안군→[220?]옹주 부풍군→[서진]옹주 부풍국
- 위치: 《34.49225, 107.38869》 산시성 바오지시 펑샹현 청관진 마지아좡촌(陕西省宝鸡市凤翔县城关镇马家庄村)
- 진창현(陳倉縣)
학소가 이 현의 현령시절 제갈량의 침공을 막아내어 열후에 봉해졌다. - 소속: [진]관중→[한]사례교위부 우부풍→[189]한안군→[220?]옹주 부풍군→[서진]옹주 부풍국
- 위치: 《34.36926, 107.27860》 산시성 바오지시 진타이구 워룽쓰가도 리우지아타이촌(陕西省宝鸡市金台区卧龙寺街道刘家台村)
- 봉작
마대: 진창후(?~?)- 유미현(隃麋縣): 서진 폐지
- 지명: [전한]유미현(隃麋縣)→[후한]유미국(渝麋國)
- 소속: [한]사례교위부 우부풍→[189]한안군→[220?]옹주 부풍군→[서진]폐지
- 위치: 《34.64418, 107.14493》 산시성 바오지시 첸양현 청관진 첸촨촌(陕西省宝鸡市千阳县城关镇千川村)
익양현(棫陽縣): [진]관중→전한 폐지(옹현에 합병)
4.2. 시평군(始平郡)
266년에 부풍국(扶風國) 괴리현·무릉현·시평현·호현·무공현을 분할해 설치되었다. 267년에 설치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부풍왕의 식읍을 조절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평군이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 만큼, 『진서』 지리지에 기록된 연도인 266년 쪽이 올바르다고 판단된다. 이 무렵 괴성현(蒯城縣)이 설치되었다. 277년에 시평왕 사마유의 식읍이 되어 시평국(始平國)으로 개편되었다. 사마유가 책봉된 해에 죽었으나, 새로 사마위가 시평왕에 책봉되어 군으로 환원되지는 않았다.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으나, 서진 때 무릉현이 폐지되었다.- 괴리현(槐里縣·槐裏縣): 부풍군-시평군 치소
원래는 폐구현이었으나 전한 때 괴리현과 통합되었다. 현 치소는 견구(犬丘)인데, 옛 이름대로 폐구(廢丘)라고도 한다. - 지명: [진]폐구현(廢丘縣)→[한]괴리현
- 소속: [진]관중→[한]사례교위부 우부풍→[266]옹주 시평군→[서진]옹주 시평군
- 위치: 《34.26251, 108.50215》 산시성 셴양시 싱핑시 푸자이진 난쭤촌(陕西省咸阳市兴平市阜寨镇南佐村)
- 봉작
- 무릉현(茂陵縣): 서진 폐지
- 소속: [한]사례교위부 우부풍→[서진]폐지
- 위치: 《34.34693, 108.58281》 산시성 셴양시 싱핑시 난웨이진 징왕촌(陕西省咸阳市兴平市南位镇井王村)
- 무릉(茂陵): 《34.338131, 108.569439》
무제의 무덤으로, 무릉현은 원래 이를 관리할 목적으로 만든 능현(陵縣)이었다. 장릉현과 함께 위나라 때는 조용히 묻어갔으나 서진 때 얄짤없이 폐지되었다. - 시평현(始平縣)
- 지명: [전한]평릉현(平陵縣)→[220]시평현
- 소속: [한]사례교위부 우부풍→[266]옹주 시평군→[서진]옹주 시평군
- 위치: 《34.37203, 108.52646》 산시성 셴양시 싱핑시 난웨이진 구셴촌(陕西省咸阳市兴平市南位镇固显村)
- 호현(鄠縣)
- 소속: [한]사례교위부 우부풍→[266]옹주 시평군→[서진]옹주 시평군
- 위치: 《34.11182, 108.60390》 산시성 시안시 후이구(陕西省西安市鄠邑区)
- 봉작
- 동민: 호후(190~192)
- 무공현(武功縣): 30년 폐지→65년 재설치
- 소속: [진]관중→[한]사례교위부 우부풍→[30]폐지, [65]우부풍→[266]옹주 시평군→[서진]옹주 시평군
- 위치: 234년 무렵에 현 치소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CHGIS나 『중국역사지도집』 등은 『태평환우기』의 "태성(斄城)은 일명 무공성(武功城)"이라는 기록을 토대로, 후한 때부터 무공현이 전한 때의 태현(斄縣)이었던 태정(邰亭)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속한서』 군국지에는 태정이 미현(郿縣)에 소속된 지역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이와 충돌한다. 태현은 위수(渭水) 이북에 위치한 현이었고, 무공현은 위수 이남에 위치한 현이었는데, 모두 기원후 30년에 광무제가 일시에 폐지한 현들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무공현만 65년에 재설치 되었는데, 이때 원래의 태현 위치에 설치되었다는 단서는 없다. 무공현은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 당시에도 촉한군과 위군이 대치하고 있던 지점으로, 제갈량은 위수를 건너는 데 실패했고 사마의는 제갈량의 동진을 저지하고자 무공을 방어하는 입장이었는데, 이런 정황을 살펴보면 이때까지 무공현은 위수 이남에 있었음이 확실해 보인다. 아마도 이 당시 촉한이 위수 이남을 점거하자, 최전방 대치지점이었던 무공현의 치소를 위수 이북의 태정으로 옮겼고, 이에 태성이 무공성으로도 불리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에 따른다면 234년 무렵 이후의 무공현 치소는 태정(邰亭)이 된다. - ~234?: 《34.22775, 107.96592》 산시성 바오지시 메이현 헝취진 쑨지아위안촌(陕西省宝鸡市眉县横渠镇孙家塬村)
- 234?~: 《34.25887, 108.10019》 산시성 셴양시 양링구(咸阳市咸阳市杨陵区)
- 야곡관(斜谷關): 《34.18010, 107.66289》
야곡(斜谷)의 입구에 해당하며, 포곡(襃谷) 입구까지 포야도(襃斜道)를 이룬다. - 곽지오(郭氏塢): 《34.26897, 107.63221》
일반적으로 오장원과 동일한 위치로 본다. 제갈량이 마지막 북벌 때 주둔한 곳으로 난강(蘭坑)에 위치했다. - 오장원(五丈原): 《34.21945, 107.90836》?
제갈량이 보즐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대로 오장원을 제갈량의 본부가 아닌 촉한의 전군(前軍) 주둔지로 볼 경우, 현대의 오장원이 아니라 무공현 인근으로 비정된다. 당시 위나라 군대가 주둔한 마총(馬冢) 또는 양수(陽遂)는 오장원의 동쪽에, 북원(北原) 또는 적석(積石)은 오장원의 위수 건너편 북쪽에 해당한다. - 장성수(長城戍): 《34.08453, 108.11340》
줄여서 장성(長城)이라고도 한다. - 낙곡(駱谷): 《34.02564, 108.03869》
침령(沈嶺·《33.96491, 107.95613》)-아령(衙嶺·《33.82247, 107.73698》)-분수령(分水嶺·《33.71521, 107.63609》?)을 거쳐 당곡까지 당락도(儻駱道)를 이룬다. 괴성현(蒯城縣): 266년 설치괴리현(槐里縣): [진]관중→전한 폐지(폐구현과 통합)
폐현된 이후 소괴리(小槐里)로 불렸는데, 폐구현과 통합된 괴리현이 현의 치소를 옛 폐구현 치소로 정했기 때문에, 원래의 괴리를 소괴리로 구분해 부른 것이다. 219년에 조조가 한중 공방전에서 패배한 뒤, 유비가 북상할 것을 염려하여 옹주의 무도군과 익주의 음평군의 군민과 저족 등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당시 무도태수 양부가 이 업무를 주관했는데, 그 사이에 조조가 죽고 조비가 선양을 받는 초대형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중앙 조정에서 이 일은 잊혀졌는지,(...) 양부가 소괴리로 옮겨온 이래 10여 년간 다른 보직을 받지 못하고 성문교위(城門校尉)로 전보될 때까지 임지가 사라진 무도태수 직을 이어갔다.이쯤 되면 본인 문제한중 공방전 당시 음평군 소속의 저족 수령이던 강단이 235년에는 무도군 소속의 저왕(氐王)으로 언급되는 것을 볼 때, 소괴리로 옮겨온 무도군과 음평군 원주민들은 형식적으로는 무도군으로 통합되어 관리된 것으로 보인다.
5. 신평군(新平郡)
194년에 우부풍 칠현 및 안정군 순고현을 분할해 설치되었다.소속 | [194]사례교위부→[213]옹주→[서진]옹주 | |||
치소 | 칠현 | |||
전입 | [197]우부풍 칠현 및 안정군 순고현 | |||
설치 | [서진]분읍현(재설치) | |||
전출 | [서진]순고현→안정군 | |||
봉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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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현(漆縣): 신평군 치소
- 순고현(鶉觚縣)
- 지명: [전한]순고현(鶉孤縣)
- 소속: [전한]삭방자사부 북지군→[후한]량주자사부 안정군→[194]신평군→[서진]옹주 안정군
- 위치: 《35.19738, 107.62942》 간쑤성 핑량시 징촨현 량허향(甘肃省平凉市泾川县梁河乡)
- 봉작
- 부현: 순고남(264~)→자(265~)
순읍현(栒邑縣): 삼국시대 중 폐지→서진 재설치
6. 북지군(北地郡)
진(秦)나라가 서융 중 하나였던 의거(義渠)를 정복하고 그 땅에 설치한 군이었다. 후한 때인 26년에 팽총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흉노를 끌어들여 와 북지군 일대가 흉노에게 장악되어 사실상 폐지되었다가, 50년에 다시 복구했다.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으나 후한 말에 폐지되었는데, 이때 이미 강족이 대부분 거주하고 있었다. 215년에 조조가 오르도스 지방을 포기하여 병주의 4군을 폐지하고 신흥군으로 교치했을 때 북지군 또한 폐지된 것으로 짐작된다. 223년에 옹주 빙익군 대우현 지역에 다시 북지군을 설치하고 이양현과 부평현을 소속시켰는데, 아마도 북지군 출신 이민자들로 새로운 북지군을 구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한 때 북지군은 크게 지금의 간쑤성 동부의 농동(隴東) 지역과 지금의 닝샤 후이족 자치구 북부의 황하 유역 지역으로 나뉘는데, 후한 말 교치된 이양현은 전자인 농동 지역에 있던 현이었고 부평현은 후자인 황하 유역에 있던 현이었다.소속 | 진(秦)→[전한]삭방자사부→[26]흉노, [50]량주자사부→[213]옹주→[215?]폐지, [223]옹주→[서진]옹주 | ||
치소 | [진]의거도→[전한]마령현, [50]부평현, [223]대우현→[서진]이양현 대우 | ||
전입 | [223]빙익군 대우현 | ||
설치 | [223]이양현(재설치)·부평현(재설치), [서진]영주현(재설치) | ||
폐지 | [215?]이양현·부평현·영주현·익거현·염현·참련현, [서진]대우현(이양현에 합병) | ||
출신 | 이양현: 부손 영주현: 부섭·부간·부현 3대 | ||
봉작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서진 이전 연혁 펼치기·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진 | 북지군: 의거도, 음밀현, 안무현, 팽양현, 방거현, 이양현, 노현, 욱질현, 오지현, 귀덕현, 경양현, 조나현, 제도, 약반도, 장무현(長武縣·연혁 미상) 이외 미상 | |
전한 | 북지군(19현 64,461호 210,688구): 마령현, 직로현, 영무현, 부평현, 영주현, 구연현, 방거현, 제도, 오가현, 순고현, 귀덕현, 회획현, 약반도, 이양현, 욱질현, 의거도, 익거현, 대요현, 염현 | ||
신 | 북지군→위융군(威戎郡), 영무현→위융정현(威成亭縣), 부평현→특무현(特武縣), 영주현→영주현(令周縣), 제도→통도(通道), 오가현→오가현(吾街縣), 약반도→연년도(延年道), 이양현→이음현(泥陰縣), 욱질현→공저현(功著縣), 염현→서하정현(西河亭縣), 순고현·의거도·익거현·대요현→경조대윤 경위군 | ||
후한 | 북지군(6성 3,122호 18,637구): 부평현, 이양현, 익거현, 염현, 참련현, 영주현 | ||
서진 | 북지군(2현 2,600호): 이양현, 부평현 | }}}}}}}}} |
- 대우현(祋祤縣): 북지군 치소→서진 폐지(이양현에 합병)
- 이양현(泥陽縣): 215년 무렵 폐지→223년 재설치
- 소속: [진]북지군→[전한]삭방자사부 북지군→[후한]량주자사부 북지군, [223]옹주 북지군→[서진]옹주 북지군
- 위치: 215년 무렵 폐지된 한나라의 북지군과 223년에 새로 설치된 위나라의 북지군은 서로 다르다.
- 부평현(富平縣): 215년 무렵 폐지→223년 재설치
- 소속: [진]신진중→[전한]삭방자사부 북지군→[후한]량주자사부 북지군, [223]옹주 북지군→[서진]옹주 북지군
- 위치: 215년 무렵 폐지된 한나라의 북지군과 223년에 새로 설치된 위나라의 북지군은 서로 다르다.
가비능이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해, 231년에는 '옛 북지군의 석성[故北地石城]'에 주둔했다고 하는데, 이전 시대의 다른 기록들에선 북지군에 석성이란 지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223년에 북지군을 설치하고 난 뒤에, 원래 북지군의 군 치소가 위치했던 옛 부평현을 가리켜 '석성'이라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 한: 《37.92495, 106.08555》 닝샤 후이족 자치구 우중시 시아커우진(宁夏回族自治区吴忠市峡口镇)
- 위: 《34.75580, 109.14670》 산시성 웨이난시 푸핑현 청관향(陕西省渭南市富平县城关乡)
영주현(靈州縣): 215년 무렵 폐지→서진 재설치- 소속: [전한]삭방자사부 북지군→[후한]량주자사부 북지군→[215?]폐지, [서진]옹주 북지군
- 위치: 서진 때 원래의 영주현 위치에 옛 현을 복구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현에 옛 이름만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어디인지 알 수 없다.
- ~215?: 《38.02121, 106.28983》 닝샤 후이족 자치구 인촨시 링우시 하오지아챠오진(宁夏回族自治区银川市灵武市郝家桥镇)
익거현(弋居縣): 215년 무렵 폐지- 소속: [전한]삭방자사부 북지군→[후한]량주자사부 북지군→[215?]폐지
- 위치: 《35.41132, 107.90787》 간쑤성 칭양시 닝현 쨔오성진 판춘촌(甘肃省庆阳市宁县早胜镇樊村村)
염현(廉縣): 215년 무렵 폐지- 소속: [전한]삭방자사부 북지군→[후한]량주자사부 북지군→[215?]폐지
- 위치: 《38.49312, 106.27314》 닝샤 후이족 자치구 인촨시 싱칭구 만춘향(宁夏回族自治区银川市兴庆区满春乡)
참련현(參䜌縣): 215년 무렵 폐지마령현(馬領縣): 후한 폐지직로현(直路縣): 후한 폐지영무현(靈武縣): 후한 폐지- 위치: 《38.73369, 106.28645》 닝샤 후이족 자치구 인촨시 허란현 훙광진(宁夏回族自治区银川市贺兰县洪广镇)
구연현(昫衍縣): 후한 폐지- 소속: [진]신진중→[전한]삭방자사부 북지군→[후한]폐지
- 위치: 《37.74978, 107.42996》 닝샤 후이족 자치구 우중시 옌츠현 화마츠진(宁夏回族自治区吴忠市盐池县花马池镇) 동남측
방거현(方渠縣): 후한 폐지- 소속: [진]북지군→[전한]삭방자사부 북지군→[후한]폐지
- 위치: 《37.60072, 107.15663》 닝샤 후이족 자치구 우중시 옌츠현 칭산향(宁夏回族自治区吴忠市盐池县青山乡) 북측
제도(除道): 후한 폐지- 소속: [진]북지군→[전한]삭방자사부 북지군→[후한]폐지
오가현(五街縣): 후한 폐지귀덕현(歸德縣): 후한 폐지회획현(回獲縣): 후한 폐지약반도(略畔道): 후한 폐지욱질현(郁郅縣): 후한 폐지의거도(義渠道): 후한 폐지대요현(大𦥼縣): 후한 폐지
7. 안정군(安定郡)
기원전 114년에 북지군을 분할해 설치했다. 삼보의 난을 전후하여 안정군은 관중제장 가운데 양추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관 전투 이후 다른 관중제장 세력들이 패망하거나 장로에 의탁한 것과 달리, 양추는 투항하여 지위를 유지했다.소속 | [한]량주자사부→[213]옹주→[서진]옹주 | ||
치소 | [전한]고평현→[후한]임경현 안동군: 삼수현? | ||
분합 | [삼국]안동군?→[214]폐지(속국도위?): 고평현·삼수현 | ||
전입 | [서진]신평군 순고현 | ||
설치 | [196]서천현, [서진]음밀현·도로현 | ||
전출 | [189]음반현→경조윤(교치), [194]순고현→신평군 | ||
폐지 | [서진]팽양현·경양현 | ||
출신 | 임경현: 호준 일족 조나현: 황보숭 일족 오지현: 양곡 현 미상:양관 | ||
봉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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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고평현→포목현(鋪睦縣), 무이현→무녕현(撫寧縣), 임경현→감경현(監涇縣), 오지현→오정현(烏亭縣), 삼수현→광연정현(廣延亭縣), 안무현→안환현(安桓縣), 조려현→향례현(鄕禮縣), 월지도→오가현(吾街縣), 음밀현→경조대윤 부위군 | ||
후한 | 안정군(8성 6,094호 29,060구): 임경현, 고평현, 조나현, 오지현, 삼수현, 음반현, 팽양현, 순고현 | ||
서진 | 안정군(7현 5,500호): 임경현, 조나현, 오지현, 도로현, 순고현, 음밀현, 서천현 | }}}}}}}}} |
- 임경현(臨涇縣): 안정군 치소
- 소속: [한]량주자사부 안정군→[서진]옹주 안정군
- 위치: 《35.53933, 107.34059》 간쑤성 칭양시 전위안현 슈광향(甘肃省庆阳市镇原县曙光乡)
- 봉작
- 양추: 임경후(220 이후~?)
- 조나현(朝那縣)
- 소속: [진]북지군→[한]량주자사부 안정군→[서진]옹주 안정군
- 위치: 《35.85993, 106.46059》 닝샤 후이족 자치구 구위안시 구청진(宁夏回族自治区固原市古城镇)
- 소관(蕭關): 《35.69308, 106.29315》
관중 지방의 서북 경계이자 실크로드의 시종점 역할을 했던 관문으로, 그 상징성 때문에 시대별로 각자 다른 관문이 이 이름을 사용하였다. 한나라 때의 소관은 보통 이 위치에 있던 것으로 비정되는데, 시황제가 축성한 장성보다는 약간 남쪽에 있다. 때문에 진(秦)나라 때의 소관을 장성과 연결된 관문으로 보는 학자들은 한나라 때의 소관은 진나라 때의 소관과는 다르다고 여긴다. - 오지현(烏氏縣)
- 지명: [후한]오지현(烏枝縣)
- 소속: [진]북지군→[한]량주자사부 안정군→[서진]옹주 안정군
- 위치: 《35.66909, 106.40519》 닝샤 후이족 자치구 구위안시 징위안현 하오뎬향(宁夏回族自治区固原市泾源县蒿店乡)
- 팽양현(彭陽縣): 서진 폐지
- 경양현(涇陽縣): 후한 폐지→161년 무렵 재설치→서진 폐지
- 소속: [진]북지군→[한]량주자사부 안정군→[후한]폐지, [161?]안정군→[서진]폐지
- 위치: 《35.65226, 106.51180》 간쑤성 핑량시 쿵퉁구 안궈진 유팡좡촌(甘肃省平凉市崆峒区安国镇油房庄村)
- 봉작
- 서천현(西川縣): 196년 설치
음밀현(陰密縣): 후한 폐지→서진 재설치- 소속: [진]북지군→[전한]량주자사부 안정군→[후한]폐지, [서진]옹주 안정군
- 위치: 《35.03260, 107.39395》 간쑤성 핑량시 링타이현 바이리진 구청촌(甘肃省平凉市灵台县百里镇古城村)
- 봉작
- 호준: 음밀후(?~)
도로현(都盧縣): 서진 설치(옹주 안정군)- 위치: 《35.67657, 106.32393》 닝샤 후이족 자치구 구위안시 징위안현 리우판산진 양지아좡촌(宁夏回族自治区固原市泾源县六盘山镇杨家庄村)
부루현(復累縣): 후한 폐지안비현(安俾縣): 후한 폐지무이현(撫夷縣): 후한 폐지노현(鹵縣): 후한 폐지- 소속: [진]북지군→[전한]량주자사부 안정군→[후한]폐지
안정현(安定縣): 후한 폐지안무현(安武縣): 후한 폐지원득현(爰得縣): 후한 폐지순권현(眴卷縣): 후한 폐지- 위치: 《37.63176, 105.94106》 닝샤 후이족 자치구 중웨이시 중닝현 바이마향(宁夏回族自治区中卫市中宁县白马乡)
월지도(月氏道·月支道): 후한 폐지- 지명: [삼국]월지성(月支城)
- 위치: 《35.80911, 105.93397》 닝샤 후이족 자치구 구위안시 시지현 마롄향(宁夏回族自治区固原市西吉县马莲乡)
7.1. 안동군(安東郡)?
『삼국지』 무제기에서 214년에 안동군과 영양군을 폐지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안동군이 언제 설치되었는지나 어느 현이 소속되었는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213년 구주 통폐합을 기록한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가 『속한서』 백관지에 인용되어 있는데, 이때 옹주는 22군이 소속되었고 그 목록에 장액속국도위와 동안남(東安南)이 나열되고 있다. 이에 '동안남'를 '남안(南安)'의 오기(誤記)로 보고, 무제기의 '안동(安東)'도 '남안'의 오기로 보아 남안군과 영양군을 폐지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남안군이 214년에 폐지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장액속국도위가 독립된 행정구역이 아니었던 만큼, 기거주에서 '안동'과 '남안'을 '동안남'으로 오기한 것을 군 1곳으로 오인하여 22군을 맞추기 위해 나중에 임의로 장액속국도위를 덧붙인 것 같다.안동군 폐지 기사는 하후연이 흥국 전투에서 승리한 일과 안정태수로 부임한 관구흥이 교위 범릉(範陵)에게 배반당한 일 사이에 서술되어 있다. 흥국 전투 이후 하후연이 고평현에서 도각(屠各)을 격퇴했으므로, 조조는 214년 무렵에야 고평현 일대의 안정군 북부를 장악할 수 있었다. 또한 범릉은 관구흥에게 자신을 속국도위로 삼아달라는 요구를 했는데, 참고로 안정군에는 전한 때부터 최북단의 삼수현에 속국도위가 설치되어 운영되어 왔었다. 이런 점들을 연관지어 보면, 안동군은 삼수현·고평현과 북지군 북부의 현들을 분할해 운영하던 것으로 보이고, 안동군이 폐지되면서 안정군으로 합병되자 범릉이 이전 안동군 지역을 속국도위부 영역으로 삼아 독립을 꾀한 것으로 판단된다. 범릉의 요구가 실제로 관철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실현되지 않았더라도 215년에 오르도스 지방을 포기했을 때 안정군 북부지역과 북지군도 함께 포기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평현(高平縣): 214년 무렵 폐지- 지명: 제일성(第一城)
- 소속: [한]량주자사부 안정군→[214?]폐지
- 위치: 《36.01400, 106.28710》 닝샤 후이족 자치구 구위안시 위안저우구(宁夏回族自治区固原市原州区)
삼수현(三水縣): 214년 무렵 폐지- 소속: [한]량주자사부 안정군→[214?]폐지
- 위치: 《37.22113, 106.41461》 닝샤 후이족 자치구 우중시 퉁신현 시아마관진 상위안촌(宁夏回族自治区吴忠市同心县下马关镇上垣村) 훙청수이(红城水)고성
8. 농서군(隴西郡)
진(秦)나라가 서융 중 하나였던 의거(義渠)를 정복하고 그 땅에 설치한 군이었다. 247년에 강유가 농우 지방 4군의 강족들을 봉기시켰을 무렵부터 촉한이 임조현 일대를 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254년에 적도와 하관현을 추가로 일시 점령하여 3현의 주민들을 익주로 사민했으며, 임조현 일대는 262년 후화 전투 때까지 촉한의 영역으로 남았다.지명 | [진]농서군→[265]농서국(隴西國) | ||
소속 | 진(秦)→[한]량주자사부→[213]옹주→[269]진주→[서진]진주 | ||
치소 | [진]적도→[111]양무현→[124]적도→[254?]양무현 | ||
전출 | [188]저도→남안군 | ||
폐지 | [220]백석현, [서진]부한현·장현·하관현 | ||
출신 | 적도: 왕국 부한현: 송건 임조현: 동탁 | ||
봉작 | 사마태: 농서왕(265~)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서진 이전 연혁 펼치기·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진 | 농서군: 적도, 서현, 난간현, 약양도, 상규현, 기현, 저도, 고도현, 임조현, 환도, 면저현, 양무현, 아양현, 하변도, 무도도, 여도, 성기현, 부한현, 강도, 유중현, 변도(辨道·연혁 미상), 융도(戎道·연혁 미상), 박도(薄道·연혁 미상) 이외 미상 | |
전한 | 농서군(11현 53,964호 236,824구): 적도, 상규현, 안고현, 저도, 수양현, 여도, 대하현, 강도, 양무현, 임조현, 서현 | ||
신 | 농서군→엽융군(厭戎郡), 적도→조로현(操虜縣), 저도→정도현(亭道縣), 여도→덕도(德道), 대하현→순하현(順夏縣), 양무현→상환현(相桓縣), 서현→서치현(西治縣) | ||
후한 | 농서군(11성 5,628호 29,637구): 적도, 안고현, 저도, 수양현, 대하현, 양무현, 임조현, 부한현, 백석현, 장현, 하관현 | ||
서진 | 농서군(4현 3,000호): 양무현, 수양현, 임조현, 적도 | }}}}}}}}} |
- 양무현(襄武縣): 농서군 치소
- 적도(狄道)
254년에 강유가 일시 점령한 적이 있으나, 유지하지는 못했다. - 소속: [진]농서군→[한]량주자사부 농서군→[서진]진주 농서국
- 위치: 《35.37915, 103.85794》 간쑤성 딩시시 린타오현(甘肃省定西市临洮县)
- 종제(鍾提·鍾題): 《35.26250, 103.83069》
255년 적도 전투 이후 단곡 전투 시점까지 강유가 주둔했던 곳이다. 이 지점의 동북쪽에 있는 위징진(玉井镇)에는 요화가 쌓았다고 전해지는 '요화보(廖化堡)'라는 유적이 있다. - 고관(故關): 《35.57215, 103.78837》
- 무가(武街): 《35.34763, 104.01899》
- 수양현(首陽縣)
- 소속: [한]량주자사부 농서군→[서진]진주 농서국
- 위치: 《35.13949, 104.21017》 간쑤성 딩시시 웨이위안현(甘肃省定西市渭源县)
- 고성령(高城嶺)·위원성(渭源城): 《35.13613, 104.11672》
- 조서산(鳥鼠山)·조서동혈산(鳥鼠同穴山): 《35.08603, 104.09663》
- 부한현(枹罕縣): 서진 폐지
'枹'는 '포'로도 읽을 수 있기에 '포한현'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기록된 반절음에 따라 '부'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 부한현 출신인 송건은 부한현 한 곳만 차지하고는 하수평한왕(河首平漢王)을 자칭하며(...) 수십 년간 할거했다. - 소속: [진]농서군→[한]량주자사부 농서군→[서진]폐지
- 위치: 《35.60728, 103.21117》 간쑤성 린샤 후이족 자치주(甘肃省临夏回族自治州)
- 장현(鄣縣): 후한 설치→서진 폐지
- 소속: [후한]량주자사부 농서군→[서진]폐지
- 위치: 《34.83723, 104.44971》 간쑤성 딩시시 장현 옌징진(甘肃省定西市漳县盐井镇)
- 풍중(渢中): 《34.92957, 104.09865》 주변 일대
- 위시(爲翅): 《34.74836, 104.18607》?
- 하관현(河關縣): 서진 폐지
- 소속: [전한]량주자사부 금성군→[후한]농서군→[서진]폐지
- 위치: 《35.81487, 102.72148》 간쑤성 린샤 후이족 자치주 지스산 바오안족 둥샹적 사라족 자치현 다허지아진 다둔촌(甘肃省临夏回族自治州积石山保安族东乡族撒拉族自治县大河家镇大墩村)
- 임조현(臨洮縣)
247년 강유가 농우 지방 4군의 강족들을 봉기시켰을 무렵에 촉한이 점령하여, 262년 후화 전투 때까지 촉한의 영역으로 유지되었다. - 소속: [진]농서군→[한]량주자사부 농서군→[서진]진주 농서국
- 위치: 《34.43645, 104.03025》 간쑤성 딩시시 민현(甘肃省定西市岷县)
- 국산(麴山): 《34.36236, 104.48612》?
249년에 강유가 이 산에 국성(麴城)을 축성하려 시도했었다. - 우두산(牛頭山): 《34.21357, 103.92777》
이 산 인근에 조성(洮城)이 있었는데,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 망곡곡(望曲谷): 《34.37082, 103.95396》
- 색서성(索西城): 《34.54371, 104.07195》
- 용상성(龍桑城): 《34.59762, 104.00436》
- 조양(洮陽): 《34.68872, 103.35958》
- 후화(侯和): 《34.66898, 103.54720》
백석현(白石縣): 220년 폐지
강족의 반란으로 폐현되었다.- 소속: [전한]량주자사부 금성군→[후한]농서군→[220]폐지
- 위치: 《35.49667, 102.98101》 간쑤성 린샤 후이족 자치주 린샤현 한지진(甘肃省临夏回族自治州临夏县韩集镇)
대하현(大夏縣): 삼국시대 중 폐지- 소속: [한]량주자사부 농서군→[삼국]폐지
- 위치: 《35.47988, 103.51060》 간쑤성 린샤 후이족 자치주 광허현 알리마투자치향(甘肃省临夏回族自治州广河县阿力麻土自治乡)
안고현(安故縣): 삼국시대 중 폐지여도(予道): 후한 폐지- 소속: [진]농서군→[한]량주자사부 농서군→[후한]폐지
9. 천수군(天水郡)
기원전 113년 농서군을 분할해 설치했다. 후한 때인 74년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개명했다가, 220년에 조비가 선양을 받자 옛 이름인 천수군으로 다시 고쳤다. 『전략』 같은 역사 기록에서 조차 마등의 아버지가 '천수군의 난간위'를 지냈다고 서술하는 등, 시기상 한양군일 때임이 분명해도 보통 천수군으로 기록되었고, 마찬가지로 『삼국지연의』에서도 한양군 시절일 때도 천수군으로 등장한다.지명 | [-113]천수군→[74]한양군→[220]천수군 | ||
소속 | [한]량주자사부→[213]옹주→[269]진주→[서진]진주 | ||
치소 | [전한]평양현→[후한]기현 | ||
분합 | [188]남안군: 환도·용사현·난간현 | ||
[193]영양군→[214]한양군에 합병→[228?]광위군: 상규현 | |||
전입 | [214]영양군 상규현 | ||
설치 | [삼국]신양현 | ||
전출 | [228?]아양현·농현·약양도·평양현→광위군 | ||
폐지 | [삼국]망원현 | ||
출신 | 기현: 강유, 양부 현 미상: 염충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서진 이전 연혁 펼치기·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전한 | 천수군(16현 60,370호 261,348구): 평양현, 가천현, 융읍도, 망원현, 한견현, 면저도, 아양현, 약양도, 기현, 용사현, 성기현, 청수현, 봉첩현, 농현, 환도, 난간현 | |
신 | 천수군→진융군(塡戎郡), 평양현→평상현(平相縣), 융읍도→진융정현(塡戎亭縣), 망원현→망정현(望亭縣), 기현→기치현(冀治縣), 용사현→기덕현(紀德縣), 청수현→식목현(識睦縣), 난간현→난순현(蘭盾縣) | ||
후한 | 한양군(13성 27,423호 130,138구): 기현, 망원현, 아양현, 약양도, 용사현, 성기현, 농현, 환도, 난간현, 평양현, 현친현, 상규현, 서현 | ||
서진 | 천수군(6현 8,500호): 상규현, 기현, 시창현, 신양현, 현신현, 성기현 | }}}}}}}}} |
- 기현(冀縣): 양주(194?~220)·진주(269~)자사 및 천수군 치소
- 소속: [진]농서군→[전한]량주자사부 천수군→[후한]한양군→[서진]진주 천수군
- 위치: 《34.73837, 105.38878》 간쑤성 톈수이시 간구현 리우펑진(甘肃省天水市甘谷县六峰镇)
- 낙문취(雒門聚)·낙문(洛門): 《34.75418, 105.01878》
- 성기현(成紀縣)
- 소속: [진]농서군→[전한]량주자사부 천수군→[후한]한양군→[서진]진주 천수군
- 위치: 《35.24150, 105.68042》 간쑤성 핑량시 징닝현 즈핑향 리우허촌(甘肃省平凉市静宁县治平乡刘河村) 성기고성(成纪古城)
- 현친현(顯親縣): 32년 설치
- 지명: [32]현친국(顯親國)→[후한]현친현→[서진]현신현(顯新縣)
- 소속: [32]량주자사부 천수군→[후한]한양군→[서진]진주 천수군
- 위치: 《34.98159, 105.58992》 간쑤성 톈수이시 친안현 궈지아진 쉬퓌촌(甘肃省天水市秦安县郭嘉镇胥堡村)
- 흥국성(興國城): 《35.10122, 105.73318》
흥국성 남북으로 장리천(長離川)이 흘렀다. 하후연이 한수를 공격할 때 한수를 지원한 강족의 주둔지가 장리(長離)에 있었는데, 바로 장리천 유역을 가리킨다. - 상규현(上邽縣)
『위략』 서융전에서는 저족의 부락이 밀집한 지역 중 하나로 가(街)를 거론하는데, 이는 상규현의 '邽'가 잘못 쓰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소속: [진]농서군→[전한]량주자사부 농서군→[후한]한양군→[193?]영양군→[214]옹주 한양군→[서진]진주 천수군
- 위치: 《34.58530, 105.72580》 간쑤성 톈수이시(甘肃省天水市)
- 서현(西縣)
- 지명: [서진]시창현(始昌縣)
- 소속: [진]농서군→[전한]량주자사부 농서군→[후한]한양군→[서진]진주 천수군
- 위치: 서진 때 현을 이전했다.
- 서현: 《34.40626, 105.39648》 간쑤성 룽난시 리현 훙허진(甘肃省陇南市礼县红河镇)
- 시창현: 《34.26919, 105.53534》 간쑤성 룽난시 리현 바이관바오자치향(甘肃省陇南市礼县白关堡自治乡)
- 노성(鹵城): 《34.269173 105.49005》
강서와 양부가 마초를 상대로 거병한 거점이며, 231년엔 이 인근에서 노성 전투가 치러졌다. - 목문(木門)
『삼국지』 장합전에서 약양에 주둔한 장합이 제갈량이 기산으로 퇴각한 뒤에 그를 추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한 곳으로, 『삼국지』 후주전에는 청봉(靑封)으로 나온다. 그 비정으로 톈수이 무먼촌(木门村)설과 리현(礼县) 뤄지아바오(罗家堡)설이 제기되었는데, 『중국역사지도집』은 뤄지아바오설에 따라 노성 인근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위략』에는 높은 곳에 있던 복병이 궁노를 난사했다는 대목이 있어서, 최근에는 평지이며 궁노병을 매목시킬만한 지형이 아닌 뤄지아바오보다는 협곡 지형인 무먼촌설이 지지받는 편이다. - 무먼촌설: 《34.39039, 105.49885》
현지에서는 『삼국지연의』의 창작 지명인 '목문도(木門道)'로 불리고 있다. - 뤄지아바오설: 《34.30943, 105.54685》
- 기산(祁山): 《34.23089, 105.39401》
제갈량이 농우 지방으로 출병했을 때는 이곳에 본진을 설치했다. - 역성(歷城): 《34.10816, 105.31760》
- 유흉오(柔凶塢): 《34.46093, 105.57445》?
- 신양현(新陽縣): 220년 이후 설치
망원현(望垣縣): 삼국시대 중 폐지가천현(街泉縣): 후한 폐지(약양도에 합병)융읍도(戎邑道): 후한 폐지봉첩현(奉捷縣): 후한 폐지
10. 남안군(南安郡)
188년 한양군 환도를 분할해 설치했는데, 확인되진 않으나 한양군 용사현·난간현과 농서군 저도 지역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214년에 안동군과 영양군이 폐지되었는데, 이 안동군을 남안군의 오기(誤記)로 보아 이때 남안군이 폐지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제갈량의 첫 번째 북벌 당시 촉한에 호응한 군으로 언급되는 만큼, 228년 전에 남안군을 다시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발견되지 않으므로 이 의견이 옳다고 하긴 어렵다.소속 | [188]량주자사부→[213]옹주→[269]진주→[서진]진주 | |||
치소 | 환도 | |||
전입 | [188]한양군 환도·용사현·난간현 및 농서군 저도 | |||
설치 | [188?]신흥현·중도현 | |||
폐지 | [삼국]용사현·난간현·저도 | |||
출신 | 환도: 방덕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서진 이전 연혁 펼치기·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서진 | 남안군(3현 4,300호): 환도, 신흥현, 중도현 | }}}}}}}}} |
- 환도(豲道): 남안군 치소
'豲(獂)'은 '원'으로도 읽을 수 있어 '원도'로도 읽히는데, 지명을 가리킬 때는 '환'으로 읽는다. - 지명: [진]환도(獂道)
- 소속: [진]농서군→[전한]량주자사부 천수군→[후한]한양군→[188]남안군→[서진]진주 남안군
- 위치: 《34.92279, 104.74220》 간쑤성 딩시시 룽시현 원펑진 챠오먼촌(甘肃省定西市陇西县文峰镇乔门村)
- 적정(赤亭): 《34.96664, 104.73232》?
- 신흥현(新興縣): 188년 무렵 설치
- 소속: [188?]량주자사부 남안군→[서진]진주 남안군
- 위치: 《34.77539, 104.78641》 간쑤성 톈수이시 우산현 위안양진 지아먼촌(甘肃省天水市武山县鸳鸯镇颉门村)
- 무성산(武城山): 《34.71530, 104.77897》
258년에 강유가 설치한 무성위(武城圍)는 무성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신흥현의 경계에 설치된 듯하다. - 중도현(中陶縣): 188년 무렵 설치
- 소속: [188?]량주자사부 남안군→[서진]진주 남안군
- 위치: 《34.18934, 105.17864》 간쑤성 룽난시 리현(甘肃省陇南市礼县)?
『중국역사지도집』은 중도현을 신흥현에 가까운 위치인 위안양진(鸳鸯镇) 동부(《34.79422, 104.79805》)로 비정했는데, 해당 지점은 웨이허(渭河) 유역의 지협이라 현의 입지로 적절하지 않고, 신흥현과 너무 지나치게 인접한 문제가 있어, 적절한 비정인지 의심스럽다. 『십육국춘추』에서 319년에 기산(祁山)에서 지진이 일어나 중도원(中陶原)의 제방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건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중도현은 기산 주변의 평원 지대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입지 조건을 만족하면서 삼국시대를 전후한 시대에 다른 현으로 비정되는 위치가 아닌 곳은 리현(礼县) 일대가 유일하고 남안군의 다른 지점들과도 인접해 있으므로, 중도현은 이곳에 위치했던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용사현(勇士縣): 삼국시대 중 폐지- 소속: [전한]량주자사부 천수군→[후한]량주자사부 한양군→[삼국]폐지
- 위치: 《36.00798, 104.11124》 간쑤성 란저우시 위중현 진야진 구청촌(甘肃省兰州市榆中县金崖镇古城村)
- 만복(滿福): 전한 때 속국도위의 치소가 있었다. 위치는 미상.
난간현(蘭干縣): 삼국시대 중 폐지- 소속: [진]농서군→[전한]량주자사부 천수군→[후한]량주자사부 한양군→[삼국]폐지
- 위치: 《35.30347, 104.68625》 간쑤성 딩시시 룽시현 퉁안이진(甘肃省定西市陇西县通安驿镇)
저도(氐道): 삼국시대 중 폐지
11. 광위군(廣魏郡)
193년 한양군 상규현을 분할해 영양군(永陽郡)을 설치했으나, 214년에 영양군을 폐지하여 다시 한양군에 합쳤다. 제갈량의 첫 번째 북벌 이후인 228년 무렵에 상규현을 제외한 옛 영양군 지역과 농판 주변 일대에 광위군을 설치했다. 당시 농우 지방의 3군이 모두 촉한에 호응하여, 옹주자사 곽회가 상규현에 고립되었는데, 부풍군과 연결되는 지역을 별도로 분리하여 다른 3군이 촉한에 호응하더라도 농서 지방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차단당하지 않게 하려는 목적으로 해석된다.지명 | [193]영양군, [228?]광위군→[265]약양군(略陽郡) | |||
소속 | [193]량주자사부→[213]옹주→[214]한양군에 합병, [228?]옹주→[269]진주→[서진]진주 | |||
치소 | [193]상규현, [228?]임위현 | |||
전입 | [193]한양군 상규현, [228?]천수군 임위현·상규현·청수현·평양현·농현·아양현·약양도 | |||
설치 | [193]면저도·청수현·한견현 | |||
전출 | [214]상규현→한양군 | |||
폐지 | [214?]한견현, [서진]농현·아양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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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위현(臨渭縣): 후한 폐지→193년 재설치·광위군 치소
- 지명: [진]면저도(綿諸道)→[193]임위현
'諸'는 '제'로 읽는 것이 일반적이나, 여기에서는 촉군(蜀郡)의 면제도(綿虒道)와 구분하고자 '저'로 표기한다. - 소속: [진]농서군→[전한]량주자사부 천수군→[후한]폐지, [193]영양군→[214]옹주 한양군→[228?]광위군→[서진]진주 약양군
- 위치: 《34.55791, 105.97760》 간쑤성 톈수이시 마이지구 서탕진(甘肃省天水市麦积区社棠镇)
- 봉작
- 곽건(郭建): 임위현공(264~)
- 유성(柳城): 《34.53055, 106.44780》?
기록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열류성(列柳城)으로 볼 수 있어, 『삼국지연의』에도 열류성으로 나온다. 제갈량의 첫 번째 북벌 당시 고상이 주둔한 위치로, 연의에서는 가정 인근에 있는 것으로 설정했으나, 실제로는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위나라에서는 조진이 미현으로 출정해 포야도를 통해 진입한 조운을 요격한 뒤에 촉한에 호응한 안정군을 진압하러 갔고, 장합은 가정에서 마속을 패퇴시켰으며, 옹주자사 곽회가 이곳에 주둔한 고상을 격파했다. 다만 당시 곽회의 행적을 살펴보면, 제갈량이 기산으로 진입할 당시 천수태수 마준의 수행을 받으며 천수군 일대를 순행하고 있다가 급히 상규현으로 이동하고 마준도 동행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당시 상규현은 옹주자사나 천수태수의 치소가 아니었다. 상규현 일대의 치안을 담당하는 소규모의 상비병력 외엔 당시 이들이 실질적으로 통솔할 수 있는 병력은 없었을 것이나, 곽회가 해당 전공을 세운 것은 의아한 점이다. 아마도 곽회 휘하의 옹주군이 관중 지방에서 상규현으로 이동하여 고상과 충돌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고려하면 유성(열류성)은 부풍군에서 광위군(당시 천수군)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청수현(淸水縣): 후한 폐지→193년 재설치
- 소속: [전한]량주자사부 천수군→[후한]폐지, [193]영양군→[214]옹주 한양군→[228?]광위군→[서진]진주 약양군
- 위치: 《34.75998, 106.09151》 간쑤성 톈수이시 칭수이현 훙바오진(甘肃省天水市清水县红堡镇) 동측
- 아양현(阿陽縣): 서진 폐지
- 소속: [진]농서군→[전한]량주자사부 천수군→[후한]한양군→[228?]옹주 광위군→[서진]폐지
『중국역사지도집』에선 아양현이 삼국시대에 폐지된 것으로 보아 누락시켰는데, 서진 때 폐지된 것으로 확인된다. 아양현이 광위군에 소속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아양군이 천수현에 그대로 소속되었다면 평양현이 월경지가 되는 만큼, 광위군 소속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 위치: 《35.45072, 105.70518》 간쑤성 핑량시 징닝현 청촨진 주이터우촌(甘肃省平凉市静宁县城川镇咀头村)
- 농현(隴縣): 양주자사 치소(~194?)→서진 폐지
- 소속: [전한]량주자사부 천수군→[후한]한양군→[228?]옹주 광위군→[서진]폐지
『중국역사지도집』에선 농현이 삼국시대에 폐지된 것으로 보아 누락시켰는데, 서진 때 폐지된 것으로 확인된다. - 위치: 《34.99588, 106.21484》 간쑤성 톈수이시 장자촨 후이족 자치현(甘肃省天水市张家川回族自治县)
- 농관(隴關): 《34.88741, 106.51534》
- 약양도(略陽道)
- 소속: [진]농서군→[전한]량주자사부 천수군→[후한]한양군→[228?]옹주 광위군→[서진]진주 약양군
- 위치: 《34.99615, 105.98359》 간쑤성 톈수이시 친안현 룽청진(甘肃省天水市秦安县陇城镇)
- 가정(街亭)
전한 때의 가천현이 삼국시대에 불린 지명으로 보는 의견인 룽청진(陇城镇)설과 가정고진(街亭古鎭)을 삼국시대의 가정으로 보는 의견인 마이지진(麦积镇)설이 있다. 룽청진설에 따를 경우 가정은 당시 광위군 약양도 소속이 되나, 마아지진설을 따를 경우에는 광위군 임위현 소속이 된다. 주류설은 룽청진설로, 당시 관중 지방과 농우 지방의 주된 길목이었던 농관(隴關)을 통과하는 농관도(隴關道)가 놓인 지점에 해당된다. 반면 마이지진설은 주요 길목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려운 위치로 비정된다.[8] 본 문서에서는 룽청진설을 우선해 가정의 소속을 표기한다. - 룽청진설: 《35.02317, 106.02170》
현지에서는 '가정고전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마속은 가정의 남산(南山)에 진을 쳤으므로 해당 유적은 실제 전장 위치는 아니다. 룽청진설에 따를 경우, 가정 전투의 실제 전장은 《34.98303, 106.05544》 일대로 추정된다. - 마이지진설: 《34.45192, 105.99444》
현재의 제팅촌(街亭村)을 삼국시대의 가정으로 비정하는 의견으로, 청나라 때의 시진(市鎭)인 '가자구(街子口)'가 현존하고 있다. 가정고진이란 가자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제팅촌 현지에서는 명·청시대의 지명인 '가자(街子)'의 '子'자가 원래는 '亭'자를 의미한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9] - 평양현(平襄縣)
- 소속: [전한]량주자사부 천수군→[후한]한양군→[228?]옹주 광위군→[서진]진주 약양군
- 위치: 《35.14925, 105.37595》 간쑤성 딩시시 퉁웨이현 비위향 비위촌(甘肃省定西市通渭县碧玉乡碧玉村)
- 봉작
강유: 평양후(234~263)한견현(罕幵縣): 후한 폐지→193년 재설치→214년 무렵 폐지
12. 같이보기
[1] 215년에 오르도스 영역을 포기하면서 함께 폐지된 것으로 추측된다.[2] 한중 공방전 패전 이후, 유비가 북상할 것을 대비해 무도군과 익주의 음평군 영역을 방기하면서 군민과 저족 등 기존 주민 일부를 우부풍의 소괴리로 옮긴 것이다. 이 2군은 이후 229년에 촉한이 점령하여 복구하고 익주에 편입시켰다.[3] 마치 수도를 세종시로 정하면서 수도권이 '서부권'으로 불리게 되고 서울특별시가 서울광역시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4] 발견된 지명은 42곳이다.[5] 80,800호 246,200구[6] 『진서』 지리지에는 후한 이전 이름인 '두릉현'으로 표기되었다.[7] 50,057호 179,469구[8] 『삼국지』 하후연전에 따르면, 장합이 위수 남쪽의 길을 이용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해당 길목이 반드시 군대가 지나가지 못할 길은 아니라 판단된다.[9] 마이진설을 지지하는 의견 중엔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가정고진이 삼국시대의 가정이라 쓰였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으나, 해당 서적에서 실제로 확인되진 않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