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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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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제장
마초 한수 후선 정은 이감
장횡 양흥 성의 마완 양추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
신위천장군(神威天將軍)
금마초(錦馬超)
馬超
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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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colbgcolor=#FFFFFF,#1f2023> 위후(威侯)
작위 도정후(都亭侯) → 태향후(斄鄕候)
최종직위 표기장군(驃騎將軍) 겸 가절(假節) 영 양주목(領 涼州牧)
성씨(馬)
이름(超)
맹기(孟起)
아버지 마등
종제 마대(馬岱)
생몰 기간 176년 ~ 222년 (향년 4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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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유비) 평서장군(平西將軍) 겸 독임저(督臨沮)
좌장군(左將軍) 겸 가절(假節)
표기장군(驃騎將軍) 겸 가절(假節) 영 양주목(領 涼州牧)
후한 독군종사(督軍從事) → 편장군(偏將軍)
마초군 정서장군(征西將軍) 겸 독양주군사(督涼州軍事) 영 병주목(領 幷州牧) }}}}}}}}}
1. 개요2. 생애(정사)3. 연의4. 가족 관계5. 평가
5.1. 명성5.2. 통솔5.3. 무력5.4. 패륜아 논란
6. 여담7.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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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西川馬孟起(서천마맹기): 서천의 마맹기(마초의 자)는
名譽震關中(명예진관중): 명성이 관중을 뒤흔들었는데
信布齊誇勇(신포제과용): 한신, 영포와 같이 자랑할 만큼 용맹하고
關張可竝雄(관장가병웅): 관우, 장비와 나란히 할 수 있는 영웅이네.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 사례 우부풍 무릉현 사람이며 는 맹기(孟起). 시호는 위후(威侯).

후한의 개국공신이었던 대장군 마원의 후예이자, 관서의 군벌들을 이끌었던 맹주로서 서량에 군림하며 관중의 세력들을 위협했다. 강병들이 많았던 서량에서도 마초의 위용과 명성은 엄청난 것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성도의 유장을 항복시키거나 조조를 위협하고 주유가 유력한 동맹 상대로 인식하는 등 중국 전체에 걸쳐 크게 위세를 떨쳤다.

후세에는 천하의 조조마저 죽음 직전까지 몰고간 그의 용력과 중원을 진동시켰던 명성이 높이 평가되어 신위천장군(神威天將軍)[1], 서량의 금마초라는 이명과 함께 당대를 호령했던 영웅호걸로 전해지고 있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선 관우장비에 버금가는 관중 제일의 맹장으로 묘사된다.

유비 휘하 최고의 장수였던 오호대장군 가운데 유일하게 생몰년대가 자세한 인물이기도 하다.[2]

2. 생애(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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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외모가 수려해서 금마초(錦馬超:비단 같은 마초)라는 이명이 생겼다. 정사에서는 마초의 외모가 어떻다는 언급은 없고 건장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기에 연의의 창작으로 보인다.

우선 마초의 아버지 마등부터 이미지가 바뀐다. 정사에서 마등은 반란 세력에다가 동탁과도 연계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인품이나 통치에 있어선 훌륭했으며 관서 군벌 자체가 이합집산과 서로간 통수 때리기로 일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시대엔 이런 일이 흔했다. 실제로 이 양반은 동탁이 죽고나서 이각, 곽사에게 정서장군 직위를 받고 돌아온 다음에 익주의 유언과 손잡고 이각, 곽사를 칠 계획까지 짰던 인물이다. 어쨌거나 연의에서는 마등이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하고 나중에 유비와 함께 헌제혈서에 서명하는 등 반란자이자 난세를 틈탄 군벌에서 충신으로 이미지 체인지된다.

마초가 정사보다 일찍 등장한다. 장안을 점거한 이각 일파와 마등, 한수가 싸울 때 17세의 마초는 적장인 이몽, 왕방을 베는 활약을 보였으나 아버지인 마등이 패했기 때문에 패퇴했다.

연의에서 마등은 조조와 대립한 양주의 한 세력으로서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원소의 잔당인 고간, 곽원과 마씨 일족의 전투는 연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연의에서는 마등이 조조 암살 계획에 가담했기 때문에 마초는 일족의 대부분을 조조에게 모살당하고 만다. 양주에 있어서 난을 피한 마초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촌 동생인 마대와 함께 복수를 위해 거병하게 된다. 마초는 상복을 대신해서 흰 전포를 입었는데 사자 형상의 투구와 더불어 마초를 상징하는 아이템이 되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마초가 충렬지사로 변한 것이다. 정사에서 마초는 업에 자신의 일족들이 분명히 있음에도 관중제장들의 압박과 서량에 남은 자신의 일족들을 보전하기 위해 한중 쪽으로 이동하려는 조조군의 움직임을 보고 조조가 자신을 친다고 생각해 반란을 일으켜서 결국 마등 등 마초의 일족은 몰살돼버린다. 물론 이는 높은 관직에 눈이 멀어 어설프게 일족들을 나누어선 하나는 호랑이 입 속인 업으로, 하나는 그대로 서량에 잔류하게 만든 마등의 책임도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만약 마초가 군벌들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허도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조조에게 항복 의사를 표한다면 서량에 남아있는 마초의 일족들부터가 관중제장들의 손에 의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 했기에. 그러나 연의에서는 조조가 먼저 마등을 죽이고 마초는 그 복수를 위해 거병한다는 식으로 바뀌었다.

연의에서 한수의 부하들로 등장하는 수하팔부는 별로 비중이 없지만, 정사에서는 모두 관중의 유력 군벌들이었다. 봉기했을 때 마초군이 장안성을 함락시켰다는 것도 허구. 또한 장안성을 함락시킬 때 방덕이 계책을 내는데, '장안은 땅이 척박하고 물도 소금기가 있어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잠시 포위를 푸는 척해서 백성들이 성 바깥을 드나들면 그 때 공격하면 된다'라고 말한다. 마초는 이 계책을 받아들여서 장안을 함락시킨다. 이는 나관중이 연의를 집필할 때인 원말명초의 관중의 모습으로, 당시의 관중은 토지 염화가 심해진 상태였다. 실제 후한 말의 관중은 아직 이 정도로 척박하진 않았다.

곧바로 동관으로 군사를 휘몰아 조조와 승부를 벌인다. 동관 전투에서는 마초의 용맹함이 과장되어 이통을 찔러 죽이고 조조를 추격하자 겁이 난 조조는 자신의 기병들 사이에서 도망친다. 그러자 마초는 붉은 전포를 두른 놈이 조조라고 외치자[3] 붉은 전포를 벗어던지고 그 다음에는 수염기른 놈이 조조라고 하자 자신의 칼로 즉석에서 수염을 자르자 이번에는 '수염 짧은 놈이 조조다!"라고 하자 뭐 어쩌라는거야.... 옆에 있던 깃발을 잘라서 얼굴을 가리지만 오히려 더 티가 나 금방 발각되고 마초는 지구 끝까지 조조를 쫓아 갈 기세였지만 조홍이 겨우 구해주는 장면이 창작된다. 연의에서 몇 안되는 블랙 코믹한 장면이다. 여기에서 정신없이 부랴부랴 도망친다는 뜻의 할수기포(割鬚棄袍)라는 사자성어가 생겨났다.

정사에서 이통은 마초에게 죽은 게 아니며, 실제로 조조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인 건 맞지만[4] 조조가 수염을 자르는 장면은 없다. 중간에 웃통을 벗은 허저와 대결을 하는 장면이 있지만 창작이다. 마초는 허저와의 싸움을 통해선 "그 용맹이 지난날 여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조조의 찬사를 듣는다. 가후의 이간계에 의해 마초는 한수를 공격해 그의 한쪽 팔을 잘라버리지만 패주한다. 연의에서 한수는 이후 조조에게 투항하지만 정사에서 한수는 그 후에도 조조에 대항해 거병하다가 죽었다.

기성에서 양부 등의 계략에 속은 마초는 자신의 눈 앞에 아내 양씨 등 자기 가족들의 목이 떨어트려진다. 마초는 역성을 습격하여 분풀이로 그곳의 강서, 윤봉, 조앙의 가족들도 다 죽여버리는데 조앙의 아내 왕이만 남편이 있는 기산의 군중에 가 있어서 죽음을 면했다고 나온다. 정사에서 마초가 역성에서 죽인건 강서의 어머니 뿐으로 나머지 강서. 윤봉, 조앙의 가족들은 멀쩡히 살았다. 아마도 나관중이 가족이 몰살당한 마초가 불쌍해서 이런 화풀이 장면으로 추가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대로 장로에게 의탁하고 유장군의 원군으로서 파견되어 유비군의 장비와 일 대 일로 싸운다. 장비와의 대결을 통해서 유비와 제갈량으로부터 "과연 서량의 금마초다."라는 극찬을 듣는다. 마초는 제갈량의 책략에 의해 양송의 참언에 혹한 장로에게 의심받아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양송은 실존하지 않았던 인물이고 정사에서는 제갈량의 책략도 아니었다. 정사에서 장로에게 마초를 시기한 것은 양송의 형으로 나오는 양백이다. 뜬금없이 이회에게 마초의 친구라는 설정이 붙었고 마초는 이회의 설득에 의해 유비군에 투항한다. 유장은 원군이 오지 않는 것을 깨닫고 유비에게 항복한다.

유비 진영에 합류한 이후의 활약도 대폭 늘어나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군에게 광역 공포를 걸고 기습으로 적의 배후를 교란하며 맹활약, 마지막에는 복병으로 등장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다. 정사에서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이 사방장군에 임명되지만 연의에서는 이 멤버에 조운이 추가되어 오호대장군으로 바뀌었다.

정사에서는 유비가 죽기 1년 전에 죽었다. 그러나 연의에서는 수명이 늘어나서 유비 사후에도 조비의 오로군이 쳐들어왔을 때 제갈량의 명을 받들어 그중 한 갈래인 강족의 군대를 패기만으로 제압하는 등 활약을 이어간다. 다만 연의에서도 유비에게 귀부한 뒤로는 정사처럼 미묘하게 활약이 부족했는데 따로 죽음 장면은 묘사되어 있지 않으나 제갈량이 북벌을 나서면서 마초의 묘를 방문하는 장면이 있다. 이후 제갈량이 자길 빼놓고 북벌에 나선 것에 항의하기 위해 홀로 제갈량의 군대 앞을 가로막은 조운과의 대화에서도 '마초 장군마저 세상을 떠난 지금 오호대장군은 조운 장군 뿐이고, 그런 장군이 북벌에 나섰다가 변고라도 생기면 이는 곧 촉의 비극과도 같다.'라며 마초가 제갈량의 북벌 이전에 죽었음을 암시한다.

마초의 사촌 동생인 마대는 정사에서는 높은 관직과 작위를 받았음에도 딱히 비중이 없는 인물이지만[5] 연의에서는 마초 버프를 받아 제갈량 세대 촉한의 필두 무장 중 하나로 활약한다. 사실상 관흥, 장포처럼 오호대장군 2세대 보정으로 마초가 했을만한 공적들을 마초가 죽은 뒤에는 조금 너프해서 마대한테 몰아주어서 오호대장군의 스토리를 이어간 것.

4. 가족 관계

5. 평가

마초는 융족과 용력에 의지해 자신의 일족을 망쳤으니 애석하구나! 허나 곤궁함에 쳐했고 이로 인해 태평함으로 나아갔으니 오히려 더 낫지 않았는가.
진수정사 삼국지
표기장군(마초)는 분연히 일어나 서방의 호걸들과 합종하고 연횡하여 삼진의 땅에서 군사를 일으켜, 황하와 동수를 지배했다. 황실을 존중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으나 어떤 때는 모반하고 어떤 때는 동조한 탓에 적이 틈타서 집이 무너지고 군대가 멸망했다. 도덕을 어기고 봉황이나 용에게 의탁했다.
양희 《계한보신찬》

후한 말을 주름잡았던 난세의 호걸이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으며, 한신에게 비견되던 군재와 영포, 팽월을 떠올리는 용력은 당대의 이름난 군웅들도 한수 접어줄 만큼 뛰어났다. 특히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 어느 때 와해될지 모르는 이민족들을 규합하고 명망을 얻어 젊은 나이에 맹주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만 하더라도 마초의 위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수준.

마초의 전공과 생애를 살펴보면 제후의 반열에 들어간 명성과 엄청난 용력,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이민족들의 도움으로 관중 전체를 진동시켰으며, 몇 차례의 인상적인 군사적 성과를 거두면서 작금 천하에 마초라는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마초를 극혐한 친조조 성향의 양주의 명사인 양부조차도 마초를 두고 "한신, 영포와 비견될 만 하다."라며 그 능력만큼은 확실히 인정했고, 조조는 마초를 두려워해 '만약 마초가 살아있다면 자신의 무덤도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또한, 양주에서 멀리 떨어진 강동의 실권자 주유 또한 천하이분지계를 계획할 때 유비장로를 제치고 서량의 마초를 북벌에 필요한 최중요 동맹 요인으로 꼽았을 정도로 그 명성은 막강했다.

군벌이 아닌 군사지휘관으로서의 모습을 살펴봐도 종요를 비롯한 조조의 제장들이 상대하기 버거워했던 명장 곽원을 격파하고 참살하거나, 별동대를 이끌어서 조조를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붙이고, 조위의 손꼽히는 사령관이었던 하후연을 물리쳐서 서량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등 비록 조조의 군세에 중과부적으로 끝내 패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매우 화려한 전적을 보여주었다. 그밖에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성도의 유장을 항복시키거나 조조에게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도 곧바로 일어섰던 기록을 보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패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기도 했다.

허나 이처럼 화려한 전공과 명성을 가졌음에도 마초의 인생은 결코 순탄하진 못했는데, 아버지 마등과 한수의 갈등, 조조와의 대결, 아군에게 당한 뼈아픈 배신 등으로 인해 젊은 시절부터 몇 번이나 가족들이 몰살당했기 때문. 말년에 죽음이 임박하자 "저의 일족 대부분이 모두 조조에게 살해당하고 이젠 마대 한 명만이 남았으니 마대만이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 남길 말은 없습니다." 라며 유비에게 마대만이라도 건사해주길 간청했던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진수도 마초를 평할 때 일신의 용력과 이민족들을 규합하여 군세를 이끌며 천하를 진동하게 할 성과를 남긴 점은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그로 인해 불우한 인생을 살다갔음을 매우 불쌍히 여기며 안타까워했다.

이상과 같이 마초라는 인물은 당대와 후대를 가리지 않고 천하의 쟁쟁한 이들로부터 인정받은 군웅이었고, 단순히 명성만 뛰어나고 실속이 없는 인물이 아니라 그 드높은 명성과 본인의 능력을 이용해 중원을 뒤흔들 수 있는 뛰어난 군사지휘관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허나, 계속된 전란 탓에 수없이 가족들을 잃고 방랑하다가 비운의 삶을 마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5.1. 명성

"마초는 한신(韓信), 영포(英布)의 용맹을 갖추고 강(羌), 호(胡)의 마음을 심히 얻고 있습니다. 만약 대군(大軍)이 돌아가며 이를 엄히 방비하지 않는다면 농상(隴上)의 여러 군(郡)들은 국가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양부(楊阜)
마초는 병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성 아래 이르렀다. 그 소식에 성도 전체와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떠니, 유장은 곧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여 항복했다.
촉서 마초전

마초는 후한의 개국공신이었던 대장군 마원의 후손으로서 할머니가 강족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강족저족 등 서북 지역의 이민족들과 가까웠고, 이로써 그는 그들의 지지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7] 마초의 명성은 그가 거병할 때부터 중요한 이점으로 작용했으며, 조조에게 큰 패배를 겪고도 1년 만에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민족들에 대한 마초 본인의 강한 영향력과 명성 덕분이었다.

당대에 실제로 마초를 높이 평가했던 이들만 하더라도 조조, 유비, 제갈량, 관우, 주유 등 하나같이 천하에 쟁쟁한 인물들뿐이었다는 점도 후대에 마초의 명성을 드높이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만약 마초가 그저 뛰어난 장수에 불과했고 군벌로서의 능력이나 명성이 부족했다면 적국의 군주 내지는 사령관 급 인사들로부터 하나같이 두려움을 사거나 고평가를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일단 마초가 유비에게 귀부하자 유장과 성도의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벌벌 떨다 바로 항복했다는 기록이나 개국공신으로 숱한 공을 세운 장비를 제치고 표기장군에 임명된 사건, 주유가 천하이분지계를 계획할 때 유비가 아니라 마초와 동맹을 맺어 조조를 압박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 등 당시 마초에 대한 인식은 최소 중원을 뒤흔들 만한 제후의 반열로 여겨졌던 것임은 확실하다. 이는 마초라는 인물이 명성에 있어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당대 마초의 명성과 웅장위맹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고, 실제로 성도의 유장이 몹시 두려워하여 항복하게 만들거나 조조를 거의 죽일 뻔하는 등 그 높은 명성에 걸맞은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괜히 후세에 서량을 대표하는 영웅 '금마초'라 불리게 된 것이 아니다. 마초의 명성은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위왕 조조, 강동의 주유, 한중왕 유비, 형주목 관우 등 당대의 인사들로부터 인정받아 높이 평가받았으며 일개 군벌이 아닌 제후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그 명성을 천하에 크게 떨쳤었다.

5.2. 통솔

맹기(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웅렬(=굳세고 맹렬하다)이 남보다 뛰어난 일세의 호걸로 응당 익덕(장비)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 있습니다.
제갈량 《관우전》
"마초 저놈이 죽지 않는다면 내가 묻힐 땅조차 없겠구나!"
조조 《산양공재기》

연의에서의 마초는 조위 제장 중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는 허저와의 일 대 일 대결에서 우세한 무승부를 거두고 만인지적 장비와도 호각을 이루는 것으로 묘사되는 맹장형 인물이나 정작 진짜배기 장수로서의 정수인 전략과 용병술에 있어서는 한수나 방덕에 의존하고 때론 성급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 일을 그르치는 등 최상급의 일신의 무력에 비해 다소 미흡한 구석이 있게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 정사에 기록된 마초의 군사적 행적을 보면 마초는 일신의 용맹을 앞세우기보단 출중한 전략적 식견과 용병술에 의존하여 군을 움직였고 상당히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곽원이나 하후연 같은 명장들을 상대해 격파한 전적도 있고 당대 최강이었던 조조의 군세를 상대로 국지적이나마 조조를 위기로 몰아넣거나 실제로 조조를 죽일 뻔하는 등 꽤나 선전하였다. 이러한 전적과 적국의 모사들이 한신과 영포에 비유했던 사례를 보면 마초의 군재는 당대의 군웅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편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마초는 어린시절부터 관중 호족과의 싸움에서 활동했고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조조의 배후를 공격하며 관서를 진동시키고 맹위를 떨쳐 사례 지역 제장들과 관원들이 모두 진압[13]하는데 실패한 고간 휘하의 하북의 명장 곽원을 1만여 명의 적은 군사로 쓰러뜨리며 적장까지 참살하는 대공을 세웠다. 이때 곽원이 이끈 군세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견초전에서 고간이 진수한 병주의 총 병력은 정예 5만으로 확인된다. 일시적이나마 사례지역을 발칵 뒤집어 엎은 곽원이 기세를 감안할 때 그가 이끄는 군세는 최소 2~3만 명 이상으로 추정. 따라서 마초가 1만의 군대를 지휘해 자기 군세보다 최소 두 배 이상은 많았을 곽원을 공격해 그의 군대를 완전히 박살낸 것은 무척 인상 깊은 군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정면대결로 곽원을 깨부순 것이 아니라 곽원이 도하 중에 기습한 것이긴 하나 그것도 정확히 예측하고 군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빠르게 치고 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는 법이니 마초의 용병술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전투 과정에서 마초는 화살을 맞아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부상투혼을 발휘해 종횡무진 군세를 이끌어 곽원군을 궤멸시키고 사례 방면을 안정시켰다.[14]

또한, 30대 중반의 나이에 전투력은 강하지만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율할 정치력의 결여로 조금만 수틀려도 와해되기 십상인 중구난방 관서의 군벌들을 규합하여 구심점이 되어 군벌 연합체를 이끌었다. 이때 마초는 분명 명성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딱히 두드러진 위상을 갖춘 게 아닌 여러 갈래의 서북방 군벌 가운데 한명에 불과했고 이 시점에 서북방 군벌 가운데 가장 알려진 인물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분명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중앙권력과 드잡이질을 벌여 명성(혹은 악명)을 쌓은 한수였다. 연령에 있어서도 한수는 이때 이미 환갑을 넘긴 관록 있는 인물인데 지금도 유교 문화권에선 리더 선출에 있어서 나이가 작용하는 여지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감안하면 당대에 마초가 한수를 제치고 서북방 군벌 연합체의 우두머리가 된 건 꽤 파격적인 행보였다.[15] 이러한 불리한 정치적 입지를 뛰어넘어 서북방을 대표하는 군웅으로 선출된 걸 보면 마초의 군사적 재능과 리더십이 훌륭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담으로 마초가 총사령관이 되어 이끌었던 관서군에 대해 호삼성은 "이때 관서 지역의 군대는 천하에서 가장 날카롭고 강하였다"라고 평하고 있다.

주유전에 따르면 주유의 천하이분지계는 기본적으로 익주를 취하고 장로를 병합한 다음 유비가 아닌, 마초와 동맹을 맺고 조조를 압박하여 북방을 도모하는 계획이었다.[16] 이는 마초라는 군벌이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서 손에 꼽히는 지휘관이었던 주유가 유비를 제치고 아군으로 삼고 싶어했으며, 조조에게 위협이 될만한 영웅이였다는 뜻으로 마초의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라 볼 수 있다.
마초는 보병과 기병 만여 명을 이끌고 조조군을 추격하여 왔는데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허저는 조조에게 적군이 너무 많이 오고, 지금 병사들은 이미 다 건넜으니 떠나야만 한다고 말하고는 조조를 부축하여 배에 태웠다, 적군은 더욱 빨리 추격하였고 군사들은 배에 오르려는 자들을 죽이고 왼손으로 말 안장을 들어 조조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사공이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자, 허저는 오른손으로 배를 저어 나아가게 하여 가까스로 황하를 건넜다. 이날, 허저가 없었다면 조조는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
정사 《허저전》

마초의 통솔력에 대해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진수와 당대의 인물들이 가장 고평가했던 부분인 용력인데, 무려 천하의 절반 이상을 석권했던 조조를 죽기 직전까지 몰고갔던 기록이 존재한다. 조조가 탄 배를 몰던 사공이 화살에 맞아죽어서 허저가 말안장을 방패로 써서 화살을 막아가며 손으로 배를 저어서 가까스로 살아났다고 하니, 무척이나 긴박하고 조조의 목숨은 풍전등화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17]

일신의 용맹이나 군을 이끌고 적절한 시기에 기습하는 능력도 뛰어났지만, 마초의 가장 큰 강점은 바로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었다. 관서에서 조조와 대결할 때 배후를 노리고 도하하는 서황과 주령을 보고 마초는 군사를 몰아 공격하고 싶어했지만 한수는 선봉군은 그냥 통과시키고 조조 본대가 도하할 때 일격을 가하자는 일종의 유인책[18]을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상황을 옳게 본것은 마초였고 관중 연합군은 서황과 주령에게 배후를 털리고 조조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내주는 빌미를 제공하는 오판이 되었다. 조조는 마초의 전략적 통찰을 후에 전해 듣고 "마초 그 아이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도 묻힐 땅이 없겠구나!"라고 탄식하였다.

이때 마초와의 전쟁을 통해 조조군 전사자가 만 단위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10만 명 중 1만 명만 날아가도 전멸 운운했던 시대상을 감안할 때 마초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긴 했어도 조조군의 피해 역시 만만찮았다는 반증이다. 결국 조조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겨우 1만 남짓한 군세로 농서 일대에서 재기에 성공했으며 적어도 자신보단 많은 병력을 거느렸을 당대의 유력한 야전 사령관 하후연을 야전에서 패퇴시켰다.[19]

허나, 장로와 유비 밑에선 딱히 두드러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한중공방전을 마지막으로 군사적 커리어가 끊긴다. 여기서 마초를 지탱해주던 한 인물의 빈자리가 크게 드러나는데, 마초의 커리어를 논할때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하면 단연 방덕이다. 전장에서 늘상 적진에 돌격하여 적군을 격퇴하였으니 방덕마등군 내의 최고의 무용을 지녔으며, 마등이 입조한 후에도 마초를 따라 반란에도 가담하고, 기성 전투에도 참가하는 등 꾸준히 마초를 지탱했다. 유비에게 관우, 장비가 있었던 것 처럼 맹장 방덕의 존재는 분명 마초에게 있어서 군재를 발휘하게 해주기 충분했다. 하지만, 장로 밑에 들어가고 마초가 유비에게로 도망치면서 둘의 운명이 갈렸다.[20] 유비가 먼저 황권을 통해 장로를 조조보다 먼저 영접하는데 성공했다면 마초에게도 가족을 비롯해 유능한 심복의 재가세로 뭔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마초는 분명 뛰어난 군재를 가진 장수지만 그런 장수도 휘하 부장들의 힘을 빌려야 한다. 대장의 작전대로 잘 움직여줄 수 있는 유능한 부장이 있다면 그 장수는 뛰어난 활약을 보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마초는 유능한 부관인 방덕을 잃었고, 이는 마초에게 통솔할 중간층의 소실로 한쪽 팔을 잃은 것과 같은 여력 상실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마초는 방덕의 빈자리를 채울만한 중간층을 재건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이처럼 마초는 당대에 훌륭한 업적을 세운 군웅으로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조조를 죽일 뻔한 전적이 있다는 점 만으로도 유력한 제후군의 수장인데다 강동의 도독과 촉한의 황제에게까지 존중을 받았으니.

마초의 용병술 중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면 소수의 병력으로 속공과 기습에 능했다는 점이다. 마초의 군사적 커리어 가운데 가장 빛나는 순간들인 평양 전투에서의 곽원 참살, 동관 전투에서의 조조와의 대결, 농서에서 하후연을 패퇴시킨 것 모두 1만 명 정도의 상대보다 적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적군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을 노려 순식간에 군사를 휘몰아 상대방을 위기에 빠뜨린 케이스다. 곽원과 조조 모두 도하 도중에 마초군의 기습을 받아 위기에 몰렸으며 하후연 같은 경우는 기성에서 200여 리 떨어진 곳에서 마초군의 요격을 받아 후퇴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빠르게 육박한 마초의 기습에 당한 상황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확실히 이런 측면에서 마초는 자신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견되기도 했던 급습의 달인 팽월과 군을 움직이는 스타일이 비슷하다. 파란만장한 마초의 일생에서 가장 정점에 다다랐던 순간은 관서 군벌군의 총대장으로서 당대 최고 군웅인 조조와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인 것이었지만 실제로 마초가 군을 지휘하는 방식을 보면 동시대 제갈량, 주유, 육손 등처럼 한 국가의 군권을 총괄하는 총사령관의 그것이라기보단 한갈래의 군세를 이끄는 별동대 사령관으로서 한 전선을 책임지고 치고 빠지며 상대방을 괴롭히는 데 특화된 모습에 가까웠고, 이는 실제로 마초가 비견됐던 팽월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5.3. 무력

심심하면 일대일 대결이 난무하는 연의가 널리 알려진 탓에 장수의 기량을 가늠하는 결정적 기준이 일신의 무용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연의에서 나오는 단기접전은 대부분 창작으로, 정사에서 군을 이끄는 지휘관이 일대일로 적장과 맞붙는 기록은 매우 찾기 힘들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휘관으로써 지양해야할 행위였다. 그러나 마초 같은 경우는 일개 장수도 아니고 당대의 군웅으로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면서도 마치 여포처럼 일신의 무용을 언급하는 기록이 꽤 남았다. 이렇게 일신의 무용을 묘사하는 대목 자체가 마초의 용맹함이 비범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실제로 양부는 마초의 용맹함을 두고 그 옛날 한신, 영포와도 비견된다며 그의 위세와 영향력을 걱정하는 묘사가 정사에 등장한다. 아군도 아닌 적군의 인물이 이러한 말을 했다는 것부터가 마초의 용맹과 무력이 천하에 널리 퍼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양부 본인은 형제들과 함께 마초를 상대했다가 형제들은 모두 마초에게 죽고 본인도 여러 군데 상처를 입으며 겨우 살아남았으니 그의 우려가 기우는 아니었던 셈.

물론 염행이나 허저와의 일화를 신뢰할 경우 마초 일신의 무력을 연의에서 묘사된 수준의 만인지적의 용장으로 보기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무슨 이종격투기도 아니고 애초에 순간의 실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단기접전에 나서고 직접 당대 최강의 군주의 암살을 시도할 생각을 한 것 자체부터가 대단한 용맹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평양전투에서 보여준 부상투혼이 사서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최소 일정 수준 이상의 용맹한 장수였기 때문에 특기할 만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기본적 조건만 추려 봐도 평생을 전장에서 살았으니 무기도 익숙하게 다를 것이고, 서량 출신으로 숱한 전투를 치러왔으니 말도 잘 탈 것이며, 실제 사서에 건장하다고 기록되어 있는 데다, 부상투혼을 보면 화살을 맞고 그대로 싸우는 육체적 터프함과 정신적인 강인함도 가지고 있으니 기본적으로 싸움을 잘 할 수밖에 없는 인물인 것만은 틀림없다.[21]

배송지의 마초전 주석 《전략》에 따르면 마초는 사례교위(종요)의 독군종사가 되어 곽원을 토벌했는데 날아온 화살에 맞자 주머니로 자신의 다리를 감싼 채 싸워 곽원을 격파하고 참수했다. 그만큼 마초가 용맹하기에 기록될 수 있었던 기록인데 이마에 화살을 맞고도 멀쩡히 군대를 지휘했다고 기록된 관우의 일화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5.4. 패륜아 논란

정사에서 마초의 행동 탓에 그의 일족과 부하들이 위해를 당한 비극이 여러번 언급된다.

이렇게 정사에서는 그의 아버지와 일족을 버린 마초의 패륜을 언급하는데 사실 마초 이외에도 당시 인물들 중에는 패륜행위로 비난 받을 일들이 있었다.

이 셋 중에서도 당대엔 유독 마초의 패륜행위가 자주 비판되었다. 그 사정을 논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당대에 마초를 주로 패륜아로 비난하던 이들은 그와 대결하던 조조 휘하 지방 속관들이나 그들의 가솔들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장로의 경우엔 본인 스스로가 이미 마초와 같은 전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더더욱 마초를 꺼리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당대에 또 다른 군웅인 유비는 그의 불효를 논하기보단 그의 재능이나 위명에 관심을 두어 마초를 얻자, 내가 익주를 얻었다며 기뻐한 사실도 분명 존재하였다. 또 마초가 일족을 배반했어도 농서지방의 수많은 호족들이나 이족들은 여전히 마초를 따르며 그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명성 항목에도 나오지만 그가 주로 패륜아 소리를 들었던 건 조조 휘하 지방 속관들 상대였을 때였고 무조건 당대에 패륜아라고 매도당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측면으로 봐도, 마초가 가족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냉혈한만으로는 볼 수 없는 대목도 존재한다.

또한 마초 이외에도 당시 인물들 중에는 장로, 마초, 원소급은 아니지만 가족을 저버린 패륜행위로 비난받을 일들이 있었다.

분명 마초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패륜을 저지른 것은 부정할 수 없고, 당대에도 마초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패륜아, 냉혈한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투영된 건 사실이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마초가 스스로의 결단으로 패륜을 저지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를 인간적 감정이 없는 냉혈한으로 치부하는 것은 남겨진 기록을 봐도 무조건적으로 그렇다고 볼 순 없다. 차라리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일족을 멸하게 했다는 것에 더 가깝다고 하면 모를까.[26] 당대에도 이와 같이 자신의 결단으로 인한 결과로 가족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이 없지 않았다, 또 굳이 마초 같은 사례가 아니더라도 이 혼란한 시대의 사람들이나, 군웅들에겐 그럴 의도가 있던, 혹은 그렇지 않던 종종 이런 종류의 일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서 군벌이 봉기한 이유에 대해선 조조의 계략이라는 설도 있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장로가 한중을 점거하니 3월에 종요를 보내 장로를 토벌했다. 공이 하후연 등에게 하동(河東)에서 나와 종요와 합류하게 했다. 이때 관중(關中)의 제장들은 종요가 습격하고자 하는 것으로 의심하니, 마침내 마초가 한수, 양추, 이감, 성의 등과 함께 모반했다.
라는 무제기의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관중 군벌이 조조가 종요로 하여금 한중을 토벌할 것을 명했을 때, 이것이 양주 군벌들을 자극하여 조조가 습격하려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이것을 바탕으로 조조가 이를 기회로 반란을 유도했다는 의견을 보이는데 실제로 원나라 시기에 자치통감에 음주를 단 학자 호삼성은 이를 조조의 허허실실에 의거한 계략으로 보았다.[27]

당시 관서 군벌과 조조의 조정세력은 언제라도 서로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팽팽한 긴장 상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이며 정사에 남아 있는 기록들만 조합해도 이런 긴장 관계가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호삼성의 서술대로 마초가 조조의 선제도발 혹은 계략에 말려들어 자기 영역을 보존하려고 수동적으로 봉기한 군벌이라는 시각을 강화한다면, 마초의 행적은 분명 변호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마초는 조조와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먼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요청하고 자신의 영토를 보존해 줄 것을 청했다, 즉 마초 역시 처음부터 자신의 가족이 죽을 때까지 싸울 생각은 아니었던 것이며, 조조는 마초의 타협안을 거절하고 후일 마초가 격파되고 관서지방으로 도주해 천수에 도착하자마자 인질은 필요없다는 식으로 그제서야 마등의 일족을 죽인다. 물론 이는 군벌연합체의 수장으로서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구심력 와해를 우려한 제스처일 수 있겠지만 애초에 마초의 봉기가 조조에 대한 적극적인 대항의지에서 기인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마초도 마초지만 아버지 마등 역시 비판받아야 할 여지가 있다. 마등은 조조에 순응해 업으로 일족과 이주하면서 마초만 양주에 남겨 자신의 본거지를 관리하게 하는데 이것은 본인의 생명까지 빼앗은 마등의 말 그대로 치명적인 실수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마등은 업에 이주함으로서 조조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양주에 남겨둔 자신의 기반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어차피 조조가 언젠가는 이 지역을 차지하려 들테고 관중제장들이 이에 반발할 것은 필연적이었으며 관중제장 중 하나인 마초도 어쩔수 없이 주변 제장들에게 공격받지 않으려면 조조와 싸우지 않을수가 없게 된다. 즉 마초만 양주에 남겨둔 건 사실상 마초를 조조와 싸우도록 놔둔 셈이 되어 마초의 인생이 거하게 꼬이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본인 일족의 명을 재촉한 셈이 되었다. 업에 이주할거면 깔끔하게 양주의 본거지를 포기하고 확실히 장남 마초까지 이주를 시켜서 장로처럼 한 자리를 얻게 하거나 아니면 계속 양주에 있는것이 차라리 나았다.

그리고 마초가 유비에게 투항할 때 부하 방덕을 버리고 갔다고 비판하는 시각이 타당하다면 유비 역시 전예, 진군, 진등같은 특급 인재들을 버린 셈이 된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데려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가족조차 데리고 가지 못했을 정도였는데 방덕과 같이 유비에게로 귀순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장로, 원소와 같이 마초와 비슷한 경우가 있었고, 꼭 "패륜아"에 해당하진 않지만, 조조, 유비, 손권의 경우에도 세력화와 권력화의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친인척이 위기에 빠지는 일이 있었다.

특히 원소와의 비교가 볼만한데 분명 마초와 같이 그 역시 중앙정부에 봉기하여 인질로 잡혀 있던 일족을 죽게 하였음에도 그는 오히려 충신열사로 명망을 더하고 패륜아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원소가 6년상을 치르면서 천하에 효행으로 이름을 높은 명망, 역적 동탁을 죽여 나라를 평온케 한다는 명분이 마초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초와 비교하면 마초는 기껏해야 관서의 군벌 중 일부로 봉기 당시에는 오히려 한수가 더 명망이 높았던 상황이었으며[28] 명분 역시 관서군벌의 안전이라는 명분으로 원소의 '동탁이라는 천하를 혼란케 하는 대역적 토벌'보다 그 명분이 부족한 편이었다. 또 원소는 천하의 공적으로 찍인 동탁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와 타협은 안한다!'는 자세로 갔지만 마초는 계속 협상을 요구하고 화해를 하려고 하면서 아울러 인질을 계속 요구하였는데 이는 업으로 가 있는 인질화된 일족에 대한 보험을 필요로 했다는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다. 마초는 이쯤하면 우리가 그만두겠다는 자세를 취했으니 어쨌든 아직 천자의 신하로서 천하를 주무르던 조조에게 타협할 수 있다고 여겼다.

결국엔 유사한 상황이어도 원소는 원씨 일족이 몰살당한 것에 대한 동정표가 더해졌으나 마초는 아비를 죽게한 패륜아 소리를 들었다. 한대의 법률에는 아무리 큰 죄를 저지른다 해도 어린아이와 늙은이에게 까지는 연좌시키지 않았으나 후한쯤 가면 거의 사문화 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원소의 일족이 몰살당할때는 이 규정으로 원소가 동정을 더 받았었는데 마초는 그렇지 않았고 그냥 닥치고 욕을 먹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또 생각외로 중요한 두 사람의 차이점인데 마초는 아버지를 비롯한 일족들이 자기들 의지로 중앙에 가 있는 것이었기에 자신이 간섭해 여기에 머무르라고 할 상황이 돼있지 못했다. 이후 중앙에 위협에 맞서 봉기한 이후 화해를 청하고 이쪽에서도 향후를 대비한 인질을 받아내려 했다. 또 마초는 아비를 버리고 한수를 아버지로 섬긴다고 말로만 그랬을뿐이지, 실제로는 서로를 전혀 믿지 못해 내분을 일으켰다. 한수가 마초의 말을 무시하고 작전을 내리거나 가후의 간단한 이간책으로 만으로도 아비라고 불리던 한수를 친 마초이다. 이랬는데 아버지 운운은 그저 당장이라고 무너지기 쉬운 관서군벌들의 집합을 결속하려는 말 이상은 되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관서군벌의 수장으로서 아직 젊었던 그는 모래알 같은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자신과 버금가는 세력의 한수와 연합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결국 그것때문에 무너졌다는 것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원소는 당시 수도를 관장하는 사례교위였고 수도에서 몸을 뺄 때 동탁이 그의 명망을 보고 함부로 죽이지 못하고 바로 발해태수가 되었었으므로 일족을 소수라도 수도에서 빼낼 시간은 많이 있었다, 즉, 그는 동탁과 맞설 작정을 했고, 일족을 빼낼만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거병하기 이전에, 친어머니를 비롯해, 단 한명의 친족도 동탁의 위협에서 빼내오지 않았다.[29] 더욱 섬뜩한건 이런 지경임에도 그는 여전히 효자라며 칭송을 받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원소는 이런 원가의 몰살로 인한 동정과 그 자신에게 주어진 원가로서, 효자로서의 명망으로 인해 마초와 달리 엄청난 세력을 결집시키는데 성공하고 유우 옹립 실패 이후에도 이런 명성을 바탕으로 하북을 제압하는 등 강한 결집력과 독재적인 카리스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그 독재적인 행동으로 인해 무너지지만 같은 처지에 처한 두 사람의 행동이나 처지가 완전 달랐다는 점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앞 문단에 언급된 바와 같이, "역적의 토벌" VS "관서군벌의 안전" 이라는 명분의 차이와 더불어, 당시 원소는 6년상이라는 고행에 가까운 행위를 하면서 얼자 신분을 걷어내고 얻어낸 당대의 효자라는 명성도 있었기에, 원소의 행위로 인한 일족의 몰살은 마초와 달리 당대 인사들에게 오히려 동정을 샀다. 반면, 마초의 경우는 위의 명분의 차이에 더불어서, 마초 본인의 일가가 강족의 피가 섞인 이민족이었고 심지어 마등의 경우도 자기 아들과 똑같이 중앙정계에 반란을 일으켰던 군벌들 중 하나였기에 이런 동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 '반 이민족이자 반란군 자식 놈이 괜히 봉기해 일족을 죽게 했다'는게 더 부각되었다. 실제로는 비슷한 행위임에도 평가가 갈리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가 있던 것이다.

굳이 더 따지면 한 사람은 오히려 어떻게든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사태를 종결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협상을 하고 다른 한쪽은 겉으로는 역적을 친다는 명분하에 자신의 야망을 위해 가족이 어떻게 되던 말던 밀어붙였음에도, 세간의 평가는 완벽히 정반대로 흘렀던 것이다. 이런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일족을 버렸음에도 결국 효와 일족에 대한 정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던 자'와 '효를 자신의 입신양명에 철저히 이용한 자'의 대비되는 평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어찌보면 마초의 패륜아 논란은 명분으로서의 효와 실제적인 당대 인물들의 행동이 괴리되었던, 유교의 효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이용되어 모순을 보였던, 혼란한 한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마초는 융족을 믿고 용맹에 힘입어, 그의 일족을 뒤집었으니, 애석하구나!(그러나) 곤궁함으로 인해 편안함에 이를 수 있었으니, 오히려 낫지 않은가!"라고 평가했다. 진수는 위진 정통론자이며 유교적 가치가 절대적이던 시대에 살았던 선비답게 어떠한 인물을 평가할 때 유교적 가치에 입각해 품성과 도덕성을 매우 중요시 한 사가였다. 그래서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인격에 하자가 있다면 가차없이 비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령 당대 이미 전 중국 최강의 무장으로 높게 평가되던 만인지적 관우장비와 같은 경우라도 그들의 군재와 무용, 주군에 대한 충성심 같은 장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들이 인격적 결함 때문에 곱게 죽지 못했다는 식으로 거침 없이 비판했다. 반대로 단독으로 일군을 이끈 경험이 별로 없어서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엔 논란이 있는 촉한의 조운이나 무장으로서 군재는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한 조위의 하후돈 같은 경우는 그들의 고결한 품성과 충성심, 인격을 높이 사 종합적으로 매우 후한 평가를 해주었다.[30]

그런 깐깐한 진수이기에 정말로 당대 사람들에게 마초가 패륜아로 이미지가 고착화 됐다면 당연히 마초를 혹평했을 법도 한데 정작 진수는 마초를 평할 때 마초와 극렬히 대립했던 조위 영향권 옹양주 명사들의 시각처럼 마초의 행적 가운데 패륜적인 측면을 부각하고 비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용력과 이민족들의 인심에 의지해 군을 일으켰다 일족을 망치고 그런 곤궁함에 인해서야 태평한 방향으로 나간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으로 여긴 걸 보면 당대 사람들이 마초를 진정 어떤 인물로 간주하고 있었는지 그 단초를 알 수 있다.

중국에서도 마초의 행보가 크게 논란인지 한쪽에서는 마초에게 모든걸 짊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반대쪽에서는 동탁보다 더한놈이라고 욕을 먹고 바이두 위키에서 마초를 소개하는 영상 제목은 마초를 사기꾼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6. 여담

7.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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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이 내린 장군[2] 관장황조는 사망년도만 나와있지 출생년도는 불분명하다.[3] 덤으로 부하들에게 조조를 잡는 자에겐 무려 열 계급 특진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참고로 현실에서 어느 나라든 보통 많아봤자 2계급 특진인데 이 경우는 어마어마한 공을 세워야 할정도로 매우매우 드물다고 볼 수 있다.[4] 조조는 마초와의 전투 도중 자신의 협공 전략을 꿰뚫어보고 도하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단걸 알자 "마초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도 묻힐 땅이 없겠구나!" 라고 외친게 무제기에 실려있고, 실제로 마초가 한수의 반대에도 홀로 출전하여 조조를 잡으러 오자 허저가 말의 안장을 들고 화살을 막으며 사공이 죽으니 한손으로 노를 저으며 강을 건넌건 정사에도 있는 실화다.[5] 다만 아주 비중이 없다고 보기는 어려운게, 가장 유명한 위연을 참한 사건은 역사에서도 기록되는 사실이고 마대가 상장으로써 군사를 이끌고 조위를 침공했다는 기록도 있다.[6] 이름이 아니라 그저 강족 여성이란 의미다.[7] 사실 마등은 강족 어머니 이전에도 수 차례 혼혈이 일어나서 얼굴이 서구인같았다는 기록을 보면 실제 비율은 쿼터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 당대 이민족들의 혈통주의 문화를 생각한다면 마초가 이들에게 그만한 지지를 받았던 것은 그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앙의 높으신 분들은 마초가 동한 개국공신 마원의 후손임에도 반오랑캐라고 디스했다. 거기다 이민족과 결탁했다는 이미지 때문에 후세에는 마초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였다.[8] 그러나 마초가 재기할 때 농서에 집결한 병력이 마초 직계 패잔병, 서북방 여러 이민족, 양앙이 이끄는 장로의 원군 포함 고작 1만 명 수준이었다는 기록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그 전까지 조위의 자장권이라고 보기 힘든, 외려 마초의 홈그라운드에 가까웠다면 가까웠을 곳에서 결국엔 내부의 친 조조 세력을 방치한 것이 문제가 되어 마초가 농서지역에서 축출된 걸 보면 마초의 전성기는 조조와의 대결에서 참패한 시점에 끝났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물론 애초에 농서 지역 자체의 인구가 적고, 마초가 농서 전체의 지배자라기보다는 연합세력의 수장이었다는 점, 농서가 이미 조조의 군세에 패배하며 인구가 줄어들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초에 대한 농서 지역에서의 지지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며, 마초가 농서를 둘러싼 여러 세력들, 그러니까 저, 강, 장로의 봉기를 유발시켰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마초가 양부를 죽여 내부의 조조 추종세력에 대한 정리를 분명히 했다면 양주는 마초에 손아귀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마초 세력 자체가 전투에 특화된 군사 집단이기에 후방에서 내정을 돌볼 문관 성향의 인재가 거의 없었다는 한계가 재봉기 실패의 핵심인 셈이다. 양부는 당시 이미 중앙권력에 능력을 인정받은 인재이고 또 후에 유엽과 조조로부터 삼공급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긴 하지만 극친조조 성향의 인물인데 오죽 내정을 돌볼 사람이 없었으면 그런 양부마저 아쉬워서 강제로 기용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9]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중왕표를 올리던 시점, 즉 한중왕에 즉위하기 직전 기준이다. 이때 기준으로 마초의 벼슬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마초의 이름이 가장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평서장군이란 (좌장군이 속한) 사방장군보다 아래인 사평장군에 속하는 직위이며, 유비는 유장과 전쟁을 벌이던 도중 군벌급인 마초가 자신에게 귀부해오자 크게 기뻐하며 좌장군의 권한으로 임의로 평서장군 직위를 내렸다. 이로 인해 한중왕표를 올릴 당시 기준으론 (권한은 높지만) 잡호장군 직위였던 제갈량이나 관우보다 마초의 벼슬이 높았다. 이후 유비가 한중왕에 즉위한 이후 사방장군을 임명할 때는 좌장군에 마초를, 관우를 전장군에, 장비를 우장군, 황충을 후장군에 임명한다. (좌장군이 전장군보다 위인 경우가 많기에 마초가 관우보다 위 서열로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론 관우가 위라고 보는게 맞다. 자세한 이유는 후술) 즉 정리하면 실제 유비 세력 내의 입지로 따지면 형주 측 사령관이었던 관우가 명백히 No.2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관우는 당시까지 (적벽대전 이후 유비가 내린) 양양태수 및 탕구장군의 벼슬 밖에 없었던지라 일시적으로 유장 측에서 영입된 인물들, 마초, 그리고 제갈량보다도 낮은 직위에 있었던 것이다.[10] 관우와 마초의 우열에 대해서: 위 각주에 언급됐다시피 사방장군 중에는 (원칙적으로 상호우열이 없으나) 보통 좌장군이 제1순위가 되는 경우가 많아, 기존 서술에서는 유비가 한중왕으로서 좌장군에 임명한 마초를 전장군에 임명한 관우보다 높은 벼슬을 주었다고 적혀있었다. 그러나 좌장군이 최고순위인 것이 고정인 것은 아니며, 마초와 관우의 경우 관우가 약간이나마 위였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당시 마초는 가절에, 관우는 가절월에 제수되었기 때문인데, 가절 (假節)이란 전시에 군법을 어긴 자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지칭하며 가절월((假節鉞)은 가절을 받은 신하조차 죽일 수 있는 권한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가절 외에 지절, 사지절의 권한이 있는데 가절월은 가절, 지절, 사지절을 가진 이를 모두 처벌할 권한을 갖는다. 실제로 마초, 그리고 그보다 약간 아래인 우장군 장비는 둘 다 가절을 받았으나, 가절월을 받은 신하는 관우 뿐이었다. 즉 만약 여기서 좌장군 마초가 전장군 관우보다 위라고 본다면, 약간이나마 아래 직위인 관우가 상위 직위인 마초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모순이 생겨버린다. 촉한이 규정하는 가절과 가절월의 권한이 이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관우가 당시 장비와 마초보다 상위의 권한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가절월 자체가 가절의 권한을 포함한 권한이기 때문. 이 점으로 봤을 때 최소한 한중왕 유비가 벼슬을 내린 의도는 관우가 마초보다 더 높은 직위를 주려고 했다고 보는게 더 타당하며, 당시 유비 진영에서 관우의 지위나 권한을 볼 때 이게 더 자연스럽다. 벼슬명이나 직위, 상대적인 권한은 고정된게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했기 때문에 절대적인 게 아니었다. 추가로 조조가 위왕에 올랐을 당시 하후돈을 전장군, 우금을 좌장군에 올린 적이 있었는데, 조조 휘하에서 하후돈의 직위와 권한은 그 전이나 후에나 항상 우금보다 우위에 있었다.(하후돈은 조위가 황제국이 된 이후 최초의 대장군 자리에 올랐으며, 원래 조조는 위의 관직을 준 다른 신하들과 달리 하후돈만 한의 관직을 주려고 했으나 하후돈 본인이 극구 사양해 전장군직을 준 것이다) 즉 정황상 최소한 한중공방전~번성공방전 즈음 시기에 조위와 촉한에서는 전장군이 좌장군보다 우위였다고 보는게 더 그럴 듯 하다.[11] 추가로 난세이던 당시엔 벼슬을 내릴 중앙정부 자체가 무너져서 실제 권한과 벼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조조 측의 넘버투에 가까운 하후돈은 많은 권한을 갖고 있었지만 조조가 위왕에 오르고 전장군에 임명하기 전까진 (이때도 유일하게 조조 본인과 동일한 한나라의 관직을 줘 특별대우를 해줬다) 잡호장군에 해당하는 직위였다. 하후돈의 최종직위가 대장군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의 대략적 위치를 알 수 있다. 손권이 적벽대전을 치를 당시 그의 벼슬은 토로장군에 불과해 좌장군 유비를 끌어들일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 때문에 군벌들이 벼슬을 자처하거나 내릴 때는 '제가 임의로 내리고(혹은 벼슬에 오르고) 나중에 (황제께) 승인받겠습니다'란 명목으로 일방적으로 조정에 표를 올렸다. 이런 식으로 유비는 마초에게 평서장군 직위를 내린 것이고, 본인도 한중왕에 오른 것이다. 당연히 조조의 꼭두각시인 헌제가 한중왕 등극을 승인해줄리가 없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표를 올린 것. 여담으로 조조가 위왕에 오르자마자 한중왕을 자처한게 것도 저런 명분과 상관 있다. 당시에 왕위는 황족만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왕은 실질적 권위는 적은 황족용 직위에 가까웠다) 조조가 왕이 됐다는 건 찬탈의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이에 반발하는 여론 덕분에 황족인 유비가 왕에 오르기 쉬워진 것이다.[12] 관우는 유비가 황제가 되기 전에 죽었기에 최종벼슬이 마초나 장비보다 낮지만, 사방장군 임명 당시 관우보다 아래 직위였던 저 둘이 촉한 건국 이후 각각 표기장군, 거기장군에 임명된 것을 보면 만약 관우가 살아있었다면 무관 중 으뜸이었던 관우가 대장군으로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제갈량이 죽기 전까지 촉한의 대장군 직위는 공석으로 남게 된다.[13] 뛰어난 인재라고 볼 수 있는 가규도 이때 곽원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마초군에 의해 곽원군이 궤멸되자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14] 연의에서는 듣보잡이지만 실제 역사상에선 한시적이나마 조조에게 유효타를 성공시키고, 세력균형과 판도를 완전히 반전시킬 뻔 했던 고간과 그의 상장, 심배가 자세력 하북의 명장으로 인증한 곽원의 임팩트는 생각보다 크다. 고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고간은 원담, 원상처럼 원소의 직계 가족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원소의 유력 일족으로서 유표 휘하의 실세 채모처럼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잘 나갈 때도 별로 좋은 소리가 안 나왔던 채모와는 달리 최소 한지역을 재패할 제후 수준의 뛰어난 명망과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만약 고간의 봉기가 성공해 독자세력화가 이뤄졌거나 적어도 할거 노선이 어느 정도 지속됐다면 조조는 북방의 원상과 인접해 있으며 막 점령해 민심이 적대적이었던 기주 북부/유주 일대에 고립되어 북쪽의 원상과 오환, 서쪽 병주의 고간의 압박을 받는 형세가 되고 더불어 고간이 사례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면 조조에 적대적이었던 유표와 고간 사이의 연대와 소통이 원활해져 중원까지 공세를 받게 되는 등 조조 입장에선 최악의 구도가 확정된다. 이쯤 되면 조조는 그 동안 원상, 원담과 몇 년 동안 싸워가며 고생 끝에 먹었던 걸 도로 다 뱉어내야 함은 최소한이고 그 자신의 생명도 위태로운 지경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설사 이 정도 파국까진 치닿지 않더라도 고간이 업성 전복이 아니라 최소한 호관 봉쇄와 사예 장악까지만 성공했더라도 조조에겐 역시 치명타였다.[15] 비슷한 시기에 30대의 나이에 구장들을 제치고 한 국가를 진두지휘한 총사령관에 오른 주유나 육손 같은 경우도 있지만 이들은 비교적 확고한 권위를 갖춘 세력의 군주의 권력을 위임받은 입장이라 약간의 잡음은 있을지언정 얼마든지 내부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지만 마초는 거의 동등하거나 위상과 권력이 더 높았다면 높았을 군벌들 틈바구니에서 리더로 선출된 격이니 더 파격적이다. 어찌 보면 반동탁 연합군의 수장으로 선출된 원소의 마이너 버전이다.[16] "지금 조조는 방금 좌절과 고통을 당하여 마침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있으므로 아직은 장군과 병사를 이어서 서로 싸우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저는분위장군과 함께 촉을 취하러 나가기를 원합니다. 촉을 얻고 장로를 병합한 후에 분위장군을 남겨 그 땅을 단단히 지키도록 한다면, 마초와 동맹관계를 맺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와 장군과 함께 양양을 점거하여 조조를 추격한다면, 북방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오서 주유전.[17] 여기에 추가로 정비의 활약도 한 몫 했다. 조조군의 물자담당관이었는데, 조조가 죽기 직전으로 몰린 걸 보고 가지고 있던 소와 말을 있는대로 풀어놔서, 대부분 농민 출신인 마초군 병사들이 눈이 돌아가 그걸 잡느라고 조조를 제대로 추격하지 않았다고 한다.[18] 혹자는 이 대목에서 당시 관중연합군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읽어내기도 한다. 이때 마초의 주장은 후에 전해 들은 조조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조조군에게 큰 위협을 줄 수 있는 전술적 선택이었는데 한수의 발언권이 더 큰 걸 보면 실질적인 오너는 마초가 아니라 한수라는 얘기. 물론 한수의 유인책 역시 꽤 일리가 있었고 실제로 조조는 한수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거의 죽을 뻔 했다. 실제로 습격으로 엄청난 성과를 낸게 마초였고 결과적으로 무산돼서 문제였지…[19] 마초와의 전투에서 패배해서가 아니라 하후연의 본대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군을 물렸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상 하후연은 마초에게 패배한 게 맞다. 당시 마초가 양주자사 위강을 하후연이 구원하기 전에 포위해서 격파하고 하후연과 맞붙는다. 마초는 기성에서 2백 여 리 떨어진 곳까지 요격와서 하후연은 이에 맞서 싸웠는데 군이 불리했고 마침 견저가 모반하자 하후연은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고 기록돼 있다. 즉 하후연은 마초의 기세에 먼저 밀리고 마침 모반이 일어나서 이걸 기회로 퇴각한 것에 가깝다. 참고로 이때 마초가 이끈 병력은 1만 명을 조금 웃도는 수준으로 추정된다. 마초가 농서에서 재기해 양부를 중심으로 하는 기성을 공격할 때 이끈 병력은 본인 휘하의 패잔병을 포함해서 이민족, 한중의 장로 등으로부터 빡빡 긁어모아 고작 1만 명 수준이었고 기성에서의 저항도 만만찮았으니 전사자도 꽤 있었을 것이다. 농서 일대를 확보하고 어느 정도 증원됐다 하더라도 아마 1만 명 언저리 수준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20] 자치통감에 마초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저족 부중에서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마초가 이 당시 방덕과 미처 협의를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1] 단 마초가 단순히 싸움을 잘 한다 수준을 넘어서 어느 정도까지 잘 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이며, 사실 이 부분이 무력논쟁의 핵심이긴 하다. 잘 싸운다는 얘기는 많은데 사실 구체적인 기록은 부상투혼과 염행에게 패배한 것뿐이니 과연 얼마나 잘 싸우는지는 애매한 것은 사실이다.[22] 이 대목이 마초가 패륜아로 비판받는 가장 큰 근거이다.[23] 거기에 당시 유비세력의 정황상 마초에게도 믿을 구석이 있었다. 유비 세력의 우선적인 대전략은 일단 기본적으로 형-익을 아울러 천하를 삼분해 조조에게 대항한다는 것이고 당시 파촉까지 얻은 상황에서 유비군이 이 계획에 따라 바로 얻어야 하는 곳이 한중이다. 따라서 유비 세력은 바로 한중에 있는 장로세력을 포섭하거나 공격해야 했는데 시간상으로 한중 옆에 있는 유비세력이 장로를 포섭하거나 공격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고, 유비 세력에서 고위급 위치에 서게된 마초 입장에선 일단 유비에게 귀부해 일신의 위험을 피했으니, 얼마 후 유비가 한중을 얻으면 자연스럽게 가족과 심복을 돌려받을수 있는 공산 역시 충분히 있다고 나름대로 계산이 서기도 했을것이다. 그러나 얼마후 급작스럽게 형주에서 익양대치가 발생해 유비는 거기에 신경을 집중해야 했고 이 사이 조조가 한중으로 치고 들어가 한중을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만다. 유비는 익양대치 직후, 뒤늦게라도 황권의 조언에 따라 장로가 조조에게 패해 파중현으로 들어올 때 장로를 영접하려고 했으나 황권이 도착하기 전에 장로는 남정으로 돌아가 조조에게 투항해버렸는데 이 과정에서 마초의 아들 마추는 죽고 수하였던 방덕은 조조의 신하가 되어버린다. 214년 당시 유비에게 귀부하던 마초 입장에서 그 다음해 발생할 갑작스러운 익양대치나 장로의 동생 장위가 천혜의 요새지인 양평관에서 삽질(...)을 해서 장로가 제풀에 무너질것을 예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유비 입장에선 이후 한중을 공격해 조조의 최고위 상장 하후연을 죽이고 친정한 조조를 격파함으로써 세력에 최고조에 오르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지만, 마초 입장에선 또 다시 가족을 잃고 심복까지 잃는 통탄할 일이었다.[24] 당시 동탁의 명성과 행적을 생각하면 명분이 존재하긴 했지만,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동탁 토벌은 의로운 싸움이라기보다는 이권을 챙기기 위한 1차대전과 비슷한 전쟁이었다.[25] 패륜아 논란때문에 부각되지는 않지만 삼국지 시대에서 친족이 여러 번 잃은 비운의 삶을 살아간 사람이기도 하다. 유언도 남은 일족을 보호하려는 모습이다.[26] 사실 이 부분에서 더 경솔하다고 까여야 할 것은 마초가 아니라 아버지 마등일지도 모른다. 괜히 적진으로 들어갔다가 죽음을 맞은 거기 때문.[27] 이와 관련된 또 다른 기록이 고유전으로 이에 따르면 '고유가 간언하여, 지금 거대한 군대를 함부로 파견한다면 서쪽에 있는 한수와 마초가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되어 장차 서로 선동하여 반역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 우선 삼보(三輔)를 불러 모아서 삼보가 평정시킨다면, 한중은 격문만을 보내도 평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위기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이때 관서 제장들은 겉으로는 귀부했으나 내심은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조조의 한중진공을 두고 조조 진영에서도 이쪽이 한중을 공격하려고 군대를 동원하면 관서가 반드시 위협을 느껴 공격할테니 한중보다 먼저 치자는 주장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군벌들이 장로를 치려고 준비하는 것을 곧 관서 토벌의 징조라고 경계하고 있었다는 것.[28] 물론 이건 상대적인 비교로 주유가 언급했듯이 마초 역시 이전부터 관서의 대표적인 군벌로서의 명성은 있었다. 다만 한수는 워낙 오래전부터 마초보다 관서에 오래있으면서 그 지역의 유력자로 존재했기에 연륜의 측면에선 마초가 밀릴 수 밖에 없다는 것, 마초가 이후 한수를 넘어설 정도로 명망이 올라간건 오히려 조조와 싸워 조조를 곤경에 몰아붙인 덕이 컸다.[29] 심지어 친어머니의 신분은 일개 노비였기 때문에 친어머니 한 명만이라면 사람 한둘 보내는 것만으로 간단히 빼내올 수 있었다.[30] 물론 서주 대학살을 자행하는 등 무고한 민중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친 전적에 있어선 동탁이고 이각이고 곽사공손찬이고 뭐고 다 초월해 당대 no.1인 조조 같은 경우는 별 비판 없이 초세지걸이라는 둥 찬양 일색인 예외적인 케이스도 있긴 하지만, 정작 무제기 본문엔 진수조차도 서주 학살에 대해서는 '잔륙(残戮, 잔인하게 도륙했다, 학살했다)'이라는 잔학한 뉘앙스로 기술했는데 정사 삼국지에서 저런 식으로 학살을 표현한 건 이게 유일하다. 역적으로 욕먹던 동탁의 양성 학살도 이 정도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상당히 드라이하고 간결한 문체로 유명(그래서 후대 유송의 3대 황제 유의룡이 읽다가 너무 간결해서 사건을 제대로 알기 힘들다는 이유로 배송지에게 주석을 달게 했다.)한 정사 삼국지의 레토릭을 감안하면 굉장히 이례적으로 엄청나게 부정적인 뉘앙스의 단어를 총동원해 정론직필 한걸 보면 그 폭거를 일으킨 조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31] 휘는 사마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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