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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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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封
? ~ 220년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로 유비의 양자. 고향은 형주 장사군 나현(羅縣).[1]

2. 정사 삼국지

본래 성은 구(寇)씨였지만 유비의 양자로 입적된 뒤[2] 성이 유씨가 되었다.

원래 양자는 같은 성씨 중에 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유봉은 드문 경우이다. 유봉이 완전히 유씨와 무관하지는 않다. 장사(長沙) 유씨(劉氏)의 조카라는 기록으로 보아 모계로 유씨의 혈통을 이었을 것이다. 장사 유씨는 광무제, 경시제를 배출한 가문이므로(부계 조상 중 황제가 되지 못하여 황실 직계에서 분파하여 집안을 차린 사람이 장사정왕 유발이다) 혈통적으로는 전한계 황족의 후예인 유비보다 후한계 왕족에 더 가깝다.

재밌는 점이 하나 있는데, 유봉의 이름인 봉(封)과 유비의 친자 유선의 선(禪)을 합치면 봉선(封禪)이 된다.[3] 봉선은 천자(황제)의 제사였는데, 이 때문에 두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유비의 야심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비가 정말 봉선에서 이름을 지었다는 정사의 언급이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냥 정황상 그렇게 보인다는 이야기. 사실 유봉은 양자 출신이므로 애초에 봉은 유비가 지어준 이름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며, 그냥 우연찮게 유봉의 이름이 봉이어서 둘째 아들은 선으로 짝을 맞췄을 가능성이 있다. 정사에서는 유봉이 먼저 양자로 들어온 뒤 유선이 출생하였으나, 연의에서는 순서가 바뀐 것도 미묘한 일이라며 유비가 개인적인 야심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어줬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연의에서 순서를 바꾸었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으나 역시 근거는 없다. 애초에 유비는 이미 어린 시절에 황제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내비친 적이 있으므로 새삼스럽게 이걸로 깔 필요가 있을까 싶다.[4]

유비의 입촉 당시 20여 세의 나이로 가는 곳마다 승리를 이끄는 등 여러 가지로 군공을 세웠다고 한다. 위략에 따르면 한중 공방전 당시 산을 끼고 내려와 조조의 본군을 상대로 치고 빠지는 역할을 하며 조조가 이를 갈며 조창을 찾을 정도로 군사적 도발을 했다고 한다. 이후 맹달과 함께 상용을 점령하고 수비하게 된다. 이때 유비의 행동이 유봉에게 군공을 주기위한 뜻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유비가 맹달이 혼자 힘으로 상용을 점령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유봉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맹달과 화합하지 못해 서로 다투었고 이로 인해 관우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결국 맹달의 군악대를 몰수하고[5] 또 자치통감에 따르면 유봉이 맹달을 침해하고 능멸하니 맹달이 부곡 4천가(家)을 들고 위나라에 투항하게 되고 상용을 공격하는데, 맹달은 유봉과의 불화로 위에 투항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유봉을 회유하려 들었다.
고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계가 소원한 사람은 친밀한 사람들 사이의 우정을 찢지 않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은 친밀한 사람들 사이의 우정을 찢지 않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은 오랜 친구에게 혼란을 더하지 않는다.' 이것은 위에 있는 군주가 현명하고 아래에 있는 신하가 정직하면 사악한 일을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권세를 쥐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군주는 물론이고 어진 부친이나 자애로운 친척이라도 충신이 공을 세워서 화를 초래하며, 효자가 인의를 따라서 여러움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문종(文種)ㆍ상앙(商鞅)ㆍ백기(白起)ㆍ효기(孝己)ㆍ백기(伯奇)는 모두 이런 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된 까닭은 골육지간이 헤어지는 것을 좋아하고 육친이 화를 입는 것을 기뻐해서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은혜의 정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가고 사랑하는 대상을 바꾸며, 또한 어떤 때는 중간에서 참언을 하여 이간시키므로, 비록 충신이라도 군주의 생각을 바꿀수 없고, 효자라고 하더라도 부친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권세나 이익을 더하려고 한다면, 친척을 바꾸어 원수가 되게 하는데, 하물며 친척이 아닌 자야 어떠하겠습니까? 때문에 신생(申生)ㆍ위급(衞伋)ㆍ어구(禦寇)ㆍ초건(楚建)은 선천적으로 받은 군주 모습의 기질로써 정당하게 후사를 계승했어도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 현재 그대와 한중왕은 길에서 만난 사람일 뿐입니다. 친분의 관계에서 보면, 그대는 뼈와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권세를 차지하고 있고, 명의상으로 보면 군주와 신하 사이라고 할수 없지만, 높은 지위에 있으며, 원정할 때는 한쪽을 책임지는 위엄이 있고, 주둔할 때는 부군장군의 칭호가 있는데, 이것은 멀고 가깝건 간에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두를 세워 태자로 삼은 이래 식견있는 사람들은 당신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만일 신생이 자여(子輿)의 말을 따랐다면 반드시 진에서 도망 나와 주무왕에게 자리를 양도 받아 오명 계획을 들었다면 부친에 대한 비난이 빛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소백은 다른 나라로 달아났으므로 후에 들어와 패자가 되었고, 중이는 담을 넘어 달아났으므로 끝까지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고대로부터 있었던 것이지 유독 현재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가 귀한 것은 화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고, 고명한 식견이 존중되는 것은 사태를 통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판단으로는 한중왕은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고, 밖으로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결단을 내리면 마음은 공고해지고, 의심이 생기면 마음은 두려워지게 됩니다. 혼란이나 재화가 발생하고 만들어지는 것은 일찍이 계승자를 폐위시키고 세우는 사이에서 말미암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원한이나 인정은 관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측근에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한중왕에게 참언을 할 것입니다. 그러한즉 의심은 형성되고 원한이 알려져 순식간에 폭발 할 것입니다. 지금 그대는 먼 곳에 있으므로 잠시 휴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위나라 대군이 전진한다면, 그대는 근거지를 잃고 귀환하게 될텐데, 저는 사사로이 위험하게 될 것이라고 느낍니다. 과거 미자(微子)는 은(殷)나라를 버렸고, 지과(智果)는 일족과 헤어졌는데, 재난을 피하고 화를 등지기 위해서 모두 이와 같이 한 것입니다.

지금 그대가 부모를 버리고 다른 사람의 아들이 된 것은 예가 아니며, 화가 장차 이르게 될 것임을 알면서 그곳에 머무는 것은 지혜가 아니고, 바른 것을 보고 따르지 않고 의심하는 것은 의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스스로 장부라고 부르면서 이 세 가지를 행하는 것이 어떻게 귀하겠습니까? 그대의 재능으로 을 버리고 동쪽으로 와서 나후(羅侯)를 계승한다면 가까운 사람을 등지는 것이 아니고, 북쪽으로 신하라고 하며 군주를 섬김으로써 군신의 기강을 바르게 한다면 옛 주인을 버리는 것이 아니며, 분노하며 혼란을 초래하지 않음으로써 위험이나 멸망을 면하게 한다면 헛되이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폐하께서는 방금 선양을 받고 어떤 사심도 없이 현명한 사람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덕을 갖고 먼 곳에 있는 자를 복종시키고 있습니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돌려 위나라에 의지한다면, 비단 우리와 동료가 되어 3백 호의 봉록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나국(羅國)의 뒤를 이을 것이고, 응당 진일보하여 큰나라를 영지로 삼도록 하여 초대 군주가 되게 할 것입니다. 폐하의 대군은 이미 전쟁북을 두드렸으며, 촉과 오를 압박하기 위해 수도를 완(宛)과 등(鄧)으로 옮기려 하고 있습니다. 만일 두 적이 소멸되지 않는다면, 군대는 돌아올 기한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대는 이 기회에 일찍 좋은 계획을 결정해야 합니다. 《역경》에 `고귀한 인물을 보면 좋은 점이 있다` 라는 말이 있고, 《시경》에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한다` 라는 말이 있는데, 실행해야 합니다. 현재 그대는 노력해야만 하며, 호돌(狐突)처럼 문을 닫고 나가지도 않으면서, 그대를 보좌하도록 하지 마십시오.
유봉은 일단 맹달을 공격하려 했지만 신의가 배반하여 전세가 기울어짐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도망쳤다.

성도로 도망쳐온 유봉은 맹달을 욕보인 것을 문책당했으며 또 과거에 관우가 위기에 처했을 때 원군요청을 거절한 것도 문책당했다. 또한 제갈량은 관우가 죽은 후 유봉이 강맹(剛猛)[6]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인물이라 보고 후환이 될 것을 걱정했고 유봉을 제거할 것을 권한다. 결국 유비는 유봉을 자결케 한다.
"맹자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
유봉은 죽을 때 맹달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한스러워 했다.

유비는 유봉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마음에 들지도 않는 젊은이를 자신의 양자로 삼을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유비 역시 양자로 삼을 당시에는 유봉에게 호감을 가졌을 것이고 유봉이 주변 사람들과 반목하는 사납고 굳센 성격을 가지고 있을 망정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에 들어해 자신의 양자로 삼은 것이 정치적으로 작용해 목숨을 잃게 된 원인이 됐으니 실로 씁쓸했을 것이다.

유봉의 아들 유림은 촉에서 아문장군까지 지내며 멸망때까지 살아남았는데 그 후 하동 지방으로 이주했다. 참고로 맹달의 아들 맹흥도 동시에 부풍으로 이주한다.

3. 삼국지연의

연의에서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모부인 번성 현령 유필(劉泌)에 의지해 있다가, 서서의 활약으로 조인을 물리치고 번성에 입성한 유비의 눈에 띄어 그의 양자가 되어 유봉으로 이름을 고쳤다.

관우가 "왜 이미 자식이 있는데 또 (양)아들을 두십니까"라고 했지만[7] 유비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관우에게 있어 재앙의 불씨 중 하나가 되었다.

연의에서는 양아들이 되어 유비 밑으로 들어가는 것까진 동일하다. 하지만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의 넷째 친아들조창, 일명 "황수아"[8]라이벌 구도가 서게 된다. 다만 이 구도를 만든 건 조창이 아니라 조조다. 유봉이 선봉장으로 나오니까 "가짜 아들이 어디서 설쳐, 우리 황수아한테 발리기 전에 돌아가!"라고 모욕을 준 것.[9]

이후 그럭저럭 활약을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초반에는 관평과 주로 짝을 이뤄 활약했으나 후반에는 일시적으로 맹달과 짝을 이뤘다.

그러나 맥성에 고립된 관우의 구원 요청을 거부하는 바람에 자신의 운명도 갈리게 된다. 정확히는 요화가 밤낮을 달려 구원을 요청하러 오자 유봉은 꽤 고심을 했다. 하지만 맹달이 "네가 관우를 숙부로 본다고 해도 관우가 너를 조카로 봐 줄까? 네가 양아들로 들어가는 걸 거부했는데?"라며 꼬드기는 바람에 모호한 까닭을 대서 요화를 쫓아낸다. 결국 관우가 죽음을 맞이하자, 유비는 조조가 죽고 조비가 뒤를 이어 위나라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동오를 쳐서 관우의 복수를 하려고 한다. 이때까지는 유봉에게 목숨을 부지할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유봉은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요화는 먼저 내부의 배신자인 유봉과 맹달을 처형하라고 간언했다. 그 때문에 유장 밑에 있던 시절부터 맹달과 한편이었던 팽양이 맹달에게 알리려다 실패하자,[10] 맹달은 먼저 위나라로 도망갔다. 맹달은 도망가자마자 유봉에게도 배반을 권유했지만 유봉은 맹달의 권유를 거절했다. 이 즈음에서 유비는 유봉부터 죽이려고 했지만, 제갈량은 "유봉에게 맹달을 잡아오라고 명령하세요. 실패하더라도 유봉을 죽일 수 있습니다."라고 간언했다. 하지만 유봉은 실패했고, 결국 그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유비의 명령에 의해 사형당하게 된다.[11] 사형이 언도된 후 내심 괴로워하는 유비에게 한 신하가 유봉이 실은 관우를 돕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고, 맹달의 배반 공작에도 넘어가지 않았다고 하며 용서해달라고 말하자 유봉의 사형 집행을 중지하라고 한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형이 집행된 후였다. 유비는 유봉에겐 큰 죄가 없고 실질적인 배신자는 맹달이라는 걸 뒤늦게 알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최후에 노력하다가 배신자란 오명을 씻지 못하고 죽는 것은 대부분 동일하다.

삼국지연의에서 관평을 양자로 설정한 것은 유봉과 대비를 이루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같은 양자임에도 결과적으로 의리를 지키지 못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 유봉과 대비시켜서 관평의 의리를 돋보이게 하려는 극적 장치라는 것이다. 다만 이 평가는 부당한 것이, 유봉은 크나큰 실책으로 자신의 최후를 자초한 인물인 것은 맞지만 누가 봐도 엄벌에 처해질 것이 확실한 상황에 스스로 촉으로 돌아와 자신에게 내려진 벌을 받았다.

4. 평가

최후를 보건대 유봉으로서는 유비의 양자로 들어온 것이 결과적으로 불행이 되었다. 물론 상용을 잃고 관우를 지원하지 않아 전사하게 만든 책임은 있었지만 후계자 문제가 얽히면서 죽음에 이르렀으니....[12]

진수의 평가는 매우 짜다. 팽양, 위연, 양의, 이엄 등과 한 권으로 묶어놓고, 자신들이 화를 초래했다는 공통된 평을 내린다.

연의에서는 양자 시점이 유선이 태어나는 장면보다 늦게 기술되어서 순수한 의리와 인연으로 맺어지는 형태이지만 실제로는 유선 탄생보다 이른 시기이다. 정황상 유비가 후계자로 삼기 위해 입양했으나 유선이 태어나면서 미묘해진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이후 유봉의 입지는 굉장히 애매해진다. 정식 후계자가 태어나기 이전에 입적한 양자. 유선이 후계로 서기 위해서는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정리를 해야 하는 위치였다.[13]

다만 이것이 전적으로 유비의 잘못이나 실수라고 보기는 어렵다. 유봉을 양자로 들인 207년 무렵 당시 유비는 이미 40대 중반으로 나이가 많아[14] 아들을 다시 얻는다는 보장이 없었고, 설사 얻는다해도 당시 유비의 세력이 유표의 지원으로 근근이 꾸려나가는 소규모 군벌 수준이라 성년까지 무사히 성장한다는 보장이 없었다.[15] 여러모로 어려웠던 사정을 생각하면 유봉을 양자로 들인 것은 보험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이후 유비의 새로 태어난 유선이 후계자로 낙점되면서 유봉의 입지가 사실상 제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만약 유선에게 약점이 전혀 없었다면, 즉 유봉이 있더라도 유선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딱히 걸릴 것이 없었다면 양자라는 약점이 뚜렷한 유봉의 처지가 좀 나아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선 역시 친아들이라곤 해도 적자(嫡子)가 아닌 서자(庶子)이며 나이가 어리다는 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었다.[16] 양자라고는 해도 이미 장성했고 개국과정에서 공적이 있는 유봉은 유선의 제위 계승에 방해물이 되었다.

하지만 유비 본인은 유봉을 충성심 있는 부하로 여겼다. 유비는 유봉에게 상용을 맡기며 중용하였다. 상용은 땅 크기는 작지만 익주와 형주를 잇는 요충지이며, 독립하기는 어려워도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만한 곳이기 때문에 유봉에게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면 죽음은 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봉과 맹달의 마찰, 그리고 관우의 죽음과 상용의 상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등의 책임이 매우 컸고 제갈량의 정치적 공격에 덧붙여 유비의 아들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되어버렸다.

유능한 지휘관이지만 유연하지 못한 처신술 때문에 목숨을 잃은 케이스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번성에서의 패배, 형주의 상실과 관우의 전사는 물론이요, 자기 임지인 상용을 잃었다는 건 참작 받기 힘들다. 상용을 잃은 건 엄연히 자신이 상용의 다른 거물급 인사들인 맹달과 신탐, 신의 등과 사이가 나빴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관우에게 지원군을 보내지도 않았으니 번성 전투의 패배와 관우의 패사의 책임도 분명히 있다.[17] 여기에 후사문제까지 꼬이면서 반드시 죽여야 하는 인물 1위에 올라버렸다. 이 부분은 전적으로 유봉 본인이 자초한 비극이 맞다. 애초에 자기가 형주에 지원을 가지 못한 이유는 맹달과 사이가 나빴으며, 신탐 형제를 잘 아우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방치하고 갈 순 없기 때문이다.[18] 거기다가 잘못한 것을 처벌하는 데 있어 공정성을 중시하던 유비-제갈량 정권에서 군주의 가까운 혈족이라고 하여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은 법치를 어기는 일이었다. 당장 제갈량이 멀지 않은 미래에 크나큰 삽질을 저지른 본인 절친이자 촉한 개국공신의 아우를 처형하거나, 본인 다음의 입지를 지닌 탁고대신을 서인으로 강등한 것만 봐도 그렇다. 거기다 유봉이 상용에서 저지른 삽질은 관우를 살릴 마지막 찬스와 더불어 숙적인 위나라를 향한 북벌 루트를 날려버린 거라 마속이나 이엄이 저질렀던 것보다 덜하다고 하기도 어렵다.[19]

유비가 인재를 회유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신탐이 성도로 가족을 볼모로 보내고 유비에 협력한 댓가로 받은 지위가 정북장군 + 상용태수 + 위향후다. 유비의 최고참급 숙장인 조운이 몇 년 뒤인 223년에 받는 관직이 정남장군이다. 그해에 바로 진동장군으로 진급했고, 즉 상용의 터줏대감이었고 촉에서 핵심인물로 취급되어 대우받는 인물이란 것이다. 즉, 유봉 입장에서는 엎드리는 한이 있어도 자기편으로 삼아야 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유봉은 이들을 잘 규합하지도 못하고 이탈하게 만들어 버렸다.

유봉의 상용에서의 지위는 맹달을 지원하는 포지션이었으나 오히려 유봉이 맹달의 군악대를 몰수하는 돌출행동을 보이는 등 악화일로를 걸었다는 것도 변호 거리는 안된다. 상용이 불안정해서 관우를 구할 수 없다는 유봉+맹달의 핑계의 원인은 그 당사자들의 사이가 나빴다는 게 근본적인 것이다. 단순히 토사구팽, 후계자 문제로 퉁치기에는 상용에서 벌인 실책이 너무 컸다. 후계자 문제는 연쇄파급이고.

유봉의 제거를 권한 제갈량이 비판 받는 부분이 있다. 제갈량의 법가적 태도가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하지만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나이 많은 아들이 아닌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밀었다가 내분으로 망해버린 원소의 전례를 생각하면, 유봉을 내버려둘 경우 촉한은 유봉파와 유선파로 나뉘는 사태를 우려한 것으로 생각된다.[20] 전성기의 촉한보다도 오히려 컸던 세력인 원소도 후계 문제로 원담원상이 서로 대립하다가 세력 자체가 박살난 것을 보면 유봉을 죽인 것이 극단적인 결정을 했을지는 몰라도 국론분열은 최소한 막은 셈. 거기에 맹달의 말처럼 가뜩이나 유선이 태자에 올라 유봉의 처지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형주, 상용 상실과 관우의 전사 등 유봉이 책임질 문제가 상당히 컸다.

하지만 유봉이 제위에 위협이 된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 비록 유선이 적자가 아니었다고는 하나 유비에게는 적자가 없었고, 이미 성년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는 데다가, 유비가 당시 이미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지는데 불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과부를 정실로 맞아들인 것을 보면, 유비의 후계 구도는 이 시점에서 이미 확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설령 유선이 어떠한 이유에서든 후계를 낳지 못하고 요절한다 하더라도 유봉은 제위에 오를 수 없었다. 차남 유영과 3남 유리가 있었기 때문. 중국사에 양자가 친자를 제치고 제위를 차지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부분 삼국시대 이후, 즉 북방민족의 침입 후 그들의 영향을 받은 다음의 일이다. 양자 계승은 일본에서나 가능하지 중국에선 불가능에 가까웠다.[21] 더군다나 일본식 '양자'라는 것도 사실은 외삼촌,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 고모부, 이모부 등 친척 어르신의 아들로 들어가서 양자인 경우가 대부분인지라, 유비와는 아무 혈연 관계도 없이 본명이 '구봉'인 유봉은 이 일본식 양자의 조건에도 부합되지 않는다.[22] 당대 형제간의 분쟁으로 유명한 원씨 일가나 조조, 손견, 유표 등의 경우에도, 이는 어디까지나 친아들간의 대립이었지 양아들 따위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하물며 정통성 즉 '우리는 유씨의 후손이 황제다'라는 것이 최대의 무기였던 촉한 왕조에서 이는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다. 위나라에서 조예의 양자였던 조방이 제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조예의 친아들들이 전부 요절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처럼 피치 못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조방은 제위 기간 내내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다. 그래서 조상이 이를 트집잡아 온갖 전횡을 일삼았으며 그게 원인이 되어 고평릉 사변이 발발하고 사마씨에게 권력을 몽땅 잃고 결국 폐위된다.

또한, 조식의 예에서 볼 수 있듯. 후계 문제에 관련된 숙청이라면 유봉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고, 이들이 같이 처벌되는 것이 상식적인데, 유봉의 처형에서는 그러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유봉의 속마음이 어쨌는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나, 설령 역심을 품었다 할지라도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제갈량이 걱정한 것은 아마도 좀 다른 문제였을 것으로 보인다. 전한 시절 오초7국의 난 이후로 황제의 가까운 혈족들에게는 명예는 주되 실권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이를 회피하려 했고 또 그럭저럭 성공적이었지만,[23] 대신 이런 제약에 해당하지 않는 외척들의 발호는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기록에 의하면 제갈량과 유비가 외척의 발호에 대해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우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훗날의 일이지만, 유선의 황후로 이미 사망한 장비의 딸들을 연달아 들여보낸 것을 보면 이런 부분에 대한 대책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정작 유봉의 입지가 바로 외척과 유사하다는 것은 문제였다. 차기 황제의 웃어른이어서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면서도, 황위 계승권은 없어서 관직에 제약이 없다는 점은 확실히 위험요소다.[24] 이 위험성이 현실화된 경우가 바로 위나라의 조진, 조상 부자인데, 제갈량의 라이벌격인 사마의가 위에 언급된 고평릉 사변을 통해 제거하고는 오히려 위나라를 집어삼켰다는 것이 아이러니.

결과적으로 후대에서는 유선이 암군이었기에 나름대로 능력을 검증받고 경력도 쌓은 유봉이 유비의 후계자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얘기도 종종 나온다. 그러나 유선은 말년을 제외하고는 40년을 유능한 신하들의 보필 아래서 무난히 정국을 이끌어 갔다. 무엇보다 유선은 성격이 무난하고 유순한 편이었기에 강맹하다는 평가를 받은 유봉보다 유비와 제갈량이 확립한 한실 부흥의 이데올로기 하에 신권과 황권이 절묘하게 권력 균형을 달성한 촉한 특유의 정치 시스템에 훨씬 더 적합한 유형의 인물이다.

반면 유봉은 무예가 있고, 기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지만 익주와 형주를 연결하는 최요충지 상용을 진수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도 고작 군악대 따위를 두고 맹달과 반목을 겪다 관우 구원에 불응하고 맹달을 이탈하게 만들었으며, 결국엔 상용을 상실한 것만 보아도 지도자로서의 능력(정치력이나 리더십, 성품, 판단력[25])에 하자가 없다고 보긴 힘들다. 그러므로 유선보다 반드시 나았을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26] 차라리 연의에서 묘사된 대로 유선을 지지하는 관우에게 보일 의리가 어딨냐는 맹달의 설득에 잠시 미혹돼 원군 요청을 거절한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선 어느 정도 이해라도 갈 수 있지만, 실제 역사상에선 전적으로 유봉의 패착이 맞다.

5.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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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후난성 웨양시(지급시) 미뤄시(현급시): 羅자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2] 관평은 연의에서 관우의 양아들이라고 나왔지만 실제 정사에서는 친아들이었다. 그러나 유봉은 정사에서도 양아들이 확실하다.[3] 흙을 쌓아 올려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봉(封), 땅을 깨끗이 하고 산천에 지내는 제사를 선(禪)이라 하는데 중국의 역대 제왕이 정치상의 성공을 천지에 보고하기 위해서 태산에서 행한 국가적 제전이다. 이 봉과 선은 원래 별개의 유래를 가지는 제사였다가 양자를 합쳐 봉선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지냈다.[4] 사실 이런 사례는 장제스 일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장제스의 맏아들은 징궈(經國), 둘째 아들은 웨이궈(緯國)인데 經과 緯가 서로 통한다. 장징궈의 적자들은 이름이 샤오원(孝文)·샤오장(孝章)·샤오우(孝武)·샤오용(孝勇)인데 文-武, 文-章, 武-勇이 서로 통하며, 서자인 쌍둥이 형제의 이름은 샤오옌(孝嚴)·샤오츠(孝慈)인데 嚴과 慈도 서로 통한다.[5] 현대전 이전 전쟁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근세까지의 전투에서 통신수단은 북이나 나팔같은 악기와 깃발, 명령서를 들고 뛰는 병사들이었는데 군악대를 몰수했다는건 즉 맹달의 지휘권을 몰수했다는 뜻이다.[6] '强猛'과 뜻이 같은데 '매우 굳세고 사납다'는 뜻이다.[7] 정사에서는 유선이 태어나기 전 유봉을 양자로 삼았기에 성립되지 않는다.[8] '수염이 노란 아이'라는 뜻. 조조가 붙여준 별명이다.[9] 이건 조조 처지에서도 할 말이 있는 것이, 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오랜 옛 인연도 있고 해서 유비와 1:1로 대화를 해보기 위해 위왕이자 총대장인 자신이 직접 나섰더니 정작 유비가 자신은 나가지도 않고 유봉을 내보내 자신을 모욕한거나 다름없게 돼서 제대로 빡친 것이다.[10] 연의던 정사던 팽양은 마초에게 이를 몰래 알려줬고, 마초는 거드는 척 하고서는 곧바로 유비에게 알리며 자신의 망명을 받아주고 대우까지 해준 유비에 대한 신의를 지켰다.[11] 이때 유봉은 "저는 최선을 다해 숙부(관우)를 구출하려고 했지만, 운이 나빠 그렇지 못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빌었으나 유비는 오히려 더욱 화를 내며 "너는 머리가 흙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이었느냐?"라고 꾸짖으며 용서하지 않겠다고 윽박지른다.[12] 맹달, 신의, 신탐과는 달리 촉을 배신하지 않고 성도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가 유비의 양자로 후계자 문제와 얽혀있지 않았다면 중징계는 피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목숨은 부지했을 확률이 높다.[13] 유선이 태자로 책봉되고 나서부터 꾸준히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기에는 기회도 받았고 공적을 세운 것도 있었다. 그리고 한중왕 등극 이후에도 맹달이 상용을 공격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유봉을 지원군으로 공격하게 한 것을 보면 꾸준히 천덕꾸러기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촉이 상용을 항상 중요 요충지로 생각했던 걸 감안하면 오히려 유봉의 입지가 불안해졌음에도 믿고 맡긴 거라고 봐야 한다. 이 시점에서 본인의 위치를 알고 군주의 아들이 아니라 휘하 장수로 살았으면 화를 피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14] 참고로 천년 후 고려시대 평균수명이 42세, 조선시대 평균수명이 47세다! 유아사망 등을 빼고도 그러니 40대면 슬슬 자연사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나이다. 물론 서민 기준이지만, 유비처럼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몸을 험하게 굴린다면 4~50대의 나이에 군막에서 잠들었다 그대로 자연사해도 이상하지 않다. 지금이야 40대 중반이면 그 나이에 결혼해도 살짝 만혼 취급이지만(1983년 생의 3분의 1이 미혼) 저 당시에는 40대 중반이면 평균수명보다 살짝 더 산 것이다. 딱 유굉 정도가 저 당시의 평균수명이었다. 따라서 평균수명과 비교하자면 저 당시의 40살이면 지금의 80살 정도로 볼 수 있다.[15] 당장 당양 장판파에서 조조에게 쫒기는 와중에 두 딸을 잃었고 유선도 조운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것이다.[16] 유선의 어머니인 감부인은 유비가 떠돌아 다니며 아내를 여러 번 잃은 탓에 정부인 노릇을 했을 뿐 본래 첩이었고, 유선이 황제가 된 뒤에 아들의 신분을 따라 추존되었다.[17] 번성 전투에서 관우는 병력 부족으로 인해 이길 수 있는 전투를 고착화 시켜야 되는 상황이었다.[18] 정작 맹달 문서를 보면 맹달은 유봉과 달리 관우 구원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원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것과 아예 시도하지 않은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게 사실일 경우 이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한 유봉은 관우의 죽음에 차지하는 지분이 더 커지는 셈이다.[19] 번성 전투는 촉한이 조위를 극복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였다. 이후 제갈량이 상용을 점유한 맹달을 회유하려 한 건이나 장완이 계획한 상용 방면의 북벌만 보더라도, 상용은 촉한 입장에서 북벌 옵션을 늘릴 수 있는 요충지였다. 상용만 있어도 북벌에 큰 힘이 될 판인데, 당시 형주의 일부를 촉한 측 세력이 점령하고 있던 시점엔 더욱 중요해진다. 익주는 말할 것도 없고 한중만 해도 너무 멀고 길이 험해서 (관우세력 중 가장 가까운) 양양조차 실질적으로 지원하기 힘든 위치인데, 한중과 거리의 절반 밖에 안되는 곳에 위치한게 바로 상용이기 때문이다. 양양/상용은 그만큼 요지이며, 위나라 입장에서도 위협적이기에 거물인 조인에게 번성을 맡기고, 조인이 몰리자 온갖 장수들을 불러오며 관우의 북벌을 그만큼 필사적으로 막았던 것이다. 만약 유비가 한중에서 출정, 제갈량이 익주에서 후방 지원, 관우가 양양에서 출격, 유봉/맹달이 상용에서 지원하는 구도라면 위나라 입장에선 정말 힘들어진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요지/중요한 사령관을 동시에 날려버렸으니 대역죄인이나 마찬가지다. 유봉은 이런 요충지를 맹달, 신탐 등과 화합을 이루지 못하는 개인적 과실로 잃어버린 것이다.[20] 유표의 경우-유기파와 유종파-는 그나마 군권을 쥐고 있는 채모가 유종의 처가[27]로써 만악의 근원이나 다름없었다는 점에서 옹호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다만 채모가 진짜 만악의 근원인 이유는 바로 조조의 수십년 지기 친구라는 점이다. 이러니 유표의 후계자 문제는 결국 유비와 조조의 대리전 양상으로 흘러간 거고 유기=유비, 유종=조조 이렇게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채모는 유표가 죽자 유종을 군주로 옹립하는 게 아니라 유표의 모든것을 친구인 조조에게 바쳤다. 유종과 후계자를 놓고 대립하던 유기가 유표 말년에 권력 싸움에서 밀려 강하태수로 내쫓겼기 때문이고 사실상 유비만 없었다면 유기는 세력을 얻지 못하고 소멸됐을 확률이 높았다.[21] 수천년 중국사에 친자가 멀쩡히 살아 있음에도 양자가 황위를 계승한 것은 염민모용운 정도가 전부이며, 이들조차도 정상적인 즉위가 아니라 정변(혹은 그에 준하는 사건)을 거치고 즉위했다.[22] 유봉이 이 보편적인 일본식 양자의 조건에 부합하려면 원래 이름이 미봉, 감봉(이 경우가 해당되면 유봉은 유선의 이종사촌 형제가 된다.), 손봉, 오봉 중 하나여야 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구봉이다.[23] 실제로 삼국지를 보면 유비를 비롯해 황실의 후예들이 상당수 등장하지만, 모두 먼 친척이다. 물론 이는 후한 말기 황제들이 줄줄히 요절한 것도 원인이기는 하다.[24] 이런 인간을 '왕야'라 부른다. 위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조인, 조홍, 조진, 조휴 이런 사람들이 '왕야'에 해당되고 만약 촉한에서 유선이 즉위하게 되면 유봉이 '왕야'의 위치가 된다. 오나라의 경우도 손정이 '왕야'에 해당된다. 한 황실 기준이라면 유표, 유언, 유비, 유우, 유요, 유엽 등이 '왕야'에 해당된다.[25] 냉정히 말해 자기가 후계자에서 완전히 이탈한 상황에 본인이 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선의 후계를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자기 지분을 어느 정도 보장받는 것이었는데 정작 그 정반대에 준하는 최악의 처세로 다 말아먹었다.[26] 유선은 마지막 5년만 빼놓고 재상들에게 모든 걸 전적으로 위임하던 군주였다. 반면, 지원하러 갔던 맹달과 갈등을 빚어낸 유봉이 유비 사후 유능한 재상인 제갈량을 전적으로 믿어줄 것인지도 의문이며, 오히려 유비의 고명대신으로써 권력을 위임받은 제갈량(혹은 다른 촉한사영)을 숙청하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