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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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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기 생애
2.1. 평양 전투
3. 중기 생애
3.1. 동관 전투3.2. 기성 전투3.3. 장로 휘하
4. 유비 휘하5. 죽음

1. 개요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기록한 마초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산양공재기》나 배송지가 삼국지 정사에 주석으로 달은 《전략》 등의 사료에 마초의 자세한 행적이 더 등장하는 만큼 기록이 부족하기로 유명한 촉나라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기록이 남은 인물로 전해진다.
마초의 자는 맹기(孟起)로 부풍군(扶風郡) 무릉현(茂陵縣) 사람이다. 부친 마등(馬騰)은 영제(靈帝) 말에 변장(邊章), 한수(韓遂) 등과 함께 서주(西州)에서 거사를 일으켰다.

초평(初平) 3(192)년에 한수와 마등은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향했다. 한 왕조에서 한수를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삼아 금성(金城)으로 돌아가게 했고, 마등은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삼아 미현에 주둔토록 했다. 후에 마등은 장안을 습격했지만, 패주하여 퇴각해 양주(凉州)로 돌아왔다.

사예교위(司隷校尉) 종요(鐘繇)가 관중(關中)을 진수(鎭守)하며 한수와 마등에게 글월을 보내 화복(禍福)에 대해 진언했다. 마등은 마초를 파견해 종요를 따라 평양(平陽)에서 곽원(郭援)과 고간(高幹)을 토벌하게 했는데, 마초의 장수 방덕(龐德) 친히 곽원을 참수했다. 후에 마등은 한수와 불화(不和)하여 서울로 돌아가길 구했다. 이에 그를 불러다 위위(衛尉)로 삼고, 마초는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아 도정후(都亭侯)에 봉하여 마등의 부곡(部曲)을 영솔하도록 했다.

마초가 군대를 통솔하게 되자, 마침내 한수와 합종(合從)하고, 양추(楊秋) 이감(李堪) 성의(成宜) 등과도 결의를 맺고 진군하여 동관(潼關)에 이르렀다. 조공은 한수, 마초와 단기로 모여 얘기했는데, 마초가 그의 힘을 의지해 몰래 돌진해 조공을 잡을려고 했는데, 조공의 주변에 장수 허저(許褚)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니, 마초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조공이 가후(賈詡)의 모책을 이용해, 마초와 한수를 이간질하여 다시 서로 의심케 하니, (마초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마초는 달아나 여러 오랑캐(戎族)들을 보전하고 있었는데, 조공은 안정(安定)까지 추격해 왔지만 마침 북방에 일이 있어,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양부(楊阜)가 조조를 설득하며 말하길 "마초에겐 한신, 영포의 용맹함이 있고, 강족(羌族)과 호인(胡人)들의 마음을 깊이 얻고 있습니다. 만약 대군이 돌아가 엄정이 방비하지 않는다면, 농상의 여러 군은 나라의 소유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라 했다. 과연 마초가 여러 오랑캐(戎)를 거느리고 농상의 여러 군현을 공격하니, 농상의 여러 군현들이 이에 호응해 양주자사 위강(韋康)을 죽이고, 기성(冀城)을 차지하여 그 군대를 가졌다. 마초가 정서장군(征西將軍)이라 자칭하며, 병주목(幷州牧)을 맡아, 양주의 군사(軍事)를 감독했다.

위강의 옛 관리와 백성인 양부, 강서(姜敍), 양관(梁寬), 조구(趙衢)등은 공모하여 마초를 공격할 것을 같이 모의했다. 양부와 강서는 노성(鹵城)에서 병사를 일으키니 마초가 출진하여 공격했지만 항복시키지 못했다. 양관과 조구가 기성의 성문을 닫아 버리니, 마초는 들어갈 수 없었다. 진퇴가 어려워진 마초는 이에 한중으로 달아나 장로(張魯)에게 의지했다. 장로는 함께 일을 도모하기 부족하여, 속으로 고향으로 그리워 하고 있는데, 선주(유비)가 성도(成都)에서 유장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은밀히 항복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선주는 사람을 보내 마초를 맞이하니, 마초는 병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성 아래 이르렀다. 이에 (성도) 성 안이 모두 두려움에 떠니, 유장은 곧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여 항복했고, 이에 마초를 평서장군(平西將軍)으로 삼아 임저(臨沮)를 감독하게 하고, 예전대로 도정후로 삼았다. 선주가 한중왕이 되자, 마초를 좌장군(左將軍)으로 삼고 가절을 내려주었다.

장무(章武) 원년(221)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승진시키고, 양주목을 맡게 하며, 태향후로 봉작을 올리면서 책문을 내려 이르길 짐이 부덕한 몸으로 지존의 자리를 이어 종묘를 받들게 되었다. 조조 부자는 대대로 그 죄를 짓고 있는지라 짐은 이에 참담하여 병을 앓아 근심하게 되었다. 천하가 분하고 원통하여 정(正)에 귀의하고 근본으로 되돌아 와, 이미 저와 강(羌)족이 복종하며, 흉노도 도의를 흠모하고 있다. 그대의 신의는 북쪽 땅에 드러나고 위무(威武) 또한 빛나니, 이에 임무를 그대에게 맡겨, 용맹을 드날리며 만 리밖을 아울러 다스려 백성들의 아픔을 구하라. 조정의 교화를 밝게 펴고, 멀고 가까운 곳을 보듬어 보전하며, 상벌을 엄정히 하여, 한조의 복을 돈독히 하여 천하에 대하라고 했다.

장무 2년(222)에 죽었는데, 이때 임종을 맞이해 상소를 올려 말하길 "신의 집안에 2백여 인은 맹덕(조조)에게 거의 다 주살되었고, 오직 종제(從弟;사촌동생) 마대(馬岱)만이 남아있어, 마땅히 미약한 가문의 제사를 이을 사람이어서, 폐하께 깊이 부탁드리며, 나머지는 다시 말할 게 없습니다라 했다."

시호를 추증해 위후(威侯)라 하고, 아들 마승(馬承)이 뒤를 이었다. 마대의 관직은 평북장군(平北將軍)에 이르렀고, 작위를 올려 진창후(陳倉侯)로 삼았다. 마초의 딸은 안평왕(安平王) 유리(劉理)의 배필이 되었다.

2. 초기 생애

마초의 할아버지는 천수 난간현의 현위 출신으로, 그는 낙향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족 여인과 결혼해 마등을 낳았다. 마등은 후한명장이자 개국공신 마원의 후손이다. 마원의 조상은 조나라 명장 조사였다. 본래 조씨 성을 가졌지만, 조사가 마복군이란 호를 받은 후 성을 고쳐 마씨라고 칭했다.

마등이 어릴 때는 집안이 가난했는데 영제 말 양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할 때 자원해 공을 세웠으나 영제(168년 ~ 189년) 말, 변장, 한수 등과 함께 양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192년, 한수, 마등이 무리를 이끌고 장안으로 나아가니 한나라 조정에서는 한수를 진서장군으로 삼아 금성으로 되돌려 보내고 마등을 정서장군으로 삼아 사례 부풍군 미현으로 보내 주둔하게 했는데 마초는 뒤에 남아 본거지를 지켰다. 이후 차근차근 성장해 양주의 유력한 군벌로 자리잡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마초는 자연스래 강족저족 등 서북지역의 이민족들과 가까워졌고, 이로써 그는 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애초에, 한수와 마등이 관중에서 난을 일으켜 자주 유장의 아버지 유언과 교류하여 믿었다. 그 뒤 마등이 장안을 습격했으나 패주하고 양주로 되돌아갔다. 이때 마등은 이각곽사에게 식량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 장안에서 마등과 호응하려던 세력들이 모두 숙청당했다.[1]

마등은 진서장군 한수와 결탁해 의형제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서로 매우 친했으나 뒤에 부곡(部曲)이 서로 침입하게 되자 원수 사이가 되었다. 마등이 한수를 공격하자 한수가 달아났는데 무리를 합쳐 돌아와 마등을 공격해 마등의 처자식을 죽였고 싸움이 연이어 풀리지 않았다.[2] 또 건안(196년 ~ 220년) 초, 국가의 기강이 위태롭고 느슨해지니 사례교위 종요, 양주목 위단을 시켜 그들을 화해하게 했다. 단 이 싸움이 끝난 뒤에도 마등은 한수를 비롯한 관중의 군벌들과 산발적으로 계속 대립했고 관중 군벌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196년 마등과 한수가 반목하여 싸웠고 마등의 처자식이 한수에게 살해당하였다. 마등의 아들 마초 또한 건장하다고 칭해졌다. 염행은 일찍이 마초를 찔렀는데, 가 부러지자, 부러진 모로 마초의 목을 쳐서 거의 죽임에 이르렀다고 한다.[3]

2.1. 평양 전투

원소의 아들 원상고간곽원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흉노의 선우와 하동으로 침략하려고 할 때, 마등과 한수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으려고 했다.[4] 당시 원씨 형제가 조조의 하북 진군을 일시적으로 막아내는 데 성공하여 전열을 고를 수 있게 되자, 별도의 경로를 통해 조조의 배후를 칠 계획을 세운 것이다. 마등은 몰래 그것을 허락했다.

원상의 관서 공격은 나름대로 공들여 준비한 전략인지, 먼저 남흉노의 선우 호주천을 부추겨 조조를 공격하게 했고 호주천은 평양현을 점거하고 사례교위 종요의 주력병력을 묶어두었고 이 사이 곽원과 고간은 인근의 군현들을 공략해 모두 함락시키며 하동으로 향해 그 위세가 관서 전체를 진동시켰다고 한다.[5] 곽원은 원소군 내부에서 명장으로 취급받았으며, 실제로 이때 곽원이 가한 위협은 상당한 것이었다.

종요가 아직 호주천을 격파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에서 곽원이 평양[6] 인근까지 당도하자 그 전력은 매우 강해졌고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해 하동을 버리고 도망치자고 진언했으나 종요는 여기서 약하게 보인다면 관서의 제장들이 모두 원상에게 돌아설 것이라 하여 거부하였다.

한편 사예주 3군의 반란이 장기화될 것을 우려한 순욱은 두기를 하동으로 파견했는데, 순욱의 예상대로 두기는 하동군 내부에서 반고간 세력을 규합해 고간 진영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사례교위 종요가 관중을 진수하게 되자 한수, 마등에게 서신을 보내 화와 복에 관해 진술했다. 당시 종요 혼자만의 힘으로는 흉노와 곽원 양쪽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어쨌든 마등이 생각을 바꾸어 조조를 돕기로 하고 아들 마초를 보내 종요를 뒤따르게 하니 마초는 1만의 군사들로 사례교위(종요)의 독군종사가 되어 곽원을 토벌했는데 날아온 화살에 맞자 화살을 부러뜨린 후 주머니로 자신의 다리를 감싼 채[7] 싸워 강대했던 곽원의 군사를 격파하고 곽원을 참수했다.

이후 조령으로 서주자사에 임명되고 그 뒤 간의대부에 임명되었다.

3. 중기 생애

조조는 형주를 징벌하려고 했지만, 마등과 관서의 세력들이 아직 관중에서 할거하고 있었으므로 또 장기를 보내 마등 등을 설득하여 부하들을 해산시키고 조정에 돌아오도록 하자 마등은 이것을 허락하였지만 여전히 다시 미적미적 하고 이전과 같은 행동을 하였으므로 장기는 그가 변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해서 여러 현에 문서를 보내 식량 등을 비축하도록 준비하도록 하고, 군수에게 교외까지 나가 맞이하도록 했다. 2천석 관리가 교외까지 마중을 나가니 마등은 어쩔 수 없이 동쪽으로 출발했다.[8]

그 뒤 조조가 표문을 올려 마등을 위위로 임명하고, 마초를 편장군으로 삼고 도정후에 봉해 마등의 부곡(部曲)을[9] 거느리게 했다. 마등이 받은 위위라는 직책은 삼공 바로 아래로 매우 높은 직책이다. 그러나 마초가 받은 편장군 벼슬은 명예직에 불과하다. 마등이 입조하게 되자 마초를 편장군으로 임명해 마등의 진영을 거느리게 했다. 또 마초의 동생 마휴를 봉거도위, 마휴의 동생 마철을 기도위로 삼고 그 가속들을 모두 업으로 이주시키니 오직 마초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10]

그러나 이것은 마등의 실수라고밖에 할 수 없다. 마등은 업에 이주함으로써 조조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양주에 남겨둔 자신의 기반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어차피 조조가 언젠가는 이 지역을 차지하려 들 테고 관중제장들이 이에 반발할 것은 필연적이었으며 관중제장 중 하나인 마초도 어쩔 수 없이 주변 제장들에게 공격받지 않으려면 조조와 싸우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즉 마초만 양주에 남겨둔 건 사실상 마초를 조조와 싸우도록 놔둔 셈이 되어 마초의 인생이 꼬이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본인 일족의 명을 재촉한 셈이 되었다. 업에 이주할거면 깔끔하게 양주의 본거지를 포기하고 확실히 장남 마초까지 이주를 시켜서 장로처럼 한 자리를 얻게하거나 아니면 걍 계속 양주에 있는것이 차라리 나았다.[11]

무엇보다 마초의 군대, 이민족 세력은 여러 부족의 연합체였기 때문에 상부에서 통제하는 중앙 집권 체제 국가의 군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양주에서 마씨 세력의 영향력이 크다지만 한중 침공으로 인해 다른 부족들의 의견은 공격으로 결론이 난 상황에서 마초 혼자 앉아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고, 이는 훗날 마초가 조조를 공격해 마등과 일가족이 살해당하는 비극의 계기로 작용한다.

유장의 경우 마등의 아들 마초에 이르러서는, 관계를 되돌리고 서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유장은 촉의 의(意)를 이으려는 뜻이 있었다. 왕상이 유장에게 고하여 말했다.
마초는 날래지만 어질지 못하여 얻는 것에 의로운 것을 보지 않으니, 만약에 이와 같이 그(마초)를 끌어들여 가까이 하시면 말미암아 호랑이를 길러 장차 스스로 근심을 남길 뿐입니다.
유장은 그 말을 따라 이에 길을 끊어 마초와 교류하지 않았다.[12]

한편, 주유는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후방 불안 요소로 마초와 한수를 언급했으며, 죽기 직전에 언급한 자신의 대전략인 천하이분지계에서 유비의 야심을 경계한 주유는 주된 동맹의 상대로 유비가 아닌 관서의 마초를 지목하며 그와 함께한다면 조조를 압박하고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13] 주유가 몸담고 있던 강동과 마초의 세력지였던 양주는 거의 천하의 끝과 끝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유가 그를 주된 동맹 대상으로 인식하며 계획에 첨가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미 관서의 마초는 당대의 관서군벌을 대표하는 최고의 제후로 여겨졌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3.1. 동관 전투

이후 조조는 한중정벌 계획을 기획했는데 한중 정벌 계획은 유장과 그 부하들이 경계를 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헌데 유장 외에도 또 다른 세력 또한 조조의 서진(西進)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으니, 다름 아닌 관서군벌들이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조조가 강남 정벌을 단행하기 위해 남하하기 직전이었던 건안 13년(208년), 관중의 제장 중 한 사람이었던 마등은 병력을 장남 마초에게 넘기고 업성으로 들어왔다. 더불어 아들 마초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여 량주에서 마등의 세력을 이어받도록 해 준다. 즉 조조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영향력 아래 들어간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조조는 보답으로 마등에게 위위(衛尉)라는 지위를 주었는데 구경(九卿)에 속하는 고위직이다. 대군이 강남으로 내려간 뒤 관서군이 준동할 것을 두려워한 조조가 마등을 조정으로 소환한 것이다. 본래도 하동에서 곽원을 상대로 싸울 때부터 조조와 친분을 다져놓기로 방침을 정한 데다, 위위라는 높은 벼슬에 혹한 마등은 식솔들을 데리고 조조의 비호 아래 들었다. 다만 관서의 군권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마초를 남겨 휘하 부대를 통솔케 한 것이다.

마등은 조조에게 귀부할 때에도 어느 정도는 억지로 귀부한 듯한 장면이 보이고, 온전히 귀부한 것도 아니고 마초를 남겨 양주에 있는 자기 세력을 이끌게 했다. 이건 조정과 조조 세력에서 인정을 받으면서도 양주의 자기 세력은 유지하고 싶었단 건데, 이게 양립하기 어려운 목표라는 게 문제였다.[14] 마초는 조정에 있는 아버지와 일족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참 뜻인지, 양주에 있는 마씨 세력을 지켜내는 것이 목적인지 선택해야 했다. 결국은 둘 다 이루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건안 16년(211년) 3월, 조조 휘하에서 손꼽히는 부관들인 종요하후연이 하동을 거쳐 장로를 토벌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자 마초를 비롯한 관중의 제장들은 이것이 한중 정벌을 핑계 삼아 관서을 압박하기 위한 조치가 아닌가 의심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비단 관서 현지인들만의 것이 아니었는지, 조조의 속관으로 있던 고유(高柔)가 다음과 같은 진언을 올리기도 했다.
대군이 서쪽으로 출병하면 한수와 마초는 자신들을 칠 것이라고 의심하여 반드시 서로를 부추기며 군사를 움직일 것입니다. 마땅히 먼저 삼보三輔(=관중)의 사람들을 불러들여 평안케 해야 합니다. 삼보가 평정되면 한중은 격문 한 장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능히 평정할 수 있습니다.[15]

그러나 어째서인지 조조는 고유의 말을 무시했다.

이때 관서 제장들은 겉으로는 귀부했으나 내심은 믿을 수 없었다. 사례교위 종요는 3천 병을 청해 관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겉으로는 장로를 친다고 칭했으나 내심 실제로는 그를 위협하여 인질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위기 역시 고유와 같은 의견을 냈다.
서방의 제장들은 모두 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켰으므로 천하에 웅거할 뜻이 없으니 실로 눈 앞의 안락을 구할 뿐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이들을 후하게 대우해 작호를 더해주어 그 뜻을 이루게 해 준다면 중대한 사고가 없는 한 변고를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의당 그 후에 도모해야 합니다. 만약 군사를 일으켜 관중으로 들어가 장로를 토벌한다면 장로는 깊은 산에 있어 도로가 통하지 않을 것이고 저들이 필시 의심이 품을 것입니다. 한번 놀라서 동요하게 되면 땅이 험하고 무리들이 강성하니 그 위태로움은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순욱이 위기의 의견을 조조에게 보고했다. 조조는 처음에는 그 말을 옳게 여겼으나 종요가 스스로 자신의 임무를 관장해야 한다고 하여 마침내 종요의 의견에 따랐다.[16]

결국 211년, 종요가 이끄는 부대는 계획에 따라 관을 넘어 서쪽으로 출진했고, 이 시점을 기해 마초가 무리를 통솔하게 된 후 마침내 한수와 굳게 맹세하여 서로 응하고 한수, 후선, 정은, 이감, 성의, 양흥, 마완, 장횡, 양추 등 10명의 제장들이 일제히 거병하여 도합 10부로 함께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각 부곡에서 징집된 병사가 1만 명씩은 되어 연합군의 규모는 총 10만 명을 헤아리는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17] 종요와 하후연이 서쪽으로 기어이 출진하고 나자 그들은 더 이상 군사적 위협을 참지 않겠다는 듯 군사를 연합해 조조가 당황하게 만들 대군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들은 위수(渭水) 북단을 단숨에 가로질러 관중 지역 최고의 요새인 장안성을 그대로 통과, 그 동쪽에 있는 동관(潼關)을 점거하고 조조군과 대치했다. 이들은 하수, 동수 일대를 점거하고 진영을 벌여 세웠다. 사서에서는 군벌들의 총 병력이 10만이라고 적고 있으며 액면 그대로 믿지 않더라도 6~7만 이상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8]

당초, 한수가 서쪽에서 장맹을 토벌할 때, 염행에게 옛 영채를 지키도록 하였고, 마초 등과 결탁하여 모반할 때, 마초가 한수를 도독으로 삼았다. 마초는 한수에게 "예전에 사례교위 종요가 저 마초로 하여금 장군을 취하도록 하였으니, 관동인은 다시 믿을 게 못 됩니다. 지금 저 마초는 부친을 버리고 장군을 부친으로 삼으려 하니, 장군께서도 자식을 버리고 마초를 자식으로 삼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서로 친분관계를 요청했다. 마초의 이러한 발언은 역으로 업에 있는 마등과 일족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의견도 있다. 마등과의 표면적인 관계를 끊어 자신과 마등은 이제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 일족이 연좌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 후대의 종회가 난을 일으키자 '종회는 책략에 의지하여 뜻 밖의 것을 지키기는 어려우므로 중요한 직책에 위임될 수 없습니다.' 라고 동생 종회와 선을 그어 말한 형 종육의 자손들은 연좌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일리는 있는 소리. 염행이 마초와 연합하지 말라고 한수에게 간하였으나 한수는 "지금 제장이 공모하지 않았음에도 뜻을 같이 하고 있는데, 이는 타고난 수명과도 닮은 것이오."라며 그리고는 동쪽의 화음으로 갔다.[19]

이렇게 한수, 마초가 봉기한 때, 홍농 및 빙익에서는 많은 현읍이 거병하여 그들에게 호응하였다.[20] 하동은 이들에게 인접한 곳이었으나, 주민 가운데 다른 마음을 품은 자가 없었다. 유웅명은 마초 등이 모반하였을 때, 마초를 따르지 않아, 마초가 그를 격파했고 왕랑전에 따르면 나중에 마초가 반란을 일으켜 가홍을 체포한 다음에, 그를 화음으로 데려가서는 포고문을 만들게 했는데, 가홍은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21]

이에 조조는 강릉에서 돌아온 뒤 대기 중이던 조인을 안서장군(安西將軍)에 임명하여 선발대로 출진시키되, 후속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마초와 함부로 교전하지 말고 수비에만 힘쓰라는 엄명을 내렸다. 아울러 자신의 아들이자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으로 있던 조비로 하여금 업성을 지키게 하고, 분무장군(奮武將軍) 정욱을 보좌역으로 남겼다. 그 외 좌호군(左護軍) 서선(徐宣)에게는 군무를, 거부장사(居府長史) 국연(國淵)에게는 행정을 맡겼다. 이와 같이 후방의 인사를 마무리한 조조는 가후를 종군 참모로 삼고 장합, 서황, 우금, 허저, 주령 등 쟁쟁한 장수들을 참전시켜 동관으로 출진했다.

이 당시 관서군의 기세는 무서운 수준이었다. 뒷날 자치통감에 주를 단 호삼성은
이때 관서 지역의 군대는 (천하에서) 가장 날카롭고 강하였다

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동등한 제장들의 연합으로 형성된 군이라 효율적이고 통일된 지휘 체계가 마련되지 못했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조조는 바로 이러한 장단점에 착안하여 정면 대결을 피하고 적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릴 계책을 세워나갔다.

211년 7월 조조는 본대를 이끌고 동관으로 향했다. 배송지 주 위서의 기록에는 이민족과의 실전으로 단련된 관서병의 강함을 알고 있는 장수들이 "관서의 병사들은 긴 창(모)를 쓰는 데 익숙하니 선봉에 서는 군사들을 잘 선발하지 않으면 당해낼 수 없습니다." 며 관서군이 창술에 빼어난 병사들이 많다는 점을 우려하여 선봉군을 걱정했지만 조조는 이에 대해 "적이 비록 창에 익숙하다지만 장차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찌를 수도 없게 하겠다"며 오히려 호기롭게 받아 넘겼다. 애초에 그는 하루도 끊이지 않은 전투로 단련된 경험 많은 관서군을 상대로 회전을 치를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는 별동대를 파견해 적을 고립무원의 처지로 떨어뜨릴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는데, 부장 서황은 그런 조조의 생각과 꼭 들어맞는 대책을 제시했다. 조조가 동관에 도착한 뒤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서황을 불러 물었다. 이에 서황이 말했다.
공의 성대한 군세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적이 포판(蒲阪)을 수비하지 않으니, 그들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저에게 정예병을 빌려주시면 포판진蒲坂津을 건너 병력을 배치한 뒤 그들의 내부를 끊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능히 적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22]

조조는 그 말을 따랐다. 이후 조조 자신은 관서군과의 대치를 유지하면서 서황주령에게 4,000명의 병사를 주어 몰래 강을 건너게 했는데 지금의 산서 성 영제현 황하 입구인 포판을 건너 황하의 서쪽을 점거했다.[23] 관서군은 나름대로 신속히 대응하고자 했지만 서황이 그리 만만한 장수가 아니었다. 한밤중에 참호와 목책이 미처 완성되지 못했을 때 양흥이 밤중에 보기 5천여 명을 이끌고 서황에게 기습을 가해왔지만, 서황은 침착하게 대처하여 오히려 양흥을 격퇴시켰다. 이로써 조조군은 북안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 강물을 거쳐 서쪽으로 나아가면 관서군을 앞뒤에서 협공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조조군의 동향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던 마초는 즉시 조조가 어떤 주전략을 세우고 있는지를 직감했다. 그는 한수를 찾아가 위수 북안에 방어선을 마련하고 조조군의 도하를 막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조조군은 20일도 되지 않아 군량 부족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해할 수 없게도 한수는 마초의 말을 무시해버렸다.[24]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그는 되려 조조군의 도하를 방치하자는 황당한 의견을 꺼내놓았다. 한수는 조조군이 강을 건너오면 그대로 군사를 몰아 쓸어버리면 될 것이라면서 전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총사령이라고 해도 당장 서로의 발언권이 비등한 상황이라 한수나 여타 제장들의 동의 없이는 마초 혼자서 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연하지만 결국 옳게 본 사람은 마초였다. 어떤 경로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날 마초와 한수가 나눈 대화의 내용이 조조에게 입수되었는데, 마초가 이미 자신의 주전략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깨뜨릴 대안을 내놓았음을 알게 된 조조는 아찔함 반 안심 반으로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마초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도 묻힐 땅이 없겠구나![25]

윤 8월, 관서군을 포위하여 압박하는 전략의 마지막 단계가 실행되었다. 일부 병력만 남기고서 조조가 인솔하는 대군이 황하를 도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조조는 병력과 물자를 먼저 도하하게 하고 자신은 허저와 그 휘하의 100여 명의 호위병을 곁에 둔 채 후미에 남았다. 그러나 미처 도하 작전이 다 끝나기도 전에 조조군의 움직임을 포착한 마초의 부대가 불시에 용맹하게 돌격하여 들이닥침으로써 그 자리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조조가 동관에서 북쪽으로 강을 건너려 했는데 미처 건너기 전에 마초가 배를 향해 달려와 급박하게 싸웠고, 조조가 장차 황하를 건너려 하여 선두 부대가 막건널 때 마초 등이 돌연 당도하여 날카롭게 돌격했는데 조조는 호상(胡床)에 앉아 일어서지 않았다.

장합 등이 사태가 급박한 것을 보고 함께 조조를 이끌어 배에 타게 했다. 이때 허저전에 따르면 마초는 보병과 기병 만여 명을 이끌고 조조군을 추격하여 왔는데 (휘하부대에게 마초가 명령하여)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허저는 조조에게 적군이 너무 많이 오고, 지금 병사들은 이미 다 건넜으니 떠나야만 한다고 말하고는 조조를 부축하여 배에 태웠다. 적군은 더욱 빨리 추격하였고 군사들은 배에 오르려는 자들을 죽이고 왼손으로 말 안장을 들어 조조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사공에게 빨리 노를 저으라 재촉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노를 저어야 할 사공이 그만 마초군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이에 다급해진 허저는 말안장을 들어 조조를 가리는 방패로 삼고서는 반대쪽 손으로 직접 노를 저어 가까스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진수는 허저전에서 "이날 허저가 없었다면 (조조는) 큰 위태로움에 빠졌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헌데 당시 조조의 도주를 도운 사람은 허저만이 아니었다. 조조군의 교위로 있던 정비(丁斐)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마초군의 추격이 급박한 것을 보고는 그의 관리하에 있던 소와 말을 한꺼번에 들판에 풀어놓았다. 이에 마초군 일부가 추격을 놓아둔 채 가축을 포획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쨌건 이러한 허저의 노력과 정비의 기지로 인해 조조는 무사히 강 반대편에 진지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26] 이에 제장들이 군이 패하는 것을 보았는 데다 또한 조조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해 모두 황망하고 두려워했는데, 조조를 만나보고는 슬퍼하고 또 기뻐하며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조조가 크게 웃으며 "오늘 하마터면 좀도둑들에게 곤란을 당할 뻔 했구나!"라고 말했다.[27]

결국 마초는 조조의 전략을 파악하고 또 이를 파훼하기 위해 움직였지만, 명목상 총사령관의 직책임에도 연합군이라는 군 체계의 특성과 동료 제장들의 의견 차이로 인해 전황이 뒤집어지는 꼴을 속절없이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조는 이후 황하를 따라 용도[28]를 건설하며 차근차근 남하한다. 마초군은 물러나 위수가 황하로 유입되는 입구(渭口)를 지켰다. 조조가 이미 도하에 성공하여 하서 일대를 장악한 이상 동관 방면에서의 교전은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이래저래 전전긍긍하는 적군의 모습을 지켜보게 된 조조는 이제 얼마든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입장에 섰다. 이에 조조가 속이는 군사(疑兵)를 여럿 두고는, 배에 군사들을 태워 몰래 위수로 들어가 부교를 만들고, 밤중에 군사를 나누어 위수 남쪽에 둔영을 세웠다.

이렇게 관서군과 직접 대적하는 위치에 서는 것은 본래 백병전에 능한 관서군을 상대로 정면 회전은 피한다는 조조의 방침에 비추어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었을 테지만, 당시 조조에게는 참모 누규의 책략에 따라 준비한 대비책이 있었다. 강 남안이 모래밭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누규는 당시 날씨가 점차 추워지는 절기에 접어들었음에 착안, 모래로 벽을 쌓은 뒤 물을 뿌려 얼림으로써 임시로 방벽을 구축하는 책략을 내놓았던 것이다.[29] 조조가 탐색전을 겸해 파견했던 소수 부대는 도하하는 족족 마초의 기병대에 의해 격퇴당했지만, 밤을 틈타 일제히 결행한 대규모 도하와 누규의 책략을 이용한 성채 급조에 대해서는 마초는 물론이고 관중 제장들 중 누구도 방비하지 못했다. 물론 마초라고 조조가 이러는 것을 모를 리는 없어서 조조가 이렇게 나온 후에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밤중에 둔영을 공격했으나 조조는 급조한 성채와 복병으로 이를 격파했다.

마침내 조조군이 위수를 도하하자 마초를 비롯한 관서군벌들은 가능한 한 피해를 최소화한 채 근거지인 양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짜내야만 했다. 이에 그들이 어렵사리 꺼내든 패는 다름아닌 화친 요청이었다. 마초군은 한편으로는 자주 싸움을 걸고 한편으로는 연차적으로 땅을 떼어주며 화친할 것을 제안했다. 사실상 전의를 잃지 않은 유일한 제장인 마초는 몇 차례에 걸쳐 싸움을 걸었지만, 조조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응전을 거부했다. 부동의 1인자인 조조와 달리 군벌연합의 수장으로서 서로 이해가 대립되던 군벌들을 무마시키고 조정해야 했던 마초 입장에서는 이도저도 아닌 장기전만큼 위험한 것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관중 제장들은 화평 조약을 맺고 화친을 하자고 합의한 의사를 담은 편지를 조조에게 전했다. 마초 또한 달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관중 제장들의 영토를 보장할 것, 그리고 인질을 교환할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최소한 자신들을 따랐던 이민족들과 본인의 일족들의 안위만은 보장하기 위해서 짜낸 책략이었으나, 조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 조조와 휘하제장, 참모들은 이를 그냥 무시할 작정이었다. 손해를 볼 생각 따위 하지도 않았다. 특히 종군 참모로 동행한 가후의 책략은 교묘하기 짝이 없었다. 마초와 위수 남쪽에서 싸우는 사이 그는 일단 겉으로는 휴전을 받아들이는 척 넘어가되, 뒤로는 공작을 펼쳐 관중 제장들을 이간시키자고 건의했다. 조조 역시 가후의 책모를 받아들여 "한수와 마초의 동맹을 풀어 버리겠소." 라고 말하였다.[30] 당시 관서군벌을 이끄는 건 한수와 마초였다. 이들 두 사람을 이간시킨다면 나머지 떨거지들이야 제풀에 무너지고 쓰러질 게 뻔했다. 조조는 특히 한수 쪽에 의심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하여 화평 조약을 맺을 때 양측의 수장이 직접 논의 자리를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한수와 동석할 자리를 만드는 것에서 이간책을 시작하고자 한 셈이다.

첫 번째 회담 자리에서 조조는 한수에게 유독 친근함을 과시했다. 조조는 한수의 부친과 같은 해에 효렴이 되었고, 또한 한수와 같은 시기의 동년배였다. 이에 말을 마주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군사에 관한 일은 말하지 않고 다만 수도에서 있었던 옛 일만을 얘기하며 손뼉을 치며 환담했다. 대화를 끝낸 뒤 마초 등이 한수에게 물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마초는 의심하여 한수를 추궁했지만, 실상 조조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기는 한수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회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조는 5,000명의 철기(鐵騎)대를 이끌고 나와 호인들이 앞뒤로 크게 구경했다. 이때 철기 5천을 늘여 세워 10중의 진을 만드니 광채가 해처럼 빛나 적들이 더욱 놀라고 두려워했다. 조조는 "그대들은 조공을 보고 싶은가? 나는 눈이 네 개 달린 것도 아니고, 입이 두 개 달린 것도 아니다. 그대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되 다만 지모가 많을 뿐이다!"라고 외치며 위풍당당함을 과시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휴전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으니 마초 등 여타 제장들이 점차 한수가 내통 내지는 배신을 꾸미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도 당연했다.[31]

한편 허저전에는 위의 기사와는 다른 양상의 회담이 기록되어 있다. 
조조가 한수, 마초 등과 회담을 가질 때 아무도 따르지 못하게 하고 단지 허저 한 사람만 수행하도록 했다. 마초는 자신의 용력에 의지하여 조조를 죽이려 했으나, 평소 허저의 용맹함을 듣고 있었기에 조조를 수행하는 기병이 허저임을 의심하여 물었다.

조공에게 호후(虎侯)가 있다 하던데, 어디에 있소이까?"

조조가 고개를 돌려 허저를 가리키자 허저는 눈을 부릅뜨고 마초를 노려보았다. 이에 마초 등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곧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마초 역시 꾸미고 있는 바가 있었다. 조조가 관중의 군벌들을 이간시키려 했다면, 마초는 대담하게도 회담 중에 자신의 강력한 용력에 의지해 조조를 사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삼국지 촉서 마초전에도 조조는 한수, 마초와 더불어 홀로 말을 타고 대화했는데 마초는 자신의 힘이 강함에 의지해 돌진하여 조조를 붙잡으려 은밀히 꾀했으나 조조 좌우의 장수 허저가 눈을 부릅뜨고 (경계하면서) 노려보았고 이에 마초는 감히 실행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조조가 일부러 한수와의 거짓 회담을 한 전후로 마초까지 참여하는 다른 회담이 몇차례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명색히 마초는 관서군벌을 이끄는 위치였으니만큼 조조가 마초를 무작정 배제하기는 어려웠을터이다. 또, 무작정 마초를 배제한다면 오히려 마초가 조조의 획책을 의심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고 이렇게 하는 편이 한수가 조조와 혼자 대화할때 의심하기 만들기도 좋았을 것이다.[32]

어느 쪽이든 간에, 처음부터 회담을 이간계의 씨앗으로 뿌리려 의도한 조조로서는 만족스러운 전개였다. 뒷날, 조조가 또 한수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여러 곳의 글자를 첨삭해 마치 한수가 고친 것처럼 보이게 하니, 이로 인해 마초 등은 결정적으로 한수가 조조와 내통 중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마초와 한수를 이간시키니 다시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게 되었고 군이 대패하는 원인이 되었다.[33] 다수의 제장들에 의해 운영되는 관서군의 지휘 체계상 이러한 의심은 연합 자체를 와해시킬 수 있는 치명타였음에 틀림없다. 이에 조조가 날짜를 정해 어울려 싸웠다. 먼저 가벼운 몸차림을 한 병사로 싸움을 걸고 싸움이 매우 오래 지속된 후 용맹스러운 기병을 풀어 양쪽에서 공격하여 대파하고 성의, 이감 등을 참수했다. 조조는 관중제장들에게 회전을 건 것인데 이런 회전에서는 기병의 수와 질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는 법이다. 조조는 최소 5천명의 철갑을 입은 정예기병을 가지고 있었고 호인들 앞에서 보여주기만 한 철기가 이 정도니 그 외 기병들은 더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호인들이 이를 두려워했던 점을 봤을때 아무리 기병 전력을 양성하기 편한 관중의 이민족들이라도 두려워할 만큼의 기병의 질과 양을 조조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주동자격인 한수, 마초 등은 양주로 도주하고 양추는 안정으로 달아나니 관중이 평정되었다.

그러나 마초와의 오랜 싸움으로 조조 역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종요의 군사가 처음 진격한 이래로 관서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의심해 들고 일어나 조조가 친히 정벌한 뒤에야 겨우 이를 평정할 수 있었고 전사자도 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34] 전사자만 만 명 단위였으니 포로나 부상자들은 헤아릴수 없었을 것이다.

조조는 관중제장들이 산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대신 한꺼번에 차례대로 모여준 덕에 일거에 적군을 섬멸할 수 있었다는 말로 전장을 마무리했다.

삼국지연의를 비롯 후대의 묘사에서는 마초가 허저, 장비 등의 맹장들과 막상막하로 무용을 펼치되 지략은 휘하장수 방덕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기록을 살펴보면 마초는 오히려 개인의 무용도 무용이지만 그보다 야전에서의 지휘능력과 상황 판단력에 더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조조마저도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기록과 도하 작전 직전에 조조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 책략을 깨뜨리기 위해 치렀던 일전에서는 확실히 그의 비범한 면모가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관서군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게 불가했고 근본적으로는 각기 동등한 권한만을 갖춘 여러 제장들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와 조조의 결정적인 입장 차이였고, 동시에 승패가 극명하게 나뉜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자치통감에 음주를 단 호삼성은 관서군을 들어 천하에서 가장 강한 부대라고 평가했으나 동시에 이 마디를 덧붙였는데, 그 내용이야 말로 관서군벌들이 패배한 근본 원인이라고 할 만하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관서군이) 조조에게 격파당한 것은, 법제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농서에서 이민족들과 주민들의 강력한 지지와 인심을 얻고 있었던 마초를 제외한 관중의 제장들은 전부 재기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양추는 동관에서 서쪽으로 달아나 안정(安定)에 숨었으나 이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쫓아온 조조군에게 투항했고, 남전(藍田)으로 간 양흥은 한중 정벌을 중지하고 돌아온 하후연에게 토벌당했다. 그는 어찌어찌 부성(鄜城)까지는 달아났지만 결국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외 한수나 마초를 따라 멀리 양주까지 달아난 인물이 몇몇 있기는 했으나 그들도 거의 무사하지는 못했다. 특히 마초와 더불어 관서군벌의 거두로 손꼽히던 한수는 금성으로 달아났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 하후연을 상대로 마초와 산발적 연합하던 시절 버릇을 못 버리고 똑같은 짓을 하다가 대차게 깨지고 부하들에 의해 살해당했다.[35] 그나마 장로에게 도망친 인물들은 나중에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할 때 같이 항복하면서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211년 10월, 마초는 달아나 여러 융족들에 의지하려 했고 마초를 쫒아 북상해 양추의 항복을 받아낸 조조는 이를 추격해 안정에 이르렀으나 때마침 조조 역시 북방에 일이 생겨 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때 이 지역의 속관인 양부가 조조를 설득하며 마초는 한신, 영포의 용맹을 갖추고 강족, 호족의 마음을 심히 얻고 있으니 만약 대군이 돌아가며 이를 엄히 방비하지 않는다면 농상의 여러 군들은 국가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렸다, 물론 조조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빠른 시간에 군대를 귀환시켰으므로 수비는 주도면밀하지 못했다.[36]

이런 기록을 보면 실제로 조조 또한 이번 전쟁에서 자신을 고전케 한 인물이 오직 마초뿐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고, 마초가 여타 관중 제장들과는 달리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만만히 볼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양부의 건의가 근거 없는 우려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양부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면서도 그의 건의를 완전히 수용하지는 못했다. 당장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후방에서 전은(田銀)과 소백(蘇伯)이라는 자들이 주도한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또한 멀리 강동의 손권은 유수(濡須) 지역에 보루를 건설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북진을 계획하고 있었다. 덧붙여서 오랜 숙적도 힘을 기르고 있으니 이미 대패해 달아난 관서군의 동향보다는 동쪽의 일이 더 급했다.

조조는 하후연을 남겨 마초의 잔존세력을 토벌하게 했다.[37] 이렇게 조조 휘하 최고의 숙장 중 한 사람인 하후연이 장안에 남아 주둔하고, 서황과 장합 같은 일급 장수들이 하후연의 부장이 되어 역시 서부 전선에 주둔하게 된 것을 보면 조조가 마초에 대해 아무런 방지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양부전에서 이러한 조치들이 그리 주도면밀한 것이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조조가 마초에 대해 설마 다시 그가 재기해 근심거리가 되리라고는 생각치 못하고 방심한 것 또한 사실인 듯 싶다. 다른 관중 제장들은 몰락을 면치 못했으니까. 그러나 마초는 이때부터 몰락한 그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3.2. 기성 전투

이렇게 도주에 성공한 마초는 한양(천수) 상규(上邽)를 점거하면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비록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온 양주였지만 어찌 됐건 그의 명망은 아직 주효했던 듯하다. 상규현의 현령 염온은 본래 조조 측 인사로서 마초를 받아줄 의향이 전혀 없었지만, 현내 사람들 중 절대다수가 오히려 현령의 뜻을 거스르고 마초에게 힘을 보태고자 했으므로 그는 공직을 포기한 채 달아나야 했다. 아직도 마초의 영향력이 죽지 않았음을 확인한 염온은 장차 관중 지역이 다시금 전란에 휩싸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기성(冀城)으로 향했다.[38]

한편 12월 중앙으로 돌아온 조조는 212년 5월, 마초의 아버지 마등의 삼족을 멸했으며 한수의 자손들도 죽였다. 아버지와 두 동생을 비롯한 마초의 일족 200여 명은 모두 이때 죽어 마초에겐 사촌동생 마대와 아내인 양씨, 아들들과 몇몇 일족만 남게 된다.

조조는 자신의 군사활동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자고 한 자의 가속을 죽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의 가속은 살려두는 이간책을 두어 본보기로 삼았다. 대표적인 예가 염행으로 조조는 염행이 한수를 말린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한수의 자손들만 죽이고 염행에게는 "그대의 부모님은 감옥에 봉양할 공간도 없고 관청에서도 이제 못 모시는데 이제 어찌되려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니 이런 조조의 이간책에 염행은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를 안 한수가 염행을 회유하기 위해 그를 사위로 삼지만 조조가 염행을 의심하자 더욱 초조해진 염행은 결국 반기를 들어 밤중에 한수를 급습하지만, 패배하자 일가를 이끌고 조조에게 의탁하고 만다.

이렇듯 조조 쪽에 우호적인 장수였기 때문에 그의 부모들은 조조에게 붙잡힌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마초와 한수 등은 이들의 수괴였고 조조는 아직 토벌되지도 않은 이런 자들에게는 전쟁 중에 그들이 먼저 화해의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선 그냥 무시하거나 이간계를 사용했고 이들을 격파한 이후에도 굳이 염행의 사례처럼 회유책을 쓰지도 않고 마등, 한수 일족을 그냥 몰살시켰다, 조조는 이들의 가솔을 죽여 자신에게 대항할 마음을 품은 자와 그렇지 않은 소극적인 자의 차이를 분명히 했다.

이로 인해 조조에게 더욱 이를 갈게 된 마초는 필사적으로 재기를 시도하여 관중 제장들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다시 세력을 정비하는 데 성공했다. 막강한 군벌들이 대부분 죽거나 투항했지만 호족들과 이민족들까지 조조에게 복종하는 건 아니었다. 거듭된 전란으로 피폐해진 서북지역의 민심은 그곳을 통제하던 군벌들이 사라지자 극히 유동적으로 변했고 조조의 영토라기보단 분쟁지역에 가까웠으며 오히려 이 지역 민심을 장악한 마초의 땅에 가까웠다. 그 예로 농상의 군현들은 거의 모두 그에게 호응했다. 이후 마초는 다시 관중 공략을 시도하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이뤄진 유비의 익주 공략과 마초의 관중 공략은 전혀 별개의 전쟁이나, 결과에 이르러 후자가 전자에게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마초는 융족(강, 저족)의 우두머리들을 인솔하고 농상의 군현을 공격하였다.[39] 이렇게 조조에게 붙은 고을들을 공격해 평정했고 마초가 강족과 호족의 군대를 규합하자 그 위명에 농서의 거의 모든 고을들이 바람에 쓸리듯 마초에게 호응해 왔다. 현지의 조조군이 뭘 어쩔 틈도 없이 양주의 거의 전 지역이 마초의 발 아래로 들어간 것이다. 조조가 임명한 양주자사 위강과 앞서 마초의 재기를 우려하며 조조의 주의를 환기시켰던 참군 양부가 지키는 오직 한 곳, 기성만은 주와 군의 관리들을 끼고 고수하며 성문을 닫고 마초에게 맞섰다. 마초는 농우의 병사들을 모두 겸병하였으므로, 심지어는 마초와 별다른 교류가 없던 장로조차 또 대장 양앙을 파견하여 그를 도왔다. 모두 만여 명이 성을 공격했다. 양부는 나라의 사대부와 종족 자제 중 전쟁에 참가한 천여 명을 인솔하고, 종제 양악에게 성벽 위에서 초승달 모양의 진영을 만들도록 하고 마초와 전투를 했다. 정월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저항하며 지켰고 거의 8개월을 버텨냈다. 그러나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40]

그들의 항전이 그리 오래갈 수는 없었다. 상규에서 마초를 피해 기성으로 왔던 염온은 몰래 포위망을 빠져나가 장안성에 주둔하고 있는 하후연에게 지원을 요청하려 하였다. 적의 포위는 몇 겹에 이르렀으나, 염온은 밤중에 물 속에 숨어 탈출하였다. 다음 날, 마초군은 염온이 포위를 벗어난 흔적을 발견하고, 사람을 풀어 그를 쫓게 하여, 현친현의 경계에서 염온을 발견하여 이를 붙잡아 마초에게로 끌고 돌아왔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기성을 빠져나가려 했던 것인지 짐작한 마초는 그 포승을 풀어주었고 다음과 같이 그를 회유했다.
이제 승패의 향방이 보이겠지. 족하는 고립된 성의 구원을 요청하고자 하였다가 우리 손에 붙잡혔는데, 어떠한가. 혹여 내 말에 따르고자 한다면 곧 성에 돌아가 올 원군이 없다고 말하도록 하라. 이리 행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대를 죽일 것이다

마초는 이렇게 그에게 구원병이 오지 않으리라고 성 안에 통보하라 지시했다. 이에 염온은 위협에 굴복한 듯 순순히 성 앞으로 가서 고할 말이 있다 외쳤으나, 그 뒤에 나온 말은 마초를 격분케 만들었다.
대군이 3일 안에 도달할 것이니 모두들 힘을 내시오!

성중에서는 이를 보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외쳤다. 절망을 사기로 바꾼 기성의 군사는 기세등등하게 마초군과 맞섰다. 딱히 승패의 결과가 바뀔 만큼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 하나, 어쨌든 마초가 단숨에 기성을 점령하기란 어렵게 됐다. 마초는 노하여 그를 책망하면서 "족하는 목숨을 어찌 이리 가벼이 여기는 것인가!"라고 화를 냈으나 사실 마초는 협박했던 것과는 달리 당장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몇 차례에 걸쳐 염온을 회유하여 자신의 부하로 만들고자 했다. 여러모로 연의에서의 화끈하고 성미가 급한 모습과 달리 정사에서 마초가 보여준 냉철한 면모를 잘 보여주는 일화인데 마초가 염온을 나름대로 존중하고 회유하려 했던 것은 호칭에서도 보인다. 마초는 염온에 대해서 '족하'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지방관 등 중급 관료나 딱히 작위나 관직은 없지만 명문가 소속의 사람을 부르는 말로 나름대로 마초가 염온을 존중해 준 것이다.

허나 염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마초는 장기간 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치 못하였기에 그를 회유하여 뜻을 바꿀 수 있을까 기대하였다. 이에 또 다시 염온에게 성중의 연고자 가운데, 자신에게 동조하려 하는 자가 있는지 없는지 물었으나 염온은 또한 답하지 않았다. 결국 엄히 그를 책하였으나, 염온은 "장부가 군주께 사관함에 이르러서는 죽어도 두 마음을 갖지 않는다 하오. 헌데 경은 장자에게 의롭지 못한 말을 하게끔 하려는 구려. 내 어찌 삶을 탐하는 자이겠소?"라고 말했다. 그러나 염온이 끝까지 마초를 따를 기색을 보이지 않자 이에 이르러 마초도 어쩔 수 없었는지 결국 마초는 그를 죽였다. 미관말직에 머물렀으되 의기만은 높았던 한 의사(義士)의 숙연한 최후였다.[41]

당연한 일이겠지만, 염온의 발언과 죽음이 기성의 전황을 크게 뒤바꾼 것은 또 아니었다. 3일의 시간이란 실상 염온이 어떻게든 기성의 군민을 분발시키기 위해 내놓은 거짓말에 불과했고, 하후연이 마초가 전격전을 벌이며 관중 지역의 수복을 꾀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은 꽤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던 것이다. 마초의 공격이 드높아지자 성안의 사람들은 배고픔에 시달렸다, 자사 위강은 원래 인자한 사람이었는데, 관리들과 백성들이 상하는 것이 두려워 마초와 화해하려 하였다. 건안(196년~220년) 연간에, 참군사가 된 조앙이 기성에 살고 있었는데 조앙은 그 의견에 반대하였다. 집에 돌아와 부인인 왕이에게도 말했는데 왕이는 스스로 궁농수(弓籠手)를 몸에 걸쳐 활을 쏘아 마초군에 대항해 싸웠고 남편 조앙 옆에서 싸우면서 귀걸이나 반지들을 조앙의 병사들에게 상으로 주었던 여장부였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주에게는 그를 충고하는 신하가 있어, 신하는 위급할 때에 독단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독단이 꼭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후연의 구원이 근처까지 와있지 않다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병사들을 독려하고 높은 공을 위하여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모두 절개를 완수하여 죽읍시다. 항복은 안 됩니다.

조앙이 돌아가 위강을 다시 설득하려 했지만, 이미 위강은 마초와의 화해를 도모하고 있었다.[42] 이미 자사와 태수는 낯빛을 잃었고, 마초에게 항복하자고 하는 이가 있기 시작했다. 양부는 눈물을 흘리며 "저 양부 등은 부모 형제를 이끌고 대의로써 서로 면려하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두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항복은 성공할 공업을 버리고 의롭지 못한 이름 속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저 양부는 죽음으로써 이 성을 지킬 것입니다."라며 말하며 통곡을 했다. 결국 자사, 태수는 사람을 파견하여 화의를 요청하고, 성문을 열고 마초를 맞이하였다. 마초는 성 안으로 들어왔으며, 기성에서 양악을 구금하고, 양앙을 시켜 자사, 태수를 죽이도록 했다. 양부는 마초의 호의로 살아남았는데 관청을 차렸으니 군무를 살피고 사무를 관장할 행정관이 필요해 남겨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조가 임명한 다른 지방관을 죽일때 극렬 친조조파 속관인 양부를 죽이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43]

어쨌거나 213년, 마초는 여러 융족들을 이끌고 다시 일어나 기성을 제외한 농상의 군현들을 모두 손에 넣었다. 이후 공성전으로 기성을 장악한 마초는 정서장군(征西將軍) 병주목(幷州牧) 독양주군사(督涼州軍事)를 자칭하며 자신의 재기를 요란하게 선전했다. 그리고 이제 조조 휘하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인 하후연과 대결을 펼치게 된 것이다. 하후연은 본래 조조 휘하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특히 신속한 용병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 때문에 관도대전 당시에는 최전선에 대한 보급 업무를 총괄했고, 하북 원정 때는 '엿새에 천 리를 간다'는 명성이 돌 정도로 화려한 용병술을 구사하기도 했다. 강동 정벌에 나선 조조가 굳이 그에게 장안성을 맡긴 이유 또한 하후연이라면 충분히 관중의 소요를 제어할 수 있으리라는 신임에서 기인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번에 그가 상대해야 할 적수는 저족 반란군이나 여타 관중 제장의 잔당이 아닌 마초였다. 하후연과 마찬가지로 기병대 운용에 능숙하고 속전속결형 전법을 선호하는 무장인 그는 앉아서 공격을 기다릴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장안에 있던 하후연은 조조의 재가를 받느라 제때 원군을 대지 못했고 원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다음이었다. 마초는 농성전 대신 야전을 택했고 기성 밖 200리 지점에서 조조군에서도 손꼽히는 명장 하후연의 군세를 격파했다.

자세한 전황을 말하면 마초가 양주자사 위강을 양주 천수군 기현에서 포위하자 하후연이 위강을 구원하려 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위강이 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초는 기성에서 2백여 리 떨어진 곳까지 신속하게 진격하여 하후연과 맞서 싸웠는데 마초는 단숨에 요격전을 벌여 자신의 방식대로 전투를 끌고 갔다. 아직 기성이 함락당했음을 알지 못했던 하후연에게 이것은 불의의 기습이나 다름없었다. 뛰어난 장수답게 일격에 궤멸당하는 것을 피하고 교전 태세에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지만, 군이 불리했고 전장의 주도권은 계속 마초에게 있었다. 결국 마초에게 질질 끌려다니던 하후연은 견저가 모반하고 저족이 군사를 이끌고 마초에게 협력하려 한다는 급보를 접하자 말머리를 돌려 퇴각했다. 하후연의 퇴각으로 한동안 농서 지역에서 마초를 견제할 만한 군세는 사라지게 된다.[44] 기성을 비롯한 관중 일대의 군현이 마초의 손에 넘어가고, 이를 저지하러 온 하후연까지 패퇴당한 이상 양주는 이제 온전히 마초의 영토였다.

그러나 전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형태로 터진 반격은 이 일대의 전황을 급격하게 뒤바꿔 놓았다.

왕이는 남편에게 죽은 상관인 위강을 위해 복수하도록 권했다. 마초는 조앙의 적자 조월을 인질로 취하였는데 마초는 조앙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고 싶었지만 아직 크게 신뢰하지 못하였다. 마초가 양주 관리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데. 왕이는 자신의 절개가 높다는 말을 듣고 자신을 초대한 마초의 아내 양씨의 환심을 사 이를 이용해 마침내 조앙도 마초의 신임을 받게 했다. 왕이는 양씨를 설득하여 조앙이 마초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나라가 안정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난리를 평정하는 것은 사람을 얻는 데 있습니다. 양주의 군사와 말이야 말로 중원의 나라와 싸우는 데 딱입니다.

마초의 처 양씨는 깊게 감동하였으며, 양씨는 왕이를 신뢰하게 되었고 중요한 일에 대해서 왕이를 불러 상의하고 결정하곤 했다. 조앙이 마초의 신뢰를 받게 된 것과 모두 공을 세우고 화를 면한 것은 왕이의 노력 때문이었다.[45]

한편 살아남았던 양부는 마음속으로 마초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적합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 양부의 아내가 갑작스럽게 죽어 장례를 치러야 할 상황이 됐다. 이를 빌미로 기성을 잠시 떠날 수 있게 된 양부는 역성(歷城)을 방문하여 강사를 만났다. 강서는 양부의 고종사촌 형으로 역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양부는 어렸을 때 강서의 집에서 성장하였는데, 강서의 어머니와 강서를 만났을 때 이전에 기성에서 발생한 일을 말하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매우 비통해 했다. 강서가 왜 우는지 묻자 양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성을 지켰지만 완전하게 할 수 없었고, 주인이 죽었는데 함께 죽을 수 없었으니 또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서 숨을 쉬며 살겠습니까! 마초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군주를 배반했으며 주의 장수들을 죽였습니다. 어찌 저 양부 혼자만이 슬퍼하며 책임을 느끼겠습니까? 한 주의 사대부들은 전부 치욕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병권을 장악하고 전권을 휘두르고 있지만, 적을 토벌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은 조돈이 사관들에게 반역자를 죽인 것이 아닌 주군을 죽인 것으로 쓰인 까닭입니다. 마초는 강대하지만 신의가 없고, 대부분 모순되는 것이 많아 무찌르기가 쉽습니다.

이 강서라는 인물은 단순한 친인척이 아니라 역성을 지키고 있던 장군으로, 어느 정도 병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양부는 그것을 밑천 삼아 마초와 대항하고자 한 것이다. 본래 강서는 늙은 어머니의 안전 때문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 어머니가 양부에게 감동해 자신의 생사를 신경쓰지 말라고 강권하자 이에 마음을 다잡고 마초를 공격할 채비를 했다. 강서의 동향 사람들인 조앙, 윤봉 및 기성에서 기다리고 있는 양부의 동료 양관(梁寬) 등이 합류하면서 이와 동시에 외부의 고향 사람 강은, 요경, 공신, 무도 사람 이준, 왕령 등과 모의하는 한편 종제 양모를 기성으로 보내 양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거기다가 안정현의 양관, 남안의 조구, 방공과도 손을 잡아 계획은 점차 구체적으로 발전되었다.[46]

이 가운데 조앙은 아들 조월이 마초의 군영에 있다는 이유로 합류를 주저했지만, 그의 아내 왕이"군부의 치욕을 설욕할 때는 자신의 목숨조차 내놓아야 하거늘 하물며 아들 하나쯤이야 어떻단 말인가"라는 무서운 말로 설득한 탓에 조앙은 그대 말이 옳다고 하고 결국 계획을 밀어붙이게 되었다.[47]

훗날이야 어찌 됐건, 양부와 강서 등의 계획은 이랬다. 우선 계획의 주도자인 두 사람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마초의 세력권을 공격한다. 그러면 마초는 필시 직접 그들을 격퇴하러 출진할 텐데, 그 사이 기성에 있는 동료 양관이 성 안의 마초 세력을 일소하고 기성을 장악하여 마초의 근거지를 없애버린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퇴각했던 하후연이 다시 돌아와 그들을 지원한다면 군사력으로도 밀릴 게 없다. 이상의 결론을 내린 양부 등은 즉각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벌어진 전투는 그야말로 처절함 그 자체였다. 마초는 양부, 강서가 노성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출전하였다. 이렇게 양부, 강서가 노성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마초가 출군해 이를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는데, 양관, 조구가 기성의 성문을 닫아 버리자 마초가 들어갈 수 없게 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기성은 양관에 의해 점거되었으며 조구와 양관은 양악을 풀어주었고, 마침내 조앙, 양관 등은 성 안에 머물고 있던 마초의 아내와 남은 일가붙이를 모조리 살해했다. 살아남은 건 거기 없던것으로 추정되는 사촌동생 마대나 첩실일가 정도. 그러나 전투 자체는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았다. 양부가 비록 직접 미끼를 자청하여 마초와 교전을 벌였지만, 본래 장수가 아닌 그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양부의 형제 일곱 명이 전사했고, 양부 본인 또한 다섯 군데나 부상을 입었다. 사실상 지휘선이 완전히 붕괴된 그 상황에서 되려 마초가 물러난 것은 오직 기성이 점거당했다는 급보 때문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마초는 전쟁에서는 패한 것이었다. 결국 마초는 가족이 죽은 복수라도 할 목적이었는지 강서의 근거지 역성을 습격하여 강서의 어머니를 붙잡았다. 강서의 모친은 그에게 욕을 퍼부었다.
너는 부친을 배반한 역적 놈이고, 군주를 살해한 흉악한 적이다. 천지가 어찌 너를 오래 살려두겠느냐? 네가 일찍 죽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감히 사람들을 보겠느냐!

마초는 격노하여 강서의 모친을 죽였다. 결국 기성전투는 서로가 서로의 일가를 멸한 끔찍한 전쟁으로 변한 것이다.

이렇게 본거지와 일가를 잃고 마초는 진퇴가 낭패스럽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자신의 뒤를 쫓아올 하후연을 걱정해야 했다. 이제 더 이상 관서에는 발을 붙일 수 없다 여긴 그는 멀리 한중으로 달아났다. 앞서 군사를 지원했던 장로의 호의에 기대를 걸고 몸을 의탁하러 간 것이다.

해를 지나 건안 19년(214년) 봄, 장로에게 달아났던 마초는 포기하지도 않고 끈질기게 양주의 재공략을 시도했다. 그는 한중의 군사를 빌려 기산(祁山)을 공격했는데, 마초는 한양에서 다시 강족, 호인에 의지해 군사를 일으키자 저왕 천만이 모반하고 마초에 호응해 흥국에 주둔했다. 하후연을 시켜 이를 토벌하게 했다.[48] 한편 마초의 원수인 왕이는 남편과 함께 기산에서 마초와 30일간 맞서 싸웠다. 기산이 습격당하고 나서 기산의 수비에 조앙이 낸 아홉 가지의 기묘한 꾀에는 전부 왕이의 생각이 들어 있었다.[49] 또, 당시까지 현지를 지키고 있던 장수 강서는 급히 하후연에게 연락을 보내 상황을 알렸다. 대부분의 장수들은 함부로 출진하는 것보다는 우선 업군에 있는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기를 조조의 절도(節度)를 기다려 행동에 나서자고 주장했지만, 앞서 간발의 차이로 기성을 빼앗긴 탓에 마초에게 패배한 경험을 잊지 않은 하후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보고를 받은 지금 당장 출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공께서 업에 계시니 왕복하여 4,000리 거리요. 보고가 이를 무렵이면 강서 등은 반드시 패할 터인데, 이것이 급한 상황을 구할 만한 계책은 못 되는 것이잖소?[50]

마초의 요격에 호되게 당했던 만큼 이번만은 마초에게 선수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투였다. 다만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는지, 부장으로 있던 장합에게 보병과 기병 5천을 주어 선두에 서서 진창의 좁은 길을 따라 선봉으로 진격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자신은 후방에 남아 군량을 감독하며 잠시 전황을 주시하기로 했다. 만약 장합이 마초에게 패하거나 밀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때는 하후연이 지원군이 되어 뒤따라 출진할 태세였다. 그러나 전쟁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장합이 위수 가에 도착하자 마초가 강족과 저족 수천 명을 이끌고 장합에 맞섰으나 곧 싸우기도 전에 마초가 퇴각하니 장합은 진군하여 마초군의 무기를 거두었다. 하후연이 도착했을 때는 여러 현들이 이미 다 항복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그는 하후연의 말대로 보고가 조조에게 들어가고, 또 그에 대한 지시가 장안으로 내려올 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리라 예상했던 듯 싶다. 그러나 작년의 전쟁을 거울삼은 하후연이 신속한 대처로 나오자 후퇴한 것이다. 이제 마초가 한중에서 더 나올 생각이 없는 듯 보이자 양주는 하후연의 독무대가 되었다. 하후연은 이후 이민족과 연합한 한수를 격파하고 양주를 종횡무진 평정하며 명장으로서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

어쨌거나 이렇게 구원군이 오고 기산의 포위가 풀리자, 마초는 더 이상의 인질가치가 없어진 조앙과 왕이의 자식 조월을 죽이고 후퇴했다.

3.3. 장로 휘하

마초는 다시 농상에서 패했다. 그 뒤 한중으로 달아났는데, 장로는 본래 마초의 용맹과 명성에 반해 마초를 도강좨주로 삼고 자신의 딸 장기영과 결혼시켜 그를 자신의 사위로 삼으려 했지만, 어떤이가 말하길
이처럼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이가 어찌 남을 사랑하겠습니까?

라며 마초의 반란에 의해 그의 가족들이 희생당했음을 상기시키며 만류했다. 과연 듣고 보니 뭔가 껄끄러워지는 데가 있었는지 장로는 혼약을 없던 일로 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장로는 마초를 믿기 어려운 인물이라고 인식했는지도 모른다.[51]

이러나 저러나 마초의 생활은 불우했다. 당초 마초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 그의 첩의 동생인 동충이 삼보(三輔)에 머물렀는데 마초가 패하게 되자 동충이 먼저 한중으로 들어왔었다. 정월 초하루 아침, 동충이 마초에게 장수를 바라는 뜻으로 술잔을 올리자 마초가 가슴을 치고 피를 토하며 통곡하여 말했다.
온 가문의 근친 일족이 하루아침에 함께 죽었는데 지금 두 사람이 서로 축하한단 말인가?[52]

그 뒤 수차례 장로에게 군사를 청해 북쪽으로 양주를 탈취하려 하니 장로가 보내 주었으나 이로움이 없었다. 위에도 나왔지만 그를 바라보는 한중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 고운 것도 아니었다. 특히 장로의 부장 양백(楊白)은 마초의 재능과 명성을 시기하여 공공연히 그에게 거부감을 표했는데, 결국 장로의 부하들이 모조리 한통속이 되어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는 생각이 든 마초는 여기에서조차 달아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다시 한 번 가족들을 버리고 심복인 방덕과도 이별하게 되었다. 마초의 첩 동씨와 아들 마추는 한중에 남아있다가 훗날 조조가 한중을 차지하고 나자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된다.

마초는 마침내 무도를 따라 달아나 저족 중으로 들어갔다. 어쨌건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 저족[53]의 부락으로 간 마초는 막막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홀연 익주에서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면서 새로 얻은 참모 이회(李恢)였다.

4. 유비 휘하

4.1. 유비의 입촉

이회전에 따르면 유비는 이회를 한중으로 파견하여 마초와 우호를 맺도록 했다. 마초는 그래서 유비를 따랐다. 마초는 장로와 더불어 일을 도모하기에 부족한 인물이라 생각하여 내심 근심하고 번민했는데 유비가 성도에서 유장을 포위했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서신을 보내 항복을 청했다. 유비가 사람을 보내 마초를 영접하자 마초는 군사를 거느리고 곧바로 성 아래에 도착했다.

유비는 유장과의 전쟁 와중에도 각지의 소식을 접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던 듯싶다. 양주에서 용명을 떨쳤던 마초가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어 저족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 말을 들은 그는 즉시 이회를 보내 자신과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기왕 누군가에게 몸을 의탁해야 할 신세라면 실력과 인망을 겸비한 유비가 낫겠다 싶어진 그는 마침내 그때까지도 자신을 따라주던 군사들을 대동하여 몸을 돌려 성도로 향했다. 마초가 자신의 장수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비는 기뻐하며 말했다.
 
이제 내가 익주를 얻었구나!
 
유비는 사람을 시켜 마초를 멈추게 하고 은밀히 군사를 대어 주었다. 마초가 도착하자 군을 이끌고 성 북쪽에 주둔하게 했는데, 마초가 도착한 후 열흘이 지나기 전에 성도가 무너졌다. 당시 성도의 성벽을 사이에 두고 수십 일 동안 대치하던 유비군과 유장군의 전쟁은 마초의 전향으로 비로소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성안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유장이 이내 머리를 조아려 절하니 마초를 평서장군, 독임저로 임명하고는 예전대로 도정후로 삼았다. 이 해가 건안 214년이다.

관우는 마초가 항복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예전부터 친분, 내왕이 있는 이가 아니기에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사람됨과 재주가 누구에 비교될 수 있는지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강한 호승심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맹기(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웅렬이 남보다 뛰어난 일세의 호걸로 응당 익덕(장비)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는 있으나 염(髥) 그대의 절륜 일군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으니 이 때문에 제갈량이 관우를 일컬어 염(髥)이라 한 것이다. 관우는 이 서신을 읽어보고 크게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주었다.[54]

마초는 유비가 후대하는 것을 보고 유비와 더불어 말하며 늘 유비의 자(字)를 부르니 관우가 노하여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55] 유비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궁박해져 내게로 귀의했소. 그런데 경 등이 분노하며 내 자(字)를 불렀다 하여 죽이자 하니, 천하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이겠소!

장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응당 예(禮)를 보여야지요.

다음 날, 크게 모이며 마초를 청했는데, 관우, 장비가 함께 칼을 쥐고 곧게 서 있었다. 마초는 좌석을 둘러보았을 때 관우, 장비를 보지 못했다가 그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니 마침내 다시는 유비의 자(字)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 날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야 패망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의 자(字)를 부르다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구나.

이후로 유비를 존중하며 섬겼다.[56]

하지만 배송지는 이 기록에 대해 관우는 당시 형주에 있었는데 왜 유비, 장비랑 같이 익주에 있냐고 주석을 달아 이 기록의 신빙성을 크게 부정하였다. 연의에서야 화끈하고 성미 급한 인물로 나오지만, 정사에서의 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냉철함을 보유했고 사리분별도 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궁지에 몰려 귀부한 유비에게 어찌 저러한 하대를 할 수 있었겠냐는 것. 더구나 관우는 마초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기에 제갈량에게 편지까지 보내가며 그에 대한 내용을 물어야 했다. 직접 만날 수 있는 환경이라면 굳이 편지까지 보내며 제갈량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도 하다. 이에 배송지는 크게 분노해 분질(忿疾)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기록 자체가 그릇됐으며 사실이 아니라고 극렬하게 비판했다.[57]

한 가지 가능성을 말해보자면 이 시점에서 마초의 지위가 명목상으론 형주를 진수하는 관우의 관할 구역인 임저독이었기 때문에 마초가 잠시 본인의 임지가 속한 형주로 와서 형식상 직속 상관인 관우와 대면했을 공산은 있다. 거기에 유비는 익양대치 때 형주에 군을 이끌고 온 적이 있었고 마초 역시 여기에 종군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유비, 관우, 마초가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만났을 가능성이 없진 않은 편이며, 잠시나마 모두 같이 형주에 머물렀을 확률은 있지만, 파서태수로서 조조가 공격한 한중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방어해야 하는 장비가 형주에 왔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에 만약의 만약을 가정한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여도 배송지의 의견처럼 사실상 헛된 기록에 가깝기 때문에 해당 기록은 신뢰성을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4.2. 유비 휘하

이때 팽양은 자신이 먼 곳으로 진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불쾌하여 곧 마초를 찾아가 만났다. 마초가 팽양에게 질문했다.
그대는 재능이 특출나므로 주공께서는 그대를 중요하시며, 응당 제갈공명, 효직(법정) 등과 함께 발을 나란히 하고 달려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찌하여 외지의 작은 군에 임명되었습니까? 이것은 사람들의 그대에 대한 희망을 저 버린 것입니다.

팽양이 말했다.
(유비가) 이미 늙어서 황당하고 어그려졌으니 또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마초에게 말했다.
그대가 외부를 맡고 내가 내부를 담당하면 천하는 충분히 평정되지 않겠습니까?

마초는 먼 곳에서 떠돌다가 촉나라로 투항해 왔으므로 항상 위험과 두려움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팽양의 말을 듣고 매우 놀랐으므로 대답하지 않았다. 팽양이 돌아간 후, 마초는 팽양의 말을 모두 상주했다. 이 때문에 팽양은 체포되어 담당 관리에게 보내졌다.[58] 이는 마초가 여러차례 고난을 겪고 안정된 생활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팽양의 반란이 실현 가능성은 들째치고 이런 표현이 나왔다는 것은 마초가 매우 조심하면서 생활했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마초가 양백들의 시기를 피해 무도 저족부락으로 피신해 있다가 촉으로 들어올 때 그의 첩인 동씨와 아들 마추는 남아서 장로에 의탁하고 있었다. 장로가 패망하자 조조가 이들을 손에 넣었는데, 동씨를 염포에게 하사하고 마추는 장로에게 주니 장로가 자기 손으로 직접 마추를 죽였다.[59]

4.3. 한중 공방전

218년, 유비가 제장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진군했다.[60] 유비는 장비와 마초 등을 파견하여 저(沮) 길로부터 나와 하변을 취하도록 하였고, 마초의 출정 소식에 저, 뇌정 등 일곱 부족 1만여 부락이 모반하여 유비에게 호응했다.[61] 유비가 장비, 마초, 오란 등을 보내 하변에 주둔하게 하니, 조홍을 보내 이에 맞서게 했다.[62] 유비는 장수 오란을 보내 하변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가 장비를 보내 고산에 주둔케 하여 군의 배후를 끊으려 했다. 의논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자 조휴가 말했다.
적이 실제로 길을 끊고자 하면 응당 복병으로 몰래 행군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먼저 성세를 과장하니 이는 실제로는 그들이 이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적군이 아직 집결하지 못했을 때 급히 오란을 공격해야 할 것이고 오란이 격파되면 장비는 달아날 것입니다.

조홍이 이를 좇아 진병했고, 오란을 공격해 대파하니 과연 장비는 달아났다.[63]

3월, 장비,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고, 음평의 저족 강단오란을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왔다.[64] 이후 마초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데 한중으로 후퇴했다는 무제기의 기록도 그러하거니와 아래의 기록처럼 간접적 추측이 가능한 정황이 있으니 유비가 전군을 한중으로 이끌고 들어가서 싸웠으므로 마초도 이동하여 싸웠을 것으로 보인다. 한중 공방전의 승리 이후, 유비가 한중왕이 되고 유비가 마초를 좌장군, 가절로 임명했다.

이렇게 유비가 한중왕이 되어 황충을 후장군으로 임명하려 하니 제갈량이 유비를 설득하며 말했다.
황충의 명망은 본래 관우, 마초와 동등하지 않았는데 이제 곧바로 동렬에 두려 하십니다. 마초, 장비는 가까이에서 그의 공을 직접 보았으므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으나 관우는 멀리서 이를 들으면 필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불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내가 직접 이해시키겠소.

그리고는 마침내 관우 등과 더불어 나란한 지위에 두고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65]

4.4. 이릉대전

221년, 표기장군, 영(領) 양주목으로 올리고 태향후로 올려 봉했다.

이것은 굉장히 많은 부분을 시사하는데 이 양주목(양주자사) 자리는 촉한의 북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 주로 받은 것이다. 대표적으로 위연이나 강유를 들 수 있다. 근데 이들도 '영 양주자사' 였을 뿐인데 마초는 그냥 '영 양주목'이다. 제갈량의 '영 익주목'을 생각해보면 마초 홀대설을 부정하는데 있어서 강력한 근거자료다.
짐이 부덕(不德)하나 지존(至尊)의 자리를 이어 종묘를 봉승(奉承)하게 되었다. 조조(曹操) 부자(父子)가 대대로 죄가 가득하니 짐은 참달(慘怛-참담하고 비통함)하여 열병으로 머리가 깨어질 듯하구나. 해내(海內)가 원망하고 분노하여 정(正)에 귀의하고 본(本)으로 되돌아오고 저(氐), 강(羌)이 솔복(率服-잇따르며 와서 복종함)하고 훈육(獯鬻- 흉노)이 의(義)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대는 북토(北土)에 신의를 드날리고 위무(威武-위엄과 무력) 또한 아울러 빛났도다. 이로써 그대에게 임무를 맡기니 효호(虓虎-포효하는 범)의 위용을 높게 드날려 만 리 밖까지 겸하여 바로잡고 백성들의 아픔을 구하도록 하라. 장차 조정의 교화를 밝히고 베풀어 멀고 가까운 이들을 품어 보호하고 상벌을 엄숙하게 삼가고 한나라의 복운을 두텁게 하여 천하의 기대에 보답하도록 하라.

유비가 마초를 표기장군, 영(領) 양주목으로 임명한 이 시기는 이릉대전이 발발한 때이다. 유비는 마초를 임명한 책문에서 강, 저가 복종하고 있고, 흉노 및 북쪽지방에 대한 그의 큰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오와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언제라도 생길지 모를 위, 이민족의 침입에 대한 북쪽의 방비를 마초에게 전적으로 맡긴 것으로 보인다.

5. 죽음

222년에 죽으니 이때의 나이가 46세였다. 죽음이 다가오자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신의 종족 2백여 명이 맹덕(조조)에게 주살당해 거의 다 없어지고 다만 종제 마대가 남았으니 미천한 종족을 위해 제사가 이어질 수 있도록 폐하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 외에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66]
세상을 호령했던 맹장 마초였지만 마지막 유언은 오직 가문의 존속만을 빌고 있다. 마원 이래에 명가로 유명했던 한양 마씨의 후예이자 한때 관중을 호령했던 관중 제장의 맹주였으면서도 일가족 모두를 전쟁과 함께 잃은 그가 남긴 유언은 정말 처량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마초는 한중 면현 정군산 부근, 뇌공산에 묻혔다. 면양 무후사와 약 1km 떨어져 산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한수를 사이에 두고 관자산의 여랑사(즉 장로의 딸 장기영의 묘)가 있다. 시호를 추증해 위후(威侯)라 했다. 아들 마승이 후사를 이었다. 마대의 관위는 평북장군에 이르렀고 진창후로 올려 봉해졌다. 마초의 딸 마씨는 안평왕 유리의 배필이 되었다.[67]

마초의 요절은 유비와 촉에 있어서는 여러모로 안타까운 일인데 마초가 사망한 연도는 이릉대전이 끝난 연도와 같다. 이 무렵 촉은 관장황이라는 1세대 핵심 지휘관들이 순차적으로 사망했다. 마초는 관장마황조 중 가장 젊었다고 할 수 있기에 살아있었다면 북벌 때 마초 자신의 연고지였던 옹양주에서 일어나는 전투에서 중요한 비중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결국 요절하면서 이릉대전 전후를 기점으로 관장마황조 중에선 조운만이 남았고, 몇 년이 지난 1차 북벌 이후에는 조운까지 사망해 이들은 모두 역사에서 퇴장한다. 제갈량의 북벌 시기 인재 부족에 시달리던 촉으로서는 마초를 비롯하여 형주 공방전부터 이릉대전까지 잃어버린 인재들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이었다. 살아남은 2세대 장수들인 왕평, 요화, 마충, 장익, 장억, 위연 등의 활약이나 공적을 보면 잃어버린 인재들이 더더욱 아깝게 느껴진다.[68]

일부에서는 마초의 무기력한 말년의 모습과 요절이 마음의 병을 얻어서 그런 게 아니었나 하는 추측[69]을 하기도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부터가 우리 집안 사람들은 다 죽고 마대 하나 남았으니까 잘 좀 부탁합니다였을 만큼 마초는 조조와의 대립과 익주 공방전을 거치며 거의 모든 것을 잃게 되었고, 촉에서는 자신의 입지 때문에 적지 않은 고민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 삼국지 촉서 허정전 주석 익주기구전.[2] 배송지 주 전략.[3] 삼국지 위서 장기전 주석 위략.[4] 삼국지 위서 종요전 주석 배송지 주 전략.[5] 가규도 이때 포로로 붙잡혔었다.[6] 사례(司隸) 하동군(河東郡) 평양국(平陽國)[7] 의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함부로 화살을 뽑았다가는 더 큰 출혈이 일어나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하다.[8] 삼국지 위서 장기전, 자치통감.[9] 사병(私兵)을 뜻한다.[10] 배송지 주 전략.[11]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다른 관점으로 해석해야 하는 게, 조조는 양주 이민족 세력의 안정을 위해 마등에게 관직을 주고 좋게 대우해준 것이다. 즉, 양주에서 마씨 일가가 입김을 발휘하고 버티고 있어줘야 조조의 계책이 작동하는 것이지 마씨 일가가 군대를 해산하고 양주 세력을 다른 이에게 넘긴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훗날 이 판단으로 인해 마초나 다른 이민족 수장들이 중원을 공격하지만, 이 역시 조조의 한중 공격으로 인한 이민족 세력의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지 마초의 단독 행동이 아니었다.[12] 삼국지 촉서 허정전 주석 익주기구전.[13] 삼국지 오서 주유전.[14] 다만 애초 조조는 마씨 일가가 양주 이민족을 통제해주길 바라고 마등을 대우해준 것으로, 마씨 일가의 누군가는 양주에서 남아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마초의 중원 공격도 마초가 입신양명을 위해 가족이 죽어도 좋다라는 해석보단 마초도 공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해야 하는 게, 마초의 군대는 수많은 이민족들의 연합체로 실제 전쟁 당시에도 수장들끼리 의견이 엇갈려서 제대로 된 공세를 펼치지 못하는 일이 많았던 만큼, 양주 전체의 인심이 이미 반 조조로 돌아섰는데 업에 가족들이 있다고 마초 혼자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15] 삼국지 위서 고유전.[16] 위기전 주석 위서.[17] 배송지 주 전략.[18] 연의와 달리 마초가 장안을 점거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정사 삼국지 내에 없다, 장안 넘어에 있는 동관을 포위했다고 나와 정황상 장안을 점거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은 있으나 직접적으로 마초가 장안을 함락했다라는 식의 기록은 없으며 장안 점거를 한 건 아니고, 장안에서 못 기어나오게 위협만 한 후 우회를 하였다는 것이 대세. 실제 드라마 삼국에서도 이걸 고려해 마초가 장안을 무시하고 동관으로 바로 진격하는 식으로 나온다.[19] 삼국지 위서 장기전 주석 위략.[20] 삼국지 위서 두기전.[21] 삼국지 위서 장로전 주석 위략.[22] 삼국지 위서 서황전.[23] 삼국지 위서 무제기.[24] 삼국지 위서 무제기 주석 산양공재기.[25] 삼국지 위서 무제기.[26] 삼국지 위서 무제기.[27] 삼국지 위서 무제기 조만전.[28] 담을 양쪽에 쌓아 만든 통로다.[29] 삼국지 위서 누규전.[30] 삼국지 위서 가후전.[31] 삼국지 위서 무제기 주석 위서.[32] 일단 자치통감에서는 이 기록을 배제하였다. 자치통감의 국내 번역자인 권중달 교수는 원저자 사마광이 이를 사서에 수록하지 않은 것을 들어 허저전의 내용이 조작일 것임을 의심하고 있는데 다만 이 부분은 앞선 기록들에서 허저가 호위하여 마초가 실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하기에 시도 자체는 사실이지만 내용을 허저의 용맹을 강조하기 위해 부풀린 기록이라는 의견도 있다.[33] 삼국지 위서 가후전[34] 삼국지 위서 위기전 주석 위서[35] 이각, 곽사전.[36] 삼국지 위서 양부전.[37] 삼국지 위서 하후연전.[38] 삼국지 위서 염온전.[39] 강유의 아버지 강경이 이때 강족의 봉기를 막다가 전사했다는 설이 있으나 마초의 공격 말고도 강족과 저족을 수시로 이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켜왔기 때문에 시점을 확언할 수는 없다.[40] 삼국지 위서 양부전.[41] 삼국지 위서 염온전.[42] 양부전 주석 황보밀 열녀전 왕이.[43] 삼국지 위서 양부전.[44] 삼국지 위서 하후연전.[45] 양부전 주석 황보밀 열녀전 왕이.[46] 삼국지 위서 양부전.[47] 양부전 주석 황보밀 열녀전 왕이.[48] 삼국지 위서 무제기.[49] 양부전 주석 황보밀 열녀전 왕이.[50] 삼국지 위서 하후연전.[51] 배송지 주 전략의 기록.[52] 배송지 주 전략의 기록.[53] 마초는 모든 걸 잃은 시점에서도 유독 이민족들에 대한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한수에게 붙었다 하후연에게 깨진 저족의 천만도 이 시기 마초에게 도망오기도 하고 말이다.[54] 삼국지 촉서 관우전.[55] 자를 부르는 것은 상대방과 신분이 동등하거나 높을 때 가능하며, 하급자가 상관의 자를 부르는 건 불경하다 여긴다. 부하가 상관을 부를 땐, 직책으로 부르는게 일반적이다.[56] 마초전 주석 산양공재기.[57] 신 송지가 보건대(주석자인 배송지裵松之의 견해), 마초는 궁박해져 유비에 귀의하여 그의 작위를 받았는데 어찌 오만하게 유비의 자를 부를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유비가 촉으로 들어올 때 관우를 남겨 형주를 진수하게 했으니 관우는 일찍이 익주 땅에 있은 적이 없다. 그래서 관우는 마초가 투항했다는 말을 듣고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주는 누구에 비견될 수 있는지를 물은 것으로 이 책(산양공재기)이 말하는 바 대로가 아니니, 관우가 어찌 장비와 함께 곧게 서 있을 수 있었겠는가? 무릇 사람이 일을 행할 때는 모두 그것이 가능하다 하여도 불가함을 알면 이를 행하지 않는 법이다. 과연 마초가 유비의 자를 불렀다면 또한 이치로 볼 때 의당 그리해도 된다고 여겨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령 관우가 마초를 죽일 것을 청했다 하더라도 마초는 이를 듣지 못했는데, 단지 두 사람이 곧게 서 있는 것을 보고 무슨 까닭으로 이내 (자신이 유비의) 자를 불렀기 때문임을 알아채고는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고 말했겠는가? 말이 이치에 닿지 않음이 너무 심해 가히 분질(忿疾-분노하고 미워함)에 이르는구나. 원위(袁暐-헌제춘추의 지은이), 악자(樂資-산양공재기의 지은이) 등이 기재한 여러 대목은 추잡하고 헛되고 그릇되니(穢雜虛謬) 이와 같은 부류가 거의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다.[58] 삼국지 촉서 팽양전.[59] 배송지 주 전략의 기록.[60] 삼국지 촉서 선주전.[61] 삼국지 위서 양부전.[62] 삼국지 위서 무제기.[63] 삼국지 위서 조휴전.[64] 삼국지 위서 무제기.[65] 삼국지 촉서 황충전, 이를 통해 마초가 편입된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유비군 내에서 장비나 황충보다 높고 관우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66] 유비의 수하가 된 후 마초는 다시 가정을 꾸려 아들 마승을 얻어 그가 후사를 이었지만 마승이 어린 탓에 마대에게 가문의 제사를 맡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유비에게 귀순하고 새로 가정을 꾸렸을 때가 214년 이후라 보고 222년 마초가 죽었으니 아이의 나이를 높게 잡아봐야 8세다.[67] 유리가 요절하는 바람에 딸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리의 사망연도가 244년인데 가정을 꾸렸을 때가 214년 이후라 보면 당시 마초의 딸은 적어도 30세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68] 마초는 제갈량보다 5살 연장자였다. 관장황조 등 1세대보다는 제갈량을 비롯한 2세대들에 더 가까웠다. 유비가 마초를 영 양주목에 임명한 것도 북벌에서 그의 역할에 크게 기대를 한 인선이었던 걸로 보이지만 둘 다 이릉대전 시기에 세상을 떠났으니 참 얄궂은 상황이기도 하다.[69] 동충과의 일화 당시 피를 토했다는 기록을 신뢰한다면 가족들을 잃은 스트레스로 장로에게 몸을 의탁했을 당시에도 이미 건강이 악화된 상태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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