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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20:38:02

육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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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
3.1. 비판3.2. 옹호
4. 일화5. 창작물에서

1. 개요

陸機
(261 ~ 303)

삼국시대 오나라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사형(士衡). 육항의 4남으로 육손의 손자가 된다.[1] 형으로는 육안, 육경, 육현, 동생으로는 육운, 육탐이 있다. 양주 오군 오현 사람. 육기의 키는 7척이며, 목소리가 종(鐘)과 같았다. 어려서 남다른 재주를 지녀, 유학을 숭상했다. 육기에게 하늘이 내려준 재능은 비단처럼 다듬어져(天才綺練), 문장의 아름다움의 점에서는(文藻之美) 당대 제일이었다.

또한 박학하면서도 예법에 어긋나면 행동하지 않았다고 한다.

2. 생애

274년 아버지 육항이 죽자 위에서 열거한 형제들 가운데 육탐을 제외한 나머지와 함께 아문장으로서 아버지의 군사를 나눠가졌으며, 280년에 육안과 육경이 싸우다가 죽은 뒤 육기와 육운은 서진에 항복한다.

20세에 오가 멸망하자, 옛 거처로 은거해, 문을 닫고 10년간 학문에 힘썼다고 진서 육기전은 기록하나 진서 좌사전에 따르면 육기가 낙양에 들어가 좌사를 비웃다가 그의 걸작 《삼도부(三都賦)》가 새로 나오자 이를 보고 탄식했다고 나오는데 이는 포로로 잡혀 들어온 것으로 육기 자신이 지은 《형평원중(兄平原贈)》 서문에서 '내 나이 20살에 일찍이 홀로 되어 아우 사룡(士龍, 육운)과 함께 부모를 잃고 가정을 잃었다네. 또 왕명에 쫒겨 포승을 받고 북쪽으로 갔다.'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좌사가 삼도부를 짓고 있을때인 280년에 육기가 낙양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으며 삼도부가 나온 시점은 오나라가 멸망하고 삼도부에 서문을 써준 황보밀이 죽은 282년 사이이니 따라서 육기는 10년을 온전히 은거한게 아니라 은거하기 전 몇년간 낙양에서 포로 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후 은거 생활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조부는 장군과 재상이었고 오나라에 큰 공이 있었지만 손호 때문에 나라가 망함에 분개해 손권이 나라를 얻은 일과 손호가 망한 바를 논하고 조부의 공업을 서술하고자 하여 《변망론辯亡論》 2편을 지었다.

태강(太康, 진무제 사마염의 연호, 280~289) 말에 동생 육운과 함께 낙양에 들어갔는데, 태상 장화가 이를 보고 본래 그들의 명성을 중히 여겨, 육기와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 같았다. 그리고
오나라를 격파하고 얻은 최고의 수확은 이 두 사람의 준걸을 얻은 것이다.
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며 주위 공(公)벼슬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둘을 추천한다. 후에 태부로 있던 양준이 벽소해 육기는 제주가 되었고 마침 양준이 주살되자 여러번 옮겨, 이어서 태자선마, 상서 저작랑까지 오른다.

이때 범양(範陽)의 노지가 무리 사이에 있는 육기에게 "육손, 육항은 그대와 가까운가?"라고 물으니 육기는 "당신의 노육, 노정(盧廷)[2]과 같다."고 해서 노지가 꿀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히 잠잠하였다, 이윽고 일어나니 육운이 육기에게 "저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어, 우리 집안 관계를 알지 못하는데, 왜 그래?"라고 물었지만 육기는 "우리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명성이 사해(四海)에 퍼졌는데, 쟤가 모를리가 있겠어?"라고 했다. 즉, 노지는 알면서도 일부터 육기, 육운 앞에서 조부, 부친의 이름을 직접 말해 무안을 주려했고 육기가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 주었던 것. 의논하는 사람들은 이를 가지고 두 사람의 우열을 정하였다.[3]

오왕 사마안회남으로 출진하는데, 육기를 낭중령으로 하였고, 상서중병랑으로 옮겼으며, 전중랑으로 옮겼다.

291년에 가밀과 곽창의 권세가 대단할 때 가밀의 친구인 24우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300년에 장화가 피살되자 뇌문을 지어 영덕부로 이를 애도한다. 조왕 사마륜이 보정을 하자 상국참군을 지냈으며, 또 가밀을 주살한 공으로 관중후(關中侯)의 작위를 하사했다. 301년 사마륜이 황위를 빼앗자 중서랑이 되었다.

황족들이 권력다툼을 할 때 사마륜이 주살되고 난 후 제왕 사마경은 그가 중서의 직위에 있어서 사마륜을 위해 구석을 내리는 문서와 선양하는 조서를 썼다고 의심하여, 마침내 육기 등 9인에게 준 정위를 거두었다. 성도왕 사마영, 오왕 사마안이 함께 옹호해, 죽음만은 면하고 유배를 당하는데, 유배 가는 도중 사면이 되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고영대연 등이 중원 지역은 많은 어려움이 있으므로 강동으로 돌아오라고 권했지만 육기는 그 재주와 명망에 힘입어, 세상의 난을 바로잡을 뜻을 가져, 이러한 연유로 따르지 않았다. 사마경은 이미 스스로가 공로가 있다고 여기며, 작위받는 것에 사양하지 않으며, 육기가 이를 싫어해, 《호사부豪士賦》를 지어 꾸짖었다. 사마경은 깨닫지 못하니, 끝내는 무너지게 되었다. 육기는 또 어진 왕이 국가 경영에 있어, 의가 봉건에 있어, 이로 인해 원대한 지향을 드러내 보일 수 있었음을 《오등론五等論》을 지어 말하였다.

당시 성도왕 사마영은 공을 자신에게 두지 않고 (다른이를) 천거하며, 아랫 선비들에게 겸허하게 힘썼다. 육기는 이미 온전히 구해준 은혜를 감사히 여겼는데, 또한 조정에 여러 변란이 있는 것을 보고, 사마영에게 반드시 진 황실을 편안하게 하고 (위엄을) 높이는 것이 가능하다 아뢰며, 마침내 사마영에게 위탁하였다. 사마영은 육기를 대장군 군사에 참여하게 하며, 평원내사로 삼도록 표문을 올렸다.

태안(太安, 301~302) 초, 사마영은 하간왕 사마옹과 거병하여 낙양을 공격해 장사왕 사마예를 토벌하였는데, 임시로 육기를 후장군, 하북대도독으로 삼고, 북중랑장 왕수, 관군 견수 등 제군 20여만명을 감독하게 하였다. 육기는 삼대가 장수였기에, 도가(道家)에서도 꺼렸던 바고, 또한 육기 자체가 오나라 출신이라 유력한 지지가 없던 인물이었기에 진심으로 복종하고 있는 군사는 없었다.

육기의 고향사람 손혜 역시 왕수에게 도독을 양보하라 육기에게 권했지만, 육기는 오히려 저들이 내가 쥐새끼처럼 눈치를 본다고 말할것이니 화가 더 빨리 닥칠 것이라고 거절하고 출발했다. 사마영은 육기에게 일이 성공하면 작위는 군공에 지위는 태사가 될 것이라 약속했다. 육기는 제환공관이오에게 맡겨 공을 세우고 연혜왕악의를 의심해 수성에 실패했다며 지금의 일은 사마영에게 달려 있지 나에게 있는건 아니라 했다. 이에 사마영의 좌장사 노지는 속으로 육기의 총애를 시기하여, 사마영에게 "육기는 자시를 관중, 악의에 비하고 주군을 암군과 비교했는데, 신하가 군주를 무시하고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했고 사마영은 조용히 수긍했다.

육기가 전투에 임하는데, 대장기가 끊어지니, 심히 불길하다 여겼다. 군의 행렬이 조가에서 하교까지 수백리에 이르었고 고성(鼓聲)이 울리니, 한나라, 위나라 이래 출병이 성대하기가, 이와 같은 적이 없었다. 사마예가 황제를 받들며 육기와 녹원에서 싸웠는데, 육기의 군사들이 대패하여, 칠리간으로 도망갔고 죽은 자가 쌓여, 물이 흐르지 않으니, 장군 가릉 등은 모두 죽었다. 이로 인해 매번 싸움에 나갈 때마다 매번 패해 죽거나 도망친 군사가 반이 넘었다고 한다.

그 때 육운에게 원한을 품은 환관 맹구의 동생 맹초[4]가 육기의 지휘하에 있으면서도 육기의 군령을 따르지 않았는데, 육기가 그를 법에 따라 처벌할려고 하자 맹초는 육기가 장차 반란을 꿈꾸고 있다고 비난하고 곧 견수 등도 사마영을 찾아가 육기를 비난하면서 육기가 적과 아군 사이에 양다리를 걸고 있다고 했다. 거기다가 맹구[5]까지 영내에서 육기를 비난하고 있었으므로 사마영은 사람을 보내 육기를 체포하게 하고 덩달아 육기의 동생 육운, 그리고 또다른 동생 육탐도 잡아들여 모두 사형에 처했다.

그날 저녁, 육기의 꿈에서 검은 천이 수레를 덮어, 몸소 천을 잘랐는데 열리지 않으니, 하늘이 밝아지고 견수의 병사가 이르었다. 육기는 융복을 풀고, 백갑을 드러내면서, 표정이 매우 차분하게 견수와 마주보고, 그에게 말하였다.
오나라가 기울고 엎어져, 나의 형제와 종족은 국가의 무거운 은혜를 입어, 들어와서는 군대에 쓰이는 장막을 모시고, 나가서는 부죽(符竹)을 다스렸다. 성도왕이 나에게 중임을 명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오늘날 죽임을 당하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이를 사마영에게 보냈는데, (그)어조가 심히 슬펐다. 이윽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화정(華亭)[6]에 학이 우는데, 그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마침내 군중에서 살해당하니, 당시 43세였다. 두 아들인 육울, 육하 역시 같이 살해당했다. 이날 밤안개가 낮에 생기고, 큰 바람이 나무를 꺽었으며, 평지엔 눈이 쌓이니, 사람들은 육씨의 원통함으로 인한 일이라 하였다.

육기 형제들은 이미 강남의 수재들로 역시 제하에서도 이름이 유명했는데, 죄도 없이 몰살 당하게 되자 천하의 사람들이 슬퍼했다. 다만 사람들을 이를 두고 예전에 육항이 보천을 죽일때 어린 아이까지 죽였는데, 이 때 "육항의 후세들은 필히 그 재앙을 만날 것이다"라고 한 것이 결국에 육기가 죽게 되고 육씨의 3가족이 후세가 없어지며 사실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맹구 등에게 무고될 때 손증도 함께 붙잡혀 고문당했다가 옥에서 사망했다.

그의 저서로는 변망론, 문부, 육사형집, 모시초목조수충어소 등이 있다.

3. 평가

육기의 문장들은 후세 사람들에게 높게 평가되었으며 이에 대해 손혜(孫惠)가 주탄(朱誕)에게 준 편지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마원이 공직에 나올때는, 좋은 주군을 골라서 했다는 일화는 일반 사람들도 모두 들어서 알고있는데, 지금 육씨의 삼형제가 모두 폭악한 조정에 들어가 같이 어울리다가 떼죽음을 당했으니 슬픈 일이다.

이 이야기는 진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남조의 문학 이론서인 ≪시품(詩品)≫은 육기의 시를 상품으로 분류하고, 육기가 조식사영운(謝靈運)을 잇는 대작가라고 평가했다. 문학작품 선집인 ≪문선(文選)≫에서도 남조까지의 작품 중에서 육기의 작품을 가장 많이 수록했다. 이러한 사실은 남조 문단에서 육기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준다. 그가 쓴 문학 이론서인 ≪문부(文賦)≫는 중국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문학 창작의 이론을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한 글로 평가받는다. 당시의 현학(玄學)으로 인해 유행하던 철학적 개념들을 문학의 영역에 도입해 이론적으로 접근했으며, 자주 발생하는 오류와 대안, 이상적인 심미관, 상상력과 영감, 문체와 풍격 등 창작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했다. ≪문부≫는 "시는 감정을 따라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아름다워야 한다(詩緣情而綺靡)"라고 말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문학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속성으로 제시했다. 이런 관점에서 쓰인 육기의 시는 오늘날에도 많이 남아있어 국내에서도 '육기시선'이라는 이름으로 시집이 번역되었다.

문장전의 기록에는 육기가 타고난 재능은 뛰어나, 언변이 뛰어나고 아름다워 문장을 잘 지어 사공 장화가 그의 문장을 보고 편마다 훌륭하다고 칭찬하면서도 그의 문장이 고운 것을 비평해 이르길 남들이 문장을 지을 때는 재능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만 그대가 문장을 지을 때는 재능이 너무 많은 것을 걱정한다고 했다. 동생 육운 역시 형의 글을 보면 늘 붓과 벼루를 태워버리고 싶다고 했다.

세설신어에는 갈홍이 육기의 문장을 곤륜상에 있다고 전해지는 선경인 현포에 쌓여있는 옥처럼 밤에도 빛나지 않음이 없다고 평가했으며, 다섯 하의 물이 흘러감 같지만, 그 근원은 하나와 같다. 그 화려하고 아름다움은, 영민하고 날카로움하며 세상을 벗어난 경지니, 역시 한 시대의 유일무이함이라라고 했다. 세간에서 등애와 함께 평가할 때 육운은 숨어있는 고니라고 평가받았다. 문장을 지은 바가 무릇 300여편인데, 나란히 세간에 유행하였다.

사람들이 탄복한 바가 이와 같았지만 그러나 권세있는 가문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고, 가밀과 친하였으므로, 세간의 비웃음을 당하였다.

위의 이야기까지가 진서에 나온 사관의 육기에 대한 평이다.

3.1. 비판

종합해 보면 문장을 잘 쓰고 야망이 크지만 딱 그뿐인 인물이라고 평가가 가능하다. 육기의 문장에 대한 평은 당시 사람들에 예외없이 엄청난 찬사를 받았던 듯 하다. 오나라 최고 명문가 출신의 문장이 탁월하고 말빨이 좋으며 대가 세고 자존심이 강한 선비의 이미지는 당시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는 모든 걸 갖추고 있었다. 다만 그 뿐, 시대를 올바르게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경륜도,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얻을 수 있는 인덕도, 제대로 된 처세술도[7], 그리고 따지고 보면 충성심이랄지 윗 사람에 대한 의리도 그다지 없는 인물이라는 건 여러 모습에서 나온다.

애시당초 높으신 분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였던 건 사실이었던 듯 하다. 젊은 시절 장화에게 엄청난 극찬을 들었던 것도 그렇고, 양준이 벽[8]하여서 승진한 다음 양준이 죽고 가남풍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가밀 밑에서 24우로 지내면서 있다가 정작 사마륜이 정권을 잡게 되자 가밀을 주살한 공로로 관중후가 되었고, 사마륜이 주살당한 뒤에 구석문이나 선양조서를 지었다는 의심을 받아서 죽을뻔한 걸 이전에 같이 출전한 인연이 있던 오왕 사마안과 이름 높은 선비를 아끼는 사람이었던 성도왕 사마영이 애써 변론을 해 줘서 죽음도 면하고 유배도 중지되었다. 이런걸 보면 육기의 명성이나 문재가 당시 높은 사람들에게는 꽤나 호감이었던 듯 하다.

다만 저 과정에서 과연 얼마나 '예가 아니면 나가지 않는' 선비의 모습을 보였는지는 의문. 도리어 출세욕이 강한 선비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 준 예만 하나 가득이다. 양준이 준 벼슬을 거절한 적도 없고,[9] 양준이 죽은 다음에는 가남풍의 조카이자 수양동생인 어린 가밀의 밑에서 24우가 되어서 세간에 욕을 좀 먹으면서도 계속 관직에 있으면서 인싸생활을 했었다. 정작 가남풍이 죽고 가밀이 죽었을 때 사마륜에게 나름 충성을 다 하며 이런저런 공로로 계속 관운을 유지했는데, 자신을 천거해 준 장화가 사마륜에게 주살되고 그걸 안타까이 여겼 영덕부를 지었다고 하나 딱 그 뿐.... 사마륜 때 오히려 더 출세를 했고 찬탈 후에는 중서랑까지 되었으니 그가 구석이나 선양조서를 썼다는 게 단순 의심일 리는 없었다. 고영이 세상이 험악하다며 중원에서 강동으로 다시 오라고 할 때도 세상을 바르게 할 생각이 있어 거절했다는데 말이야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런건지 뭔지는.... 그리고 '님 인망 없으니 원수직 그냥 남 주셈. 안그러면 님 끝이 안 좋을 수 있어요.' 하고 자기 고향 사람이자 측근인 손혜까지 반대하며 말렸을 때도 '내가 쥐새끼같이 도망다니면 더 위험할 것이다,' 라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하는데 과연 이게 단지 자리욕심 때문이엇는지 아니면 진짜 저런 이유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를 보자면 손혜 쪽의 말이 맞다고 할 수 있으니 그 역시도 현명한 판단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육기가 문장 쓰는 것 이외에 다른 능력이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의문인게, 육기는 이런저런 부는 잘 지었지만 현실적으로 뭘 잘 해서 도움이 된 게 하나도 없다. 당장 육기의 능력을 시기하는 빌런으로 나온 노지만 보더라도 성도왕에게 간한 내용들이 '사마경을 도와 사마륜을 토벌할 것' 이라던가 '낙양을 떠나고 자신을 낮추며 선비나 전사자들을 높이고 때를 기다를 것' 같은 내용들이었는데 노지의 말을 제대로 들었던 젊은 사마영은 말 그대로 다음 황권을 노릴 수 있는 자리까지 가게 되었다. 그리고 하간왕의 꼬임에 빠져 장사왕을 치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것도 노지.... 그 이후에도 노지의 말을 듣지 않은 사마영은 말 그대로 폭망하게 되는데, 정작 노지는 그런 사마영을 끝까지 따르며 사마영이 주살당한 뒤에도 변하지 않는 충성심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그런데 정작 육기는 원수가 되어서는 장사왕을 치는데 앞장섰다가 크게 패하기만 했다. 그리고 당시 나온 이야기들을 본다면 장사왕과의 싸움에 꽤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도 보이는데 그게 과연 세상을 구하기 위한 선비의 올바른 판단이었는지는 보는 사람들에 따라 다르겠지만 글쎄...

3.2. 옹호

육기는 혼란했던 위진 시대를 살았던 시인이다. 그는 오나라의 멸망 이후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애썼지만, 삶은 순탄치 못했으며 끝내 정치적 대립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의 시들은 어지러운 시대와 고단한 개인의 삶이 반영된 애상적인 정조가 주를 이룬다. 또한 스스로 '수향(水鄕)의 선비'라 일컬을 만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결국 그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사는게 낫다는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시를 분석해본 이들은 육기가 망국인 오나라의 신하로써 몰락한 가문을 되살려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육기의 시들은 그의 고단했던 삶을 반영한 듯 슬픔의 정조가 주를 이룬다. 아울러 패망한 가문의 후예로 뜻을 펴지 못하는 아쉬움과 상실감이 다른 한 축을 이룬다.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하지만 그것은 세계의 본래적인 비극성에 대한 인식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비롯한 것들이다.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영화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좌절이 생에 대한 비극적인 인식으로 나아간 것이다. 가령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는 것은 자신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즉 오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굳이 이미 장수로써 오나라에 벼슬하다가 비명에 죽은 형들 대신 가문을 일으키려고 발버둥 칠 필요는 없었을테고, 장강 남쪽에서 동생과 함께 성공한 문사로써의 삶을 살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나라가 멸망하고 그의 가문도 몰락함에 따라 그는 자신의 그릇에 맞지도 않은 북쪽 조정에서의 출세에 집착하여 스스로의 운명을 망친 격이 되었다. 289년 육기는 남방의 인재를 발탁한다는 서진의 정책에 따라서 다시 낙양으로 갔다. 육기는 조국이 멸망한 마당에 낙양에서 다시 가문을 부흥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패망국 출신으로 전승국의 수도에서 입신을 도모하는 처지에서 오는 고충이 많았다. 게다가 당시 낙양의 문화적 분위기를 주도하던 명사들과도 원만한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낙양에서의 생활이 상당히 외롭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은 그의 문학이 끊임없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게 된 배경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당신은 오나라의 명문가 출신이지 중원의 명문가 출신은 될 수 없다'고 빈정거린 노지와의 일화나 육기 스스로도 인정한 그의 문학작품이나 발언에서도 나오듯이 그가 아무리 그곳에서 발버둥쳐봐야 망한 나라의 유민으로써 나그네 신세에 불과했지만 젊은 시절의 망국과 가문의 몰락으로 인한 좌절에서 육기는 끝내 벗어나지 못했고 그것이 어떤 방법을 쓰던간에 성공하려는 집착으로 이어졌다. 그는 "원칙대로 살아가면 멀리까지 닿지 못하는 법 / 반듯한 걸음걸이로 어찌 남을 따라가리"라고 말한다. 그가 항상 원칙을 견지하는 근엄한 유학자라기보단 실존의 순간 앞에서 항상 가치관이 흔들리고 혼란스러워 한 문인에 불과했고[10], 결국 그가 가장 중요시한 성공을 위해선 정도만을 갈 수 없다고 인식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강남의 학이 우는 화정을 다시 그리며 최후를 맞은 육기의 모습은 망국의 유민으로써 본연의 정체성이 타향인 북쪽이 아니라 옛 망국과 강남에 있었음에도[11] 망집에서 벗어나지 못해, 끝내 원래의 정체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최후를 맞은 한 인간의 비극을 보여준다. 오나라가 멸망한 뒤 육기의 인생은 평생 문묵(文墨)의 향기가 나는 옷만 입어야 했으나, 자기에게 걸맞지도 않은 정치인의 옷을 입었고, 다른 나라의 정계에서 어떻게든 출세해보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발버둥치다가, 끝내 자기와 맞지도 않은 짓을 하며 비참하게 몰락한 한 문사의 허망한 인생에 불과했다는 것을 육기 스스로도 유언에서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고, 알면서도 거기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으니 그의 인생은 비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하겠다.[12]

4. 일화

육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일화가 있는데, 자신에게 잘 대해준 장화한테 생선젓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런데 장화가 손님이 엄청 많이 왔을 대 그 뚜껑을 열고는 "이게 바로 용의 고기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주위사람들이 당연히 믿지 않았는데 여기서 장화는 여기다가 독한 술로 이것을 씻으면 뭔가 다른 점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독한 술로 이것을 씻으니 이게 웬일? 다섯색깔의 빛이 나는 것이 아닌가? 신기하게 생각한 육기가 돌아가 생선젓의 주인에게 물어보니 과연 말하길
정원의 띠풀 쌓인 곳 밑에서 하얀물고기 한 마리를 얻었는데 형상이 남달라 이것으로 젓갈을 만들어보니 과연 맛이 좋아 이로써 헌상하게 된 것 입니다.
라는 이야기가 있다.

육기는 또한 《변망론辨亡論》을 지어 오나라가 흥하고 망한 까닭을 지었다. 또 진나라의 시인 반악이 《위가밀작증육기(爲賈謐作贈陸機)》 4장에서 '남쪽 오나라는 뭐길래 감히 제왕을 사칭하는가, 위대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고 가짜 손씨 정권이 보배를 물고 항복하니 영토가 모두 귀속되었다'라는 식의 언사를 날렸는데, 육기는 '한 황실이 분열하면서 조, 유, 손이 동등하게 일어났지만, 하늘이 패덕을 미워해 위가 서진에 선양한 것이고 또한 서진은 오와 촉의 옹호를 얻었다'며 , 촉한, 오를 모두 진에 멸망당한 정권으로 생각하고 이들은 한나라와 진나라 사이를 잇는 역사의 한 장이 되었다는 논조의 《답가장연(答賈長淵)》이라는 답서를 지었다. 이미 진나라에 몸을 담은 이상 삼국의 정통을 논하는건 부질없으며 반악 역시 위와 진을 섬겼으니 오를 섬기다 진을 섬기는 나랑 다를게 무엇이냐는 논리인 것이다.

육기에게는 좋은 개가 있어, 이름이 황이(黃耳)였는데 심히 아꼈다. 수도인 낙양에서 타향살이를 하는데 오랫동안 집 소식이 없어, 개를 보며 웃으며 "우리 집에서 서신(書信)이 끊겨서 없는데, 네가 소식을 얻어 가져올수 있겠지?"라고 물었고 개가 꼬리를 흔들며 짖었다. 육기가 이에 편지를 써서 대나무통에 담아 개의 목에 걸었는데, 개가 길을 찾아 남쪽으로 달려, (육기의) 집에 이르어서, 서신을 가지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황이가 늙어 죽자 육기는 무덤을 만들어 줬는데 이를 황이총이라 부른다고 한다.(출처:술이기述異記)

왕필과 만났던 일화가 있는데, 육기가 낙양에 들어갈 때 하남의 언사 지방을 지나다가 저녁이 가까워지면서 그 곳의 민가에 묵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심원한 기품을 가진 젊은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말이 깊고 미묘해 운치가 있었다고 한다.

육기는 마음 속으로 그 재능에 탄복해 고금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명칭과 실상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증명했지만 그 젊은이는 그다지 즐거워하거나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고 하며, 새벽이 되자 서로 작별을 인사를 하고 떠났다. 육기가 여관에서 말을 풀어놓고 있을 때 여관 할멈이 "이 곳에서 동쪽으로 수십 리에는 마을이 없고 단지 산 남쪽에 왕씨 집안의 묘만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육기가 만난 그 젊은이는 왕필이었으며, 이로 인해 현묘한 이치에 깊이 통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왕필은 249년에 죽었다. 한 마디로 귀신이랑 떠들고 놀았단 소리.

또한 주처에게 개과천선의 유래를 말해준 것도 육기 혹은 육운이다.

5. 창작물에서

서진시대를 다룬 소설 후삼국지에서는 친왕과 자사들이 군대를 모아서 유연의 한에 대응하려는 상황에서 혜성과 같이 등장하여 사자후를 날린다. 그의 계책을 대단하게 본 성도왕 사마영이 그를 백만 대군의 원수로 추천하면서 유연을 토벌하려는 대군을 이끄는 지위에 오르게 된다. 다만 이 소설에서 좋았던 건 딱 여기까지.... 계책은 맨날 제갈선우나 장빈에게 읽혀서 번번히 깨져버리고, 간만에 좀 먹히나 했던 계책도 운이 안 좋아서 이도저도 안 되어 버리는 등 결과를 제대로 낸 일이 하나도 없다 보니 나중에는 친왕들에게 조롱의 대상까지 되어버린다. 훗날 사서에 나온대로 환관 맹구에게 모함을 받아 죽는다. 전체적으로 딱 첫 등장부분 이후에는 영원히 고통받는 캐릭터....


[1] 참고로 할아버지 육손과는 무려 78세 차이가 난다. 육항이 아버지 육손과 43세, 육기가 아버지 육항과 35세 차이가 나기 때문.[2] 노지의 할아버지 노육의 아들이자 노지에게는 아버지가 된다. 세어에 따르면 자는 자홀(子笏)이다. 노육전에 따르면 함희 연간에 노흠은 상서가 되었고, 노정은 태산태수가 되었다. 진서에 따르면 구경(卿)인 위위(衛尉)에까지 올랐다.하나 더하면 노육의 아버지는 후한 말 대학자인 노식이다. 삼국지 독자들에게는 바로 그 유비공손찬의 스승으로 유명한 그 양반 맞다.[3] 원문은 議者以此定二陸之優劣으로, 노지의 말에 대처하는 것을 보면서 육기와 육운 두 사람 중에 육기가 더 낫다고 본 것이다. 노지와 육기를 비교해서 한 말이 아니다. 노지의 가문인 범양 노씨는 훗날까지 대대로 이어지는 명문가로, 이 당시는 가문의 명망도 명망이지만 그 명망을 제대로 하드캐리한 노식이라는 희대의 먼치킨 학자가 있었다. 한편으로 육기의 가문인 강남 육씨의 경우는 강동에서 4대 명가로 치기는 했지만 전국구 명성을 얻던 노지의 가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집안인 것. 그러니까 노지의 말은 '육손 육항이 유명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걔네 자손이 누구이며 친족관계가 어떠한지를 달달 알 정도로 네임드는 아니다' 라는 식의 후려치기였던 거고, 거기에 육기는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대단하신 가문의 너네 할아버지 아버지 이상으로 사해에 이름을 날리신 분이니 꿀릴 게 전혀 없는데 왜 짐짓 모르는 척 하면서 후려치는거냐?' 라는 식으로 당당하게 노지의 말을 받아쳤던 것... 저 대응을 보면서 논하는 자들이 노지와 육기가 아니라 육기와 육운 사이의 우열을 가렸다는 게 그런 이유에서다, 걍 좋게좋게 저 상황을 넘기려고 한 육운보다 가문의 명성을 생각해서 제대로 받아 친 육기를 더 높이 친 것.... 참고로 진서가 쓰여진 게 당나라 초기의 일인데, 그 시대야말로 명문세족들의 가문빨이 무지막지했던 시절이었고, 범양 노씨는 그 시대에도 최고 명문가 중 하나라는 걸 감안하면서 저 일화를 본다면 대충 어떤 분위기와 뉘앙스인지 알 수 있다.[4] 맹초는 육기의 군령에 따르지 않고 함부로 경무장을 하고 나가 건춘문 앞에서 사마예와 싸우다가 전사했다.[5] 육운이 자신의 행적을 비판하면서 원한을 품었는데, 동생인 맹초가 군령을 어기고 멋대로 나갔다 전사한 것을 육기가 죽였다고 여겨 더더욱 원한을 품게 된다.[6] 지금의 상하이시 화팅(華亭)이다.[7] 위에서 논의되었던 육기와 육운의 사례를 들어보면 처세술로는 노지의 말을 좋게좋게 넘어가려 했던 동생 육운의 처세가 육기보다 나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문으로써의 자존심 강한 선비라는 이미지를 주변 사람들에 높게 평가받았지만 결국 그 뿐인것이다.[8] 辟: 이건 피하다라거나 막다 라는 뜻도 있지만 인사 쪽에 쓸 때는 자기 권한도 아닌데 맘대로 누군가를 임명하거나 할 때 쓴다. 뒤에 벼슬 이름이 나오므로 아마 양준이 자기 독단으로 그 자리에 육기를 꽂아넣었다는 의미로 쓰인 글자인듯 하다.[9] 양준이나 육기를 위해 변명을 하나 하자면 양준은 좀 찌질한 인간이기는 했어도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다. 너 같은 놈이 주는 벼슬은 받지 않겠다 라고 할 정도의 평가를 받는 인물은 아니었고, 하나 더하면 양준의 동생들이 꽤나 덕망있고 행동거지가 신중해서 나름대로 평이 좋기도 했었다.[10] 즉 그는 명교에 무조건 매인 인물은 아니었다. 육기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사상이나 내용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언어와 문자의 형식적 아름다움이다. 즉 도덕이나 인격과는 무관한, 예술로서의 문학 그 자체의 미감이다. 유가(儒家)에서는 표현의 미감을 경시해 단순하고 투박한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했지만, 육기는 유가 문학 사상의 제약을 넘어 심미성을 인정한 것이다. ≪문부≫에서 그가 문학 창작의 가치와 즐거움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고 태생적으로 문학도써 일반적인 유학자와는 다른 사고 방식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11] 그의 글에서는 오나라의 태조인 손권을 나의 황제(我皇), 나의 대황제(我大皇帝) 라고 부르는 글이 많다. 그가 마음으로 진짜 섬긴 황제가 누구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12] 이런 면에서 육기와 정확히 반대로 행동한 사람이 고옹의 손자인 고영이다. 고영은 한편으로는 자기 보전을 잘 하면서도 세세한 면에서는 충이나 의나 덕을 충분히 챙겨 처신했기에 출세에 성공하면서도 덕이나 재주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를 받으며 제 명에 살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