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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21:08:57

장재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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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張載
생몰년도 불명

서진의 인물. 자는 맹양(孟陽). 기주 박릉군 안평현 출신으로 서진의 촉군태수 장수(張收)의 아들이다.

2. 생애

성품이 한아하고 박학다식하여 문장을 짓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촉군태수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검각을 지날 때, 장재는 촉 땅의 사람들이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 반란을 일으키기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고 촉 사람들을 비판하는 시를 지었다. 익주자사 장민(張敏)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무제에게 보고했고, 무제는 장재의 시를 마음에 들어하며 사람을 보내 검각 인근 돌에 새기게 했다. 이 장재의 시는 <검각명>(劍閣銘)이라 하며, 훗날 당나라의 시인 이백의 시 <촉도난>(蜀道難)에서도 인용된다.[1]

이후로도 장재는 문학적 재능을 펼쳐 <교론>(榷論)[2], <몽사지부>(蒙汜池賦) 등을 지었고, 당시 박학하기로 유명한 사예교위 부현에게도 인정을 받으면서 전국에 명성을 떨쳤는데, 부현의 몰년으로 미루어보아 278년 이전의 일로 보인다. 아버지인 장수의 익주 부임 시기가 태강 연간인 것을 고려하면 익주로 가기 전부터 명성을 떨쳤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장재는 조정의 부름을 받고 중앙에서 좌저작랑(佐著作郎)을 지내다가 비향현령(肥鄉縣令), 저작랑,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 낙안상(樂安相), 홍농태수를 차례로 역임했다.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장사왕 사마예가 장재를 기실독(記室督)으로 삼아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중서시랑, 영저작(領著作)을 역임하던 중, 서진의 정치가 너무 혼란스러운 것을 보고 병을 핑계로 사직해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살면서 총 10여 편의 시를 남겼고 그 중 혼란한 세상을 보며 한탄하는 내용인 <칠애시>(七哀詩) 2편이 제일 유명하다. 그리고 먼 훗날 명나라 사람들은 장재와 그 동생 장협의 문학 작품들을 모아 《장맹양경양집(張孟陽景陽集)》으로 엮었다.


[1] <검각명>에서 "한 사람이 창을 들고 만 명을 저지할 수 있다(一人荷戟,萬夫趄)." 글귀가 <촉도난>에서 "한 사람이 관문 막으면 만 사람도 열 수 없다(一夫當關,萬夫莫開)"로 인용되었다.[2] <각론>으로도 읽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