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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2 02:36:01

등악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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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鄧嶽
(? ~ 344)

동진의 인물. 자는 백선(伯山). 예주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출신. 원래 휘는 '악(岳)'이었으나, 강제 사마악의 휘와 똑같아지는 바람에 '악(嶽)' 자로 피휘했다가, 결국에는 '대건(岱焉)'으로 아예 개명해버렸다.

2. 생애

젊었을 적부터 장수의 재략이 있어, 왕돈 휘하의 참군으로 처음 임관했고, 종사중랑, 서양태수를 역임했다. 왕돈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등악은 제갈요(諸葛瑤), 주무(周撫), 이항(李恒), 사옹(謝雍)과 함께 왕돈의 반란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태녕 2년(324년) 7월, 왕돈이 명제 사마소에게 반발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표기대장군 왕함(王含)을 파견해 수도 건강(建康)을 치게 했다. 등악은 관군장군에 임명되어, 전장군 주무, 표기참군 전봉 등과 더불어 왕함을 따라 진군하였다. 이후 왕함이 패하자, 등악은 동진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주무와 함께 서양군(西陽)의 만왕(蠻王) 상잠(向蠶)에게로 도망갔다. 그리고 이듬해, 명제의 사면령을 받고 동진 조정에 자진 출두하니, 죽음을 면하는 대신 금고형에 처해졌다.

함화 원년(326년), 금고형을 마치고 사도 왕도의 종사중랑을 지내다가 다시 서양태수로 옮겨졌다.

함화 3년(328년) 정월, 역양내사 소준의 반란군이 도성 건강을 접수하자, 등악은 평남장군 온교가 일으킨 의군에 참가해, 독호 왕건기(王愆期), 파양태수 기목(紀睦) 등과 함께 수군을 거느리며 반란군과 싸웠다.

함화 5년(329년) 정월, 소준이 어이없게 전사하자, 그의 부하 광술(匡術)이 건강의 원성(苑城)을 들어 의군에게 투항했다. 이에 도간은 독호 모보를 보내 건강의 남성(南城)을 지키게 하고, 등악(鄧嶽)을 보내 서성(西城)을 지키게 했다. 소준의 난이 평정된 후, 다시 부임지인 서양군으로 귀환했다.

함화 5년(330년) 정월, 우장군 곽묵이 강주자사 유윤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다. 등악과 무창태수 유훈(劉詡)는 초국내사 환선이 혹여나 곽묵에게 호응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예주 서조(西曹) 왕수(王隨)를 보내 그의 본심을 살피게 했다. 이후 환선이 곽묵에게 가담할 뜻이 없음을 확인한 등악과 유훈은 중앙에서 토벌령을 받고 내려온 대사마 도간의 지휘에 따라 곽묵을 평정했다. 그 공으로 도독교광2주제군사(都督交廣二州諸軍事), 건무장군, 영평월중랑장(領平越中郎將), 광주자사, 가절에 임명되고, 의성현백(宜城縣伯)에 봉해졌다.

함강 2년(336년) 10월, 등악은 독호 왕수와 신창태수 도협(陶協) 등을 파견해, 성한의 영토인 영주(寧州)의 야랑(夜郎)과 흥고(興古)를 각각 점령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영주를 더해, 도독교광영3주제군사(都督交廣寧三州諸軍事), 정로장군에 임명했다.

함강 5년(339년) 3월, 평남장군에 임명되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성한의 영주를 다시 침공하니, 건녕태수 맹언(孟彦)이 영주자사 곽표(霍彪)를 붙잡아 등악에게 바치면서 항복해왔다.

건원 2년(344년), 등악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등하가 후사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