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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24 19:34:24

유담(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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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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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劉惔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진장(真長). 예주 패국(沛國) 상현(相縣) 출신. 조부 유굉(劉宏), 유굉의 형 유수(劉粹), 유굉의 동생 유황(劉潢) 모두 서진 시기 고위관직을 지냈고, 부친 유탐(劉耽) 또한 진릉태수를 지냈다.

2. 생애

유담은 어려서부터 청명하고 원대한 뜻이 있었으나, 집안이 가난해 짚신을 짜는 것으로 생계를 이었다. 그는 어머니 임씨(任氏)와 함께 경구(京口) 누추한 골목가에 자리를 잡아 살고 있었음에도 불만없이 편안히 살아갔다. 사람들은 거렁뱅이 유담의 재능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동진의 승상인 왕도만이 그의 그릇을 눈여겨 보았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유담의 명성이 점점 높아졌고 사람들은 그를 원양(袁羊)에 비할 만하다 평하기 시작했다. 유담은 기뻐하며 이를 어머니에게 알렸으나, 총명한 임씨는 아들이 자만할 것을 우려해 냉담하게 말했다.
"너는 그에게 비할 바 못 되니 그런 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거라."
얼마 지나지 않아, 범왕에 비할 만하다는 평을 들은 유담이 기뻐하며 또다시 어머니에게 알렸으나, 임씨는 이번에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유담의 명성은 해가 지날 수록 높아져, 성년이 되었을 때 삼국시대 조위의 유명한 현학자인 순찬에 비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이름이 당시 동진의 황제였던 명황제 사마소에게도 알려지면서 명제의 딸인 여릉공주 사마남제(司馬南弟)와 혼인할 수 있었다.

영화 원년(345년) 정월, 강황제 사마악이 이른 나이에 요절하고, 그의 3살배기 아들 목황제 사마담이 어머니 저 태후의 품에 안긴 채로 즉위했다. 저 태후는 섭정을 맡으면서 강제의 숙부인 회계왕 사마욱도 중앙으로 불러 무군대장군, 녹상서육조사로 삼고 보정을 부탁했다. 이때 유담은 언변에 재능이 있어, 왕몽과 사마욱의 빈객으로 들어가 후히 대접받았다. 한번은 사마욱이 자신의 집에 사안 등의 명사들을 모아놓고 토론을 벌일 적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손성이 현학을 비판하는 〈역상묘어견형론(易象妙於見形論)〉을 지어 은호를 굴복시켰다. 다른 이들도 손성의 주장에 마땅히 반박할 만한 논리가 없어 머뭇거리자 사마욱이 탄식하며 말했다.
"진장(真長: 유담)을 오게 하였더라다면 응당 저 자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오."
그러고는 즉시 유담을 그 자리로 불렀다. 손성 스스로도 자신이 유담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주눅이 들어 이론을 다시 설명하면서도 이전에 은호에게 말했을 때보다 능숙하게 풀어내지 못했다. 유담은 손성의 이론을 200여 마디로 이를 반박해 손성을 마침내 굴복시켰다. 자리에 있던 명사들이 모두 박장대소하며 유담의 재치를 오래도록 칭찬했다.

영화 원년(345년) 8월, 형주자사 유익이 사망하자, 녹상서사 하충이 유익의 아들 유원지 대신 환온을 형주자사로 천거했다. 유담은 환온이 유능하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의 야망 또한 짐작하고 있어, 회계왕 사마욱에게
"환온에게 형승(形勝)의 땅을 맡겨서는 안 되고, 그의 지위는 항상 억제해야만 합니다."
라 간하고, 사마욱이 직접 형주자사를 맡으라 권했다. 하지만 사마욱은 유담의 간언을 듣지 않고, 하충의 말에 따라 환온을 형주자사에 임명했다. 그리고 유담을 감면중제군사(監沔中諸軍事), 영의성태수(領義成太守)로 삼아 유익의 아들인 유방지를 대신하게 했다.

영화 2년(346년) 11월, 형주자사 환온이 조정에 촉 땅의 성한을 정벌하겠다는 표문을 올리고 출진하였다. 조정에서는 촉으로 들어가는 길이 험하고, 환온의 무리가 적어 모두 실패할 것이라 여겼는데, 오직 유담만이 반드시 이길 것이라 말했다. 어떤 이가 그 이유를 물으니, 유담이 대답했다.
"환온은 포박[1]에 능한 자로, 반드시 이기지 못한다 생각되면 처음부터 승부를 걸지 않습니다. 저는 오로지 환온이 촉을 정벌한 이후 조정을 통제할까 걱정될 따름입니다."
과연 환온은 5개월도 지나지 않아 촉을 정벌하는 데 성공하고, 뒷일은 유담이 유려하던 대로 진행되었다.

영화 3년(347년) 12월, 여러 차례 승진해 단양윤에 제수받았다. 유담은 단양윤을 지내면서 청렴하고도 올바른 정치를 펼쳤고, 사람을 사귐에 있어 항상 신중히 하였다. 이후 36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3. 기타



[1] 蒱博. 장기 말이나 바둑알로 하던 노름의 일종.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했는지는 실전되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