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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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杜弢(? ~ 315)
서진 말기 반란자. 자는 경문(景文). 익주 촉군(蜀郡) 성도현(成都縣) 출신. 무제 사마염 시기 부절(符節) 현령을 지냈던 촉 땅의 명사 두식(杜植)의 손자. 악양호군 두진(杜眕)의 아들.
2. 생애
두도는 초기에 재능과 학식이 있어 주의 수재로 천거되었다. 이후 이상(李庠)의 반란을 피해 남평(南平)으로 피난갔을 때, 남평태수 응첨이 그의 재능을 마음에 들어하여 두도를 예릉(醴陵) 현령으로 삼았다.영가 5년(311년) 정월, 당시 수만 호에 이르는 파촉(巴蜀)의 유민들이 이특의 반란을 피해 여반(汝班), 건석(蹇碩) 등 호족들을 따라 형주와 상주 각지로 흩어져 있었다. 원래 형주와 상주에 살던 토착민들은 갑자기 등장한 유민 무리를 당연히 반기지 않아, 텃세를 부리면서 이들을 박해하고 괴롭혔다. 결국 파촉 유민들의 토착민을 향한 적개심과 원한은 점점 고조되어, 촉 땅 유민인 이양(李驤)이 수백 명을 모아 현령을 죽이고 낙향(樂鄉)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양의 반란은 오래지 않아 응첨과 두도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양과 그 무리는 성도내사 왕기에게 항복을 청했으나, 왕기가 이를 받아들이는 척하며 급습하여 8,000여 명이 수장당했다. 이 사건으로 유민들의 분노와 두려움은 극에 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상주에서 촉 유민인 두주(杜疇)와 건무(蹇撫)가 반란을 일으키자, 상주자사 순조(荀眺)는 이참에 아예 파촉 유민들을 몰살시키려 하였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여반, 건석 등은 유민들을 이끌고 명망 높은 두도에게 일제히 의탁하니, 그 규모가 어느새 4 ~ 5만여 호에 달하였다. 두도는 이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양익2주목(梁益二州牧), 평난장군, 상주자사를 자칭하고, 여러 군현들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영가 5년(311년) 5월, 상주 장사군(長沙郡)이 두도에게 공격받자, 상주자사 순조는 안성태수 곽찰(郭察)에게 성의 수비를 맡기고 광주(廣州)로 도망치다가 두도군의 추격을 벗어나지 못 하고 사로잡혔다. 곽찰은 성에서 나와 반격을 가했지만, 두도에게 패사하였고 성은 함락되었다. 마침내 장사를 점령한 두도는 파죽지세로 영릉(零陵), 계양(桂陽) 등 여러 군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나아가 무창(武昌)을 약탈하였는데, 이때 지방 관리들도 마구잡이로 죽여 장사태수 최부(崔敷), 의도태수 두감(杜鑒), 소릉태수 정융(鄭融) 등이 살해당하였다. 이후 두도는 광주자사 곽납(郭訥)이 보낸 시흥태수 엄좌(嚴佐)를 요격해 격파하고, 파릉(巴陵)에서 형주자사 왕징(王澄)이 보낸 성도내사 왕기를 대파하였다. 그리고 투항한 정남장군 산간을 광한태수로 삼았다.
영가 6년(312년), 형주자사 왕징이 친히 두도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작당(作塘)에 주둔하였다. 하지만 왕충(王沖)이 남평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왕징은 두려워 잔릉(孱陵)으로 옮겨 주둔했다가, 다시 동쪽으로 들어가 답중(沓中)으로 도망쳤다. 이에 낭야왕 사마예는 왕징을 건강(建康)으로 불러들이고, 주의를 형주자사로 새로 임명하였다. 주의가 심수성(潯水城)에 이르렀을 때, 건평군의 유민 부밀(傅密) 등이 형주에서 거병해 두도에게 호응하자, 두도는 장수 왕진(王眞)을 보내 면양(沔陽)도 차지하여 주의를 완전히 고립시켰다.
건흥 원년(313년) 8월, 무창태수 도간은 명위장군 주사를 파견해 두도를 치게 하고, 동시에 두도의 진군 경로를 예상하여 지름길을 통해 무창으로 들어가 지켰다. 과연 도간의 예상대로 두도는 영구(泠口)로 잠시 물러났다가 무창을 향해 진격하니, 주사가 이를 역습하여 대파하였다. 대패한 두도는 도망쳐 장사군으로 들어갔다.
건흥 2년(314년) 3월, 면양에 있던 왕진이 휴장(休障)으로 진군해 도간을 습격하였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도간은 패하여 섭중(灄中)으로 달아나다가 심양태수 주방의 구원군을 만나 왕진을 무찔렀다.
건흥 3년(315년) 2월, 정남장군 왕돈이 도간, 감탁, 주방을 보내 두도를 수 차례 토벌하였다. 두도는 반란군을 이끌며 이들과 전후로 수십 번 싸우면서 장수와 병사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두도는 낭야왕 사마예에게 투항을 청했으나, 사마예가 이를 불허하자 과거 연이 있는 응첨에게 익주의 성한 토벌을 조건으로 속죄를 빌었다. 응첨은 두도가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겨, 그에게 기회를 한번 주고자 사마예에게 이제라도 두도의 투항을 받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에 사마예는 전(前) 남해태수 왕운(王運)을 보내 두도의 투항을 받게 하고, 조서를 내려 두도의 모든 역모죄를 용서하는 동시에 그를 파동감군(巴東監軍)으로 삼았다.
두도가 조서를 받은 이후에도 사마예의 장수들이 공격을 멈추지 않자, 분노를 참다 못 해 폭발한 두도는 왕운을 곧장 죽여버리고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두도는 장수 왕진에게 정예병 3,000을 주고 무릉(武陵)으로 보내 관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또, 장수 두홍(杜弘)과 장언(張彦)을 보내 임천을 함락하고 예장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주방이 두홍을 격파하고 장언을 죽임으로써 예장군의 함락을 막았으며, 왕돈의 장수 정반(鄭攀)도 무릉으로 향하던 왕진을 기습해 대파하였다. 두홍이 임천으로 들어가 숨고, 상성(湘城)으로 도망친 왕진이 도간에게 항복하자, 두도의 무리는 이내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건흥 3년(315년) 8월, 두도는 성을 버리고 은밀히 숨어서 도주하던 중 객사하였고, 도간과 응첨은 마침내 반군의 마지막 거점인 장사성을 점령하였다. 두도의 난을 진압한 낭야왕 사마예는 사면령을 내려 그 잔당을 용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