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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1 16:31:02

응첨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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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관양열후(觀陽烈侯)
應詹 | 응첨
시호 (烈)
작위 영양현후(潁陽鄉侯) → 관양현후(觀陽縣侯)
(應)
(詹)
사원(思遠)
생몰 274년 ~ 326년 9월 8일
출신 여남군(汝南郡) 남돈현(南頓縣)
부모 부친 - 응수(應秀)
자녀 응현(應玄), 응탄(應誕)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서진동진의 인물로 자는 사원(思遠). 예주 여남군(汝南郡) 남돈현(南頓縣) 출신으로, 조부 응거삼국시대 위나라에서 시중을 지냈다.

서예가로도 유명해 북송 시대에 쓰여진 《선화서보》에 따르면 서체가 자연스럽고 진솔하여 진나라의 품격이 녹아있다고 평했지만, 그의 문집이 모두 소실되는 바람에 현재로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2. 생애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그의 할머니에 의해 거두어졌다. 하지만 응첨이 15세가 되었을 무렵, 홀로 그를 돌봐주던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상을 치르면서 너무 슬퍼한 나머지 지팡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상했다. 사람들은 이런 응첨의 효심을 칭찬했고, 이로 인해 그는 지역에서 효자로 명성을 널리 떨쳤다. 이때 응첨이 물려받은 유산은 상당했는데 여기에 나이까지 어리니, 한 친척이 그에게 접근해 재산을 자신이 관리해줄테니 동거할 것을 권했다. 응첨이 아무런 의심없이 이 제안을 수락하고 친척에게 모든 재산을 맡기자,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이들은 그의 범상치 않은 판단에 크게 놀랐다.

응첨이 20세가 되었을 때에는 이미 지역의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성품도 질박하고 고상하여 남들과 충돌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학문에도 매진해 주변으로부터 문장 짓는 재주가 뛰어나다는 찬사도 받았다. 사도 하소가 그를 보고 말하길,
"이 사람이야말로 군자(君者)다!"
라 극찬했다. 서진 조정에서는 응첨을 징소하여 태자사인으로 임명했다. 이후 조왕 사마륜 휘하에서 정동장사를 지냈으나 사마륜이 얼마 안가 다른 왕들에게 주살되면서 면직당했다.

성도왕 사마영의 부름을 받고 그의 연(掾)이 되면서 다시 관직에 복귀했다. 당시 표기장군 장사왕 사마예의 종사중랑 제갈매(諸葛玫)가 업(鄴)으로 와 사마영에게 귀순했는데, 제갈매는 대놓고 이전 상관인 사마예의 흉을 보았다. 제갈매는 사람됨이 경박했으나 말재주가 있어, 임장(臨漳) 지역의 선비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응첨은 제갈매와 친분이 있었음에도 이를 보고 한탄했다.
"제갈성림이여, 어찌하여 악의처럼 충성스럽지 못하느냐!"
그러고는 끝까지 제갈매를 찾아가지 않았다. 후에 응첨의 말을 전해들은 제갈매는 심히 부끄러워 하였다. 이후 응첨은 외숙부인 진남대장군 유홍의 부름을 받고, 사마영을 떠나 유홍의 장사가 되었다. 응첨은 유홍으로부터 군권을 위임받아 한남(漢南) 일대에서 실적을 올렸고, 그 공으로 남평태수로 옮겨졌다.

영흥 2년(305년) 12월, 우장군 진민이 강동에서 할거할 생각으로 역양(歷陽)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유홍은 강하태수 도간, 무릉태수 묘광을 파견해 하구(夏口)에 주둔하게 하고, 응첨에게는 수군을 거느리고 그 뒤를 잇게 했다.

영가 원년(307년) 11월, 왕징이 형주자사에 임명되었을 때, 응첨은 임시로 남평, 천문(天門), 무릉(武陵) 세 군(郡)의 군사를 감독했다.

영가 5년(311년) 정월, 파촉의 유민들이 형주와 상주에 널리 퍼져있었는데 토착민들로부터 받는 고통을 참다 못해 이양(李陽)을 중심으로 뭉쳐 낙향(樂鄉)에서 난을 일으켰다. 응첨이 예릉현령 두도와 함께 나아가 이양을 격파하자, 이양은 성도내사 왕기에게로 도망쳤다. 군공을 탐했던 왕기는 이양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이양을 습격해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아 병사들에게 상으로 주었다. 그리고 이양의 무리 8,000명을 포박해 강물에 던져 버리니, 파촉 유민들의 원망은 더욱 깊어만 갔다. 파촉의 유민들은 두도를 주군으로 옹립해 다시 반란하려 했고, 본래 익주 성도 출신이던 두도 또한 이건 아니라 생각했는지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장사(長沙)에서 거병했다.

영가 5년(311년) 6월, 낙양이 유총에게 함락되자 응첨은 소매를 걷어올리고 눈물을 흘리며 왕징에게 낙양을 되찾자 권했다. 왕징이 이에 동의하고 응첨에게 격문을 쓰라 하니, 응첨은 곧장 붓을 들고 격문을 썼는데 그 말의 뜻이 장렬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정의심이 복받쳐 오르게 했다. 그러나 천문과 무릉에서 무릉만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응첨은 낙양 정벌을 뒤로 하고 무릉만의 반란을 진압했다.

당시 천하의 정세가 흉흉하여 응첨에게 이미 한 차례 진압당했음에도 무릉만의 불만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아 다시 반란을 모의했다. 이를 우려한 응첨이 무릉만의 추장들을 소집하고 그 자리에서 구리로 된 증표를 깨뜨려 서로 맹약을 맺으니, 오랑캐 무리들은 모두 기뻐하며 더이상 다른 뜻을 품지 않았다. 비록 천하는 영가의 난으로 피폐했으나 응첨이 다스리는 지역 만큼은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정남장군 산간이 응첨에게 다섯 군(郡)의 군사를 관장하게 했다.

영가 6년(312년), 산간의 참군 왕충(王沖)이 응첨을 불러 그를 형주자사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응첨은 왕충을 무뢰배라 욕하며 다시 남평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왕충은 그를 원망하지 않고 스스로 형주자사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두도를 토벌 중이었던 진짜 형주자사 왕징은 왕충이 반란했다는 소식에 두려워 답중(沓中)으로 피신했다가 낭야왕 사마예의 부름을 받고 건강으로 향했다. 왕징은 장강을 따라 건강으로 가면서 왕돈의 진영을 잠시 들렀다가 무례한 태도로 왕돈의 노여움을 사 죽임을 당했다. 왕돈은 표를 올려 도간을 형주자사로 삼고 두도 토벌을 이어나갔다.

건흥 3년(315년) 2월, 두도가 도간, 감탁, 주방 등에게 여러 번 패해 장수와 병사를 대부분 잃자, 낭야왕 사마예에게 항복을 청했지만 거부되었다. 두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과거 이양 토벌전 때 연을 맺었던 응첨에게 서신을 보내 속죄를 청했다. 응첨이 사마예에게 이를 알리니, 그제서야 사마예는 두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파동감군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왕돈, 도간 등은 두도가 항복했음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단단히 화가 난 두도는 사마예가 보낸 사신들을 몰살하고 다시 난을 일으켰으나, 이내 주방에 의해 진압당했고 두도는 숨어서 도망치다가 길에서 객사했다.

건흥 3년(315년) 8월, 응첨은 도간과 함께 진격해 두도의 잔당을 무너뜨리고 장사를 점령했다. 성 안에는 두도가 이때까지 형주에서 약탈한 금은보화들이 넘쳐 흘렀으나, 응첨이 그것들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책과 지도 등만 취하니 사람들은 감탄해 마지 않았다. 낭야왕 사마예는 응첨을 건무장군에 임명하고 영양현후에 봉했다. 왕돈도 상주해 응첨을 감파동오군군사(監巴東五郡軍事)로 삼았다. 응첨은 이후 익주자사, 영파동감군(領巴東監軍)으로 옮겨져 그동안 다스리던 군(郡)을 떠나게 되었는데, 사대부들이 그의 수레에 매달려 가지 말라 울부짖었다. 선비들이 그를 사모하는 마음이 이와 같았다.

얼마 후 후군장군에 임명되었다. 응첨은 사마예에게 상소해 도가를 숭상하는 풍조를 억제하고 유가를 장려해 풍속을 쇄신해야 한다 주장했다. 그의 재능을 매우 중시여기던 사마예는 그의 조언을 깊이 받아들였다. 이후 응첨은 오국내사로 옮겨졌으나 공적인 일로 면직되었다.

태흥 4년(321년) 7월, 진북장군 유외가 군사를 이끌고 출진하면서 응첨을 불러 자신의 군사(軍司)로 삼고 산기상시를 더했다. 응첨은 이후로도 여러 차례 관직이 옮겨다니다가 광록훈에 임명되었다.

태녕 2년(324년) 7월, 원제 사마예가 왕돈의 폭주를 참다 못해 분사하고, 명제 사마소가 즉위했다. 왕돈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명제는 응첨을 불러 난을 안정시킬 계책을 물었다. 응첨은 분연히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혁혁한 위엄을 보이시고, 저희 신하들을 앞장세워 종묘의 영에 의지해 정벌한다면 싸우지 않고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러하지 아니한다면 왕실은 필시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명제는 그 말을 옳게 여겨 응첨을 도독전봉군사, 호군장군, 도독주작교남(都督朱雀橋南)으로 삼았다. 아픈 왕돈 대신 반란군을 이끌던 왕함의 군대를 죽격저(竹格渚)에서 요격해 적장 두발(杜發)을 참하고 수천 개의 수급을 얻었다. 마침내 왕돈이 병으로 죽고 반란이 평정되자, 관양현후(觀陽縣侯)로 전봉되었다. 응첨의 식읍이 1,600여 호에 달했고 여기에 더해 하사품으로 비단 5,000필까지 내려오니, 응첨은 사양하려 했으나 명제가 불허했다.

태녕 3년(325년) 10월, 사지절, 도독강주제군사(都督江州諸軍事), 평남장군, 강주자사로 임명받았다. 당시 왕돈의 난이 평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와 백성들이 안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응첨이 강주로 부임해 관리와 백성을 위로하고 보듬어주자 기뻐하며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함화 원년(326년) 7월 25일[1],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2] 향년 53세. 진남대장군, 의동삼사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열(烈)이라 하였으며, 제사는 태뢰(太牢)의 예에 따랐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동진에서 출세했다. 후사를 이은 응현(應玄)의 관직은 산기시랑에 이르렀으며, 응현의 동생 응탄(應誕)도 유능해 6군의 태수직을 역임하고 용양장군을 지냈다.


[1] 양력으로 계산할 시 9월 8일.[2] 사망 시기 관련해서는 《진서》 〈응첨전〉과 〈성제기〉의 기록이 서로 배치되나, 《자치통감》이 〈성제기〉의 기록을 채택했기에 본 문서도 이에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