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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21:44:12

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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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8000><colcolor=#fff> 초촉 군주
成都王 | 성도왕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왕호 성도왕(成都王),(자칭),
초(譙)
종(縱)
생몰 ? ~ 413년
재위 성도왕
405~413년

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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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초촉(譙蜀)의 건국자. 동진 파서 사람이며 한족 출신이다. 그가 세운 초촉은 존속기간이 짧아 16국에 들어가지 않는다.

2. 생애

파서군(巴西郡) 남충현(南充縣) 출신이었다. 초종의 조부 초헌지(譙獻之)는 갸륵한 명예가 있었으며, 초종은 젊은 시절에 신중한 성격이어서 촉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처음 안서부참군(安西府參軍)으로 임명되었다.

405년, 익주자사 모거가 초종과 후휘(侯暉) 등에게 군대를 이끌고 강릉을 구원하도록 명했다. 하지만 후휘는 배반할 마음을 품었고 또한 양주(梁州)의 백성들이 모거의 명령에 대해 고향을 떠나야 한다며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결국 후휘가 오수성구(五城水口)에서 반란을 일으켜 양매(陽昧)와 연합했고 초종을 협박하여 맹주로 세웠다. 초종은 처음엔 두려워하여 강물에 뛰어들었지만 후휘가 초종을 강물에서 빼내어 다시 요청했고 여러 차례 요청한 끝에 군대를 동원하여 초종을 협박하였다.

초종은 결국 모거의 동생인 서이교위(西夷校尉) 모근(毛瑾)을 부성(涪城)에서 공격하였고 모근이 전사한 뒤 양진2주 자사를 자칭했다. 모거는 초종의 반란 소식을 접하고 약성(略城)에서 도보로 성도로 향한 뒤 참군 왕경(王瓊)에게 3,000명을 이끌어 초종을 토벌하도록 명했으며, 아우 모원(毛瑗)에게는 4,000명을 이끌어 왕경의 뒤를 따르도록 명했다. 초종은 동생 초명자(譙明子)와 후휘를 보내 광한(廣漢)에서 왕경과 대치하도록 했지만 왕경이 후휘 등을 물리쳐서 면죽(綿竹)까지 추격했다. 초명자는 복병을 배치하여 왕경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왕경을 대패시켰다. 한편 익주의 영호(營戶) 이등(李騰)은 성문을 열어 초종을 맞아들였다.

초종은 모거를 제거한 뒤 성도왕(成都王)을 자칭했다. 또한 자신의 사촌동생 초홍(譙洪)을 익주자사로 삼고, 초명자를 진동장군(鎭東將軍), 파주자사로 삼아 백제성에 주둔시켰다. 초명자는 406년, 익주자사 사마영기에게 패배했다. 407년, 초종은 후진요흥에게 사신을 보내 을 칭했다. 초종은 동진의 거기장군 유유의 토벌을 명분으로 요흥에게 군대를 요청했고, 한편으로 환겸과의 협력도 추진했다. 유유는 유경선에게 초종 토벌을 명했으나, 군량이 떨어지고 전염병까지 퍼졌기 때문에 결국 초종 토벌에 실패했다.

409년, 요흥이 사신을 보내 초종을 대도독, 상국, 촉왕으로 삼고 구석을 내렸다. 한편 환겸이 선비들을 끌어들이자, 초종은 환겸을 시기하여 환겸을 용격(龍格)에 두었고 사람을 시켜 환겸을 감시하였다. 410년, 초종은 후진에 시중 초량(譙良) 등을 보내 후진에게 군대를 요청했고, 환겸을 형주자사로 삼고 초도복을 양주자사로 삼아 형주를 침공하게 했다. 후진에서는 전장군 구림(苟林)에게 기병을 이끌어 초종의 군대와 합류하도록 명했다.

413년, 유유가 다시 서양태수 주령석을 익주자사로 삼고 영삭장군 장희, 하비태수 유종, 난릉태수 괴은 등에게 20,000명의 군대를 이끌어 초종을 토벌하도록 명했다. 유유는 주령석을 초종 토벌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군대의 절반을 주령석에게 주었다. 장희는 유유의 처제로 지위가 높았지만 유유가 주령석의 휘하에 두게 했다. 주령석은 성도로부터 200리 떨어진 평모(平模)에 도착했고 후휘, 초선(譙詵)과 대치하다가 유종의 의견을 따라 공세에 나서면서 초선과 후휘를 참수한다. 주령석의 공세에 초종의 군대는 와해되었고, 초종은 도망치게 된다. 초종의 상서령 마탐(馬耽)은 창고를 봉쇄하여 주령석이 오기를 기다렸고, 주령석은 성도에 입성하여 초종의 종친들을 죽인 뒤 다른 사람들은 위로하였다.

초종은 달아날 때 먼저 조상의 무덤에 도착했다. 이때 초종의 딸이 초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망쳐도 틀림없이 도망치지 못하고 모욕만 받을 뿐입니다. 같은 죽음이라도 조상의 무덤 옆에서 죽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초종은 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초도복은 평모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성에서 초종의 원군으로 왔다. 초도복은 초종에게 분노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장부가 이런 위대한 공업을 세웠음에도 이를 포기한다면 어디로 돌아갈 것입니까! 누가 죽지 못하고 이렇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초도복은 자신이 찬 칼을 초종에게 던졌고 초종의 안장을 칼로 갈랐다. 초종은 결국 목을 매 죽었다.

초도복은 뒤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기른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다. 촉의 존망은 실로 나에게 달려있지, 초왕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내가 아직 살아있으니 한번 전투를 치르기만 해도 족하다.
초도복은 홀로 광한으로 달아났으나 두근(杜瑾)에게 붙잡혀 참수되었다.

한편 창고를 봉쇄했던 마탐은 월휴(越巂)로 옮겨졌는데, 이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령석이 나를 수도로 압송하지 않은 것은 우리를 멸하려는 것이다. 나는 틀림없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마탐은 손을 씻은 뒤 땅바닥에 누웠고 줄을 잡아당겨 목숨을 끊었다. 머지않아 주령석이 도착해서 목을 베었다.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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