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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2 02:34:45

도회(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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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陶回
(286 ~ 336)

동진의 인물. 자는 불명. 양주 단양군(丹陽郡) 출신. 삼국시대 오나라에서 교주자사를 지낸 도기의 손자. 서진 시기 태자중서자를 지낸 도항(陶抗)의 아들.

2. 생애

초기에 사공부(司空府)에서 중군(中軍), 주부로 징소되었으나, 도회는 사양하며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대장군 왕돈의 참군으로 임관하고 주의 별가로 옮겨졌다.

태녕 2년(324년) 7월, 왕돈의 반란이 평정되자, 도회는 사도 왕도의 부름을 받고 그의 휘하로 들어가 종사중랑을 지내다가 사마로 승진했다.

함화 2년(327년) 12월, 유량(庾亮)의 과도한 견제에 폭발한 역양내사 소준이 반란을 일으키고 도성 건강(建康)을 향해 진격해왔다. 도회는 상서좌승 공탄(孔坦)과 함께 왕도를 찾아가, 얼른 군대를 출병시켜 강구(江口)를 틀어막을 것을 진언했다. 왕도 또한 그의 말을 타당하다 여기고 유량에게 전했지만 유량은 듣지 않았다. 결국 소준이 장수를 보내 고숙(姑孰)을 순식간에 함락하면서 상당량의 소금과 군량을 손쉽게 탈취하니, 유량은 비로소 도회와 공탄의 계책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함화 3년(328년) 2월, 소준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건강에 이르고, 궁성 북쪽에 위치한 복주산(覆舟山)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유량은 적이 필시 석두성(石頭城)으로 직진해서 내려올 것이라 예견하고 석두의 방비를 한층 강화하였다. 이때 도회가 유량에게 말했다.
"소준은 석두에 병력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감히 곧바로 직진해서 내려오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반란군은 반드시 소단양(小丹陽)의 남쪽 길을 통해 걸어서 내려올 것이니, 중요 길목에 병사를 매복시키면 의당 한 번의 전투로 소준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량은 이번에도 도회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 과연 소준은 소단양을 통해 말릉(秣陵)을 경유하며 내려왔고, 익숙하지 않은 지리에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인근 마을 사람 한 명을 붙잡아 길잡이로 삼았다. 소준은 밤을 틈타 진군했는데, 날이 무척 어두워 부대간의 식별이 불가능했을 정도였다. 나중에 그 소식을 접한 유량은 도회의 계책을 따르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뉘우쳤으나, 이미 소준은 건강 코앞까지 이른 뒤였다.

변곤(卞壼)은 관군을 지휘해 여러 차례 소준과 맞붙었지만, 소준의 정예군을 상대로 한 차례도 이기지 못하고 전부 패했다. 건강성은 이내 반란군에 의해 장악되었고, 도회는 성을 빠져나와 고향으로 돌아갔다. 도회는 소준을 토벌하기 위해 고향에서 1,000여명의 의병을 모으고, 도간, 온교 등이 이끄는 의군과 합류해 소준의 장수 한황(韓晃)을 격파했다. 소준의 반란이 모두 평정된 후에는 건악백(康樂伯)에 봉해졌다.

한바탕 위기를 넘긴 동진 조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기강이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사도 왕도는 이런 시기에 도회의 재능을 중히 쓰고자 그를 북군중후로 선발했다. 이후 도회는 중군후, 정로장군을 역임하다가, 조정의 명을 받고 오흥태수로 부임했다. 당시 동진은 심각한 기근에 시달려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었는데, 그 중 삼오(三吳: 오군, 오흥군, 회계군) 지역은 특히 심한 편이었다. 도회가 상소해 관아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휼할 것을 청했으나, 조정에서 빨리 답을 주지 않자 그는 임의로 창고를 열고 수만 곡에 달하는 쌀을 풀어 오흥의 백성들에게 할부로 나누어 주었다. 이윽고 백성을 구휼하라는 조서가 내려지니, 도회는 오군과 회계군에도 이를 똑같이 시행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도회가 오흥군에 부임한지 4년이 지났을 무렵, 조정에서 그를 징소해 영군장군으로 삼고, 산기상시를 더했으며, 정로장군 직책은 전과 같게 하였다. 도회는 성정이 고아하고 강직하여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번은 동향인인 환경(桓景)이 왕도에게 빌붙어 아첨하자, 도회는 그의 의롭지 못한 모습에 한탄하며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왕도가 도회에게 말했다.
"양주(揚州)는 남두(南斗)에 대응하는 지역일진대, 형혹(熒惑)이 그곳에 눌러앉아 있는 것을 보아하니, 하늘은 내가 관직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오."
도회가 답했다.
"공께서는 명덕(明德)으로 재상에 오르시고, 성주(聖主)를 보필하는 입장에서 마땅히 충정한 이들을 가까이 하고 아첨하는 이들을 멀리하여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환경과 같은 자를 가까이 하고 계시니, 어찌 형혹이 물러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왕돈은 심히 부끄러워하였다.

함강 2년(336년), 병을 이유로 조정에 사직을 청했다. 성제 사마연은 이를 불허하고, 호군장군, 산기상시에 임명하며, 영군장군 직책은 전과 같게 했다. 하지만 도회는 성제의 임명 조서를 받들기도 전에 병사하고 말았다. 향년 51세. 시호는 '위(威)'.

장남 도왕(陶汪)이 후사를 이었고, 관직은 보국장군, 선성내사에 이르렀다. 다른 아들들도 모두 동진에서 출세하여, 도루(陶陋)는 관군장군, 도은(陶隱)은 소부, 도무기(陶無忌)는 광록훈을 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