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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30 17:09:11

임욱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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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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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任旭
(? ~ 327)

서진동진 시기의 은사. 자는 차룡(次龍). 양주 임해군(臨海郡) 장안현(章安縣) 출신. 동오 시기 남해태수를 지냈던 임방(任訪)의 아들.

2. 생애

어린 나이에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힘들게 자랐지만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장성한 후 지조를 세우고, 깨끗이 수양해 세속에 물들지 않아 마을에서 추앙받았다. 임해태수 장수(蔣秀)는 그 명성을 아름답게 여겨 그를 공조로 삼았다. 장수는 관청에 거주하면서 재물을 탐해 매번 법을 어겼는데, 그럴 때마다 임욱은 정색하고 간언을 올렸으나 장수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크게 실망한 임욱은 바로 사직한 뒤,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학문에 매진하였다. 이후 비리가 탄로나고 장수는 즉시 체포되어 감옥으로 압송당하였다. 임욱이 이를 딱하게 여기며 장수를 배웅하니, 장수는 그를 보고 슬피 탄식하였다.
"임 공조는 참된 이로다. 나는 그의 바른 말을 어겨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후 임욱은 효렴으로 살펴져 임해군중정에 천거되었으나 굳게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영강 초에 혜제 사마충이 청렴한 절개와 재능이 있는 준걸들을 널리 구하였다. 임해태수 구복(仇馥)은 임욱이 깨끗하고 정직한데다 학식이 깊고 넓다며 천거하였고, 조정에서는 예를 갖추어 사람을 파견해 임욱을 불렀다. 임욱은 당시 조정에 변고가 많다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에, 은거하는 쪽으로 뜻을 굳히고 병이 있다며 사양하였다.

팔왕의 난으로 천하가 큰 혼란에 빠지자, 우장군 진민은 역양(歷陽)을 중심으로 강동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평소 서진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오군 고씨, 오군 주씨 등 강동의 명문 호족들은 진민을 찾아가 인연을 맺었는데, 오직 임욱과 하순만은 복종하지 않았다. 진민은 이 둘을 힘으로 굴복시키고자 했지만, 끝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 했다.

영가 원년(307년) 7월, 안동장군, 낭야왕 사마예가 동해왕 사마월의 명을 받고 건업에 주둔하였다. 낭야왕 사마예는 임욱의 명성을 듣고 그를 불러 참군으로 삼기 위해 손수 책서를 써서 임욱에게 확실히 전달했으나, 임욱은 아프다는 이유로 간곡히 사양하였다.

건흥 원년(313년) 5월, 낭야왕 사마예는 좌승상에 임명되자, 다시 임욱을 불러 좨주에 임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임욱은 이번에도 사마예의 청을 모두 거절하였다.

건무 원년(317년) 3월, 낭야왕 사마예가 진왕(晉王)에 즉위하여 백관과 종묘를 갖추고 강동에서 동진 정권을 건국하였다. 사마예는 마차까지 보내면서 또 임욱을 불렀지만, 하필 임욱이 모친상을 치르던 중이라 등용할 수 없었다. 이후 사공 왕도가 학교를 세우고 임욱을 비롯한 회계의 우희 등 강동의 여러 은사를 초빙하였다. 하지만 얼마 뒤에 대장군 왕돈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왕도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영창 원년(322년) 11월, 원제 사마예가 붕어하고 명제 사마소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명제 사마소가 임욱을 강제로 급사중으로 삼으니, 임욱은 병이 위독하다는 핑계로 출근을 거부하였다. 이에 상서성에서 무단결근을 이유로 임욱을 명부에서 제명시키려 하였는데, 상서좌복야 순숭이 반대하여 그대로 두었다.

태녕 3년(325년) 8월, 명제 사마소는 다시 예를 갖춰서 조서를 내리고 제발 조정에 참여해달라 청하였다. 그러나 조서가 내려지자마자 명제가 병으로 승하하였고 임욱은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함화 2년(327년), 임해태수 풍회(馮懷)가 임욱을 마땅히 추증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지만, 얼마 안 가 역양내사 소준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었다.

아들 임거(任琚)는 아버지와 달리 출사하여 관직이 대중정에 이르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