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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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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劉胤
(281 ~ 329)

서진동진의 인물. 자는 승윤(承胤). 청주 동래군(東萊郡) 액현(掖縣) 출신. 전한의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의 후손.

2. 생애

유윤은 준수한 외모에 사교성도 좋아서 당대 여러 호걸들과 교류했고, 명성도 매우 높아 동해(東海)와 태산(太山)에 걸쳐 여러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윽고 현량(賢良)에 천거되어 사공연(司空掾)으로 부름 받았지만 유윤은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팔왕의 난으로 하북이 혼란해지자, 유윤은 어머니를 모시고 요동(遼東)으로의 피난길에 올랐다. 유윤이 유주(幽州)를 지날 때, 유주자사 왕준이 요동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니, 그의 말에 따라 유주에 남아서 발해태수가 되었다.

건흥 2년(314년) 3월, 왕준이 석륵의 속임수에 넘어가 어이없이 사로잡히고 처형당했다. 이에 유윤은 유주를 떠나 기주자사 소속에게 의탁했다. 그러나 소속의 세력은 힘이 약소했고, 이내 아들 소예(邵乂)가 석륵에게 사로잡히자, 소속은 석륵에게 투항하려 했다. 이를 알게 된 유윤이 소속에게 말했다.
"과거 전단신포서는 각각 제나라와 초나라의 하급 관리였음에도 나라가 이미 멸망하거나 상패(喪敗)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남아 보전했습니다. 오늘날 장군께서는 정예의 무리를 거느리고 계시고 성 또한 멀쩡할진대, 어찌하여 장군 같은 충신(忠信)한 인물이 공을 세우려 하지 않으시고 늑대와 승냥이 같은 자에게 투항할 생각부터 하십니까! 항우원소의 세력은 분명 강성했으나, 고조가 호관(縞冠)을 쓰자 사람들이 호응했고, 조공(曹公)이 황제를 받들자 제후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역순(逆順)의 이치가 다르고 자연의 섭리는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이융(夷戎)이 추잡하게 뭉친 이 상황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제아무리 개와 양이 무리를 지어 강성해졌다 한들, 이는 한낱 도축업자의 근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랑캐한테 투항하면 어찌 훗날 위급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소속이 말했다.
"만약 그대의 말대로라면 나는 장차 어떻게 계획을 세워야 하겠소?"
유윤이 답했다.
"낭야왕께서 강좌(江左)에 터를 잡고 성덕을 밝히고 있으니, 중흥(中興)의 융성함은 곧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장군께서는 끝까지 강력한 세력에 항거하면서 의사(義士)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고, 충정(忠正)의 군대를 이끌며 선비들의 뜻을 받들어 주십시오. 또, 시기가 늦어지기 전에 낭야왕에게 귀순해야 합니다. 존망(存亡)과 폐흥(廢興)은 모두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자 소속은 유윤의 말에 따르고, 석륵에게 항복하자는 자들을 여럿 죽였다. 그리고 유윤을 건강(建康)으로 파견해 낭야왕 사마예에게 귀순하니, 사마예는 소속을 평원태수, 유윤을 승상참군으로 삼았다. 유윤은 동진에서 누차 승진하여 관직이 상서이부랑에 이르렀다.

대흥 3년(320년) 2월, 석륵이 석호를 보내, 당시 소속이 지키고 있는 염차(厭次)을 공격했다. 유윤은 그 소식을 듣고 원황제 사마예에게 소속을 구원해야 한다 주장했다. 원제도 유윤의 말에 따라 구원군을 보냈으나 이미 염차성이 무너지고 소속이 사로잡혔다는 보고를 듣고 구원군을 거두었다. 이후 유윤을 마음에 들어한 왕돈이 조정에 청해 그를 우사마로 삼았다. 하지만 유윤은 왕돈의 야심을 눈치채고, 베개를 베고 앓아 누운 척하며 일을 돌보지 않았다. 이는 곧 왕돈의 심기를 거슬렀고, 결국 유윤은 예장태수로 내보내졌다. 유윤이 다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태수직을 사양하려 하자, 조정에서 그의 집으로 사신을 파견해 조서와 함께 태수의 인수를 건네주었다.

당시 예장의 호족 막홍(莫鴻)이 여러 지역 호족들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예장에 도착한 유윤은 이를 즉시 진압하고 막홍과 그에게 호응한 호족들을 모두 멸하였다. 이로써 예장은 다시 평안을 되찾았고, 나머지 호족들은 숙연해져 유윤의 말에 잘 따랐다.

함화 원년(326년), 평남군사(平南軍司)에 임명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함화 2년(327년) 2월, 역양내사 소준이 반란을 일으켜, 도성 건강(建康)을 함락하고 황궁을 크게 약탈했다. 이에 강주자사 온교는 건강에서 도망쳐 나온 유량(庾亮)을 영접하고, 형주자사 도간과 더불어 의군을 일으켜 소준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했다. 온교가 떠나고, 유윤은 강주(江州)에 남아 분구(湓口)를 수비했다. 소준이 평정된 후, 풍성자(豐城子)에 봉해졌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또 승진하여 온교를 대신해 평남장군, 도독강주제군사(都督江州諸軍事), 영강주자사(領江州刺史), 가절에 임명되었다.

유윤은 날이 갈수록 직위가 높아지자 점점 자만심이 심해져, 날마다 음주와 음악을 즐기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또, 사치 부려, 조세를 모두 탕진한 것으로도 돈이 모자라 장사까지 하며 돈을 벌기 위해 애를 썼다. 유윤이 강주자사에 임명되기 전, 도간과 치감이 입을 모아 유윤에게 방백(方伯)의 재능이 없다고 하였지만 조정에서 듣지 않았다. 과연 유윤이 강주를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강주의 운하를 사적으로 독점했고, 대부분의 조세를 강주의 운하를 통해 운송하던 조정은 이로 인해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며 백관들에게 급료도 지급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조정에서는 유윤의 탄핵안을 받아들이고 면직시키는 것으로 결의했다.

함화 5년(329년) 12월 24일[1], 징계에 관한 조서가 내려지기도 전에 곽묵이 유윤을 살해하고, 그 목을 건강으로 보냈다. 향년 49세. 유윤의 후사를 이은 아들 유역송(劉赤松)은 관직이 황문랑, 의흥태수에 이르렀고, 성제 사마연의 딸인 남평장공주(南平長公主)와 혼인했다.


[1] 양력으로 계산할 시 330년 1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