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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庾峻
(? ~ 273)
1. 개요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산보(山甫)로 유민의 아버지.2. 생애
예주 영천군 언릉현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생각에 재치가 있었으며, 이전에 경사로 나가 소림에게 학문을 배웠다. 소림이 늙어서 병에 걸렸다고 해서 집에 머무르자 가서 문안하면서 통곡했다.군의 공조를 역임하고 계연으로 천거되었다가 주의 종사로 벽소되었으며, 태상 정무가 유준을 보고 큰 그릇이라 여겼고 박사로 추천되었다. 당시 장자, 노자 등이 중시되어 유교 경전과 역사 서적이 무시되자 이에 대해 염려하면서 조용히 유교 경전을 공부했다.
조모가 태학으로 행차해서 상서에 대해 질문하자 왕숙의 이론을 지지하는 답변을 했는데, 조모는 왕숙의 이론을 대놓고 공격하는 발언을 하자 굽혔다. 이는 왕숙의 이론이 사마씨가 표방하는 이념이었기 때문에 조모의 반사마씨 정서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비서승으로 옮겼다가 장안의 큰 옥사를 오랫동안 처리하지 못해서 유준이 시어사에 임명되어 처리하자 조야에서는 공정하다고 칭찬했다.
진나라가 건국되자 관중후에 봉해졌고 사공장사, 비서감, 어사중승을 지내다가 시중으로 옮겼고 간의대부를 더했다. 황제의 가까이에서 시경을 강론했고 중서자 하소와 시경의 풍, 아, 정변설에 대해 논쟁하다가 하소가 반박할 수 없었다.
당시 풍속은 다른 사람과 서로 비교하고 예의바르면서 사양하는 태도가 침체되자 이에 대한 상소를 올렸으며, 당시의 겉만 화려한 풍조를 싫어하고 명성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를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 글을 너무 크거나 많게 하지는 않았다.
273년에 사망해 조복 1구, 옷 1벌, 30만 전을 하사했으며, 조서를 통해 아침에 죽었으므로 저녁에 빈소를 차려 복건과 포의를 갖추고 날짜를 골라 장사지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