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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4 18:01:25

은의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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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殷顗
(? ~ 397)

동진의 인물로 자는 백통(伯通). 예주 진군(陳郡) 장평현(長平縣) 출신. 서진 시기 태상경을 지낸 은융(殷融)의 손자. 동진 시기 오흥태수 은강(殷康)의 아들. 은중문의 형.

2. 생애

은의는 재능과 기개가 있고, 성품도 솔직하여 젊었을 적부터 사촌동생 은중감과 더불어 명성을 떨쳤다. 태원 연간(376년 ~ 396년)에 중서랑을 지내던 은의는 남만교위에 임명되었는데, 일을 청렴하고 명쾌하게 처리하니, 그 치적이 날마다 쌓여갔다.

융안 원년(397년) 4월, 연청2주자사 왕공이 사마도자의 최측근인 왕국보 등의 횡포에 반발해 거병했다. 형주자사 은중감은 왕공의 연락을 받고, 밖으로는 옹주자사 치회와 일을 도모하고, 안으로는 은의를 포함한 부하 관리들을 불러모아 반란에 대해 의논했다. 이때 은의가 말했다.
"인간과 신하로서의 의리를 헤어린다면 신중하게 자신을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조정의 시시비비는 조정 내의 대신들이 해결해야 할 책무일진대, 어찌 번병(籓屏)의 관리들이 함부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 진양(晉陽)의 일에는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은의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남군상 강적도 한사코 반대했지만, 은중감이 계속해서 거병을 고집하자 은의가 노하여 말했다.
"그대가 일을 도모한다 해도 나는 감히 함께할 수 없을 것이며, 물러가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오."
이에 은중감은 은의를 심히 원망했다. 이후로도 은의는 재차 간언했는데, 그 말이 무척 이치에 들어맞았지만 끝내 은중감의 야망은 꺾을 수 없었다. 은중감이 거병에 반대하는 강적을 쫓아내고 양전기로 대체하는 것을 본 은의는 친척인 자신도 곧 쫓겨나리라 여겨, 오석산의 부작용을 핑계로 사직했다.

얼마 뒤, 은의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은중감은 은의를 찾아가 말했다.
"형님의 병환이 가히 우려스럽습니다."
은의가 답했다.
"나의 병은 단지 이 몸 하나 죽는 것으로 끝나지만, 너의 병은 멸문을 부르고 있으니, 내 생각은 하지 말고 앞으로의 일이나 심사숙고하여 결정하라."
그러나 은중감은 은의의 말을 듣지 않고 양전기, 환현을 가까이 하며 반란을 꿈꿨다. 걱정으로 인해 병세가 더욱 악화되던 은의는 오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과연 은의의 우려대로 은중감은 권력을 탐하다가 환현의 계략에 당해 살해당했다. 은중감 사후,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은의를 관군장군으로 추증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