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24 12:14:29

사마희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무릉위왕(武陵威王)
司馬晞 | 사마희
시호 위(威)
작위 무릉군왕(武陵郡王)
성씨 사마(司馬)
이름 희(晞)
도숙(道叔)
부모 친부: 원제 사마예 / 친모: 재인 왕씨
양부: 사마철
생몰기간 316년 ~ 381년
재위 동진의 무릉왕
318년 ~ 371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동진의 황족으로 자는 도숙(道叔)이다.

2. 생애

316년 낭야왕(琅邪王) 사마예와 재인 왕씨(王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명제 사마소, 간문제 사마욱과는 이복형제였다.

317년, 오호의 침공으로 중원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강남에서 사마예가 진왕(晉王)이 되었고 다음 해인 318년 정식으로 제위에 올라 간신히 진나라의 명맥을 이었으니 이가 원제였다. 같은 해에 사마희는 영가의 난 때 석륵에게 살해당한 무릉애왕(武陵哀王) 사마철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사마희는 함화(咸和) 연간에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상동군(湘東郡)을 무릉국(武陵國)에 더하고 좌장군(左將軍)에 제수되었다. 뒤이어 진군장군(鎭軍將軍)을 역임하고 다시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342년, 성제 사마악이 붕어할 때 회계왕(會稽王) 사마욱, 중서감(中書監) 유빙, 중서령(中書令) 하충, 상서령(尙書令) 제갈회와 함께 고명을 받들었다.

사마악의 동생 강제 사마담이 즉위한 뒤 시중(侍中), 특진(特進)이 더해졌다. 343년, 비서감(秘書監)을 겸임하였다.

목제 사마담이 즉위한 뒤 345년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352년, 태재(太宰)가 되었다.

태화 연간, 폐제 사마혁이 사마희에게 의장과 고취, 검리상전(劍履上殿), 입조불추(入朝不趨), 찬배불명(贊拜不名)의 특권을 내리려고 했지만 사마희는 이를 고사하였다.

371년, 권신 환온이 사마혁을 폐위하고 낭야왕 사마욱을 제위에 올렸다. 사마희는 학식이 없었지만 무술을 연마했기 때문에 환온은 사마희를 꺼려서 그를 내쫓을 방법을 강구하다가 결국 간문제에게 사마희에 대해 참소하였다.
무릉왕 사마희는 황실 출신이므로 그의 은총이 세상에 빛나지만 왕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자신을 갈고닦고 신중하게 행동하지만 경박한 사람들을 모으고 도망친 이들을 몰래 숨겼습니다. 또한 아들인 사마종은 오만하고 잔인하여 다른 사람들을 학대했습니다. 원진의 반역도 그와 관련이 있습니다. 근래에 사마종이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으니 틀림없이 이것이 화근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마희를 면직시키고 왕의 신분으로 번국으로 돌려보낼 것과 사마희의 아들 사마종을 면직시키고 사마희의 아들 사마봉을 산기상시에서 해임시킬 것을 주청합니다.

이후 사마희는 폐서인되어 말 85마리와 300명의 병사와 무기들이 모두 환온에게 돌아갔다. 환온은 또한 신채왕(新蔡王) 사마황(司馬晃)를 협박하여 사마황이 사마희, 사마종, 저작랑(著作郞) 은연(殷涓), 태재장사(太宰長史) 유천(庾倩), 태재연(太宰掾) 조수(曹秀), 사인(舍人) 유강(劉彊), 산기상시 유유(庾柔) 등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였다. 이들이 정위(廷尉)로 압송된 뒤 환온은 이들에 대한 처벌을 간문제에게 요구했으나 간문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환온은 다시 이들을 신안군(新安郡)으로 유배를 보내도록 상주했다. 결국 사마희는 가족들과 함께 신안군으로 유배되었고, 은연 등은 삼족이 멸해졌으며, 사마황은 폐서인되어 충양군(沖陽郡)으로 유배되었다.

사마희는 결국 381년 신안군에서 죽었다. 사후 효무제 사마요가 사마희를 신녕군왕(新寧郡王)으로 추봉하고 위(威)라는 시호를 내렸다가 387년에 다시 무릉왕으로 추봉하였다.

사마희는 슬하에 3명의 아들로 사마종(司馬綜), 사마봉(司馬㻱), 사마준(司馬遵)이 있었으며, 효무제 때 복권되었다. 사마희의 작위는 사마준이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