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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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高崧(? ~ 366)
동진의 인물로 자는 무염(茂琰). 아명은 아영(阿酃). 서주 광릉군(廣陵郡) 출신. 광록대부를 지낸 건창백(建昌伯) 고이(高悝)의 아들이다.
2. 생애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가까이 했으며, 역사책 읽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 표기장군 하충이 양주자사(揚州)를 겸하게 되었을 때, 그의 부름을 받아 주부(主簿)에 임명되었고, 이후 주의 수재로 천거받아 태학박사로 옮겨졌다. 얼마 뒤, 아버지가 사망하여 사직했다. 그러나 아버지 고이의 생전 축첩 행위로 소송이 제기되면서, 고이의 관작은 박탈되었고 고숭 또한 사건에 얽혀 정위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친상은 중지된 상태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치러지지 않고 방치되었으며, 아버지 고이의 시신은 매장되지 않은 채 썩어만 갔다. 고숭은 정위의 조사를 받으면서 아버지의 오명을 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조정에도 상소를 수십 번이나 올렸다. 소송이 종료되고 마침내 고이의 무고함이 밝혀지니, 조정은 조서를 내려 고이의 관작을 모두 회복시키고 고숭으로 하여금 부친의 작위를 잇게 했다. 부친상을 무사히 마친 후,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중서랑, 황문시랑을 역임했다.영화 원년(345년) 정월, 회계왕 사마욱이 무군대장군에 임명받자, 고숭은 무군사마가 되어 사마욱을 보정했다.
영화 5년(349년) 12월, 환온은 여러 번 조정에 상표해 북벌을 구했음에도 전부 거절당하자, 이번엔 표문을 올리고 바로 4 ~ 50,000 병력을 일으켜 무창(武昌)에서 무력 시위를 단행했다. 환온의 위협에 사마욱이 근심에 빠져있을 때, 고숭이 나서서 환온을 조서로써 일깨우겠다 설득하고, 사마욱을 대신해 조서의 초안을 작성했다. 조서를 전달받은 환온은 진정하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후 고숭은 여러 차례 승진해 관직이 시중에 이르렀다.
흥녕 2년(364년) 3월, 애제 사마비는 도사들만 신임해, 그들의 말에 따라 곡식을 끊고 약만 먹으며 불사(不死)의 몸이 되는 것을 꿈 꾸었다. 이에 고숭이 간했다.
"천자로서 적합한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하는 일은 실로 일식, 월식과 같다는 것을 상기해 주시옵소서."[1]
하지만 사마비는 듣지 않았고, 고숭은 얼마 후 공적인 일로 면직당했다.태화 원년(366년) 8월 22일,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2] 아들 고지(高耆)가 뒤를 이었고 관직은 산기상시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