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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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侯湛
(243 ~ 291)
1. 개요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효약(孝若)으로 하후연의 증손자이며 하후장의 아들이다.2. 생애
예주 패국 초현 사람으로 어려서 지혜로 이름을 떨쳤고, 재능이 풍부하고 문장이 정교했으며, 소아의 시에 가사를 보충하는 것에 뛰어나 명성이 반악에게 버금갔다. 262년에 태위부로 벽소되어 태위연이 되었다.현량방정으로 징소되어 265년에 낭중에 임명되었으나, 274년까지 거의 9년 가까이 승진하지 못하자 '저의(抵疑)'라는 시를 지어 자신을 위로하였다. 이후 승진하여 태자사인, 상서랑을 차례로 역임했고, 야왕현령이 되었을 때 정사를 청평하게 하면서 백성에 대한 징수를 빡빡하게 하지 않았다. 이때 하무를 조정에 천거하고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는 《곤제고(昆弟誥)》라는 책을 한 편 저술했다.
몇 년 뒤, 중서시랑, 남양상에 임명되었다가 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직후에 태자복에 임명되었지만, 명을 받들기도 전인 290년에 사마염이 사망했으며, 사마충의 즉위 이후 산기상시에 임명되었다.
291년 5월, 49세로 집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생전 30여 편에 달하는 글을 남겼지만 앞서 상술한 두 작품과 '주시(周詩)'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소실되었다. 하후담은 삼국지의 《위서(魏書)》도 직접 썼으나 진수가 쓴 위서가 더 훌륭한 것을 보고 자신이 쓴 책은 불 태워버렸다고 한다.
3. 평가
하후담은 주시를 지어 반악은 그 글에 대해 온아하고 효성스런 성품이 드러나있다고 평가했으며, 위서를 저술했지만 진수가 저술한 것을 보고 자신이 쓴 책을 없애서 그만뒀다.[1] 반악과 함께 수려한 용모로 딸린 옥이라 불렸다.[1] 만약 하후담이 그가 저술했던 위서를 없애지 않아 후대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면 진수와는 또다른 사관을 가진 서진 시대 사가의 삼국시대 역사서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아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