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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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韓友(? ~ 313)
서진의 인물. 자는 경선(景先). 양주 여강군(廬江郡) 서현(舒縣) 출신.
2. 생애
학문을 닦던 서생으로, 회계군(會稽郡) 사람 오진(伍振)에게서 《주역(周易)》을 배워 점을 잘 쳤고, 주택이나 묘지의 도면을 보고 그 길흉을 평하는 데에 능하였으며, 불길한 기운을 억제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주술을 사용하였다고 한다.한우는 질병을 치유하거나, 재앙을 예측하는 등 여러 기이한 일들을 행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기록되어 있다.
- 용서장(龍舒長) 등림(鄧林)의 부인이 여러 해 동안 병을 앓아 거의 죽을 지경이었고, 의사와 무당들조차 모두 포기하였다. 이때 한우가 점을 치고 난 다음, 들판의 돼지 그림을 그려 병풍에 걸게 하니, 그 후 하루 밤이 지나자 병이 나아졌다고 한다.
- 서현의 정연(廷掾) 왕목(王睦)이 병으로 죽었다가 다시 소생했을 때, 한우는 점을 치고 나서 널판지에 해와 달을 그린 다음, 그것을 침대 머리맡에 두게 하고, 표범 가죽을 베개 위에 덮게 하였더니, 그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 유세칙(劉世則)의 딸이 오랫동안 마귀에 시달려 무당을 불렀는데, 무당이 빈 무덤과 옛 성터를 파헤쳐 고양이와 개구리 수십 마리를 찾아내어도 병이 낫지 않았다. 이를 들은 한우가 점을 치고 나서, 천으로 만든 주머니를 딸이 발작할 때 창문 사이에 걸게 하였다. 그 후 한우가 문을 닫고 주문을 외우자 주머니가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 주머니가 터지면서 병이 재발하니, 이번에는 가죽 주머니 두 개를 겹쳐서 같은 방법으로 처리하여 병을 완전히 고쳤다고 한다.
- 선성(宣城)의 변홍(邊洪)이 4월에 한우에게 집의 안위를 점치게 하였을 때, 한우는 큰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70묶음의 나무를 경(庚) 방향에 쌓아, 7월 정유일에 이를 불태우면 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하였다. 변홍은 이를 따랐으나 하필 그 날 바람이 강하게 불어 불을 피우지 못했다. 그 후 변홍은 광양(廣陽)의 현령으로 임명되어 부임하려 했지만, 모친상을 당해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후 한우가 그를 찾아왔는데, 이미 해가 저물었는데도 한우는 급히 떠나야 한다며, 변홍의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황급히 떠났다. 그날 밤, 변홍은 갑자기 발광하여 두 아들을 목 졸라 죽이고 아내를 살해하였며, 부친의 첩 두 명을 상처입히고 도망쳤다. 다음날 가족들이 변홍을 찾았을 때, 그는 집 앞 숲에서 목을 매어 죽어 있었다고 한다.
- 선성(宣城) 태수 은우(殷祐)가 병에 걸렸을 때, 한우는 7월 말에 큰 구욕조(鸜鵒鳥)가 청사(廳事)에 나타날 것이니, 이를 잡아야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예언하였다. 과연 때가 되자, 한우의 예언대로 큰 구욕조가 나타났고,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은우는 이를 손쉽게 붙잡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우는 석두성(石頭城)의 도호로 승진하였고, 나중에는 오군(吳郡) 태수가 되었다고 한다.
"점치는 방법은 오행의 상생과 상극을 이용하는 것으로, 병을 치료할 때 약을 처방하여 냉온을 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그 효과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으니, 반드시 맞는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원강 6년(296년),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었고, 훗날 낭야왕 사마예가 장강을 건너 건업에 자리잡았을 때는 광무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영가 말년(313년)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