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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감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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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徐龕
(? ~ 322)

동진후조의 인물. 자는 불명. 서주(徐州) 태산군(太山郡) 출신.

2. 생애

용맹하고 과감한 성정을 가졌지만, 행동이 경박하여 오래도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사람들을 약탈하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날렵했다고 한다. 이후 대흥 원년(328년)에 건강(建康)의 동진 정권에 귀순하여 태산태수로 임관하였다.

대흥 원년(318년) 12월, 팽성(彭城)내사 주무(周撫)가 패(沛)국내사 주묵(周黙)을 살해하고 팽성을 들어 한나라의 조공(趙公) 석륵에게 항복하였다. 서감은 하비(下邳)내사 유하와 함께 서주자사 채표의 지휘를 받으며 주무 토벌에 참전하였다.

대흥 2년(319년) 2월, 동진의 토벌군은 한산(寒山)에서 주무를 격파하였다. 주무는 도망치다가 우약(于薬)에서 서감의 부하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서감의 기대와는 달리 조정의 논공행상에서 서감은 유하보다도 순위가 낮은 것을 보고 크게 분노하여 2개월 뒤에 스스로를 안북장군, 연주(兗州)자사라 칭하며 석륵에게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동진을 배반하게 된 서감은 제수(濟水)와 대산(岱山) 일대를 휩쓸고 다녔다.

대흥 2년(319년) 8월, 서감이 동완(東莞)태수 후사모(侯史旄)를 격파해 보루로 쫓아내고 동완을 떨어뜨리자, 원제 사마예는 중서감 왕도의 천거에 따라 태자좌위솔 양감을 정토도독으로 삼아 서주자사 채표, 무위장군 후예(侯禮), 임회(臨淮)태수 유하, 선비족 단부단문앙 등을 통솔해 서감을 토벌케 하였다.

대흥 3년(320년) 5월, 토벌군의 지휘관인 양감은 본래 군인 체질도 아니었고, 본인 또한 대장의 자리에서 회피하려 하였음에도 억지로 떠맡겨진 것이라 1년 가까이 하비에 가만히 주둔한 채 나아가지 않았다. 보다못한 채표가 자신의 군대만이라도 움직여 단구(檀丘)에서 서감을 무찌르니, 다급해진 서감은 후조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석륵은 장수 왕복도(王伏都)에게 300명의 기병을 주어 서감을 돕게 하고, 장경(張景) 등으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했다. 이때 석륵이 서감의 청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고, 구원하러 왔다는 장수 왕복도 또한 음란하고 포학하니, 서감은 앞으로의 일을 크게 근심하였다. 왕복도의 후발대인 장경 등의 군대가 동평(東平)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서감은 의심이 깊어져, 장경이 자신을 습격해오리라 판단하고, 먼저 왕복도를 공격해 후조군 300명을 몰살해버렸다.

왕복도의 구원병이 동진군이 아닌 서감의 배신으로 전멸했다는 소식에 석륵은 크게 노하여 장경에게 자리를 지키라 전하고, 석호를 보내면서 본격적으로 토벌하려는 모양새를 보였다. 서감은 재빨리 동진에 다시 항복하겠다는 서신을 전달했지만, 원제 사마예는 자주 배신하는 서감을 미워해 항복을 거절하고 양감과 채표에게 서감을 토벌하라 재촉했다. 일이 이 지경까지 왔음에도 의심하며 진격하지 않은 양감은 이내 상서령 조협에게 탄핵당해 면직되었고, 토벌군은 절충장군으로 강등당한 채표가 대신 지휘하게 되었다.

대흥 3년(320년) 8월, 중산공 석호가 보•기 40,000명을 거느리고 태산의 서감을 정벌하러 출병하였다. 서감은 동진에서 항복을 받아주지 않자 장사 유소(劉霄)를 보내 석륵에게 용서를 빌며 처자식까지 인질로 주니, 석륵이 서감의 항복을 다시 받아주었다. 당시 채표는 변성(卞城)에 주둔하여 서감을 압박하고 있었는데, 석호의 군대가 도착해 거평(巨平)에 주둔한 것을 보고 밤에 하비로 후퇴하였다. 서감은 단구에서 퇴각하는 채표의 군대를 습격해 격파하고, 그 장수 유총(留寵)과 육당(陸黨)을 전사시켰다.

대흥 4년(321년) 2월, 서감이 다시 동진에 항복을 청해오니, 이번에는 원제 사마예가 그를 받아주었다.

영창 원년(322년) 2월, 중산공 석호가 정예병 40,000명을 이끌고 서감이 지키고 있는 태산성을 공격해 포위하였다. 석호는 아예 장기전을 치를 작정으로 긴 포위망을 구축해 여러 겹으로 두르고 둔전하기 시작하였다.

영창 원년(322년) 7월, 석호가 성을 함락해 태산군을 장악하고 서감을 붙잡아 후조의 수도인 양국(襄國)으로 압송하였다. 거듭된 배신으로 단단히 화가 나있던 석륵은 서감을 자루에 넣은 후, 100척 누각 위에서 그 자루를 땅바닥으로 내리꽂았고 서감은 그대로 터져서 사망하였다. 석륵은 이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자루에서 서감의 시체를 꺼내고, 일찍이 서감에게 죽임당했던 왕복도 등의 유족들을 불러 그 시체를 베어내 먹게 하였다. 또, 항복한 서감군 3,000명을 전부 생매장하여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