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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강희제가 사용한 옥새 |
1. 개요
옥새(玉璽)는 국새 중 옥(玉)으로 만든 새(璽)를 말한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군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장이다. 천자만이 옥새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제후는 금인(金印)을 사용해야 했다.2. 유래
이름에 옥이 들어간 이유는 가장 유명한 국새인 진시황의 국새가 옥의 명산지로 유명한 남전산(藍田山)의 옥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옥은 황금과 함께 고대부터 동양에서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석으로 옥새와 형태는 다르지만 한국사에서도 권위의 상징물이던 신라의 금관이 황금과 곡옥이란 두 재료가 중심이다. 일본에서도 옥은 조몬 시대부터 중요시되었다.진시황제 사후 전국옥새는 천여 년간[1] 중국 여러 왕조의 황제의 손을 거치다가 후당 말제 때 결국 유실되어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이 옥새에는 수명우천 기수영창[2]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하며, 이 명문은 진시황 때의 정치가이자 전서(篆書)의 대가로 유명한 승상 이사(李斯)가 썼다고 한다.
이 옥새는 대대의 황제에게로 전해졌다고 해서 전국옥새(傳國玉璽)라고도 불린다.
3. 용도
황제가 본인이 직접 결재했음을 증명하는 도장이다. 옥새가 찍힌 공문은 칙(勅)[3]이 되어 매우 엄중히 관리됐다.황제는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의 국가 정책 현안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히 읽어본 후 가부 결정을 해야 한다. 해당 정책 현안을 승인한다면 옥새로 날인한다. 그러면 현안은 바로 왕 또는 황제의 이름으로 실행된다. 반면 해당 정책 현안을 기각한다면 옥새를 찍지 않으면 된다. 옥새가 찍힌 문서를 받은 환관은 해당 실무자한테 반드시 이 문서를 전달해야 하고, 실무자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지시를 완수해내야 했다.
옥새가 어떻게 관리됐는지는 당대 황권과 국정 운영 상태를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후한 영제는 정무를 소홀히 하다 결국 옥새를 분실했다. 물론 옥새는 부새랑(符璽郞)이라고 하는 옥새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직책이 있어, 당시 옥새를 담당하는 관료들까지 제 소임을 하지 않을 정도로 혼란이 심각했다고 볼 수 있다.
4. 역사
춘추전국시대까지 왕·공의 권위는 대개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나 구정이라 불린 청동으로 만든 세발 달린 솥(鼎)을 그 상징으로 삼았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처음으로 황제의 칭호를 쓰면서 솥을 대신할 새로운 상징물로 옥새를 만들었다.전근대 사회에서 황제의 옥새는 군주의 절대적 권위, 더 나아가 중화제국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자리잡았다. 진시황 이래 황제의 조칙이 법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공식 문서화 후 반드시 옥새가 찍혀 있어야 했고, 황제의 제위 계승도 선황제의 영전에서 옥새를 정식으로 인수해야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전국옥새는 제위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의미였을 뿐, 국가의 공식적인 행정 문서에 찍는 옥새는 따로 있었다. 한대 이래로 사용된 실무용 옥새는 모두 6종류가 있어 각각의 업무에 따라 달리 날인했다.
- 황제행새(皇帝行璽) - 책봉 및 논공행상을 할 때 사용한다.
- 황제지새(皇帝之璽) - 황제가 칙서를 반포할 때 사용한다.
- 황제신새(皇帝信璽) - 군사적인 업무, 소집이나 동원 시에 사용한다.
- 천자행새(天子行璽) - 조공국의 왕이 즉위했을 때 황제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책봉하거나 상을 내릴 경우 사용한다.
- 천자지새(天子之璽) - 하늘이나 땅, 또는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다.
- 천자신새(天子信璽) - 대외 동원이나 중국 바깥의 번국을 소집할 때 사용한다.
황제삼새는 대체로 실무 및 내치에 활용되었고, 천자삼새는 의례 및 대외 관계에 사용되었다.
전국옥새가 후당 말에 없어진 후, 송나라 때는 옥새 7과를 사용했고,[4] 명나라 때는 17과, 청나라 중기에는 25과까지 늘어났다. 청나라 말 선통제 푸이가 즉위하자 새로운 체제를 도입한다고 다시 만들었는데, 이 옥새는 1945년 푸이가 소련군에게 체포될 때까지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옥새는 위안스카이가 세운 중화제국 옥새이다.
전근대 중국에서는 새 왕조가 전 왕조로부터 빼앗은 옥새를 사용해 세력의 이동을 나타내는 일이 많았다. 새 왕조에 맞게 고쳐 쓰기도 했다. 진시황의 옥새는 중간에 부서져서 금으로 땜질하기도 하고 조비나 석륵 등은 옥새에 자신의 문구를 새기기도 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손견과 원소의 대립과 반동탁 연합군의 분열을 손견이 옥새를 주워놓고 모른 척 해서라고 연출하거나, 후에 손책이 병력을 얻는 수단을 원술에게 옥새를 빌려주고 몇천 병력을 얻었다고 처리하고, 병사를 갚아도 원술이 옥새를 돌려주지 않아 손책이 원술 휘하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연출하는 등 당시 옥새의 상징성은 대단했다.
4.1. 한국사
한국 옥새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예왕지인(濊王之印)'이다. 고구려는 옥새(玉璽)가 아닌 금새(金璽)를 썼다는 삼국사기 기사가 있다. 하지만 굳이 천자의 새(璽)를 쓴 만큼 옥새도 썼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에서 옥새 도장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비슷하게 왕권을 상징하는 보물로 천사옥대라는 옥 허리띠가 있었다고 전한다. 진평왕부터 사용한 이 옥대는 수백 년이 흘러 고려태조 왕건이 관심을 가져 신라 멸망 직후에 인수인계 받았다고 한다.고려, 조선 왕조는 상국으로 우대해준 국가들에게 국인(國印)을 받아 썼다. 하지만 정종 문명왕이 '새서(璽書)'를 내려주었으며 숙종 붕어 후 예종이 '옥새(玉璽)'를 받았다고 표현했으며 고려사 인종 세가엔 고려 예종이 신하 한안인을 시켜 '국새(國璽)'를 가져와 태자였던 인종에게 물려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보아 타국이 보낸 국인 외에도 고려가 독자적으로 만든 옥새(국새)가 따로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역시 마찬가지로 명, 청에게 '조선국왕지인'이란 옥새(국인)을 받았지만 오로지 외교용으로만 쓰고 자체적으로 옥새를 만들어 썼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은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옥으로 국새 황제지보 등의 옥새들을 제작했다.[5]
5.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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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국새#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국새#|]] 부분을 참고하십시오.동아시아 국가들 중 대만이 유일하게 옥으로 제작된 옥새를 사용한다. 이는 중국 전통문화 애호가였던 장제스의 의중이 담겨 있다. 중국에게 본토를 빼앗긴 만큼 정통성을 챙기기 위해 전국옥새때부터 중국의 주권을 상징했던 옥새를 만든 것이다.
6. 여담
- 축구에서는 가는 팀마다 우승을 만드는 선수를 의미하는 은어로 쓰인다.
7. 창작물
[1] 진시황 때부터 후당 말제까지는 천 년이 넘는다.[2] 受命于天 旣壽永昌: 하늘에서 천명(天命)을 받았으니, 그 수(壽)가 길이 빛나리라.[3] 왕의 명령은 교(敎)라고 하고, 황제의 명령은 칙(勅)이나 조(詔)라고 한다.[4] 원나라 때의 옥새에 대해선 자세한 기록이 없다.[5] 다만 국새인 대한국새는 금도금 순은(天銀鍍金)으로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