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의 난 | 王凌之亂 | |||||
수춘삼반의 일부 | |||||
시기 | |||||
251년 | |||||
장소 | |||||
양주 구강군 수춘현 | |||||
교전세력 | |||||
사마의 일파 | 왕릉 일파 | ||||
지휘관 | |||||
사마의 | 왕릉 | ||||
결과 | |||||
왕릉의 항복 | |||||
영향 | |||||
사마씨의 권력 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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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춘삼반의 첫째 반란.251년 과거에 동탁을 주살했던 왕윤의 조카인 왕릉이 고평릉 사변으로 조위의 국정을 장악한 사마의에게 반발하여 조조의 아들인 초왕 조표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던 모반 사건이다.
2. 배경
249년, 사마의는 전횡을 일삼던 대장군 조상 일파를 처형한 후 위나라의 국정을 온전히 장악한다. 원래 사마의가 조상 일파로부터 권력을 인수하면서 그들의 안전을 보장했지만 이내 약속을 어기고 장당을 고문하여 얻은 자백을 명분으로 그들을 모두 처형하면서 위나라 조정에 위기감을 고조시켰다.이에 왕릉은 황제 조방이 사마 가문의 꼭두각시가 된 현실을 위험하다고 생각하고[1] 새로운 황제 옹립을 통해 영호우과 같이 위나라의 주권을 회복시키려 하였다.
3. 결과
그러나 계획을 짜고있던 영호우가 급사하고 왕릉의 우유부단함으로 이 시도는 실패하였다. 왕릉은 자살했으며 삼족이 주멸된다.[2] 또한 반란에 연루된 초왕 조표는 사사되고 그의 관속들은 주살되었다. 이후 사마씨의 권력은 더욱 강화된다.왕릉의 난 자체는 불발된 역모에 불과하였으나 사마의 개인 입장에서는 반란 자체는 쉽게 막았지만 자신과 함께 관료 생활을 오래 함께한 동료이자 신임하고 태위직까지 맡겼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모양새가 돼서인지 심리적인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사마의는 왕릉의 난을 진압한 뒤인 같은 해 8월, 병들어 누운 자리에서 왕릉에게 해를 당하는 꿈을 꾸고 곧 사망했다.
[1] 사마의 이전에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조상은 개인의 부패와 무능 문제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어쨌든 황실 가문인 조씨인데다 그 아버지는 대장군 조진이다. 사마씨가 국정을 장악한 상황과는 엄연히 다른 상황이라는 것.[2] 예외적으로 왕릉의 여동생은 사마의와 같은 편인 곽회의 아내라서 살려주었고, 영호우의 일족 영호소의 아들인 영호준은 영호소가 영호우에게 경고했다는 것이 참작되어 처벌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