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魏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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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b><colcolor=#fedc21> 王凌 왕릉 | |
작위 | 의성정후(宜城亭侯) → 남향후(南鄉侯) |
최종직위 | 태위(太尉) |
성씨 | 왕(王) |
휘 | 릉(凌) |
자 | 언운(彦雲) |
숙부 | 왕윤(王允) |
생몰기간 | 172년 ~ 251년[1] |
고향 | 병주(幷州) 태원군(太原郡) 기현(祈縣) |
재임기간 | 조위의 사공 |
248년 9월 ~ 249년 12월 9일 | |
조위의 태위 | |
249년 12월 9일 ~ 251년 |
[clearfix]
1. 소개
후한 말, 삼국시대의 위나라의 인물이며 자는 언운(彦雲)으로 후한의 사도 왕윤의 조카다. 병주 태원군 기현[2]사람.2. 생애
192년, 왕윤이 이각 등에게 살해되고 일족 10여 명이 처형당할 때 형 왕신(王晨)과 성벽을 넘어 탈출해 향리(鄕里)로 달아났다. 왕릉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고, 발간현(發干)의 장(長)으로 임명되었으며, 점점 승진하여 중산태수(中山太守)가 되었다. 그가 부임한 곳에서 치적을 쌓자, 조조는 그를 초빙하여 승상연속(丞相掾屬)으로 삼았다. 그런데 조조 밑에서는 이렇다 할 활약을 한 것 같지는 않고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조비 시절부터였다. 오와의 싸움에서도 공을 세웠고 특히 석정 전투에서 주방의 계책에 빠진 조휴를 죽을 각오를 하고 적의 포위를 뚫고 구출하여 구해낸 것으로 이름이 높아졌다. 양주자사, 예주자사 등을 역임했다. 행정 쪽에도 수완이 있었는지 임지에서도 선정을 베풀며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231년에 만총이 말림에도 불구하고 손포의 거짓항복에 넘어가 온갖 설레발은 다 치다가 병사를 잃는다. 다만 다행인 점은 만총이 미리 명을 내려 군사를 못 끌고가게 했기 때문에 끌고간 병력이 독장 한 명에 병사 700에 불과했다. 240년에는 오나라 전종의 침입을 격퇴했고 남향후로 승진했으며 이후 사공이 되고 사마의 등에 의해 조상이 처형되자 태위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249년, 조카 영호우와 함께 당시 황제 조방을 폐하고 초왕 조표를 옹립하고자 했고 영호우와 초왕 조표는 서로 소식을 전해받기까지 했다. 이를 장남인 왕광이 강력하게 반대했고 계획 도중 동년 11월에 영호우가 병사해 버렸지만 계속 진행했다. 한진춘추[3]에 따르면 왕광은 조상일파가 정치를 못해서 다 죽었고 명사가 반이나 줄었지만 백성들이 슬퍼하지 않으며 사마의가 아직 반역한 것도 아니고 정치를 바르게 해 민심을 얻고 있으며 사마씨 일족이 병권을 잡고 있으니 망하지 않을 것이라 했지만 왕릉은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251년에 오군이 여수를 막는 것을 기회로 궐기를 꾀했지만 부하인 황화와 양홍이 이를 밀고하여 사마의에게 이 소식이 전해지는 바람에 사마의는 왕릉 토벌군을 결성했고 왕릉은 스스로 사마의에게 출두하고자 도성으로 갔는데 그 도중 독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4] 《위략》에는 왕릉이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는 글과 대화가 묘사되지만, 사마의가 냉담하게 나오면서 결국 자살하는 것은 마찬가지. 실제로 사마의는 직접 수춘으로 내려가 사건을 규명하고 조표에게 죽음을 내리고 왕릉의 삼족을 멸했으며 왕릉과 영호우의 시신을 시장에 내걸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사마의도 왕릉이 죽은 그 해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왕릉은 사마랑, 가규와 절친한 사이였다. 자연히 사마랑의 동생인 사마의와도 오랜 교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탓인지 왕릉의 일족을 멸한지 반년도 못가 왕릉과 가규가 나오는 악몽을 꾸고 세상을 떠났다.[5][6]
왕릉전 주석에 의하면 왕릉의 여동생은 곽회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왕릉의 일 때문에 왕릉 집안의 삼족이 멸족되게 되자 곽회의 부인도 그 죄를 받게 되었다. 이에 곽회의 아들들이 눈물을 흘리고 이마를 땅바닥에 찧어가며 어머니를 구해줄 것을 아버지 곽회에게 빌었다. 곽회도 결국 마음이 움직여 사마의에게 "제 자식놈들이 어머니를 사랑하여 어머니에게 죽음을 내리면 자식들도 어미를 따라 죽겠지요. 이들이 죽으면 저도 제 아들들을 따라갈 겁니다"라고 탄원하였고 사마의가 곽회의 부인은 사면해줘서, 즉 왕릉의 여동생만은 유일하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2.1. 마지막 행보와 의문점
왕릉의 난은 수춘삼반 중에 가장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난 사건이지만 음모의 스케일은 가장 컸다. 사마의 타도는 물론 조방의 폐위까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덕분에 오히려 모반의 순수성(?) 문제는 애매해진다. 출신 문제로 잡음이 있는 조방이지만 조예가 인정한 정통 후계자임은 분명한데, 그런 조방을 폐위하고 새 황제를 옹립하는 것이 과연 조위에 대한 충성인가? 더군다나 그 조방도 고작 2년 뒤 사마씨를 상대로 저항하다가 폐위되는 운명을 맞는데, 이런 조방이 사마의의 꼭두각시라고 무조건 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게다가 사마씨 전횡에 대한 반발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해도 문제가 되는게, 사마씨 가문은 사마의 시대에는 독재 정권으로써의 모습을 크게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릉의 아들인 왕광 조차도 '지금 사마의가 하는 일은 전부 조상의 실책을 바로 잡는 것뿐이니 트집 잡을 구석이 없다'고 말했고,실제로 이후 '사마 형제에 대한 항거'를 전면에 내세운 관구검/문흠 역시 사마사에 대해 탄핵할 때 사마의만큼은 건드리지 않았고, 사마사가 위나라에 충성한 제 아비의 뜻을 거스르고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조위에 대한 충성 여부와는 별개로 사마의와 그 자식들에 대한 적의가 수면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고평릉 사변(조상 주살) 때문인데, 확실히 이후 사마씨와 다투다 죽은 사람 대부분은 이때 죽은 자들과 연이 있지만 정작 왕릉은 그 조상과 딱히 이렇다 할 친분도 없었고 오히려 이런저런 기록들을 봤을 때 그는 사마의 파벌이라고 봐도 무방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왕릉이 난을 일으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모의에 가담한 영호우는 확실히 조상과 연이 있다.
사마의가 왕릉과 아들들에 대해 물었을 때 그들을 높이 평가했던 장제가 자신 때문에 왕릉 일가가 해를 입게 되었다고 탄식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사마의 쪽에서 왕릉을 견제한 것이고 왕릉은 선수를 쳤을 뿐인 걸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모반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 두 사람이 만났을 때의 분위기도 뭔가 좀 미묘하다. 왕릉은 잘못을 인정하는 건지 변명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태도로 횡설수설하며 정에 호소하려 하는 반면, 사마의는 그저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어쨌거나 위략에 실려있는 사마의에게 보내는 왕릉의 편지를 보면,
소인, 어느새 신군(神軍)이 비밀리에 출병해 백척 앞에 당도했다는 말을 듣고 명이 다했음을 깨달았으니, 잠시 접견이 지체될 뿐 결국 머리와 몸이 떨어질 터이나 이를 한스러이 여기진 않겠습니다. 몇 차례 사자를 보내 서신을 전했으나 그 회답이 오지 않았는데, 발꿈치를 들고 서쪽만 바라본 이 마음 비할 데가 없습니다.
저번에 사자에게 서신을 쥐어 보낸 후,배를 타고 멀리까지 나와 밤에는 돌을 쌓아 숙영하고 낮에는 포구에 나와 하염없이 사면 받기만을 바라길 스무날 하고도 사흘, 돌아온 서신이 전한 명령을 듣고나자 너무나 놀라고 당혹스러워 오장이 녹아 내리니 대체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알 겨를 조차 없습니다.
이 못난 종은 황송하게도 조정의 은혜를 입었으나 오랜 노력에도 해낸 것은 없고,군마를 돌보고 동하 일대를 감독하며 크고 작은 과실과 실패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 마음은 의를 저버렸으니 그 죄가 삼백가지요,이제 처자식과 함께 이렇게 스스로를 결박했으니 무슨 궁색한 바램이 있겠습니까.
비록 하늘과 땅을 덮을 만큼 큰 성은을 바랄 마음은 추호도 없사오나 무엄하게도 살아남아 해와 달을 다시 볼 수 있기만을 조심스레 희망할 뿐입니다.
죽은 조카 영호우가 사람들을 홀리는 말을 퍼트릴 때 이 종놈은 즉시 엄히 꾸짖었으나 부득이 그 말이 퍼짐을 억누르지 못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사실을 알게되고 천지신명이 꿰뚫어 보셨으니 이 못난 놈은 더이상 감출 수 없어 털끝 하나 빠짐없이 드러내는 바,이는 제 죄가 죽어 마땅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를 낳으신 분은 부모이나 나를 살리실 분은 당신 뿐입니다(生我者父母,活我者子也).
저번에 사자에게 서신을 쥐어 보낸 후,배를 타고 멀리까지 나와 밤에는 돌을 쌓아 숙영하고 낮에는 포구에 나와 하염없이 사면 받기만을 바라길 스무날 하고도 사흘, 돌아온 서신이 전한 명령을 듣고나자 너무나 놀라고 당혹스러워 오장이 녹아 내리니 대체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알 겨를 조차 없습니다.
이 못난 종은 황송하게도 조정의 은혜를 입었으나 오랜 노력에도 해낸 것은 없고,군마를 돌보고 동하 일대를 감독하며 크고 작은 과실과 실패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 마음은 의를 저버렸으니 그 죄가 삼백가지요,이제 처자식과 함께 이렇게 스스로를 결박했으니 무슨 궁색한 바램이 있겠습니까.
비록 하늘과 땅을 덮을 만큼 큰 성은을 바랄 마음은 추호도 없사오나 무엄하게도 살아남아 해와 달을 다시 볼 수 있기만을 조심스레 희망할 뿐입니다.
죽은 조카 영호우가 사람들을 홀리는 말을 퍼트릴 때 이 종놈은 즉시 엄히 꾸짖었으나 부득이 그 말이 퍼짐을 억누르지 못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사실을 알게되고 천지신명이 꿰뚫어 보셨으니 이 못난 놈은 더이상 감출 수 없어 털끝 하나 빠짐없이 드러내는 바,이는 제 죄가 죽어 마땅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를 낳으신 분은 부모이나 나를 살리실 분은 당신 뿐입니다(生我者父母,活我者子也).
이 문구는 관중의 명언인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이나,나를 알아준 자는 포숙아)를 살짝 바꾼 내용이다. 사실 사마의와 왕릉의 우정이 왕릉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고 실제로 수많은 정황증거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일단 왕릉은 사마의의 형인 사마랑과 굉장히 교우가 깊었고 사마 형제와 비슷한 시기 승상부 소속 주부로 활동했는데, 사마랑/사마의/왕릉은 조조가 손권을 정벌하러 갔을때 가규가 목숨 걸고 간언하자 그와 뜻을 같이한 세 명의 동료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4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친구이자 동료라는 얘기. 또한 왕릉은 역시 승상 주부시절 부터의 오랜 동지이자 고평릉 사변의 일등 공신인 장제의 후임 태위이기도 하다. 마지막 순간 비극적으로 틀어지고 만 장제의 후임으로 사마의가 왕릉을 밀어줬다는 것은 그가 왕릉을 장제와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신임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왕릉에게까지 배신당하고 난 뒤 사마의가 태위에 앉힌 인물은 자신의 동생인 사마부 임을 감안하면 왕릉을 마지막으로 사마의는 더 이상 친구조차도 믿기를 거부할 정도로 그의 배신에 충격을 받은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왕릉의 혐의가 드러난 뒤에도, 사마의는 평소의 그 답지 않게 단호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왕릉 쪽에서 먼저 자결한 뒤에야 피의 응징[7]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이 관포지교 드립 이면에 숨은 의도인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중과 포숙아가 속했던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제 희공의 세 아들 중 관중은 둘째 규, 포숙아는 셋째 소백의 스승이었다. 두 사람 사이 계승 경쟁이 벌어졌을 때,관중은 규를 위해 소백을 제거하고자 화살을 쏘았지만 화살은 빗맞았고 결국 계승자는 소백이 되었으며,이후 소백이 규 세력을 숙청할 때 당연히 규는 주살 당했지만 소백을 죽이려한 당사자 관중은 포숙아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즉 여기서 왕릉이 자신을 관중에, 사마의를 포숙아에 대입한 것은 '내가 비록 조방을 폐하고 조표를 옹립하려 했지만 딱히 널 어쩌려 한 건 아니니, 조표는 죽이더라도 나는 살려주면 안 되겠니?' 라는 메세지가 담겨 있는 셈이다.
당연히 조표 옹립 기도의 실제 중심 인물이 왕릉이 책임 전가했듯 그의 조카인 영호우라 할지라도 그는 이미 죽었고, 그 이후 아들인 왕광의 반대까지 꺾어가며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등 이 난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주체는 결국 왕릉이었다. 그런데 멀쩡히 지내던 조표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 왕릉 본인이, 그 조표를 희생양으로 써서 자기만 살아남고자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왕릉이 정말 최후의 순간까지 사마의가 자신을 살려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엔 가규의 묘 앞에서 자신이 위나라의 충신이라 외치는 장면을 보면 정말 죄가 없었던 건가 싶기도 하다.
2.2. 복권
여담으로 사마염 즉위 후, 왕릉은 등애와 함께 복권되었다. 등애야 명명백백한 누명이었다지만 왕릉은 과연 죄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고평릉 사변 이후 사마의의 견제를 견디다 못해서 난을 저지른 것인지는 알 수 없다.왕릉의 복권은 진 개국 당시 (아마도 번건의 제안으로 인해) 등애와 함께 나란히 그 후손들의 죄가 사면받음으로써 이루어졌다. 일단 조서의 논리 자체는 '둘 다 죄는 지었지만 순순히 오라를 받았으니 안 그런 놈들(관구검/문흠/제갈탄) 보다는 낫다'는 것이었지만, 사실 아무리 봐도 이건 '그래,걔들은 잘못 없고 우리가 잘못했다'고 공식적으로 말할 수 없는 입장에서 댄 핑계고, 실제로는 두 사람의 무고를 인정했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일단 당초 발안자인 번건부터가 등애의 결백을 역설하고 있었다.
등애야 뭐 다른 기록을 봐도 무고가 명명백백하지만, 문제는 왕릉이다. 위서에는 분명 조표, 영호우, 왕광 등과 함께 그가 조방 폐위의 역모를 꾸몄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왕릉의 죄는 실제로 무겁지만 어쨌든 사면해 줬다' 혹은 '왕릉의 죄도 사실 날조고,다만 사마씨가 깊게 얽혀있기 때문에 진수가 기록을 조작했다'는 두가지 추측을 할 수 있다.
사실 왕릉의 케이스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사안이었다. 왕릉의 모반 대상이었던 조방을 끝내 폐위 시킨 것이 사마씨 자신들이라, 진 건국 시점에 와서는 그 행위를 대역무도로 규정하기에 애매했다. 또한 사마의가 정말로 왕릉과 친했고 그를 끝내 죽음으로 몰아간 것에 약간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던 게 사실이라면, 그 후손인 사마염이 제 할아버지의 넋을 위로하는 의미에서라도 이런 제스쳐를 취했을 가능성이 있다.
후자의 근거는 왕릉의 난이 끝난 뒤 사마씨가 조표의 아들인 조가에게 행한 처우였다. 왕릉이 옹립하려 했던 조표는 당연히 죽음을 맞았고 그를 올바르게 보좌하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그의 관속들까지 모두 주살되었는데, 다만 아내와 아들인 조가는(어쨌든 왕족이니) 목숨만은 살려두고 서인으로 폐해졌다. 조가는 조모가 즉위하자 상산진정왕으로 복권된다.
당시는 아직 왕릉의 난으로 부터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으로, 아무리 조방이 폐위되었다고는 하나 조모는 훨씬 훗날의 사마씨마냥 이렇게 남 일 다루듯 처리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사마씨가 조모를 시해한 일은 오랫동안 비판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모는 즉위 초부터 이런 행동을 강행했는데, 이 사건 배후에 있는 석연찮은 사마씨의 냄새를 감지하고 일부러 그들을 자극해 봤을 가능성이 있다.
3. 미디어 믹스
3.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100만인의 삼국지 |
삼국지 12, 13, 14 |
삼국지 8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모든 능력치가 60~70대를 오가는 밸런스형 무장에 정치력이 80대 초반이다. 인재가 드문 후반부 시나리오에서는 괜찮은 인재에 속하나 특기나 적성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실제 역사에서 본인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위나라 시절에는 인재가 너무 많아서 왕릉의 존재는 매우 미미하지만, 초기 시나리오에서는 진양에 재야로 있는데 마침 그곳의 군주인 장양이 인재난이 매우 심각하다. 특히 198년 여포토벌전 시나리오 때 장양과 휴고, 양추 단 세 명만 있고 휴고, 양추도 많이 상태가 좋지 않은 무장들이다 보니 그런 장양에게 왕릉은 대체불가급 존재로서 그 위상이 격상된다. 마침 수명도 길다 보니 그 존재감은 더욱더 올라간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0/무력 61/지력 72/정치력 83이며 병법으로는 분전, 돌파, 충차, 혼란, 덫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3/무력 61/지력 71/정치력 84/매력 75에 특기는 기술, 치안, 돌격, 은밀, 반목, 유인, 명사. 총 7개다. 정치력이 가장 높지만 막상 정치력 의존 특기가 하나도 없는 것은 좀 아쉽다. 여담으로 일러스트는 무슨 무관처럼 나와서 능력치랑 괴리가 있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매 순으로 74/64/70/82/71에 적성은 창병과 노병이 A로 나쁘지 않지만 특기가 없다.
군웅할거 때 등장하는데 사망년도가 역사대로 251년으로 지정되어있어 성장 가능성은 매우 높다. 게다가 부자연사이니 전사나 참수가 아닌 이상 사망연도보다 오래 사는데 같은 사망연도의 자연사 사마의보다 더 오래 산다. 왕릉이 가장 활약하는 때는 바로 플레이어가 군웅할거의 장양을 골랐을 때다. 사마의와 상성도 가깝고 수명도 길어 낙양 이주 플레이할 시 사마의와 함께 장양 세력의 미래를 담당하여 육성을 밀어줄만한 인재다. 등장연도가 사망연도인 장양은 적당히 굴리다가 사마의와 왕릉, 가규를 중심으로 세대교체하게 된다. 다만 인재가 넘쳐나는 다른 군주나 영웅집결 같이 수명이 없는 시나리오에서는 정치력만 쓸 만한 무특기 장수가 된다.
삼국지 12에서의 일러스트는 오른손에 도검을 든 채 소리치면서 돌격하고 있다. 젊었을 때는 크게 활약이 없으면서 노년에 활약을 한 인물인데 일러스트가 지나치게 젊게 나왔다. 전법은 역시 쓰레기인 속공.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74/64/71/82이며 특기는 상업 3, 설파 3. 전수특기는 상업으로 전법은 방어강화.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4, 무력 64, 지력 71, 정치 83, 매력 73으로 전작과 달리 정치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일심, 혈로, 진흥, 모집, 경솔, 주의는 패도, 정책은 학익강화 Lv 4, 진형은 어린, 안행, 학익, 추행, 전법은 제사, 화시, 경파, 교란, 친애무장은 가규, 곽회, 사마랑, 영호우, 왕창, 혐오무장은 만총이다.
3.2.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사마의전에서 스토리에서 어느 정도 비중이 있으며, 석정 전투에서는 우군, 사마의전 최후의 전투인 왕릉 진압전에서는 적으로 등장한다. 병과는 중기병으로 회심 대사는 하하하, 간지럽구나., 퇴각 대사는 아뿔싸!
사마의와 진군이 조비의 황제 즉위 직후에 법령에 대해 논의할 때 사마의를 불러 대화를 나누는데, 연주자사로 부임한 소식을 알리면서 사마의의 형이자 친구인 사마랑의 묘에 가서 함께 참배한다.
석정 전투에 참전해 조휴와 함께 선봉군에 종군했고 사마의가 후군에서 부도독으로 종군하면서 적이 매복하기 좋은 지형이라면서 정찰대를 보내야 한다는 의견을 보냈는데, 조휴가 듣지 않으려고 하자 왕릉은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면서 정찰대를 보내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조휴는 함부로 나섰다가 매복에 걸린다. 매복에 걸려 조휴로 인해 함께 선봉으로 편성된 사마의의 아들 사마사, 사마소도 위험에 빠지자 왕릉은 그 둘을 보호해 무사히 빠져나가도록 한다.
조휴가 패배로 인한 울화로 죽으면서 사마의가 패배에 대해 사죄하는 것을 보고 조진이 처형해야 한다고 하자 왕릉은 사마의가 매복을 대비할 것을 간언했지만, 조휴가 이를 듣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면서 사마의를 변호했다. 조예 사후 오군이 번성을 공격하자 사마의가 주연을 상대하는 동안 왕릉은 작피에서 오군과 싸웠는데, 조상이 사마의의 대항마로 포섭하기 위해 이 때의 공으로 표기장군에 임명된다.
이후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 일파를 죽이고 사자를 보내 자신을 태위로 임명하자 파견된 사자를 죽이고 사마의 타도를 내걸고 군사를 일으키기로 한다. 그러나 부하인 양강이 사마의에게 밀고했음을 알고 사마의가 기동력으로 승부를 볼 것이라 파악하면서 수비를 준비하고 아들 왕광, 왕비효, 왕금호와 함께 사마의의 군사와 맞서 싸운다. 그러나 사마의에게 패해 사로잡히고 낙양으로 압송하려 하자 독약을 먹고 자결한다.
3.3.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 6에서 시리즈 처음으로 '왕릉의 난'이 구현되었다. 위에도 쓰여있듯 정사에만 나오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전용 전투 테마까지 있는 의외의 사례. 다만 이는 왕릉때문에 그런게 아니라 이 전투가 사마의의 마지막 활약이라 그렇다. 그리고 왕릉의 난이지만 적으로서의 비중은 왕릉보다 제갈각이 더 크다.3.4. 삼국전투기
콧수염에 단정한 머리모양을 한 정치인스러워 보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기반 패러디는 불명.[8] 신성 전투 (2)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작피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당시 정동장군으로 작피로 쳐들어온 전종을 상대로 맞섰다. 처음에는 이런 녀석들을 상대로 지금까지 합비에서 이겨왔던 거냐고 경악을 금치 못하며 시종일관 밀리지만, 전종의 분위기를 보고 바로 제방을 무너뜨려 합비에서의 지원을 막아내려고 한다는 것을 읽어내었고 이에 제방만큼은 사수에 성공, 합비에서 지원을 받는 데 성공한다. 이후 지원군으로 온 손례의 도움을 받아 작피에서 오군을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지만, 막판에 장휴, 고승에게 막혀 주춤하는 사이 전서에게 역습을 당하면서 찝찝한 승리로 작피 전투를 마무리하게 된다.[9]
신성 전투 편에서는 고평릉 사변 이후 친구 사마의가 실권을 잡으며 왕릉 본인도 태위로 승진했지만 내심 사마의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졌기에 떨떠름해했다고 묘사된다. 이 상황에서 왕릉은 영호우의 꾀임에 넘어가 아들 왕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초왕 조표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짜게 된다. 그런데 그래 놓고 정작 작전을 제안한 영호우가 조표에게 보낸 사신이 돌아오기도 전에 죽어버리자 어이없어하기도 했다.
250년 기준 회남 지방의 실질적 1인자였다고 언급되기도 했다. 3인자인 여강태수 문흠과는 사이가 나빴다고 언급되며, 왕릉 본인은 문흠을 보고 저열하고 잔인한 놈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왕릉은 영호우가 사망했음에도 아직도 야망을 버리지 못했고, 왕창이 오군을 상대로 승리한 이듬해 오군이 도수 근처에서 깔짝대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오군을 핑계로 거병을 꾀했다. 거병이 허가되면 그대로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이었지만 당연히 불허됐고[10] 왕릉은 괜히 다급해져 여기저기 도움을 청하고 다니다가 결국 그 속내를 사마의에게 들키게 되었고, 이에 사마의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당연히 거부되고 정 죽일 거라면 관뚜껑에 박을 못이나 주고 죽이라고 말했다. 이에 사마의가 못을 던지는 것으로 대답하자 마지막 자존심까지 바닥에 떨어진 왕릉은 자살하였고, 그의 삼족은 멸됐다고 묘사된다.[11]
[1] 생몰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사마의보다 나이가 많으며, 이 시대를 산 사람 치고는 매우매우 장수한 편이다. 반란에 연루돼 피치 못하게 자살하지만 않았어도 더 살았을 것이다. 172년생이면 조운의 또래이며 노숙과 동갑인 삼국지 1세대다.[2] 現 산서성 진중시의 일부[3] 배송지는 이 일이 이전 사서에는 안 보이고 습착치의 책에서만 보이며 말이 옛말과 같지 않으니 습착치가 지어낸게 아닌가 의심하지만 《자치통감》에는 이 대화가 그대로 기재되어 있어 《한진춘추》를 따른다.[4] 이때 가규의 무덤을 지나던 도중에 "가양도(가규)! 나 왕릉이 대(大) 위나라의 충신임을, 그대의 신령이 있다면 잘 알 것이오!"라고 외치고 짐독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5] 원혼지에는 사마의가 제위를 찬탈하려는 행적이 뚜렷해지자, 왕릉이 난을 일으켜서 죽었는데 후일 병이 든 사마의에게 왕릉이 가규의 귀신과 함께 앙화를 끼치는 것을 보았다. 사마의는 "언운 나를 놔주게"라고 말했고 온 몸에 매맞은 자국이 생겼으며 며칠안에 죽었다고 한다.[6] 사마의의 이러한 말에 왕릉은 "무슨 소리인가 중달, 자네도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우리 같이 저 세상에서 회포나 푸세나." 라고 무덤덤하게 대꾸한 뒤에 사마의를 잡아 끌고 갔다고 한다.[7] 자치통감에 따르면 사마의는 왕릉의 반란이 미수에 그치자 수춘에서 대량으로 사람을 죽였다.[8] 스타워즈의 두쿠 백작이라는 견해가 있다. 늘그막에 야욕을 부리다 골로 가는 공통점[9] 이 때문에 죽은 장료에게서 오군한테 처밟히고 그렇게 해선 안 된다며 까이는 컷이 1컷 지나간다.[10] 사마의는 동쪽 끝인 도수에서 오군이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합비를 뚫지 않으면 오군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며 거부했다.[11] 다만 나중에 사마의에게 복수하는 건 성공했는데, 가규와 함께 나타나서 사마의의 꿈에 나타나서 그를 괴롭혀대어서 죽게 만드는 데 일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