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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의 행정체계 | |||
주나라 | 진나라 | 한나라 | 수나라 |
봉건제 | 군현제 | 군국제 | 주현제 |
郡 고을 군 | 國 나라 국 | 制 지을 제 |
중국어 | [ruby(郡, ruby=jùn)][ruby(国, ruby=guó)][ruby(制, ruby=zhì)] [쥔궈즈] | |
일본어 | [ruby(郡, ruby=くん)][ruby(国, ruby=こく)][ruby(制, ruby=せい)] [쿤코쿠세이] |
1. 개요
郡國制
전한 초기의 제도로, 군현제와 봉건제의 특성이 섞여 있는 제도. 한무제 이후 군국제가 폐지되고 군현제가 확립되었다고 하며, 엄밀히 말해 형식적으로는 군국제가 이후로도 유지되긴 했으므로[1] 사실 중국의 군주정이 폐지되는 신해혁명까지 군국제는 명목상 계속 남아 있었다. 다만 전국시대~초한쟁패기~전한초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찾아볼 수 있는 봉건제적 요소는 거의 유명무실해졌으므로 한무제 이후로는 사실상 군현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어차피 군국제나 군현제 모두, 당대에 그런 제도가 있었던 게 아니라 후대에 그 시대의 특징을 감안해 붙인 명칭이다.
2. 역사
2.1. 시행
진나라가 멸망하고 초한전쟁을 거쳐서 성립된 전한은 통치 제도를 정비해야 했다.그러나, 진에서 시행한 군현제는 가혹한 통치의 상징과 같이 여겨져 진나라가 망하자마자 도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고, 진나라에 멸망했던 옛 전국시대 여러 나라들을 초한전쟁 때 재건했는데 이 왕국들이 전한 초기에도 섬기는 천자만 한나라로 바꾼 채 중국 각지에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군현제를 통해 중국대륙을 지배하려면 필연적으로 거대 규모의 지방 통치 조직이 필요하므로 막대한 비용이 발생되었다. 또 그런 비용을 부담하려면 백성을 수탈해야 하니 그야말로 악순환이었다. 수많은 열국이 다퉜던 전국시대, 통일 진나라의 가혹한 부역, 초한전쟁에서 항우의 학살과 파괴와 그에 맞서기 위한 한고조의 관중 징발이 숨 쉴 틈도 없이 이어지면서 당시 중국의 경제 상황은 굉장히 열악했다. 아예 장수들까지 말이 아니라 소를 타고 다녀야 했을 정도로.. 그러니 이제 막 중원을 제패하고 성립된 전한이 본격적으로 군현제를 시행하기는 어려웠던 갓이다. 또한 많은 수의 공신도 있었기에 이들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봉국을 할당해줘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그 때문에 군현제와 봉건제를 적당히 혼합한 군국제를 시행하게 된 것이다. 수도 장안과 주요한 핵심 지역, 즉 전국시대 기준으로 하면 관중, 파촉, 농서 등 옛 진나라 영토 전체에, 한(韓)나라의 상당•하동 지역, 위나라의 하동•하내 지역, 조나라의 상당 지역, 초나라의 언영•남양 지역은 황제의 직할 통치령으로 삼아 군현제를 실시하고, 상대적으로 거리가 떨어진 동쪽 지역은 제후국으로 만들어 황제가 봉건한 왕이 각자의 군대를 가지고 반독립 상태로 다스리도록 했다. 이로 인해 초한전쟁 때 복원된 왕국들 및 한신, 영포, 팽월, 오예, 노관, 한왕 신, 장오 등 공신들이 책봉된 왕국이 각지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한고조와 여후 치세 동안 유력하고 위험한 공신들은 하나하나 숙청당했고, 이후 왕이 책봉되는 국(國)은 유씨 황족만 임명될 수 있는 것으로 관례화 됐다. 황족인 유씨만이 왕으로 책봉될 수 있다는 제한 조건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군국제의 뼈대 자체는 계속 유지됐다.
참고로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군국제라는 것은 후대에 한나라 초기의 지방 통치 형태를 분석해서 군국제라는 이름으로 정리한 것이지 실제로 당시에 제도로서 군국제란 게 있진 않았다.[2] 한나라와 여러 제후국들의 상황은 얼핏 보기엔 전국시대에 열국들이 존재하던 상황의 재현이었으나, 그래도 역시 다르긴 했다.
그냥 찝어서 말하자면 전국 시대 종횡가들이 떠들던 이상적인 연횡의 형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전국시대에 연횡론을 주창하던 변사들은 '진나라가 큰 형님이 되고 다른 나라들이 진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면 다들 평화롭게 일신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 말을 진짜로 믿은 자들은 당대에 아무도 없었고, 애초에 진나라도 이런 주장을 믿지 않았다. 그건 그냥 다른 열국들이 합종하면 곤란해지는 진나라를 위한 합종 파훼용 속임수였고, 진나라는 나머지 모든 열국을 멸망시키려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었으며 이런 사정은 다른 열국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나라 또한 다른 열국들 위에 설 수 있는 이념적 권위는 전혀 없었으니, 실제로 전국 시대에 실천된 연횡론은 잠깐 눈앞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진나라 외 나라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한편 이 군국제는 중앙정부격인 한나라 직할령의 종주국으로서의 권위가 확고했고, 실력도 그에 맞먹는 수준으로 뒷받침해줬음이 전국 시대에 실천된 연횡론과 궁극적으로 다르다. 우선 이성왕들이 잔뜩 있던 서주와는 달리 한나라는 이성왕은 초기에나 존재했지 이후에는 동성왕으로 대체되었고, 무엇보다 한나라 중앙 정부의 영토와 인민은 다른 육국들을 힘으로 무너뜨리기 시작하던 진시황 통치 초기 진나라보다도 넓고 많았다. 굳이 진시황 정복 사업 초기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한 황실의 직할령은 진시황 통치 초기의 진(秦) + 조(趙) 남부 절반 및 서북부 상당군 + 초(楚) 서북부 + 한(韓) + 위(魏)였다. 다른 제후국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강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군국제를 썼다고 해도 서한이 주나라처럼 망할 상황은 아니었다. [3]
2.2. 군국제의 상세
왕들이 거의 전부 유씨이니 군현제와 별 차이 없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군국제는 그냥 명목상으로만 나눠 놓은 것은 아니고 실제 내부 법리적으로는 제후국은 '다른 나라'로 여겨졌으며 상당히 높은 수준의 자치권이 있었다. 황제가 봉국의 감찰과 제어를 위해 승상과 신하들을 파견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신하는 왕이 직접 뽑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봉국 내에서는 왕이 직접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법적으로도 제후 봉국의 국민은 한나라에서는 '다른 나라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허가 없이 '국경'을 넘거나 '타국' 사람을 꼬드겨 데리고 나간 일로 간첩 혐의를 받아 중형을 받은 사례를 담은 목간이 많이 남아 있다.제후국의 영지 또한 전국시대의 강국 수준은 아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있는 크기는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열후들을 약화시키는 정책이 추진돼 영지가 계속 축소되긴 했지만, 그래도 오초칠국의 난 당시 오왕 유비의 봉국인 오나라는 양쯔강 하류의 광활한 평야지대에 봉지는 무려 3군(郡) 53성(城)에 다다랐다. 농업, 소금 생산력이 매우 높아 인구가 밀집되어 상업이 발전했다. 또한 광물자원 풍부하여 자체적으로 병기 및 구리 생산도 가능했던 지역이었다. 이로 인해 중앙 본국인 한나라에서 부과된 세금을 최소화하거나 회피하면서 세금 징수와 행정기구 운영을 자체적으로 시행하였다. 이렇게 중앙의 간섭 없이 독자적인 체제를 구축하여 오초칠국의 난이 발생하기 전 한나라 제후국 중 가장 강력하고 본국도 압박 가능한 국가였다.
2.3. 군국제의 쇠퇴
군국제 체제에서 가장 강력했던 제후국인 오나라를 필두로 한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면서 군국제의 모순이 대두됐다. 봉건제와 마찬가지로 유력하게 힘을 쌓은 제후왕이 중앙정부의 황제에게 반기를 들 위험성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나마 춘추전국시대 같이 천자와 혈통이 다른 제후왕들은 반란을 일으켜도 목표(?)가 역성혁명이라는 엄청난 것이기에 성공 확률이 낮았지만, 한나라 같은 경우는 제후왕들도 같은 유씨 황족이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켜 성공해도 그저 황제가 교체되는 것뿐이기에 위험도나 거부감도 적었다. 실제 한문제가 이러한 반란(?)에 성공한 장본인이기도 하고. 세력이 작다고 해도, 군현제면 그냥 중앙정부에서 옥리 하나를 보내 체포해서 심문하면 그만이지만 모반자가 봉국의 왕이라면 그렇게 간단히 해결할 순 없다. 중앙정부 안에서 내통자를 얻을 수 있다면 또 어찌될지는 모르는 것이다.그리하여 급기야, 오초칠국의 난으로 군국제의 모순이 폭발했다. 결국 난은 진압됐고, 이 반란으로 제후왕들은 완전히 실권을 상실했다. 한무제 시기에 제후국들의 위협을 줄이기 위하여 영지를 축소하거나 장남 이하 아들들한테 분할 상속시키고 각종 트집을 잡아서 나라를 몰수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제후국이 너무 작아져서 중앙정부의 황제에게 대들기 힘들어진 것이다. 이후 계속 줄이고 줄여 결국 제후국의 영역은 1개 군에 한정되었다. 그리고 제후왕이 신하를 뽑을 수 있는 권한을 없애고, 황제가 직접 제후국의 신하도 임명하게 되면서 이름만 국(國)일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직할지인 군(郡)과 아무 차이도 없게 되어 유명무실한 제도가 되었다.
2.4. 흔적만 남은 군국제
다만, 군국제가 유명무실화된 이후에도, 황제의 아들과 그 직계 자손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는 형식만은 남았다. 제후를 봉하는 것은 주나라 때부터 이어진 천자의 권위를 드러내는 의식이었으므로 이 형식을 없앨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작위로서의 왕'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4]물론 중국의 역사 내내 같은 형태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오랜 중국 역사 동안 제후왕들의 권력은 커지기도 했고 작아지기도 했다. 잘 알려진 사례로 조비가 건국한 위나라는 황족들의 권력을 크게 제한하는 바람에 결국 사마의 일족의 대두를 막지 못했고, 반대로 서진은 황족들의 권력을 너무 강화했다가 팔왕의 난을 터뜨리고 나라를 말아먹기도 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정착한 형태는 왕의 지위는 인정하되 그냥 작위만 주는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명 연왕 주체처럼 이들 왕들의 반란은 있었다.[5]
중앙집권국가의 상징과도 같은 군현제는 계속 이어졌으며 봉건제는 형식적으로만 유지되었다.
한편 한국사에서는 비슷한 사례가 거의 없다. 한국의 왕조들이 중국을 보면서 주로 참조한 건 군현제지 군국제는 아니었기 때문. 물론 고구려는 옛 낙랑 지역을 처음에는 수십 년 동안 자치권을 주었다가 점차적으로 자치를 박탈해가며 직할령화했고, 백제는 옛 마한 일대에 그러한 정책을 실시했으며 신라 또한 진한 일대에 그랬다. 신라의 경우 방계 왕족을 갈문왕으로 봉하기도 했다. 다만 지배 양태를 보면 군수 혹은 현령 이하는 현지 지배층을 기용했던 한나라의 변군 지배 형태와 비슷하지, 군국제와는 별로 공통점이 없다. 신라의 6부와 갈문왕은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으로 임명되는 것인지 아직 합의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한편, 고려와 신라의 향소부곡 및 속현 등은 얼핏 보면 비슷하지만, 변군은 그나마 거둬가는 세금이라도 적기라도 했지, 속현은 가끔씩 주현보다도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했던 데다 속현인은 주현인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 이렇듯 범주가 다르니, 군국제와는 비교가 어렵다.
[1] 얼마 안 되는 봉지로 '왕부'를 열게 하는 등... 하지만 이는 영토 지배권이 아니라 그냥 호화로운 별장 하나 떼어주고 돈 두둑히 줄테니까 정치일선에 나오지 말라는 것과도 같았다.[2] 많은 역사 용어도 마찬가지. 예를 들어 실학은 당시에 실제로 있던 학문의 이름이 아니라 후대에 당시 학문의 일정한 흐름을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한 것이다. 유가와 묵가 양 현학을 제외한 도가, 법가, 병가, 종횡가, 음양가 등 제자백가도 후대에 이름붙인 것.[3] 제후국들이 전부 다 뭉쳐서 반란을 일으킨다 해도 승산은 적은 상황이었고 이는 오초칠국의 난이 실패하며 입증된다.[4] 이는 타국의 왕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는지 명나라에서 조선 왕의 지위는 명나라 친왕과 거의 동격이었다. 이등체강 문서 참조[5] 명조에선 각 지역의 왕이 군대를 보유해 해당 지역을 방어할 수 있었다. 만력제의 아들이던 복왕 주상순의 경우엔 분봉 받은 낙양 일대의 세금징수권을 갖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