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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 ~ 기원전 182년 |
이름 | 장오(張敖) |
왕 작위 | 조왕(趙王) |
후작 작위 | 선평후(宣平侯) |
1. 개요
중국 초한쟁패기와 전한 초기에 활약했던 인물. 상산왕 장이의 아들이다.2. 생애
아버지 장이는 진여(陳餘)와 함께 무신(武臣)을 꼬드겨 진승(陳勝)에게서 독립하게 하였다. 무신은 조왕(趙王)이 되었다. 진승은 그들을 건드려 아예 적이 되지 않기 위해 무신의 가족을 보호하고 장오를 성도군(成都郡)에 봉했다.거록대전 중 아버지 장이가 거록에서 오도가도 못할 때 북쪽에서 일만 명의 군졸을 조직하여 구원하려 했지만 진나라(秦) 군의 기세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 뭘 해볼 수도 없어 항우(項羽)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꼼짝도 못했다.
아버지 장이는 진승이 거병하기 전부터 진나라에서 가장 이름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장이는 항우에게 갈 수도 있었으나 유방에게 투신해 공을 세웠다. 초한전쟁 때 이미 고령이라 통일 즈음 사망하여 역모에 말려들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덕분에 아들 장오가 이 영광을 대신 받았다. 쟁쟁한 공신들 중에서도 장오가 서열 3위라는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버지 장이의 영향이다.[1] 장이는 조나라 왕의 자리에까지 올라 장오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한고제 유방(劉邦)의 장녀인 노원공주(魯元公主)와 결혼하여 그야말로 순풍에 돛을 단 듯 무탈하게 잘나가고 있었다. 백등산 포위전 때문에 흉노의 묵돌에게 마누라를 빼앗길 위기도 있었지만 자기 딸을 묵돌에게 주기 싫었던 장모님 덕에 부인을 지켰다.
BC 200년 유방이 조나라에 들렀을 때 문제가 터진다. 백등산 포위전에서 흉노의 묵돌에게 대패한 유방은 당시 기분이 매우 안 좋았을 것으로 추청된다. 장오는 장인어른 유방을 대접하면서 직접 팔을 걷어 올리고 음식 대접부터 모든 과정을 지극히 정성스럽게 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측실 조씨(趙氏)까지 진상했는데, 유방은 이 조씨를 총애해 이듬해에는 조씨에게서 아들 유장을 보기까지 한다. 하지만 천성이 무례한 유방은 기분까지 안 좋으니 의자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장오에게 욕을 하며 성질을 부렸다.
유방에게 장오는 그야말로 애송이 사위이지만 아버지 장이 때부터 장씨 일가를 모셨던 빈객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장이는 진나라가 천하통일 후 행방을 알 수 없자 천금의 상금을 걸었을 정도로 당대의 거물이었고, 장오가 뒤를 이은 후에도 여전히 장씨 일가를 모시던 빈객들은 나이가 60세가 넘도록 전란에서 살아남은 호걸들이었다. 상국 관고(貫高)와 조오(趙午) 등은 장오에게 "왕을 위하여 천자를 죽이겠다."라고 선언하였다. 혼이 빠질 정도로 놀란 장오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보이면서 말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당장 죽을 처지였던 우리를 황제께서 거둬주신 은혜를 잊고 그렇게 잘못된 말을 하는 것입니까?[2] 더욱이 우리 선조들이 망해 잃은 나라를 황제께서 찾아 주시어 그 덕이 자손들에게 전해지니 우리들의 털끝 하나까지 모두 황제의 덕에 힘입은 바입니다. 원컨대 여러분들은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하지 마십시오.
관고와 조오는 장오를 나약한 사람으로 여긴 것을 반성했으나 '유방 암살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유방이 기주 조국(趙國) 백인(柏人)현에서 묵으려다 지명이 박인(迫人)[3]과 유사하여 기분이 좋지 않다고 장소를 바꿔 암살 계획이 실패했다.
결국 정보가 유출돼 장오와 그 신하들이 단체로 역모죄 문초를 당하게 되었다. 황제 암살 음모라는 충격과 공포급 사건이므로 장오도 사형당할 확률이 높았다. 배신감에 펄펄 날뛰는 유방은 사위를 감싸는 여후의 애원에도 "그놈이 황제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 딸의 목숨이 대수겠냐?"라며 혐의만 확정되면 장오를 사형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고문을 받는 관고 등이 워낙 결사적으로 장오와의 관련을 부정하고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들이 저지른 일이다."라고 일관적으로 계속 주장했다. 달군 쇠꼬챙이로 허벅지를 뚫리면서도 말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자 유방도 마음이 흔들려 결국 장오를 조나라 왕에서 해임하는 것으로 사건을 끝낸다. 유방은 관고의 호걸스러움과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도 신의를 지키기 위해 장오를 팔아먹지 않은 기개를 높이 사 그의 책임을 더 이상 묻지 않고 석방했다. 관고는 내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죽지 않은 것은 조왕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함이었고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려고 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말한 후 자결했다. 관고 사건 이후로 유방은 반란자의 관련인에겐 나름대로 관대해져서 같이 따라서 반역하지 않으면 사면해주거나 때로는 상금을 주면서 회유하려 했다. 덕분에 진희와 노관의 반란 때 애꿎은 사람들이 엮여서 줄초상을 치르지 않을 수 있었다.
장오를 선평후(宣平侯)로 봉했다.
장오가 물러난 조왕(趙王) 자리는 척부인 소생의 유방의 서자 유여의가 물려받았으며, 유여의가 여후에게 짐독으로 암살당한 후 이복동생 유우(劉友)가 물려받았지만, 여후를 비방하다 암살되었다. 이후 양왕 유회(劉恢)가 물려받았지만 역시 수상쩍은 자살로 공석이 되었고, 공석이 된 조왕 자리는 여후의 조카 여록(呂祿)이 물려받았다가, 기원전 180년 여씨 천하가 끝난 후에 유우의 아들 유수(劉遂)가 물려받았다.
장언(張偃)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장오가 사망할 때는 나이가 어려 장오의 첩실 소생인 아들이 후에 봉해졌고 장언은 노왕(魯王)에 봉해졌다. 그 후 고황후 여씨가 죽고 여씨 일가의 제후왕은 물론이고 일족이 모조리 멸족당하는 와중에 목숨을 보전하는 데 성공했는데 여씨 일가이긴 해도 유방의 외손자인데다가 아버지가 공신에서도 높은 서열에 들었던 것이 감안됐다. 단 노왕 자격은 박탈당하고 남궁후(南宮侯)로 격하됐다.
[1] 장이는 워낙 명성이 높은 인물이라서 유방에게 투신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높은 자리를 받을 수 있었고 거기다 한신과 함께 강적 진여를 죽이고 조 및 대 땅을 평정하는 데도 일조했다.[2] 유방이 조나라와 연나라 땅을 취한 진여에게 동맹을 청하자 진여는 원수인 장이의 목을 요구했다. 유방은 장이와 닮은 죄수의 목을 보내 진여와 동맹을 맺었지만, 얼마 안 가 들통나서 진여와 적이 되었다. 장이를 살리고자 정형 전투씩이나 벌였던 셈이니 아들인 장오가 유방을 은인으로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3] 박(迫)이라는 한자가 핍박하다, 강제하다라는 뜻이 있다. 협박, 압박할 때 쓰이는 한자라서 뒤에 사람 인(人)의 글자와 합치면 사람을 핍박하다라는 뜻이니 불길해 보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