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A11><colcolor=#ece5b6> 전한 황제 고제의 후궁 척부인 | 戚夫人 | |
| 출생 | 기원전 224년? |
| 사망 | 기원전 194년 (향년 29~30세) |
| 주군 | 한고제 |
| 자녀 | 조왕 유여의 |
1. 개요
통일 왕조 한나라 초대 황제 유방(前漢高帝劉邦)의 후궁. 조왕 유여의(劉如意)의 친모. '부인'은 당시 전한의 후궁 품계로,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척희(戚姬)나 척씨(戚氏)라고도 불린다.친아들을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고제의 정실이자 정치적 숙적이었던 여후와 노골적으로 대립했다가 고제의 사후 여씨의 보복으로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참혹한 극형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척부인과 관련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 - 여태후본기 제9권(전문 링크)과 반고의 《한서》- 외척전 67상 고황후 여치(전문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 나오는 내용 외에는 대부분 야사다.2.1. 후궁 시절
고제가 한왕일 때 정도에서 만났다고 하며, 그대로 고제의 첩이 되었다. 고제는 원정을 갈 때마다 늘 척부인과 동행했고 이 외에도 척부인과 같이 노래를 짓거나 춤을 추면서 어울렸다는 기록이 많은 걸 보면 고제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1] 이후 고제가 전한의 황제가 되자 척부인도 후궁이 되었으며, 기원전 207년에 아들 유여의를 낳게 된다. 고제는 유여의를 볼 때마다 '이 아이는 나를 닮았다'며 좋아했다고 한다.기원전 197년 척부인은 자신의 아들 유여의를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고제에게 매일 밤마다 울면서 애원하는 등, 갖은 수를 썼다. 당시 황실에는 고제의 정실인 황후 여씨(여후) 소생의 적장자 유영이 있었는데, 본래 양갓집 규수였던 여후는 어린 나이에 건달 두목이던 고제와 혼인해 온갖 고생을 하며 남편과 그 가솔들을 내조한 조강지처였다. 그러나 팽성 대전 때 여후와 그녀 소생의 아들딸[2]까지 내버리고 도망가 척부인과 살림을 꾸렸을 정도로 아내에게 별다른 애정이 없었던 고제는 유영을 폐하고 유여의를 황태자로 삼으려고 한다.
당연하겠지만 나이 어린 후궁의 베갯머리송사로 멀쩡한 적자를 놔두고 정통성도 없는 서자를 황태자로 삼겠다는 고제의 주장에 신하들은 난리가 났다. 고제가 태자 교체에 대한 견해를 묻자 유학자 숙손통은 진나라의 여희와 호해의 선례를 들며 차라리 본인을 죽이라고 했고, 주창은 유여의를 태자로 삼는다면 군신 관계를 끊겠다며 고제와의 절연 선언을 했다.[3] 당시 대전 밖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여후는 나중에 주창에게 무릎까지 꿇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하니 그녀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태자 교체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무산됐으며, 고제는 한탄하고 척부인도 슬퍼했다고 한다. 이때 그가 부른 노래가 〈홍곡가(鴻鵠歌)〉로, 태자 유영이 장성하여 이를 막을 수 없다는 뜻을 봉황에 비유하며 부른 내용이다. 한편 남편에게 헌신한 젊은 시절을 보상받기는커녕 일개 후궁과 그 소생에게 뒷전으로 밀려나 심기가 불편했던 여후는 기어이 아들의 태자 자리까지 탐내며 자신의 권위에 멋모르고 도전한 척부인에게 무서운 복수심을 키워간다.
2.2. 몰락
기원전 195년에 고제가 승하하자 장안은 여후의 천하가 되어버렸는데 이것이 고제 외엔 별다른 보호막이 없던 척부인과 유여의 모자에게 비극의 시작이었다.아들은 왕인데 어미는 죄인이라네!
하루 종일 쌀을 찧으면, 죽는 것과 다를 바 없구나!
서로 삼천 리나 떨어져 있는데 누가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
子爲王,母爲虜!
終日舂,薄暮常與死相伍!
相離三千里,誰當使告汝!
(하략)
영항가(永巷歌)의 앞 부분. 한서(漢書) 97상 외척전 67상에서 발췌.
고제가 죽고 여후의 아들인 혜제가 즉위했다. 원래대로라면 조왕에 책봉된 유여의를 따라 조나라에 가야 했을 척부인은 여후의 명으로 태형을 받고 머리를 깎인 채 죄를 지은 궁녀들이 가는 영항(永巷)에 감금되어 쌀을 찧는 형벌을 받게 된다.[4] 그러자 척부인은 상기된 〈영항가(永巷歌)〉를 지어 노래하며, 마치 자신의 아들 유여의가 왕으로 있는 조나라에게 전해달라는 듯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이것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폭발한 여후는 "네년이 네 아들에게 기대어 살아남으려고 했구나"라고 말하며 척부인만큼은 절대 곱게 죽이지 않기로 결심한다.하루 종일 쌀을 찧으면, 죽는 것과 다를 바 없구나!
서로 삼천 리나 떨어져 있는데 누가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
子爲王,母爲虜!
終日舂,薄暮常與死相伍!
相離三千里,誰當使告汝!
(하략)
영항가(永巷歌)의 앞 부분. 한서(漢書) 97상 외척전 67상에서 발췌.
우선 여후는 척부인의 마지막 희망이자 비빌 언덕인 조왕 유여의를 죽이기 위해, 그에게 "장안으로 오라"는 송환 명령을 계속해서 내렸다. 하지만 고제의 명으로 유여의를 보필하던 주창이 병을 핑계로 소환을 거부하자, 여후는 주창부터 소환해 질책한 뒤,[5] 유여의의 보호 기반을 없애고 다시 명령을 내려 기어코 유여의를 장안으로 송환하는 데 성공한다. 친모의 음모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던 혜제는 배다른 동생이 독살당하는 것만은 막기 위해 매일같이 유여의의 곁에 붙어 다니며 그를 보호하려 노력했지만, 기원전 195년 12월 혜제가 잠시 사냥을 하러 간 사이 여후는 유여의를 독살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유여의의 나이는 고작 12살이었다.
유여의가 어려서 일찍 일어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으며, 혜제가 유여의를 보호한 기간도 1달이 채 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태후본기 및 일부 기록에는 유여의의 사망 일자를 기원전 194년 12월로 기록했는데 이 당시에는 진나라의 전욱력을 사용하여 정월이 10월이었으므로, 지금으로 따지면 193년 12월에 죽은 셈이다.
2.3. 최후
이후 여후는 마지막 남은 보호막마저 사라진 척부인에게 이제까지 내린 형벌들조차 매우 온건하고 과분하게 보일 정도로 유례없는 극형을 내린다.太后遂斷戚夫人手足,
태후가 마침내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去眼,煇耳,飲瘖藥,使居廁中,
눈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이고, 돼지우리에 기거하게 하니
命曰人彘。
이를 사람 돼지라 불렀다.
먼저 척부인의 손발을 자르고, 눈알을 파내(또는 불로 지져) 장님으로 만들고, 귀에 유황을 부어(혹은 연기를 쬐어) 고막을 태워 귀머거리로 만들고, 혀를 자르고, 벙어리가 되는 독약을 강제로 먹여 돼지우리[6]에서 돼지와 같이 인분을 먹으며 살게 만들었다.태후가 마침내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去眼,煇耳,飲瘖藥,使居廁中,
눈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이고, 돼지우리에 기거하게 하니
命曰人彘。
이를 사람 돼지라 불렀다.
사람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처참한 꼴이 된 척부인은 이윽고 인간돼지, 즉 인체(人彘)라 불리게 되었다. 당시에는 돼지를 표기한 한자로 돼지 체(彘)를 사용한 비율이 지금보다는 높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이 인체 사건으로 인해 돼지 체(彘)보다는 돼지 돈(豚)이나 돼지 저(豬)의 비율이 늘어나 이후 체(彘)는 90년 후의 순체의 이름, 200여 년 후의 고구려 동천왕의 아명에서나 겨우 보이고, 지금은 옥편 귀퉁이에서나 볼 수 있는 벽자가 되었다.[7]
게다가 한술 더 떠 여후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본인의 아들 혜제에게 척부인을 보여줬다. 척부인은 도저히 인간의 형태가 아니었기에 혜제는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랐지만, 곧 자신의 서모임을 알게 되자 큰 충격에 빠져 혼절했다. 여후가 혜제에게 왜 척부인의 모습을 보게 했는지 명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 뒤 척부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형벌의 내용 및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당연히 얼마 살지 못하고 곧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저 정도로 참혹한 꼴을 당하고도 혜제에게 보여질 때까지는 살아 있었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당시 환경 등을 고려하면 척부인은 인간 돼지가 되고 난 뒤 3~4일 후 죽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3. 평가
古代妇女对于命运走向不能自主把握,只能依附男性从而不可避免地卷入宫廷斗争中。戚夫人政治上的单纯与天真,是使其在复杂的宫廷斗争中惨败从而导致其悲剧命运的直接原因。
고대의 여자들은 운명이 흘러가는 방향을 자주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기에 남자에게 의존해야 했고, 그리하여 궁중의 투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척부인의 정치적인 단순함과 순진함은, 복잡했던 궁중 투쟁에서 참패하여 비극적인 운명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중국의 기자 레이위칭(雷雨晴)이 작성한 「한초 척부인 천론 (汉初戚夫人浅论)」[8]의 서론의 일부. 2013년 작성, 중학생 신문지에 투고.
고대의 여자들은 운명이 흘러가는 방향을 자주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기에 남자에게 의존해야 했고, 그리하여 궁중의 투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척부인의 정치적인 단순함과 순진함은, 복잡했던 궁중 투쟁에서 참패하여 비극적인 운명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중국의 기자 레이위칭(雷雨晴)이 작성한 「한초 척부인 천론 (汉初戚夫人浅论)」[8]의 서론의 일부. 2013년 작성, 중학생 신문지에 투고.
척부인은 중국사, 나아가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처참한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이로 인해 후대에 강한 동정과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여후의 잔혹성과 폭정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다만 이 비극을 인간 돼지형이라는 극단적 처벌 하나로만 이해하면 사건의 구조와 원인이 단순화될 위험이 있다. 척부인은 정치적 기반과 제도적 보호가 없는 후궁 신분에서 황제의 총애에 의존해 아들 유여의를 황위 계승자로 만들고자 했으며, 이는 당시 궁중의 권력 질서와 계승 구조 속에서 심각한 정치적 긴장을 초래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척부인과 여후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그 결과가 비극으로 이어졌다.
즉 인간 돼지 사건은 척부인이 처한 신분적·제도적 제약과 정치적 경험의 부족, 그리고 유방의 계승 질서 파괴, 여후의 지나친 정치적 보복이라는 결정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을 여후 개인의 치정에 의한 질투로 단순 환원 하거나, 사후적 동정 정서에 기반한 심리 추정 서사로 해석하는 것은 사건의 구조적 맥락을 축소시키는 접근에 가깝다. 아울러 본 문서에서 제시되는 조선·후한 등 타 왕조 사례는 체제 동일성을 전제한 비교가 아니라, 계승 정통성과 권력 질서 문제를 한국인 독자에게 보다 직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이해 보조적 예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해당 사례들은 사건 해석의 직접 근거라기보다, 당시 권력 구조와 계승 질서의 보편적 긴장을 설명하기 위한 보충적 비교 장치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3.1. 제도 설명
우선 여후와 유방·척부인의 정치적 갈등, 그리고 숙손통·주창·장량 등이 강경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이유, 유방 사후 여후가 척부인을 제거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중국의 계승 질서와 신분제적 위계 구조, 그리고 전한 초기의 정치 상황에 대한 선행 이해가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사건 경과 서술이 아니라, 감정적 선악 구도화나 인물의 심리·동기 중심 해석을 배제하고 제도와 권력 구조 속에서 각 행위의 정치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전제 작업이다. 특히 여후와 척부인에 대한 평가는 잔혹한 결말과 감정 서사에 치우쳐 소비되는 경향이 강하므로, 본 문단에서는 개인 간 감정이나 도덕적 평가보다 계승 원칙·후궁의 정치적 위상·외척 권력 문제 등 제도적 조건을 중심으로 갈등의 배경을 설명한다.- 고대 사회의 질서와 제도에 대한 이해
고대 사회의 질서와 규범, 정치 제도가 유동적이었다, 강제력이 낮았다, 제도화 수준이 낮았다는 평가는 권력 경쟁과 제도 변동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계승 원칙이나 위계질서 자체가 부재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국가 형성기일수록 시대를 불문하고 후계 분쟁이 체제 불안정으로 직결될 위험이 컸기 때문에, 정통성 확보와 계승 질서 유지에 대한 정치적 민감성은 더욱 강하게 작동하는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고대 시기의 초기 왕조의 계승 문제와 제도·법도를 무질서나 단순한 자유 경쟁 구도로 환원하는 해석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 정실과 측실의 위계질서
처첩 제도가 유지되던 사회에서 측실은 정실보다 명확히 낮은 지위에 속했으며, 측실이 정실이나 그 소생의 지위를 위협하는 행위는 질서 교란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군주가 특정 후궁만을 편애하여 정실을 공개적으로 존중하지 않는 행위 역시 궁중 및 가정 질서를 해치는 것으로 여겨졌다.
왕정 국가에서 왕비·황후는 단순한 군주의 배우자가 아니라 궁중 여성 조직인 내명부를 통솔하는 최고 책임자이자 후계 질서의 핵심 축이었다. 내명부 인사·규율·후궁 관리 및 황자 양육 환경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적장자와 차기 군주의 지위와 권위를 제도적으로 보증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따라서 후궁이 위계질서를 침해하거나 내명부 통치 질서를 혼란시키는 행위에 대한 제재는 왕비·황후 권한의 정당한 행사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더 나아가 왕비·황후는 외척 세력과 결합하여 궁중 권력의 한 축을 형성했으며, 군주 사후에는 대비·태후로서 섭정이나 국정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례도 존재했다.
이러한 처첩 제도의 처첩 간 위계질서는 특정 왕조나 지역에 한정된 특수 관습이 아니라, 처첩제를 기반으로 한 동아시아 군주제 전반에서 공통적으로 작동하던 궁중 권력 구조의 일환이었다.
- 적장자 우선 계승법이 우선시 된 제도적 배경
중국은 고대·중세를 통틀어 적장자 계승 원칙이 제도적으로 중시되었으나, 정치 현실 속에서 예외적 계승 사례가 축적된 특징을 보인다. 후궁 소생 서자가 황위를 계승할 경우 생모가 황태후 또는 추존 황후로 격상되는 사례가 존재했는데, 이는 황제 혈통의 정통성을 보강하기 위한 정치적 조치로 기능하였다. 다만 이러한 사례는 적자가 부재했거나 정치·제도적 사정으로 적장자 계승이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발생한 예외적 경우에 가까웠다.
적장자가 존재할 경우 그를 우선 후계자로 삼는 원칙 자체는 동서 문화권을 막론하고 널리 작동하던 기본 질서였다. 후대의 청나라는 만주족 유목 전통의 영향으로 능력 경쟁 요소가 상대적으로 강조되었다는 평가가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서자가 적자보다 노골적으로 우대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적자가 정통성과 정치적 안정성에서 우위에 있다는 인식은 여전히 강하게 유지되었으며, 서자 출신 황제들조차 자신의 생모를 황후로 추존하고 적자를 후계자로 세워 정통성을 보강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즉 동서고금의 왕정 국가에서 적장자 우선 계승법은 후계 분쟁을 최소화하고 정통성을 명확히 하기 위한 기본 질서로 기능해 왔다. 중국·동아시아권은 춘추 전국 시대부터 적서 구별이 제도화되었고, 종법제는 주나라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유교·성리학은 이를 창출했다기보다 기존 질서를 윤리·제도적으로 규범화한 체계에 가깝다.
유럽 역시 기독교 혼인 규범 정착 이후 '정실 소생' 중심의 정통성 원리가 강화되었으며, 사생아 출신 군주(예: 윌리엄 1세)는 적자 부재 등 특수 조건 속에서 성립했더라도 정통성 논란과 귀족 반발을 동반했다. 몽골·티무르의 병립 계승, 오스만의 형제 상잔, 청의 태자밀건법과 같은 예외적 승계 방식도 존재했으나, 이는 내전·권력 투쟁을 유발하거나 제도 전환으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유방의 황태자 교체 시도와 이를 지지한 척부인의 정치적 행동에 대한 비판을 단순히 '유교·성리학적 질서의 투영'으로 환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전한의 정치 구조와 계승 질서 기준에서도 해당 시도는 정통성과 권력 안정성을 흔들 수 있는 고위험 선택으로 인식될 여지가 충분하였다.
이러한 계승 원칙은 단순한 관념적 규범이 아니라, 전한 건국 과정에서 형성된 공신 집단의 권력 안정 전략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 호해의 정통성 문제로 인한 숙청
전한 성립에 직접적 영향을 준 통일 진나라가 중국 통일 직후 3대 만에 급속히 붕괴한 원인 역시 단순히 호해의 폭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호해의 취약한 계승 정통성이 신하·황족·민심의 지지를 약화시킨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진시황제는 적장자이자 능력과 평판이 뛰어났던 황태자 부소를 제거하고, 18남이자 서자인 호해를 후계자로 세웠다.[9] 정통성이 취약했던 호해는 즉위 직후, 남성 형제뿐 아니라 여성 형제들까지 광범위하게 숙청하였다. 이는 계승 기반이 약한 황제가 권력 안정을 위해 숙청 범위를 확대할 수밖에 없었던 사례로 해석된다.
더 나아가 호해는 사구 정변 과정에서 자신의 즉위가 정치적·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전한다.[10] 그가 언급한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불의, 황제의 조서를 따르지 않는 것은 불효'라는 언급은, 황위 계승에 있어 적장자·황제의 유조·공훈과 능력이라는 삼중의 정통성 요소가 모두 결여되었음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진나라 붕괴의 기억은 곧 초한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전한 건국 세력 또한 계승 정통성 문제에 극도로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정치 환경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황태자 교체 시도에 대한 신료들의 강경한 반발은 단순한 보수성이나 특정 인물에 대한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정통성 훼손이 곧 숙청 확대와 국가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선례에 대한 현실적 위기 인식의 반영이었다. 이 과정에서 신료들은 진헌공과 여희의 서자 계승 시도 사례까지 거론하며 반대 논리를 강화하였다.
- 춘추 전국 시대의 숙청 양상과 전한의 상황
춘추 전국 시대 제후국들에서 숙청이 빈번하게 발생한 것은 단순한 폭정이나 잔혹성 때문이라기보다, 후계 구도의 불안정성과 종친 세력의 병존, 대신·군벌 세력의 정치 개입이 결합된 구조적 요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예컨대 제나라에서는 제환공이 명확한 후계 구도를 정하지 않은 채 사망하면서 다수의 공자가 병존하였고, 이들이 대신 및 군벌 세력과 결탁하여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쟁 공자 제거와 무력 충돌이 이어지며 정치적 숙청이 발생하였다.[11], 진나라 역시 왕권 강화를 위해 경쟁 종친 세력을 제거하거나 축출한 사례가 확인되는데, 이는 계승 과정에서 잠재적 경쟁자를 사전에 정리함으로써 중앙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정치적 조치였다.[12]
즉 춘추 전국 시대의 숙청은 이러한 불안정한 체제 상황으로 인해 정통성 경쟁이 현실화된 상황에서 발생한 정치적 생존 투쟁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전한 초기에는 사료상, 황족 간 조직적 황위 쟁탈전이나 경쟁 황자 제거 시도가 확인되지 않으며, 숙청의 주요 대상 또한 한신·팽월·영포 등 개국 공신 세력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후계 질서가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또한 유방이 서자들을 제후왕으로 봉한 조치는 후계에 방해될 잠재적 경쟁자를 격리하기 위한 조치라기보다, 광대한 영토 통치와 군사·행정 통제 강화를 위한 권력 분산 및 봉건적 통치 체제 구축의 일환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13]
따라서 전한 초기의 정치 환경을 춘추 전국 시대의 극단적 후계 경쟁 구조와 동일선상에서 파악하여, 척부인이 숙청을 피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황위 계승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상시적 숙청 공포' 가설로 일반화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과도하게 단순화하는 해석에 가깝다.
3.2. 비판론
(중략)
其三为戚夫人和赵王如意本身的弱势。如意不过十岁左右的孺子小儿,“ 群臣心皆不附赵王”乃是必然。戚夫人虽然是汉初杰出的艺术家,但对政治却一无所知,不懂笼络朝臣,更无强大的家世背景。一对弱小的母子面对这样一群野心勃勃的开国将相,刘邦也不免忧虑“如百岁后,谁肯北面事戚姬子乎?”
셋째는 척부인과 조왕 여의 그 자체의 약세이다. 여의는 불과 10세 남짓한 어린아이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마음으로는 전부 조왕을 따르지 않았다"(자치통감에서 사용한 표현)는 것은 필연이었다. 척부인은 한나라 초기의 뛰어난 예술가였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고, 조정 신하들을 회유할 줄도 몰랐으며, 막강한 가문의 배경도 없었다. 작고 약한 두 모자(母子)가 야심이 넘치는 개국 공신 장상(將相)들을 상대해야 하는 이 상황에, 유방 역시 근심을 떨치지 못하며 "만약 내가 죽고 나면[14], 누가 척희의 아들을 신하로서 섬기려고 하겠느냐?"라고 걱정했다.
(중략)
吕后与戚夫人,可谓当时两位杰出的女性,一位是谋略胆识兼备的女政治家,一位是才艺冠绝的艺术家。但两人在政治场上相逢,结局的胜负就具有某种必然性。吕后富于谋略,图长思远。而戚夫人作为“事艺型”的人才,只是单纯凭借刘邦对自己的宠爱和以眼泪唤起的同情以达成自己的目标,与吕后的纵横捭阖比起来,戚夫人不论在政治头脑或是人脉背景上都相形见绌。
여후와 척부인은 그 당시에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여성들이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은 지략과 책모, 대담함과 식견을 겸비한 여성 정치가였고, 한 사람은 재능과 기예가 매우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정치판에서 만난다면, 그 결말의 승패에는 필연적인 점이 있게 된다. 여후는 모략이 풍부하여 멀리 보고 생각하지만, 척부인은 "예술가형"의 인재로서 단순히 자기에 대한 유방의 총애에 기대고 눈물로 동정을 일으켜서 자기의 목표를 달성했을 뿐, 여후가 정치적 이합집산을 주도하는 정치 공작을 행했던 것과 비교하면 척부인은 정치적인 사고력이나 인맥의 배경이나 모두 그에 비해 부족했다.
중국의 기자 레이위칭(雷雨晴)이 작성한 「한초 척부인 천론 (汉初戚夫人浅论)」의 일부 발췌. 2013년 작성
其三为戚夫人和赵王如意本身的弱势。如意不过十岁左右的孺子小儿,“ 群臣心皆不附赵王”乃是必然。戚夫人虽然是汉初杰出的艺术家,但对政治却一无所知,不懂笼络朝臣,更无强大的家世背景。一对弱小的母子面对这样一群野心勃勃的开国将相,刘邦也不免忧虑“如百岁后,谁肯北面事戚姬子乎?”
셋째는 척부인과 조왕 여의 그 자체의 약세이다. 여의는 불과 10세 남짓한 어린아이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마음으로는 전부 조왕을 따르지 않았다"(자치통감에서 사용한 표현)는 것은 필연이었다. 척부인은 한나라 초기의 뛰어난 예술가였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고, 조정 신하들을 회유할 줄도 몰랐으며, 막강한 가문의 배경도 없었다. 작고 약한 두 모자(母子)가 야심이 넘치는 개국 공신 장상(將相)들을 상대해야 하는 이 상황에, 유방 역시 근심을 떨치지 못하며 "만약 내가 죽고 나면[14], 누가 척희의 아들을 신하로서 섬기려고 하겠느냐?"라고 걱정했다.
(중략)
吕后与戚夫人,可谓当时两位杰出的女性,一位是谋略胆识兼备的女政治家,一位是才艺冠绝的艺术家。但两人在政治场上相逢,结局的胜负就具有某种必然性。吕后富于谋略,图长思远。而戚夫人作为“事艺型”的人才,只是单纯凭借刘邦对自己的宠爱和以眼泪唤起的同情以达成自己的目标,与吕后的纵横捭阖比起来,戚夫人不论在政治头脑或是人脉背景上都相形见绌。
여후와 척부인은 그 당시에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여성들이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은 지략과 책모, 대담함과 식견을 겸비한 여성 정치가였고, 한 사람은 재능과 기예가 매우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정치판에서 만난다면, 그 결말의 승패에는 필연적인 점이 있게 된다. 여후는 모략이 풍부하여 멀리 보고 생각하지만, 척부인은 "예술가형"의 인재로서 단순히 자기에 대한 유방의 총애에 기대고 눈물로 동정을 일으켜서 자기의 목표를 달성했을 뿐, 여후가 정치적 이합집산을 주도하는 정치 공작을 행했던 것과 비교하면 척부인은 정치적인 사고력이나 인맥의 배경이나 모두 그에 비해 부족했다.
중국의 기자 레이위칭(雷雨晴)이 작성한 「한초 척부인 천론 (汉初戚夫人浅论)」의 일부 발췌. 2013년 작성
戚夫人因受刘邦宠爱,萌生立其子为太子的想法,却高估自身实力,最终导致悲惨结局。若非受宠,或许能避免做成人彘的下场。戚氏母子是吕氏和太子的威胁,刘邦逝世后,吕氏怀恨在心,戚夫人与其子必遭吕后报复。古代妇女对于命运的走向不能自主把握,只能依附于男性从而不可避免地卷入宫廷斗争中。戚夫人政治上的单纯与天真是导致其悲剧命运的直接原因。
척부인은 유방의 총애를 받으면서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으나,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과대평가하였다. 그 결과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었다. 만약 총애를 받지 않았다면 '인간 돼지'가 되는 결말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척씨 모자는 여씨 세력과 태자 측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였으며, 유방 사후 여씨가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보복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이두 백과 척부인 문서의 총평(总体评价) 문단 일부 인용
척부인은 유방의 총애를 받으면서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으나,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과대평가하였다. 그 결과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었다. 만약 총애를 받지 않았다면 '인간 돼지'가 되는 결말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척씨 모자는 여씨 세력과 태자 측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였으며, 유방 사후 여씨가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보복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이두 백과 척부인 문서의 총평(总体评价) 문단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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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사료와 역사적 해석에는 여후의 잔혹함과 악행을 비판하고 척부인의 비참한 최후를 동정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으며, 척부인이 생전에 보인 행동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평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척부인의 행위 자체를 체계적으로 비판하거나 정치적 책임을 분석하는 전통적 논의가 충분히 축적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는 인간돼지형의 충격성과 여후의 폭정이 워낙 강렬하여, 척부인의 개인적 선택과 실책이 상대적으로 묻혀 왔기 때문이다. 또한 척부인은 주로 여후의 부정적 평가를 부각시키는 사례로 인용되어 왔을 뿐, 그 자체로 독립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15]
다만 전통적 일화들 가운데에는 정실과 측실의 위계 질서의 파괴, 그리고 첩을 과도하게 편애하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를 낳는지를 경고하는 사례로 이 사건이 언급되기도 한다. [16] 이는 인간 돼지형이라는 비인륜적 처벌과 여후의 극단적 대응을 비판하는 한편, 척부인과 유방의 행동이 계승 질서와 정치적·윤리적 충돌했음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해석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현대 중국 사학계에서는 여후의 섭정 통치가 외척 세력 중용과 잔혹한 숙청 등 권력 행사 방식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인 것과 별개로 전한 초기 정치 질서 안정과 권력 공백 수습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점에서 정치가로서 재평가, 권력 구조에 대한 재평가가 되면서[17] 유방 말년의 후계 갈등 역시 후궁 여성들의 치정적 갈등이 아닌 정치 권력 투쟁의 일환으로 해석되는 시각이 강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척부인 또한 일방적인 피해자나 비운의 희생양으로만 규정되기보다는 후계 구도에 개입한 정치 행위자로 재위치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다만 이도 척부인에 대한 전면적 부정 평가라기보다는, 그녀의 행보 역시 권력 구조 속에서 재조명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해석으로 이해된다.
먼저 척부인은 유방의 후궁들 가운데 큰 총애를 받았으나, 그 배경은 미약하여 가문이나 정치적 기반에 대한 자료도 거의 전하지 않는다.[18] 이 점에서 척부인은 외척 세력이나 정치적 후원 기반을 갖춘 인물이 아니라 황제의 개인적 총애에 의존한 후궁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척부인이 적장자 유영의 폐위 시도에 동조하고 여후와 대립각을 세운 것은, 당시 궁중 위계질서 속에서 상당한 긴장을 초래할 수 있는 행위였다.
또한 척부인은 정치적 지략과 감각이 부족했던 인물로 보인다. 전제 군주정 체제에서 후계자 선정 문제는 단순한 가정사가 아니라 국정과 직결된 중대한 정치 사안이었으며, 후계자의 정통성과 이를 지지하는 관료·귀족 세력의 존재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척부인은 후궁 신분으로 황위 계승 경쟁에 뛰어들었음에도, 신하나 유력 귀족들을 포섭해 정치적 기반을 형성하기보다는 유방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방식에만 의존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기록에까지 남을 정도로 노골적이었으나 제도적·정치적 뒷받침이 없는 상황에서는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19]
반면 여후는 자신의 현 위치에만 안도하지 않고 장량의 조언에 따라 상산사호를 초청하는 등 여론과 신하들의 지지를 확보하여 유영의 적장자적 정통성과 황태자로서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이로 인해 유방 역시 황태자 교체 시도가 가져올 정치적 혼란과 위험을 인식하고 이를 포기하게 되었다. 이렇 듯 척부인의 정치적 기반은 유방 개인에게만 몰려있었고 조정 대신들에게도 반감을 산 나머지 유방 사후, 유여의와 함께 위기에 처했을 때 혜제가 된 유영을 제외하면 두 모자를 보호해 줄 세력이 없었다. 여후는 정치적 계산과 처세 면에서는 비교적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유비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항우와 달리 반대파를 무차별적으로 제거하여 정치적 약점을 자초하는 성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물이 척부인에게 극단적으로 잔혹한 처벌을 내렸음에도 이에 대하여 여후의 과격한 잔인성의 예시로 언급되거나, 필요 이상으로 잔혹하다고 비판했을 뿐 이 형벌을 공개적으로 제지했다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 점은 당시 척부인을 보호하거나 중재할 정치적 세력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한편 척부인은 이미 여후와 갈등이 깊어진 상황에서 '영항가'를 지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여후를 간접적으로 비난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여후의 적개심을 더욱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기록과 정황을 종합하면 여후는 이미 척부인과 유여의를 위협 요소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이 없었더라도 결국 제거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여후가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공개적으로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다면 보다 형식적이거나 덜 가혹한 방식의 처분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결국 유여의를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황제에게 직접 애원한 기록과 영항가 일화는 척부인이 당시의 정치 현실과 권력 구조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감정적·개인적 방식으로 대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박희 모자와 유비가 여후의 숙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유방의 총애를 받지 않아 정치적 권력의 중점이 될 수 없었고, 박희 본인 또한 여후와 충돌을 빚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며 유비는 노원공주에게 자신의 군을 바쳐 여후의 정적이 아님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장자가 아닌 아들이 후계자가 된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후한 말, 군벌 원소가 장남 원담 대신 삼남 원상을 후계자로 지목하려 했던 일이나, 유표 사후 형주 후계가 장자 유기가 아닌 차남 유종에게 넘어간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 사례는 오히려 장자 계승 원칙을 무시한 선택이 정치적 분열과 권력 갈등을 촉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 원소 사후 원담·원상 간 후계 분쟁이 격화되며 원씨 세력이 급속히 붕괴한 것이나, 유표 사후 형주 내부가 유기파와 유종파로 분열되어 내전 직전까지 치달은 사례는 모두 계승 질서 교란이 정치 불안정으로 직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들 역시 군벌·호족 세력, 지역 기반, 외교 노선 등 일정한 정치적 후원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후궁 소생으로 정치 세력·외척 기반·신료 지지를 전혀 확보하지 못했던 유여의의 조건과는 차이가 존재한다.
결국 척부인이 황권 투쟁에 뛰어들게 된 1차적 원인은 유방의 그릇된 편애에서 비롯된 측면이 컸고 본인 또한 정치에 무지했다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황제의 총애에 의존한 채 후계 구도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행동은 적장자 계승 원칙과 내명부의 질서 구조를 동시에 자극하는 고위험 정치 행동이였다는 점에 상당한 정치적 긴장을 초래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반인륜적인 처형을 당했고, 이후 여후가 잇따른 숙청과 실책, 권력 남용으로 스스로 평가를 깎아먹는 만행을 저지른 덕에 동정을 압도적으로 받게 된 것이지, 여후가 보다 정치적으로 절제된 방식으로 대응했다면 척부인은 황제의 총애를 이용해 질서 혼란을 시도하려 했던 후궁, 더 나아가 동양사 표현식 요부로 기록되어 두 인물의 평가는 달라졌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일부 대중적 해석에서는 척부인을 "여후와 숙청을 두려워 한 나머지 생존을 위해 황권 투쟁에 뛰어든 인물"로 규정하거나, 일부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적장자 우선 계승 원칙과 정실 중심 질서를 근거로 한 구조 분석과 비판을 유교·성리학적 질서의 산물로 환원하여 척부인의 행위를 일정 부분 정당화하려는 시각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인간 돼지 사건의 잔혹성과 여후의 외척 세력의 권력화 과정에 과도하게 매몰된 나머지 여후의 잔혹성을 결과론적으로만 부각시키고, 사건이 전개된 정치 구조와 계승 질서의 맥락, 시간 순서를 축소·단순화·왜곡한다는 비판이 따른다. 후계 갈등을 개인 간 감정 대립이나 심리적 공포 서사로 환원할 경우, 궁중 권력 구조 속에서 발생한 정치 사건의 제도적 성격이 희석될 수밖에 없다. 더불어 적장자 계승 질서를 유교 이념의 산물로만 해석하는 시각 역시, 왕정 국가 전반에서 보편적으로 작동하던 계승 안정 원리를 간과한 해석이라는 지적이 가능하다.
기록상 여후의 잔혹성은 주로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된 대상에게 집중되어 나타났으며, 정치적으로 무관한 집단에까지 무차별적으로 확대되었다는 양상은 확인되지 않는다. 황후·태후 시기 숙청 사례 역시 공신 및 잠재적 권력 경쟁자에 집중되어 있다. 척부인과의 갈등 또한 유방의 황태자 교체 시도 이후 본격화된 것으로 보이며, 그 이전 단계에서 구조적 정치 충돌이 존재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20] 또한 전한 초기는 춘추 전국 시대와 달리 후계 계승 질서가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은 아니었다. 유방은 서자들을 제후왕으로 봉하여 각 제후국의 통치를 맡기는 등, 황태자가 아닌 황자들 또한 일정한 봉건제 지배 체계 안에 편입시키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으며, 유여의는 태자 교체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미 조은왕에 봉해져 있었다.
이러한 사료적 정황을 종합하면, 척부인이 여후의 성향을 사전에 분석하고, 체제 상황 때문에 생존 공포 속에서 선제적으로 황권 투쟁에 개입했다는 서사는 설득력이 낮다. 특히 태자 교체 이전까지 갈등이 구조적으로 표면화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생존을 위한 선제 대응'이라는 설명은 사건의 시간적 인과 관계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계승 질서를 흔드는 태자 교체 시도가 먼저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황후와 태자 측이 정치적 위협을 인식하며 갈등이 격화된 것으로 보는 편이 권력 구조상 자연스럽다. 즉 생존 위협이라는 긴장은 존재했으나, 그 직접적 적용 대상은 기존 계승 질서를 점유하고 있던 황후·태자 측에 가까웠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만일 척부인이 생존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면, 태자 교체라는 고위험 정치 행위에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황후 세력과의 협력 또는 정치적 중립 유지가 보다 합리적 선택지에 가까웠다. 황제 사후 권력이 황후와 태자 측으로 집중되는 구조를 고려하면, 총애에 의존한 후궁 세력이 정통 권력에 도전하는 행위는 생존 전략이라기보다 정치적 모험에 해당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3.3. 동정론
여후가 척부인을 학대하고 살해한 것은 매우 비인도적인 처사이므로 우리는 마땅히 질책해야 한다. 여후의 이런 행보는 그녀 자신을 중국사 치욕의 기둥에 영원히 못을 박았다.
왕리췬(王立群), 중국의 역사학자. 허난 대학교의 예술사 교수.
왕리췬(王立群), 중국의 역사학자. 허난 대학교의 예술사 교수.
본 문단은 척부인을 감정적으로 옹호하거나 생존 목적으로 황위 계승에 뛰어들었으나 패배 후 비참하게 살해당한 비운의 피해자로 소비하기 위한 서사적 동정론이 아니라 당대 사회·정치 구조 속 권력 위계와 행위 제약을 근거로 그녀를 황위 계승 갈등에 구조적으로 휘말린 인물로 해석하려는 취지에서 작성된 것이다. 즉 척부인에 대한 동정은 존재할 수 있으나 그것은 개인적 비극성이나 생존 서사에 기반한 감정적 동정이 아닌 구조적 조건 속 선택지의 제한을 고려한 분석적·구조적 동정에 해당한다.
척부인은 당시의 정세와 기록을 종합하면 스스로가 정말 야심을 지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정치에 이해가 부족한 후궁이 황제의 주도하에 황태자 교체라는 정치적 문제에 휘말린 것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척부인의 행동이 어리석고 현실 감각이 부족했다고 평가할 수는 있어도 가혹한 처형을 당할 정도로 국가 권력을 위협할 실질적인 정치 세력이나 역량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후궁 신분으로 황후에게 도전권을 내민 것은 중대한 실책이었고 그 결과, 정치적으로도 내명부의 위계질서를 위해 숙청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돼지형이라는 매우 잔혹한 형벌로 응징되어야 할 중죄였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실제로 황태자 교체 시도가 실패한 이후 척부인은 유방과 함께 이를 슬퍼했다는 기록 외에는 별다른 정치적 행동이 확인되지 않으며 유여의를 황태자로 만들기 위한 지속적인 정치 공작이나 여후와 혜제 모자에 대한 해코지 또한 사료상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적극적인 재도전이나 지속적 공작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척부인이 여희, 조비연, 만귀비와 같은 유형의 권력 지향적 후궁이었다면 황태자 교체 실패 이후에도 측근과 신하를 규합해 계속 정치적 압박을 가하거나 여후 모자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했을 테지만 그러한 흔적은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척부인은 정치적 기반도 지속적인 권력 의지도 갖지 못한 채 외부에 의해 황위 계승이라는 거대한 정치 문제에 휘말린 인물에 가까웠다.
그러나 여후는 정치적 기반과 권력이 거의 없었던 척부인 모자에 대한 처벌 과정에서 그 강도를 절제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과도한 보복으로 평가될 여지를 남겼다. 만일 이것이 정치적 목적의 숙청 혹은 황후의 지위를 위협한 후궁에 대한 처벌 차원이었다면 폐위나 유배 등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며, 사형이 불가피했다 하더라도 참수·독살·교수형 등 당시 법도에 규정된 처형 방식이 통상적 선택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후왕으로 봉해졌던 선황의 아들이 정식 절차에 따른 폐위나 재판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암살 형식으로 제거되었고, 선황의 후궁이자 황족 신분이었던 척부인 또한 신체 훼손과 가혹 행위를 동반한 극단적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이러한 처벌 방식은 단순한 정적 제거 혹은 제도적 처벌 범주를 넘어선 것으로 평가되며, 사적 감정이 일정 부분 개입되었을 가능성 역시 지적되어 왔다. 여후가 유방 생전에는 한신 등 공신 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명분과 절차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비교적 정치적 계산에 입각한 행동을 보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척부인 사건에서 나타난 처벌 양상은 그녀의 정치 행보 중, 감정적 요소가 강하게 표출된 사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 때문에 해당 사건은 당시 권력 안정 조치라는 측면과 별개로, 후대 사학 및 대중 인식에서 여후 비판의 주요 근거 중 하나로 언급되어 왔다.
척부인 모자가 여후 집권기 동안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 원인에는 구조적으로 유방의 후계 구도 개입이 일정 부분 작용했다는 지적이 존재한다. 공식 사료에서도 유방이 유여의를 황태자로 세우려 한 배경에는 정치적 명분보다는 총애하던 후궁의 소생이라는 개인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이 언급된다. 사마천 역시 사기에서 해당 사건을 서술하면서 유방과 척부인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논평하지는 않았으나, 척부인이 총애를 받아 황제와 같이 동행했다는 기록과 태자 교체 시도를 연속적으로 배치해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후계 교체 시도가 정치적 대의보다는 사적 총애 관계에서 비롯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구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다만 이는 사마천의 서술 의도를 추정한 해석에 해당하며, 명시적 비판으로 단정하기에는 신중함이 필요하다.[21]
한편 일부 대중적 해석에서는 유방이 여후 및 여씨 외척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고 이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태자 교체를 시도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를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사료는 확인되지 않으며, 후궁 소생의 어린 황자를 후계자로 교체하려 한 시도는 당시 조정 내 반발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해당 시도는 다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후계 구도 혼선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태자 교체 시도를 외척 견제 전략으로 해석하는 견해는 존재하나, 그 정치적 실효성과 동기 해석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한편 말년의 유방이 여씨 외척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번쾌 숙청을 시도했다는 기록도 전하나, 이는 유방의 건강 악화와 사망으로 인해 실질적 권력 재편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당대는 엄격한 신분제 질서와 더불어 남존여비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성은 개인의 성향과 능력 여부를 떠나 남성의 권력에 종속되거나 의존하는 위치에 놓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권력을 행사한 사례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독자적 정치 기반을 통해 획득되었다기보다 혼인, 혈연, 외척 등 관계망을 매개로 형성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후 역시 정치적 식견과 권력 감각을 갖춘 인물로 평가되지만, 생전 유방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황후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권력 앞에서 독자적 정치 행위를 전면화하기 어려웠다. 여후가 실질적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른 시기는 이른바 '고후기'로 불리는 전후소제 섭정기 이후이며, 이 또한 어린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대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더불어, 유방의 정실이자 혜제의 모후, 현 황제들의 조모라는 신분적·제도적 배경이 결합되었기에 가능했던 권력 행사였다.
이러한 시대적·제도적 환경을 고려할 때, 황태자 교체 사건 또한 황족 위계에서 후궁이라는 을적 위치에 있었고, 정치적 기반이나 외척 세력도 미약했으며 가무를 통해 총애를 얻은 척부인이 능동적으로 주도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만약 척부인이 교체 시도의 실질적 주체였다면, 이는 단순한 총애 경쟁을 넘어 황후 권위와 적장자 계승 질서를 정면으로 흔드는 중대한 정치 행위로 인식되었을 것이며, 그 파장은 궁중 내부 갈등을 넘어 정국 불안 요소로 확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 군주가 특정 후궁의 의중에 좌우되어 태자를 교체하려 했다는 인식이 형성될 경우, 유방 역시 사사로운 총애에 휘둘려 공사 판단을 흐린 암군이라는 정치적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현존 사료에서 확인되는 척부인의 행보는 독자적 정치 행위자라기보다 황제 의사와 총애에 종속된 후궁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교체 시도 과정에서도 척부인이 별도의 정치 연합을 구축하거나 외척 기반을 동원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교체 실패 이후에도 권력 구도를 재편하려는 능동적 대응 대신 개인적 비탄과 체념에 가까운 반응이 전해진다. 이러한 점을 종합하면, 척부인을 생존을 위해 선제적으로 권력 투쟁에 뛰어든 정치 행위자로 규정하기보다는, 유방의 후계 구상에 종속된 형태로 권력 갈등에 수동적으로 연루된 존재에 가깝다고 해석하는 편이 사료 및 당시 제도 환경과의 정합성이 높다. 따라서 '생존투쟁'이라는 해석을 적용하더라도, 그것은 여후의 보복 가능성과 향후 숙청에 대한 선제적 공포에서 비롯된 능동적 권력 행위라기보다는, 정치적 기반이 전무한 후궁으로서 황제의 의중을 거스를 수 없는 위계적 위치에 놓여 있었던 데서 비롯된 종속적 연루에 가까웠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합적이다.
대중적 해석 중에는 유방이 척부인을 폐서인하여 궁중에서 완전히 내쫓았다면 최소한 목숨만큼은 건질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가정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왕조 정치의 권력 구조를 감안하면 현실성이 떨어지는 해석에 가깝다. 전제군주제 국가에서는 선왕보다 현왕, 즉 즉위한 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구조였고, 선왕의 생전 조치나 유훈이 사후에 뒤집히는 사례는 중국 역대 왕조사에서 매우 빈번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방이 태자 교체 실패 이후 취한 조치 역시 그가 생전에 행사할 수 있는 권한 범위 안에서의 '완충책'에 가까웠다. 유여의를 조왕으로 봉해 봉국을 부여하고 강직하기로 유명했던 주창을 조국의 승상으로 붙여 보낸 것은 여후 세력으로부터 일정 부분 거리를 두고 보호하려는 정치적 장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는 어디까지나 유방 생존을 전제로 유지되던 안전장치에 불과했다. 유방이 사망하자 권력의 중심은 곧장 여후에게 집중되었고, 주창 또한 여후의 명으로 수도로 소환되면서 조국에서의 방어막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결과적으로 유여의와 척부인 모자는 정치적 완충 지대를 상실한 채 여후 정권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훗날 벌어진 참극을 막지 못한 구조적 한계로 이어졌다.
3.4. 결론
汉朝历史学家司马迁认为,戚夫人想让儿子刘如意取代太子,自己取代吕后,但刘邦死后,戚夫人之宠便成二人之祸端。后世学者认为,刘邦知戚姬母子会遭吕后报复。但因太子仁弱,故惧身后群臣作乱,需吕后之刚毅以制之。然刘邦未尝以尊卑嫡庶为意,不顾吕后之怒,愈宠戚夫人,封刘如意以重土,又遣周昌为赵国丞相。此乃激吕后之怒,速戚姬母子之祸也。
한나라의 역사학자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보았다. 척부인은 아들 유여의로 하여금 태자를 대신하게 하고, 자신은 여후를 대신하려 하였으나, 유방이 사망한 뒤에는 오히려 그 총애가 두 사람에게 화근이 되었다고 하였다. 후세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유방은 척희 모자가 여후의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태자가 인자하고 유약하였기 때문에, 자신 사후 대신들이 난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여후의 강인함으로 이를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유방은 적서와 존비의 질서를 크게 개의치 않았고, 여후의 분노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척부인을 더욱 총애하였다. 또한 유여의에게 큰 봉토를 내리고, 주창을 조국의 재상으로 보내 보좌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곧 여후의 분노를 자극하였고, 척희 모자에게 닥칠 화를 더욱 앞당긴 것이었다.
바이두 백과 척부인 문서의 후세 평가(后世评价) 문단 번역
한나라의 역사학자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보았다. 척부인은 아들 유여의로 하여금 태자를 대신하게 하고, 자신은 여후를 대신하려 하였으나, 유방이 사망한 뒤에는 오히려 그 총애가 두 사람에게 화근이 되었다고 하였다. 후세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유방은 척희 모자가 여후의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태자가 인자하고 유약하였기 때문에, 자신 사후 대신들이 난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여후의 강인함으로 이를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유방은 적서와 존비의 질서를 크게 개의치 않았고, 여후의 분노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척부인을 더욱 총애하였다. 또한 유여의에게 큰 봉토를 내리고, 주창을 조국의 재상으로 보내 보좌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곧 여후의 분노를 자극하였고, 척희 모자에게 닥칠 화를 더욱 앞당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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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론은 척부인 개인의 정치적 무지와 처신상의 실책, 그리고 황태자 교체 시도가 실패한 이후 숙청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한계와 정치 권력 및 계승 구조 분석에 초점을 맞추되, 동정론은 척부인이 지닌 태생적 제약과 불리한 정세, 그리고 시대적·구조적 약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 두 시각은 공통적으로 척부인이 저지른 실책에 비해 척부인이 맞이한 최후가 지나치게 잔혹했다는 점과 척부인 모자의 비극은 유방의 책임이 결정적으로 크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즉 여후가 척부인 모자를 1차적 숙청 대상으로 인식할 정도로 강한 원한을 품게 된 근본 원인 역시 정치적 계산보다 사적인 애정에 흔들린 유방의 그릇된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유방은 정통성과 권력 기반이 극히 취약한 어린 서자를 단지 총애하는 후궁의 아들이라는 이유 만으로 차기 황제 후보로 밀어붙이며 계승 구조를 흔들었고, 그 과정에서 척부인 모자를 황실 권력 투쟁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황태자 교체 시도가 좌절된 이후에도 유방은 척부인과 유여의를 보호할 보호망을 만들려고 시도했으나, 이 보호망 또한 자신이 생존해 있을 때에만 제한적으로 작동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즉 유방의 말년 실책은 황위 문제를 안일하게 보았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안일함이 곧 사적인 애정에 휘둘리는 판단으로 이어졌으며, 그 결과는 척부인 모자의 처참한 최후였다.
설령 황태자 교체가 성공해 유여의가 즉위했다 하더라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여희와 해제 모자, 호해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정통성과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계승자는 즉위 이후에도 백성과 신하, 황족들의 반발과 쿠데타, 폐위와 숙청의 위험에 상시 노출될 수밖에 없다. 특히 척부인과 유여의는 이를 방어할 외척, 공신, 관료들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고 척부인의 정치적 감각과 처세 능력을 고려하면 정권 유지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결국 유방이 황태자 교체 시도라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더라면 여후가 척부인 모자를 사적으로 좋아할 수 없었다해도, 정치적인 문제 한해서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한, 즉각적인 숙청이나 잔혹한 보복으로 나아갔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설령 유방 사후이 정치적 위협 요소로 판단해 제거했다 하더라도 인간 돼지같은 잔혹한 방법이 아닌 법도에 따른 일반적인 처형으로 끝났을 여지도 존재한다. 실제로 여후는 박희 모자나 유비와 같이 자신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인물이나 유장처럼 사적으로 친한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일정한 타협과 관용을 보였으며 이는 그녀가 무차별적 학살자이자 폭군이라기보다는 최소한의 이해관계와 명분을 계산하는 쪽이었음을 보여준다.
4. 개인사
척부인은 유방의 후궁들 중, 미모와 예술적 재능을 겸비한 인물로 전해진다. 각종 노래와 춤, 시 등 궁중 예능과 교양에 능했다고 하며, 특히 "소매를 치켜들고 허리를 꺾는 춤(翹袖折腰之舞)"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그녀가 지은 시와 노래 역시 궁중에서 유행을 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예능뿐만 아니라 바둑에도 조예가 깊어 중국사 여성들 중에서 최초로 기록된 여성 바둑 기사로 거론되기도 한다.이러한 점을 종합하면, 유방이 척부인을 유달리 총애한 배경에는 단순한 외모뿐만 아니라 취미와 문화적 소양을 공유하며 사적으로 정서적 교류가 가능했던 관계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5. 대중 매체
유방 사후 척부인의 말로를 다룬 매체에서는 인간 돼지 일화가 너무 잔인해서인지 매체에 따라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검열되거나 순화시키는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요코야마 미쓰테루가 그린 만화 사기에서는 그림으로는 실루엣의 형태로, 내레이션으로 상태를 서술하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고우영 십팔사략 5권 초한지전 편에서 인간 돼지 일화에 대해 그려진 챕터가 있는데 그림체 특성상 간략하게 묘사되었으나 잔혹한 부분은 여전하다.# 일부 연극이나 드라마에서는 척부인이 항아리에 담긴 형태로도 표현하는데 이는 측천무후의 일화를 참고해서 고어적인 부분은 검열하는 식으로 연출한 것.삼국지를 모티브로 한 화본[22] 삼국지평화에는 팽월의 환생인 유비의 아내 감부인으로 환생하며, 아들 유여의는 유선으로 환생해 전생과 달리 행복하게 살게 됐다는 설정이다. 남편 유방은 헌제로, 숙적 여후는 폐후 복씨로 환생해서 조조(한신의 환생)에게 괴롭힘당하거나 죽는데, 당시 민중들에게도 척부인에 대한 동정론이 매우 우세했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이다.
영걸전 시리즈의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유방전 스토리에서 등장한다.
유방이 수수 대전으로 항우에게 패해 달아나는 와중에 팽성의 농가에 들르자 척희는 유방과 만나는데, 아버지와 함께 유방에게 대접을 한다. 며칠 후에 유방으로부터 "훗날 나를 찾아오면 오늘의 신세를 갚겠다"는 약속을 받는데, 유방이 항우와 형양에서 한차례 싸운 직후에 유방을 찾아와 유방의 아이를 잉태했다는 것을 알린다.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초한지에서 등장한다. 첫 등장과 황실 암투에서의 성우가 다르다. 팽성대전에서 유방이 패배한 이후 첫 만남에서는 성우 서다혜가 담당하고, 이때 유방은 사탄의 인형 드립을 친다(척희>처키). 해하 전투 이후 입궁한 뒤에서는 이지선으로 바뀌고, 사기, 원전 초한지의 기록을 따라 아들을 황제로 만들어달라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토사구팽 중심으로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유방이 사망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끝냈기 때문에, 유방 사후의 인간 돼지 사건 등의 일이 묘사되지 않는다.
중국 드라마 대풍가(大風歌)는 전한 초창기 시기[23]를 다룬 만큼 당연히 등장. 유방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어 언제나 유방의 곁에 붙어다니는 형태로 등장한다. 성격은 착하지만 우유부단하고 그리 현명하지 못해 아들 유여의와 유방에게 끌려다니고 있다. 드라마의 설정이지만 자신들의 자식들을 다룰 때 여후와 박희, 척부인의 차이가 드러나는 묘사가 있다. 박희는 유항이 불만을 내뱉으면 적당히 타이르면서 유항의 나이에 맞게 세상사에 대해 알려주고, 여후는 유영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밀어붙이다가 자기 말을 듣는다 싶으면 잘해주지만, 척부인은 유여의가 철없이 굴면 그저 말리기만 할 뿐, 박희처럼 가르쳐주지도, 여후처럼 강하게 압박하지도 못하고 있다. 드라마의 분량이 짧아서인지, 극 중 척부인의 성격이 우유부단하게 설정돼서인지 척부인이 중심이 되어야 할 태자 교체 사건 때는 비중이 있기는커녕 갖은 수를 썼다는 묘사는 나오지 않았다. 유방 사후에 그녀를 미워한 여후에 의해 영항에 끌려간 뒤에는 등장이 없다 11화에 재등장. 고된 형벌로 폐인이 되었다. 여후가 척부인을 증오하는 이유는 단순히 연정 문제가 아니라 후궁 주제에 국모 자리를 넘본 정치적 문제라고 말하자[24] 이미 정신이 피폐해진 척부인은 자포자기한 채 "나는 유방의 사랑을 얻었고 그저 유방의 뜻을 지지한 것에 불과하다"고 도발을 가하고 <영항가>를 부르다 여후의 명에 의해 혀가 잘리고 머리를 통째로 뽑히는 형벌을 받게 된다. 12화는 유여의의 독살과 인간 돼지 고사를 다룬 만큼 척부인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파트. 여후는 척부인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혜제를 독살하려다 유여의가 대신 짐주를 마시고 독살당했다는 역모 누명을 씌워 인간 돼지형을 내려버린다. 아들을 잃고 혀도 잘려 항변도 못 한 척부인은 처참한 꼴이 된 채 절망에 빠져 실성한 채 웃다 울고, 조정 대신들도 척부인이 누명을 썼고 과한 형벌이라 생각해 율법을 근거로 그녀의 처형을 막으려고 했으나 여후의 권위 앞에 아무도 항변을 못한 채 척부인은 끌려가 역사대로 살해되고 만다. 척부인이 인간 돼지가 된 부분은 혜제의 회상으로 흑백 처리가 된 채 아주 짧게 흘러가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중국 드라마 초한전기에서는 탕옌(汤嬿)이 연기했다. 미인에 유방의 총애를 독차지했다는 것은 원전과 동일하지만, 척부인이 등장하는 초한기를 다룬 매체 중 척부인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한 매체인데, 유방이 부상을 입고 군영에서 쓰러지자 유방 사후 후계 문제에만 집착한다든지 유방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대놓고 지내 적들에게 알리는 식으로 여러 가지 실책을 저질러 내부에 혼란을 야기하는 어그로를 끌었다. 이외 원래 여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지만 고모의 충동질에 말려들어 여치와 대립하는 등, 후일 황태자 교체 문제로 여후와 대립한다는 암시를 뿌리기도 했다.
미인심계에는 1화에는 이름만 언급, 그 후에는 역사대로 이미 죽은 인물이기에 작중 인물들의 입으로 언급되고 있다. 19화에서는 섭신아(신부인) 역을 맡은 왕려곤이 척부인의 원혼으로 등장해 말년의 여후를 혼절시켰다.[25] 박태후는 병으로 사망할 때 갈등을 겪었던 며느리 두의방(효문황후)에게 심정을 표현하는데, 여후와 자신은 권력을 얻었지만 남자(유방)의 사랑을 얻지 못했고 척부인은 유방의 사랑을 받았지만 권력이 없어 여후의 손에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는 식으로 언급했다. 그래도 사랑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척희를 부러워했다고.
옹정황제의 여인에서는 견환이 부찰 의흔을 겁줄 때 척부인의 인간 돼지 일화를 읊어주면서 부찰 의흔의 멘탈을 산산조각 냈다. 그리고 얼마 후, 부찰 의흔은 폐인이 되어 자기 처소에 연금된 뒤 치료받는 신세가 된다.
춘향전에서 고문으로 피폐해진 춘향이 꾸는 꿈에서 왕소군 등 중국 역사 속 유명 여인들과 함께 춘향을 만난다. 다른 여성들은 멀쩡하게 등장하는데 본인은 끔찍하게 죽은 것 때문에 바람과 목소리로만 등장. 자신의 죽음을 춘향에게 한탄한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인현왕후가 장옥정에게 척부인의 고사를 이야기해 주면서 자신은 심성이 착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겠지만 고사의 내용을 새겨들어 알아서 잘 처신하라며 경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옥홍보팀 악대리에서도 악대리가 척부인 일화를 언급하는데, 죄인을 전문적으로 고문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고 고문 도구를 연구도 하는 악마조차 척부인 일화를 듣고 "너무 끔찍하다"며 크게 충격을 받으며 "인간은 정말 창의적인데 왜 나는 그런 생각을 못 하냐"며 울기까지 한다.
카툰-연재 갤러리의 임여치가 과거 연재한 중국 형벌 잔혹사 시리즈의 부록 여치의 삶에서는 당연히 인간 돼지 사건의 주연인 만큼 등장. 흑발인 여후와 대비되는 금발에 좋게 말하면 가볍고 애교가 있으나 안 좋게 말하면 생각이 없고 철이 없는 여자로 그려지며 유방 생전엔 그의 총애를 믿고 여후의 심기를 계속해서 자극하다 결국 유방 사후 역사대로 여후의 손에 끔찍한 최후를 맞고 만다.#
6. 여담
- 뒷간에서 죽었다는 최후로 인해 중국에는 척부인을 화장실의 수호신(厠神)으로 모시는 민간 신앙이 있다고 알려져있다.
- 야사에는 여후의 잔인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인간 돼지로 만들 때 척부인의 음부를 짓이겼다니 집행하기 전 남자 죄수들이 갇힌 감옥에 내던져 능욕당하게 했다니, 유여의의 시체를 척부인에게 보여줘 절망에 빠뜨린 뒤 인간 돼지로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지만 인간 돼지 사건을 제외하면 어디까지나 야사니 걸러 보도록 하자. 실제 역사 속 여성 인물들 관련 야사들은 동서 안 가리고 성적인 것들이 많은 편.
- 분명히 유여의가 먼저 살해당한 뒤 척부인이 처형당했다고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현대인들이 기원전 연도 계산법을 오인해서 척부인이 유여의보다 먼저 죽었다는 오해를 한다. 기원전 연도는 기원후 연도와 다르게 반대로 계산하는 것이 맞다.
- 일부 현대인들은 인간 돼지 사건의 충격성과 당시 의료 수준을 고려할 때 야사나 과장 전승이 아니냐는 해석도 존재한다. 그러나 해당 내용은 정사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후대에 사지를 모두 절단했다는 식으로 과장되기도 하나 실제 기록은 손발 절단 등 신체 훼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 중국어권 인터넷 칼럼 및 덧글 일부에서는 의외로 척부인을 일방적 피해자로만 동정하는 반응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는 편이다. 여후의 처형 방식이 과도했다는 점에는 공감하면서도 척부인 역시 태자 교체 시도 등 권력 경쟁에 직접 개입한 정치 행위자였다는 책임론을 병존시키는 반응이 다수 확인된다. 또한 일부 논조에서는 사건의 근본 원인을 후계 구도 혼선을 초래한 유방에게 돌리는 해석도 함께 나타난다. [26]
- 조선 선조의 제1계비 인목왕후와 서사적 전개 면에서 유사성이 언급되기도 한다. 다만 인목왕후는 왕비, 척부인은 후궁이라는 신분 및 제도적 권한의 차이가 있어 정치 구조상 동일선 비교는 어렵고, 어디까지나 후대 인식 소비와 사건 전개 양상의 유사성에 한정된 비교에 가깝다. 둘 다 권력 기반과 배경이 약했음에도 친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시도가 정적(여후·광해군)과의 갈등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아들이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27]과 본인 역시 정치적 보복 속에서 몰락했다는 점[28]에서 서사적 유사성이 거론된다. 또한 이러한 비극성으로 인해 후대에는 동정 여론이 형성된 반면, 정적들의 보복 역시 과도했다는 평가가 병존한다는 점, 동시에 두 인물 모두 무리한 권력 시도와 처세상의 한계를 지적받는 양면적 평가 구조를 가진다는 점도 공통적으로 언급된다. 다만 제도적 지위의 차이 또한 결말을 가르는 요인이 되었다. 인목왕후는 왕비였기에 폐위 이후에도 생존이 보장되었고, 인조반정 이후 복권될 수 있었다. 반면 척부인은 후궁이었기에 제도적 보호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탓에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뒤 여후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점에서 대비된다.
- 또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역사 속 여성 인물이라는 점과, 후대 대중 인식 및 서사 소비 양식이 감정 서사 중심의 동정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폐비 윤씨와의 유사성이 흥미 위주로 언급되기도 한다. 척부인이 인간돼지 사건으로 인해 정치적 행위와 실책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소비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윤씨 역시 폐위와 사사라는 결말이 강조되면서 왕비로서의 실책과 궁중 갈등의 구조적 책임 문제는 창작물에서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특히 척부인의 경우, 회남여왕 유장이 유여의와 그 모친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기록은, 척부인의 최후에 대해 당시에도 일정한 동정 인식이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사례로 거론된다. 윤씨 역시 야사적 윤색과 후대 창작물의 영향이 크긴 하나, 폐위 과정과 사사라는 결말의 비극성으로 인해 세간에서 억울하게 폐위된 왕비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는 인식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동정 서사의 형성 기반이 전혀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 과정에서 두 인물의 적대적 여성 인물들(여후, 인수대비)이 절대적 악역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 비극적 피해자 이미지와 행위 책임 논쟁이 병존하는 평가 구조를 지닌다는 점에서도 서사적 공통점이 거론된다. 다만 상단에 서술된 인목왕후와의 비교와 마찬가지로, 윤씨는 왕비였고 척부인은 후궁이었다는 신분 및 제도적 차이가 명확하며, 비극적 최후의 소비 양상 또한 동일선상에서 보기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윤씨는 비교적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폐위와 사사 과정이 제도적 맥락 속에서 분석되며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평가가 병존하는 반면, 폐위 및 숙청을 단행한 주체가 남편인 성종이었다는 점에서도 정치적·제도적 맥락이 함께 논의된다. 반면 척부인은 기록이 제한적인 데다 인간 돼지 사건의 충격성이 강하게 각인되어 대중 서사에서 감정 중심의 소비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다.
[1] 왈가왈부는 있지만 척부인과 정사를 나누다 주창에게 걸렸다는 기록도 있었다. 말이 좋아 걸린 거지 그냥 대낮에 들키든 말든 대놓고 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주창이 그 꼴을 보고 눈을 돌리자 장난기가 동한 유방이 주창을 놀리려고, 등 뒤에서 슬리퍼 홀드를 걸고 "내가 누구 같은 임금이냐!"라고 묻자 "주군은 걸주 같은 폭군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당대는 물론이고 현대에도 군주에게 걸주와 같다는 발언은 엄청난 폭언이다. 하지만 유방은 본인이 한 짓도 있어서 껄껄 웃으며 넘어갔다고.[2] 유영과 노원공주[3] 평소 화가 나면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던 주창은 저 대화에서 말을 두 번이나 더듬었다.[4] 반면 같은 유방의 후궁인 박희(박부인, 효문태후 박씨)는 아들 유항이 대왕으로 부임한 대나라로 멀쩡히 갔다. 이는 박희가 유방의 총애를 받지 못해 권력의 중심이 되지 않았고, 이 결과로 후계자 싸움에 뛰어들지 않아 여후가 그녀를 숙청할 이유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5] 앞서 목숨 걸고 태자를 폐위하면 군신 관계를 끊겠다며 태자 유영을 보호한 공 덕분에 질책 이상의 해코지는 당하지 않았다.[6] 전한 시대에는 돼지우리를 뒷간(화장실)처럼 사용했었다.[7] 참고로 돼지 돈(豚)은 원래 새끼 돼지만을, 돼지 저(豬)는 암퇘지만을 뜻했으나 둘 다 오늘날에는 의미가 확장돼 돼지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8] 원문 출처는 해당 링크, 전문도 전부 서술되어 있다. 저자가 기자에 중학생 신문지에 투고된 칼럼인 만큼 역사학자가 집필한 논문보다 가치는 떨어지는 편이나, 단순한 흥미성 가십거리로 썼기보다 교육 목적에 맞추어져 역사 기록과 자료들을 참고해 척부인이 어떤 인물인지, 당시 전한의 사회상과 제도, 황태자 교체에 실패한 이유를 설명, 척부인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간단히 서술했기에 참고 목적 하에 읽을 가치는 있다.[9] 사마천은 조고의 조서 위조설을 전하나 확증은 없다. 다만 결정의 자발성 여부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계승 정통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것은 분명하다.[10] 사기 이사열전 참조. 번역자: swings81 - "호해가 말하길 : 형을 폐하고 동생을 세우는 것은 불의(不義)이며, 아버지의 조서를 받들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불효(不孝)이며,능력이 없고 재능이 없는 자가 억지로 남의 공을 빼앗는 것은 불능(不能)이오, 이 세 가지는 덕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천하는 복종하지 않을 것이고,자신의 몸이 장차 위태로울 것이며 사직의 제사를 받들지 못하게 될 것이오."[11] 참고 - 사기 제태공세가 - 그해 겨울 10월 을해일, 제 환공이 죽었다. 역아는(궁중에)들어와 수도와 함께 총애받던 첩의 측근들과 결탁하여 신하들을 죽이고 공자 무궤를 국군으로 세웠다. 태자인 소는 송으로 달아났다. 환공이 병이 들자 다섯 공자는 각기 당파를 지어 자리를 다투었고, 환공이 죽자 드디어 서로를 공격하니, 이 때문에 궁중이 비어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었다. 환공의 시신은 침상에 67일 동안 방치되어 구더기가 문밖으로 기어 나왔다. 12월 을해일, 무궤가 즉위하여 바로 시신을 수습하고 죽음을 알렸다. 신사일 밤, 염을 하고 빈소를 마련했다. 환공에게는 10여 명의 아들이 있었고, 나중에(국군의)자리에 오른 자만 다섯이었다. 무궤는 즉위 석 달 만에 죽어서 시호가 없었고, 그다음이 효공, 그다음이 소공, 그다음이 의공, 그다음이 혜공이었다.[12] 사기 진본기 -[13] 참고 : 사기 - 고조본기 - (생략) 아들 유항(劉恒)을 대 지역의 왕으로 세워 진양(晉陽)에 도읍하게 했다. (생략) 이에 패후(沛侯) 유비(劉濞)를 오왕으로 삼았다. (생략) 아들 유회(劉恢)를 양왕(梁王)으로 세우고, 아들 유우(劉友)를 회양왕(淮陽王)으로 삼았다.[14] 百歲之後 : 글자 그대로는 "백 년 뒤", 죽음을 돌려 말하는 표현이다.[15] 일반적으로 사료가 적은 인물은 역사 서술에서 비중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으나, 척부인의 경우 인간 돼지형이라는 사건의 상징성이 인물 전체 평가를 압도하면서 정치적 행보에 대한 분석이 상대적으로 축적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16] 전한 문제·경제 시기의 정치가 원앙은 척부인의 사례를 들어 문제를 비판한 적이 있었다. 문제가 총애하던 후궁 신부인(愼夫人)과 함께 상림원(上林苑)에 행차하여 정해진 자리에 앉으려 하자, 원앙은 일부러 신부인의 좌석을 효문황후의 것보다 뒤로 물려 황후보다 낮은 위치에 두었다. 이에 신부인과 문제는 크게 노하여 그대로 궁으로 돌아갔다. 원앙은 이에 대해 "첩과 정부인은 같은 격에 둘 수 없습니다. 첩을 그토록 총애하신다면 후하게 상을 내리십시오. 폐하께서는 인간 돼지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이는 측실을 정실과 동등하게 대할 경우, 결국 당사자만 위험에 처하고 훗날 척부인의 전례와 같은 비극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한 발언이었다. 이 말을 들은 문제는 그 의미를 신부인에게 전하였고, 신부인 또한 이를 받아들여 원앙에게 황금 50근을 하사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문제는 유방의 아들이자 모친 박희가 총애를 받지 않아 여후의 숙청에서 벗어났던 인물이었기에, 척부인의 사례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17] 참고 : 바이두 백과의 여후 항목의 역사적 평가 일부 발췌[18] 다만 최근에 발견된 「척백저비(戚伯著碑)」와 「백가성고략(百家姓考略)」, 「문헌통고(文献通考)」에 의하면 척부인의 부친은 척새이며 척씨 가문은 주나라 왕실의 후손으로 척부인도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일개 평민, 한미한 신분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물론 본문에 서술된 것처럼 척부인의 정치적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며, 해당 세 개의 사료들도 1차 사료가 아닌 성씨·계보 참고 자료로 신빙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척백저비는 후손이 선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기록이며, 백가성고략 역시 성씨 기원 연구서 성격이 강하다. 반면 사마천과 반고는 유방, 여후, 박희의 출신과 가문을 기록하면서도 척부인만은 별다른 배경을 남기지 않았는데, 이는 그녀의 정치적 기반이 약했음을 방증하는 요소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19] 신하들이 여희의 사례를 들어 반대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여희는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적자 서생에게 누명을 씌워 제거하였다. 그러나 여희조차 적장자 우선 계승 질서 속에서 정치적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부 공작이라는 우회적 수단을 사용해야만 했다. 반면 척부인은 유방에게 여의를 태자로 삼아 줄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하였는데, 이는 신하들이 해당 행위를 여희의 선례와 유사한 계승 질서 교란 시도로 인식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나아가 척부인을 여희보다 더욱 직접적이고 위험한 방식으로 질서에 개입한 인물로 판단했음을 암시한다.[20] 여태후본기에서 "여후는 나이가 많아 늘 집을 지켰고 주상(유방)을 보는 일이 드물어 점점 멀어졌다."는 구절을 근거로 사적 거리감 또는 감정적 불화 가능성을 추정하는 해석은 존재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관계 변화 수준의 정황일 뿐, 후계 문제와 직결된 정치적 갈등으로 확대 해석할 근거로 보기는 어렵다.[21] 이미지 출처: 바이두 백과의 사기-여태후 본기의 척부인 항목 캡처본 이미지에 적힌 원문의 번역은 "척부인은 “척희가 총애를 받아 늘 황제를 따라 관동을 순행했다”라고 기록될 만큼 총애가 깊었다. 유방이 척부인 모자를 총애한 정도는 실로 컸다. 그는 척부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척부인의 아들 여의를 세우려 했고, 태자 유영을 폐하려 했다.」이 두 사건을 함께 서술하고 있는 점에는 어떤 깊은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22] 대충 판소리와 비슷한 만담극에 가깝다. 따라서 진지하게 역사적 해석을 하기보다 대중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났다.[23] 고조기, 혜제기, 고후기, 문제기[24] 말은 그랬지 이전부터 척부인을 요부라고 비난했고 자신이 유방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하거나 유방의 입맛에 맞는 계획을 세워도 유방은 여후를 위하기커녕 척부인만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이자 분에 찬 모습을 보이는 등 여자로서 질투하는 모습도 많이 보였었다.[25] 원래 여후가 개의 유령(야사에 따라서는 유여의의 원혼이 구현화된)에게 물리고 혼절한 뒤 쇠약해져 사망했다는 야사를 인용해 드라마에서 각색한 것이다.[26] 참고: 시나 웨이보의 척부인 관련 인터넷 게시 글과 덧글 반응 해당 인터넷 글은 척부인의 비극을 여후의 잔혹성만으로 설명하기보다 태자 교체 시도와 장안 잔류 등 정치적 판단 실패의 결과로 해석했다. 게시글의 덧글들 또한 "자업자득", "정치 감각 부족", "권력 경쟁의 현실" 등의 표현을 통해 척부인을 권력 행위의 주체로 보는 시각이 다수를 이루며, 동시에 여후의 수단이 과도했다는 평가와 유방에게 근본 책임이 있다는 의견도 병존한다.[27]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는 유방 사후 여후에 의해 독살, 인목왕후의 아들 영창대군은 역모에 휘말려 폐서인이 되고 유배지에서 의문사. 둘 다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28] 인목왕후는 서궁 유폐, 척부인은 여후의 보복으로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