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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10-05 07:19:21

조고

진나라의 중승상
조고 | 趙高
씨 조(趙)
명 고(高)
출생
(음력)
미상
사망
(음력)
기원전 207년 9월
함양(咸陽) 재궁(齋宮)
(現 산시성 셴양시)
역임한 관직 중거부령(中車府令)[1] → 부새령(府璽令)[2] → 낭중령(郎中令) → 중승상(中丞相)
최종직위 중승상(中丞相)

1. 개요2. 조고는 환관이었는가?3. 생애
3.1. 진시황 시대3.2. 사구정변3.3. 진나라의 권신3.4. 망이궁 정변3.5. 죽음
4. 평가5. 여담6.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진(秦)나라의 관리[3]이자 조(趙)나라의 왕족. 시황제에게 충성하던 관료이며, 시황제 사후 권력을 잡고 나서 통일 진나라가 망하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다가 암살당한다.

2. 조고는 환관이었는가?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출토 문헌을 근거로, 조고(趙高)는 환관이 아니었으며 그가 환관이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초기 문헌은 전혀 없다고 추정하였다. 조고가 환관이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현재 논쟁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당대(唐代) 이전의 사서에서는 조고가 환관이었다고 밝힌 기록이 없다고 본다.

조고가 환관으로 여겨진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는 ‘조고 형제는 모두 은궁(隱宮)에서 태어났다’ 는 기록 속 ‘은궁’이라는 말이다. 《사기정의·진시황본기》에서는 은궁을 궁형을 받은 자가 요양하던 곳으로 해석했고, 《사기집해·몽염열전》은 은궁을 ‘환관이 되는 곳’으로 풀이하였다. 또 《사기색은·몽염열전》에서는 유씨(劉氏)의 설을 인용하여 조고의 아버지가 죄를 지어 궁형을 당하고, 어머니는 관청의 노비가 된 뒤 다른 남자와 사통하여 조고 형제를 낳았으며, 이들이 조씨 성을 이어받았고, 태어난 뒤 다시 궁형을 당했다고 상세히 설명하였다.

문제는 이 ‘은궁’이라는 단어가 궁형을 받은 자가 요양하던 곳이라든지, 아니면 환관이 되는 곳이라든지 하는 설에는 아무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현대 학자 마페이바이(馬非百)은 《수호지진간(睡虎地秦簡)》을 근거로 ‘은궁’은 ‘은관(隱官)’의 오기(誤記)라고 하였다. 은관은 진나라 관청이 설치한 수공업 작업장으로, 형벌을 마치고 나온 신체 불구의 죄인을 수용하여 노동을 시키던 곳이다. 조고의 어머니는 죄를 지어 형벌을 받은 뒤 은관에 수용되었고, 거기서 조고 형제를 낳았을 뿐, 조고 형제가 궁형을 받았다는 말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장가산한간·이년율령·호율》에는 은관이 형벌을 마친 자를 수용하는 관청의 작업장을 뜻할 뿐 아니라, 거기에 수용된 죄인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는 점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결국 조고가 환관이라는 말은 오자의 글자 뜻을 잘못 풀이한 데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사기·이사열전》에 이세황제가 ‘조고는 본래 환인(宦人)이다’ 라고 말한 대목과, 《사기·몽염열전》에 조고에게 ‘환적(宦籍)’ 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마비백은 여기서 ‘환인’은 ‘스승’을 의미하며, 조고가 호해(胡亥)의 스승으로 형율학을 가르친 것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또 ‘환적’은 ‘관적(官籍)’, 즉 관리의 신분을 뜻한다고 풀이했다.

일본 슈지쓰대 인문과학부 종합역사학과 교수이자 베이징대 중국고대사연구센터 겸임연구원 리카이위안(李開元)은 환적이 내시가 궁중에 출입할 때 사용하는 출입 명부일 뿐, 조고가 환관이었는지와는 무관하다고 보았다.

추시구이(裘錫圭)는 ‘환(宦)’ 본래의 뜻은 ‘사람을 섬기는 신복(臣僕)’이며, 낭관(郎官)과 알자(謁者) 같은 벼슬도 궁정에서 가까이 시종하는 직책이므로 ‘환’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조고가 진짜 환관이었다면 사위 염락(閻樂)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명대 학자 낭영(郎瑛)의 《칠수류고(七修類稿)》에서는 조고의 딸을 양녀라고 보았는데, 이는 근거가 없다. 또한 리카이위안은 사구정변 때 조고와 이사의 대화에서 “조고는 본래 내관의 하급 관리였으나, 글을 잘 써서 진궁에 들어가 20여 년간 일을 맡아보았다” 는 내용을 근거로, 조고가 역사를 공부하는 동자 신분으로 학관에 들어가 시험을 거쳐 상서졸사로 뽑힌 뒤 진궁에 들어가 관리가 되었다고 추정했다. 또 그는 조고가 기원전 258년에 태어나 52세를 살았다고 계산했다.

그러나 베이징대 역사학과의 신더용(辛德勇) 교수는 앞선 학자들과 달리 조고가 환관이었다는 견해를 고수한다. 첫째, 일부 문헌에서 조고를 환관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한(西漢) 초, 한고조 유방이 궁에서 환관의 무릎을 베고 눕는 모습을 본 번쾌(樊噲)는 눈물을 흘리며 이를 ‘진나라 조고의 일’에 비유하였다. 이는 조고를 환관으로 비유한 것이다. 또 한원제와 경방의 대화에서도 조고와 수초를 들어 환관 석현(石顯)을 비유하였다. 이는 이미 한대(漢代) 사람들은 조고를 환관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신덕용은 출토 문헌의 ‘은관(隱官)’과 전해 내려오는 문헌의 ‘은궁(隱宮)’은 같지 않다고 본다.
조고는 사구의 음모를 주모한 자이자 미래에 진 제국을 멸망시킬 주요 인물이었다. 조고의 내력에 대해서는 2000년 동안 이해가 부족할 뿐더러 곡해도 많았다. 후한 이후로 조고는 추악한 환관으로 묘사되었고 그 가족 역시 환관 가족으로 추화되어, 오늘날까지도 사실이 아닌 고정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조고에게 자식이 있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딸은 망이궁 정변에 가담하게 되는 함양현령 염락에게 시집갔는데, 이는 조고가 환관이 아니었다는 명확한 증거다. 실제로 사마천은 조고가 환관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사마천뿐만 아니라 후한 이전의 그 어떤 사서에도 그러한 기록이 없으니, 조고를 환관으로 보는 것은 오해다. 이런 오해는 우선 ‘환(宦)’이라는 글자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고, 다음으로는 잘못된 글자 ‘은궁(隱宮)’에 대한 추화와 곡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기』 「이사열전(李斯列傳)」 에는 조고가 ‘환인(宦人)’이고 ‘환적(宦籍)’이 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조고를 환관으로 오해하게 만든 대목이다. 하지만 새로 출토된 『장자산 한묘 죽간』에 따르면 ‘환’ 이란 궁중의 내정에서 일한다는 의미다. 즉 환인이란 궁내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왕이나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며 호위하는 신하다. 또한 환적은 궁문을 출입하는 자를 등재한 등록부다. 진•한 시대에는 ‘환인’이든 ‘환적’이든 ‘환관’이든, 거세된 남자가 궁내에서 맡은 관직, 즉 후대의 ‘환관’의 의미는 없었다. 당시에는 거세된 남자를 엄인(閹人)이라 칭했는데, 궁중에서 일하는 엄인은 ‘환엄(宦閹)’이라 불렸으며 정의가 매우 분명하다. 최신 자료에 근거하면, 조고는 궁중에서 일한 환인이었다. 즉 조고는 황제의 측근 신하였을 뿐 거세된 환엄이 아니었다.

『사기』 「몽염열전」 에서 “조고 형제는 모두 은궁(隱宮) 태생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조고를 환관으로 오인하게 만든 또 다른 자료다. ‘은궁(隱宮)’ 이라는 단어는 본래의 뜻이 불분명하다. 후한 이후 『사기』 에 주석을 단 유씨(劉氏) 아무개가 이를 이용해 자기의 의견을 펼쳤는데, ‘은궁’의 ‘궁’을 궁형(宮刑)으로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조고의 부친이 궁형을 받아 거세되었으며 모친이 다른 남자와 야합하여 조고 형제를 낳았다고 확대 해석했다. 조고 형제가 조씨를 사칭했으며, 궁형을 받아 환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거짓말은 꾸밀수록 더 커지고 꾸밀수록 더 통쾌해진다. 이렇게 해서 헛소문이 이어지다가 당나라 이후로는 조고 일가가 모두 환관이라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고착화되었다. 진나라 역사에 정통한 마페이바이 선생은 일찍이 『수호지 운몽 진간』에 근거해 “조고 형제는 모두 은궁 태생이다”에서 ‘은궁’이라는 단어는 은관(隱官)의 오기임을 지적했다. 『장자산 한묘 죽간』이 출토된 이후로 은관의 의미는 더욱 명백해졌다. 은관이란 형기를 마친 이들이 일하는 곳 또는 형기가 만료된 자의 신분을 가리키는 것이지, 궁형이나 거세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중략)

후한은 환관의 화로 인해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유씨의 곡해는 환관을 미워하던 당시 사람들의 심정을 만족시켜 주었다. 다들 “망국의 원흉은 모두 환관”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싶었던 것이다. 당나라 역시 환관이 권력을 휘두르며 정치를 어지럽힌 데다가 환관이 나라를 망하게 했던 옛 망령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옛 일에 빗대어 성토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조고가 환관이라는 유언비어가 확산되면서 반박할 수 없는 정설이 되었다.
『진붕秦崩: 진시황에서 유방까지』, 리카이위안(李開元)

3. 생애

3.1. 진시황 시대

출신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일설에는 진나라의 2세 황제 호해의 외삼촌이 조고라는 이야기도 있고, 다른 일설로는 멸망한 조(趙)나라의 왕족 출신이라는 말도 있지만[4], 조나라 왕족 출신이라는 설이 대부분 힘을 얻는다.

인간성과는 별개로 능력은 어느 정도 있어서 법률에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법치국가인 진(秦)나라의 법을 다 외우고 있었다. 원래 진나라의 법률은 고대 세계에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방대했다. 그걸 다 외웠으니 머리가 좋은 것은 분명했고, 그 덕에 궁정 내관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다.

진시황이 죽기 직전 부새령[5] 겸 중거부령[6]을 맡았다. 불로불사를 꿈꾸던 진시황은 암살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누구와도 직접적으로 만나지 않고 조고를 통해야 했다. 이는 진시황이 환관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오히려 진시황의 비서 노릇 및 연결통로를 하면서 진나라 권력의 핵심이 될 수 있었다. 심지어 승상인 이사조차 조고에게 아부[7]를 할 정도로 조고의 권력은 강대해졌다. 조고는 진시황의 마지막 순행에도 동행했고 이때 일생의 기회를 얻게 된다.
'조'는 조나라 왕족의 성씨다. 조고의 부계는 조나라 왕실의 먼 친척이었다. 전국 시대에는 천하가 합종연횡하면서 국가 간의 결맹 조건으로 왕실의 공자를 볼모로 삼았다. 군주의 여러 자녀 가운데 총애받지 못하고 소원해진 자가 볼모로 보내지면, 그 공자는 오랫동안 이국 타향에서 살아야 했다. 볼모의 처지가 된 이들은 평생 의욕을 잃은 채 빈한하게 지내면서 죽을 때까지 귀국하지 못하기도 했다.

아마도 조고의 조상은 조나라 출신으로 진나라의 볼모가 된 공자였을 것이다. 조나라에서 총애받지 못하고 진나라에선 도움을 받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한 채로 진나라에서 아내를 얻고 자식을 낳았을 것이다. 그 후손이 함양의 시정을 떠돌다가 진나라 사람이 되어 일반 서민이 되었을 것이다.

조고에게는 형제가 여럿 있었는데 모두 은관에서 출생했다. 그의 형제들 가운데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는 동생 조성뿐으로, 그는 훗날 조고를 대신하여 진 제국의 낭중령이 되었으며 2세 황제를 모살한 망이궁 정변에 참여하기도 했다. 은관은 정부가 뭇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는 곳에 설치한 수공 작업장으로, 형기가 만료된 죄인을 배치해 일하도록 했던 곳이다. 일찍이 조고의 모친은 죄를 짓고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불구가 된 탓에 남들과 어울려 살기 불편했고 남의 시선에 뜨이길 원치 않았으므로 은관에서 계속 일하며 생활했다.

진나라의 신분 등급 규정에 따르면, 은관에서 일하는 사람의 신분 역시 은관으로 칭했다. 지금 말로 하자면 만기 출소자에 해당하며, 지위는 일반 서민보다 낮았고 획득할 수 있는 토지와 주택도 일반 서민의 절반뿐이었다. 제국의 법률은 공정함을 중시했으므로 은관의 지위는 낮았지만 혼인에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은관 자녀의 신분 역시 일반 서민과 동등했다.

조고의 아버지는 아마도 은관에서 일하던 하급 문법관리로, 법률에 통달하고 서법에 정통했을 것이며 은관에 재직할 때 조고의 모친과 인연을 맺어 가정을 이루고 조고 형제를 낳았다. 진나라는 가업을 중시하여 자식이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하고 관리를 스승으로 삼는 것을 훗날 제국의 국책으로 삼았다. 따라서 성년이 된 조고가 문법관리의 길로 들어서 일류의 서법가이자 법학가가 되었던 건 부친의 직업 및 영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략)

학실은 전문적인 문법관리를 양성하기 위해 관에서 설치한 학교로, 수도와 각 군에 설치되었다. 학생은 대부분 문법관리의 자제 중에서 선발했는데, 17세에 입학하여 3년간 글자와 서법과 법률을 배웠다. 학습 기간을 다 마치면 소속 학실에서 자격시험에 참가했는데, 5000자 이상 외워 쓸 수 있는 자는 합격하여 사(史)에 제수되었다. 즉 문서와 법률 업무를 담당하는 사무직원으로 하급관리가 될 수 있었다. 사(史)에 제수된 자는 중앙정부에서 주관하는 초등 선발고시에 참가할 수 있었다.

초등 선발고시는 각지에서 거행되었고 답안지를 거두어 수도 함양으로 보내면 소부 관할 하의 대사가 일괄적으로 심사해 판정했다. 그 결과 가장 우수한 자를 선발하고 성적이 가장 낮은 자는 처벌했다. 성적이 가장 우수한 자는 출신지의 영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비서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현령 바로 밑에서 일했다. 성적이 가장 나쁜 자는 제수받은 사(史)의 직책을 취소했다. 영사에 임명된 자는 3년 후 고등 선발고시에 참가할 수 있었다. 엄격한 시험과 심사를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한 명은 궁정에 들어가 상서졸사를 담당했다. 이는 내정 비서의 직무로, 진왕의 측근에서 일했다.

조고의 부친이 문법관리이자 자녀에 대한 요구가 엄격한 사람이었 기에 조고 형제는 어려서부터 부친의 감독 아래 읽고 쓰기와 법률을 배워 기초를 탄탄히 다졌을 것이다. 조고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유능하고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꾸준한 마음과 근성이 있었다. 그가 문법관리가 되는 과정은 아주 순조로웠을 것이다. 열일곱에 문법관리의 자제로 학실에 들어간 조고는 3년 뒤에 자격고시에 합격하여 사에 제수되었고, 초등 선발고시에서도 가장 우수한 성적을 보 여 영사 종류의 문법관리가 되었다. 3년 뒤에는 고등 선발고시에 참가해 또 일등을 차지하여 진왕의 궁정에 들어가 상서졸사를 맡아 진왕의 곁에서 비서 업무에 종사했다. 진나라의 수많은 문법관리 중에서 조고는 군계일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궁정으로 들어간 이후 조고는 발군의 능력으로 진왕 영정, 즉 미래의 진시황의 눈에 띄게 된다. 조고가 궁정에 들어갔을 때의 나이는 23세가량으로, 진왕 정 13년(기원전 234) 즈음이었다. 이해에 진왕 영정은 26세였고 친정한 지 5년째로, 정치적으로 원대한 계획을 펼치기 시작했다. 진나라의 관료제도는 엄밀하고 완벽했으며, 문법관리의 승진은 규정에 따른 심사와 누적된 햇수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고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진왕 영정에게 인정을 받아 소부 밑의 상서졸사들 가운데 두각을 드러내어 중거부령으로 임명되었다.

중거부령은 태복의 수하다. 제국의 주요 관직인 구경 중 하나인 태복은 오늘날 교통부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제국의 수레와 말과 관련된 교통 업무를 관장한다. 태복 아래로는 각종 거부령과 원마감령이 있었다. 중거부령은 각종 거부령과 마찬가 지로 관봉이 600석이었으며, 그 아래로 관봉이 300석인 중거부승이 부관으로 있고 수십 명의 하급관리가 있었다.

등급으로 따지자면 중거부령은 중급관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궁중의 거부령인 중거부령은 황제를 시종하는 거마 반장의 직무를 맡고 있었으며 황제의 거마 관리 및 출행 시에 수행을 책임졌다. 심지어 황제를 위해 직접 수레를 몰기도 하는 지극히 중요한 직위였기에 황제가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심복이 아니면 맡을 수 없었다. 진왕 영정은 직접 조고를 중거부령으로 선발했다. 조고가 진왕 영정의 눈에 든 이유는 시험 성적이 특출한 것 외에도 그가 진나라 궁정에 들어온 뒤 펼쳐 보인 개인의 능력과 지혜가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조고의 서법은 일류라 할 만했다. 이후 방대한 진 제국에서 승상 이사를 제외하고는 조고보다 나은 이가 없었을 것이다. 조고는 문자 방면에도 조예가 매우 깊었다. 그는 훗날 진 제국의 문자 개혁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그는 『원력』 6장을 지었는데, 이는 진 제국이 공식 지정한 식자 교본의 일부이자 유명한 문자학 저작이기도 하다. 진 제국은 실용주의적 법치 국가로, 서법과 식자는 행정문서와 형률 옥법에 숙달하기 위한 도구였다. 조고의 문자와 서법이 정밀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가 형률 옥법에 숙달하고자 노력한 결과다. 복잡하고 엄격한 진 제국의 법제 체계에서, 조고는 법률에 정통한 전문가이자 가학에 연원을 둔 명인이었다고 할 만하다. 만년의 진시황이 막내아들 호해의 교육을 조고에게 맡긴 것도 그가 문자와 서법과 법학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사서에는 조고가 업무에 충실하고 일처리에 끈기가 있었으며 행 동에 결단성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조고의 출중한 행정능력을 개술한 것으로, 이러한 면모 역시 그가 진시황의 눈에 들었던 요소 중의 하나다. 그러나 조고가 중거부령으로 발탁된 데는 그 직위를 맡기에 적합한 실질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거부령은 황제를 시종하는 거마 반장이다. 수와 말을 부리고 관리하며 황제의 안전을 보위하는 일에는 매우 엄격한 조건이 따랐다. 진나라의 법률 규정에 따르면, 일반적인 수레와 말을 부리는 거사는 최소한 4년 동안 훈련을 받아야 한다. 훈련을 마친 후에 수레와 말을 제대로 부리지 못하면 교관은 벌금을 물어야 하고 당사자는 4년 동안 노역을 감당해야 한다. 합격한 거사는 나이가 마흔 이하에 키가 7척 5촌 이상이어야 하며, 달리는 말을 따라잡을 정도로 발걸음이 세차야 한다.

뿐만 아니라 수레를 자유자재로 몰 수 있을 만큼 몸놀림과 손동작이 민첩해야 한다. 수레를 몰면서 전후좌우를 살필 수 있을 정도의 숙련된 기술, 수레 위에서 깃발을 제어할 정도로 건장한 힘, 질주하면서 8석의 강한 쇠뇌를 당기고 좌우전후로 활을 쏠 정도의 뛰어난 무예를 갖춰야 한다. 중거부에 모인 이들은 진 제국에서 수레를 가장 잘 부리는 인재로, 그들에게는 일반적인 마차꾼을 초월하는 기준이 요구되었다. 그들은 모두 수레와 말의 고수였고 개개인이 궁중 무사였다.

시황제릉에서 출토된 청동거마는 시황제가 생전에 타던 수레에 근거해 2분의 1의 크기로 정교하게 주조한 것이다. 마차꾼은 검을 차고 있으며 쇠뇌를 곁에 두고 있다. 허리띠를 차고 관을 쓴 채 수염을 휘날리는 모습은 위풍당당하면서도 침착하다. 이것이 바로 중거부 관속의 형상이다. 중거부령은 중거부 관속의 통솔자로, 제국의 마차꾼 가운데 최고 고수였다. 중거부령 조고는 체격과 기백이 건장하고, 기마술과 수레를 모는 기술이 심오하며, 활과 병기를 능숙히 다루고, 무예가 매우 뛰어난 인물로, 진 제국의 궁중에서 드물게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음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진붕秦崩: 진시황에서 유방까지』, 리카이위안(李開元)

3.2. 사구정변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전국을 순행하다가 급사하자 조고는 공자 호해를 옹립하여 일약 진 제국의 권신으로 떠올랐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의 장남 부소와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그가 즉위하면 자신이 숙청이나 실각을 당할 것이라 생각하던 차에 진시황이 순행 도중에 객지인 사구에서 급사하자 마침내 자신의 조국인 조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에 대한 복수를 할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승상 이사를 포섭 후 모의하여 진시황의 유서를 위조하여 부소를 자결하게 한 다음 몽염과 그의 동생 몽의, 개국공신인 풍겁, 풍거질 등을 죽인다. 자세한 내용은 사구정변 참고.

다만 유서 조작에 대해서는 그런 극비사항을 어떻게 사마천이 알고 있었느냐는 의혹이 있어 논란이 있다. 최근에 나오는 여러 학설들에 의하면 조고의 교활함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저러한 이야기가 민간에 떠돌기 시작했고, 사마천이 이러한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냐 하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진시황이 실제로 태자 부소를 싫어해서 변방으로 내치기까지 했던 만큼 동생 호해를 좋아하여 부소에게 자결하라고 명하고 호해를 차기 황제로 삼기 위한 진시황의 선택일 가능성도 상당히 높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저 조작이야말로 오히려 조작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3.3. 진나라의 권신

아무튼 부소가 자결하자 조고는 이사와 함께 호해를 이세황제로 옹립하고, 그 공을 인정받아 궐문 수비를 담당하는 낭중령(郎中令)에 임명된다. 권력을 장악한 조고는 호해에게 간언하여 우환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진의 황족들과 대신들을 모두 죽였다.[8] 유일하게 공자 고(高) 만이 호해에게 상서(上書)를 올려 싹싹 빌면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기에 다른 황족과 달리 처참한 꼴을 당하지 않았다.

이후 조고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앙갚음을 한 일이 많아서 대신들이 황제 앞에서 자신을 헐뜯을까 두려워 호해에게 아직 어리고 국정에 능통하지 못하니 뒤로 물러나서 법에 익숙한 신하와 의논하여 결정하라고 설득했다. 호해는 여기에 넘어가 대신들을 멀리했고, 조고는 뒷방으로 물러난 황제를 대신하여 국정을 장악하였다.

제국의 권력자가 된 조고는 이사도 죄책감으로 조고에게 환멸감을 느끼자 이를 미리 눈치채고 처단했다. 이 일로 조고는 이세 황제의 더 큰 신임을 얻었고 중승상이 되어 사실상 최고권력자 자리에 오른다. 이때 궁에서 있었던 일로 만들어진 고사성어가 바로 지록위마이다.

하지만 진시황 시절의 수탈에 더해 호해의 사치와 조고 일가의 부를 위한 더 가혹한 수탈이 이어지자 전국칠웅 중 나머지 6국 출신 백성들의 불만이 누적되었다.

3.4. 망이궁 정변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켜 장초를 세웠다. 그러자 온 천하가 호응했고 제후들은 앞다투어 몰락한 육국을 재건하였다. 궁중에 틀어박힌 호해는 "관동의 도적들은 별 것 아니다"고 보고하는 조고의 말만 믿고 있었지만 장초의 군대가 희수(戲水)에 이르자 위급한 상황임을 깨닫게 되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소부 장한이 여산의 죄수들을 이끌고 장초의 군대를 깨부수자 진나라는 한숨 돌리게 되었지만 조고는 여전히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장한은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장한이 전투에서 계속 물러나자 조고는 사람을 보내 장한을 꾸짖었고, 장한은 사마흔을 보내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조고는 이미 장한을 죽일 생각으로 가득했었기에 사마흔을 만나주지 않았다.[9]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사마흔이 도망치자 조고는 사람을 풀어 붙잡으려고 했지만 잡지 못했다. 결국 진나라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장한은 항우에게 투항해 버렸다.

이 무렵 천하의 제후들이 진나라로 몰려오고 있었는데, 그중 패공 유방이 이끄는 군대가 무관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조고는 유방과 접촉하여 진나라 왕실을 폐하고 자신이 관중의 왕이 되려 하였다.[10] 조고는 황제가 노하여 자신을 처벌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꾀병을 부리며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한편 호해는 백호가 수레 왼쪽의 말을 물어 죽이는 꿈을 꾸었는데, 해몽한 결과 "경수의 신이 괴상한 일을 일으킨다"는 점괘가 나오자 망이궁(望夷宮)에서 목욕제계하며 경수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조고에게 온 나라를 뒤덮은 반란에 대한 일을 문책하였다.

그러자 조고는 두려워한 나머지 사위 염락(閻樂), 동생 조성(趙成) 등과 함께 호해를 폐하고 공자 영을 새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조고는 궁궐에 큰 도적이 들었다는 거짓말로 관리와 병사들을 불러모으고, 염락에게 천 명의 병졸들을 주어 호해가 있는 망이궁을 공격하도록 했다. 염락은 위령복야(衛令僕射)의 목을 벤 뒤 궁궐에 난입해 마구 활을 쏘았다. 궁궐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조고에게 대항한 수십 명은 모두 죽었다. 염락은 망이궁을 장악했고 호해는 염락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11] 이것은 수천 년 동안 반복될 중국사의 첫 번째 황제 시해였다.

이후 조고는 대신과 공자들을 불러모아 공자 영을 옹립하고, 동시에 '황제'라는 호칭은 육국이 떨어져 나간 지금의 현실과 맞지 않으니 다시 '왕'으로 되돌렸다.

3.5. 죽음

그러나 자영은 조고의 꼭두각시 노릇을 할 생각이 없었다. 조고는 자영에게 제사를 드리고 옥새를 받들라고 했지만 자영은 두 아들과 환관 한담(韓談)과 논의하여 조고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자영이 두문불출하자 조고는 사람을 보내 독촉했지만 자영이 움직이지 않자 결국 자기가 직접 찾아갔다. 그러자 자영이 조고를 재궁에서 찔러 죽인 뒤, 삼족을 멸해 시황제와 이세황제의 복수를 마쳤다.

하지만 조고를 죽인다고 해서 이미 쇠할 대로 쇠해버린 나라를 회생시키기엔 너무 늦은 판국이었고, 이미 유방의 군세는 패상(覇上)에 당도해 있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자영은 결국 즉위 46일 만에 항복을 택했다. 자영은 소복을 입고 포로로서 유방에게 항복했고, 조고처럼 진나라에 의해 조국을 잃은 항우에 의해 자영을 비롯한 진나라 영성 조씨 왕족이 멸족당하고 함양은 불바다가 되고 만다.

조고가 호해를 죽이고 자영에게 죽은 것에는 이설도 있다. 자영이 조고를 제거할 것을 아들들과 의논하면서 조고가 초나라 사람[12]과 내통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에 착안하여 조고가 호해를 죽인 것은 '초나라 사람'과의 밀약의 결과이며 관중으로 진격한 유방이 큰 전투 없이 비교적 쉽게 함양을 함락시킨 것 역시 이 밀약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

조고와 관련된 얽힌 사자성어로, 호해 앞에 사슴을 한 마리 끌어다 놓고 말이라 우긴 뒤 신하들의 반응을 살펴 말이라 하는 자는 내버려 두고 사슴이라 하면 모함해 내쫓거나 전부 죽여버린 일화에서 나온 권력으로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우긴다는 뜻인 지록위마(指鹿爲馬)가 있다.

이후에도 조고는 그 강력한 통일왕조 진나라를 단 6년 만에 망가뜨린 업적 덕에 중화권 문화 영향을 받은 곳에서는 간신의 대명사가 되었고 중화권 영향을 받은 왕조에서 특정 인물을 조고라고 비유하면 사실상 큰 모욕이나 다름 없는 수준의 이름이 되었다.

4. 평가

세계 역사에 간신은 많았으나 자기가 옹립하여 이용해먹은 군주를 자기가 시해한 자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일단 폐위시킨 후에 명분을 갖다 붙이거나 독살시켜 죽인 것도 아니고, 현재의 군주를 자신이 살기 위해 제대로 된 명분도 없이 그냥 궁궐에 쳐들어가서 죽인 사례는 조고가 유일하다.[13] 그야말로 간신을 넘어선 역적이라 중화권 문화를 받아들인 일부 국가에서 간신이라 하면 조고를 떠올릴 정도로 황호, 잠혼 따위는 명함도 못 내미는[14] 간신의 대명사가 된다.[15] 오죽하면 조국인 조나라를 멸망시킨 데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설이 돌 정도였다.

이 외에도 지록위마 사건으로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들을 숙청해서 이때 추방당한 신하들이 항우 편으로 붙게 한다거나, 시황제의 자식들을 다 죽이고, 이사같은 개국공신들을 죽이는 등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인하여 진(秦)나라의 멸망에 직접적인 역할을 한 세계 역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최악의 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

6.1. 드라마

6.2. 만화

공식능력치
시기 무력 지휘력 지력 정치
가이드북3 ? ? 92 90
* 하라 야스히사의 만화 <킹덤>에서는 태후 (진시황의 모친) 휘하의 젊은 환관으로서 처음 등장한다. 성우는 타케우치 에이지. 후궁 편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가짜 옥새를 이용하여 진시황과 여불위를 움직이게 만드는 수를 고안했다. 이후 애국의 난 편에서는 애국을 세운 태후 곁에서 재등장한다. 태후에게 포섭된 사람들은 그를 나라의 뼈대를 만들어낼 귀재로 평가하며 돈으로 다른 나라의 신하들을 사거나 초나라 군대를 움직이는 등 진나라를 안팎으로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나 돈으로 샀다고 생각한 초나라의 대신과 군대가 오히려 태후 측을 내란으로 몰고 가 진나라를 뒤흔들 장기말로 쓰고 버리려 하는 바람에 낭패를 겪으며 태후 측이 일으킨 내란이 진압되자 촉나라 땅으로 유배되었다. 나름 정치력 면에서 될성부른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아직 젊어서 경험과 담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태후의 대담한 행적에 식은땀을 흘리며 불안감을 표출한다. 실제 역사에서 등장하는 말년의 교활하고 자신만만한 모습까지는 아직 갈 길이 먼 듯.

6.3. 소설

6.4. 게임

파일:The Legend of Cao Cao Zhao Gao.png

[1] 죄를 지어 면직되었다가 시황제가 사면해주었다.[2] 부새(符璽, 옥새)를 담당하는 일.[3] 《사기(史記)》원문에는 조고가 환관이었다는 기록이 없다. 사위가 있기도 하고, 후한(後漢) 말에 환관의 폐단이 심해질 당시, <사기>에 주석을 단 유씨(劉氏)(성씨만 기록되어 있어서 이름을 알 수 없다.)가 환관에 대한 증오심에 '진(秦)나라도 환관인 조고 때문에 망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왜곡한 것으로 추정된다.[4] 《사기》 <몽염 열전>[5] 옥새 담당[6] 어가(임금이 타고 다니던 수레) 담당[7] 이는 진시황이 암살을 두려워해 조고만을 통해 연락을 한 만큼 조고가 마음만 먹으면 진시황에게 접근해 모함이 가능한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8] 진시황릉 옆에서 진시황의 자녀들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관이나 부장품은 호화로웠지만 시신은 목이 잘리고 사지가 토막 나고 두개골에 화살이 박혀있는 등 처참한 상태였다.[9] 사기에서는 조고가 장한이 승리해도 죽이고, 패배해도 죽이려 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추정상 장한이 계속해서 전공을 세우자 자신에게 위협이 될까 봐 장한을 제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장한이 이끄는 군대가 진나라의 마지막 군대인데, 이 군대를 이끄는 장한을 제거하려 했다는 점에서 조고가 얼마나 권력욕에 미쳐있는지 알 수 있다.[10] <진시황 본기>에선 먼저 접선한 쪽이 조고가 아니라 유방이라고 나오는데, 이게 진짜라면 유방이 조고에게 호해를 살해하도록 부추긴 뒤 계약 이행을 요구하자 오리발을 내밀면서 그대로 진격한 것일 수도 있다. 통수 대마왕 조고가 낚여서 제 무덤을 판 셈.(...)[11] 단, 호해가 그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버티다가 타살을 당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일단 당시 기록에 의하면 염락에 의해 자결을 강요받았다고 했으나 진짜로 호해가 염락의 강요대로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물론 그 상황에서 호해가 살아남을 방법은 사실상 아예 없으니 그 시기에 죽은 것은 확실하다.[12]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나 유방이나 의제, 어떤 주장으로는 항우를 들고 있다. 《사기》 <고조 본기>와 《한서》에선 유방이라고 말한다.[13] 그 조고에게 죽임을 당한 호해가 아무리 중국사에서 손꼽는 희대의 폭군이자 암군이라 할지라도 당시 조고의 만행은 절대 정당화되지 않는다.[14] 황호, 잠혼이 비록 간신으로 나라를 약화시키는 데 지대한 공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모시던 황제는 끝까지 모셨고, 촉한(蜀漢), 동오(東吳)의 직접적인 멸망과는 큰 관련이 없다. 촉한은 험난한 산길을 등애가 뚫고 방어하는 촉군들이 괴멸된 상태라 유선이 항복을 결정하는 바람에 멸망한 것이고, 동오 역시 이궁의 변으로 인해 후계구도가 좀 꼬인 것과 더불어 폭군 손호가 나라를 말아먹고 거기에 잠혼이 거든 것이며, 망한 것도 결국 서진(西晉)의 공격에 버티지 못한 거지만 조고는 진(秦)나라의 멸망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15] 조선에서도 조고의 악명이 너무 높았기에 누군가를 조고에 빗대는 것 자체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의 수위 높은 발언이었다.[16] 사실 이 부분은 유방의 의도치 않은 낚시였다. 처음에는 의심병이 도져 번쾌를 죽이라고 진평과 주발을 보냈는데 여후와 역상이 두 사람이 나간 이유를 오해하고 지레 겁먹은 것.[17] <신삼국>의 원소 배우. 원래 시황제 역이 같은 작품에서 조조를 맡았던 천젠빈으로 예정되어 있었음을 생각하면 미묘하다. 물론 천젠빈을 대신해서 유비 역할의 위허웨이가 맡았다는 점 역시 미묘하기는 마찬가지이다.[18] 배우와 마찬가지로 신삼국에서 원소를 맡았다.[19] 이후 성우 홍진욱은 후속작 <와이파이 삼국지>에서는 황호를 연기하게 된다.[20] 노애의 난으로 인해 병사들이 많이 희생되어 궁에도 피해가 갔다.[21] 코를 베어내고 양발을 잘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