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秦) 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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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제2대 황제 이세황제 | 二世皇帝 | ||||
<colcolor=#fff> 출생 | 기원전 229년[1] | |||
영진 함양 (現 산시성 셴양시) | ||||
사망 | 기원전 207년 (향년 22세) | |||
진나라 함양 (現 산시성 셴양시) | ||||
재위 | 진 말대 황제 | |||
기원전 210년 ~ 기원전 20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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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 조(趙) | |||
휘 | 호해(胡亥) | |||
부황 | 시황제 | |||
모후 | 호희(胡姬)(?) | |||
황후 | 불명 | |||
제호 | 이세황제(二世皇帝) |
이세황제 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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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亡秦者胡也(망진자호야)
진을 망하게 하는 것은 호(胡)이다.
《천록비결》(天籙秘訣)
중국 진(秦)나라의 제2대 황제이자 중국 역사상 두 번째 황제였으며, 최초로 시해를 당한 황제였다. 시황제의 18남이자 서자로, 그의 치세때 진나라는 망국으로 치닫게 되었다.진을 망하게 하는 것은 호(胡)이다.
《천록비결》(天籙秘訣)
선대의 시황제는 나중의 황제들이 2세, 3세, 4세… 이런 식의 제호를 삼도록 정했다. 따라서 2세 황제(二世皇帝)란, 문자 그대로 두 번째 황제라는 뜻이되 정식 제호(帝號)이다.
2. 생애
2.1. 탄생에서 즉위까지
출생 연도는 정확하지 않은데 《사기》 〈진본기〉(秦本紀)에 의하면 호해가 등극할 때의 나이가 12세였다고 하고,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2세 황제 원년에 그의 나이가 21세였다고 되어 있다. 〈진시황본기〉의 내용에 따라서 역산하면 출생연도를 기원전 229년으로 추정한다.야사에선 호해를 낳았다고 알려진 궁녀가 형가에 의한 시황제 암살 미수 사건 때 시황제를 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호해는 시황제의 18남인데다가 서자였기 때문에 제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에게는 천하의 모사꾼이었던 조고(趙高)가 있었다.
기원전 210년, 시황제가 제5차 순행에 나서면서 호해와 조고도 동행했는데 황제가 사구에 이르렀을 때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50세의 나이로 붕어하고 말았다. 《사기》에 의하면 시황제는 장남인 부소가 제위를 계승하도록 유언했으나 조고가 승상 이사(李斯)와 짜고 시황제의 유서를 날조해 호해에게 제위를 계승하게 하는 것으로 조작하고, 부소와 몽염에게는 자결하라는 명령을 위조했다고 한다.(사구정변) 문제는 '과연 《사기》의 기록대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당시 세간의 인식이 호해의 등극을 곱지 않게 바라봤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한편으로 시황제가 말년으로 갈수록 의심병이 더해졌고, 판단력도 흐려져서 호해에게 제위를 승계하게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호해와 이사가 조고에게 설득되어서 이러한 날조에 동참했음을 설명하며, 그들의 대화를 전하고 있다. 처음 호해와 이사는 죽은 시황제의 어마어마한 권위 탓인지, 아니면 그들이 받은 교육과 학문,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정변이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서 조작과 황위 찬탈을 거부했다. 특히 단순한 무뇌아로 인식되는 호해는 적어도 이때만큼은 진 제국의 법령과 시황제의 지시, 그리고 형 부소의 계승 정당성 등을 거론하며 조고의 설득을 두 번 넘게 거절했으나, 조고는 여러 궤변 및 감언이설로 호해를 녹이며 결국 설득하게 된다. 사실 허망한 자살로 인해 최후를 맞기는 했으나, 부소는 실제로도 진 제국 전반에서 최소한의 인망은 얻고 있었고, 그를 수호하는 장군 몽염 또한 정복전쟁 당시부터 맹활약했던 조부 몽오, 부친 몽무와 더불어 여러 차례 전공을 올린 장수였다. 거기에 그들이 있었던 장성에는 이민족 방어를 위한 강력한 병력이 있었으므로 최소한 한 번 정도는 도박을 해볼만 했으나,[2] 부소가 거짓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자살함으로서 진 제국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쨌든 호해는 가장 걸림돌이라 할 수 있는 형 부소와 명장 몽염, 우승상 풍거질(馮去疾), 대장군 풍겁(馮劫) 등을 제거했으며 자신의 제위를 위협할 만한 형제와 누이 20여 명도 숙청하고 제위에 오르게 된다.[3] 진시황릉의 배장갱 중에는 사람이 묻힌 무덤도 여러 곳 발굴되었는데 무덤의 부장품이나 관은 호화로웠으나 막상 묻힌 유골은 나이도 젊고 건강 상태도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두개골에 화살촉이 박혀 있거나[4] 사지가 토막나는 등 잔혹한 처형을 당한 상태였다. 이는 호해가 죽인 그의 형제, 자매들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때 누이 10명은 가장 잔혹하게 사지를 찢어죽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진시황릉 발굴 때 발견된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골들이 팔다리가 인위적으로 절단되어 나란히 포개져서 묻힌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 《사기》에 묘사된 잔혹한 기록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특히 《사기》 〈이사열전〉에 보면 호해의 형제들 중 유일하게 공자 고(公子 高)는 먼저 죽음을 청했기 때문에 호해가 은혜를 베풀어 자살을 허락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이 배장갱 중 딱 남자 유골 1구만 외상이 없이 멀쩡한 상태여서 이것이 공자 고의 유해라고 추정되고 있다.[5]
아주 유명한 야사로 시황제가 불로장생초를 찾으라 보낸 수많은 종자들 중 한 명이 신선을 만나 불로초를 부탁하자 그 신선은 '《천록비결》'이라는 책을 건네주고 그 글귀를 해독하면 불로초가 있는 곳을 알 수 있으리라고 했다. 종자가 시황제에게 책을 바친 후 수많은 학자들이 달라붙어 해독했지만 "진나라를 망하게 할 것은 호(胡)다."라는 한마디만을 해석해낼 수 있을 뿐이었다. 시황제는 이를 듣고는 '胡'를 오랑캐라는 뜻 그대로 해석하여 북방의 흉노 등으로 생각해 만리장성을 축조하게 했으나 실상은 막내 아들 호해를 일컫는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호해의 이미지가 여러모로 좋지는 않았던 듯하다.[6]
2.2. 혼란을 거듭한 치세
시황제가 6국을 병합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제국이 출현하긴 했으나 시황제의 급속한 중앙집권정책과 과도한 대규모 토목공사는 6국 유민들의 큰 불만을 샀다. 이런 가운데 즉위한 호해는 자신을 황위로 올린 모사꾼 조고에게 휘둘리면서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않았고, 이때문에 진나라의 정세는 급속도로 어지러워졌다.호해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등극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았고, 정통성에도 논란이 있어서였는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측면에서 시황제 대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그대로 이어나갔다. 시황제의 거대한 능침인 여산릉의 공사를 계속하는 한편, 시황제 대에도 완공되지 않았던 아방궁과 만리장성의 공사도 이어갔다. 문제는 이런 토목공사가 지속되면서 백성들의 불만도 커져갔다는 점으로,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승상 이사가 호해에게 아방궁 건립의 중단과 조세 부담 완화를 주청했다. 그러나 조고의 농간으로 호해는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시황제의 치세를 이끌었던 공신 이사는 결국 숙청되고 말았다. 이들이 제거되면서 조고의 권력은 커졌고, 호해는 그에게 모든 국사를 맡겨버리며, 자신은 유흥에 빠져들었다.[7]
정통성의 부족으로 진 조정에서도 큰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위 후 형제들뿐만 아니라 누이들까지 모두 잔혹하게 처형[8]하고 그들과 연루시켜 선대의 대신들부터 말단 관리들까지 많은 신하들을 처형해서 조정이 텅비었다는 표현까지 나왔다. 매끄럽지 못한 등극으로 극심한 내부 분열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불안정한 입지 때문에 공포정치를 택한 것인지 이후에도 거슬리는 간언을 하는 신하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하며 반진봉기가 시작되자 심상치 않으니 대비해야 한다고 충언한 신하들도 처형해버렸다 (숙손통 항목 참조). 심지어 좌•우 승상인 풍거질과 이사, 장군 풍겁이 함께 지금 반란 진압이 쉽지 않으니 토목공사를 중단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이자고 간언하자 모두 잡아들여 풍거질과 풍겁은 자결케하고 이사는 처형했다. 영성 조씨 종실과 최고위 대신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관료들을 몰살시켜버리니 중앙정부가 제대로 기능할리가 없었다. 진나라와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에서 중앙정부의 기능 상실은 그것만으로 이미 나라가 반은 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중앙집권의 취약점을 스스로 극대화한 상황은 이어지는 반진봉기에 대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기력한 대처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진나라의 과도한 조세와 부역 및 급속한 중앙집권정책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이 난은 장한에 의해 겨우 제압되었으나 문제는 진승·오광의 난으로 인해 진나라에 저항하는 봉기의 불이 당겨져서 각지에서 반란이 속출한 것이었다.
일단 호해는 재위 2년 9월에 마지막으로 남아있었던 춘추전국시대 국가인 위(衛)나라의 군주를 폐하여 주나라의 명목상 마지막 후계국을 없애버렸으나, 이때는 이미 7월에 6국이 모두 부활하고, 진승•오광의 난이 벌어진 이후였다.
2.3. 최후
호해의 거듭된 실정으로 통일제국은 금세 분열되었고, 유방과 항우 등의 세력들이 일어나 이들이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향해 진격해 들어오면서 호해 정권은 초유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간신 조고가 중간에서 보고를 차단한 탓에 호해는 천하가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조고의 모함에 제거당할 위기에 처한 장한이 200,000명의 대군과 함께 항우에게 투항해 버리면서 더 이상 진나라를 지킬 힘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한편 유방의 군대가 함양 남쪽의 무관에 이르게 되자 결국 조고는 호해에게 모든 것을 들키게 됨을 우려한 나머지, 사위인 염락과 함께 모반을 도모했다. 일부 기록에선 조고가 진나라를 유방한테 넘겨주고, 대신 조나라를 받는 걸로 유방과 밀약을 맺고 호해를 죽였거나, 혹은 유방 쪽에서 일부러 조고를 충동질한 다음 시치미를 뗀 듯한 정황이 있다.조고를 비롯한 대•소 신료들이 죄다 죽음이 두려워 입을 다문 결과, 결국 호해는 함양에 반란군이 입성하는 시점이 되어서야 돌아가는 상황을 깨닫게 되었다. 《십팔사략》에는 호해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호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 짐에게 미리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단 말이냐?"[9]
시종: "구태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무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이 그걸 말했다면 진작에 죽임을 당했겠지, 오늘날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염락이 군대를 이끌고 황궁을 포위한 후 병사들에게 끌려나온 호해에게 자결할 것을 강요하여 결국 호해가 자결을 하는 방식으로 살해되면서 2년의 치세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망이궁 정변).시종: "구태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무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이 그걸 말했다면 진작에 죽임을 당했겠지, 오늘날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기》에는 호해가 죽는 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호해: "살려주시오. 황제가 아닌 한 지역의 왕으로서 조용히 살겠소."
염락: "안 되오."
호해: "그럼 일개 열후로 만족하겠소."
염락: "안 되오."
호해: "그럼 변경 산골에서 백성으로 살게 해 주시오."
염락: "안 되오.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오."
포기하고 자결을 했는지, 끝까지 거부를 하다가 자결당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렇게 호해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염락: "안 되오."
호해: "그럼 일개 열후로 만족하겠소."
염락: "안 되오."
호해: "그럼 변경 산골에서 백성으로 살게 해 주시오."
염락: "안 되오.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호해는 염락의 강요에 자살했다고 사마천이 표현했으니 그도 호해를 그리 좋게 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렇게 영호해는 자신의 아버지인 시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고 그 지위를 이어받자마자 중국 역사상 최초로 시해당한 황제가 되었다.
3. 평가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불의이고, 아버지의 조서를 받들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불효이며, 재능이 천박하면서 억지로 남의 공로에 의지하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오. 이 세 가지는 덕을 거스르는 것으로, 천하가 복종하지 않을 것이고, 자기의 몸마저 위태롭게 될 것이고, 사직의 제사를 받들지 못하게 될 것이오.”[10]
-호해, 조고의 사구정변 제안을 거절하며(《사기》 <이사열전>)
호해는 시황제라는 절대적인 카리스마의 군주가 퇴장한 후 진나라가 유지되느냐 마느냐의 중대한 시점에 즉위한 황제였으나 제국을 이끌만한 능력이 없었기에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못했고, 문제만 악화시킨 최악의 암군이자 폭군이었다. 차남이나 삼남도 아닌 18남이자 적자도 아니었으면서, 적법한 후계자였던 태자 부소를 자살시키는 등 전혀 정통성이 있는 즉위도 아니었기 때문에 신하들과 백성들의 지지도 얻지 못했을 것이며, 그렇다면 묵돌이나 조혜문왕 처럼 황제 노릇이라도 잘했어야 하는데,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시황제의 엄혹한 정책을 더 밀어붙인 탓에 결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진나라 멸망의 결정타를 날리게 된다.-호해, 조고의 사구정변 제안을 거절하며(《사기》 <이사열전>)
의외로 《사기》의 기록상으론, 즉위 전의 호해는 선천적으로 악하다거나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다. 조고의 사구정변 제안을 처음에는 거절했으며, 이때 한 호해의 발언은[11] 지극히 정론이다.[12] 또한 이사 역시도 처음에는 조고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그러나 결국 조고의 궤변과 유혹에 호해와 이사가 넘어가면서 사구정변의 참사가 일어났고, 마침내 진나라를 말아먹었으니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은 없어 보인다. 요컨대, 호해 자체는 처음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으나, 궤변과 유혹에 굴하여 형 부소를 자살하게 만들고, 분수에 맞지 않는 황제 자리에 올라 국정 질서를 문란케 한 것이다.
진나라의 멸망 이후 역사를 되짚어 보면 영호해의 행보는 더 답이 없는데, 비록 시황제 사후 4년 만에 진나라는 망했지만, 진나라의 중심부인 관중 지역은 진나라 멸망 후에도 1,000년 넘게 번영하며 한나라나 당나라 등 그 지역을 수도로 삼은 통일 왕조들에게 풍부한 경제력과 높은 생산력을 통해 수백 년 동안 엄청난 국력을 실어주었다. 당장 유방이 항우를 이길 수 있게 해준 근간이 관중 지역의 생산력이었는데 진나라가 망하고 거의 곧바로 초한전쟁이 시작되므로 호해 때 피폐했다가 소하 등이 회복한 것도 아니었다. 더불어 당시 진나라는 영성 황족들에 대한 지지가 강했는데, 당장 호해를 죽인 조고조차 자기가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시황제의 후손을 즉위시켜야 했을 정도로 관중 지역의 귀족들과 주민들의 진 황실에 대한 충성도는 상당히 강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진나라가 통일 왕조는 유지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함곡관 서쪽 전국시대때의 진나라 영토는 유지할 여력이 충분히 있었고, 조금만 장기전으로 끌었어도 구심점이 남은 진나라가 다른 반진 연합군보다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당장에 급조된 반진연합군보다 훨씬 정예인 합종군을 가지고 논 것이 진나라였다. 그러나 이런 유리한 상황에서도 호해는 폭정과 직무유기로 단 4년 만에 수도 함양이 후초군에게 함락되도록 만들어 버렸다.
당장에 진승·오광의 난으로 망할 것만 같던 진나라가 명장 장한이 여산의 죄수들을 긁어모아 반란 토벌에 나서자 진승이고 뭐고 다 갈아버렸다. 함곡관 동쪽으로는 통제력을 상실해 사실상 전국시대의 진나라 수준으로 축소된 상황에서도 구 6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다 평정해버릴 듯한 저력을 보인 것이 진나라였다.[13] 그런데 호해는 그걸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제대로 말아먹었으니 암군이 아닐 수가 없다.
4. 대중매체에서
대부분의 매체에서도 주지육림을 일삼으며 노닥이다가 조고에 의해 살해당하는 무능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특히 이름의 '해'(亥)자가 돼지라는 뜻이 있는데다가 폭군 이미지와도 잘 맞아떨어지기에, 대체로 뚱뚱하고 살집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 영화 〈서초패왕〉에서는 첫 등장부터 궁녀들을 채찍으로 때리며 즐기는 SM 변태로 나오고, 등장한 지 얼마 안 가 조고가 직접 칼로 해치우는 캐릭터로 나온다.그나마 드물게 의외로 능력치는 나쁘지 않으나 몰락했다고 묘사한 게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이다. 생김새도 멀쩡하고 능력치도 제법 있게 나오지만 조고를 감싸다가 나중에는 조고에게 책임을 물으려다가 역으로 당하면서 몰락하는 인물로 그렸다. 또 고우영 화백의 작품에서도 빼빼마르게 나오는데, 《고우영 초한지》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체구가 작지만 잔혹한 성품의 모습으로 나오고,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주근깨투성이로 병약하고 의심이 많은 청소년의 모습으로 나온다. 《고우영 초한지》에서는 살려달라고 빌다가 결국 자결하는데 죽음에 대한 공포로 정신이 나가서 왕관을 이빨로 씹어먹다가 칼로 스스로 찌르고 피투성이가 되어 한동안 고통스러워하며 죽는다. 반대로 《고우영 십팔사략》에선 씨익 웃으며 한 칼에 목을 찔러 금세 죽는다.
드라마 <초한전기>에서는 <삼국>에서 위문제 조비역을 맡았던 우빈이 호해를 연기했다. 재밌는 점은 KBS 더빙 방영시에도 <삼국>에서 조비역을 맡았던 최정호가 호해의 성우를 맡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빠릿하고 영악한 면이 있었던 조비와는 달리 이미지는 정반대로 어리석고 찌질한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이쪽은 정감도 있고 인간미도 있어서 황제의 일이 자기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는 말도 하고, 피의 숙청 앞에서도 좀 찝찝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타 매체에 비하면 차라리 대우가 나은 편이다. 황제가 된 후에도 형인 부소가 자기보다 나았을 재목이라며 탄식도 하고, 어느 시점부터는 정사도 열심히 돌보려는 의지를 내비치나 번번이 조고의 말빨에 넘어가 흐지부지된다. 그렇지만 아예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는지 조고의 야심을 알아챈 후, 미친 척 연기를 했고 역시 미친 척하고 숨어 지내던 부소의 아들인 자영을 불러 자신을 돕도록 하려고 한다. 물론 자영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호해 앞에서 끝까지 바보 연기를 한다. 이후 거록대전에서의 참패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서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직접 대신들과 만나 국정과 전쟁을 지휘하려고 했다. 그에게 진실을 숨긴 신하들을 갈구면서 '이 거세나 해버릴 놈들!'이라 하다가 조고에게 '아 맞다 니는 이미 해버렸지?'라고 까기도 했다. 하지만 호해를 죽이려고 마음을 먹은 조고에게 당해 자결을 하려 했으나 못하고, 끝까지 호해에게 충성을 했던 환관 한담에게 대신 부탁해 생을 마감한다. 이후 한담은 자영을 도와 조고를 숙청할 때 큰 역할을 했다.
문정후의 《영웅 초한지》에서는 돼지같은 풍모에 무능하면서도 사악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조고와의 결탁으로 황제에 오른 이후에는 미녀와 산해진미에 둘러싸인 채 조고가 올리는 소식만 믿고 살다가 최후 직전 최근들어 꿈자리가 뒤숭숭 하다며 한 신하에게 반란은 다 진압됐냐며 바깥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를 물어보는데, 목숨을 걸고 직언을 올린 어떤 신하 덕에 그제서야 자신이 속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때의 모습이 걸작인데 신하가 눈물을 흘리며 반란이 전국 각지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고하고 그중에서도 항우와 유방의 군대가 이미 함양 코앞까지 와있다는 말을하자 큰 충격을 받은 호해는 사태가 그지경이 되도록 승상은 뭘했냐고 소리치지만 그 신하는 눈물을 쏟으며 일이 이지경까지 이른것은 폐하께서 승상 조고의 말만 듣고 다른 신하들의 충언을 외면하셨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자 자신이 조고만 믿고서 너무 방탕하게 지내왔다는걸 본인의 죽음 직전에야 깨달으며 그 후 조고를 불러 문책하고 다시 권력을 되찾으려 하지만 소환령을 받은 조고가 염락을 통해 먼저 선수를 쳐 궁궐에 쳐들어갔고, 결국 염락에게 잡힌 호해는 목숨을 구걸하다 안 되어 자결하는데, 《사기》에서 나온 대사의 골자를 그대로 썼으나 더욱 극적이고 비참하게 서술한 것이 압권이다.
호해: "스…. 승상을 만나게 해 주시오."
염락: "흐흐…. 진제국의 황제라는 자가 나같은 무관에게 경어까지 쓰시다니…. 승상은 만나게 해 드릴 수 없소!"
호해: "그… 그럼 내 말이라도 승상에게 전해 주오. 조그만 지방의 왕이라도 시켜 준다면 당장 그곳으로 가겠다고."
염락: "흥. 진제국을 이 꼴로 망쳐 놓고 왕이라니, 가당치 않소이다."
호해: "그렇다면 제위를 버리고 낙향해서 처자와 함께 조용히 살아 가겠다고……."
염락: "그것도 안 될 말이오."
호해: "그… 그럼 모… 목숨만이라도……."
염락: "참으로 답답하시오. 승상께서 원하시는 건 그대의 목숨이오. 모르시겠소? 마지막으로 자결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지."
염락: "흐흐…. 진제국의 황제라는 자가 나같은 무관에게 경어까지 쓰시다니…. 승상은 만나게 해 드릴 수 없소!"
호해: "그… 그럼 내 말이라도 승상에게 전해 주오. 조그만 지방의 왕이라도 시켜 준다면 당장 그곳으로 가겠다고."
염락: "흥. 진제국을 이 꼴로 망쳐 놓고 왕이라니, 가당치 않소이다."
호해: "그렇다면 제위를 버리고 낙향해서 처자와 함께 조용히 살아 가겠다고……."
염락: "그것도 안 될 말이오."
호해: "그… 그럼 모… 목숨만이라도……."
염락: "참으로 답답하시오. 승상께서 원하시는 건 그대의 목숨이오. 모르시겠소? 마지막으로 자결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지."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유방전> 스토리에서 진시황이 죽자 이사와 조고가 황제의 유언장을 조작해 호해가 즉위했다는 것이 언급으로 나오며, 이후 진나라를 상대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진나라의 장한이 이끄는 군대 20만 명이 초군의 항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신하로부터 전해듣는데, 믿을 수 없다고 여기지만 신하로부터 조고가 두려워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고에게 나라가 이 꼴이 될 때까지 뭐했냐고 따지다가 조고로부터 노느라 정무를 돌보지도 않고 죄를 모두 뒤집어씌우려 든다는 말을 들었으며, 호해는 경비병을 부르려고 했지만 조고가 궁중 안에 있는 자신의 사람들을 시켜 공격하자 살해당한다.
《이문열 초한지》에서는 염악에게 여러 가지 말을 해보지만(그냥 《사기》에 기록된 대화 그대로다.) 염악이 죽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 말고는 어떤 부탁도 들어줄수 없다고 윽박지르자 마지막에서야 황제다운 모습을 보이며, 조고의 악행을 비난하고,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저주하고는 목을 칼로 찔러서 자결한다.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초한지>에서는 강수진이 연기했다. 사구정변 당시 첫 등장하여 조고, 이사에게 옹립되어 황제 노릇을 하다가[14] 조고와 그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담당 성우는 후속작에서 영제를 연기했다.[15]
학습만화 《진시황릉에서 살아남기》에서 만수가 아이들과 함께 진시황릉에 있는 해골들을 보고, 2세 황제가 진시황릉 공사를 담당하던 인부들을 생매장한 기록을 《사기》에서 봤다고 말한다.[16]
2011년 중국 애니메이션 <진한영웅전>(秦汉英雄传)에서 호해가 지아오(쇼타)의 형상으로 등장하면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호해는 여기서 마지막에 자살이 아니라 염라에게 참살당했다. 어린이의 죽음과 관련된 원인으로 호해가 살해된 장면은 이 애니메이션의 명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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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기》에는 원년(기원전 209년)에 21세였다고 기록되었지만, 같은 책의 다른 부분에는 12세라고 기록되어 있어 모순이 발생한다. 여기서는 전자를 따른다.[2] 민중이나 중신의 여론을 잡고 있었던 만큼, 마냥 불리하지만은 않은 게임이었을 것이다.[3] 특이한 사실은 형제뿐 아니라 누이들도 숙청했다는 것이다. 전근대의 동아시아에서는 여자가 왕이나 황제가 되는건 예외적이었고, 심지어 그런 이들도 거의 대다수는 탈법적인 방식으로 오르거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음을 감안해보면 호해가 무슨 이유로 누이들까지 죽였는지 의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형제들보다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는 누이들이 더 잔혹하게 죽었다. '나는 친인척도 안봐주는 사람이니까 어리다고 얕보지 말고 알아서 기어라'라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4] 석궁으로 뒤통수를 쏘아죽였다.[5] 비록 공자 고는 죽었지만 먼저 자살을 청한 덕에 그의 일족은 숙청을 면했다고 한다. 하지만 몇 년 후 항우가 함양을 함락하고 영성 조씨 황족들을 몰살시켰다고 하니 결국 그들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6] 물론 이는 진나라의 멸망 후에 만들어진 프로파간다일 가능성이 높다. 본래 역사상 이런 예언류의 글들은 대부분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만들어진다.[7] 조고는 호해를 어릴 때부터 보필한 내시이자 가정교사격인 인물로 호해의 정신적인 지주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호해에게 황제의 본분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끝없이 추구하는 것이며, 국사는 신하에게 모두 맡기는 것이 미덕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자 호해는 그대로 홀려버렸고, 결국 후궁에 수천 명의 궁녀를 두고 주지육림에 빠져들었다.[8] 사마천의 《사기》 <이사열전>에는 남자들은 시장에서 참수하고, 여자들은 사지를 찢어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9] 당연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건 모두 호해 본인의 자업자득이었다. 호해는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는데, 예시로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난 후 누군가 호해에게 이를 보고하자 벌컥 화를 내며 그를 가두었고, 그래도 찝찝했던지 박사들과 유생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더니 모두들 저 반란을 일으킨 놈의 모가지를 날려버려야 한다고 대답했는데 이는 너무나 맞는 말이었지만 호해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 자체가 싫은건지 그들도 죽였다. 바른말 하는 사람은 자기가 다 죽여놓고 이 말을 하니 어이가 없는 일이다.[10] 「廃兄而立弟, 是不義也;不奉父詔而畏死, 是不孝也;能薄而材譾, 彊因人之功, 是不能也:三者逆徳, 天下不服, 身殆傾危, 社稷不血食.」[11] 위의 발췌문[12] 정말 호해 본인의 말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정통성이 없는 2세 황제가 즉위하자 나라가 복종하지 않았으며, 결국 호해 본인의 몸조차 위태롭게 하고, 진나라의 사직은 끊겼다.[13] 심지어 장한은 통일전쟁과 이후 대외정벌에 참여한 커리어가 없어, 만약 호해가 조정을 박살내놓지 않았다면 진나라의 군부에서 몽염 같은 총사령관급의 에이스 장수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통일전쟁의 공신에다가, 유방도 털린 흉노를 정벌한 확실한 에이스였던 명장 몽염을 죽인 것은 호해였다.[14] 거의 놀고 사냥하다가 일은 조고에게 맡겼다. 놀다가 광기가 드러난다.[15] 두 황제의 연기에서 폭군과 암군의 차이가 드러난다. 꽤나 디테일한 부분이다.[16] 이에 우주가 인부들 중 탈출한 사람이 없냐고 묻자 만수가 수로를 담당하던 인부 한 명이 수로를 통해 탈출에 성공했다는 전설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