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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로마 제국 제129대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Κωνσταντίνος ΙΑ΄ | |||
출생 | 1405년 2월 8일 |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보아 블라헤르네 궁전 | |||
실종 | 1453년 5월 29일 (향년 48세) |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성 로마노스 성문 | |||
재위기간 | 로마 황제 | ||
1449년 1월 6일 ~ 1453년 5월 29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가문 | 팔레올로고스 가문 | |
본명 |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 Κωνσταντῖνος Δραγάσης Παλαιολόγος | ||
부모 | 아버지 마누일 2세 어머니 엘레니 드라가시 | ||
형제자매 | 디미트리오스, 토마스 | ||
종교 | 정교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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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는 훌륭한 군인과 유능한 행정가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스티븐 런치만[1],《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로마 제국의 제129대 황제. 스티븐 런치만[1],《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로마 제국과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으며, 더 나아가 왕국 시대부터 공화국 시기를 통틀어 2,205년을 이어온 로마 역사상 마지막 지도자였다.
2. 언어별 표기
1953년 그리스 화가 포티스 콘도글루(Φώτης Κόντογλου, 1895~1965)가 그린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이콘 | 이탈리아 모데나에 있는 에스턴스 장서고의 콘스탄티노스 11세 초상화 |
그리스어[2] | 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Κωνσταντίνος ΙΑ΄ Δραγάσης Παλαιολόγος) |
라틴어 |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 팔레올로구스(Constantinus XI Dragases Palæologus) |
세르비아어 | 콘스탄틴 11세 드라가시 팔레올로그 (Константин XI Драгаш Палеолог) |
영어 | Constantine XI Dragases Palaiologos |
중국어 | 君士坦丁十一世[발음] |
일본어 | コンスタンティノス11世パレオロゴス・ドラガセス |
프랑스어 | Constantin XI Paléologue |
이탈리아어 | Costantino XI Paleologo |
3. 생애
3.1. 즉위 이전
팔레올로고스 가문 출신이며, 별칭은 '드라가시스'(Δραγάσης)로 어머니가 세르비아의 드라가시[4] 가문 출신이라 붙은 별칭이다. 팔레올로고스라는 성보다도 어머니의 성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마누일 2세와 엘레니 드라가시 사이에서 8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그 중 둘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으므로 장성한 황자들 중 4남에 해당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성장기는 알려진 바가 상당히 적은데 가끔 '포르피로게니토스'[5]로 묘사되는 것으로 보아 블라헤르네 궁전의 자주색 산실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사냥과 승마, 무예에 소질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몇 가지 기록으로 볼 때 모험심과 활달함, 용기를 갖춘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남인 요안니스 8세가 차기 후계자로 지명된 상황에서 차남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와 3남 안드로니코스는 각각 모레아와 테살로니키의 데스포티스로 임명된 상황이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워낙 적었기 때문에 어린 콘스탄티노스는 할당된 영지 없이 당분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무르게 되었다.
1422년 6월, 17세의 소년이었던 그는 무라트 2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을 경험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마누일 2세와 차기 후계자인 요안니스 8세의 공동 황제 통치 시기였다. 결국 오스만군은 해가 가기 전에 철군했지만 이 공성전이 크나큰 스트레스가 되었는지 공성전 기간 중인 9월에는 부황 마누일 2세가 뇌졸중으로 반신 마비를 겪기도 했다. 다음해 여름, 외부로는 오스만군의 공세에, 내부로는 반란 음모와 불치병에 시달리던 안드로니코스 데스포티스가 베네치아인들에게 영지인 테살로니키를 넘겨주었는데, 그 보람도 없이 7년 후인 1430년 3월 29일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술탄국에게 함락되었다.
요안니스 8세의 치세 동안 콘스탄티노스는 황제를 대리할 섭정직을 두 차례나 맡았다. 당시 요안니스 8세는 서방세계의 도움을 얻기 위해 몸소 서유럽으로 찾아가 동•서교회의 통합을 추진했는데 이때문에 황제가 부재할 동안 수도를 관리할 섭정이 필요했다. 첫 번째는 1423년 11월부터 이듬해 11월 초, 그가 18세 ~ 19세 때의 일로 이것이 그가 맡은 최초의 정치적 직무였다. 두 번째 섭정기는 1437년 11월 말에서 1440년 2월까지였다. 이 두 차례의 섭정기를 통해 콘스탄티노스는 후사가 없었던 형 요안니스 8세를 이을 잠정적인 후계자로 여겨졌다.[6]
1428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제국의 번국인 모레아 전제군주국[7]의 군주가 되었다. 모레아의 데스포티스 시절에 라틴계 아테네 공국 및 아카이아 공국 등을 격파하고 흡수함으로써 그리스 남부의 경쟁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1443년에 이르면 베네치아의 식민지 일부를 제외한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 지역과 아티키 반도의 상당수를 세력권에 넣었지만 이를 경계한 무라트 2세의 오스만 대군에 의해 영토를 모조리 토해내야 했으며,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입구인 코린토스 지협에 모레아 전제군주국이 세운 제국판 만리장성인 '헥사밀리온'이 함락되고, 모레아까지 황폐화되었다.
44세가 되는 1448년에 맏형인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8세가 후사없이 붕어한 뒤 동생인 디미트리오스와의 사이에서 제위 계승 분쟁이 있었으나 오스만 술탄 무라트 2세의 지지를 받아 콘스탄티노스가 제위에 올랐다. 대관식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니라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수도였던 미스트라에서 치렀는데 이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닌 지방도시에서 즉위식을 올린 황제는 몇 명 있었으나[8]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예외적이었던 것은, 그들은 모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다시 한 번 즉위식을 거행했던 반면 그에겐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동•서교회의 통합 문제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로마 교황의 군사 지원을 얻고자 동•서교회의 통합을 꾀했고,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조차도 그에 동조적이었으나 그걸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성직자들도 많았다. 교단 내에서까지 배척받는 총대주교에 의해 대관식을 받게 되면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즉위하는 순간부터 정치적인 위기에 직면할 확률이 높았다. 한참 뒤에 반발이 줄어들거나 교회 일치는 없었던 일로 한다는 어명이라도 떨어졌더라면 성 소피아 성당에서의 대관식도 가능했을 테지만 이전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해서 그에게는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이로써 멸망을 앞둔 로마 제국의 운명을 대변하듯,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후 유일하게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지 못한 동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3.2. 즉위
1449년 1월 6일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로마 황제로서 즉위식을 올렸다.[9] 그가 제위에 올랐을 때 이미 동로마 제국은 완전히 몰락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일부(= 모레아 공국)[10]를 제외하면 그 영토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에만 겨우 남아 있는 도시국가로 전락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 주변의 영토는 죄다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술탄국에게 완전히 장악당했기 때문에 제국이 부흥할 가망이라곤 전혀 없었다.콘스탄티노스 11세는 로마 황제의 자리가 매우 위험하고 이름밖에 남지 않은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즉위한 후에는 불가피한 멸망을 조금이나마 늦추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통치했다. 훌륭한 인품과 교양을 지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으며, 존망의 기로에 선 로마 제국을 구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외교를 펼쳤다. 정교회에 대한 교황 수위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11] 서유럽에 지원 요청을 했고[12] 당시 교황이었던 니콜라오 5세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으나 교황령에서 보낸 지원군은 고작 궁수 200명과 식량 뿐이었다.
사실 당시 교황령의 군사력도 동로마 제국만큼 약하다 보니 제대로 된 지원을 해 줄 여력이 없었으며,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각각 백년전쟁과 레콘키스타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대공위시대와 후스 전쟁이라는 내란을 겪고 나서 후유증이 심했고, 폴란드 왕국과 헝가리 왕국은 1444년에 바르나 전투에서 참패했기 때문에 교황령 외에 동로마 제국의 지원 요청을 받고 구원군을 보낸 서유럽 국가는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뿐이었다. 결국 오스만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동로마 제국이 동원한 병력은 동로마인, 서방 구원군, 용병을 모두 합쳐 약 8,000명으로 오스만군에 비해 매우 열세였다. 서유럽은 이미 1396년에 한 차례 십자군을 보냈다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근 한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에 대해 수세적인 입장에 처하여 동로마 제국을 구원해 주기 어려웠다.
3.3.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제국 없는 황제로 사는 것은 하느님께서 금하신다.[13] 짐의 도시가 스러지면 짐도 함께 스러질 것이다.(μη δώσει ο Θεός να ζήσω, αυτοκράτορας εγώ, χωρίς αυτοκρατορία. Αφού πέφτει η πόλη μου, θα πέσω κι εγώ μαζί της)
도망가고 싶은 사람은 할 수만 있으면 목숨을 구하고, 죽음을 직면할 각오가 된 사람은 짐을 따르라!"(όποιος θέλει να φύγει, ας σώσει τον εαυτό του, αν μπορεί κι όποιος είναι έτοιμος να αντικρίσει τον θάνατο, ας με ακολουθήσει!)[14]
수행원 중 누군가가 항구로 도착해 탈출할 시간이 있을 것이라고 하자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대답했다는 말이다.
오스만 제국의 새 술탄으로 메흐메트 2세가 즉위하자 그에게 자신이 그의 왕위 계승 경쟁자인 오르한[15]을 데리고 있다고 자극하면서 이를 활용해 보려고 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자충수가 되었다. 즉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초반의 자세를 번복하고, 최후의 공세를 준비한 것이었다.[16]도망가고 싶은 사람은 할 수만 있으면 목숨을 구하고, 죽음을 직면할 각오가 된 사람은 짐을 따르라!"(όποιος θέλει να φύγει, ας σώσει τον εαυτό του, αν μπορεί κι όποιος είναι έτοιμος να αντικρίσει τον θάνατο, ας με ακολουθήσει!)[14]
수행원 중 누군가가 항구로 도착해 탈출할 시간이 있을 것이라고 하자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대답했다는 말이다.
10배가 넘는 대군을 동원한 오스만 술탄국의 공격에 온 힘을 다해 2개월 동안이나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었다. 이때 동로마군은 용병을 포함하여 닥치는대로 긁어모은 병력이 고작 8,000명이었고, 다른 유럽 국가들은 지원 요청을 받았지만 지원군을 보내기가 어려웠거나 일부는 아예 무시하기도 했다. 이러니 가망이 없었다.[17]
자세한 내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년) 문서 참조. 당시 메흐메트 2세 측에서는 사절을 보내 항복하면 황제 및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총독으로 임명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지만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정중히 거부했다.
이 도시를 넘겨주는 일은 짐뿐만이 아니라 여기 살고 있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의사에 따라 죽기로 결정했고,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18]
5월 21일, 오스만 측 사절에게.
5월 21일, 오스만 측 사절에게.
인간이 목숨을 걸 만한 명분에는 네 가지가 있다. 신앙과 조국, 가족과 주권이 그것이다.
이것들을 위해서라면 누구나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짐 또한 도시와 백성을 위해 기꺼이 한 목숨 바칠 것이다.
그대들은 고결한 백성들이며, 저 위대한 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의 후손이다.
짐은 그대들이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조상들에 못지않은 용기를 보여 줄 것이며,
예언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히려는 이교도 술탄의 음모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믿는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전날 밤인 5월 28일,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로마인 지휘관에게 고했던 연설.[19]
이것들을 위해서라면 누구나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짐 또한 도시와 백성을 위해 기꺼이 한 목숨 바칠 것이다.
그대들은 고결한 백성들이며, 저 위대한 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의 후손이다.
짐은 그대들이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조상들에 못지않은 용기를 보여 줄 것이며,
예언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히려는 이교도 술탄의 음모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믿는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전날 밤인 5월 28일,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로마인 지휘관에게 고했던 연설.[19]
3.4. 행방불명
그리스의 민속화가 테오필로스 하찌미하일이 1932년에 묘사한 전투. 백마를 탄 장수가 콘스탄티노스 11세다. |
"짐의 머리를 받아줄 그리스도인은 없는 것이냐?" (Δεν υπάρχει κανένας χριστιανός να μου πάρει το κεφάλι)
요르고스 스프란체스(1401~1480)의 기록
일설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자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할 생각이 없었던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위의 유언을 남기고 끝까지 자신을 따르던 근위대와 함께 무너지는 성벽을 수의 삼아 밀려오는 오스만군에 돌격했고[20] 오스만군에 유린당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행방불명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48세였다. 이것이 2,206년을 이어 온 로마의 멸망이었다.요르고스 스프란체스(1401~1480)의 기록
그가 오스만군과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제국 측의 사료나 후대에 서유럽 역사가들이 쓴 사료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는 순간 목을 맸다거나 겁을 먹고 도망치는 도중에 죽임을 당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도 보인다. 이에 영국의 도널드 니콜(Donald Nicol)(1923~2003)은 대체 어느 것이 진상인지 알아내려고 했으나 도저히 분간해낼 수 없었고[21][22] 다만 동로마의 역사가들은 그가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했다고 묘사하는 반면[23] 오스만 측과 유럽 국가들의 사료에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24] 것만 확인했다고 한다. 다만 행적이 묘연한 것은 함락 뒤부터인데 튀르키예어 위키백과에까지 항복보다 저항을 택했다고 서술한 만큼 그 직전까지 가망이 없음을 알고도 결사적인 태도로 일관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자살은 몰라도 함락되고서야 도망을 쳤다는 것은 맥락이 맞지 않아 보인다. 영어, 그리스어 위키백과에서는 도시를 탈출했다는 사료가 세 개뿐이며, 당일에 사망했다는 것에는 동의하는 편이라고 한다.
당시 "로마 제국은 창건자[25]와 이름이 같은 황제의 치하에서 멸망한다."는 예언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이 소문은 들어맞고 말았다. 흥미롭게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도 로마 왕국를 세운 로물루스와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26]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동생들인 디미트리오스와 토마스가 통치하던 모레아 전제군주국 역시 형제 간의 내분으로 내전을 거듭하다가 1460년에 오스만군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으며, 또 다른 동로마계 국가인 아나톨리아 북부 폰토스의 트라페준타 제국[27]도 이듬해인 1461년에 멸망했다. 1475년에는 테오도로 공국이, 1479년에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 멸망함에 따라 로마 제국의 마지막 잔재들은 완벽하게 사라졌다.[28] 이후 팔레올로고스 가문은 몬페라토 변경백 가문으로나마 이어지다가 1533년 남계 혈통이 단절되며, 굴리엘모 9세의 딸이 곤차가 가문과 이어지는데 곤차가 가문의 후예가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프란츠 1세라, 오늘날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에는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혈통이 여계로나마 남아 있다.
3.5. 사후
유해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29]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그리스에서는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죽지 않고 대리석상으로 변해 잠들어 있으며, 튀르크의 지배가 무너지고 그리스가 해방되는 날 다시 부활하여 앞장서게 될 것이라는 전설이 생겨났다.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만 제국이 패망하자 그리스 왕국이 메갈리 이데아[30]를 내세워 승전국으로서 에디르네와 스미르나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영유권을 요구하여 이 전설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케말 파샤가 이끈 튀르키예군에 의해 실패했고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을 통해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정교도와 무슬림이 맞교환되면서 이스탄불은 튀르키예 땅으로 굳어졌다.
자녀가 없었으므로 명목상의 로마 황제위는 동생들인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를 거쳐 토마스의 장남인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에게 이어지다가 안드레아스가 발루아 왕조 프랑스 왕국의 샤를 8세와 트라스타마라 왕조 스페인 연합 왕국의 이사벨 1세 및 페르난도 2세 부부에게 제위를 팔면서 증발했다.[31]
4. 평가
4.1. 그리스에서
민족 영웅이나 다름 없는 대접을 받는다. 2009년 스카이TV에서 집계한 위대한 그리스인 100인 중 28위에 선정될 정도인데, 이는 역대 로마 황제 중 최고 순위다.[32][33] 특히 그리스가 서양 문명의 발상지이자 산실이었기 때문에 역사상 수많은 위인들이 피고 졌으며, 기나긴 역사를 자랑한단 걸 생각하면 더욱 더. 역대 군주 중에서도 알렉산드로스 대왕, 레오니다스 1세 다음 가는 3위로, 페리클레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네임드 속에서도 상당히 선방한 편이다.그를 기리는 노래로 현대에 작곡된 <당신은 번개처럼 오시리라>(Θά 'ρθεις σαν αστραπή)라는 그리스어 노래가 있다.
4.2. 서유럽에서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상실했다가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수복한 후 동로마 제국의 위신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영어에서 'Byzantine'이라는 단어가 음흉함 혹은 복잡한 간계 등을 의미하는 관용어로 남았을 정도였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끝없는 소모전과 음모, 내전으로 모든 방면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전성기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영토와 국력 속에서 동로마 제국은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그렇게 불명예 속에서 사라질 뻔한 동로마 제국을 전설로써 끝낸 사람이 바로 콘스탄티노스 11세였다.
그는 선량하고 성실한 인품을 지녀 서유럽의 많은 인사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로마 제국이 동•서 간 분쟁을 초월한 2,200여년 역사의 보편제국 로마답게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뼈저리는 노력 덕분이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그동안 쌓여온 동로마 제국에 대한 불신을 불식하고, 식어버린 서유럽인들의 마음을 돌려내었으며, 이는 베네치아인들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그들의 고향이자 무덤으로 삼게 했다.
4.3. 정교회에서
그리스 정교회 중에서도 일부 지역 교회가 순교자이자 성인으로 공경한다. 아테네의 미트로폴레오스 대성당 앞 광장에는 칼을 치켜들고 서 있는 그의 동상을 만나 볼 수 있다. 다만 그 외의 정교회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기 위해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과 일치시킨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서유럽의 원군을 요청한 것을 두고, 정교회를 통째로 교황에게 바치려고 했다며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여 전체 정교회에게서 성인으로 공경받는 것은 앞으로도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4.4. 아랍권에서
아랍권은 일단 오스만과 같은 이슬람권이라지만 동유럽 및 발칸반도 국가들과는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해 지배를 받은 역사를 공유하므로[34] 오스만이 일으킨 정복 전쟁 자체를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민족도 다르고.[35] 따라서 아랍권의 무슬림들은 콘스탄티노스 11세를 비록 패배자이지만 튀르크족 침략자에게 맞서 싸운 용맹한 이교도 군주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이라크인들과 시리아인들은 이런 쪽에서 그리스와의 동병상련이 강하다 보니 그리스 현지인들만큼은 아니어도 그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이다.다만 아랍권 중에서도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알제리는[36] 그리스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튀르키예와도 사이가 좋다 보니[37] 콘스탄티노스 11세에 대한 평가가 중립적이다.
4.5. 총평
큰 실책 없이 나라를 다스렸고 마지막에는 황제로서 당당히 죽은 성군이자, 매우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군주였다. 본인의 잘못 없이 선대부터 국력이 끊임없이 쇠락하여 망국의 군주가 되었으나 군주로서의 자질은 굉장히 뛰어났으며[38] 역사상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에서[39] 본인의 비운과는 별개로 2,000년 제국의 종지부에는 일반적인 암군들보다 훨씬 적합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콘스탄티노스 11세는 신학 및 철학과 같은 학문적인 분야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나, 미스트라스에선 개혁을 부르짖던 철학자인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과 친하게 지냈다. 플레톤이 중세 기준으로는 충격적일 정도의 반기독교 성향을 표방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콘스탄티노스 11세 본인의 종교적/사상적인 유연성도 굉장히 높았음을 추론할 수 있다. 더불어 좋은 군인이자 유능한 행정가였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성실함이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불명예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았으며, 까다로운 형제 문제를 다룰 때도 관용과 인내심을 보여주었다. 친구들과 관료들은 그와 항상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그에게 충성했으며 그에게는 신하들에게 존경과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질이 있었다.
망국의 군주들은 멸망의 원인을 직접 제공했거나 비굴한 행보를 보이면 매우 나쁜 평가를 받고, 본인의 잘못이 없더라도 기껏해야 안타까운 비운의 군주 정도로 동정표를 받는 정도에 그치기 마련이며, 콘스탄티노스 11세처럼 망국의 군주임에도 현대에 헌정곡까지 나올 정도로 위인이자 영웅으로 수백 년이 넘도록 칭송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2,206년 역사의 로마가 망한 것이 그의 탓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오히려 어떤 방법을 써도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덕분에 로마는 그 찬란한 역사에 걸맞은 가장 장렬하고 아름다운 멸망을 맞이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로마인답게 마지막까지 로마를 위해 싸운 진정한 영웅으로서 많은 역사 매니아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인품과 내치에 대한 평가가 호평 일색인 것과 달리 전략적 안목에서는 완벽과 아주 거리가 먼데, 바로 그 순간이 오스만군에게는 최적의 침공 시기였으며 조금 더 버티면 적들의 내부 분열이나 힘을 회복한 서방과의 공조를 기대해 볼 수도 있을 법한 마당에 적에게 외교적으로 도발을 하며 적들을 단결시킨 행위는 아주 현명하지 못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외부의 위협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능력은 과거의 난세속에서 국정을 이끌던 로마의 명군들보다는 한 수 아래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며, 어떻게 보면 이런 난세보다는 치세를 통치하는 쪽이 더 적절했을 법하다는 아쉬움은 있다. 즉 '로마 제국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데는 최고의 군주였지만, '로마 제국의 마지막을 뒤로 미루는' 데는 최고의 군주였다고 보기는 좀 어렵다.
5. 대중매체에서
풍전등화의 제국을 유지하고 지키던 유능한 인물임과 동시에 극적인 일생과 죽음이라는 소재 때문에 망국의 마지막 군주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평가가 좋은 인물이다.대한민국의 국회의장을 지낸 정치인 김형오의 역사소설 《술탄과 황제》에서는 메흐메트 2세와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이 소설을 조한이 만화화한 《만화로 보는 술탄과 황제》에서도 말을 타고 검을 들며 오스만군에 돌격하는 최후로 묘사되었다. #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전을 영화화한 2012년작 튀르키예 영화 <정복자 1453>(Fetih 1453)에서 주인공인 메흐메트 2세를 <300>의 레오니다스처럼 묘사한 것은 그렇다 쳐도, 콘스탄티노스 11세를 하렘에서 여색과 환락에 빠져든 탐욕스런 폭군으로 왜곡하여 묘사하고 있다. 황제가 된 후 결혼도 못하고 대관식조차 못 올렸을 정도[40]로 국가를 위해 노심초사한 황제인데 말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메흐메트 2세가 성 소피아 성당으로 대피한 동로마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모습은 역사 왜곡으로 비난받았다.[41] 우습게도 <300>이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했듯이 이 영화도 튀르키예에서 2012년 흥행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이 영화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튀르키예의 시점으로 극화했기 때문에 튀르키예에서 좋아할 만했다. 어이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역사 왜곡에도 불구하고, 상영 당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과 튀르키예 정부가 이 영화를 지원했고, 튀르키예 정치권에서는 영화를 칭찬하거나 두둔하는 발언을 하면서 대놓고 밀어주며 흥행 몰이를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민간에서 제작해 방영한 사극 드라마 <위대한 세기>에 대해서는 에르도안이 이슬람과 오스만 제국 술탄의 위엄을 깎아 내린다며 노발대발하면서 비난하는 내로남불적인 행동을 보였다.
마찬가지로 튀르키예에서 제작한 넷플릭스의 다큐 드라마 <오스만 제국의 꿈>에도 등장했다. 전술한 영화와 달리 가히 시즌 1의 진주인공으로써 갈수록 불리해지는 전황에 내심 고뇌하면서도 끝까지 자기 백성을 책임지려 애쓰는 성군으로 그려진다. 작중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노력은 동로마 귀족들과 껄끄러운 관계인 조반니 주스티니아니에게도 인정받을 정도다. 최후의 날에 로마 역덕들의 심금을 울리는 명연설을 하면서[42] 병사들을 독려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막을 수 없었고, 끝내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예니체리 근위대에 용맹하게 돌격하는 것으로 극에서 퇴장한다.
<Europa Universalis 4>에서는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시작 시점의 황제인 형 요안니스 8세보다는 낫지만 객관적으로는 평범 그 자체다. 일부 유저들이 실제로 실책을 저질렀던 외교 능력치만 놔두고[43] 나머지 행정이나 무력 능력치를 더 높게 줘도 되지 않냐는 이야기를 하지만 대부분의 유저들은 일찍 죽어서 그랬지, 실제로는 능력자였던 문종에게 밸런스를 맞춰야 된다고 1,2,1이라는 희대의 쓰레기 능력을 주고 패치도 안 해주는 패러독스에게 뭘 바라냐며 한숨을 쉬고 있다. 그러나 1.36 버전에서 능력치 버프가 확정되어 3/2/2 였던 것이 5/2/3이 되는 것이 확정되면서 이전에 비해 확실히 쓸만한 군주가 될 것으로 보인다.[44]
미국의 대체역사소설 거장으로 유명한 해리 터틀도브의 1990년작 단편《황제의 귀환》(The Emperor's Return)에서는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순간에 하기아 소피아의 대리석 바닥 속으로 빠져들어 콘스탄티노플 수복의 순간까지 잠들어 있다는 전설이 실제로 일어났고, 2003년[45]에 그리스의 사회주의 정권이 소련과 동맹을 맺고, 튀르키예를 침공하여 그리스군이 이스탄불을 점령하고, 하기아 소피아에 그리스군 정찰병들이 진입한 순간 잠들어 있었던 콘스탄티노스 11세가 깨어나지만 '이제 내 것인 제위를 되찾겠다'는 황제의 말을 듣고, 사회주의자였던 그리스군 분대장이 '그리스엔 더이상 전제군주가 필요없다'며 쿨하게 그를 사살해 버린다. #, 번역
모바일 게임인 <마녀병기>에서는 1453년에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성배를 얻은 후 500년 동안 세상을 통치했으나 결국 성배의 힘에 매혹되어 미쳐버리게 된다. 결국 4명의 성기사가 그를 성배에 봉인함과 동시에 세상을 다시 1453년으로 회귀시키지만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저주는 여전히 성배에 깃들어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고, 결국 작중 시점에서 성배의 봉인이 풀리기 직전까지 오게 되었다.
질 페이튼 월시의《황제의 수의》(The Emperor's Winding Sheet, 1974), 제임스 십맨의《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 2013), 피터 샌드햄의《반암과 재》(Porphyry and Ash, 2019)에서 주인공 또는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Fate/Grand Order>에서 서번트로 등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콘스탄티노스 11세(Fate 시리즈) 문서 참조.
한국의 인터넷 대체역사소설인《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 주인공이 전생한 인물이다. 주인공으로서의 행적을 제한 콘스탄티노스 11세라는 인물의 행적을 본다면 콘스탄티노플 포위 이후 어린 몸으로 신에게 제국을 살려달라 눈물로 빌고 있었는데 그것을 들은 사신이 그 몸에 주인공의 영혼을 집어넣은 것이다.
《용병대장과 성녀》, 《마지막 바이킹》, 《내가 바로 세종대왕의 아들이다》와 같이 15세기 초중반이 배경이면 유럽을 묘사할 시 반드시 등장한다. 원역사의 행적이 행적이다 보니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비중있게 등장한다면 오스만은 그 반대급부로 무조건 끝장나는지라 오스만 킬버튼이라 봐도 될 정도다.
5.1. 인터넷 밈
디시콘 원본 | 패러디1(블아 아로나) | 패러디2(풍홍) |
콘스탄티노스 11세가 평균적인 역사 교육을 받은 한국인이라면 알기 어려운 인물인 데다가[48] 그의 실제 행적과 장엄한 최후에 대해 모른다면 웃기도 힘든 한국 역덕들만의 밈이다. 게다가 대놓고 웃기게 날조한 다른 유언들과 달리 망국의 군주+암군이라면 진짜로 했을 법한 그럴싸한 말이기까지 하여[49] 동로마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 웹에서의 역사 왜곡 + 날조로 만들어진 밈이라 당연히 외국어로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아예 찾아볼 수 없다. 물론 한국에서도 날조로 시작된 것인 만큼 그걸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건 사실이 아니라면서 진실에 대한 설명을 해주도록 하자.
6. 참고 자료
- Nicol, Donald M.,《The Immortal Emperor: the life and legend of Constantine Palaiologos, last Emperor of the Roma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50]
[1] Sir. James Cochran Stevenson Runciman, CH, FBA, 1903년 6월 7일 ~ 2000년 11월 1일[2] 고전 그리스어로는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세스 팔라이올로고스'가 되지만 이는 당시 기준으로도 1,000년 이상이나 과거의 발음이다. 현대 그리스어식으로 읽으면 '콘스탄디노스'가 된다.[발음] jūn shì tǎn dīng shí yī shì[4] Драгаш / Dragaš[5] 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6] 실제로 요안니스 8세는 자신을 제하고, 출생 서열이 제일 높은 차남 테오도로스보다 4남인 콘스탄티노스를 신임했고 사이도 서로 좋았다. 이 총애가 꽤 노골적이었는지 자신을 차기 황제로 여기고 있었던 테오도로스는 콘스탄티노스와 자주 갈등을 빚었다. 이 후계 갈등은 훗날 콘스탄티노스가 수도 인근에 자리한 자기 영지를 테오도로스의 모레아와 맞바꾸면서 어느 정도 봉합되었고, 요안니스 8세의 서거 몇 달 전 테오도로스가 먼저 사망하면서 완전히 종결되었다.[7] Despotate of the Morea[8]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즉위식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에선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정통황제로 보지 않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라틴 제국을 없애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미하일 8세는 니케아에서 즉위했고, 1341년부터 1347년까지의 내전 중에 즉위한 요안니스 6세는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즉위하는 등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는 이와 비슷한 전례가 존재했다.[9] 참고로 이때 즉위식에는 그의 부인이나 자녀가 없었다. 그 이유는 첫 번째 부인이 첫째(= 딸)를 사산하고 사망했으며, 두 번째 부인도 후사없이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후 결혼을 하지 못했으니 후손도 없었다.[10] 세르비아 제국이 한참 강성하던 1349년에 요안니스 6세가 본국과 단절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보다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반쯤 독립하는 것을 허가해 준 지방 정권으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황제로 즉위한 뒤에는 동생들인 디미트리오스와 토마스가 영토를 반씩 분할해 다스렸다.[11] 이 결정에 대해 정교회 신자 + 동•서교회 통합 반대파에 속한 동로마인들은 불만을 가졌는데, 동로마 제국의 재상이었던 루카스 노타라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추기경의 모자를 보느니 술탄의 터번을 보겠다."는 말을 남겼다. 노타라스는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동안 황제를 보좌했다가 동로마의 패망 직후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처형되었다.[12] 이건 미하일 8세 때부터 지속적으로 나왔다가 결렬되고 다시 이야기가 나오기를 반복해 온 것이었다. 한편 재미있는 사실은 동로마 제국은 물론 니케아 제국의 공격을 받고 있었던 라틴 제국도 교황한테 도와달라고 달려갔다는 것이다.[13] 다스릴 것도 없는 군주로는 싫다라는 뜻이 아니라 제국보다 오래 사는 군주가 될 수 없다는(no emperor should outlive his empire) 뜻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14] God forbid that I should live as an Emperor without an Empire. As my city falls, I will fall with it. Whosoever wishes to escape, let him save himself if he can, and whoever is ready to face death, let him follow me.[15] 이 오르한은 메흐메트 2세의 사촌이었으나 메흐메트 2세가 다른 형제를 다 죽였으므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오스만 왕족이었다. 훗날 콘스탄티노플 방위전에 참전했고, 성이 함락되던 날 저항하다가 포로가 되어 자기를 따라온 부하 수백 명과 함께 처형되었다.[16] 스티븐 런치만도 이 실책에 있어서는 콘스탄티노스 11세를 비판했다고 한다.[17] 다만 숫자만 보면 싸워 보지 않아도 승부가 뻔한 것 같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싸움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외부에서 지원군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크기는 했지만 공방전 초기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비군의 사기는 결코 낮지 않았다. 특히 메흐메트 2세와 오스만군도 예상외로 공성이 오래 걸리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18] As to surrendering the city to you, it is not for me to decide or for anyone else of its citizens; for all of us have reached the mutual decision to die of our own free will, without any regard for our lives.[19] 해당 연설은 황제의 서기였던 스프란체스와 미틸레네 대주교가 기록했으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엮고 있으나 본뜻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부족하지 않다.[20] 전해지는 말로는 마지막으로 적군에게 돌격하면서 자신의 몸에 달고 있었던 황제로서의 상징물을 죄다 떼어냈기 때문에 황제의 시체를 찾을 때 표식으로 추정할 만한 물건이 부츠 뿐이었다고 한다.[21] 오스만군이 결국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시체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그냥 황제인 줄 모르고 죽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런 최후에 대한 내용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오스만군이 그가 황제임을 인식했다면 그의 시체를 가져가 포상을 받으려고 했을 터이니 찾지 못했을 가능성이 적다.[22] 그러나 수많은 지휘관들이나 군주들이 도주할 때 당연히 자신의 장식을 전부 몸에서 떼어낸 상태로 도주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황제가 도주하는 장면까지는 확인했으나 그 이후에 도주하는 병력을 전부 사로잡아 죽였을 때는 더 이상 장식이 없어 구분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23] 그러나 이런 주장도 문제가 따르는데 저 두 명은 직접 저 상황을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니며, 황제와 함께 돌격했던 병사들도 죽거나 최소한 기록에서 증언을 해 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과연 도대체 어떻게 저 이야기를 알았는가?"라는 문제가 있다. 오스만군 측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그 말을 한 사람이 황제라는 것을 인식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시체를 찾지 못한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24] 이는 종교 문제와 문화권의 차이, 질투심과 신성 로마 제국의 정통성 같은 복합적인 이유들, 그리고 팔레올로고스 황가의 온갖 패악질 등으로 로마 제국과 유럽 국가들의 관계가 오랫동안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25] 기독교 공인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기준.[26]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우구스툴루스'는 '작은 아우구스투스'라는 뜻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을 함락하고 새로운 수도로 삼은 오스만 술탄은 메흐메트 2세였는데,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황제 또한 메흐메트 6세였다.[27] 팔레올로고스 왕조보다 앞서 동로마 제국을 다스렸던 콤니노스 왕조가 황가였다.[28] 작위 자체로 봤을 때, 로마 황제의 칭호는 토마스를 거쳐 토마스의 아들인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까지 이어지다가 안드레아스가 생활고로 인해 프랑스와 스페인에 작위를 팔았다. 이후 두 국가는 딱히 그 칭호를 쓰려고 하지 않아 안드레아스가 사망하고 나선 사실상 사라졌다고 보고 있다. 한편 이피로스 데스포티스의 칭호는 군주국이 멸망하고 나서도 토코 가문이 지속적으로 사용하다가 1642년에 아카이아 공작위가 신설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29] 튀르크인들은 황제로 추정되는 인물의 시체를 찾아 그 목을 베어 매달았지만 그 시체가 확실히 황제가 맞는지에 대한 그리스인이나 유럽인들의 기록이 없다.[30] Μεγάλη Ιδέα. 한국어로 옮기면 위대한 이상으로, 옛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되찾자는 내셔널리즘 & 국가주의 사조였다.[31] 샤를 8세와 이사벨 1세, 페르난도 2세는 로마 황제위를 받기만 하고 사용하지는 않았다. 당시 서방엔 부부의 사돈인 막시밀리안 1세가 신성 로마 황제로 있기도 했고, 이들이 제위를 사준 것도 진짜 칭호를 사용하려기보다는 궁핍한 처지의 안드레아스에 대한 동정심에서 말미암은 적선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32] 그 다음은 의외로(?) 바실리오스 2세(70위), 콘스탄티누스 대제(71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82위)다.[33] 비슷한 포지션의 군주로 멕시코에는 아즈텍 제국의 마지막 틀라토아니인 콰우테목이 있고, 카자흐스탄에는 카자흐 칸국의 마지막 칸인 케네사리 칸이 있다. 후자는 공교롭게도 콘스탄티노스 11세와는 반대로 정교회 국가에 의해 멸망한 튀르크계 이슬람 국가의 마지막 군주였다.[34] 실제로 아랍 국가들은 튀르키예와는 역사적으로 견원지간인 데 비해, 똑같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겪었던 그리스나 불가리아, 세르비아 같은 발칸반도의 기독교 국가들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다.[35] 현재도 튀르키예(튀르크족)-아랍(아랍인)-이란(페르시아인)의 관계는 좋지 않다.[36] 오스만령 알제리에서 토착 알제리인 토호들은 자치권을 인정받았고, 바르바리 해적들은 오스만 제국의 보호를 받으며 마음껏 약탈했다.[37] 다만 냉전 시절에는 알제리와 튀르키예의 관계가 나빴던 적이 있으며, 탈냉전을 기점으로 두 나라의 관계가 다시 좋아졌는데 이마저도 냉전 시절 알제리가 아랍 사회주의 국가가 된 것에 따른 영향이고, 오스만 제국과는 무관하다.[38]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즉위 이전까지도 모레아의 전제군주로서 훌륭한 수완을 보여주었다. 콘스탄티노스의 지휘하에 모레아는 14세기부터 이어진 문화적, 경제적 번영을 유지하면서 1444년까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대부분을 수복하는 성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바르나 십자군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이루어진 무라트 2세의 원정에 콘스탄티노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모레아가 철저히 약탈당하면서 결국 모레아에서의 부흥은 무위로 돌아갔다.[39] 그나마 비슷한 최후를 찾자면 비슷하게 명군의 자질을 타고났으나 선대의 위업이 너무나 커서 망국을 피하기 힘들었다는 공통점이 있고, 최후도 꽤나 비장했던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있다. 다만 숭정제는 명장 원숭환의 숙청을 비롯하여 본인의 과실이나 리더십 부족이 명나라의 멸망에 차지하는 비중도 적지 않다.[40] 아예 결혼을 못 해본 것은 아니다. 1448년 제위에 오르기 전, 즉 모레아의 데스포티스였던 시절에 두 번 결혼했다. 하지만 두 번째 아내도 1442년에 죽었고, 제위에 오른 뒤에는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41] 실제로는 성 소피아 성당으로 대피했던 동로마 백성들은 독 안에 든 쥐처럼 오스만군에게 포위되어, 몸값을 받아낼 수 있을 만한 부자들과 성직자들은 포로가 되었고 몸값을 낼 수 없는 하층민들은 살해되거나 노예로 끌려나갔으며, 여성과 아이들은 강간당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메흐메트 2세는 성당이 훼손될까 노심초사했을 뿐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앞두고 사기 진작을 위하여 함락 성공 후 병사들에게 3일 동안의 약탈을 보상으로 허락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 백성의 안위를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거기서 막으려고 들었다간 이자성 꼴이 났을 것 그나마 이 성당이 마음에 든 메흐메트 2세는 성당을 불태우려거나 우상이라며 닥치는 대로 성화를 훼손하는 병사들을 꾸짖으며 막긴 했다. 대신 회반죽으로 덮고 그 위에 이슬람 문양을 그리며 모스크로 개조했다. 그래도 다행인 게(?) 덕분에 회칠만 제거하면 오래된 성화가 복원이 가능하지만 그 문양들도 이젠 수백 년이 지난 문화 유산이 되어서 반대 여론도 많아 회칠 제거는 이뤄지지 않았다.[42] "제군! 벽 밖에서 무엇이 몰려오는지 안다. 그러나 두려워 말라. 우리의 특권은 대제가 세운 이 도시를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1,000년 동안 이슬람의 재앙이 유럽으로 퍼지는 걸 막아왔다. 그러나 위대한 로마 제국이 오늘 밤 끝나야만 한다면, 쉽게 끝내게 두지 말자. 칼을 갈고 마음 단단히 먹어라. 우리는 오늘 형제이자, 같은 로마인으로써 싸운다. 아우구스투스! 유스티니아누스! 콘스탄티누스! 그분들이 우릴 주목하신다![43] 위에서 봤다시피 오르한 건은 제국의 멸망을 초래한 자충수였으니 말이다. 물론 메흐메트 2세의 야심상 언젠간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 왔겠지만 위 실책 때문에 계획을 앞당기게 된 건 확실하다. 이를 알려 주는게 할릴의 일갈로, 할릴은 콘스탄티노플을 치는 걸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그가 사신들에게 일갈을 퍼부었을 정도면 얼마나 큰 외교적 실책인지를 알 수 있다.[44] 특히 이벤트로 군사 능력치도 버프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45] 출간 시점에는 근미래였다.[46] 카이사르의 '너도냐, 브루투스?' 부터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셰익스피어의 각본에서 나온 얘기다. 그 외에도 오다 노부나가의 유언은 "씁 어쩔 수 없지"라고 써놓고, 샤를 드 골에 대해서는 골 아파라는 개드립을 쳐놓는 등 날조가 한가득이다. 인물 설명도 마르틴 루터는 이단자, 나폴레옹, 조조는 반역자, 히틀러는 암살자라는 등 제대로 소개된 게 없다. 모택동은 그냥 짱깨라고 써놓았다 교황이라는 닉이랑 날조한 방향성으로 비춰보아 중세 교황 컨셉을 잡고 해당 인물들에 대해 중세 가톨릭의 입장을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47] 그리스+아스퍼거[48] 한국의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동로마의 멸망을 '비잔티움은 1453년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에게 멸망했다'라는 설명으로 끝내고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다루지 않는다.[49] 실제로 중국의 이세황제는 평민으로 살아도 좋으니 살려만 달라고 하다가 죽었다는 일화가 있다.[50] W.트레드골드의 저서인《비잔틴 제국의 역사》에서도 참고 자료로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