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444년 헝가리 십자군과 오스만 술탄국 사이에 벌어진 전투. 오스만 술탄국이 승리를 챙겼다.2. 배경
2.1. 알바니아의 반란 → 성공
1444년 3월,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는 알바니아 중부의 영주들을 모아 '레저 동맹[1]'을 결성하여 그들의 민족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초기 동맹의 군사력은 1만에서 1만 5천에 달하였으나 스칸데르베그는 자신의 직속병력에 대해서만 직접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었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간접적인 지휘만을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오스만 술탄국의 거대한 군사력은 레저 동맹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거대했기 때문에 정면대결을 벌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그는 대체로 알바니아의 산악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을 활용해 오스만 술탄국을 상대하였다.알바니아의 대대적인 반란에 오스만 술탄국은 즉각적으로 진압군을 보냈다. 무라트 2세(41세)는 자신이 신임하던 지휘관 알리 파샤에게 2만 5천~4만에 달하는 군을 맡겨 레저 동맹을 공격했다. 그러나 스칸데르베그는 1444년 6월 29일 토르비올에서 일부러 언덕 바로 아래에 군대를 배치함으로써 기병이 주력인 오스만군을 유인했고, 후방에 미리 배치해두었던 기병이 기습을 감행하는 방식으로 격파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2.2. 바르나 십자군의 결성
이는 오스만을 몰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와 1444년 추기경 체자레니는 대오스만 동맹결성을 촉구하였고, 여기에 호응한 교황령, 헝가리 왕국, 폴란드 왕국, 부르고뉴, 베네치아, 제노바의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이 정교회를 가톨릭에 종속시키면서까지 서방 세계에 도움을 요청하자 교황도 이에 동의했으며, 동로마 제국을 폄하하던 서방 세계도 제국이 망하는 건 바라지 않았기에 이 십자군을 바르나 십자군이라고도 부르며,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구원을 위해 남하하도록 하였다.여기에는 왈라키아 공국도 참전했다. 당시 왈라키아 공이던 블라드 2세는 자식들이 오스만 술탄국에 인질로 잡혀있는터라 이 원정을 막으려 지도부를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왈라키아로 물러났다. 바르나 십자군에 참가한 블라드의 아들은 블라드의 둘째 아들이던 미르체아 2세였다.[2]
3. 전투
드디어 연합군은 도나우 강을 넘어 공격을 개시하였다(1444. 9. 20). 그러나 전 원정이 끝난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재개된 원정은 예전의 규모에 미치지 못하였고, 바르나까지 진격한 연합군은 이곳에서 지휘관으로 복귀한 무라트 2세(40세)의 오스만군에게 포위당한 채 혈투 끝에 퇴각했다.기독교 측 군대가 패한 데에는 폴란드 국왕 겸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었던 브와디스와프 3세의 책임이 컸다. 오스만군의 공격으로 십자군의 좌익이 위험하자 후녀디 야노시는 직접 구원해야겠으니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는 성급히 움직이지 말고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진언했는데, 공명심이었는지 이대로라면 패하게 생겼다는 초조감이었는지 브와디스와프는 후녀디의 조언을 무시하고 돌격하다가 역으로 포위되어 전사했다. 그나마 바르나 십자군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오스만군을 상당히 밀어붙였기 때문에 오스만 또한 공세를 지속하지 않았다.
4. 이후
이 전투 뒤에 왈라키아를 통해 퇴각하던 후녀디는 블라드 드라쿨과 그의 아들 미르체아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풀려나는데 그 이유는 확실치 않다. 단지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고 직접 지휘를 맡았던 것이 후녀디였기 때문에 블라드가 후녀디의 책임을 물으려 했던 것이라고 생각될 뿐이다. 여담으로 이 사건이 후일 블라드 드라쿨의 아들, 블라드 가시공, 일명 드라큘라의 인생을 질곡으로 밀어넣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바르나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가 전사하면서 후녀디 야노시는 당분간 라슬로 5세[3]의 섭정으로서 헝가리를 통치했다. 후녀디는 바르나의 치욕을 갚기 위하여 군대를 재정비하였고 , 1448년 오스만 술탄국과 2차 코소보 전투에서 다시 맞붙었다. 폴란드에서는 리투아니아 대공이자 브와디스와프의 동생인 카지미에시가 왕위에 올랐다.
한편 십자군을 요청한 동로마 제국은 최후의 발악마저 실패함으로서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정확히 9년 후 동로마는 영원히 역사에서 지워지진다.
[1] 레저(Lezhë)는 알바니아의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동맹을 맺은 장소의 이름에서 따왔다.레저 시의 상징적 의미 덕분에 스칸데르베그의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2] 다른 아들인 블라드 3세와 라두 3세는 오스만에 인질로 보냈다.[3] 1440~1457. 독일왕 겸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의 유복자. 독일어 이름은 '라디슬라우스'로 본래 부친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공작,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이 되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브와디스와프 3세를 헝가리 국왕으로 옹립한 귀족들 때문에 사실상 2명의 국왕이 존재하는 상황이었다가 브와디스와프 전사 후에 단독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