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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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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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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생애 · 평가 · 대중매체
가족관계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가족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 · 고모부 가이우스 마리우스 · 첫째 아내 코르넬리아 킨나 · 둘째 아내 폼페이아 술라 · 셋째 아내 칼푸르니아 · 딸 율리아 · 양아들 옥타비아누스 · 사생아 카이사리온
전투
<colbgcolor=#fff,#1f2023>일레르다 전투 · 디라키움 공방전 · 파르살루스 전투 · 알렉산드리아 전쟁 · 젤라 전투 · 탑수스 전투 · 문다 전투 · 코르도바 공방전
대외 전쟁 갈리아 전쟁
휘하 군단 3군단 갈리카 · 4군단 마케도니카 · 5군단 알라우다에 · 6군단 페라타 · 7군단 클라우디아 · 8군단 갈리카 · 9군단 히스파나 · 10군단 에퀴스트리스 · 11군단 클라우디아 · 12군단 빅트리스 · 13군단 게미나 · 14군단 게미나
관련 기록 갈리아 전기 · 내전기
기타
정책 삼두정치,(로마 공화정의 삼두정치), · 독재관
사건 · 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기타 율리우스력 · 카이사르(칭호),(차르 · 카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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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0.35px"
{{{-1 {{{#!wiki style=""<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라틴어 문구
선출 사유(causa) <colbgcolor=#FFEFA5,#1E1B00>
  • rei gerundae causa: 공무 수행을 위해
  • clavi figendi causa: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의 벽에서 행해지는 못질 의식을 위해
  • seditionis sedandae causa: 폭동 진압을 위해
  • comitiorum habendorum causa: 정무관 선거를 위한 민회 개최를 위해
  • ferarium constituendarum causa: 축제 개최를 위해
  • ludorum faciendorum causa: 루디 로마니 개최를 위해
  • Latinarum feriarum causa: 라틴 축제 개최를 위해
  • senatus legendi causa: 칸나이 전투 이후 원로원 의원 선출을 위해
  • legibus faciendis: 법률 제정
  • rei publicae constituendae causa: 공화정 재건을 위해
  • dictator perpetuo: 종신 독재관
기타
  • mortuus est: 집권 중 사망
  • sine magistro equitum: 기병장관을 임명하지 않음
  • non iniit: 취임하지 않음
  • occisus est: 집권 중 암살
}}}}}}
서력기원: 기원전 501년 기원전 496년 기원전 494년 기원전 463년
로마 건국 기원: 253년 255년 260년 291년
독재관: 티투스 라르키우스 플라부스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부스 레길렌시스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볼루수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쿠스)
기병장관: 스푸리우스 카시우스 베켈리누스 티투스 아이부티우스 헬바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프리스쿠스 스트룩투스 (불명)
선출 사유(causa): rei gerundae causa clavi figendi causa
기원전 458년 기원전 439년 기원전 437년 기원전 435년 기원전 434년
296년 315년 317년 319년 320년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프리스쿠스 피데나스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루키우스 타르퀴티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아할라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 포스투무스 아이부티우스 헬바 코르니켄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투베르투스
기원전 431년 기원전 426년 기원전 418 년 기원전 408년 기원전 396년
323년 328년 336년 346년 358년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투베르투스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프리스쿠스 피데나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틸루스 코수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율루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악실라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아할라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말루기넨시스
기원전 390년 기원전 389년 기원전 385년 기원전 380년 기원전 368년
364년 365년 369년 374년 386년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 카피톨리누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티투스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아할라 티투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 카피톨리누스 아울루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rei gerundae causa
기원전 368년 기원전 367년 기원전 363년 기원전 362년 기원전 361년
386년 387년 391년 392년 393년
푸블리우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 임페리오수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 레길렌시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펜누스 카피톨리누스 크리스피누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칼부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 카피톨리누스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나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카풀라 또는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말루기넨시스
seditionis sedandae et rei gerundae causa rei gerundae causa clavi figendi causa rei gerundae causa
기원전 360년 기원전 358년 기원전 356년 기원전 353년 기원전 352년
394년 396년 398년 401년 402년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아할라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페티쿠스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율루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펜누스 카피톨리누스 크리스피누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가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프로쿨루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아르비나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rei gerundae causa
기원전 351년 기원전 350년 기원전 349년 기원전 348년 기원전 345년
403년 404년 405년 406년 409년
마르쿠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 루키우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시누스 레길렌시스) 루키우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아할라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아르비나 (가이우스 리비우스 덴테르)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 임페리오수스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기원전 344년 기원전 342년 기원전 340년 기원전 339년 기원전 337년
410년 412년 414년 415년 417년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크라수스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인레길렌시스
퀸투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프리베르나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스카이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호르타토르
ferarium constituendarum causa
기원전 335년 기원전 334년~기원전 333년 기원전 332년 기원전 331년 기원전 327년
419년 420년~421년 422년 423년 427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프리베르나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마르쿠스 파피리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 또는 그나이우스 퀸크티우스 카피톨리누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티투스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lavi figendi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기원전 325년~기원전 324년 기원전 322년 기원전 321년 기원전 321년 기원전 320년
429년~430년 432년 433년 433년 434년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아르비나 퀸투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가이우스 마이니우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마르쿠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포슬리우스 플라키나토르
rei gerundae causa rei gerundae 또는 ludorum faci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기원전 320년 기원전 320년 기원전 316년 기원전 315년 기원전 314년
434년 434년 438년 439년 440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프리베르나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가이우스 마이니우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루키우스 풀비우스 쿠르부스 퀸투스 아울리우스 케레타누스 마르쿠스 포슬리우스 플라키나토르
가이우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
rei gerundae causa rei gerundae causa rei gerundae causa
기원전 313년 기원전 312년 기원전 310년~기원전 309년 기원전 306년 기원전 302년
441년 442년 444년~445년 448년 452년
가이우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비솔루스 또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롱구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마르쿠스 포슬리우스 플라키나토르 Ⅲ 또는 마르쿠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마르쿠스 티티니우스
rei gerundae (et clavi figendi) causa rei gerundae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기원전 301년 기원전 287년 기원전 287년 기원전 285년 기원전 280년
453년 467년 467년 469년 474년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부스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mortuus est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막시무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또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기록 미상) (기록 미상) (기록 미상) (기록 미상)
comitiorum habendorum causa
기원전 276년 기원전 263년 기원전 257년 기원전 249년 기원전 249년
478년 491년 497년 505년 505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 퀸투스 오굴니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글리키아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
(기록 미상)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마르쿠스 라이토리우스 플란키아누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clavi figendi causa Latinarum feriarum causa
기원전 246년 기원전 231년 기원전 224년 기원전 221년 기원전 217년
508년 523년 530년 533년 537년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 가이우스 두일리우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부테오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기원전 217년 기원전 216년 기원전 216년 기원전 213년 기원전 210년
537년 538년 538년 541년 544년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 마르쿠스 유니우스 페라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토 sine magistro equitum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comitiorum habendorum causa senatus legendi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기원전 208년 기원전 207년 기원전 205년 기원전 203년 기원전 202년
546년 547년 549년 551년 552년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comitiorum habendorum et ludorum faci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기원전 82년~기원전 79년 기원전 49년 기원전 48년 기원전 47년~기원전 44년 기원전 44년
672년~675년 705년 706년 707년~710년 710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occisus est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sine magistro equitum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non iniit)
legibus faciendis et rei publicae constituendae causa rei gerundae causa dictator perpetuo rei publicae constituendae causa
{{{#FCE774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37px; padding: 0 6px"
}}}}}}}}}}}}}}}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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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1.4px"
기원전 715년 기원전 509년 기원전 449년 기원전 431년
누마 마르키우스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퀸투스 푸리우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기원전 420년 기원전 390년 기원전 332년 기원전 304년
스푸리우스 미누키우스 마르쿠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칼루사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
기원전 254년~기원전 243년 기원전 243년~기원전 221년 기원전 221년~기원전 213년 기원전 213년~기원전 212년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 (공석)
기원전 212년~기원전 183년 기원전 183년~기원전 180년 기원전 180년~기원전 152년 기원전 152년~기원전 150년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공석)
기원전 150년~기원전 141년 기원전 141년~기원전 132년 기원전 132년~기원전 130년 기원전 130년~기원전 114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무키아누스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기원전 114년~기원전 103년 기원전 103년~기원전 89년 기원전 89년~기원전 82년 기원전 82년~기원전 63년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기원전 63년~기원전 44년 기원전 44년~기원전 13년 기원전 13년~기원후 379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로마 황제가 겸임) }}}}}}}}}}}}}}}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font-size: 0.742em; letter-spacing: -0.35px"
{{{#!wiki style=""<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라틴어 문구 색상 범례
  • sine collega: 동료 없이 단독 선출
황제 겸 집정관 }}}
기원전 100년 기원전 99년 기원전 98년 기원전 97년 기원전 96년
가이우스 마리우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티투스 디디우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기원전 95년 기원전 94년 기원전 93년 기원전 92년 기원전 91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기원전 90년 기원전 89년 기원전 88년 기원전 87년 기원전 87년 보결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카토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
기원전 86년 기원전 86년 보결 기원전 85년 기원전 84년 기원전 83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기원전 82년 기원전 81년 기원전 80년 기원전 79년 기원전 78년
가이우스 마리우스 마르쿠스 툴리우스 데쿨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기원전 77년 기원전 76년 기원전 75년 기원전 74년 기원전 73년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루키우스 옥타비우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기원전 72년 기원전 71년 기원전 70년 기원전 69년 기원전 68년
루키우스 겔리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 그나이우스 아우피디우스 오레스테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
기원전 68년 보결 기원전 67년 기원전 66년 기원전 65년 기원전 65년 보결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 푸블리우스 아우트로니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기원전 64년 기원전 63년 기원전 62년 기원전 61년 기원전 60년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마르쿠스 푸피우스 피소 프루기 칼푸르니아누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기원전 59년 기원전 58년 기원전 57년 기원전 56년 기원전 55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기원전 54년 기원전 53년 기원전 52년 기원전 51년 기원전 50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기원전 49년 기원전 48년 기원전 47년 기원전 46년 기원전 45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sine collega
기원전 45년 보결 기원전 45년 보결 기원전 44년 기원전 44년 보결 기원전 43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기원전 43년 보결 기원전 43년 보결 기원전 42년 기원전 41년 기원전 40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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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0년 보결 기원전 39년 기원전 39년 보결 기원전 39년 보결 기원전 38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가이우스 코케이우스 발부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기원전 38년 보결 기원전 38년 보결 기원전 37년 기원전 37년 보결 기원전 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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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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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루키우스 코르니피키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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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CAIVS IVLIVS CAESAR
파일:Julius_Caesar_Coustou_Louvre_MR1798.jpg
니콜라 쿠스투가 제작한 조각상 (1696)
{{{#fecd21 출생}}} 기원전 100년 7월 12일
로마 공화국 로마[A]
{{{#fecd21 사망}}} 기원전 44년 3월 15일 (향년 55세)
로마 공화국 로마[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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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라틴어 카이사르(Caes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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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정관 I 기원전 59년
II 기원전 48년
III 기원전 46년
IV 기원전 45년
V 기원전 44년
독재관 I 기원전 49년 10월[4]
II 기원전 48년 10월 취임[5]
III 기원전 47년 ~ 기원전 44년 2월 15일[6]
IV 기원전 44년 2월 15일 ~ 기원전 44년 3월 15일[7]
{{{#fecd21 신장}}} 170cm 참고[8]
{{{#fecd21 종교}}} 로마 다신교
{{{#fecd21 부모}}}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아버지)
아우렐리아 코타(어머니)
{{{#fecd21 아내}}} 코르넬리아 킨나(첫째 아내)
폼페이아 술라(둘째 아내)
칼푸르니아(셋째 아내)
{{{#fecd21 자녀}}} 율리아(딸)
옥타비아누스(양아들)
카이사리온(사생아)[9]
}}}}}}}}}

1. 개요2. 이름의 어원3. 가문 및 시대 배경4. 생애5. 평가6. 대중매체에서7. 여담8. 카이사르가 치른 유명한 전투들

[clearfix]

1. 개요

Vēnī. Vīdī. Vīcī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기원전 47년 젤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가 원로원에 보낸 편지의 전문.
고대 로마정치인이자 군인. 후기 공화정 로마를 근본적으로 뒤엎고 제정 로마의 기틀을 마련하여 사실상 제정 로마의 창업군주 또는 시조의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10][11]

쇠락한 유력 가문의 일원으로 출발하였으나 공화정 로마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며 정계에서의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집정관으로 선출된 이후 당시 유력한 정치인들인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더불어 삼두정치 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사실상 원로원을 무력화하였다. 이후 갈리아 원정을 단행하여 갈리아 전체를 로마의 속주로 편입하는 공적을 쌓았다.

이어진 폼페이우스 및 로마 원로원파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유일무이한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공화정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으나 그 끝을 보지 못하고 암살되었고, 그 과제는 후계자로 지명한 옥타비아누스[12]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기 황제들에 의해서 완수되었다.

뛰어난 정치인, 군인이었을 뿐 아니라 타고난 문인이자 달변가로서 《갈리아 전기》, 《내전기》와 같은 저술을 후대에 남겼으며, 그 외에도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브루투스, 너마저"와 같은 명언 또는 발언으로도 후세에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2. 이름의 어원

고대 로마의 초기 알파벳 체계는 그리스 문자에트루리아에서 변형된 것이 로마로 전해진 것인데, 에트루리아 언어에서는 /k/와 /g/ 발음이 구분되지 않아 /g/ 발음을 표기했던 감마가 C로 변형되어 /k/ 발음에 쓰였다. 그래서 초기 로마자에는 G가 없고 C로 /k/와 /g/를 모두 나타냈다. 추후 G가 추가되었지만, 인명을 표기할 때는 초기 용법에 따라 CAIVS, CNAEVS 등으로 표기된다.

카이사르 생전에는 고전 라틴어가 사용되어서 카이사르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이름을 표기할 때 사용한 카르투쉬에 분명히 '카'이사르로 표기되는 등 사료가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로제타 석에서도 "KAISRS"라는 발음표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라틴어 'Caesar'의 그리스식 표기 'Καισαρος(카이사로스)'를 다시 상형문자로 옮긴 것.

현재 국립국어원에서 인정한 표기는 카이사르다.[13] 하지만 1990년대까지는 '케사르’가 표준적인 표기여서 당시의 교과서나 출판물에는 ‘케사르’라고 쓰였으며, 대중적으로는 영어식 표기인 ‘줄리어스 시저’가 더 널리 쓰이기도 했으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대중적으로도 '카이사르'라는 표기가 정착되었다.[14] 한국어 개신교 성경 표준본인 개역한글판에는 '가이사'로 표기된다.

카이사르의 어원에 대한 설은 당대부터 많이 퍼져 있었다. 대다수 역사가는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카이사리에스(Caesaries)'의 변형으로 본다. 저 단어의 뜻은 "풍성한 머리를 가진"이란 뜻으로, 아마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상 중 한 명이 태어났을 때부터 풍성한 배냇머리를 가지고 있어서[15] 붙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집안 남자들에게 계속 대머리가 유전되다 보니 희망 사항으로 저런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도 있다. 카이사르가 대머리였다는 걸 보면 꽤 신빙성이 높은 설이다.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가문의 씨족 중 한 개의 이름, 즉 코그노멘(Cognomen)이고 주로 먼 조상 중 한 명의 별명에서 유래된 성씨다. 그리고 코그노멘에는 주로 그 시조뻘 되는 사람의 신체적 특징을 담고 있는 게 유난히 많아서[16] 더 신빙성이 가는 설이다.

다른 속설에 따르면 '카이사르'라는 단어는 본래 카르타고어로 '코끼리'를 뜻하는 카이사이(Caesai)의 변형이라는 '썰'이 당대부터 퍼져 있었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에서 한 병사가 전투 중 단신으로 코끼리를 죽이는 대활약을 해서 이런 별명을 얻었는데, 이 별명이 가문명으로 정착되었고 카이사르는 그의 후손이다. 이 '썰'이 맞는다고 가정한다면, 어찌 보면 로마인에게 멸망한 카르타고의 '코끼리'라는 낱말이 한 로마 병사를 거쳐서 카이사르에게 전달되고 마침내 황제를 뜻하는 대단한 말까지 승격되어 현대[17]까지 생명력이 남은 셈이다. 카이사르 개인은 이름이 코끼리에서 왔다는 설을 굉장히 좋아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어마어마한 전공[18]을 세운 전쟁 영웅일화가 더 폼도 나고, 정작 이름과는 달리 자신은 대머리라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파일:external/www.romanemperors.com/julius-caesar-elephant-coin.jpg
그래서 위 사진처럼 본인을 새긴 주화에 코끼리를 넣기도 했다. 참고로 현재에는 돈에 많은 위인들이 들어가지만 최초로 돈에 사람을 새겨 넣은 것은 카이사르라는 낭설이 존재하는데, 실존 인물의 초상화가 새겨진 주화는 아케메네스 왕조알렉산드로스 3세, 셀레우코스 제국 등 고대 시대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로마로 한정하면 최초가 맞다.

3. 가문 및 시대 배경

<nopad>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C3%A9sar_%2813667960455%29.jpg
이탈리아 투스쿨룸에서 발굴된 카이사르 두상.[19]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율리우스 씨족은 당대 로마에서 유서 깊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습 귀족[20] 가문이었다. 율리우스 씨족은 원래 도시국가 알바롱가[21]의 귀족이었다가 로마의 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때 로마로 강제 편입되었다. 이 알바롱가가 로마 건국 세력의 발상지임을 감안하면, 율리우스 가문의 역사는 거의 로마 자체의 역사나 다름없었다. 카이사르는 한술 더 떠 마리우스의 배우자였던 고모 율리아의 장례식에서 율리우스 씨족의 시조가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알바롱가의 개국시조 율루스이며 자신은 여신 베누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허구성 짙고 대담한 주장을 공공연히 하고도 빈축을 사지 않을[22] 정도로 유서깊은 가문임은 분명했다. 실제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후손 중 한 명을 시조로 둔 아이밀리우스 씨족[23]과 칼푸르니우스 씨족[24], 로마와 이탈리아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씨족들로 꼽히는 파비우스, 유니우스, 만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씨족, 건국 당시부터 합류해 꾸준히 평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발레리우스코르넬리우스 씨족 정도를 제외한다면 율리우스 씨족의 역사와 맞먹을만한 로마의 세습 귀족 가문은 거의 없었다. 하다못해 시조 클라우수스가 자기 부족을 통째로 끌고 와서 로마의 귀족으로 편입된 이래 한번도 몰락해본 적이 없었던 굴지의 명문 클라우디우스 씨족도 율리우스 씨족에 비하면 까마득한 후배(?)였다.

당시 율리우스 씨족은 족보 하나는 끝내주기는 했어도 왕정 폐지 이후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으로 이행되는 시점에서 이미 권력 핵심에서는 밀려나게 된다. 율리우스 씨족은 내부 지파로 루키우스 율리우스의 직계손들인 아울루스 가문을 비롯하여 리보, 카이사르 등이 있었다. 이중 가장 유명하고 율리우스 가문 전체를 상징하는 집안은 사실 아울루스 가문이었다. 이 집안은 공화정 초기 14명 정도의 집정관과 1명의 독재관을 배출했는데, 유명한 인물로는 율리우스 가문 내 중시조 정도로 찬사받은 대정치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울루스[25]가 있었다. 하지만 종가 격의 아울루스 가문의 경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일찌감치 대가 끊겨 기록만 남은 상태였다. 이는 또 다른 유력 가문 리보 가문도 비슷해, 그나마 알아주는 지파는 카이사르 가문 정도만 있다고 할 정도로 위세가 현저히 꺾여 있었다.

카이사르가 태어나기 직전인 기원전 2세기 무렵, 로마 공화정을 주름잡은 대명문가로는 로마 자체와 맞먹는 역사를 가진 대귀족 가문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배출한 파비우스 씨족, 그리고 이들보다 훨씬 후발 주자(?)로 로마에 귀화한 사비니 혈통의 클라우디우스 씨족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외에도 카이킬리우스나 리키니우스, 셈프로니우스, 도미티우스 씨족과 같은 평민 귀족(Noble plebeians)[26] 가문들도 이 시기에 다수 출현했다. 역사가 깊으면서도 부, 명성, 공적까지 전부 갖춘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나 파비우스 막시무스, 파울루스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등의 명문대가 앞에서는 한 수 접어야 했다지만, 선두권 신귀족 가문들의 부, 명성은 늦게 원로원에 입성했음에도 율리우스 씨족은 물론이고 그보다 사정이 나았던 여러 세습 귀족 가문들을 훨씬 능가했다.

설상가상 율리우스 씨족은 로마 사회가 변화하며 대두한 신흥 평민 귀족 가문들과 경쟁할 재력도 없는 상황에서, 전 지파에 걸쳐 집정관도[27], 전쟁 영웅도 배출하지 못했다. 기원전 2세기 지중해 세계 정복을 주도한 명문대가들[28]은 그 결과로 막대한 재력을 쌓고, 이탈리아를 넘어 지중해 전역의 호족들은 물론 왕가까지 클리엔텔라 관계로 끌어들였다. 애당초 공화정 로마에서는 출세하려면 선거에 엄청난 정치 자금을 쓰고 후원 회원도 많이 동원해야 했고, 재벌급 재력과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가문이 아니라면 고위공직을 연이어 역임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집정관도 전쟁 영웅도 배출하지 못한 율리우스 씨족은 기원전 2세기 이후부터 재산과 피호민 수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며 고위공직에서 자연스럽게 밀려난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카이사르의 조상들이 무능해서 율리우스 씨족이 정계의 중심에서 밀려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세계 제국으로 도약한 로마에서 가문의 족보와 실제 영향력이 점차 별개가 되고 신진 세력들이 대두하는 가운데 기존 세습 귀족들도 여러 분가[29]로 나뉘면서, 가문 간 경쟁이 치열해진 당시 원로원의 분위기에서 벌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따라서 유서 깊은 가문들은 이런 상황에서 밀려나지 않고 가문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했다. 상호 입양과 혼인을 통한 인척관계, 공통의 이해관계에 기반한 붕당 형성은 공화국 초기부터 볼 수 있는 현상이었으나, 이제는 치열해진 귀족가문 간 경쟁으로 인해 자신의 붕당 외의 다른 가문들을 적극적으로 배척하게[30]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카이사르 가문은 아예 잔반 수준으로까지 몰락하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카이사르가 활동하던 시절 그가 한때 유피테르를 모시는 최고 사제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31] 였으며, 그의 사촌 섹스투스가 퀴리누스를 모시는 고위 사제 플라멘 퀴리누스(Flamen Quirinalis)가 되고 팔촌 루키우스는 조점관이었던 등 모든 가문 구성원이 국가적 종교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종교에서의 율리우스 씨족의 막강한 위상은 마리우스 이후 가문의 부상과도 관련이 있겠으나, 원래 고위 사제는 실권은 없을지언정 가장 폐쇄적인 공직으로 노부스 호모에게는 거의 개방되지 않았으며 플라멘 디알리스를 비롯한 몇몇 신관직은 아예 평민이 맡을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세력유무야 어쨌건 역사가 오래된 씨족이 태고적부터 로마를 수호해온 신들을 모시는 사제직에 적합하다고 여겼고, 때문에 고위 사제직은 족보만큼은 짱짱한 가문의 자제들을 뽑는게 관례였다. 고위 사제는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었으며, 훗날 최고 제사장 자리를 카이사르가 잘 활용했던 것처럼 종교적 휴일을 선포하는 식으로 민회나 원로원 회의 등 정치 일정을 조절[32]하고, 사면권을 행사하기도 했으며, 점괘가 불길하다는 등의 이유로 민회나 원로원의 결정을 무력화하거나 반대로 그런 시도를 막아낼 수 있는 권능이 있었다. 현대 공화정에 대입하면 헌법재판관이나 선관위원, 국회 운영위원, 가처분 판사의 역할[33]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랬던지라 카이사르 가문은 권력의 중심에서는 밀려난 상황에서도, 세습 귀족가문들이 고위 사제 등을 세습하며 암암리에 맡아온 국가의 종교와 전통을 수호하는 역할을 통해 권위와 신망을 유지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변화의 흐름 속에서 카이사르 가문 역시 원로원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는데, 그들이 택한 방법은 자신들의 신분에 맞는 결혼 상대 대신 부유하고 유능해 장래가 기대되는 신진 세력을 찾아나서는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할아버지는 깡촌 아르피눔 출신의 듣보잡 라틴 평민으로 씨족이라는 '간판'이 없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사위로 맞았다. 비록 젊을 때부터 군인으로서 전도유망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때는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전이라 군 복무가 직업이 아니라 병역 의무였던 걸 생각하면 귀천상혼으로 집안 몰락 인증했다는 소리듣기 딱 좋은 혼사였다. 그런데 이후 마리우스는 당시 귀족들의 지리멸렬한 지휘에 더해 이제는 전쟁만 터지면 몇 년 동안 교대도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군 생활을 하는[34] 로마 평민들의 불만을 교묘히 이용해 별 선거 운동도 안하고 집정관 선거에 깜짝 출마해 당선되고 유구르타 전쟁을 빠른 승전으로 종결지었다. 거기에 더해 20만에 가까운 로마군을 학살하며 2차 포에니 전쟁 이래 최악의 위기를 가져온 게르만족의 대침공을 신묘한 전술로 멋지게 막아내는 일까지 이루어냈다. 결국 마리우스는 건국왕 로물루스와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에 이은 로마 제3의 건국자로 불리고 남들은 한두 번 지내기도 힘든 집정관직을 일곱 차례나 역임하는 위업을 세운다.

카이사르가 태어난 기원전 100년은, 개선식을 치르고 집정관을 연임하며 마리우스의 권세와 인기가 절정에 오른 시점이었다. 그의 인기와 방대한 인맥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35] 인척 카이사르 가문에게도 마침내 고위직 진출의 길이 열렸다. 카이사르의 삼촌인 섹스투스는 기원전 91년 집정관, 카이사르의 칠촌당숙 루키우스는 기원전 90년 집정관을 지내게 된다. 카이사르의 아버지 가이우스 역시 법무관과 아시아 총독을 역임했으나, 집정관이 되기 전, BC 85년에 사망했다.[36] 거기 더해 옵티마테스였던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가문은 카이사르의 외삼촌 셋이 나란히 집정관을 지내면서 로마 정치를 좌우하는 핵심 명문가로 발돋움한 상태였다. 한동안 집정관을 내지 못하던 카이사르 가문에서 드디어 삼촌 섹스투스와 칠촌당숙 루키우스[37]가 집정관을 지냈고, 외가에서도 외삼촌 셋이 집정관을 지냈으며, 아버지도 법무관까지는 출세했으니 카이사르 가문은 다시 로마의 최상층에 진입한 셈이었다. 이런 든든한 가문배경은 정치를 막 시작하는 카이사르에게 큰 힘이 되었다. 아버지가 끝내 집정관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일은 카이사르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마리우스와 킨나로 이어지는 포풀라레스 정권에서 아버지 가이우스가 집정관을 지냈으면 그는 마리우스파 핵심인사로 분류되었을 것이고, 그의 아들인 카이사르 역시 술라의 숙청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의 성공이 가문 전통이 되어 내려온 것인지, 카이사르 역시 출신 지역과 가문에 얽매이는 대신 개방적으로 혼맥을 맺고 인재를 기용했다. 카이사르 본인은 코르넬리아 킨나, 폼페이아 술라, 칼푸르니아처럼 명문대가 출신 배우자를 맞으면서도, 가문의 여성들은 명문 귀족 대신 성장 가능성이 있고 확고한 동맹이 돠어줄 지방 유력자와 맺어주게[38] 된다. 카이사르는 퀸투스 페디우스나 아티우스 발부스 같은 지방 명문가 출신들과 혼맥을 맺고 이들을 중용한 것을 넘어, 포로와 유랑민 출신이었던 벤티디우스, 신체에 결함이 있던[39] 바티니우스, 이탈리아 유력자는커녕 속주로 이주한 로마인의 후예조차도 아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같은 외국인[40]까지 폭넓게 중용했다. 물론 옵티마테스 진영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린 반면, 카이사르는 정실주의 없이 능력만 고려했다는 식으로 카이사르의 인재 기용을 단순하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옵티마테스 진영도 잠재력 있는 신진세력이 눈에 띄면 기용을 망설이지 않았고, 카이사르 역시 기존 명문귀족들을 더 우대했다. 카이사르 진영에도 레피두스나 돌라벨라,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데키무스 브루투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같은 명문귀족들이 즐비했고, 이들은 신진 세력보다 우선적으로 주요 관직에 기용되었다. 다만 기존 귀족들은 선을 긋고 미관말직에나 머물게 했을, 벤티디우스나 발부스 같은 무명 인사나 외국인까지도 카이사르는 군대 지휘를 맡기고 이후 집정관직을 역임하며 로마 정계의 정점에 오를 수 있도록 파격적으로 중용한 것이 큰 차이였다. 결국 이런 카이사르 의 개방성과 능력 중심의 인재 기용은 마리우스를 뛰어넘는 아우구스투스아그리파라는 두 번의 대박[41]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가문의 입지가 부침을 겪은 데 개인의 행운[42]과 불운뿐 아니라 시대상황이 크게 작용했던 만큼, 카이사르 가문이 특이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카이사르 가문처럼 한때 경쟁력을 잃고 밀려났던 세습 귀족들은 당시 로마에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술라, 카틸리나인데 이들은 원로원 의석은 유지한 카이사르 가문이 애교로 보일 만큼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진짜 명문 귀족의 후예였다. 이렇게 공화정 후기 로마 정치의 최상층부에서 밀려났던 명문귀족들 중 일부가 로마의 영역이 크게 팽창하고, 기존 명문대가의 일원이 아니었으나 정복지에서의 군사와 상업활동을 통해 권력과 부를 거머쥔 신진 세력들과의 연대를 통해 로마 정치의 중심에 다시 진입하는 일도 당시에는 드물지 않았다. 돈과 영향력에 비해 부족한 가문의 족보는 늘 신진 세력의 약점이었고 익숙한 '브랜드'를 선호하는 유권자와 동료 정치인들의 지지를 얻는 데는 명문 귀족들과의 인척관계와 정치적 연대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인척 마리우스 덕을 봤던 카이사르 가문과 마찬가지로 마리우스의 휘하에서 활약하면서 로마 귀족사회로 돌아올 기회를 잡았던 술라가 그런 경우였고, 본인의 혈통이 진짜 세습 귀족이기는 했어도 맨주먹으로 태어나 신진세력이나 다름없었던 술라와의 연대로 원로원에서 영향력을 키운 카틸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들은 고위직으로 진출할 길이 열렸을지언정 다른 가문들처럼 정치 자금을 소모할 만큼 부유하지는 않았던지라, 출세의 과정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카이사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의 출생지와 자택은 로마의 대표적인 서민 주거지로, 귀족들이 선호하지 않은 수부라 구역이었다. 이처럼 카이사르 가문은 지금으로 치면 재산 규모가 평범한 영세 자산가 수준인 귀족에 불과했다. 지금으로 치면 유명한 조상들을 둔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강북의 다세대주택 밀집지역에서 나고 자란 정치인이었던 셈[43]이다. 더욱이 원로원 의원은 플라미니우스 법에 따라 상공업과 임대업도 할 수 없었던지라, 건국 이래 대대로 귀족이었던 카이사르 가문은 지방에서 은행업을 통해 중견기업 정도 규모의 재산을 일군 옥타비우스[44]같은 신참 원로원 의원 집안보다도 재산이 현저히 적었다. 때문에 카이사르는 경력을 쌓는 과정에서 큰 빚을 지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세계제국으로 도약한 로마에서 공직에는 엄청난 이권이 걸려 있었고, 때문에 후보자는 당선되기 위해 큰 돈을 들여 공공 사업을 벌이고 유권자들에게 뇌물을 뿌려야 했다. 따라서 혼맥과 인맥 덕에 출세에 도움이 될 연줄과 인지도가 있었음에도,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때문에 카이사르의 정치 경력은 거의 끝장날 뻔했다. 크라수스와 같은 유력한 사업가들의 보증이 아니었으면, 비슷한 처지였던 카틸리나처럼 빚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리우스와의 연대로 카이사르 가문의 출세길이 다시 열리기는 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카이사르 가문은 당시 로마를 장악한 옵티마테스 고위 귀족들과 온전히 한 편이 될 수 없었다. 마리우스는 씨족 이름조차 없는 그야말로 촌구석의 듣보잡 평민으로서 원로원 의석을 오랫동안 차지해온 귀족들과 대립하는 입장이었고, 마리우스의 붕당은 민중파, 혹은 포풀라레스로 불리게 된다. 때문에 카이사르 가문은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혈통으로는 옵티마테스[45]에 속하는 게 당연했으나, 공화정 로마의 부유한 명문 귀족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마리우스와 포풀라레스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46]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뒤를 이어 포풀라레스 정권의 수장이 된 킨나의 딸과 결혼하면서,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가 되며 마리우스파와의 연대를 더욱 확고히 하게 된다. 또한 카이사르 가문은 술라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술라의 첫 부인이 율리우스 가문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47] 마리우스의 처가로서 마리우스 붕당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카이사르 가문이 술라의 숙청에서 살아남아 로마 정치의 중심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데는 술라와의 인척관계가 유리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술라의 첫 결혼에서 태어난 딸인 코르넬리아 술라는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결혼해 폼페이아를 낳았는데, 이후 그녀는 카이사르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와의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그의 숙적이었던 옵티마테스의 대표 주자 술라파와의 관계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것이다.[48]

카이사르 가문이 포풀라레스옵티마테스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는 점은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가계만 봐도 드러난다.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문은 비록 성향이 온건하긴 했지만 엄연히 옵티마테스의 중진으로 간주되었고 덕분에 술라의 숙청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49] 다만 코타 가문은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나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처럼 원로원의 특권만을 앞세우는 강경한 옵티마테스 인사들은 아니었고, 카이사르의 외삼촌인 루키우스는 원로원이 독점하던 배심원 역할을 기사계급과 함께 수행하는 법률을 입안하기도 했다. 다만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이 민중파라는 것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전혀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술라의 숙청 이후에도 마리우스는 서민들에게 전쟁 영웅이자 민중의 편으로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내전과 술라의 무자비한 숙청으로 마리우스의 친족들은 남김없이 살해당했기 때문에 남은 인척은 마리우스의 처조카인 카이사르뿐이었고, 거기에 킨나의 사위임을 내세워 그는 젊은 나이부터 포풀라레스 붕당의 영수가 된다.

포풀라레스와 옵티마테스 양 쪽과 전부 밀접하고, 고귀하지만 부침을 겪은 가문 출신으로서 빈민가에서 경력을 시작한 카이사르의 특별한 배경은 카이사르의 정치적 행적과 성공의 비결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이다. 이런 배경 덕에 정치 입문 시점부터 카이사르는 로마 건국까지 올라가는 유서깊은 세습 귀족으로서 그들이 독점하던 특권을 온전히 향유하면서도, 포풀라레스 붕당의 수장으로서 평민과 기사계급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양쪽의 이점을 전부 취할 수 있었다. 이를 이용해 카이사르는 법무관도 지내기 전에 집정관을 여러 차례 지낸 원로에게 어울리는 자리인 최고 제사장에 당선되고,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대등한 입장에서 삼두연합을 맺을 수 있었다. 삼두연합을 통해 권력을 얻은 카이사르는 마리우스나 폼페이우스 같은 평민 야심가들과는 달리 명문귀족들의 인정을 갈구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대대로 물려받았고 최고 제사장이 되며 더 강화된 종교적 권능까지 이용해 원하는 바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그런 추진력으로 그는 토지개혁 등 그라쿠스 형제가 못 이룬 꿈을 일부분이나마 이루고, 갈리아 전쟁을 통해 얻은 막강한 무력과 지지자들을 등에 업고 옵티마테스 붕당을 해체해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열 수 있는 기반[50]을 닦게 되었다.

4.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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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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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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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담

8. 카이사르가 치른 유명한 전투들


[A]이탈리아 라치오 주 로마[A] [3] 발음은 [ˈt͡ʃeːzare\]이므로 '체자레'에 더 가까우나, 이탈리아어 표기법이나 전통적인 이탈리아어 발음에 따라 '체사레'로 표기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인 체사레 보르자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4] 11일간 재임.[5] 연말까지 재임.[6] 기원전 46년 4월 말 10년 임기로 전환.[7] 종신 독재관 (Dictator Perpetuo)으로 취임, 재임 중 암살.[8] 사실 고대사람이 중세시대 사람보다 평균키가 더 높았다. 이는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도 나온다. 당대 로마인의 평균키는 167~170cm이였고 이 정도 키는 평균 키로 봐야한다.[9] 클레오파트라와의 아들.[10] 그의 성인 카이사르로마 제국에서 지속적으로 황제(또는 부제나 후계자)를 칭하는 칭호로 사용되었고,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카이저, 러시아 제국차르의 유래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유럽의 각 언어권에서 카이사르의 파생어들이 임페라토르의 파생어가 쓰이는 곳을 제외하면 황제 또는 군주를 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11] 카이사르가 황제였는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이견이 있어 왔는데, 근대 이전까지는 카이사르를 최초의 로마 황제로 여기는 풍조가 강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의 역사학계에서는 카이사르의 정치 체제와 아우구스투스원수정과의 차이를 들어 아우구스투스를 최초의 황제로 보는 시각이 주류가 되었다.[12] 훗날의 아우구스투스[13] 라틴어는 외래어 표기법이 없고, 국립국어원에서 사용하는 관행적인 표기 원칙이 있기는 하나, 정식으로 규정된 적은 없다. 관행적 표기는 고전 라틴어 발음에 가깝기는 하지만 고전 라틴어보다는 현재 가톨릭에서 쓰는 교회 라틴어 발음에 가까운 것도 있다. 한국에서 라틴어의 V의 발음은 일반적으로 /v/라고 보아 ㅂ로 적는데 이는 교회 라틴어(중세 이후 라틴어)에서의 발음이고, 고전 라틴어에서는 /u/나 /w/ 발음이었다.[14] 단 일본에서의 표기는 카에사르(カエサル).[15]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도, 시빌라 예언으로 등장하는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의 운명에 대한 시에서 황제들을 은유해 '털북숭이'라고 부르고 있다.[16] 즉 어느 가문에서 파란 눈을 가진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를 어느 가문의 파란 눈이라고 부르다가 그 아이의 후손들 구분을 위해 어느 가문의 파란 눈 분파라고 부르는 식이었다.[17] 독일어 카이저(Kaiser), 러시아어 차르(Царь/Tsar) 등이 있다.[18] 병사가 코끼리를 죽였다는 건 요즘으로 치면 알보병 하나가 중화기도 없이 전차 한 기를 무력화시킨 셈이다.[19] 유일하게 카이사르 생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20] 평민 귀족(Noble Plebians) 가문들 때문에, 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상황과 맥락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원래 귀족(Patrician)은 왕정이나 공화정 초기로부터 내려오는 유력 가문 구성원들 사이에서 세습되는 신분이었다. 그런데 공화정 중기 이후 등장한 평민 귀족 가문들은 따로 귀족 신분을 부여받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기존 다수의 세습귀족들보다도 영향력이 컸고, 통혼하거나 정치적 동맹을 맺을 때도 기존 세습귀족들로부터 대등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분명히 '귀족'으로 인식되었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평민과 세습 귀족의 구분 없이 원로원 의원직을 세습하며 정국을 주도한 가문들을 통틀어 수식 없이 '귀족'으로 부르고, 공화정 초기부터 이어진 신분으로서의 귀족은 '세습 귀족'으로 구분하여 서술했다.[21]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의 생존자 아이네이아스의 아들이 알바롱가를 건국했으며 그 알바롱가 왕녀와 군신 마르스의 아들이 바로 초대 왕 로물루스다.[22] 율리우스 씨족보다 역사가 짧고 기원이 불확실한 가문도 족보에 신들을 끌여들여 윤색하는 일은 종종 있었으나 보통은 세간의 비웃음을 샀다. 적어도 율리우스 씨족의 경우 가문의 역사가 로마 건국 이전부터 시작하는 건 확실했기 때문에 문제가 덜 된 것이다.[23] 누마의 후손이 아닌 알바롱가의 유서 깊은 귀족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있다.[24]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의 친정으로 피소, 비불루스를 배출했다. 이 가문은 씨족 성씨에서 드러나듯 누마의 아들 칼푸스가 시조였다.[25] 기원전 489년 집정관.[26] 이들은 실제 귀족 신분은 아니었고, 평민집회에 참가하고 호민관을 역임하는 등[97] 평민 고유의 권리도 계속 향유했다. 다만 평민임에도 기존 귀족 가문들과 대등하게 혼맥을 맺고, 기존 파트리키 가문처럼 구성원들이 고위 관직을 연달아 역임할 정도로 가문의 위세가 커졌기 때문에 '평민 귀족'으로 불린 것이다.[27] 공화정 초기의 주요 가문 중 하나였던 율리우스 가문 사람들은 후기 공화정에서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장 전까지 BC 267년, BC 157년을 제외하고는 집정관직을 역임하지 못했다.[28] 공화정 후기에는 포에니 전쟁으로 누미디아 왕가까지 피호민으로 만든 스키피오 가문, 프로빈키아(남프랑스)를 정복한 아헤노바르부스와 파비우스 가문, 마케도니아와 일리리쿰에서 정복 활동을 벌인 메텔루스 가문 등 전쟁을 통해 명성을 쌓은 가문들이 다수 출현했다.[29] 여기 해당하는 것이 코르넬리우스 씨족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고 해도 좋을 또 다른 대귀족 클라우디우스 씨족이었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 인레길렌시스의 아들인 장님(카이쿠스) 아피우스와 그의 장남(실제로는 차남)을 중시조로 둔 풀케르 가문은 클라우디우스 가문 그 자체로 인식될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지만, 아피우스 카이쿠스의 차남(실제로는 사남) 티베리우스에서 기원한 지파인 네로 가문은 형제뻘 친척인 풀케르 가문이나 시조 아피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먼친척 마르켈루스 가문과 달리 전쟁 영웅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외에는 집정관을 배출하지도 못한 채 카이사르 가문처럼 법무관을 배출하면서 의석을 세습하고 있었다.네로 가문이 본격적으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시기는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카이사르 밑에서 해군제독, 법무관 등을 지내며 카이사르파로 활약한 이후였다. 그러나 이 역시 풀케르, 마르켈루스 가문보다 잘 나간다거나 대등한 수준은 아니었고, 네로 가문이 클라우디우스 가문 그 자체가 된 시기는 리비아 드루실라가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해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와 그 후손들이 카이사르의 율리우스 가문과 하나의 가문으로 결합된 시대 이후였다. 결국 이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이루는 카이사르와 네로 가문은 둘 다 때때로 등장한 몇몇 유명인들을 제외하면 공화정 시기에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귀족가문이었던 것이다.[30] 평소같으면 온정주의가 작동해 관대하게 처리되었을 일이나, 합의를 통해 적당히 나눠먹고 끝났을 관직 배분에서의 충돌이 점차 잦아지게 되었다.[31] 최고신 유피테르를 모시는 사제였으니 당연히 그 권위가 막강해 최고 제사장과 비견될 정도였다. 그는 원로원의 당연직 의원으로, 릭토르를 거느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치 참여에 제약이 없던 최고 제사장과는 달리 플라멘 디알리스는 죽음과 관련된 어떤 행위도 할 수 없었는데, 군 지휘가 곧 정치였던 고대 로마에서 이는 그가 명예로운 경력(Cursus Honorum)과 현실정치 참여에서 배제된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32] 역법이 이들의 소관으로, 필요할 때 달력에 날수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의사일정을 지연시키거나 선거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점에 열리게 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가 율리우스력을 제정한 것은 역법의 불확실성을 줄여 일상생활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함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필리버스터로 쓰이던 역사와 전통의 꼼수를 봉쇄하려는 조치였다. 당시 로마 역법의 폐해를 로마인들 자신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기존의 역법을 고치지 않은 것은 무지보다는 그것의 유용성 때문이었다.[33] 현대 공화정에서 엘리트 중심으로 구성되어, 급격한 변화에 저항하고 체제를 수호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사법부를 생각해보면 된다. 이는 이렇다할 조상이 없는 지방 평민 야심가[98]가 집정관, 심지어는 개선장군과 국가적 영웅이 될 수 있는 개방성이 있었고, 호민관이 민회나 평민집회에서의 입법권, 거부권 행사를 통해 원로원 결의를 뒤집으며 포풀라레스가 기세를 올리기도 하던 로마 공화정이, 근본적으로는 귀족들의 합의로 굴러가는 과두정이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직접적인 견제 외에도, 폐쇄적인 고위 사제직은 가끔 등장하던 위협적인 평민 야심가를 체제에 포섭하는 역할로서 유용했다. 협력자 사투르니누스를 마지막 순간에 버리고 그를 진압하는 원로원파에 합류했던 마리우스나, 동방을 정복하고 돌아왔으나 전후처리나 퇴역병에 대한 보상 문제에서 개무시로 일관하는 원로원 앞에서 군대를 해산하고 참고 견딘 폼페이우스의 사례처럼 이들은 아쉬울 게 없어 보였음에도 원로원파와의 대결에서 때로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들은 한편으로 원로원과 대립하면서도 체제에 본격적으로 대항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일에는 계속 망설였고, 스카이볼라나 스카우루스 같은 명문가와 혼사를 맺고 우호적인 관계를 쌓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그들은 자신의 가문이 여러 대에 걸쳐 번성하여 후손들이 명문귀족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그들에게만 열려 있던 고위 사제나 켄소르 등의 공직까지 진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99]이다.[34] 원래 로마군은 현역 해당자인 시민들이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병역을 수행하기 때문에 일정 기간마다 부대 구성원이 교체되어야 했으나 포에니 전쟁 이후로 해외 영토가 크게 늘고 이역만리에서 전쟁을 하게 되면서 교대 시스템이 무너졌다.[35] 처가라 해도 물론 공짜는 없었던지라 카이사르의 아버지 가이우스는 마리우스의 퇴역병 정착을 도우며 나중에 드러났듯 그들을 마리우스의 사병으로 만드는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36] 미트리다테스에게 된통 당하기 전까지 로마 총독들이 아시아 속주를 마음대로 벗겨먹을 수 있는 화수분 취급했던 만큼, 카이사르의 아버지 역시 한몫 챙겼을 것이 확실하다. 다만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마리우스파였던 만큼 그 재산은 내전을 거치며 사라지거나 술라에게 몰수당했을 것이 분명하고, 이는 카이사르의 출세 전까지 그의 가족이 수부라에서 생활할 정도로 가난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이후 아시아 총독 부관으로 공직 경력을 시작해 비티니아에서 긴 시간을 보낸 것은, 아버지가 아시아 총독을 역임해 이 지역에 연고가 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드리아누스시대의 변호사,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3대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처럼 카이사르 스트라보 역시 킨나 시절 칼에 맞아 죽었다면서 율리우스 가문 내의 가이우스를 개인 이름으로 사용한 카이사르 집안 남성들은 칼에 맞아 죽을 운명이었다고《황제열전》에 서술했다. 하지만 카이사르 스트라보는 병으로 사망했고, 저서 말미에 수에토니우스 스스로 자신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그리고 칼리굴라를 얼마나 혐오했는지 기술한 탓에 국내 번역서 저자들까지도 "틀렸다", "명백한 오류다" 등으로 각주를 달아 짚고 넘어가고 있다.[37] 이 루키우스 분가의 출세는 사실 마리우스와 큰 관련은 없었다. 루키우스는 가장 집요하게 마리우스에 반대했던 옵티마테스파 수장 카툴루스의 이부형제로, 정치적 배경은 오히려 반대였다. 정치적 입장도 다르고 칠촌이면 거의 남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율리우스 가문은 공화정 말기까지 살아남은 후손이 매우 귀했다. 때문에 당시 율리우스 가문원은 전 로마를 통틀어 독재관 카이사르의 할아버지 가이우스의 분가와 이 루키우스 분가 사람들이 전부였고 때문에 양쪽은 관계가 꽤나 밀접했다. 이 관계는 루키우스의 외손자로 부계후손이 끊어진 분가를 사실상 잇게 된 안토니우스가 독재관과의 혈연관계는 9촌으로 멀었어도, 독재관 카이사르의 최측근이자 유력한 후계자로 간주된 이유였다. 안토니우스의 후손들이 황족으로 온전히 인정받아, 칼리굴라 이후 로마 황통을 잇게 된 데는 이들이 루키우스로부터 이어지는 카이사르 분가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점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38] 물론 가난한 카이사르에게는 명문대가에 딸의 지참금으로 내줄만한 돈이 없었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39] 2천년이 지난 현대인들도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당시에도 장애는 공직자에게는 큰 결격사유였다. 이후 황제가 되는 클라우디우스 1세는 흠잡을 데 없는 혈통이었음에도 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괄시받으며 나이 50이 되도록 별다른 경력을 쌓지 못했다. 이에 비하면 카이사르는 편견없이 인재를 기용했던 것.[40] 가데스(현재 카디스)의 페니키아계로,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활약해 로마 시민권을 받았다. 아직 이탈리아 지방도시 명문가 출신조차 운신에 제약이 있던 당시 정서를 고려하면, 외국인인 발부스는 애초에 정치는 꿈도 꿀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럼에도 카이사르에게 자금 운용 능력과 정치력을 인정받아 갈리아 전쟁 내내 로마 업무를 총괄하는 비서실장 역할을 수행하고, 카이사르 사후에는 집정관까지 역임한다.[41] 당시에는 누가 봐도 옥타비우스[100]보다는 안토니우스가 더 후계자로 적합해 보였다. 물론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의 가장 가까운 혈연이었지만, 입양은 꼭 혈연만을 고려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안토니우스는 당시 정치인의 전성기로 간주되던 40대를 눈앞에 뒀고, 카이사르파의 2인자로서 정치적 입지도 탄탄했다. 외할머니가 카이사르의 누나였던 옥타비우스와 달리 안토니우스는 어머니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여동생으로, 카이사르와 촌수는 멀어도 율리우스 가문과의 관계는 더 가까웠다. 감찰관 할아버지와 삼촌을 둔 안토니우스의 막강한 배경은 집정관도 배출하지 못한[101] 옥타비우스 가문과는 애초에 비교대상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지방 유지 가문 출신의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벤티디우스처럼 완전히 무명이었던 농민가정 출신의 아그리파를 인간성과 능력만 보고 그에게 붙여줬다. 이후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가 함께 이뤄낸 놀라운 성공은, 단순한 우연이나 행운으로만 볼 수는 없으며 카이사르의 인재 기용 방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카이사르가 능력을 보고 발탁한 인재들이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도움이 되었음은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원로원 정원을 900명으로 늘리고 갈리아 부족장들까지 의원으로 받아들이면서 충실한 카이사르파들에게까지 반감을 사 암살당하게 된 일을 잊지 않았다. 결국 권력을 잡은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 정원을 600명으로 다시 줄이고 기존 명문귀족과 이탈리아 유력자 중심으로 인재를 기용하게 된다. 다만 이를 뒷받침할 실무 관료로는 지방의 기사계급을 꾸준히 등용하였고, 결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후반부에는 황제의 측근 역할을 하며 성장한 관료 출신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 그런 세력의 대표주자격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플라비우스 왕조가 들어선 뒤 그는 문호를 더 개방하여 속주 출신 인사들을 중용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결국 트라야누스의 등장까지 이어지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방향성 자체는 이어가되, 반발을 고려해 속도를 조절했던 것이다.[42] 물론 카이사르 가문의 부흥에는 그렇게 출세할 거라고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던 시절의 마리우스를 사위로 맞은 엄청난 행운이 결정적이었다. 사실 생전 행적을 고려하면, 처가에 대단한 도움을 줄 생각은 없던 게 분명했던 마리우스가 새로운 명문가를 여는 대신 또 다른 전쟁의 주인공이 되려는 욕심에 폭주하다가 대가 끊겨, 처조카 카이사르가 전쟁영웅의 명성, 시민들의 향수 등 그의 무형적 유산을 온전히 물려받은 것은 또다른 큰 행운이었다. 물론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이혼하라는 독재관 술라의 명령에도 끝까지 버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숱한 정치적 위기를 넘겨 그 탈 많은 유산을 온전한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만드는 과정에서는 카이사르의 결단력과 능력이 크게 작용했다.[43] 수부라는 카피톨리노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에 위치해 있는 저지대로, 공공건축물이 밀집한 북부와 하층민들이 살던 남부 구역이 뒤엉켜 있는 로마시 최대의 상가로서 유흥 시설과 윤락가까지 들어서 하루종일 시끄럽고 습기찬 시장통인지라 귀족이면 술라같은 몰락 잔반이 아닌 바에야 거기서 안살았다. 자고로 공화정 로마에서 귀족이라고 하면 로마시 7대 언덕 중 6개 위에 형성된 밝고 조용하고 물이 잘 빠지는 부촌의 단독 주택에서 사는게 일반적이었다. 다만 카이사르가 수부라 빈민들과 똑같이 살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원로원 의원 신분을 감안[102]하면 그의 자택은 수부라에서는 나름 괜찮은 '주상복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로원 입성을 위한 재산 자격은 100만 세르테르티우스 이상이었던 만큼 카이사르 역시 자택 외에도 교외의 농장 등 이런저런 자산을 보유했을 것이고, 하루 몇 세르테르티우스 정도의 일당으로 먹고살던 서민들 눈에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원로원 의원이라도 대단한 자산가였다. 카이사르 가문의 경제력이 서민 수준으로 떨어졌다면 한때의 술라 가문처럼 원로원에서도 진작 밀려났을 것이고, 다만 그들에게는 팔라티누스 언덕의 거대한 단독주택에 입주할 재력은 없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현대 정치인들도 일부러 서민적 배경을 내세우려 애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이런 특이한 배경은 카이사르의 인기 요인 중 하나였다. 팔라티노에 살며 그들끼리만 교류하는 명문가 귀족들과는 달리,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고귀한 혈통의 카이사르가 수부라로 흘러들어온 온갖 배경의 주민들 사이에서 나고 자란데다 정치경력을 쌓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호감을 샀던 것이다.[44]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버지[45] 직역하면 최고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엘리트주의를 내세운 귀족파를 뜻하는 말.[46] 실제로 마리우스는 자신을 공격한 원로원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카이사르의 칠촌당숙인 BC 90년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해하기도 했을 정도로 마리우스에 대한 카이사르 가문 내부의 스탠스는 복잡했다.[47] 그러나 그 외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일부 사가는 이 율리아가 카이사르의 칠촌 당숙 루키우스의 여자 형제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 소설 《로마의 일인자》등을 집필한 콜린 매컬로는 이 율리아를 카이사르의 고모이자 마리우스의 아내 율리아의 여자 형제로 설정했으나,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를 동서지간으로 만들고 카이사르를 마리우스와 술라 양쪽과 엮어 이야기 진행을 수월하게 만들기 위한 단순한 창작이다. 다만 술라가 초기 마리우스의 보좌관으로 활동했던 것은, 율리우스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제기해볼 수 있다.[48] 실제로 로마 귀족들은 이념에 따라 붕당을 형성하기보다는, 그때 그때의 이해관계, 친족이나 보호자에 대한 의무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포풀라레스와 옵티마테스를 '민중파'와 '귀족파'라는 고정된 붕당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못한 시각이다. 카이사르가 옵티마테스 견제에 쏠쏠하게 써먹었던 호민관 클로디우스만 해도 원래 당시 로마 최고의 명문 귀족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였는데 민중파 활동을 위해 스스로 귀족 신분을 버리고 평민이 된 케이스이다.[49] 실제로 카이사르의 친척들 중에서 카틸리나 탄핵 때 같이 엮여서 옵티마테스 쪽에 완전히 찍힌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카이사르의 부관 노릇을 한 안토니우스 정도만 제외하면 거의 다 옵티마테스 쪽 인사들이었다. 그 정도로 카이사르는 가문만 보면 완벽한 귀족 자제였다. 그나마도 루키우스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려고 할 때 이건 반역이라며 반발했을 정도였다.[50] 물론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의 정치개혁을 예상했다거나, 제정 로마 수립을 의도했다고까지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51] 당시의 로마인들의 관점에서 동성애가 용인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볼 수도 있는데, 동성애는 나약한 그리스식 취미 취급을 받았고 더군다나 동성애에서 수동적 역할 즉, 삽입 당하는 역할을 맡는 것은 노예나 할 법한 '여성적' 역할로 보아 로마 시민이 남창 영업을 하다 적발되면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중죄였다.[52] 돌라벨라는 카이사르를 "왕비의 연적"이라고 불렀고, 메미우스는 그를 '연회에서 종 노릇을 했다'며 비난했다. 특히 화려한 웅변 실력을 인신공격에 쓰던 키케로는 '베누스의 후손이 비티니아에서 청년막을 따였다'며 조소했고, 후일 니코메데스의 딸인 니사를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변호하자 "집어치우시오. 그와 당신이 뭘 주고받았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라고까지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카이사르의 정적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그와 집정관으로 집권하던 해에 그를 동료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 유명한 "비티니아 왕비"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러나 정작 비불루스는 그 해에 카이사르에게 완전히 정치적으로 농락을 당했으니 아이러니하다.[53] A.골즈워디 같은 현대 사가들은 정적인 원로원파들이 당시 로마인들에게 퍼져 있던 동방, 동방 왕실에 대한 경멸 및 혐오감과 동성애자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등을 민중파의 우두머리이자 독재자인 카이사르에게 엮어 권위를 실추시키는 정치 선전에 써먹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본다. 어쨌든 가십을 좋아하는 수에토니우스의 이야기가 출전이므로 이 소문의 진위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54] 탈모는 카이사르에게도 계속 콤플렉스였는지 클레오파트라 7세와 동거했을 시절에는 그의 탈모를 개선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가 쥐를 태운 재에 곰의 기름과 사슴 뿔을 섞은 약을 만들어 주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탈모를 멈출 수는 없었다고 한다.[55] 탈모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명 '바코드' 스타일을 말한다.[56] 실제로 카이사르는 여성편력이 굉장히 심했다.[57] 당시 카틸리나의 정치적 목표가 바로 채권자들에게 부채 전액 탕감을 강제하는 것이었는데 카이사르도 빚을 엄청나게 지고 있어서 한패라는 의심을 받았다. 거기다 태생적으로 민중파였기 때문에 원로원파에게 미움을 샀던 것도 있었다.[58] 그녀의 자식은 그 유명한 마르쿠스 브루투스다. 일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정말 사랑했던 여인이 세르빌리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브루투스를 너무 아낀 나머지 이런 야담까지 나왔다. 그러나 브루투스 본인은 그 말 때문에 시달려서 싫어했다.[59] 카이사르가 먼저 회의 중 무슨 편지를 적어 시종 편에 보냈고, 거기에 온 답장이 세르빌리아의 편지였다고도 한다. 이 전개를 따른다면 카이사르가 자신에 대한 의심도 딴 데로 돌리고 겸사겸사 카토도 망신 줄 생각으로 작정하고 회의 중에 세르빌리아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60] 연애 편지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이때 지속적으로 공권력에 의한 채무 강제 탕감을 주장한 카틸리나에 대한 여론이 하도 나빠서 카이사르는 카틸리나에 대해 "일단 재판을 하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군대로 감시하자"라는 발언을 했다가 어그로가 끌린 군중들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법적으로는 엄밀히 말하면 카이사르가 옳았고 재판 없이 로마 시민을 즉결처분하는 건 불법이었다. 한마디로 재판 판결도 혐의 입증도 없이 그냥 죽인 셈이어서, 카틸리나 사후 제정신이 돌아온 로마 시민들은 자신들이 재판도 없이 로마 시민을 처형했다는 것을 후회하고 그 책임을 물어 키케로를 추방하게 된다. 이전에는 마녀사냥을 당했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고 당연히 정당한 절차를 거쳐 내쫒은 것이다.[61] 오죽하면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에 대한 로마 시내의 중평은 솔개에게서 매가 태어났다.였다고 한다.[62] 정치적인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첫 번째 부인인 코르넬리아와는 차라리 이혼하는 게 정치적으로 이득이었는데도 당시 독재자였던 술라가 이혼하라는 명령도 거부하고 튀었다. 이는 카이사르가 자신은 민중파라는 것을 술라를 비롯한 보수파들에게 알린 일화라고 보는 것이 맞다. 자신은 마리우스를 지지하기에 술라의 말은 듣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후로 카이사르는 자신이 마리우스와 혈연이면서 민중파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다녔으며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전까지, 아니 성공하고 나서도 원로원의 견제를 지속적으로 받았다.[63] 그래도 합법이기는 했다. 그 유부녀의 남편이 결혼식 들러리를 해줬다고 하고, 전 남편의 자식 2명(그중 임신 중이던 둘째가 불륜의 결과라는 이야기도 있지만)을 모두 떠맡았으며 데려온 자식 중 첫째가 결국 후계자가 되기도 했다.[64] 다만 이건 드루수스가 일찍 죽어서 그렇게 된 거고 만약 드루수스가 오래 살았다면 황제 자리는 당연히 드루수스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애시당초 티베리우스는 황제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고 반면 드루수스는 활달하고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두 형제의 사이는 지극히 좋았다. 만약 드루수스가 황제가 되었다면 그의 부족한 부분을 티베리우스가 채울 수 있어서 매우 이상적이었을 지도 모른다.[65] 1999년작 프랭크 로덤 감독의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선 작중 클레오파트라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클레오파트라와 그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와의 결혼을 제의하는데, "저런 코흘리개 어린애하고 결혼하기 싫다"라고 투덜대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여왕이 되었으면 여왕처럼 생각하는 방법도 배워라. 프톨레마이오스와 부부가 되면 그의 군대를 합법적으로 해산시키고 당신의 반대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걸 모르겠냐."라며 일침을 놓는 장면이 있다.[66] 카이사리온은 카이사르의 유일한 남자 자손이었는데도 말이다. 사실 카이사르는 그렇게 염문을 많이 뿌렸지만 후손은 공식적으로 딸밖에 없었고 그 딸도 이미 카이사리온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었다. 그런데도 카이사리온이 아닌 옥타비아누스를 선택한 것이다.[67] 사실 살아있었다. 주인공도 모르고 있던 자신의 진짜 정체가 바로 카이사리온이었다.[68] 카이사르 본인은 7권까지 썼고 마무리는 그의 부관이 8년째 뒷마무리 과정을 쓰면서 완성시켰다.[69] 라틴어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문장 내에서 품사의 순서가 자유롭다.[70] 의외로 로마인들은 실용보단 '위엄'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로마 귀족들의 전통 예복인 토가가 실용과 거리가 억만 년쯤 떨어진 복장인 걸 생각하면 제책법 역시 '위엄이 넘치지 않아서' 거부했다는 주장이 아예 생뚱맞은 주장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71]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패장을 가차없이 처형했는데 이런 고급 인력의 손실과 달리 실수를 만회할 의지에 불타는 장군들이 넘쳐난 로마에게 유리했다는 평가도 있다. 심지어 로마의 패장은 패전 자체로는 처벌받지 않았지만 전투 직전에 닭 모이 점을 치다가 불길하게 나오자 닭을 바다에 집어 던져버려 경솔하게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 때문로만 처벌받은 경우도 있다.[72]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를 “자신의 운명을 알았고, 그 운명을 권력 쟁취의 동력으로 삼았던 슈퍼 휴먼”으로 그렸다. 플루타르코스는 “누구보다 자신의 운명에 강한 믿음을 가졌던 인물”로 카이사르를 묘사했다. 현대의 연구가인 에이드리언 골즈워디는 행운의 연속이라고 평할 만한 카이사르의 삶을 두고 “운명의 여신은 계속해서 카이사르에게 미소 지었다”라고 요약했다.[73] 그 외에 2명의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어머니인 아티아, 스키피오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다. 가부장적인 로마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현모양처로 로마 역사 내내 칭송받던 3명의 어머니다.[74] 어느날 카이사르가 책을 읽다가 갑자기 울었는데 친구가 "왜 그러냐"라고 하자 "알렉산더는 33살에 세계의 주인이 되었는데 동갑인 난 뭘 하고 있나"라고 한탄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75] 그런데 이건 애초에 비교 대상이 잘못됐다고 보는 게 맞다. 예시로 나오는 알렉산더, 폼페이우스, 스키피오 모두 유의미한 군사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여건이 젊은 나이부터 가능했음을 고려해야 한다. 알렉산더는 당대의 강국에 해당하는 마케도니아의 왕자였고, 폼페이우스는 가문 대대로 전해지던 다수의 후원자들이 있었으며, 스키피오는 아버지가 군단 사령관이었고, 아버지 아래에서 종군했던 케이스다. 오히려 카이사르는 키케로나 루키우스 카이사르처럼 특수한 케이스들을 제외하면 소위 말하는 '명예로운 경력'을 착실히 쌓아가는 평균적인 로마의 정치인 코스를 탄 케이스이다.[76] 여러 사료에서는 3월 15일의 암살 직전 수많은 불길한 징조들과 아내의 악몽 등이 거론된다.[77] 알레시아 전투 당시 카이사르 휘하 군단이 포위망을 요새화하는데 들인 노력이 대표적인 예이다.[78] 실제 어감은 "이 개같은 새끼!" 정도의 욕설이라고 하는데, 진짜로 카이사르의 유언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말은 로마판 황색언론으로 평가받는 수에토니우스의 저작에서 유래했고, 다른 사료에서는 유언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는 "카이사르의 진짜 유언은 "아아아아악"이었을 겁니다."라는 매우 현실적인 개드립을 치기도 했다.# 실제로 카이사르는 암살자들에게 포위당한 채 몸을 20군데가 넘게 찔려 사망했으니, 순식간에 윽윽윽... 하다가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 정설에 가깝다.[79] 하지만 사실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절친이라 말할 수준은 아니었다. 설령 친했다고 해도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정반대인 이상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되기는 어려웠고. 실제로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삼두 정치에 들어올 것을 권유받은 것도 거절했고 또,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에도 폼페이우스의 진영에 합류했다.[80] 이 시기 제왕절개 수술은 마취 따위 없이 말 그대로 생살을 가르는 수술이었다. 당연히 그에 따른 고통과 출혈량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산모의 죽음을 의미했으며, 산모가 가망이 없거나 사망했을 때 아이라도 살리고자 시행했던 말 그대로 응급 수술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이 이후에도 역사상에 등장하므로, 이는 말 그대로 전설임을 알 수 있다.[8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종신 독재관 추대를 비롯한 일련의 행보로 그는 암살 당했고 오늘날 까지도 카이사르는 독재적 야망을 품은 자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는것은 아이러니[82] 어떻게 보면 명목상의 최고 존엄은 따로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장군이 최고 정치 역할을 겸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쇼군과도 비슷한 케이스이다. 물론 파고들면 세부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많긴 하지만.[83] 플라비우스 왕조 당시 베스파시아누스가 세습권을 원로원에 요구하며 전제 군주정을 향해 한발자국 다가섰지만 통치의 방식은 여전히 원수정의 그것 그대로였다.[84] 이렇게 선대의 이름을 계승함으로서 자신이 선대를 계승한 존재임을 선언하는 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었다. 당장 한국만 해도 고려고구려를 계승했다고 고구려의 진짜 이름인 '고려'를 자기 국명으로 삼은 것이고 단지 편의상 구분을 위하여 고씨 왕조의 고려를 고'구'려로 바꿔서 부른 게 굳어져 온 것이다. 즉 진짜 삼국시대 당대의 백제, 신라 사람들은 그 북방 국가를 '고려'라고 불렀지 '고구려'라고 부르지 않았다. 실제로 왕씨 고려 이전, 남북국시대에서 고려(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주장한 발해 역시 '발해'는 중국으로부터 수여받은 국명이었고 자체적으로는 '고려'를 국명으로 썼다. 발해의 문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당당하게 "나 고려왕 대흠무는..."이라고 쓴 글귀도 남아 있다. 조선 또한 마찬가지로 원래 단군왕검이 건국한 국가의 이름은 고조선이 아니라 '조선'이었으나 나중에 이성계가 고려를 전복하고 새로이 왕조를 창건하면서 "고려는 고구려만 계승했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최초의 나라 조선을 계승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다"라는 명분으로 건국을 정당화하고자 국명을 조선으로 칭하면서 고대 조선을 편의상 '고'조선으로 바꿔서 부른 게 굳어져 온 것이다.[85] 후대의 수많은 로마 황제들이 자신의 이름을 넣어 월의 이름 바꾸려고 시도하였으나,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뿐이다.[86] 서양에서는 이런 머리 스타일을 카이사르 컷 혹은 시저 컷이라 부른다.[87] 그 중에 자신의 친척도 포함되어 있었다.[88] 반면 그의 정적인 소 카토는 알코올 중독이 의심될 정도의 술 애호가였다.[89] 미식가였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집안에 수족관을 두고 생선을 잡는 것을 규제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그의 친구에게 '그놈의 법안 때문에 생선을 못먹어서 내가 배탈이 났다'하고 투덜거렸다.[90]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카이사르는 왼손잡이였지만, 글은 왼손으로 쓰고 전쟁터에서는 칼을 오른손으로 잡았다.[91] 당장 방어 무기를 들지 않는 오른쪽에 대해 대놓고 노출된 측면(latere aperto)이라는 표현이 카이사르 본인의 저서인 '갈리아 전쟁기'에서도 나오며, 로마 군단병은 모두 일렬로 합을 맞춰야 했기 때문에 왼손잡이, 오른손잡이에 상관없이 오른손에 칼, 왼손에 방패를 들어야 했다. 지금까지 발굴된 수많은 로마 시대 군단병 무기 중에서 왼손잡이용 칼과 방패가 발굴된 적은 한번도 없다. 기술이 발달한 현대의 제식소총도 왼손잡이용이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해보자.[92] 특히 이 '시민 여러분'이 결정타였다. 본래 카이사르는 제 휘하 군단을 부를 때 '전우 여러분'이라 불렀는데, 평소 자기와 가까웠던 군단이자 갈리아 원정 때부터 함께해온 베테랑인 10군단에게 "그래 아저씨들 잘가요~" 정도로 대응해 감정적으로 제대로 동요시킨 것이다.[93] 또한 카이사르는 젊어서부터 민중파로 유명했으므로 착실히 엘리트 코스를 밟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승승장구했던 술라파가 아닌 이상 탈법행위를 맘껏 저지를 수도 없었고 또 그런 짓을 했다가는 원로원의 반대파로부터 무슨 말을 들을 지도 몰랐을것이다.[94] 타키투스의 경우, 장인 아그리콜라의 부친(아내의 할아버지)이 칼리굴라 황제 시절, 반역죄로 유죄가 명확히 결정돼 기소될 황족을 법대로 기소하는 것을 거절한 명령 불복종죄로 처형당해 일말의 원한이라도 있을 법했다. 그렇지만 그는 아내의 할아버지가 현직 법무관임에도 명령 불복종 혐의로 처벌받아 죽임을 당한 것을 증오한다고 표현하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했다. 당장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이렇게 된 것에는 티베리우스 시대에 겪은 카이사르 가문의 비극 때문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기술했고, 저서 역시 특유의 수사체로 진실, 소문, 작자의 추측을 명확히 구분해 서술했다.[95]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수에토니우스가 자신의 저서에 적은 자랑 글처럼 어린 시절 아우구스투스의 청동상(꼬마 투리누스 청동상)을 찾아오도록 한 뒤, 이를 받자 극도의 경외감을 표하며 이를 자신의 침실에 모신 황제로 유명했다.[96] 다만 이건 오해가 좀 있는데 당시에는 카이사르 이상으로 빚을 진 자들이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카틸리나 탄핵으로 유명한 카틸리나도 엄청난 빚을 진 상태에서 집정관 선거에 낙선했기 때문에 반역을 일으키려 계획했었고, 카이사르의 지지자이기도 했던 젊은 정치 신인 쿠리오는 카이사르보다도 훨씬 더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사실 애시당초 카이사르에게 돈을 가장 많이 빌려준 사람이 당대 로마 제일의 부호였던 크라수스였는데 크라수스의 재산은 거의 로마 1년분 예산과도 맞먹을 정도였기 때문에 카이사르에게 빌려준 돈 정도는 크게 문제가 되지도 않았고 울며 겨자먹기로 카이사르의 지지자가 될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크라수스와 카이사르의 관계가 매우 양호했던 것은 카이사르가 크라수스에게 엄청난 이득이 되었기 때문인데 당장 카이사르는 크라수스, 폼페이우스를 끌어들여 거물급 정치가인 삼두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즉, 카이사르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늦어도 삼두정치 때까지는 빌린 돈이 그 값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며 이런 결과를 가져다 준 카이사르를 오히려 열렬히 지지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