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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정치인이자 군인. 후기 공화정 로마를 근본적으로 뒤엎고 제정 로마의 기틀을 마련하여 사실상 제정 로마의 창업군주 또는 시조의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10][11]쇠락한 유력 가문의 일원으로 출발하였으나 공화정 로마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며 정계에서의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집정관으로 선출된 이후 당시 유력한 정치인들인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더불어 삼두정치 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사실상 원로원을 무력화하였다. 이후 갈리아 원정을 단행하여 갈리아 전체를 로마의 속주로 편입하는 공적을 쌓았다.
이어진 폼페이우스 및 로마 원로원파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유일무이한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공화정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으나 그 끝을 보지 못하고 암살되었고, 그 과제는 후계자로 지명한 옥타비아누스[12]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기 황제들에 의해서 완수되었다.
뛰어난 정치인, 군인이었을 뿐 아니라 타고난 문인이자 달변가로서 《갈리아 전기》, 《내전기》와 같은 저술을 후대에 남겼으며, 그 외에도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브루투스, 너마저"와 같은 명언 또는 발언으로도 후세에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2. 이름의 어원
고대 로마의 초기 알파벳 체계는 그리스 문자가 에트루리아에서 변형된 것이 로마로 전해진 것인데, 에트루리아 언어에서는 /k/와 /g/ 발음이 구분되지 않아 /g/ 발음을 표기했던 감마가 C로 변형되어 /k/ 발음에 쓰였다. 그래서 초기 로마자에는 G가 없고 C로 /k/와 /g/를 모두 나타냈다. 추후 G가 추가되었지만, 인명을 표기할 때는 초기 용법에 따라 CAIVS, CNAEVS 등으로 표기된다.카이사르 생전에는 고전 라틴어가 사용되어서 카이사르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이름을 표기할 때 사용한 카르투쉬에 분명히 '카'이사르로 표기되는 등 사료가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로제타 석에서도 "KAISRS"라는 발음표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라틴어 'Caesar'의 그리스식 표기 'Καισαρος(카이사로스)'를 다시 상형문자로 옮긴 것.
현재 국립국어원에서 인정한 표기는 카이사르다.[13] 하지만 1990년대까지는 '케사르’가 표준적인 표기여서 당시의 교과서나 출판물에는 ‘케사르’라고 쓰였으며, 대중적으로는 영어식 표기인 ‘줄리어스 시저’가 더 널리 쓰이기도 했으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대중적으로도 '카이사르'라는 표기가 정착되었다.[14] 한국어 개신교 성경 표준본인 개역한글판에는 '가이사'로 표기된다.
카이사르의 어원에 대한 설은 당대부터 많이 퍼져 있었다. 대다수 역사가는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카이사리에스(Caesaries)'의 변형으로 본다. 저 단어의 뜻은 "풍성한 머리를 가진"이란 뜻으로, 아마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상 중 한 명이 태어났을 때부터 풍성한 배냇머리를 가지고 있어서[15] 붙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집안 남자들에게 계속 대머리가 유전되다 보니 희망 사항으로 저런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도 있다. 카이사르가 대머리였다는 걸 보면 꽤 신빙성이 높은 설이다.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가문의 씨족 중 한 개의 이름, 즉 코그노멘(Cognomen)이고 주로 먼 조상 중 한 명의 별명에서 유래된 성씨다. 그리고 코그노멘에는 주로 그 시조뻘 되는 사람의 신체적 특징을 담고 있는 게 유난히 많아서[16] 더 신빙성이 가는 설이다.
다른 속설에 따르면 '카이사르'라는 단어는 본래 카르타고어로 '코끼리'를 뜻하는 카이사이(Caesai)의 변형이라는 '썰'이 당대부터 퍼져 있었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에서 한 병사가 전투 중 단신으로 코끼리를 죽이는 대활약을 해서 이런 별명을 얻었는데, 이 별명이 가문명으로 정착되었고 카이사르는 그의 후손이다. 이 '썰'이 맞는다고 가정한다면, 어찌 보면 로마인에게 멸망한 카르타고의 '코끼리'라는 낱말이 한 로마 병사를 거쳐서 카이사르에게 전달되고 마침내 황제를 뜻하는 대단한 말까지 승격되어 현대[17]까지 생명력이 남은 셈이다. 카이사르 개인은 이름이 코끼리에서 왔다는 설을 굉장히 좋아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어마어마한 전공[18]을 세운 전쟁 영웅의 일화가 더 폼도 나고, 정작 이름과는 달리 자신은 대머리라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위 사진처럼 본인을 새긴 주화에 코끼리를 넣기도 했다. 참고로 현재에는 돈에 많은 위인들이 들어가지만 최초로 돈에 사람을 새겨 넣은 것은 카이사르라는 낭설이 존재하는데, 실존 인물의 초상화가 새겨진 주화는 아케메네스 왕조나 알렉산드로스 3세, 셀레우코스 제국 등 고대 시대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로마로 한정하면 최초가 맞다.
3. 가문 및 시대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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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투스쿨룸에서 발굴된 카이사르 두상.[19] |
당시 율리우스 씨족은 족보 하나는 끝내주기는 했어도 왕정 폐지 이후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으로 이행되는 시점에서 이미 권력 핵심에서는 밀려나게 된다. 율리우스 씨족은 내부 지파로 루키우스 율리우스의 직계손들인 아울루스 가문을 비롯하여 리보, 카이사르 등이 있었다. 이중 가장 유명하고 율리우스 가문 전체를 상징하는 집안은 사실 아울루스 가문이었다. 이 집안은 공화정 초기 14명 정도의 집정관과 1명의 독재관을 배출했는데, 유명한 인물로는 율리우스 가문 내 중시조 정도로 찬사받은 대정치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울루스[25]가 있었다. 하지만 종가 격의 아울루스 가문의 경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일찌감치 대가 끊겨 기록만 남은 상태였다. 이는 또 다른 유력 가문 리보 가문도 비슷해, 그나마 알아주는 지파는 카이사르 가문 정도만 있다고 할 정도로 위세가 현저히 꺾여 있었다.
카이사르가 태어나기 직전인 기원전 2세기 무렵, 로마 공화정을 주름잡은 대명문가로는 로마 자체와 맞먹는 역사를 가진 대귀족 가문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배출한 파비우스 씨족, 그리고 이들보다 훨씬 후발 주자(?)로 로마에 귀화한 사비니 혈통의 클라우디우스 씨족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외에도 카이킬리우스나 리키니우스, 셈프로니우스, 도미티우스 씨족과 같은 평민 귀족(Noble plebeians)[26] 가문들도 이 시기에 다수 출현했다. 역사가 깊으면서도 부, 명성, 공적까지 전부 갖춘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나 파비우스 막시무스, 파울루스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등의 명문대가 앞에서는 한 수 접어야 했다지만, 선두권 신귀족 가문들의 부, 명성은 늦게 원로원에 입성했음에도 율리우스 씨족은 물론이고 그보다 사정이 나았던 여러 세습 귀족 가문들을 훨씬 능가했다.
설상가상 율리우스 씨족은 로마 사회가 변화하며 대두한 신흥 평민 귀족 가문들과 경쟁할 재력도 없는 상황에서, 전 지파에 걸쳐 집정관도[27], 전쟁 영웅도 배출하지 못했다. 기원전 2세기 지중해 세계 정복을 주도한 명문대가들[28]은 그 결과로 막대한 재력을 쌓고, 이탈리아를 넘어 지중해 전역의 호족들은 물론 왕가까지 클리엔텔라 관계로 끌어들였다. 애당초 공화정 로마에서는 출세하려면 선거에 엄청난 정치 자금을 쓰고 후원 회원도 많이 동원해야 했고, 재벌급 재력과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가문이 아니라면 고위공직을 연이어 역임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집정관도 전쟁 영웅도 배출하지 못한 율리우스 씨족은 기원전 2세기 이후부터 재산과 피호민 수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며 고위공직에서 자연스럽게 밀려난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카이사르의 조상들이 무능해서 율리우스 씨족이 정계의 중심에서 밀려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세계 제국으로 도약한 로마에서 가문의 족보와 실제 영향력이 점차 별개가 되고 신진 세력들이 대두하는 가운데 기존 세습 귀족들도 여러 분가[29]로 나뉘면서, 가문 간 경쟁이 치열해진 당시 원로원의 분위기에서 벌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따라서 유서 깊은 가문들은 이런 상황에서 밀려나지 않고 가문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했다. 상호 입양과 혼인을 통한 인척관계, 공통의 이해관계에 기반한 붕당 형성은 공화국 초기부터 볼 수 있는 현상이었으나, 이제는 치열해진 귀족가문 간 경쟁으로 인해 자신의 붕당 외의 다른 가문들을 적극적으로 배척하게[30]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카이사르 가문은 아예 잔반 수준으로까지 몰락하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카이사르가 활동하던 시절 그가 한때 유피테르를 모시는 최고 사제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31] 였으며, 그의 사촌 섹스투스가 퀴리누스를 모시는 고위 사제 플라멘 퀴리누스(Flamen Quirinalis)가 되고 팔촌 루키우스는 조점관이었던 등 모든 가문 구성원이 국가적 종교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종교에서의 율리우스 씨족의 막강한 위상은 마리우스 이후 가문의 부상과도 관련이 있겠으나, 원래 고위 사제는 실권은 없을지언정 가장 폐쇄적인 공직으로 노부스 호모에게는 거의 개방되지 않았으며 플라멘 디알리스를 비롯한 몇몇 신관직은 아예 평민이 맡을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세력유무야 어쨌건 역사가 오래된 씨족이 태고적부터 로마를 수호해온 신들을 모시는 사제직에 적합하다고 여겼고, 때문에 고위 사제직은 족보만큼은 짱짱한 가문의 자제들을 뽑는게 관례였다. 고위 사제는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었으며, 훗날 최고 제사장 자리를 카이사르가 잘 활용했던 것처럼 종교적 휴일을 선포하는 식으로 민회나 원로원 회의 등 정치 일정을 조절[32]하고, 사면권을 행사하기도 했으며, 점괘가 불길하다는 등의 이유로 민회나 원로원의 결정을 무력화하거나 반대로 그런 시도를 막아낼 수 있는 권능이 있었다. 현대 공화정에 대입하면 헌법재판관이나 선관위원, 국회 운영위원, 가처분 판사의 역할[33]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랬던지라 카이사르 가문은 권력의 중심에서는 밀려난 상황에서도, 세습 귀족가문들이 고위 사제 등을 세습하며 암암리에 맡아온 국가의 종교와 전통을 수호하는 역할을 통해 권위와 신망을 유지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변화의 흐름 속에서 카이사르 가문 역시 원로원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는데, 그들이 택한 방법은 자신들의 신분에 맞는 결혼 상대 대신 부유하고 유능해 장래가 기대되는 신진 세력을 찾아나서는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할아버지는 깡촌 아르피눔 출신의 듣보잡 라틴 평민으로 씨족이라는 '간판'이 없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사위로 맞았다. 비록 젊을 때부터 군인으로서 전도유망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때는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전이라 군 복무가 직업이 아니라 병역 의무였던 걸 생각하면 귀천상혼으로 집안 몰락 인증했다는 소리듣기 딱 좋은 혼사였다. 그런데 이후 마리우스는 당시 귀족들의 지리멸렬한 지휘에 더해 이제는 전쟁만 터지면 몇 년 동안 교대도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군 생활을 하는[34] 로마 평민들의 불만을 교묘히 이용해 별 선거 운동도 안하고 집정관 선거에 깜짝 출마해 당선되고 유구르타 전쟁을 빠른 승전으로 종결지었다. 거기에 더해 20만에 가까운 로마군을 학살하며 2차 포에니 전쟁 이래 최악의 위기를 가져온 게르만족의 대침공을 신묘한 전술로 멋지게 막아내는 일까지 이루어냈다. 결국 마리우스는 건국왕 로물루스와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에 이은 로마 제3의 건국자로 불리고 남들은 한두 번 지내기도 힘든 집정관직을 일곱 차례나 역임하는 위업을 세운다.
카이사르가 태어난 기원전 100년은, 개선식을 치르고 집정관을 연임하며 마리우스의 권세와 인기가 절정에 오른 시점이었다. 그의 인기와 방대한 인맥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35] 인척 카이사르 가문에게도 마침내 고위직 진출의 길이 열렸다. 카이사르의 삼촌인 섹스투스는 기원전 91년 집정관, 카이사르의 칠촌당숙 루키우스는 기원전 90년 집정관을 지내게 된다. 카이사르의 아버지 가이우스 역시 법무관과 아시아 총독을 역임했으나, 집정관이 되기 전, BC 85년에 사망했다.[36] 거기 더해 옵티마테스였던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가문은 카이사르의 외삼촌 셋이 나란히 집정관을 지내면서 로마 정치를 좌우하는 핵심 명문가로 발돋움한 상태였다. 한동안 집정관을 내지 못하던 카이사르 가문에서 드디어 삼촌 섹스투스와 칠촌당숙 루키우스[37]가 집정관을 지냈고, 외가에서도 외삼촌 셋이 집정관을 지냈으며, 아버지도 법무관까지는 출세했으니 카이사르 가문은 다시 로마의 최상층에 진입한 셈이었다. 이런 든든한 가문배경은 정치를 막 시작하는 카이사르에게 큰 힘이 되었다. 아버지가 끝내 집정관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일은 카이사르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마리우스와 킨나로 이어지는 포풀라레스 정권에서 아버지 가이우스가 집정관을 지냈으면 그는 마리우스파 핵심인사로 분류되었을 것이고, 그의 아들인 카이사르 역시 술라의 숙청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의 성공이 가문 전통이 되어 내려온 것인지, 카이사르 역시 출신 지역과 가문에 얽매이는 대신 개방적으로 혼맥을 맺고 인재를 기용했다. 카이사르 본인은 코르넬리아 킨나, 폼페이아 술라, 칼푸르니아처럼 명문대가 출신 배우자를 맞으면서도, 가문의 여성들은 명문 귀족 대신 성장 가능성이 있고 확고한 동맹이 돠어줄 지방 유력자와 맺어주게[38] 된다. 카이사르는 퀸투스 페디우스나 아티우스 발부스 같은 지방 명문가 출신들과 혼맥을 맺고 이들을 중용한 것을 넘어, 포로와 유랑민 출신이었던 벤티디우스, 신체에 결함이 있던[39] 바티니우스, 이탈리아 유력자는커녕 속주로 이주한 로마인의 후예조차도 아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같은 외국인[40]까지 폭넓게 중용했다. 물론 옵티마테스 진영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린 반면, 카이사르는 정실주의 없이 능력만 고려했다는 식으로 카이사르의 인재 기용을 단순하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옵티마테스 진영도 잠재력 있는 신진세력이 눈에 띄면 기용을 망설이지 않았고, 카이사르 역시 기존 명문귀족들을 더 우대했다. 카이사르 진영에도 레피두스나 돌라벨라,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데키무스 브루투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같은 명문귀족들이 즐비했고, 이들은 신진 세력보다 우선적으로 주요 관직에 기용되었다. 다만 기존 귀족들은 선을 긋고 미관말직에나 머물게 했을, 벤티디우스나 발부스 같은 무명 인사나 외국인까지도 카이사르는 군대 지휘를 맡기고 이후 집정관직을 역임하며 로마 정계의 정점에 오를 수 있도록 파격적으로 중용한 것이 큰 차이였다. 결국 이런 카이사르 의 개방성과 능력 중심의 인재 기용은 마리우스를 뛰어넘는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라는 두 번의 대박[41]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가문의 입지가 부침을 겪은 데 개인의 행운[42]과 불운뿐 아니라 시대상황이 크게 작용했던 만큼, 카이사르 가문이 특이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카이사르 가문처럼 한때 경쟁력을 잃고 밀려났던 세습 귀족들은 당시 로마에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술라, 카틸리나인데 이들은 원로원 의석은 유지한 카이사르 가문이 애교로 보일 만큼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진짜 명문 귀족의 후예였다. 이렇게 공화정 후기 로마 정치의 최상층부에서 밀려났던 명문귀족들 중 일부가 로마의 영역이 크게 팽창하고, 기존 명문대가의 일원이 아니었으나 정복지에서의 군사와 상업활동을 통해 권력과 부를 거머쥔 신진 세력들과의 연대를 통해 로마 정치의 중심에 다시 진입하는 일도 당시에는 드물지 않았다. 돈과 영향력에 비해 부족한 가문의 족보는 늘 신진 세력의 약점이었고 익숙한 '브랜드'를 선호하는 유권자와 동료 정치인들의 지지를 얻는 데는 명문 귀족들과의 인척관계와 정치적 연대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인척 마리우스 덕을 봤던 카이사르 가문과 마찬가지로 마리우스의 휘하에서 활약하면서 로마 귀족사회로 돌아올 기회를 잡았던 술라가 그런 경우였고, 본인의 혈통이 진짜 세습 귀족이기는 했어도 맨주먹으로 태어나 신진세력이나 다름없었던 술라와의 연대로 원로원에서 영향력을 키운 카틸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들은 고위직으로 진출할 길이 열렸을지언정 다른 가문들처럼 정치 자금을 소모할 만큼 부유하지는 않았던지라, 출세의 과정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카이사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의 출생지와 자택은 로마의 대표적인 서민 주거지로, 귀족들이 선호하지 않은 수부라 구역이었다. 이처럼 카이사르 가문은 지금으로 치면 재산 규모가 평범한 영세 자산가 수준인 귀족에 불과했다. 지금으로 치면 유명한 조상들을 둔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강북의 다세대주택 밀집지역에서 나고 자란 정치인이었던 셈[43]이다. 더욱이 원로원 의원은 플라미니우스 법에 따라 상공업과 임대업도 할 수 없었던지라, 건국 이래 대대로 귀족이었던 카이사르 가문은 지방에서 은행업을 통해 중견기업 정도 규모의 재산을 일군 옥타비우스[44]같은 신참 원로원 의원 집안보다도 재산이 현저히 적었다. 때문에 카이사르는 경력을 쌓는 과정에서 큰 빚을 지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세계제국으로 도약한 로마에서 공직에는 엄청난 이권이 걸려 있었고, 때문에 후보자는 당선되기 위해 큰 돈을 들여 공공 사업을 벌이고 유권자들에게 뇌물을 뿌려야 했다. 따라서 혼맥과 인맥 덕에 출세에 도움이 될 연줄과 인지도가 있었음에도,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때문에 카이사르의 정치 경력은 거의 끝장날 뻔했다. 크라수스와 같은 유력한 사업가들의 보증이 아니었으면, 비슷한 처지였던 카틸리나처럼 빚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리우스와의 연대로 카이사르 가문의 출세길이 다시 열리기는 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카이사르 가문은 당시 로마를 장악한 옵티마테스 고위 귀족들과 온전히 한 편이 될 수 없었다. 마리우스는 씨족 이름조차 없는 그야말로 촌구석의 듣보잡 평민으로서 원로원 의석을 오랫동안 차지해온 귀족들과 대립하는 입장이었고, 마리우스의 붕당은 민중파, 혹은 포풀라레스로 불리게 된다. 때문에 카이사르 가문은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혈통으로는 옵티마테스[45]에 속하는 게 당연했으나, 공화정 로마의 부유한 명문 귀족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마리우스와 포풀라레스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46]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뒤를 이어 포풀라레스 정권의 수장이 된 킨나의 딸과 결혼하면서,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가 되며 마리우스파와의 연대를 더욱 확고히 하게 된다. 또한 카이사르 가문은 술라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술라의 첫 부인이 율리우스 가문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47] 마리우스의 처가로서 마리우스 붕당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카이사르 가문이 술라의 숙청에서 살아남아 로마 정치의 중심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데는 술라와의 인척관계가 유리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술라의 첫 결혼에서 태어난 딸인 코르넬리아 술라는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결혼해 폼페이아를 낳았는데, 이후 그녀는 카이사르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와의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그의 숙적이었던 옵티마테스의 대표 주자 술라파와의 관계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것이다.[48]
카이사르 가문이 포풀라레스와 옵티마테스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는 점은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가계만 봐도 드러난다.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문은 비록 성향이 온건하긴 했지만 엄연히 옵티마테스의 중진으로 간주되었고 덕분에 술라의 숙청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49] 다만 코타 가문은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나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처럼 원로원의 특권만을 앞세우는 강경한 옵티마테스 인사들은 아니었고, 카이사르의 외삼촌인 루키우스는 원로원이 독점하던 배심원 역할을 기사계급과 함께 수행하는 법률을 입안하기도 했다. 다만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이 민중파라는 것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전혀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술라의 숙청 이후에도 마리우스는 서민들에게 전쟁 영웅이자 민중의 편으로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내전과 술라의 무자비한 숙청으로 마리우스의 친족들은 남김없이 살해당했기 때문에 남은 인척은 마리우스의 처조카인 카이사르뿐이었고, 거기에 킨나의 사위임을 내세워 그는 젊은 나이부터 포풀라레스 붕당의 영수가 된다.
포풀라레스와 옵티마테스 양 쪽과 전부 밀접하고, 고귀하지만 부침을 겪은 가문 출신으로서 빈민가에서 경력을 시작한 카이사르의 특별한 배경은 카이사르의 정치적 행적과 성공의 비결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이다. 이런 배경 덕에 정치 입문 시점부터 카이사르는 로마 건국까지 올라가는 유서깊은 세습 귀족으로서 그들이 독점하던 특권을 온전히 향유하면서도, 포풀라레스 붕당의 수장으로서 평민과 기사계급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양쪽의 이점을 전부 취할 수 있었다. 이를 이용해 카이사르는 법무관도 지내기 전에 집정관을 여러 차례 지낸 원로에게 어울리는 자리인 최고 제사장에 당선되고,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대등한 입장에서 삼두연합을 맺을 수 있었다. 삼두연합을 통해 권력을 얻은 카이사르는 마리우스나 폼페이우스 같은 평민 야심가들과는 달리 명문귀족들의 인정을 갈구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대대로 물려받았고 최고 제사장이 되며 더 강화된 종교적 권능까지 이용해 원하는 바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그런 추진력으로 그는 토지개혁 등 그라쿠스 형제가 못 이룬 꿈을 일부분이나마 이루고, 갈리아 전쟁을 통해 얻은 막강한 무력과 지지자들을 등에 업고 옵티마테스 붕당을 해체해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열 수 있는 기반[50]을 닦게 되었다.
4. 생애
자세한 내용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5. 평가
자세한 내용은 율리우스 카이사르/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6.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7. 여담
- 카이사르는 개인적으로 망신스러운 추문과 신체적 콤플렉스에 시달렸는데, 공적인 곳에서는 그가 초급 장교 시절 비티니아 왕실에 파견나가있을 무렵 국왕 니코메데스 4세와 동성애 관계, 그것도 수 역할을 했다는 소문[51]이 그를 따라다녔다. 지독한 인신공격이 일반적이던 정계에서 카이사르의 정적들은 온갖 추악한 언사로 짓궂게 그를 비웃었다.[52][53]
- 사적으로는 나이가 먹자 시대를 불문한 남성의 고뇌에 시달려서 대머리라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M자 탈모[54]가 와서 이마가 벗겨지자 이 신체적 약점이 정적들에게 놀림을 받게 되었고, 머리를 뒤에서 앞으로 빗어서 대머리를 최대한 가리려는 가련한 시도까지 해야 했다고 한다.[55] 이 때문에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준 모든 특권이나 영예 중에서도 월계관을 쓰는 특권을 특별히 기쁘게 받아들였는데, 당연하지만 대머리를 가릴 수 있어서였다. 카이사르가 개선식을 할 때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개선식에서 병사들이 개선 장군의 체면을 깎는 희극적인 구호를 외치는 게 전통이었다. 개선장군이 너무 교만해지면 신들의 질투와 미움을 사게 될까 우려해서 일부러 신들이 들으라고 소리치게 됐다고 한다. 동시에 당당하게 대중 앞에 선 개선 장군을 신나게 놀려먹음으로써 개선식 행사의 분위기를 더욱 재미있게 만들고 시민들에게 로마의 군대는 친절하고 유쾌한 시민의 군대라고 홍보하는 효과도 있었다. 카이사르의 개선식 때 병사들이 선택한 구호는 밑에서 언급하는 동성애 스캔들 구호와 아래의 구호였다."갈리아는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했고, 카이사르는 니코메데스 왕에게 정복당했다네. 갈리아를 무찌르고 개선하신 카이사르가 납신다! 셋 중에서 가장 위대한데도 니코메데스 왕은 월계관을 쓰지 못했다네. 대머리 난봉꾼[56] 카이사르가 납시니, 로마인들이여, 어서 마누라를 숨겨라! 그는 금덩어리를 빌려 쓰고는, 고작 갈리아 창녀로 갚는다네."- <카이사르의 생애> 中 "로마 군단의 개선행진가" 필립 마타작 저 "로마 공화정"에서.
- 그는 엄청난 수의 유부녀들과 염문을 뿌렸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이지만) 각종 원로원 의원 등 유력층 인사들의 아내는 물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등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의 아내와도 태연하게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유명한 애인 소동은 기원전 63년 카틸리나의 탄핵 당시 카틸리나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던 카이사르가 스캔들을 이용해 그 의심을 한번에 떨어버린 이야기이다. 원로원 회의에 참석 중이던 카이사르에게 웬 서신 한 통이 전해졌는데, 카이사르가 서신을 읽자 카이사르 반대파인 소 카토가 갑자기 일어나 카이사르가 읽고 있는 서신이 카틸리나 일파와 내통하는 증거[57]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카이사르가 지극히 사적인 서신일 뿐이라고 응수하자 카토는 더 기세등등해졌고 결국 카이사르는 그럼 카토 본인이 직접 이 자리에서 낭독하라면서 서신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 서신의 내용은 사실 소 카토의 이복누이인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58]가 카이사르에게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었다.[59] 당연히 소 카토는 한마디도 낭독하지 못하고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카이사르에게 편지를 내던지며 "작작 좀 밝혀!"라고 소리쳤고 원로원 회의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책에 따라서는 "바람둥이 같으니라고!" 혹은 "(당신 편지나) 가져가, 이 바람둥이야!"라고 나오기도 한다.[60] 그의 자금 스폰서인 크라수스도 제 아내가 넘어갔지만 어쨌든 계속 군자금 융통을 해주었다. 단순히 채권뿐 아니라 크라수스 본인이 카이사르의 매력에 빠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크라수스는 자기 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를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시작했을 때 맡기기도 했는데 카이사르도 그를 '젊은 크라수스'라 부르며 매우 아꼈다고 한다. 정치적 협력자에 대한 배려도 있었겠지만 상당히 유능한 청년이었기 때문이다.[61] 자신의 정적이 되는 폼페이우스의 아내하고도 바람을 폈으니 어떤 의미에서 삼두정치의 알파라 할 수 있다.
- 이 외에도 장가를 여러 번 갔는데, 주로 정치적인 목적. '결혼은 현실'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62] 사실 당시 로마의 절대 다수의 결혼은 정략결혼이었다. 다만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는 리비아와 오로지 사랑만으로 결혼을 했다.[63][64] 카이사르가 여성들에게 보냈던 연애 편지들은 사후 신격화가 되면서 엄격하고 냉정한 성격인 후계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싸그리 사라졌다. 카이사르가 남긴 편지들은 '신적인 인물'이 작성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감정이 녹아들어 왕조의 실질적이고 정신적인 시조가 수많은 여자들과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는 기록을 일부러 삭제한 것인데 후대인들에게는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 한 가지 특기할 점은, 크라수스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카이사르는 바람둥이 노릇을 하면서도 여자 문제 때문에 중요한 인간관계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했다는 점이다. 이는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와의 염문에서도 드러나는데,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연애를 즐기면서도 로마에서건 이집트에서건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은 한번도 없고, 그러면서도 클레오파트라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클레오파트라가 자신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이집트에서의 지위를 강화하는 것은 묵인했다. 즉 카이사르는 이집트의 여왕과의 관계를 이집트를 관리하는데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로마인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적절하게 줄타기를 한 것이다.[65] 게다가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카이사리온을 아들이긴 하지만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유언장에도 카이사리온과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언급은 한 단어도 나오지 않았다.[66] 이러한 모습은 후에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해서 아내와 이혼하고 로마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 것과 대조적이다. 당시에 로마인들 기준에서 카이사르의 행위는 법적으로 간통으로 보지 않았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명백한 간통이었다. 당시에 남자가 여러 첩을 두어도 상관은 없었으나 문제점은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는 쪽이 문제가 되었는데 하필이면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여론으로 보아도 명백히 로마를 배신하는 듯한 이미지인 클레오파트라를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고 결혼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카이사르는 그냥 클레오파트라를 자신과 그냥 밤을 나눈 여자라고 생각하고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지 않아 당시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스캔들로 넘어갈 수 있었다.
- 많은 여인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지만 정작 본인은 간절히 원하던 적자를 얻지 못했다. 첫 아들은 유산되었고, 유일하게 언급된 분명한 혈육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얻은 카이사리온뿐이지만 그는 절대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사실상 남남 취급이었고 그 외에 여러 여인들에게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러나 이 때문에 자기 친인척 및 가문 사람들을 대거 기용하는데, 이들이 나중에 큰 힘이 된다. 사실상 부관이나 다름 없던 안토니우스도 친척. 비록 양자를 들여서 가문의 대를 이었지만 본인의 피를 이은 적자를 얻기를 간절히 원했을 거라고 하는데, 기록에는 남아 있지를 않다. 유일한 아들인 카이사리온은 양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참살되었으며 카이사르의 적통은 대가 끊겼다. 드라마 ROME에서는 카이사리온이 죽지 않고 무사히 탈출했다는 대체역사로 흘러가고 PS2 게임 '아르고스의 전사'에서는 카이사리온의 죽음에[67] 보복하기 위해서 클레오파트라가 악의 여왕으로 부활한다는 설정이다. 이러나 저러나 카이사르는 끝내 자식 복이 없었고 그렇기에 미련 없이 양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정통성을 다 몰아줄 수 있었다. 물론 인간적으로 솔직한 심정이야 이집트의 카이사리온에게 뭔가 한몫 떼어주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그랬다가는 자신이 구상한 로마 제국의 계획을 망칠 수 있기에 씁쓸한 심정으로 넘어갔을지도. 참고로 많은 소설가들이 카이사르가 이상할 정도로 옛 연인이었던 세르빌리아에게 잘 대해주고 아들인 브루투스에게까지 호의를 베풀자 사실은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와 세르빌리아의 사생아가 아니냐는 소문을 채용해 카이사르가 브루투스를 남몰래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알고 그렇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소설도 나오고 있지만, 그가 정식으로 카이사르의 아들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 사후에 신격화되어 세워진 '카이사르 신전'은 왠지 로마에서 연인들의 밀회 장소로 자주 쓰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카이사르가 흐뭇하게 내려다보지 않았을까 하면서. 참고로 카이사르의 가문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의 후손을 자칭하고 있다.
- 카이사르의 문학 작품은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의 신격화를 위해 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답시고 대부분의 작품을 소각했기 때문에, <갈리아 전기>와 <내전기> 정도만 남아 있다. 후세까지 전해지는 갈리아 전기[68]의 담백한 문체는 키케로의 화려한 문체와 함께 라틴어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지옥을 선사한다. 일반적으로 라틴어 초급에서 배우는 주어+목적어+동사의 간결한 문구[69]는 갈리아 전기의 카이사르의 문체이다. 일단은 이탈리아에서는 초등, 중학생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카이사르의 작품을 입문자가 바로 읽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무리 담백한 문체라고는 해도 카이사르가 저술 활동을 한 고전 라틴 시기는 라틴어가 고도로 정형화되어 확실히 자리를 잡은 시기였기 때문에 문장의 구조 등이 매우 복잡하다. 이것에 익숙해진 뒤, 키케로의 문체를 자유자재로 해석할 수 있게 되면 라틴어를 그럭저럭 한다고 자부해도 좋다. 갈리아 전기의 문체를 쉽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면 정말로 라틴어 공력이 쌓인 것이다. 키케로 저작까지 갈 것도 없다. 키케로 저작을 쭉쭉 읽을 수 있다면 아마추어 레벨은 진작에 지났다. 뛰어난 지성인이기도 해서 로마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키케로와도 절친한 사이였고 내전이 일어났을 당시 그를 만나서 협력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귀족 가문이라고는 하나 태어났을 당시엔 평민과 별다를 것 없는 상황이었지만,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또한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했으며 젊은 시절부터 여러 문학작품을 저술하는 등 의외로 학구파적인 면모가 있었다. 카이사르가 장년기에 대단한 행보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릴 적부터 쌓아온 학문적인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집트를 방문해서 책력과 천문학 등에 관심을 가졌고 나일 강의 수원을 탐색하기도 했다고(물론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후 이런 관심은 당시 태음력을 사용하던 로마에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게 해서 오늘날의 달력 체계의 기틀이 되기도 했다. 아시아경제 보도에 따르면 라틴어로 달력(캘린더)는 칼렌다리움(Calendarium)이라고 해서 차용증, 채권, 빚 문서, 금전 출납부 등의 의미도 지니고 있었으며, 고대 로마에서는 그리스의 관습을 본떠 매년 1월 1일에 로마 시내 모든 주민들이 광장에 모여 신전에서 주관하는 의식을 치르고 새해 달력을 받아오면서 채권자와 채무자들이 모여 기존 채무관계를 재조정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채무자들이 돈 떼먹고 외국으로 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나오지 않으면 즉시 추방 및 로마 내에서 보유한 모든 재산을 동결시켜버렸다고 한다. 본인이 늘 빚에 쪼들려 살던 카이사르로서는 달력이 전혀 예사로 보이지 않았을 법도 하다. 또한 카이사르 본인이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최고사제가 해야 할 일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 달력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책들의 제책 방식인 코덱스 또한 카이사르가 고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로마인들은 팔랑팔랑 책장 넘기는 게 그전까지 쓰던 두루마리를 펼치는 것에 비해 위엄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70] 널리 사용되지는 못하고, 파피루스 대신 뻣뻣한 양피지를 쓰던 중세 수도자들이 사용하면서 일반적인 제책 방식으로 이어져오게 된다.
- 로마에서는 패장을 처벌하지 않았는데 전쟁에서는 가능한 모든 준비를 해야 하지만 결국 승패는 운에 달려있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71] 당시 유명한 장군들에겐 fortuna, felicitas, felix 같은 행운과 연관된 별칭이 붙어다니곤 했다. 술라는 자기 스스로 존칭을 행운아라는 뜻의 Felix로 지어 술라 펠릭스라 했다. 장군보다는 문학가였던 키케로조차 위대한 장군이 갖춰야 할 필수요소 중 하나로 felicitas를 꼽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행운(Fortuna Caesaris· Felicitas Caesaris)’이란 표현은 당대와 그 이후에도 일종의 상용어구가 되다시피 할 정도로 강한 행운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으로 묘사된다. 당대인들에게도 운명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많은 고대의 전기 작가들은 카이사르의 성공이 운명의 호의 덕분이라고 믿었다.[72] 아예 카이사르 본인부터가 “나는 운이 좋다”, "행운의 여신(Fortuna)은 나의 편"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로마 당대에도 이상적인 어머니로 뽑히는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가르침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73] 각종 기록에서 카이사르는 거의 자신의 행운을 종교 수준으로 믿은 사람으로 그려진다. 자신의 외모를 포함해 거의 모든 측면에서 그는 허영에 가까울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다. 무엇보다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카이사르는 행운의 역할을 강조했다. “오늘 전투에선 적군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적군 안에 카이사르가 있다면.”이란 문구도 카이사르의 말이다. 자신보다 운이 좋은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현이다. 카이사르 본인의 운명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잘 드러난 사례로는 기원전 48년 겨울 항구도시 디라키움에서 벌어진 일화가 유명하다. 악천후로 선장과 선원들이 두려워하자 "걱정하지 마라, 너희들은 카이사르와 카이사르의 행운을 태우고 있다!"라고 소리쳤다. 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 잔당을 추격해 아프리카에 상륙할 때 그는 발을 헛디뎠는지 병사들 앞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당시의 기준으로는 매우 불길한 징조였기 때문에 모두가 웅성댔지만 카이사르는 넘어지자마자 모래를 움켜쥐며 “아프리카여! 드디어 내가 너를 잡았다.”라고 소리쳤다. 리더의 즐거운 목소리에 군단병들은 불안감을 떨치고 환호했다고 한다. 이런 장면들로 보았을 때 막무가내로 자신의 행운을 맹신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강하고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는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성격이 극도로 강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꼭 행운이 좋기만 한 사람이었냐고 하면 꼭 그렇다고 하기도 어렵다. 집안은 전통은 있었지만 가난하고 한미해서 로마 서민들이 사는 수부라 외곽 지역에 살았고 아버지는 카이사르가 어릴 때 신발을 신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또한 알렉산더가 33세에 세계를 정복하고[74] 스키피오도 20대에 정점을 찍었으나 카이사르는 40세가 넘어서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75] 또한 전쟁터에서 수많은 위기를 겪어야 했고 본인이 죽을 뻔한 전투도 여럿 있었으며 최후에는 암살당해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76] 죽기 직전 저녁 식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죽음은 무엇인가'라는 토론에서 스스로 '아무 예상 없이 갑작스럽게 닥치는 죽음'이라고 꼽은 걸 보면 스스로에게는 행운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카이사르 반대파가 전쟁에서 패배한 뒤 “패전은 운이 나빴던 탓이었다”라는 면죄부를 받기 위해 카이사르의 행운을 강조했다는 분석도 있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는 필리피 전투에 패해 죽기 직전 "가증스런 운명이여, 너도 행운의 편이더냐!"라고 했다. 결국 정적에게도 카이사르는 죽어서도 행운의 가호를 받는 슈퍼 휴먼으로 인식되었다는 것. 또한 카이사르가 막상 자신의 저술에선 행운의 역할을 최소한으로만 적었다는 점이 흥미로운 점이다. 카이사르가 정작 본인은 정쟁이든, 전투든 승리를 위해 철저한 준비에 매달리는 한편[77], 행운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신앙을 이용해 군단의 사기를 올리고 '프로파간다'로 써먹었다는 관점도 있다. 다시 말해 현실과 자신감을 구분할 줄 알고 요행에 기대는 성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카이사르와 행운의 조합은 천생연분처럼 붙어 다녔고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 끝없이 회자된다.
- 명언을 여럿 남겼다. "위대한 결정은 다만 수행될 뿐이다. 심사숙고하는 게 아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등의 명언이 이 사람의 말이다. 또 유명한 대사로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라는 유언이 있다.[78] 다만 유언이 신빙성이 없듯, 다른 명언들도 상당수 후대의 창작이라는 설이 있다. 카이사르가 한 말이 100% 확실한 것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하나다.
- 희한한 점은 충분히 자신에 대한 암살기도를 예측하고도 남는 사람이었음에도 불안하게 살고 싶지 않았던 마음 때문인지 경호원을 제대로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이 점은 술라와 비슷하다. 신변 경호를 충고하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평생 불안하게 숨어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다. 결국 이는 암살로 이어졌고 이에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투스는 평생 강력한 경호원과 근위대를 이끌고 다녔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처럼 항복한 모든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폼페이우스파 잔당을 비롯해 자신을 해칠 위험이 큰 자들은 제거하였다. 심지어 카이사르의 절친이었던[79] 키케로와 카이사르 군단장으로 복무했던 퀸투스 키케로까지 모조리 2차 삼두정치의 살생부에 올렸다.
- 카이사르가 죽은 곳은 폼페이우스가 생전 건축했던 폼페이우스 포룸이었다. 그날은 그곳에서 원로원 회의가 열렸기 때문이다.
- 참고로, 카이사르의 저서 갈리아 전기에서는 객관적인 서술을 위해 본인을 칭할 때 '카이사르는 XXX 했다'라는 식으로 썼다. 그랬기 때문에 후반, 그러니까 암살 이후에 쓰여진 부분에서는 카이사르 본인이 아니라 부관(심지어 그 전장에 있지도 않았다)이 쓴 것이라서 원문을 보면 사실상 다른 문장으로 보일 정도이다.
- 카이사르는 최초로 어머니의 배를 갈라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으며, 이 때문에 산모의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는 수술을 제왕 절개(帝王切開, Caesarean section)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물론 후세에 만들어진 전설로, 실은 '절개'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의 철자가 카이사르의 이름과 비슷해 영어로 번역될 때 와전된 것이 유래다.[80]
- 흥미로운 점은 유럽 역사상 최초의 실질적 황제였으나 그는 단 한 번도 군주로 불린 적도 없고 왕으로 추대되거나 왕위에 오른 적 또한 없었다. 상술했듯 로마의 근간 그 자체인 공화정을 흔듦으로써 로마 시민들의 반감을 사는 불안한 통치를 하고픈 마음이 없었기에 그랬던 것이다.[81] 따라서 그는 자신의 원래 군인으로서의 직위였던 '임페라토르(Imperator - 라틴어로 최고사령관을 뜻한다.)'[82]라고 불리웠는데, 이것이 변형되어 오늘날의 Emperor, 즉 황제를 일컫는 단어가 되었다. 문제는 이 때문에 후대의 독재관들 또한 감히 스스로를 군주로 호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카이사르가 군주를 자칭하지 않은 판국에 카이사르만큼 대단한 업적을 세우지 않고서 군주를 자칭하는 건 그냥 '나는 독재관이 뭔지도 모르면서 닥치고 자리에 오르고 본 욕심만 더럽게 많은 못난 놈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자살 선언을 하는 행위에 불과할 뿐이니 그나마 그의 뒤를 이은 양아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정당한 후계자라는 정통성에다가 본인 스스로도 많은 업적과 공을 세운 인물이다 보니 제1시민(Princeps)이라는 전용 직함을 신설하긴 했는데, 이것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행정, 군대 등 로마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힘을 지녔으나 어쨌건 시민'이라는 뜻의 직함으로 절대로 군주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이 역시 후대에 군주를 뜻하는 Prince로 바뀌었으니 그야말로 부전자전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전제군주정이 공식 표방하기까지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즉위하는 280년까지 기다려야 했다.[83] 이렇다 보니 로마의 역대 독재관들은 그냥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직함을 대신해서 썼다. 로마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황제 = 엠퍼러'니까 로마 황제들은 '엠퍼러'('임페라토르')를 호칭으로 썼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상기하였듯 임페라토르는 최고사령관을 일컫는 호칭으로 이는 로마의 독재관이 지닌 수많은 호칭 중 하나에 불과했다. 최고사령관(임페라토르) + 최고정치가 + 최고경제관 + 최고산업관 + 최고행정관 + 최고집행관 + 최고법무관... 등을 하나로 모아서 카이사르라고 불렀다. 즉 '그 일들을 한 사람이 카이사르, 즉 나도 카이사르이니 같은 일을 하는 존재임'이라는 식으로 퉁쳐서 썼다. 간단하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계승한 자'라는 의미였던 것이다.[84] 예를 들자면 '네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즉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자리를 물려받은 자 네로'라는 식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22장 21절에 나오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는 구절의 카이사르는 진짜 그 이름을 갖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당시에 통치하던 로마 황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의역을 한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다. 이 문화 또한 '임페라토르→엠퍼러'와 마찬가지로 후대 유럽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신성 로마 제국이 위치한 독일 지방에서는 카이사르를 독일어식 '카이저'로 만들어 황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했고, 러시아 제국에서는 카이사르를 러시아어식 '차르'로 읽어 황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이 외에도 폴란드 지방에서는 카이사르를 폴란드어로 읽어 '체사르쉬(cesarz)'로 만들어 황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유럽권의 역사상 첫 황제답게 여러모로 서구권의 '황제'의 대명사가 된 셈이다.
- 그의 생일이 포함된 달인 7월(July)의 명칭은 원래 Quintilis였는데,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율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변경되었다. 더불어 8월(August)은 Sextilis에서 자신의 이름을 따서 바꾸었다.[85] 참고로, 이 때문에 달력이 2달씩 밀렸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율리우스력 이전에는 10개월짜리 달력밖에 없었는데, 겨울에 해당하는 2개 달이 달력에 추가되고, 카이사르가 율리우스력을 확정하면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즉 9월부터 12월까지는 2개월씩 밀려난 건 맞는데, 카이사르 때문에 밀린 건 아니라는 소리. 태양력 참조.
- 유명한 대머리였고, 이 때문에 병사들이 개선식을 하면서 대머리라고 놀리는 구호를 외치기도 할 정도였다. 1980년대 미국의 학술단체에서 카이사르의 탈모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는데, 그 연구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귓머리만 조금 있는 정도의 심각한 탈모였다고 한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탈모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양 귀밑머리를 길게 길러 정수리까지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본인의 대머리를 가렸는데, 이 경우 정수리에서 만난 머리가 마치 닭벼슬처럼 붕 뜨게 된다.[86] 그리고 종신 독재관이 된 후에는 이런 머리 스타일을 고정하기 위해 월계관을 쓰고 다녔다.
- 뛰어난 장군이었지만 피나 잘린 머리를 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잘라다 바치자 보는 것을 거부했다. 어릴 적 술라의 대숙청 때 광장에 쌓여 있던 머리들을[87] 보고 트라우마로 남았다는 설이 있다.
- 어릴적엔 마르고 연약했지만 어릴 때부터 말은 잘 탔다고 한다. 당시에는 말 위에서 발을 거는 등자가 없었을 시기다. 때문에 단순히 허벅지 힘만으로 말을 조이고 그 위에서 무기를 다뤄야 했다. 그래서 고대에는 기마병이 흔치 않았고 고급 인력이었다. 어린 카이사르가 두 손을 머리 뒤로 하고 말을 타는 모습에 어머니인 아우렐리아가 기겁했다고 한다. 그리고 운동을 좋아하고 부단히 체력 단련을 해서 마른 몸에도 불구하고 젊은 군단병들에게 밀리지 않는 강건한 체력을 가지게 되어 병사들이 겉모습만 보고 무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갈리아 전쟁 당시 20대 초중반의 군단병에 비해 카이사르는 40대를 넘긴 나이였다. 당시에는 이미 아버지뻘 나이이고 무엇보다 카이사르는 전투뿐 아니라 보급, 병참, 전략, 정치, 현지 안정화 등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는 격무에 시달렸다. 호리호리하고 격무에 시달리는 아버지뻘 지휘관이 아들 나이대의 정예병들과 대등한 체력으로 싸웠다는 건 충분히 존경받을 일이었을 것이다. 네비르 족의 기습으로 군단병들이 혼란에 휩싸이자 후방 병사의 방패를 뺏어들고 전방으로 몸소 나아가 전투를 지휘하거나, 알레시아 전투에서 결정적인 순간 11개 대대를 직접 이끌고 전장에 나서 로마군의 사기를 올렸으며, 문다 전투에서는 200개의 투창을 홀로 받으면서 선두에서 적군과 싸워 사기를 끌어올리기도 했다.
- 카이사르의 정적이었던 소 카토가 "로마가 멸망했을 때 유일하게 술에 취하지 않고 걷는 사람일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알코올에 기대지 않았다.[88] 밥도 산해진미를 즐기지 않고 적당히 먹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편식하는 것도 아니고 잘 먹었다. 초대받는 자리에서 집주인이 음식을 잘못 요리해 모두가 불평할 때 "애써 만든 건데 주인이 얼마나 민망하겠나" 하면서 혼자 맛있게 먹었다는 일화가 있다. 아우구스투스와의 공통점은 둘 다 당대 로마 귀족들과 달리 미식에 전혀 관심이 없었음에도 직접 음식, 인테리어 매뉴얼을 만들 정도로 손님 대접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89] 차이점은 카이사르는 전쟁터에서 단련돼서 그런지 이것저것 주는 대로 잘 먹었으나 아우구스투스는 소화 불량으로 평생을 소식했다는 점이다.
- 젊을 적 남을 위해 호의를 많이 베풀었는데 도움을 받고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남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위해 돈을 쓰고 다녔다고 플루타르코스와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한다. 이는 남에게 빚진 마음을 심어주었고 나중에 정치적 자산이 된다. 심지어 돈을 빌려주기 위해 남한테 돈을 꾸기도 했는데 아예 돈이 없는 사람에겐 빌려주지 않았다. 이때 "당신에게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전쟁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 어느 촌락 집에 머무는 중에 몸이 아픈 부하에게 편한 자리를 양보하고 본인은 불편한 곳에서 잠을 잤다. 그러면서 "약한 사람에겐 편한 자리를, 위대한 사람에겐 명예로운 자리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 그의 장군들에게 오른손잡이 악수를 보급한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잘 쓰는 손을 잡고 있으니 무기를 휘두를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카이사르 본인은 왼손잡이였으며, 따라서 오른손으로 악수하면서 무기를 휘두르는 '못미더운 왼손잡이'의 이미지를 로마에 보급한 장본인이라는 것이다.[90] 군대 같은 경우에는 전술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대세에 맞춰서 누구나 오른손에 무기를 쥐어야 했고, 따라서 오른손을 잡는 제스처가 그럭저럭 문제없이 받아들여졌을지 모르겠지만.[91]
- 카이사르도 군대의 파업을 겪은 적이 있다. 야전 종군거부, 그러니까 복무 중 즉시 전역요구 자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루쿨루스같은 명장들도 겪었던 문제지만 카이사르는 말 한마디로 군대가 스스로 파업을 그만두게 만들었다. 설명하자면,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병들은 유독 카이사르의 지휘를 받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는데 그 중 가장 카이사르의 총애를 많이 받는 10군단이 한창 전쟁중에 봉급인상을 노리고 종군을 거부한 채 즉시 전역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벌써 남을 대하듯이 "전역을 허락하겠네. 전역에 따른 보상도 모두 지불하지. 그럼 잘 가게나, 시민 여러분."[92]라고만 말하고는 10군단을 열외시킨채 그냥 가버렸고, 10군단은 봉급이상의 봉 자도 못꺼내고는 터덜터덜 카이사르를 따라가야했다. 카이사르도 전쟁하느라 군단병 한명이 아쉬웠지만, 제10군단이 없어도 카이사르는 카이사르지만 카이사르가 없으면 10군단은 10군단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는 점을 잘 파악했던 묘수라고 할 수있다.
- 여담이지만 시대의 영웅이라고 추앙받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상당히 늦은 나이에 일어섰다는 특이한 사항이 있다. 나이 마흔에 되어서야 겨우 두각을 드러냈기에 아주 빠른 속도로 로마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셈이다. 다만 따지고 보면 카이사르의 출세는 늦은 편이 아니라 로마의 정상적인 엘리트 코스였고, 동시기 인물 중에서 그보다 더 빨리 출세한 인물은 키케로나 젊은 시절에 술라의 내전이라는 특수 상황이 있었던 폼페이우스 정도였다. 그런지라 사실은 '시대를 좌지우지했던 다른 인물들은 특이하게 이른 나이부터 두각을 보이고, 정석 코스를 밟은 다른 인물들은 카이사르만큼 걸물이 아니었던 것'에 가깝다.[93]
- 로마 원수정(프린키파투스) 시대의 플라비우스 왕조~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의 변호사, 역사가이자 황실 비서 출신인 수에토니우스가 극도로 혐오한 로마인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카이사르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극도로 혐오하고 미워한, 제정 시대의 심정적 공화주의자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비슷하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좋아하지 않은 동시대의 타키투스와 달리, 본인과 그 집안이 카이사르와 그 일가에게 피해를 입지 않았음에도 6명에 관하여는 지독할 정도로 거짓 소문까지 본인 창작과 길거리 뜬소문까지 결합해 실어 놓았다.[94]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와 그 가문이라면 이를 갈 정도로 증오했다. 물론 카이사르를 다룬 <카이사르> 편의 도입부는 율리우스 씨족과 카이사르 집안 이야기는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그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저서 <황제열전> 중 3대 황제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마지막 남성 칼리굴라를 다룬 <가이우스>편에서 다음과 같이 카이사르와 그 일가의 증오심을 표출했다.민중은 '가이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카이사르 집안 사람은 모두 칼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중 최초는 키나 시대에 살해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카이사르의 아버지)였다.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가이우스>, 60
수에토니우스는 이 편에서 카이사르의 부친과 카이사르, 가이우스(칼리굴라) 모두 개인 이름이 가이우스인 만큼 모두 칼에 맞아 죽었다면서 통괘함까지 표현했다고 평가받는데, 이를 번역한 이들조차도 아예 틀렸음을 지적할 정도로 그 적개심이 노골적이라고 까이고 있다. 물론 제정 시대 당시, 카이사르는 신격화된 데다 국부로 찬사받은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를 대놓고 비난하는 것은 후폭풍이 큰 탓에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대해선 직접 비난은 최대한 자제했다. 참고로 수에토니우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 황후에 대한 불경죄로 목숨만 겨우 건진 뒤 사회적으로 매장됐다. 이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비나 황후에 관해 뒷담화를 했던 것이 황제 귀에 들어간 것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죄목 외에도 여러 가지가 걸려 그와 친하게 지낸 인사들까지 큰 고초를 겪고 수에토니우스는 이후 원로원 귀족들에게도 믿지 못할 호사가로 찍혀 완전히 매장됐다고 한다. 이에 학자들은 제 아무리 까칠하기로 유명한 하드리아누스라고 하더라도, 이 당시 수에토니우스가 자신의 저서 몇 권을 헌사한 이들과 함께 국부 아우구스투스와 정통성을 인정받은 황제들의 그 정통성을 혐오한 것도 걸렸기 때문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95] 심정적 공화주의자로 걸린다면, 이는 반역죄로 기소될 죄목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수에토니우스가 카이사르와 그 일가를 다룬 기록들은 대차대조 연구와 유적, 유물 발견 및 비문 해석 등으로 그의 주장이 대부분 틀린 것이 많다고 밝혀지면서, 근대 이후 전 세계 로마사 연구자들에게 '황색 언론'이라고 까이고 있다.
- 배째라 식의 악질 채무자이기도 했는데 높은 지위라는 신용을 이용하여 너무나도 많은 빚을 빌리면 돈을 빌려준 사람이 오히려 쩔쩔맨다는 걸 악용하여 지금은 조금 곤란하며 나중에 갚을 것이며 그 날은 내가 정하지만 나도 모른다. 라고 하였고 카이사르가 실각되면 채권자들은 한푼도 못받을 것이기에 채권자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카이사르의 지지자가 되었다.[96]
- 예수가 한 말인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로 유명한 표현은 사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니라 갈바 대에 카이사르를 호칭으로 사용해 이 후부터 황제란 뜻이 되면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로 적은 것이 아무래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더 유명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칭하는 내용으로 와전된 것이다. 그래서 현재는 원래 뜻인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로 정정되는 추세다. 여담으로 예수대의 황제는 티베리우스다.
-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애마는 마치 사람 발처럼 발가락이 달린 발을 갖고 태어났으며, 이 말을 탄 자가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는 점괘를 들은 카이사르는 이 말을 애지중지하며 망아지 때부터 자기 외의 아무도 이 말을 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도 등장할 정도로 서구권에서는 유명한 이야기로. 과학적으로는 현생 말의 친척으로 발가락을 갖고 있던 멸종된 말 종족인 히파리온의 유전자 일부가 현생 말에 남아있다가 돌연변이로 발현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흔히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외에는 남성친족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큰누이 대 율리아의 두 아들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 퀸투스 페디우스 형제도 있다. 이들은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대 율리아의 손자들이라고 했지만, 모두 카이사르의 조카들이다. 이중 퀸투스 페디우스는 외삼촌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수행할 당시 레가투스로 복무하면서, 외삼촌의 지시로 기원전 57년 갈리아 나르보네시스에서 새로 모집한 2개 군단을 이끌고 가세했으며, 벨가이 원정 때 루키우스 아우룬쿨레이우스 코타와 함께 로마 기병대를 지휘하면서, 외삼촌의 신임을 얻은 장군이자 원로원 의원으로 입지를 굳혔다. 페디우스는 기원전 44년 외삼촌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공개된 유언장으로 전체 유산의 1/8을 상속받았는데, 유언장 1/4을 상속받은 이부형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과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전 재산을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양된 카이사르의 작은누이 소 율리아의 외손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에게 모두 넘겼다. 두 사람 중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는 외삼촌을 암살한 이들을 응징하겠다면서, 일단 힘이 미약한 옥타비아누스 대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지했는데,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조카뻘의 소 옥타비아가 일방적으로 안토니우스에게 이혼당하자, 겉으로는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척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안토니우스 지지를 공식적으로 철회해, 옥타비아누스에게 악티움 해전 패전 후 재기를 꿈꾼 안토니우스가 절망해 자살하는 결정타를 날렸다. 스카르푸스의 동생인 카이사르의 또 다른 조카 페디우스는 외삼촌의 양자로 사촌 아티아의 아들이 입양됨을 안 순간부터 당시 정치적 자산이 없는 옥타비아누스를 거의 아버지처럼 도우면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진군을 벌인 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원로원이 이를 철회하게 하고, 2차 삼두정 당시 옥타비아누스를 대리했다.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페디우스를 신임해, 그에게 서한을 보내 12~17명의 이름으로 구성된 첫번째 숙청자 명단을 제시하며 이들을 숙청하라고 명령했다. 이 사실이 새어나가자 로마 시 전체가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에 페디우스는 비밀 명단을 공개하면서 탄압은 이것으로 제한될 것이니 안심하라고 권했지만, 시민들의 동요가 워낙 극심해서 이를 수습하는 데 애를 먹다가 얼마 안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 후 삼두는 로마로 입성한 뒤 본격적인 숙청에 착수했다.
8. 카이사르가 치른 유명한 전투들
[A] 現 이탈리아 라치오 주 로마[A] [3] 발음은 [ˈt͡ʃeːzare\]이므로 '체자레'에 더 가까우나, 이탈리아어 표기법이나 전통적인 이탈리아어 발음에 따라 '체사레'로 표기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인 체사레 보르자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4] 11일간 재임.[5] 연말까지 재임.[6] 기원전 46년 4월 말 10년 임기로 전환.[7] 종신 독재관 (Dictator Perpetuo)으로 취임, 재임 중 암살.[8] 사실 고대사람이 중세시대 사람보다 평균키가 더 높았다. 이는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도 나온다. 당대 로마인의 평균키는 167~170cm이였고 이 정도 키는 평균 키로 봐야한다.[9] 클레오파트라와의 아들.[10] 그의 성인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에서 지속적으로 황제(또는 부제나 후계자)를 칭하는 칭호로 사용되었고,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이저, 러시아 제국의 차르의 유래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유럽의 각 언어권에서 카이사르의 파생어들이 임페라토르의 파생어가 쓰이는 곳을 제외하면 황제 또는 군주를 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11] 카이사르가 황제였는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이견이 있어 왔는데, 근대 이전까지는 카이사르를 최초의 로마 황제로 여기는 풍조가 강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의 역사학계에서는 카이사르의 정치 체제와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과의 차이를 들어 아우구스투스를 최초의 황제로 보는 시각이 주류가 되었다.[12] 훗날의 아우구스투스[13] 라틴어는 외래어 표기법이 없고, 국립국어원에서 사용하는 관행적인 표기 원칙이 있기는 하나, 정식으로 규정된 적은 없다. 관행적 표기는 고전 라틴어 발음에 가깝기는 하지만 고전 라틴어보다는 현재 가톨릭에서 쓰는 교회 라틴어 발음에 가까운 것도 있다. 한국에서 라틴어의 V의 발음은 일반적으로 /v/라고 보아 ㅂ로 적는데 이는 교회 라틴어(중세 이후 라틴어)에서의 발음이고, 고전 라틴어에서는 /u/나 /w/ 발음이었다.[14] 단 일본에서의 표기는 카에사르(カエサル).[15]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도, 시빌라 예언으로 등장하는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의 운명에 대한 시에서 황제들을 은유해 '털북숭이'라고 부르고 있다.[16] 즉 어느 가문에서 파란 눈을 가진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를 어느 가문의 파란 눈이라고 부르다가 그 아이의 후손들 구분을 위해 어느 가문의 파란 눈 분파라고 부르는 식이었다.[17] 독일어 카이저(Kaiser), 러시아어 차르(Царь/Tsar) 등이 있다.[18] 병사가 코끼리를 죽였다는 건 요즘으로 치면 알보병 하나가 중화기도 없이 전차 한 기를 무력화시킨 셈이다.[19] 유일하게 카이사르 생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20] 평민 귀족(Noble Plebians) 가문들 때문에, 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상황과 맥락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원래 귀족(Patrician)은 왕정이나 공화정 초기로부터 내려오는 유력 가문 구성원들 사이에서 세습되는 신분이었다. 그런데 공화정 중기 이후 등장한 평민 귀족 가문들은 따로 귀족 신분을 부여받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기존 다수의 세습귀족들보다도 영향력이 컸고, 통혼하거나 정치적 동맹을 맺을 때도 기존 세습귀족들로부터 대등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분명히 '귀족'으로 인식되었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평민과 세습 귀족의 구분 없이 원로원 의원직을 세습하며 정국을 주도한 가문들을 통틀어 수식 없이 '귀족'으로 부르고, 공화정 초기부터 이어진 신분으로서의 귀족은 '세습 귀족'으로 구분하여 서술했다.[21]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의 생존자 아이네이아스의 아들이 알바롱가를 건국했으며 그 알바롱가 왕녀와 군신 마르스의 아들이 바로 초대 왕 로물루스다.[22] 율리우스 씨족보다 역사가 짧고 기원이 불확실한 가문도 족보에 신들을 끌여들여 윤색하는 일은 종종 있었으나 보통은 세간의 비웃음을 샀다. 적어도 율리우스 씨족의 경우 가문의 역사가 로마 건국 이전부터 시작하는 건 확실했기 때문에 문제가 덜 된 것이다.[23] 누마의 후손이 아닌 알바롱가의 유서 깊은 귀족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있다.[24]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의 친정으로 피소, 비불루스를 배출했다. 이 가문은 씨족 성씨에서 드러나듯 누마의 아들 칼푸스가 시조였다.[25] 기원전 489년 집정관.[26] 이들은 실제 귀족 신분은 아니었고, 평민집회에 참가하고 호민관을 역임하는 등[97] 평민 고유의 권리도 계속 향유했다. 다만 평민임에도 기존 귀족 가문들과 대등하게 혼맥을 맺고, 기존 파트리키 가문처럼 구성원들이 고위 관직을 연달아 역임할 정도로 가문의 위세가 커졌기 때문에 '평민 귀족'으로 불린 것이다.[27] 공화정 초기의 주요 가문 중 하나였던 율리우스 가문 사람들은 후기 공화정에서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장 전까지 BC 267년, BC 157년을 제외하고는 집정관직을 역임하지 못했다.[28] 공화정 후기에는 포에니 전쟁으로 누미디아 왕가까지 피호민으로 만든 스키피오 가문, 프로빈키아(남프랑스)를 정복한 아헤노바르부스와 파비우스 가문, 마케도니아와 일리리쿰에서 정복 활동을 벌인 메텔루스 가문 등 전쟁을 통해 명성을 쌓은 가문들이 다수 출현했다.[29] 여기 해당하는 것이 코르넬리우스 씨족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고 해도 좋을 또 다른 대귀족 클라우디우스 씨족이었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 인레길렌시스의 아들인 장님(카이쿠스) 아피우스와 그의 장남(실제로는 차남)을 중시조로 둔 풀케르 가문은 클라우디우스 가문 그 자체로 인식될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지만, 아피우스 카이쿠스의 차남(실제로는 사남) 티베리우스에서 기원한 지파인 네로 가문은 형제뻘 친척인 풀케르 가문이나 시조 아피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먼친척 마르켈루스 가문과 달리 전쟁 영웅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외에는 집정관을 배출하지도 못한 채 카이사르 가문처럼 법무관을 배출하면서 의석을 세습하고 있었다.네로 가문이 본격적으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시기는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카이사르 밑에서 해군제독, 법무관 등을 지내며 카이사르파로 활약한 이후였다. 그러나 이 역시 풀케르, 마르켈루스 가문보다 잘 나간다거나 대등한 수준은 아니었고, 네로 가문이 클라우디우스 가문 그 자체가 된 시기는 리비아 드루실라가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해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와 그 후손들이 카이사르의 율리우스 가문과 하나의 가문으로 결합된 시대 이후였다. 결국 이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이루는 카이사르와 네로 가문은 둘 다 때때로 등장한 몇몇 유명인들을 제외하면 공화정 시기에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귀족가문이었던 것이다.[30] 평소같으면 온정주의가 작동해 관대하게 처리되었을 일이나, 합의를 통해 적당히 나눠먹고 끝났을 관직 배분에서의 충돌이 점차 잦아지게 되었다.[31] 최고신 유피테르를 모시는 사제였으니 당연히 그 권위가 막강해 최고 제사장과 비견될 정도였다. 그는 원로원의 당연직 의원으로, 릭토르를 거느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치 참여에 제약이 없던 최고 제사장과는 달리 플라멘 디알리스는 죽음과 관련된 어떤 행위도 할 수 없었는데, 군 지휘가 곧 정치였던 고대 로마에서 이는 그가 명예로운 경력(Cursus Honorum)과 현실정치 참여에서 배제된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32] 역법이 이들의 소관으로, 필요할 때 달력에 날수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의사일정을 지연시키거나 선거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점에 열리게 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가 율리우스력을 제정한 것은 역법의 불확실성을 줄여 일상생활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함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필리버스터로 쓰이던 역사와 전통의 꼼수를 봉쇄하려는 조치였다. 당시 로마 역법의 폐해를 로마인들 자신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기존의 역법을 고치지 않은 것은 무지보다는 그것의 유용성 때문이었다.[33] 현대 공화정에서 엘리트 중심으로 구성되어, 급격한 변화에 저항하고 체제를 수호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사법부를 생각해보면 된다. 이는 이렇다할 조상이 없는 지방 평민 야심가[98]가 집정관, 심지어는 개선장군과 국가적 영웅이 될 수 있는 개방성이 있었고, 호민관이 민회나 평민집회에서의 입법권, 거부권 행사를 통해 원로원 결의를 뒤집으며 포풀라레스가 기세를 올리기도 하던 로마 공화정이, 근본적으로는 귀족들의 합의로 굴러가는 과두정이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직접적인 견제 외에도, 폐쇄적인 고위 사제직은 가끔 등장하던 위협적인 평민 야심가를 체제에 포섭하는 역할로서 유용했다. 협력자 사투르니누스를 마지막 순간에 버리고 그를 진압하는 원로원파에 합류했던 마리우스나, 동방을 정복하고 돌아왔으나 전후처리나 퇴역병에 대한 보상 문제에서 개무시로 일관하는 원로원 앞에서 군대를 해산하고 참고 견딘 폼페이우스의 사례처럼 이들은 아쉬울 게 없어 보였음에도 원로원파와의 대결에서 때로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들은 한편으로 원로원과 대립하면서도 체제에 본격적으로 대항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일에는 계속 망설였고, 스카이볼라나 스카우루스 같은 명문가와 혼사를 맺고 우호적인 관계를 쌓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그들은 자신의 가문이 여러 대에 걸쳐 번성하여 후손들이 명문귀족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그들에게만 열려 있던 고위 사제나 켄소르 등의 공직까지 진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99]이다.[34] 원래 로마군은 현역 해당자인 시민들이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병역을 수행하기 때문에 일정 기간마다 부대 구성원이 교체되어야 했으나 포에니 전쟁 이후로 해외 영토가 크게 늘고 이역만리에서 전쟁을 하게 되면서 교대 시스템이 무너졌다.[35] 처가라 해도 물론 공짜는 없었던지라 카이사르의 아버지 가이우스는 마리우스의 퇴역병 정착을 도우며 나중에 드러났듯 그들을 마리우스의 사병으로 만드는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36] 미트리다테스에게 된통 당하기 전까지 로마 총독들이 아시아 속주를 마음대로 벗겨먹을 수 있는 화수분 취급했던 만큼, 카이사르의 아버지 역시 한몫 챙겼을 것이 확실하다. 다만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마리우스파였던 만큼 그 재산은 내전을 거치며 사라지거나 술라에게 몰수당했을 것이 분명하고, 이는 카이사르의 출세 전까지 그의 가족이 수부라에서 생활할 정도로 가난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이후 아시아 총독 부관으로 공직 경력을 시작해 비티니아에서 긴 시간을 보낸 것은, 아버지가 아시아 총독을 역임해 이 지역에 연고가 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드리아누스시대의 변호사,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3대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처럼 카이사르 스트라보 역시 킨나 시절 칼에 맞아 죽었다면서 율리우스 가문 내의 가이우스를 개인 이름으로 사용한 카이사르 집안 남성들은 칼에 맞아 죽을 운명이었다고《황제열전》에 서술했다. 하지만 카이사르 스트라보는 병으로 사망했고, 저서 말미에 수에토니우스 스스로 자신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그리고 칼리굴라를 얼마나 혐오했는지 기술한 탓에 국내 번역서 저자들까지도 "틀렸다", "명백한 오류다" 등으로 각주를 달아 짚고 넘어가고 있다.[37] 이 루키우스 분가의 출세는 사실 마리우스와 큰 관련은 없었다. 루키우스는 가장 집요하게 마리우스에 반대했던 옵티마테스파 수장 카툴루스의 이부형제로, 정치적 배경은 오히려 반대였다. 정치적 입장도 다르고 칠촌이면 거의 남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율리우스 가문은 공화정 말기까지 살아남은 후손이 매우 귀했다. 때문에 당시 율리우스 가문원은 전 로마를 통틀어 독재관 카이사르의 할아버지 가이우스의 분가와 이 루키우스 분가 사람들이 전부였고 때문에 양쪽은 관계가 꽤나 밀접했다. 이 관계는 루키우스의 외손자로 부계후손이 끊어진 분가를 사실상 잇게 된 안토니우스가 독재관과의 혈연관계는 9촌으로 멀었어도, 독재관 카이사르의 최측근이자 유력한 후계자로 간주된 이유였다. 안토니우스의 후손들이 황족으로 온전히 인정받아, 칼리굴라 이후 로마 황통을 잇게 된 데는 이들이 루키우스로부터 이어지는 카이사르 분가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점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38] 물론 가난한 카이사르에게는 명문대가에 딸의 지참금으로 내줄만한 돈이 없었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39] 2천년이 지난 현대인들도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당시에도 장애는 공직자에게는 큰 결격사유였다. 이후 황제가 되는 클라우디우스 1세는 흠잡을 데 없는 혈통이었음에도 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괄시받으며 나이 50이 되도록 별다른 경력을 쌓지 못했다. 이에 비하면 카이사르는 편견없이 인재를 기용했던 것.[40] 가데스(현재 카디스)의 페니키아계로,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활약해 로마 시민권을 받았다. 아직 이탈리아 지방도시 명문가 출신조차 운신에 제약이 있던 당시 정서를 고려하면, 외국인인 발부스는 애초에 정치는 꿈도 꿀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럼에도 카이사르에게 자금 운용 능력과 정치력을 인정받아 갈리아 전쟁 내내 로마 업무를 총괄하는 비서실장 역할을 수행하고, 카이사르 사후에는 집정관까지 역임한다.[41] 당시에는 누가 봐도 옥타비우스[100]보다는 안토니우스가 더 후계자로 적합해 보였다. 물론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의 가장 가까운 혈연이었지만, 입양은 꼭 혈연만을 고려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안토니우스는 당시 정치인의 전성기로 간주되던 40대를 눈앞에 뒀고, 카이사르파의 2인자로서 정치적 입지도 탄탄했다. 외할머니가 카이사르의 누나였던 옥타비우스와 달리 안토니우스는 어머니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여동생으로, 카이사르와 촌수는 멀어도 율리우스 가문과의 관계는 더 가까웠다. 감찰관 할아버지와 삼촌을 둔 안토니우스의 막강한 배경은 집정관도 배출하지 못한[101] 옥타비우스 가문과는 애초에 비교대상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지방 유지 가문 출신의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벤티디우스처럼 완전히 무명이었던 농민가정 출신의 아그리파를 인간성과 능력만 보고 그에게 붙여줬다. 이후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가 함께 이뤄낸 놀라운 성공은, 단순한 우연이나 행운으로만 볼 수는 없으며 카이사르의 인재 기용 방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카이사르가 능력을 보고 발탁한 인재들이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도움이 되었음은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원로원 정원을 900명으로 늘리고 갈리아 부족장들까지 의원으로 받아들이면서 충실한 카이사르파들에게까지 반감을 사 암살당하게 된 일을 잊지 않았다. 결국 권력을 잡은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 정원을 600명으로 다시 줄이고 기존 명문귀족과 이탈리아 유력자 중심으로 인재를 기용하게 된다. 다만 이를 뒷받침할 실무 관료로는 지방의 기사계급을 꾸준히 등용하였고, 결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후반부에는 황제의 측근 역할을 하며 성장한 관료 출신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 그런 세력의 대표주자격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플라비우스 왕조가 들어선 뒤 그는 문호를 더 개방하여 속주 출신 인사들을 중용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결국 트라야누스의 등장까지 이어지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방향성 자체는 이어가되, 반발을 고려해 속도를 조절했던 것이다.[42] 물론 카이사르 가문의 부흥에는 그렇게 출세할 거라고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던 시절의 마리우스를 사위로 맞은 엄청난 행운이 결정적이었다. 사실 생전 행적을 고려하면, 처가에 대단한 도움을 줄 생각은 없던 게 분명했던 마리우스가 새로운 명문가를 여는 대신 또 다른 전쟁의 주인공이 되려는 욕심에 폭주하다가 대가 끊겨, 처조카 카이사르가 전쟁영웅의 명성, 시민들의 향수 등 그의 무형적 유산을 온전히 물려받은 것은 또다른 큰 행운이었다. 물론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이혼하라는 독재관 술라의 명령에도 끝까지 버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숱한 정치적 위기를 넘겨 그 탈 많은 유산을 온전한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만드는 과정에서는 카이사르의 결단력과 능력이 크게 작용했다.[43] 수부라는 카피톨리노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에 위치해 있는 저지대로, 공공건축물이 밀집한 북부와 하층민들이 살던 남부 구역이 뒤엉켜 있는 로마시 최대의 상가로서 유흥 시설과 윤락가까지 들어서 하루종일 시끄럽고 습기찬 시장통인지라 귀족이면 술라같은 몰락 잔반이 아닌 바에야 거기서 안살았다. 자고로 공화정 로마에서 귀족이라고 하면 로마시 7대 언덕 중 6개 위에 형성된 밝고 조용하고 물이 잘 빠지는 부촌의 단독 주택에서 사는게 일반적이었다. 다만 카이사르가 수부라 빈민들과 똑같이 살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원로원 의원 신분을 감안[102]하면 그의 자택은 수부라에서는 나름 괜찮은 '주상복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로원 입성을 위한 재산 자격은 100만 세르테르티우스 이상이었던 만큼 카이사르 역시 자택 외에도 교외의 농장 등 이런저런 자산을 보유했을 것이고, 하루 몇 세르테르티우스 정도의 일당으로 먹고살던 서민들 눈에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원로원 의원이라도 대단한 자산가였다. 카이사르 가문의 경제력이 서민 수준으로 떨어졌다면 한때의 술라 가문처럼 원로원에서도 진작 밀려났을 것이고, 다만 그들에게는 팔라티누스 언덕의 거대한 단독주택에 입주할 재력은 없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현대 정치인들도 일부러 서민적 배경을 내세우려 애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이런 특이한 배경은 카이사르의 인기 요인 중 하나였다. 팔라티노에 살며 그들끼리만 교류하는 명문가 귀족들과는 달리,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고귀한 혈통의 카이사르가 수부라로 흘러들어온 온갖 배경의 주민들 사이에서 나고 자란데다 정치경력을 쌓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호감을 샀던 것이다.[44]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버지[45] 직역하면 최고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엘리트주의를 내세운 귀족파를 뜻하는 말.[46] 실제로 마리우스는 자신을 공격한 원로원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카이사르의 칠촌당숙인 BC 90년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해하기도 했을 정도로 마리우스에 대한 카이사르 가문 내부의 스탠스는 복잡했다.[47] 그러나 그 외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일부 사가는 이 율리아가 카이사르의 칠촌 당숙 루키우스의 여자 형제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 소설 《로마의 일인자》등을 집필한 콜린 매컬로는 이 율리아를 카이사르의 고모이자 마리우스의 아내 율리아의 여자 형제로 설정했으나,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를 동서지간으로 만들고 카이사르를 마리우스와 술라 양쪽과 엮어 이야기 진행을 수월하게 만들기 위한 단순한 창작이다. 다만 술라가 초기 마리우스의 보좌관으로 활동했던 것은, 율리우스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제기해볼 수 있다.[48] 실제로 로마 귀족들은 이념에 따라 붕당을 형성하기보다는, 그때 그때의 이해관계, 친족이나 보호자에 대한 의무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포풀라레스와 옵티마테스를 '민중파'와 '귀족파'라는 고정된 붕당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못한 시각이다. 카이사르가 옵티마테스 견제에 쏠쏠하게 써먹었던 호민관 클로디우스만 해도 원래 당시 로마 최고의 명문 귀족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였는데 민중파 활동을 위해 스스로 귀족 신분을 버리고 평민이 된 케이스이다.[49] 실제로 카이사르의 친척들 중에서 카틸리나 탄핵 때 같이 엮여서 옵티마테스 쪽에 완전히 찍힌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카이사르의 부관 노릇을 한 안토니우스 정도만 제외하면 거의 다 옵티마테스 쪽 인사들이었다. 그 정도로 카이사르는 가문만 보면 완벽한 귀족 자제였다. 그나마도 루키우스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려고 할 때 이건 반역이라며 반발했을 정도였다.[50] 물론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의 정치개혁을 예상했다거나, 제정 로마 수립을 의도했다고까지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51] 당시의 로마인들의 관점에서 동성애가 용인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볼 수도 있는데, 동성애는 나약한 그리스식 취미 취급을 받았고 더군다나 동성애에서 수동적 역할 즉, 삽입 당하는 역할을 맡는 것은 노예나 할 법한 '여성적' 역할로 보아 로마 시민이 남창 영업을 하다 적발되면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중죄였다.[52] 돌라벨라는 카이사르를 "왕비의 연적"이라고 불렀고, 메미우스는 그를 '연회에서 종 노릇을 했다'며 비난했다. 특히 화려한 웅변 실력을 인신공격에 쓰던 키케로는 '베누스의 후손이 비티니아에서 청년막을 따였다'며 조소했고, 후일 니코메데스의 딸인 니사를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변호하자 "집어치우시오. 그와 당신이 뭘 주고받았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라고까지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카이사르의 정적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그와 집정관으로 집권하던 해에 그를 동료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 유명한 "비티니아 왕비"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러나 정작 비불루스는 그 해에 카이사르에게 완전히 정치적으로 농락을 당했으니 아이러니하다.[53] A.골즈워디 같은 현대 사가들은 정적인 원로원파들이 당시 로마인들에게 퍼져 있던 동방, 동방 왕실에 대한 경멸 및 혐오감과 동성애자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등을 민중파의 우두머리이자 독재자인 카이사르에게 엮어 권위를 실추시키는 정치 선전에 써먹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본다. 어쨌든 가십을 좋아하는 수에토니우스의 이야기가 출전이므로 이 소문의 진위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54] 탈모는 카이사르에게도 계속 콤플렉스였는지 클레오파트라 7세와 동거했을 시절에는 그의 탈모를 개선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가 쥐를 태운 재에 곰의 기름과 사슴 뿔을 섞은 약을 만들어 주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탈모를 멈출 수는 없었다고 한다.[55] 탈모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명 '바코드' 스타일을 말한다.[56] 실제로 카이사르는 여성편력이 굉장히 심했다.[57] 당시 카틸리나의 정치적 목표가 바로 채권자들에게 부채 전액 탕감을 강제하는 것이었는데 카이사르도 빚을 엄청나게 지고 있어서 한패라는 의심을 받았다. 거기다 태생적으로 민중파였기 때문에 원로원파에게 미움을 샀던 것도 있었다.[58] 그녀의 자식은 그 유명한 마르쿠스 브루투스다. 일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정말 사랑했던 여인이 세르빌리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브루투스를 너무 아낀 나머지 이런 야담까지 나왔다. 그러나 브루투스 본인은 그 말 때문에 시달려서 싫어했다.[59] 카이사르가 먼저 회의 중 무슨 편지를 적어 시종 편에 보냈고, 거기에 온 답장이 세르빌리아의 편지였다고도 한다. 이 전개를 따른다면 카이사르가 자신에 대한 의심도 딴 데로 돌리고 겸사겸사 카토도 망신 줄 생각으로 작정하고 회의 중에 세르빌리아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60] 연애 편지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이때 지속적으로 공권력에 의한 채무 강제 탕감을 주장한 카틸리나에 대한 여론이 하도 나빠서 카이사르는 카틸리나에 대해 "일단 재판을 하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군대로 감시하자"라는 발언을 했다가 어그로가 끌린 군중들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법적으로는 엄밀히 말하면 카이사르가 옳았고 재판 없이 로마 시민을 즉결처분하는 건 불법이었다. 한마디로 재판 판결도 혐의 입증도 없이 그냥 죽인 셈이어서, 카틸리나 사후 제정신이 돌아온 로마 시민들은 자신들이 재판도 없이 로마 시민을 처형했다는 것을 후회하고 그 책임을 물어 키케로를 추방하게 된다. 이전에는 마녀사냥을 당했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고 당연히 정당한 절차를 거쳐 내쫒은 것이다.[61] 오죽하면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에 대한 로마 시내의 중평은 솔개에게서 매가 태어났다.였다고 한다.[62] 정치적인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첫 번째 부인인 코르넬리아와는 차라리 이혼하는 게 정치적으로 이득이었는데도 당시 독재자였던 술라가 이혼하라는 명령도 거부하고 튀었다. 이는 카이사르가 자신은 민중파라는 것을 술라를 비롯한 보수파들에게 알린 일화라고 보는 것이 맞다. 자신은 마리우스를 지지하기에 술라의 말은 듣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후로 카이사르는 자신이 마리우스와 혈연이면서 민중파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다녔으며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전까지, 아니 성공하고 나서도 원로원의 견제를 지속적으로 받았다.[63] 그래도 합법이기는 했다. 그 유부녀의 남편이 결혼식 들러리를 해줬다고 하고, 전 남편의 자식 2명(그중 임신 중이던 둘째가 불륜의 결과라는 이야기도 있지만)을 모두 떠맡았으며 데려온 자식 중 첫째가 결국 후계자가 되기도 했다.[64] 다만 이건 드루수스가 일찍 죽어서 그렇게 된 거고 만약 드루수스가 오래 살았다면 황제 자리는 당연히 드루수스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애시당초 티베리우스는 황제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고 반면 드루수스는 활달하고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두 형제의 사이는 지극히 좋았다. 만약 드루수스가 황제가 되었다면 그의 부족한 부분을 티베리우스가 채울 수 있어서 매우 이상적이었을 지도 모른다.[65] 1999년작 프랭크 로덤 감독의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선 작중 클레오파트라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클레오파트라와 그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와의 결혼을 제의하는데, "저런 코흘리개 어린애하고 결혼하기 싫다"라고 투덜대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여왕이 되었으면 여왕처럼 생각하는 방법도 배워라. 프톨레마이오스와 부부가 되면 그의 군대를 합법적으로 해산시키고 당신의 반대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걸 모르겠냐."라며 일침을 놓는 장면이 있다.[66] 카이사리온은 카이사르의 유일한 남자 자손이었는데도 말이다. 사실 카이사르는 그렇게 염문을 많이 뿌렸지만 후손은 공식적으로 딸밖에 없었고 그 딸도 이미 카이사리온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었다. 그런데도 카이사리온이 아닌 옥타비아누스를 선택한 것이다.[67] 사실 살아있었다. 주인공도 모르고 있던 자신의 진짜 정체가 바로 카이사리온이었다.[68] 카이사르 본인은 7권까지 썼고 마무리는 그의 부관이 8년째 뒷마무리 과정을 쓰면서 완성시켰다.[69] 라틴어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문장 내에서 품사의 순서가 자유롭다.[70] 의외로 로마인들은 실용보단 '위엄'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로마 귀족들의 전통 예복인 토가가 실용과 거리가 억만 년쯤 떨어진 복장인 걸 생각하면 제책법 역시 '위엄이 넘치지 않아서' 거부했다는 주장이 아예 생뚱맞은 주장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71]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패장을 가차없이 처형했는데 이런 고급 인력의 손실과 달리 실수를 만회할 의지에 불타는 장군들이 넘쳐난 로마에게 유리했다는 평가도 있다. 심지어 로마의 패장은 패전 자체로는 처벌받지 않았지만 전투 직전에 닭 모이 점을 치다가 불길하게 나오자 닭을 바다에 집어 던져버려 경솔하게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 때문로만 처벌받은 경우도 있다.[72]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를 “자신의 운명을 알았고, 그 운명을 권력 쟁취의 동력으로 삼았던 슈퍼 휴먼”으로 그렸다. 플루타르코스는 “누구보다 자신의 운명에 강한 믿음을 가졌던 인물”로 카이사르를 묘사했다. 현대의 연구가인 에이드리언 골즈워디는 행운의 연속이라고 평할 만한 카이사르의 삶을 두고 “운명의 여신은 계속해서 카이사르에게 미소 지었다”라고 요약했다.[73] 그 외에 2명의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어머니인 아티아, 스키피오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다. 가부장적인 로마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현모양처로 로마 역사 내내 칭송받던 3명의 어머니다.[74] 어느날 카이사르가 책을 읽다가 갑자기 울었는데 친구가 "왜 그러냐"라고 하자 "알렉산더는 33살에 세계의 주인이 되었는데 동갑인 난 뭘 하고 있나"라고 한탄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75] 그런데 이건 애초에 비교 대상이 잘못됐다고 보는 게 맞다. 예시로 나오는 알렉산더, 폼페이우스, 스키피오 모두 유의미한 군사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여건이 젊은 나이부터 가능했음을 고려해야 한다. 알렉산더는 당대의 강국에 해당하는 마케도니아의 왕자였고, 폼페이우스는 가문 대대로 전해지던 다수의 후원자들이 있었으며, 스키피오는 아버지가 군단 사령관이었고, 아버지 아래에서 종군했던 케이스다. 오히려 카이사르는 키케로나 루키우스 카이사르처럼 특수한 케이스들을 제외하면 소위 말하는 '명예로운 경력'을 착실히 쌓아가는 평균적인 로마의 정치인 코스를 탄 케이스이다.[76] 여러 사료에서는 3월 15일의 암살 직전 수많은 불길한 징조들과 아내의 악몽 등이 거론된다.[77] 알레시아 전투 당시 카이사르 휘하 군단이 포위망을 요새화하는데 들인 노력이 대표적인 예이다.[78] 실제 어감은 "이 개같은 새끼!" 정도의 욕설이라고 하는데, 진짜로 카이사르의 유언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말은 로마판 황색언론으로 평가받는 수에토니우스의 저작에서 유래했고, 다른 사료에서는 유언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는 "카이사르의 진짜 유언은 "아아아아악"이었을 겁니다."라는 매우 현실적인 개드립을 치기도 했다.# 실제로 카이사르는 암살자들에게 포위당한 채 몸을 20군데가 넘게 찔려 사망했으니, 순식간에 윽윽윽... 하다가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 정설에 가깝다.[79] 하지만 사실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절친이라 말할 수준은 아니었다. 설령 친했다고 해도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정반대인 이상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되기는 어려웠고. 실제로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삼두 정치에 들어올 것을 권유받은 것도 거절했고 또,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에도 폼페이우스의 진영에 합류했다.[80] 이 시기 제왕절개 수술은 마취 따위 없이 말 그대로 생살을 가르는 수술이었다. 당연히 그에 따른 고통과 출혈량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산모의 죽음을 의미했으며, 산모가 가망이 없거나 사망했을 때 아이라도 살리고자 시행했던 말 그대로 응급 수술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이 이후에도 역사상에 등장하므로, 이는 말 그대로 전설임을 알 수 있다.[8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종신 독재관 추대를 비롯한 일련의 행보로 그는 암살 당했고 오늘날 까지도 카이사르는 독재적 야망을 품은 자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는것은 아이러니[82] 어떻게 보면 명목상의 최고 존엄은 따로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장군이 최고 정치 역할을 겸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쇼군과도 비슷한 케이스이다. 물론 파고들면 세부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많긴 하지만.[83] 플라비우스 왕조 당시 베스파시아누스가 세습권을 원로원에 요구하며 전제 군주정을 향해 한발자국 다가섰지만 통치의 방식은 여전히 원수정의 그것 그대로였다.[84] 이렇게 선대의 이름을 계승함으로서 자신이 선대를 계승한 존재임을 선언하는 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었다. 당장 한국만 해도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고구려의 진짜 이름인 '고려'를 자기 국명으로 삼은 것이고 단지 편의상 구분을 위하여 고씨 왕조의 고려를 고'구'려로 바꿔서 부른 게 굳어져 온 것이다. 즉 진짜 삼국시대 당대의 백제, 신라 사람들은 그 북방 국가를 '고려'라고 불렀지 '고구려'라고 부르지 않았다. 실제로 왕씨 고려 이전, 남북국시대에서 고려(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주장한 발해 역시 '발해'는 중국으로부터 수여받은 국명이었고 자체적으로는 '고려'를 국명으로 썼다. 발해의 문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당당하게 "나 고려왕 대흠무는..."이라고 쓴 글귀도 남아 있다. 조선 또한 마찬가지로 원래 단군왕검이 건국한 국가의 이름은 고조선이 아니라 '조선'이었으나 나중에 이성계가 고려를 전복하고 새로이 왕조를 창건하면서 "고려는 고구려만 계승했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최초의 나라 조선을 계승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다"라는 명분으로 건국을 정당화하고자 국명을 조선으로 칭하면서 고대 조선을 편의상 '고'조선으로 바꿔서 부른 게 굳어져 온 것이다.[85] 후대의 수많은 로마 황제들이 자신의 이름을 넣어 월의 이름 바꾸려고 시도하였으나,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뿐이다.[86] 서양에서는 이런 머리 스타일을 카이사르 컷 혹은 시저 컷이라 부른다.[87] 그 중에 자신의 친척도 포함되어 있었다.[88] 반면 그의 정적인 소 카토는 알코올 중독이 의심될 정도의 술 애호가였다.[89] 미식가였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집안에 수족관을 두고 생선을 잡는 것을 규제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그의 친구에게 '그놈의 법안 때문에 생선을 못먹어서 내가 배탈이 났다'하고 투덜거렸다.[90]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카이사르는 왼손잡이였지만, 글은 왼손으로 쓰고 전쟁터에서는 칼을 오른손으로 잡았다.[91] 당장 방어 무기를 들지 않는 오른쪽에 대해 대놓고 노출된 측면(latere aperto)이라는 표현이 카이사르 본인의 저서인 '갈리아 전쟁기'에서도 나오며, 로마 군단병은 모두 일렬로 합을 맞춰야 했기 때문에 왼손잡이, 오른손잡이에 상관없이 오른손에 칼, 왼손에 방패를 들어야 했다. 지금까지 발굴된 수많은 로마 시대 군단병 무기 중에서 왼손잡이용 칼과 방패가 발굴된 적은 한번도 없다. 기술이 발달한 현대의 제식소총도 왼손잡이용이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해보자.[92] 특히 이 '시민 여러분'이 결정타였다. 본래 카이사르는 제 휘하 군단을 부를 때 '전우 여러분'이라 불렀는데, 평소 자기와 가까웠던 군단이자 갈리아 원정 때부터 함께해온 베테랑인 10군단에게 "그래 아저씨들 잘가요~" 정도로 대응해 감정적으로 제대로 동요시킨 것이다.[93] 또한 카이사르는 젊어서부터 민중파로 유명했으므로 착실히 엘리트 코스를 밟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승승장구했던 술라파가 아닌 이상 탈법행위를 맘껏 저지를 수도 없었고 또 그런 짓을 했다가는 원로원의 반대파로부터 무슨 말을 들을 지도 몰랐을것이다.[94] 타키투스의 경우, 장인 아그리콜라의 부친(아내의 할아버지)이 칼리굴라 황제 시절, 반역죄로 유죄가 명확히 결정돼 기소될 황족을 법대로 기소하는 것을 거절한 명령 불복종죄로 처형당해 일말의 원한이라도 있을 법했다. 그렇지만 그는 아내의 할아버지가 현직 법무관임에도 명령 불복종 혐의로 처벌받아 죽임을 당한 것을 증오한다고 표현하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했다. 당장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이렇게 된 것에는 티베리우스 시대에 겪은 카이사르 가문의 비극 때문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기술했고, 저서 역시 특유의 수사체로 진실, 소문, 작자의 추측을 명확히 구분해 서술했다.[95]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수에토니우스가 자신의 저서에 적은 자랑 글처럼 어린 시절 아우구스투스의 청동상(꼬마 투리누스 청동상)을 찾아오도록 한 뒤, 이를 받자 극도의 경외감을 표하며 이를 자신의 침실에 모신 황제로 유명했다.[96] 다만 이건 오해가 좀 있는데 당시에는 카이사르 이상으로 빚을 진 자들이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카틸리나 탄핵으로 유명한 카틸리나도 엄청난 빚을 진 상태에서 집정관 선거에 낙선했기 때문에 반역을 일으키려 계획했었고, 카이사르의 지지자이기도 했던 젊은 정치 신인 쿠리오는 카이사르보다도 훨씬 더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사실 애시당초 카이사르에게 돈을 가장 많이 빌려준 사람이 당대 로마 제일의 부호였던 크라수스였는데 크라수스의 재산은 거의 로마 1년분 예산과도 맞먹을 정도였기 때문에 카이사르에게 빌려준 돈 정도는 크게 문제가 되지도 않았고 울며 겨자먹기로 카이사르의 지지자가 될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크라수스와 카이사르의 관계가 매우 양호했던 것은 카이사르가 크라수스에게 엄청난 이득이 되었기 때문인데 당장 카이사르는 크라수스, 폼페이우스를 끌어들여 거물급 정치가인 삼두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즉, 카이사르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늦어도 삼두정치 때까지는 빌린 돈이 그 값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며 이런 결과를 가져다 준 카이사르를 오히려 열렬히 지지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