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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04:16:10

트로이 전쟁

트로이 전쟁
Τρωικός Πόλεμος
Trojan War
기간 기원전 1194년(?) ~ 기원전 1184년[1]
시기 청동기 시대(?)
장소 트로이
원인 트로이 왕자스파르타 왕비 납치
에게 해영토 분쟁
교전국 트로이 연합 아카이아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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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아카이아 연합군의 승리, 트로이의 멸망

1. 개요2. 전쟁의 발단
2.1. 호메로스의 기록2.2. 페르시아의 기록
3. 신들의 서로 다른 입장
3.1. 그리스 지지3.2. 트로이 지지3.3. 중립/불참
4. 경과
4.1. 초기4.2. 아가멤논아킬레우스의 불화4.3. 파트로클로스의 죽음과 아킬레우스의 재참전4.4. 헥토르아킬레우스의 죽음4.5. 트로이의 목마4.6. 트로이의 멸망
5. 영향6. 관련 인물7. 실제 역사상의 트로이 전쟁
7.1. 규모 추측하기7.2. 베일을 벗지 않은 부분들
8. 이야깃거리9. 대중문화에서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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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전쟁.

들과 영웅들이 개입한, 도시국가 트로이그리스를 주축으로 한 아카이아 연합군 사이의 치열한 전쟁이다.

2. 전쟁의 발단

신화에서 공통적으로 묘사된 바로는 전쟁의 발단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트로이로 데려간 것에 그리스인들이 분노해서 벌어진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그리스 측 기록과 페르시아 측 기록이 조금 다르다.

2.1. 호메로스의 기록

헬라스인 호메로스일리아스에서 트로이 전쟁의 배경을 신화를 통해 기록했다.

모든 것은 올림포스의 세 여신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누가 황금사과를 가질 것인가로 다툰 것에서 시작했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테티스펠레우스[2]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에리스는 불화와 다툼을 관장하는 신이기 때문에 결혼식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입장을 거절당했고, 격분한 에리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라고 적힌 황금사과를 선물로 보낸다.[3] 불화의 신이 만든 작품답게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는 서로 황금사과를 가지려고 다투게 된다. 치열한 접전 끝에, 셋은 승부를 내려고 인간 중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인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4]에게 심판을 부탁한다. 파리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헤라는 최고의 부와 권력을, 아테나는 위대한 지혜와 모든 경쟁의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줄 것을 약속한다.

결국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조건을 받아들여 승자로 선언한다.[5] 그래서 아프로디테는 약속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파리스에게 주지만, 그게 하필이면 유부녀인 스파르타메넬라오스의 부인 헬레네였다. 아내를 뺏겨 격분한 메넬라오스 왕은 자기 형인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과 함께 수많은 영웅들,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트로이로 쳐들어가게 된다.[6]

2.2. 페르시아의 기록

트로이 전쟁 후 트로이 지역을 다스리던 페르시아의 기록은 헬레네가 온 과정이 조금 다르다.

헤로도토스가 인용한 페르시아의 기록에 따르면, 원래 서아시아 페르시아인들과 남유럽 그리스인들 사이에는 잦은 납치 사건이 벌어졌다고 기록한다. 이오가 처음 이집트로 납치된 후, 에우로페가 그리스인들에게 반대로 납치되었고, 이에 트로이의 왕자 알렉산드로스(파리스의 본명)가 보복 목적으로 그리스인 헬레네를 납치했다는 주장이다. 트로이가 헬레네 반환 요청을 무시한 이유도 이전 납치 사건에서 사과나 배상이 없었고 여성 납치 문제가 국제 문제로 대두되는 일이 없었기에 무시했다는 주장이다.[출처2-1-1]

3. 신들의 서로 다른 입장

파일:SE-25c0b9a7-aa38-11eb-8f4b-792b1fea3499.jpg 파일:SE-3fe5d7af-06f8-4231-becd-97fb4c4ffc0f.jpg
그리스 지지 트로이 지지

이에 따라 여러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은 저마다 둘 중 한 진영을 선택하는데, 다음과 같다.

3.1. 그리스 지지

3.2. 트로이 지지

3.3. 중립/불참

4. 경과

4.1. 초기

트로이도 만만치는 않았는데, 강력한 성벽을 두른 데다가 프리아모스 왕의 장남인 명장 헥토르, 헥토르의 사촌 아이네이아스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무려 10년 동안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다. 하지만 10년 동안 전면전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다. 다른 설에는 트로이 부근에 쳐들어가긴 했지만 곧바로 트로이로 쳐들어가진 않고 주변의 국가들부터 약탈하고 박살내고 나니 9년째였더라 하는 말도 있다. 펠로폰네소스를 저술한 투퀴디데스도 이 설을 지지한다. 바다를 건너가 전쟁한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트로이 전쟁은 그 당시 있었던 어떤 전쟁보다 대규모이기는 했다. 그러나 병참 문제 때문에 대군을 보내지 못했고 바다를 건너가서 약탈을 하든가 농사를 하든가 하면서 시간을 끌었을 것이며, 그렇기에 투키디데스 당대의 전쟁보다는 규모가 확연히 적었을 것이라고 한다.

4.2. 아가멤논아킬레우스의 불화

전쟁 중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간에 트로이의 동맹국 침략을 진행하면서 전리품으로 얻은 여인들인 브리세이스크리세이스의 소유귄을 두고 다툼이 일어난 후에 화가 난 아킬레우스가 더 이상은 그리스 진영을 위해 싸우지 않겠다면서 이탈한 사태가 일어난다. 이는 대체적으로 아가멤논한테 큰 책임이 있는 걸로 묘사되는데, 크리세이스의 아버지이자 아폴론의 사제인 크뤼세스가 아가멤논한테 딸을 돌려주라고 간청하자 그를 모욕하고선 쫓아버린 만행을 저지르고 이내 크뤼세스의 한탄을 듣고 분노한 아폴론이 그리스군 진영에 전염병을 퍼뜨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제서야 아가멤논은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내고 아폴론을 달래기 위한 상당한 양의 제물을 지불하고선 이미 아킬레우스의 종이었던 브리세이스를 차지하려는 행보를 보이자[22] 이내 아킬레우스는 분노하여 파업을 선언하곤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전력에 공백이 생긴 그리스 군들은 이후 일어난 전투에서 트로이 군한테 밀리게 되고, 그리스 측 일원들이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한테 각각 서로간의 원한을 털어내고 화해해서 전선을 회복하자는 조언들을 보냈음에도 둘간의 분쟁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4.3. 파트로클로스의 죽음과 아킬레우스의 재참전

아킬레우스가 이탈한 탓에 전력에 큰 손실이 오게되자 그의 절친인 파트로클로스가 대신 그한테 가서 간청한 끝에 그의 갑옷 밑 무장을 얻고 참전한다. 이때 파트로클로스는 제우스의 아들인 사르페돈을 포함한 여러 트로이 측의 장수들을 죽여버리는 전공을 세우며 선전하지만, 결국 헥토르한테 죽게 된다.[23] 이후 절친이 헥토르의 손에 죽었단 소식을 듣고 아킬레우스는 크게 슬퍼하면서 이내 복수를 위해 다시 전쟁에 재참전해서 트로이 측을 몰아세우기 시작한다.

4.4. 헥토르아킬레우스의 죽음

그간 그리스 측을 상대로 선전하던 트로이 진영은 아킬레우스가 재참전하면서 수많은 트로이 측의 병사들 및 장수들이 사망하면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고, 트로이 성으로 후퇴해[24] 농성으로 버티는 전략을 택한다. 이 와중에 트로이 측의 총사령관인 헥토르는 공세를 잠시 물리자는 측근의 조언을 안 듣고 그리스 군을 몰아세우다 파트로클로스를 죽임으로서 아킬레우스가 다시 참전하게 만들어 자신의 조국에 크나큰 피해를 입혔단 생각에 죄책감이 들어 성 밖에 나와서 홀로 아킬레우스와 대결을 하기로 결정한다. 트로이의 국왕과 국모이자 자신의 부모인 프리아모스와 헤카베의 눈물어린 호소에도 트로이 측의 패세에 대한 책임 및 명예롭게 아킬레우스와 싸워 그한테 이겨 다시 승기를 잡는다는 목적을 갖고 아킬레우스를 기다리고, 이내 트로이 성 근처에 도착한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와 마주쳐서 둘간의 대결이 펼쳐진다.[25] 치열한 결투가 이어지던 중 아킬레우스의 일격이 헥토르한테 치명상을 입히게 되고, 헥토르는 자신의 시체가 손상되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을 아킬레우스한테 남기고 사망하고 만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둘도 없는 자신의 친우를 죽여버린 원수의 유언을 무시하고 병사들이 그의 시신을 손상시키고 모욕을 가하도록 내버려 둔 다음 자신의 전차에다 그를 매달은 다음에 트로이 성 주위를 돌면서 끌고 다님으로서 트로이 측의 트로이 왕가 일원들이 알연질색하게 만든다. 이후 자신의 가장 사랑한 아들이자 트로이의 미래였던 장자의 죽음을 보고 크나큰 슬픔에 빠진 프리아모스 왕은 밤중 몰래 헤르메스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 진영에 도착해서 아킬레우스한테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맏아들의 시신을 거두어서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한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처음엔 화를 내면서 거절하려고 하지만 프리아모스가 계속해서 통사정을 이어가면서 설득하자 이내 마음을 바꾸고 그를 정중하게 대접하고 헥토르의 시신을 넘겨준다.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은 트로이 측은 그를 위한 장례식을 치루는데, 이때 몰래 장례식에 참석한 아킬레우스가 트로이 왕가의 공주들 중 하나인 폴릭세네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린다. 이후 그녀한테 접근해 결혼을 청하지만, 폴릭세네는 상대가 그간 트로이의 수많은 장정들 및 자신의 가족들을 무참히 죽인 아킬레우스인걸 알아채리곤 그의 청혼을 수락한 후에 파리스한테 이 사실을 알린다. 파리스는 형 헥트로의 죽음을 되갚아주기 위해 신탁을 청해 무적의 몸을 가진 아킬레우스가 지닌 취약점 부분을 독화살로 쏘라는 조언을 듣고, 며칠 후에 트로이 근처의 한 도시에 위치한 아폴론 신전에서 기다리다가 폴릭세네를 만나고 있던 아킬레우스한테 활을 쏴 치명상을 입힌다.[26] 자신의 유일한 약점인 발뒷꿈치를 화살에 꿰뚫리게 된 아킬레우스는 허망하게 즉사해버리고, 이렇게 그리스와 트로이 양측 모두 최전력 일원을 각각 잃고 만다.

4.5. 트로이의 목마

여하간 10년이 넘게 결판이 나지 않자 그리스군은 오디세우스의 제안으로 거대한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성 앞에 남겨두고 군대를 물렸다. 트로이 사람들은 거대한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면 트로이가 완벽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거짓 예언을 믿고 성 안으로 들였다. 라오콘이 목마를 성 안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27] 결국 묵살당했고 카산드라 또한 목마를 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아폴론이 내린 저주 때문에 카산드라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4.6. 트로이의 멸망

파일:IMG_8470.jpg 파일:IMG_8473.jpg
수비병을 처리하는 그리스군 트로이의 멸망
트로이(영화)에서 묘사하는 트로이 멸망

목마를 성 안으로 끌고 들어온 그날 밤, 트로이 사람들은 큰 축제를 벌였다. 축제 후 모든 사람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잠에 들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목마 안의 그리스군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리스군은 목마에서 나와 성문을 열고 성 밖의 다른 군사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밤 동안 트로이는 방화, 학살, 약탈, 강간으로 얼룩진다.

네오프톨레모스는 가장 적극적으로 학살에 앞장섰다. 프리아모스의 아들이었던 폴리테스와 싸울 때 집요하게 그를 쫓아가 조금씩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살해했으며, 이에 분노하며 저항하는 프리아모스마저도 참혹하게 살해했다.[28] 한편 메넬라오스헬레네를 두고 데이포보스와 대결한다. 이때 데이포보스가 우세한 듯하였으나 헬레네가 뒤에서 그를 공격했기 때문에, 메넬라오스는 반격에 성공한다. 데이포보스를 처치한 후 메넬라오스는 헬레네도 죽이려고 했지만, 마음이 흔들린 끝에 그녀를 용서하고 다시 재결합한다.

트로이를 함락한 후 그리스군은 전후 처리에 들어갔다. 네오프톨레모스아킬레우스의 원혼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트로이의 공주 폴릭세네를 제물로 바쳤고, 헥토르안드로마케 사이에서 난 아들 아스티아낙스도 죽였다. 그리고 트로이의 여인들은 각 장수들에게 전리품으로 나뉘어졌다. 아가멤논카산드라를, 오디세우스헤카베를, 네오프톨레모스안드로마케를 각각 취했다.

5. 영향

해당 전쟁에서 너무 많은 그리스/트로이의 영웅들이 죽고, 이로 인해 올림포스 신족의 피를 이어받은 영웅의 종족들은 거의 전멸한다. 이 때문에 사실상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절정" 부분에 해당하며, 인간의 다섯 시대 중 영웅 시대가 끝나고 온건히 인간의 시대, "철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사실상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엔딩이라 할 수 있다.[29][30]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그리스 작가들의 영원한 원천이 되었는데, 호메로스일리아스오디세이아가 가장 대표적인 트로이 전쟁을 다룬 서사시다. 의외로 이 외에 트로이 전쟁에 관한 작품은 많지 않은 편이다. 되려 그 전후의 사건이 메인이 되는 일이 잦다. 스케일이 지나치게 큰 것이 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고대 이후 중세에는 트로이 전쟁사를 다룬 책도 여러 권 나왔다. 물론 거의 역사서 가깝게 지어졌지만. 또 중세에는 아킬레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영웅에 대한 이야기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도 특징.

특이한 건 단테의 신곡에서 트로이 측의 영웅들은 파리스만 빼고 다들 림보에 있는 데 비해, 그리스 측 영웅들은 죄다 지옥에 떨어졌다. 이건 단테가 이탈리아인이라 로마 쪽을 더 옹호한 것도 있다. 거기다가 헥토르는 중세에는 '최초의 기사'라는 호칭을 얻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롤랑의 노래에 나오는 롤랑의 검 듀랜달이 헥토르의 검이 이어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이니 당연하다.

근데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보면 상당히 막장인데. 여기선 헬레네가 트로이에 없었다. 즉 이건 헤로도토스의 추측성인데, 헤로도토스의 말에 따르면, 차라리 헬레네가 이집트에 있었다는 얘기가 더 사리에 맞다는 것. 파리스가 헬레네를 납치해서 도망가다가 잠시 쉬려 이집트에 도달하자, 파리스에게 불만이 있던 하인들이 도망치고 그 근방의 군주에게 그 사실을 까발렸다. 파리스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 군주에게로 갔다가 헬레네와 보물들을 다 뺏기고 트로이로 쫓겨났는데. 메넬라오스는 이 사실을 몰라서 트로이로 가서 헬레네를 내놓으라고 했고, 파리스가 이집트에서 헬레네를 뺏겼다는 말을 안 믿어서 10년 걸려 트로이를 다 박살냈는데, 헬레네가 없어 결국 이집트로 가 헬레네를 되찾아갔다. 헤로도토스가 은근히 일리아스를 까는 점이 있어서 그런지 정말 막장스러운 이야기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헬레네에선 여기에 신화적인 설정을 추가해서 트로이로 간 건 헬레네의 환상이고 진짜 헬레네는 신들에 의해 이집트로 빼돌려져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있었다. 당시 이집트의 왕이던 프로테우스는 헬레네를 보호해 주었는데, 그러는 동안 자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소식을 듣고 죄책감과 억울함에 괴로워하며, 급기야는 자신의 악명 때문에 어머니 레다가 자살했다는 소식까지 듣는다. 결국엔 난파돼서 거지 꼴이 돼서 온 메넬라오스와 재회, 기지를 써서 자신과 강제로 결혼하려는 프로테우스의 아들 테오클리메노스[31]에게서 도망친다.

참고로 그리스 영웅들이 10년간 전쟁을 치러서 함락한 트로이는 헤라클레스가 혼자서 단숨에 박살낸 전적이 있다. 이게 가능했던 게 헤라클레스가 반신 영웅이었던 점도 있겠으나, 우연히 포세이돈트로이를 공격하는 시기가 겹쳤던 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32]

참고로 그리스 신화는 말고 로마 신화에 따르면 로마의 설립자들은 멸망한 트로이 성의 후예이다. 원래는 로물루스/레무스 신화가 로마 신화에서 로마의 시초였지만 로마가 그리스를 병합하고 그리스 신화를 받아들이고 나니 자기들의 건국 신화가 너무 초라해 보여서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 신화를 끌어와서 땜빵한 것이라는 설과, 다른 설에 따르면 로물루스/레무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직계로 내려오는 후손인 줄 알았는데 그리스 신화를 받아들이고 나서 보니까 트로이 전쟁은 로물루스/레무스 시대에서 한참 오래전이라 이것과 로물루스/레무스 신화를 잇기 위해 장장 500년에 달하는 신화를 나중에 따로 끼워 넣었다는 설이 있다. 이 신화의 맨 처음 조상이 바로 베누스의 아들 아이네아스. 원래 아이네아스는 일리아스에서 이미 트로이를 재건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기에 끼워 넣기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다.

더불어 유럽의 다른 지방의 설화 중에는 조상을 트로이로 잡는 것도 있다. 스노리의 신 에다에선 아스가르드의 위치를 트로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으며 토르 또한 아스가르드의 12 왕국의 왕 중 한 명과 트로이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썰을 소개했다. 이쪽에선 아예 아사 신족의 이름이 아시아에서 나왔다고 얘기한다. 물론 현재의 정설은 아사(애시르)는 아수라와 같은 뜻을 가진, 인도유럽어족 고유어라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이 이야기는 바이킹 시대는 나타나지 않고 아이슬란드가 기독교화된 이후에나 등장한 썰이다.

심지어 샤를마뉴 전설에서는 그리스 신화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는 헥토르의 아들 아스티아낙스가 살아남아 그 후손이 샤를마뉴 왕조가 되었다는 설까지 나올 정도였고, 이 전설을 리메이크한 광란의 오를란도에서는 헥토르를 인류 최초의 기사라 부르며 찬양하고 그의 무구가 전설 장비 취급 받을 정도로 위상이 올라갔다.

6. 관련 인물

6.1. 트로이

6.2. 아카이아 연합군

7. 실제 역사상의 트로이 전쟁

많은 이들이 트로이를 호메로스의 서사시 안에 존재하는 가상의 도시로 여겼지만 호메로스에 감명을 받고 트로이를 찾아내겠다고 결심한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 1870년에 트로이의 유적이 발굴되었다.[34] 슐리만은 자신이 발굴한 제2층의 트로이를 트로이 전쟁 시대의 트로이로 생각했으며 이곳에서 발견한 황금 유물들을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 부르며 빼돌리기까지 했지만, 후대 고고학자들의 발굴 조사 결과 슐리만의 착각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신화로만 생각하던 트로이 전쟁을 역사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로서 절대 무시할 수는 없다. 처음에 생각했던 제2층이 트로이의 유물은 아니었으나 결국 그 장소에 트로이 전쟁이 있었던 것은 확인되었다.

트로이 전쟁이 과연 실제의 전쟁이었는지 역사학자들은 의구심을 품었지만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유적에서 발견된 대량의 외교 문서를 통해서 트로이 전쟁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히타이트 제국의 외교 문서에 의하면 윌루사에 미케네인들이 쳐들어 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학자들 중에는 히타이트 제국의 세력권인 윌루사가 곧 일리오스(트로이)로 비정되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미케네인들이 쳐들어와 약탈하고 불태운 것이 트로이 전쟁의 실체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트로이 전쟁은 기원전 1250년 또는 기원전 1180년에 일어났던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인 목적으로 일어난 전쟁이라는 분석도 있다.[35] 트로이는 입지적으로 험난한 다르다넬스 해협을 피해 소아시아로 육로수송이 가능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런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아카이아인들이 쳐들어와 트로이를 정복한 것이 트로이 전쟁의 실체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이외에 거의 인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분석도 있는데, 트로이는 히타이트 세력권에서 큰 도시이므로 철기를 일부 사용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당시 그리스 주변에서 철은 금과 맞먹는 값어치를 지닌 꿈의 물질이었기에[36] 이를 약탈하기 위해 처음에는 히타이트를 치려고 했다가 국력으로는 게임이 영 안 될 것 같으니까[37] 꿩 대신 닭 격으로 트로이를 쳤다는 분석이다. 이 주장이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제아무리 트로이가 히타이트 산하에서 큰 도시라 해도 히타이트가 철기내어줄 가능성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철기를 내어줬다는 건 현재 시각으로 보면 핵무기를 준 것과 다를 바 없다.[38]

그러나 몇몇 역사학자들은 트로이 전쟁의 실제 가능성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다. 물론 그에 해당되는 전쟁 자체는 역사상으로 존재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앞선 주장들을 미뤄본다면 트로이 전쟁의 실체는 미케네인들의 약탈이나 소규모 정복전쟁이 호메로스에 의해서 극적인 드라마로 각색된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한 설명일 듯하다. 미케네인의 윌루사 침공은 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로 보아 그런 사건이 존재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이지만,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이나 유물 증거들만 놓고 보면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당대의 이름이 알려진 모든 문명권에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한 세계 대전급 규모는 되지 못했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청동기 시대 근동의 인구나 문명 기준, 그중에서도 비교적 약소 문명이었던 미케네 문명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큰 전투로 기억되었을 수 있다. 결국 관건은 평범한 수준의 전쟁이 서사시 덕분에 큰 사건으로 기억된 것인지, 일리아스의 묘사만큼은 아니라도 실제로도 바다 민족의 침공처럼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큰 전쟁이었는지 여부인 셈이다.

한편, 2018년에는 파우사니아스가 언급했던 '트로이 전쟁의 생존자들(아가멤논에게 포로로 잡힌 트로이의 시민들)이 만든 고대 도시 테네아'의 유적이 확인되기도 했다. 기사 보기

7.1. 규모 추측하기

일리아스의 494행에서 759행까지 그리스 측의 전함과 병력을 설명하는데 언급되는 검은 배 즉 전함을 종합하면 1184척이다. 그리고 그리스군의 병력에 대해서는 일리아스에서는 그리스 함대 중 보이티아에서 배마다 120명씩 타고 있는 함대가 15척이고 필록테테스가 지휘하는 배마다 50명씩 타고 있는 함대가 7척이라고만 묘사할 뿐 나머지 함대의 병력에 대한 묘사는 일절 없다. 아마 120명은 배 한 척당 가장 많은 병력이 탄 숫자이고 50명은 배 한 척당 탑승 인원이 가장 적은 최소치일 것이다.

일리아스에서는 정확히 그리스군의 병력이 얼마라고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군의 배가 대략 1,200척이고 배 한 척당 최소 50명 이상 승선했다고만 계산해도 무려 최소 6만 이상의 대군이 된다. 이 정도 수치면 당시 패권국인 히타이트가 카데시 전투에 동원한 규모보다도 많기 때문에 당연히 고대의 과장법일 것이고 그럼 다른 방식으로의 계산을 해보아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직접적으로 탑승 인원을 명시해 둔 선박의 대표 격은 다름 아닌 아르고 호이다. 이아손이 황금 양털을 가져오기 위해 제작한 이 선박은 언급에 따르면 그 어떤 배보다 크고 강했다. 그런데 이 선박의 탑승 인원은 50명이었다. 가장 큰 배의 탑승 인원이 50명이니 이 50명은 말 그대로 최대 탑승 가능한 인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트로이 전쟁 당시 지휘관들이 탄 대장선의 크기는 그 정도 크기였겠지만 다른 병사들이 타고 있는 배는 그보다 작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선박의 수도 재계산할 필요가 있다. 1184척은 척 봐도 과장이다.[39]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을까? 안타깝지만 없다. 따라서 선박의 수는 병력부터 계산한 다음 맞춰 보아야 한다.

일단 트로이의 면적은 20만 제곱미터 정도에 불과하고 이 정도면 왠만한 대학교들보다 작은 크기로 도시내 거주하는 인원수는 약 5000명 정도였고 따라서 트로이가 동원할수 있는 병력도 아무리 많아도 1000명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40] 당시 미케네의 전체 인구도 아무리 많이 잡아도 50만명 내외였고 청동기 시대당시 그런 미케네가 동원할수 있는 병력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4000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옛날에는 실제 숫자에다가 대략 0하나 덧붙이는 뻥튀기가 흔했기 때문에 어쩌면 그리스 측 선박 숫자도 대략 100척이었을 수도 있다. 이 정도면 히타이트이집트가 싸운 청동기 시대 최대의 전투인 카데시 전투에서 히타이트와 이집트 측이 동원한 병력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미케네 문명 자체가 영토부터 전성기 고대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영토보다 훨씬 작고 그 작은 영토마저도 당시 굉장히 부유한 아나톨리아 지역을 지배했던 히타이트와 아이깁투스 지역을 지배했던 이집트에 비하면 굉장히 척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히타이트와 이집트에 비해 국력이 훨씬 약했던 미케네 입장에서는 4,000명 정도도 충분히 대군이었을 것이다.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시기는 대략 bc 12세기 전후로 당시는 미케네 역시 외부의 침입을 받고 전국토가 파괴되었는 시대인데 어떻게 미케나가 대규모로 트로이를 쳐들어갔을수 있냐는 의문이 들수도 있지만 임진왜란때의 사례를 보듯이 훗날의 임진왜란때의 일본역시 100년동안 내전으로 일본의 전국토가 전쟁으로 황폐화가 되었는데도 내전이 끝난지 2년밖에 되지 않아 대규모의 군대를 일으켜 대규모 전쟁을 일으킨 사례가 있듯이 미케네나 훗날 전국시대 일본처럼 국가의 모든 국가의 생산, 초점이 군사력에 집중되어서 전쟁으로 인한 약탈경제로 먹고사는 병영국가들에서는 전쟁 자체가 하나의 먹고사는 경제활동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집트가 지원해 주었을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 일리아스에서 그 어디에도 이집트의 대규모 지원병에 대한 어떠한 언급조차 없다. 호메로스는 그리스 연합군의 도시국가들과 트로이 동맹국들까지 일일이 나열할 정도로 전쟁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이집트가 나름 지원병을 보냈다면 그 규모도 적지 않았을 텐데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건 이집트가 전쟁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말과 같다.

트로이 전쟁 당시 히타이트도 국가 말기 상태라서 트로이 측에 그렇게 대규모 지원을 해주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애초에 미케네도 트로이가 히타이트의 봉신국이라 히타이트의 눈치를 살피다가 히타이트가 내전으로 국력이 약해져 정신없을 때 트로이를 침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7.2. 베일을 벗지 않은 부분들

고대 그리스인들마저도 여자 때문에 전쟁난 걸 못마땅해 했으며 투키디데스의 경우 경제 활동 등으로 인해 전쟁이 벌어졌다는 설을 내세웠다. 거기다가 트로이가 함락된 원인도 그리스인들의 공격 때문에 성벽이 무너진 건지 지진이 일어난 건지도 불분명하다.

여기에는 고고학적인 이유도 있다. 트로이는 여러 차례 파괴되고 재건되었는데, 그 파괴의 흔적들 중 10년에 걸친 대전쟁에 의한 철저한 파괴의 흔적으로 보이는 것은 없다.[41] 이 때문에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 여러 차례의 파괴들 중 어느 것이 트로이 전쟁의 흔적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더구나 히타이트의 문서에는 윌루시아(히타이트인들이 트로이를 부르던 이름)에 대한 기록이 미케네 문명이 무너진 이후에까지 계속 나타나고 있다.[42] 때문에 만일 미케네인들이 윌루사를 일시적으로 함락하거나 약탈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이 지역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윌루사의 배후에 있는 강대한 히타이트 제국의 영향력을 몰아내는 것은 어려웠을 듯하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트로이 전쟁은 2차례 있었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것은 2번째 트로이 전쟁이고, 헤라클레스가 트로이를 함락했다는 전설이 신화상으로는 그보다 한 세대 앞의 사건으로 언급하고 있다. 또한 헤라클레스가 트로이를 공격해서 함락시켰을 때 트로이는 이미 포세이돈이 보낸 바다의 괴물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트로이 유적의 흔적 중에도 이러한 신화상의 설명과 잘 들어맞는 듯한 부분이 있는데, 해일로 도시가 파괴되고 약탈당했다가 복원되고 한 세대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군사적으로 파괴된 (그리고 다시 복원된)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흔적이 바로 헤라클레스의 공격과 트로이 전쟁을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견해도 있다. 문제는 이 중 두 번째의 파괴의 흔적은 파괴의 정도가 심하지 않아서 첫 번째의, 해일로 인한 파괴보다 오히려 정도가 약했고, 파괴 이후에도 더 빨리 복원되었다는 점이다. 즉 이 주장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이 지나치게 작은 사건이 되어버린다. 이 때문에 정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참고로 이 전쟁은 기원전 1250년~기원전 1180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정확한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

최근 학계의 견해는 기원전 1200~1150이라는 지극히 짧은 기간에 일어난 사건인 후기 청동기 문명 붕괴와 연관지어, 신화와 기록으로서의 트로이 전쟁에 대한 기술들이 후기 청동기 시대에 여러 번 진행되었던 공격과 몇 번의 점령, 최종적으로 트로이가 멸망한 직후 바다 민족의 침공으로 미케네 문명이 멸망하여 그리스 암흑기가 찾아오게 된 후 팽배한 비극적 인식 등이 융합된 것일 것이라는 것이 많다. 위에도 언급되었듯 트로이는 여러 번 파괴되고 재건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은 바다 민족이 동지중해 지역을 휩쓸어 복합적인 청동기 국제 시스템 전체의 붕괴를 가져온 청동기 문명 붕괴 사건 이후에 해당한다. 더군다나 이 시기 동시다발적으로 그리스 문명 역시 붕괴하여 수백 년의 암흑기를 거쳤다.

8. 이야깃거리

8.1. 그리스-튀르키예 관계시발점?

어디까지나 지역만 보고 말하는 거지, 튀르키예의 조상인 튀르크(돌궐)족은 한참 후에야 지금의 튀르키예 땅에 오므로 진지하게 '그리스 vs 튀르키예'라 볼 수는 없다. 고대까지만 해도 아나톨리아 반도에 튀르크족 따윈 없었으며, 이들이 지금의 튀르키예 지역 근처로 오게 된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이천 년쯤은 지나 셀주크 제국 때부터였다.[43] 지금의 튀르키예 땅을 튀르크인들이 가지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이후부터이다. 물론 단순히 DNA상으로만 보면 현대 튀르키예인들은 백인인 아나톨리아 반도 원주민들과의 지속적인 혼혈로 인해 황인인 원시 튀르크인의 피가 거의 희석되었으며 그에 따라 현대 튀르키예인들은 트로이인을 포함한 아나톨리아 반도 원주민들의 후손이므로 이런 관점에서는 그리스 vs 튀르키예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혈통이 같다는 게 곧 민족이 같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으며[44] 적어도 오스만 제국 이후의 아나톨리아 반도 원주민들은 언어·문화적으로 튀르크족에 동화되었을뿐더러, 튀르키예 공화국이 들어서면서부터는 튀르크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튀르크적 정체성이 완전히 자리잡은 상태다. 따라서 트로이 전쟁을 그리스 vs 튀르키예로 보는 건 그저 드립으로서나 의미가 있을 뿐이다.

사실 트로이 전쟁은 하인리히 슐리만의 발굴 조사 등으로 그 실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신화상의 전쟁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강했고, 트로이 전쟁 이후 바다 민족의 대규모 침략 등으로 지중해 구성원 자체가 갈려 버리는 등의 암흑기가 도래하여 사실상 고대 그리스든 트로이든 민족성이 희석되어 버렸으므로 현대의 그리스튀르키예에 대입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이 지역을 정복했던 지배층은 이 전쟁에 자신의 세력을 대입하여 정당성을 주장하곤 했다. 일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후 메흐메트 2세나는 트로이의 복수를 했다고 선언한 것. 그러나 이것도 알고 보면 참 어이없는 소리인데,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은 자신들을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여겼고, 로마는 자신들을 트로이의 생존자인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라고 여겼다. 더 재미있는 건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슐리만은 신성 로마 제국의 후신 나치 독일의 탄생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라는 사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소위 '게르만 민족주의' 열풍에 힘입어 스와스티카 무늬를 아리안 민족의 상징으로 간주하여 이를 전파하였다.

그리고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후 "짐은 트로이의 복수를 했도다."라고 말했다는 일화의 출처는 코르푸섬의 베네치아 지방관 필리포 다 리미니(Filippo da Rimini)가 친구 프란체스코 바르바로(Francesco Barbaro)에게 보낸 짤막한 편지 하나뿐인데, 함락 당시 리미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참사의 현장을 생생히 증언한 게 아닌 그저 세간에 떠도는 카더라 통신을 끄적인 것에 불과했다. 편지의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술탄이라는 사람이 하기아 소피아라는 신성한 공간에서 마치 '한 마리의 포악한 짐승처럼(like a savage beast)' 도시의 처녀를 마구 강간하고는 "아테나 신전에서 강간당한 트로이 처녀의 복수다!"라고 말했다는 거. 실제 메흐메트 2세는 도시 약탈을 예정보다 빠르게 중지시킨 뒤 하기아 소피아를 신성한 공간으로 취급한 채 그곳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임명했다. 게다가 이 일화대로라면 메흐메트 2세는 동로마를 그리스로 봤다는 얘기인데, 정작 그는 동로마를 로마 제국으로 인식한 채 그 정당한 후계자가 자신이라는 의미에서 스스로 '로마 황제'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화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유럽으로 빠르게 퍼져 나간 건 이슬람 군주의 잔혹성을 선전하고 그리스 신화에 흠뻑 빠져들었던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주의자들이 '그리스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을 과거 그리스가 저질렀던 '트로이의 함락'과 대비해서 본 탓도 있었다.[45]

게다가 그리스인 역시 현대 그리스인과 트로이 전쟁 시기 그리스인은 차이가 크다. 트로이 전쟁을 포함한 그리스 신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미케네 문명의 시기로, 미케네인들은 도리아인의 침략을 받아 문명이 붕괴하고, 이후 300년이 지나서야 고대 그리스 시기가 시작된다.

9. 대중문화에서

그 외 트로이 전쟁을 중심 배경으로 삼은 작품들은 이 분류를 참조.

10. 관련 문서


[1] 에라토스테네스가 추측하여 주장한 연대다.[2] 이 부부는 나중에 아킬레우스를 낳는다.[3] 이 부분은 오역이다. 원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καλός인데, '최고의, 올바른, 아름다운' 등의 뜻으로 해석된다. 즉, 헤라는 최고의 여신으로, 아테나는 올바른 여신으로,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운 여신으로 해석했다는 것. 이런 오역이 나온 것은 고대 그리스가 극도의 외모지상주의 사회였던 탓이 크다. 일례로 기원전 4세기경 그리스에서 프리네(Phryne)란 이름의 헤타이라(상류층을 상대하던 고급 매춘부)가 신성모독 혐의로 법정에 서자, 그 애인이자 변호사인 히피리데스란 남자가 재판관들 앞에서 프리네의 옷을 벗겨 아름다운 나신을 드러내며 "이 사람이 정말 나쁜 사람이라면 아프로디테께서 친히 당신의 몸매무새를 빌려주시지 않았을 것"이라 변호하고, 재판관들은 실로 아프로디테의 현신이라며 무죄 판결을 내린 실제 사건이 있었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유죄일 리 없다"라는 (현대인 기준에선) 얼토당토않은 헛소리가 진지한 변론이자 무죄 판결의 근거로 여겨질 정도로, 고대 그리스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올바름, 선, 미덕, 하여튼 온갖 최고의 가치와 동일시했던 것이다.[4] 사실 파리스는 잘 생긴 것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편파 없이 공정한 심판을 내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 예로 트로이에서는 소 싸움과 비슷한 대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파리스는 자신의 소가 아닌 낯선 소에게 승리를 선언한다. 하지만 그 소는 사실 아레스가 변신한 것이었고, 신들은 파리스의 공정함에 감탄하게 된다.[5] 사실 이 이야기 자체가 단순히 파리스가 여자를 밝혀서 유부녀를 빼앗아 조국 망하게 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생을 살면서 하는 선택을 은유하는 내용이라는 알레고리적 해석이 우세하다. 권력에 대한 욕망과 명예에 대한 욕망, 그리고 미녀를 쟁취해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 중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고 거대한 욕망은 사랑에 대한 욕망이고, 결국 인간이 선택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조조, 동탁,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이 14세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상 부와 권력, 명예를 얻은 남자들 거의 대부분이 자신의 힘을 이용해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미녀를 쟁취하는 일이었고, 개중에는 호색이 지나쳐 패가망신까지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욕망은 사랑할 대상을 찾는 일이고, 권력과 명예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부차적인 '수단'에 불과한 요소라는 것.[6] 다른 영웅들이 참전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많은 영웅들이 헬레네에게 구혼을 하고 있을때 이것이 큰 분쟁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오디세우스는 헬레네의 양아버지로 부터 조언을 받아 자신이 헬레네의 사촌 페넬로페와 결혼한다는 조건으로 영웅들에게 헬레네의 선택에 선택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만약 누가 결혼을 방해하면 힘을 합쳐 싸운다는 맹세를 하자고 제안했다.[출처2-1-1] 헤로도토스, 역사, 1권 1~4장[8] 헤라는 바람의 신을 사주해 행해를 방해 하려 했으나, 트로이 전쟁때 같은 편에 있던 포세이돈이 이를 막아 세웠다.[9] 사연인즉 이렇다. 라오메돈이 트로이아에 성을 세우려고 하는데, 마침 제우스에게 대들어서 인간의 종살이를 하라는 벌을 받게 된 아폴론과 포세이돈에게 성을 세워달라고 부탁한다(신이 친히 지어준 덕에 훗날 트로이 전쟁에서도 이 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마저 속이는 사기꾼이었던 라오메돈은 막상 성이 완성되자 약속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고, 아폴론이 점잖게 따졌더니 되려 적반하장으로 그 혀와 팔을 자르기 전에 나가라며 내쫓았다. 이에 노한 아폴론과 포세이돈은 각각 전염병과 바다 괴물을 보내 트로이를 막장으로 만들었고, 견디다 못한 라오메돈이 신탁을 받으니 재앙을 거두려면 딸 헤시오네를 제물로 바치라 했다. 이에 라오메돈은 제우스가 내려준 트로이의 신마(과거 제우스가 트로이 왕자 가뉘메데를 납치한 보상으로 준 것)와 헤시오네 공주와의 결혼을 보상으로 괴물 퇴치 퀘스트를 걸었는데, 헤라클레스가 퀘스트를 수락해 괴물과 전염병을 한 번에 물리쳐 주었다. 물론 신조차 기만한 라오메돈이 헤라클레스 같은 인간 따위에게 보상을 제대로 줄 리 없었다. 더구나 문제의 신마는 이때는 이미 트로이에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애초에 있지도 않은 보상을 주겠다고 거짓 구인 광고를 올린 셈. 이에 격분한 헤라클레스는 우선 급한 일들을 마무리한 뒤 대군을 끌고 와서 트로이 성문을 몽둥이로 때려부숴 성을 점령해 버렸다. 이후 그는 헤시오네 공주를 자신의 부관으로 참전한 살라미스의 텔라몬에게 주고, 라오메돈과 그의 아들들을 몰살하려 했으나, 헤시오네가 비통해하며 울자 마음이 약해져서 "헤시오네가 쓴 베일을 받고 가족 한 사람의 목숨을 사도록 해 주겠다"라고 약속했다. 헤시오네(혹은 텔라몬)는 막내 왕자인 포다르케스를 골랐고 헤라클레스는 그를 제외한 다른 모든 왕자들과 라오메돈을 죽였다. 이후 막내 남동생과 단둘이 남은 헤시오네는 울면서 "내가 너를 샀다(프리아마이)"라고 속삭였는데, 이 일로 포다르케스는 프리아모스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훗날 장성하여 트로이를 재건한다. 한편, 텔라몬의 첩이 된 헤시오네는 대 아이아스의 이복동생 테우크로스를 낳는다. 훗날 프리아모스가 트로이의 방계 왕족인 안테노르와 안키세스를 사절로 파견해 헤시오네의 송환을 청했으나 거부당했고, 2차로 파리스아이네이아스를 파견했으나 중간에 파리스가 옆길로 새서 헬레네를 데려오는 사고를 치자 누님의 송환을 거부당한 것을 이유로 역으로 헬레네의 송환을 거부한다.[10] 다만 폴뤽세네는 아킬레우스에게 죽은 큰오빠의 복수를 위해 의도적으로 그를 유혹했다는 전승도 있다.[11] 그러나 카산드라에게 예언 능력을 주곤 그녀가 아폴론의 구애를 거부하자 아무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게 하는 저주를 걸었고, 이로 인해 그녀의 인생은 박살이 나고 만다.[12] 아스클레피오스의 아들.[13] 이 때문에 그리스 쪽에서는 아가멤논의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바치는 것으로 무마하려 했고, 아르테미스는 이피게네이아를 살려주고 타우리스에 있는 본인 신전의 사제로 삼았다. 그러나 딸이 살아 있는지 알 리 없었던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남편 아가멤논에게 평생 원한을 품었고, 남편이 전쟁 나간 동안 남편의 사촌인 아이기스토스와 불륜을 저질렀으며 아이기스토스와 쿠데타 계획을 짜고 전쟁이 끝난 직후에 돌아온 아가멤논을 암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한편 아이기스토스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음을 작은누나 엘렉트라에게 들은 오레스테스는 포키스의 왕 스트로피오스에게 시집 간 고모 아낙시비아에게 도망가서 몸을 숨겼고, 장성 후 아이기스토스와 어머니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존속살해의 죄를 씻고자 신탁을 받기를, 타우리스에 있는 아르테미스의 신전에 가서 아르테미스 신상을 가지고 와서 타지에 모시라는데, 그 타우리스 신전의 사제가 바로 이피게네이아였다. 타우리스에는 외국인을 잡아다가 제물로 바치는 악습이 있어서 오레스테스와 그의 사촌(아낙시비아의 아들) 필라데스는 제물이 될 위기에 처한다. 이때 "내 큰누나 이피게네이아도 내가 어렸을 때 아르테미스 여신의 제물이 되었다는데 나도 똑같이 되는구나."라고 절망하자 이피게네이아는 앞의 청년이 동생임을 알고 그들을 풀어주어 정체를 밝혔다. 세 사람은 신탁대로 신상을 챙겨 그 지역에 모셨고, 타우리스에서는 산 제물을 바치는 풍습이 사라졌다.[14] 마침 아테나도 오디세우스를 총애하던 여신이었다.[15] 트로이 전쟁 초기 아르테미스에게 바쳐진 사슴을 쏴 죽이고 대놓고 아르테미스 여신을 모독하는 말까지 뱉어버려 아르테미스의 역린을 대놓고 건드려버려 이 여파로 일가 자체가 박살나버린 아가멤논과 달리, 정작 오디세우스는 아가멤논과 함께 그리스군의 일원이었음에도 아르테미스를 신성모독하는 행위를 단 한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때 트로이아와 싸운 그리스군의 적장이긴 했어도 아르테미스는 오디세우스를 아가멤논처럼 크게 미워하지 않았다.[16] 사실 스카만드로스가 아무리 하급이라지만 신은 신이니 아킬레우스는 마땅히 그를 공경해야 했는데, 자기가 열받았다고 신을 우습게 알고 날뛴 것이니 스카만드로스는 정당하게 그를 벌할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헤라는 자기가 편드는 그리스군이 불리해지는 게 싫다는 이유로 고위 신의 위세를 부려 하위 신에게 갑질을 한 것이라, 사실 스카만드로스는 백 번 천 번 억울한 입장이지만 그냥 좀 높은 신도 아니고 무려 신들의 왕후의 명령을 받은 올림포스 최고위 신의 개입은 하위 신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17] 이때의 뉘앙스가 "엄마 덕분에 왕좌에 올랐으니 엄마 부탁 좀 들어줘야 하지 않겠니?" 정도였다.[18]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증손자라는 점이 한 몫 했을 것이다. 다만 프리아모스가 헥토르의 시체를 되찾으러 갈 때 제우스의 명으로 도와준 적은 있다.[19] 하데스나 포세이돈은 제외한 계산으로 올림포스에 사는 신들만 쳤을 때.[20] 그의 아버지가 헤파이스토스의 사제였기에 아들의 요절을 슬퍼할 것을 염려해서라고.[21] 남편 에로스가 아프로디테와 아레스의 자식이라는 전승을 따른다면 아레스는 프쉬케에게 시아버지가 된다.[22] 아킬레우스의 입장에서 더욱 가관이었던게 자신이 이미 크레시이스를 아가멤논한테 선물을 해주었다.[23] 그의 죽음에 대해선 혈투를 벌이다가 사망했거나 아폴론의 개입으로 인해 강제로 비무장 상태가 되서 대응할 틈을 못 타고 죽음을 맞이했단 전승이 각각 있다. 공교롭게도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한테 신들 중 트로이 측을 돕는 이들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충고를 했었는데, 파트로클로스는 전투에 몰입한 나머지 그 사실을 잊어버려서 죽음을 맞게 된 셈.[24] 이때 아폴론이 트로이 측의 중요 장수로 변장해 아킬레우스를 유인해 성 멀리 끌어냄으로서 트로이 병력들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줬단 이야기가 있다.[25] 이때 아킬레우스가 나타나자 헥토르가 트로이 측의 신인 아폴론에 의해 강제로 두려움에 빠져서 도망을 치려다가 곧장 그리스 측인 아테나가 자신의 동생인 데이포보스로 변신해서 자신한테 용기를 다시 붙돋아 줌으로서 아킬레우스와의 결투를 진행하게 됐단 전승이 있다.[26] 아킬레우스의 죽음에 관해선 전투 중에 파리스가 아폴론의 도움을 받았다거나 아폴론이 파리스로 위장해서 직접 죽였단 이야기, 혹은 데이포보스도 거들어 확인사살을 가했단 등 다양한 전승이 있다.[27] 결국 이걸로 포세이돈을 자극해 라오콘은 바다뱀에게 아들 둘과 함께 독기로 죽고 만다.[28] 말로(Marlowe)의 기록에 의하면 프리아모스는 네오프톨레모스에게 무릎을 꿇고 자비를 빌었다. 이에 네오프톨레모스는 웃으면서 프리아모스의 가슴을 짓밟으며 칼로 손목을 잘라버리고 마지막엔 배꼽에서부터 목까지 갈라죽였다.[29] 이 때문에 트로이 전쟁의 흑막은 제우스라고 보는 음모론적인 견해도 있다. 애초에 기간토마키아를 대비해 많은 영웅들을 양산해왔는데, 이 때문에 세상에 영웅들이 너무 많아지자 이들을 숙청하기 위해 트로이 전쟁을 벌인 게 아니냐는 것이다.[30] 실제 역사에서는 트로이 전쟁 이후 즈음 미케네 문명이 붕괴하고 그리스 전역에서 문명이 석기 시대 수준으로 퇴보하고 역사 기록과 문자조차 끊어지는 암흑시대를 맞이한다. 가뭄, 지진, 북방 도리스인, 바다 민족 등으로 인한 수백 년 간의 암흑시대 이후 철기 시대폴리스 도시국가들이 나타난다. 이 폴리스들이 철의 시대에 해당되며 트로이 전쟁의 신화도 이 암흑기 동안 구전되어 온 이야기다.[31] 아버지가 죽자마자 헬레네와 결혼하려 들었다.[32] 원전에서는 헤라클레스가 트로이를 공격하려고 왔더니 포세이돈과 아폴론이 제우스한테 반기를 들었던 과거로 인해 강제로 인간 세계에 어느 시간 잔류하게 된 자신들을 일꾼으로 부려먹곤 보답을 안준 당시 트로이의 왕 라오메돈의 행각에 분노한 연유로 먼저 트로이를 공격하고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이에 바로 포세이돈과 아폴론한테 합류하여 트로이를 무너뜨린다.[33] 아이러니하게도 할아버지고모할머니는 트로이 측을 지지했다.[34] 이는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트로이 항목 참조.[35] 투키디데스가 처음 제기했었다.[36] 오죽했으면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신 제우스가 앉는 의자가 온통 철로 만들어졌다는 전승까지 있을 정도였다. 또한 트로이 전쟁보다 약 1세기 전의 시대가 배경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전쟁을 묘사한 구약성경의 기록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한 왕인 옥의 보물 중 하나가 바로 철로 만들어진 침대였다는 내용이 언급된다. 그만큼 철은 고대 지중해에서 매우 귀중한 물건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37] 당시 히타이트는 최강대국 이집트의 자리를 위협하던 대국이었다.[38] 현대에서야 철은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철보다 더 중요한 석유우라늄 같은 자원이 있기에 이런 가치는 없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문명의 격을 가르는 오버 테크놀로지나 다름없는 게 철기였다. 청동기 시대에도 주 무기는 여전히 석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철기가 아니라 철광석을 내어주었으며 트로이에서는 이것을 제련할 줄 몰라 창고에 처박아뒀었고 그리스는 제련을 할 줄 알았기에 그걸 뺏으려고 쳐들어갔다 식으로 설명하면 그런 대로 말은 되지만, 그럼 왜 그리스는 그리스 국내의 철을 제련해 쓰지 않고 굳이 다른 나라에 쳐들어가 뺏어와야 했느냐는 문제점을 안게 된다.[39] 사실 목록에 나오는 배들의 수는 척 봐도 작위적이라서 동양권에서 천자국을 만승지국 제후국을 천승지국이라 하듯이 예우 내지 전투력 측정기의 역할로 보인다. 호메로스 시대 이미 후기 청동기 그리스 문명은 철저히 파괴된 상태인데도 이 부분은 오히려 후대의 영향이나 시인 자신의 사견이 없는 듯 현대에 발굴된 규모와 비슷하다. 뮈케나이, 아르고스, 퓔로스가 약 100여 척, 나머지 군소 도시국가는 일관적으로 40척인 식이다. 예외로 전화로 파괴된 테바이가 보이오티아군을 다 합쳐도 50척에 머물고 케팔레니아, 쉬메, 살라미스처럼 작은 섬은 십여 척에 머문다.[40] 트로이 인구의 3할이 동원되었다는 말이 있으나 청동기 시대보다 훨씬 후대에도 전체 인구의 3할을 동원하는 게 불가능했는데 그 시대에 전체 인구의 3할은 너무 지나치게 많다. 상식적으로 인구의 3할이나 군대로 돌리면 노동력 부족으로 농사를 짓는 것도 힘들 것이다.[41] 다만 이 부분은 10년 공성전이 아니라 9년 동안 여기저기 들렀다가 1년 동안 싸웠다고 본다면야...[42] 앞서 주장처럼 트로이가 지역 통상에 요긴한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트로이가 몇 번 파괴된 뒤에 버려지지 않고 연이어 재건되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43] 그나마 11세기 무렵부터 아나톨리아에 진입한 튀르크족의 주된 정착지는 주로 동부 내륙이었고, 트로이가 위치한 서부 해안 지대는 동로마 제국이 수백 년간 더 지켜냈다. 즉, 트로이가 위치한 지역 자체가 튀르크화된 것은 트로이 전쟁(기원전 1190년 전후로 추정)으로부터 대략 2500년 후의 일이다.[44] 멕시코의 사례이긴 하지만, 아즈텍 제국틀락스칼텍이 같은 나와틀계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별개의 국가이면서 적대 관계이기까지 했던 사례가 있다.[45] Marios Philippides, 『The Siege and the Fall of Constantinople in 1453: Historiography, Topography, and Military Stud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