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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3:43:25

히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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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𒌷𒄩𒀜𒌅𒊭[1]
Ḫattuša
파일:main-qimg-cc9d1790752e16397d3107a8bbfa9e03.gif
히타이트의 최대 판도
BC 1600년경~BC 1178년
위치 서아시아(아나톨리아)
수도 하투샤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입헌군주제[2][3]
국가원수
언어 히타이트어, 루위어
종교 히타이트 종교[4]
성립 이전 하티족
멸망 이후 히타이트 소왕국들
리디아
프리기아
언어별 명칭
히타이트어 𒄩𒋾 (Hati)
𒌷𒄩𒀜𒌅𒊭 (Ḫattuša)
튀르키예어 Hititler
영어 Hittites

1. 개요2. 발음3. 발굴4. 언어5. 정치6. 법률
6.1. 당시 주변의 법률 형태6.2. 히타이트 법률의 경우
6.2.1. 배상 중심6.2.2. 비자유민에 대한 배려
7. 문화
7.1. 종교7.2. 식문화7.3. 철기
7.3.1. 한계
8. 역사
8.1. 기원전 1178년경, 바다 민족의 침공8.2. 신히타이트(카르케미쉬)8.3. 기원전 717년, 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
9. 민족
9.1. 튀르키예의 관심
10. 역대 국왕11. 기타12. 대중 문화에서13.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기원전 1600년경부터 기원전 1178년까지 고대 아나톨리아(현재의 튀르키예) 반도에 존재했던 국가이다.

이집트바빌로니아 못지 않게 인류 문명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고대 국가였지만, 자체적으로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어 쐐기 문자이집트 상형문자가 해독되기 이전에는 미지의 국가였다. 물론 아주 미지의 국가인 것은 아니었고 《성경》에도 실리기는 했지만 간략하게 언급되는 수준이었다.[5]

2. 발음

성경》에 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고, 이집트의 조각에 ht라는 표기로 등장했다. 고전 이집트어에서는 모음을 거의 표기하지 않았으므로 h와 t라는 자음만 남은 것이다. 이집트학 학자들은 이를 헤테(Hete)라고 읽었지만, 나중에 밝혀진 올바른 이름은 하티(Hati)였다.[6] 문제는 위에 언급한 사례 외에 그들과 관련된 자료가 없어 그 실체가 수수께끼에 싸여 있었지만, 1870년 시리아하마에서 히타이트인들의 글자가 새겨진 돌들이 발견되어 연구가 시작되었다.

3. 발굴

1907년 아나톨리아 반도의 보아즈칼레(Boğazkale)[7] 마을 근처에서 수도 하투샤(Ḫattuša)가 발굴되었다. 히타이트라는 이름은 '하투샤인'을 의미하는 '하티'라는 말에서 나왔을 정도였으므로 이 일대에서 유물이 방대하게 발굴되어 히타이트의 실체가 상당 부분 드러났다. 심지어 요리책까지 발굴되어서 히타이트 사람들이 뭘 먹고 살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발굴된 유물들이 대부분 도서관에 있는 '문서'였고, 값비싼 보석이나 장신구 등은 일절 발굴되지 않았다. 국가가 멸망할 때 도시를 전소하고 값나가는 물건은 죄다 빼버렸다고 추정한다.[8]

발굴 결과 트로이가 바로 히타이트 문명권의 도시였던 윌루샤(𒌷𒃾𒇻𒊭, Wiluša)[9]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트로이 문서 참조.

4. 언어

히타이트 제국의 강역이 넓은 만큼 여러 언어를 사용했다. 수도 하투샤에서는 히타이트어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서남부에서는 루위어를 주로 썼다.[10][11] 동남부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영향으로 아카드어도 썼다.[12] 한편 선주민들의 언어인 하티어도 기원전 14세기까지는 어느 정도 쓰였는데, 히타이트 제국의 힘이 점차 강해지면서 후기에는 제국 전역에서 히타이트어가 많이 쓰였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히타이트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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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치

히타이트 문명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은 그들의 정치체계와 법률이다. 히타이트의 정치체계는 타바르나(왕), 타와난나(제사장+왕비+대비), 판쿠(귀족회의)라는 세 주체에 권력이 분산되어 상호 견제하게 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 타바르나의 여성형인 타와난나는 대왕비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지만, 왕비와 타와난나는 별개의 지위였으며 왕의 정비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타와난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타와난나는 여제사장의 지위도 함께 맡았으며, 왕비일 때는 왕의 배우자로서, 왕위가 계승되고 나면 왕의 모후로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왕과는 별개의 권한을 가진 여성판 최고 직위가 왕의 부인이나 어머니에게 별도로 계승되는 제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텔레피누의 칙령>으로 판쿠(귀족회의)는 왕위와 타와난나의 계승을 비준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왕이 지명한 후계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다음 왕이 되는 것은 아니었고 반드시 판쿠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이는 왕위를 둘러싼 지나친 권력다툼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이었으며 왕권을 제한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쿠와 왕 사이에 특별한 권력다툼이 일어난 흔적은 없다.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언어를 쓰는 히타이트는 작은 도시국가들과 봉건계약을 맺고 통치했다. 이를 중세 유럽봉건제와 비교하면서, 최초의 봉건제가 시행된 국가로 보는 견해도 있다. 히타이트의 봉신국가들에게는 여러 의무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히타이트의 편에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 히타이트가 봉건계약을 맺은 작은 나라들을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가 있는데, 기원전 13세기 히타이트와 아시리아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지던 때, 당시의 히타이트 왕인 투드할리야 4세는 소국인 아무르에게 대(對)아시리아 경제제재에 앞장서라는 서한을 보내 적국인 아시리아에 무역 봉쇄로 맞섰다. 물론 히타이트가 모든 영토를 봉건제로 통치한 것은 아니었다. 카르케미쉬알레포는 직접 통치하여 시리아 지역의 행정 중심도시로 삼았다.

6. 법률

히타이트는 살인, 혼인, 절도 등 200가지의 문제를 다루는 법전을 원칙으로 삼아 사회를 유지해 나갔다. 이 법전[13]에서는 상황의 변화에 따른 개정 또는 개혁의 흔적이 엿보이며, 그 지역의 관습과도 조화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히타이트 법전》은 복수에는 반대하면서 그 대신 배상으로 복수를 해결하고 있다. 그러나 강간이나 동물과의 성교(수간) 등에 대한 범죄는 중벌로 다스렸다. 혼인은 신랑이 신부 아버지에게 신부몸값을 지불하고, 신부 아버지가 딸에게 혼인지참금을 주어 시집보냄으로써 성립되었다. 이런 점은 주변 세계의 혼인 제도와 유사하다. 또한 자녀 없이 남편이 죽은 여자가 남편의 형제와 혼인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수혼법과 유사하다.
-《고대 근동 법전과 구약성경의 법》Ausgewählte Gesetze aus Alten Orient und Alten Testament, 채홍식 역주

기원전 1550년경 텔리피누 왕이 <텔리피누의 칙령>을 남겨 세계 최초로 왕위계승원칙을 성문화했다.
왕은 왕의 첫째 아들 한 명만이 할 수 있다. 만일 첫째 아들이 없으면, 둘째 아들이 왕이 된다. 만일 왕이 아들이 없으면, 첫째 딸과 정식으로 혼인한 사람이 왕이 된다. 훗날 나를 이어 왕이 되는 자는, 자신의 형제들과 자신의 아들들과 자신의 사위들과 자신의 씨족들과 자신의 군대들을 단결시켜야 한다...
더욱이 왕이 되려는 자가 형제와 누이를 거슬러 악을 꾀하면 판쿠(panku)[14]가 판결할 것이다.
- TUAT, Bd. I, Lief. 5, pp. 468-469

6.1. 당시 주변의 법률 형태

히타이트에서 시행된 칙령이 200개 이상 발견되어 이들이 비교적 도시적이고 세련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히타이트 이외의 오리엔트 사회에서의 법률은 바빌론 제1왕조(고바빌로니아)때의 《함무라비 법전》으로 대표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원칙'에 기반을 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복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수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즉 눈에는 눈 하나만을 받아낼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 없으며, 재보복도 금지하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진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6.2. 히타이트 법률의 경우

6.2.1. 배상 중심

그런데 히타이트의 법률은 이보다 훨씬 근대에 가까웠었다. 우선 법률조항 자체도 이전이나 동시대에 존재했던 다른 문명과는 달리 매우 너그러운 편이었으며, 민법적인 문제를 형법적인 문제와 구별하여 민법적인 문제에는 체벌보다 배상을 규정하고, 형법적인 문제에서 고의와 과실을 구별하는 등의 개념에 도달했다.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는 8가지로 한정하고 아시리아 문명권의 법률에서 흔히 보이는 가죽 벗기기, 거세, 말뚝에 꿰찌르기 같은 혹형도 존재하지 않았다.[15] 나중에는 아예 사형제도 자체를 폐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전에 사형에 처하는 범죄에 대해서 사형시키지 않도록 법이 바뀌었다는 언급을 바탕으로 하며, 정말로 사형제도 자체가 폐지되었다는 분명한 근거는 없다.
[제188조] 만일 어떤 남자가 양과 [나쁜 짓을] 했을 경우, 그것은 중죄이므로 그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를 왕의 문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 왕은 그를 죽이거나 살려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왕에게 나아갈 수는 없다.

(중략)

[제197조] 만일 어떤 남자가 여자를 산에서 강제로 성추행했을 경우, 그것은 오직 남자의 잘못이므로 그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가 집에서 여자를 성추행했을 경우, (그것은) 여자의 잘못(이므로) 그 여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 만일 남(편)이 (둘을) 잡아 그들을 죽게 했을 경우, 그에게는 잘못이 없다.
1906~1912년 Hugo Winckler가 하투샤에서 발굴한 법전.[16]

6.2.2. 비자유민에 대한 배려

히타이트 법률에서 또 다른 독특한 점은 비자유민에 대한 것이었다. 대체로 자유민은 상류층, 비자유민은 하류층으로 생각했으며 같은 범죄에 대해서도 비자유민에 대한 범죄는 배상액이 절반이었다. 다시 말해 자유민이 농노 같은 비자유민에게 범죄를 가했을 경우에 그에 대한 처벌/배상액이 자유민에 대한 그것에 비해 약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비자유민이 내야 할 배상액 역시 절반이었다는 것이다. 권리가 절반이면 의무도 절반인 셈이었다. 상류층은 당연히 더 많은 권리와 더 적은 의무가 주어졌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실제로 고바빌로니아 시대의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노예의 범죄는 더 심하게 처벌하는 동시에 노예에 대한 범죄는 가볍게 처벌했다. 또한 히타이트 여성의 지위도 다른 국가에 비해 비교적 높게 인정되어, 여성에게도 이혼할 권리가 있었다. 이때 자식들은 남편에게 귀속되었지만 아내는 자신이 데리고 갈 자식 한 명을 선택할 수 있었다.

7. 문화

7.1. 종교

종교적인 면에서도 특이했다. 다른 민족을 정복하면 그들에게 히타이트의 종교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신을 받아들여 수도 하투샤에서 숭배했다. 이때 원래의 기도문 등을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에 피정복민의 언어 역시 하투샤에 도입되었다. 그래서 하투샤에서만 8개의 언어가 확인되었다. 예술이나 철학 쪽의 독자적인 발전은 크게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며, 바빌로니아인들이나 다른 주변 문명의 것을 차용했다. 특히 후르리 신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히타이트인들이 가장 높이 숭배했던 신은 천둥의 신이었던 테슈브(Teshub)였다. 이 테슈브의 이름은 히타이트인들과 같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에 속하는 켈트족한테로 전해져서 갈리아인과 브리튼인아일랜드인들이 숭배했던 천둥의 신 타라니스(Taranis)가 되었다.[17]

노골적으로 신에게 요구하는 기복신앙적인 면모도 있었다. 히타이트의 점토판 중에는
“이대로 우리가 망하면 당신도 섬기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나. 좀 도와달라.”
라고 하는 기도문이 남아 있다.

또한 히타이트인들은 그들의 왕이 죽으면 그 영혼이 신들의 세계에 들어가서 새로운 신이 된다고 믿었고, 그래서 죽은 왕들을 신으로 숭배했다. 다만 히타이트인들의 종교관에서 죽은 왕들의 영혼은 테슈브 같은 자연의 신들보다 그 위치가 다소 낮은 2급 신들로 여겨졌다.

7.2. 식문화

발굴된 히타이트의 요리책을 보면 우유을 첨가한 유제품 위주의 식사를 했다고 한다. 이들이 살던 아나톨리아 지역은 방목에 적합한 기후는 아니었지만, 히타이트의 영향권 안에 들어온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는 소와 양이 많이 났다.

7.3. 철기

히타이트인들이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실용적인 철기 사용자라는 추측이 있다.[18] 당시 메소포타미아 및 이집트의 국가들은 청동기를 사용했는데, 이 설에 따르면 당대에 오직 히타이트만이 용광로를 이용해 철을 주조할 수 있었고, 이 철기를 바탕으로 강력한 무기를 가진 히타이트군이 메소포타미아를 정벌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집트 등에서도 극히 소량이지만 철기가 사용된 흔적이 있으나, 히타이트 이전의 철기는 운철[19]을 이용해 만든 것으로 철광석을 캐서 제련하는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20]

용광로에서 철을 녹일 정도로 온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산소를 공급하는 도구인 풀무가 필요한데 당시 히타이트에는 풀무가 없었고, 히타이트 문명은 풀무의 역할을 바람으로 대체했다는 가설이 우리나라에서 정설처럼 알려져있다. 특정한 시기에 하투샤 부근의 황야에 맹렬한 폭풍이 불어오는데, 히타이트인은 바로 이 시기에 용광로를 황야에 설치하고, 맹렬한 황야의 바람을 풀무 대용으로 써서 용광로가 철을 녹일 수 있는 높은 온도를 가까스로 유지할 수 있었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은 오직 한국에서만 정설처럼 퍼져있는데 당장 영문 위키피디아 히타이트 관련 문서를 봐도 비슷한 언급은 없다. 비르기트 브란다우의 저서에서 확대된 내용으로 보이고, 저자 또한 가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정설처럼 주장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와 관련해서 히타이트에서 철기를 선사하는 히타이트의 신(神)들을 곧 바람과 동일시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은 폭풍의 신을 의미하는 쐐기문자 𒀭𒅎에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𒅎는 바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폭풍, 비 등도 의미하는 단어였고, 무엇보다 신을 표현하는 𒀭가 붙으면 기상의 신을 의미했다. 이것은 비단 히타이트에서만 사용하는 표현이 아니었고, 아다드의 예처럼 기상의 신을 나타내는 흔한 표현이었다. 고대 다신교에서 자연과 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해당 표현을 철기와 관련지어 히타이트 고유의 특성처럼 묘사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다.

결국 풀무 없이 어떻게 철을 제련했는지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위의 바람 가설도 가능성이 있지만, 바빌로니아처럼 지면에 드러난 역청(타르)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21] 아니면 풀무만 없었다 뿐이지 사람이 직접 부채질을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과급기의 역할을 대체했을 수도 있다.

7.3.1. 한계

파일:터키 카르케미쉬.jpg
파일:터키 신히타이트.jpg
히타이트 보병 히타이트 전차병

다른 연구에 의하면 당시 히타이트의 철기 제작 수준은 동시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가 사용하기 시작했던 철기의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철제 무기 역시 상용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22] 히타이트의 유물 중에 청동기보다 우수한 품질의 철기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히타이트의 제철 수준은 그동안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청동기 문화는 수천 년을 발달해 극한의 정점을 찍었는데, 그 청동기의 품질을 고작 발견된 지 100여 년밖에 안 된 철기로 능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23].

히타이트 철기 연구와 관련된 학자들의 주장이 잘 정리된 글을 참고해 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학자마다 의견이 다 다르다. "운철 말고는 못썼다"는 주장, "해면철[24] 정도만 간신히 만들 수 있었다"는 주장, "주철연철은 만들 수 있었지만 강철은 쓰지 못했다"는 주장, "제한적이지만 히타이트인들도 강철을 썼다"는 주장까지 천차만별이다. 이렇게 온갖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히타이트의 거의 모든 철기 유물이 슬래그나 파편 정도밖에 안남은데다,[25] 그나마도 운철로 만든게 아니냐는 의심을 끊임없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8. 역사

파일:Lion_Gate,_Hattusa_01.jpg
수도 하투샤의 성문인 사자의 문

선주민인 하티인들까지 계산하면 기원전 2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사람들이 보통 히타이트라고 부르는 종족이나 국가는 히타이트 고왕국이라고 불리는 기원전 17세기부터 시작된다. 이후 기원전 1170년대 후반 바다 민족에게 파괴된 이후, 잔여 세력이 기원전 717년까지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부 지역에 존재했다.

원래부터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었던 민족은 아니었으며, 어딘가에서 이동해 와 아나톨리아의 동부에서부터 정복해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정확한 발상지는 알 수 없다. 히타이트어인도유럽어족에 속하기 때문에 인도유럽어족의 발상지를 흑해 북부로 보는 <초원 유목민 모델>에서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발칸 반도를 통과해서 이동했거나, 시계 방향으로 코카서스를 거쳐 아나톨리아 반도로 이동해 왔을 것으로 생각하며, 아나톨리아를 발상지로 보는 <아나톨리아 농경민 모델>에서는 원래부터 아나톨리아 지방에 살았던 사람으로 생각한다.

<초원 유목민 모델>을 중심으로 서술하자면 동유럽의 신석기 문화인 Old Europe이 쇠퇴하는 와중에 다뉴브 강 하류를 지나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입한 사람들이 히타이트인의 선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기원전 3000년대 말~기원전 2000년대 초) 다만, 최근 학계의 열렬한 학설인 <쿠르간 가설>[26]에 근거하여 얌나야 문화 관련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골과 히타이트인 유골의 DNA를 조사해본 결과, 히타이트인들은 이들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확히는 서로 친연관계인 것은 맞지만, 북부에서 남부로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진 정황이 DNA에서 나타나지 않아, 어느 한쪽을 다른 한쪽의 조상이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재는 히타이트인을 포함한 아나톨리아 반도의 원주민들은 원시 인도유럽인의 후손이 아니라, 자매 민족이라는 가설도 나오고 있다.

선주민인 하티인이나 후르리인을 밀어내거나 동화시켜 아나톨리아 반도를 점거했다. '히타이트'라는 이름도 선주민인 하티인에서 따온 것이었다. 도장용 등 특수한 곳에 사용하는 상형문자가 있었고, 그 외에는 쐐기 문자를 사용했다.

하투실리 1세가 히타이트계 소왕국들을 통합했고, 그 다음 왕인 무르실리 1세가 초장거리 원정으로 셈계 아모리인이 세운 바빌론 제1왕조(고바빌로니아)의 수도였던 바빌론을 함락시키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당시의 히타이트의 국력으로는 무리한 것이었고, 무르실리 1세는 군사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돌아갔다가 살해당했다. 이후 히타이트는 한동안 침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히타이트 고왕국 말기에 재위한 텔리피누 왕은 기록된 세계 최초의 왕위계승법칙[27]을 만들어 침체기 중 그나마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업적을 남겼으며, 텔리피누의 치세를 마지막으로 히타이트 고왕국은 막을 내렸다.

기원전 15세기에 투드할리야 1세는 주변 민족을 정복하고 다시금 아나톨리아 반도를 통일했다. 이 시기를 히타이트 중왕국이라고 부른다. 당시 북쪽으로 흑해 인근에 살던 카스카 부족과의 전투가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4세기인 수필룰리우마 1세의 시대에 히타이트는 아나톨리아 반도를 안정시킨 후 아시리아 및 바빌론 제3왕조(카시트 왕조)와 동맹을 맺었고, 이 동맹을 위해 수필룰리우마 1세는 중바빌로니아의 왕녀와 결혼했다. 이 동맹의 효과는 확실하여, 당시 중동 지역의 강대국이었던 미탄니 왕국을 정복하면서 일약 오리엔트의 최강자로 등극했다.

당시 이집트 제18왕조의 사정을 살펴보면 아케나톤으로 개명한 아멘호테프 4세가 급진적인 종교개혁을 행했다가 어린 투탕카멘이 파라오에 오르면서 그 종교개혁이 취소되었다. 또 투탕카멘도 어린 나이에 승하하고 80대의 노사제인 아이가 파라오에 올랐다가 1년 만에 승하하는 등의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대외적인 활동에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수필룰리우마 1세는 이집트 신왕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고 있었는데, 아들인 제난자가 투탕카멘의 누이이자 왕비인 안케세나멘의 요청으로 파라오가 되기 위해 이집트로 가는 도중 국경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터지면서 이집트와 본격적으로 적대관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후 히타이트는 이집트령 시리아에 대대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이는 다시 말해, 히타이트가 당시 지중해-중동 세계의 대표적인 강대국이었던 이집트에 맞먹는 수준의 국력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시리아 지역에는 전염병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군은 이에 대응하지 않았으며, 히타이트 역시 전염병으로 수필룰리우마 1세와 그 뒤를 이른 아르누완다 2세 등이 잇달아 승하하면서 전쟁은 흐지부지 끝이 나고 말았다. 이 전염병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이후 20년 이상 히타이트를 괴롭혔음은 확실하다.

아르누완다 2세의 승하 이후, 그의 형제들이 모두 태수의 자리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히타이트의 법령상 왕위를 이을 수 없어서 아직 어린 아들인 무르실리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히타이트의 속국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고, 이집트군도 히타이트에 위협을 가해 왔으며, 각지의 태수 자리에 있었던 무르실리 2세의 형들이 전염병으로 잇달아 사망하는 등 일시적으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무르실리 2세가 이 혼란을 수습하고 전 영역을 안정시키면서 히타이트는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히타이트는 시리아팔레스타인 지방 및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진출해 있었다.

무르실리 2세의 후계자인 무와탈리 2세는 기원전 1274년에 이집트 제19왕조의 파라오 람세스 2세카데시 전투를 벌였다. 이집트의 조각에는 이집트군의 승리로 기록되어 있지만, 히타이트 측의 기록에는 히타이트의 승리라고 기록되었다. 양국 다 자국의 승리로 기록했는데 오늘날에는 대체로 히타이트 측의 우세로 보는 역사학자들이 많다. 실제 전투의 경과를 보면 이집트의 기록을 따르더라도 전투 초반에 이집트군의 절반은 궤멸당했고, 나머지 절반은 전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결국 마지막까지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여기까지 보면 히타이트의 승리가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 이집트 측의 설명에 따르면 그 상태에서 람세스 2세가 갑자기 신으로 변신해서 혼자 히타이트군을 전멸시켰다고 나온다. 실제 전투의 경과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카데시 전투의 결과로 히타이트는 우피(현재의 다마스쿠스 부근) 등의 이집트측 주요 거점들을 점령했고, 이집트의 동맹국이었던 시리아 지역의 아무루 왕국이 히타이트에 종속되었으며, 아시아에서 이집트의 세력은 가나안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그 후에도 이집트와 긴 전쟁이 계속되기는 했지만 카데시 전투 이후 대규모 충돌은 없었으며, 소규모의 지역적인 다툼만이 몇 번 있었을 뿐이었다. 이후 하투실리 3세의 딸이 람세스 2세와 결혼하면서 두 나라는 공식적으로 우호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하투실리 3세의 시대를 기점으로 히타이트는 점차 약화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기후 변동으로 오리엔트가 점차 건조해져 현재의 기후로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도인 하투샤 근처에 흐르는 크즐으르막(Kızılırmak) 강[28] 정도의 수자원으로는 건조화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히타이트가 쇠퇴하면서 나일 강이라는 대하천을 끼고 있는 이집트와 역시 대하천인 유프라테스 강을 보유한 아시리아 등이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였지만, 이런 나라들도 점차 망조가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8.1. 기원전 1178년경, 바다 민족의 침공

결국 청동기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바다 민족의 대규모 이동이 유럽 대륙에서 시작되면서 히타이트는 미케네 및 윌루샤(트로이의 본래 이름) 등과 함께 멸망했다. 다만 수도 하투샤에 도시 전체를 불태운 화재의 흔적은 있어도, 대규모 외침의 흔적은 없기 때문에 몇몇 바다 민족들의 침략으로 망했다기보다는 내전으로 이미 멸망한 상태였던 걸로 추정된다. 마지막 왕인 수필룰리우마 2세의 운명 역시 내전 중 기록이 끊긴다. 물론 유럽 대륙의 대규모 민족 이동이 내전으로 이미 멸망한 히타이트만 때린 것은 아니라서 아시리아와 이집트도 극도로 위축된 시기를 보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히타이트가 멸망한 이후, 하투샤 부근에서 히타이트인들이 나타나기 이전 시대의 도기 양식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실상 청동기 문명의 붕괴 이후 철기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까지 수세기 동안 일시적으로 석기 시대 수준의 기술만 남은 암흑시대가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8.2. 신히타이트(카르케미쉬)

파일:신히타이트 터키.gif
신히타이트 국가들

이후 히타이트는 유프라테스 강 어귀의 카르케미쉬에서 부활했는데, 이 시기를 신히타이트라고 부른다. 다만 이전과 같은 제국이 아닌 몇몇 도시국가들로 잔존했을 뿐이며, 군사적인 정복보다는 상업 등에 주력한 것 같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다윗의 부하 우리야가 헷(하티) 사람이라고 나오는 등 하티 용병에 대한 기사들이 《구약성서》에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카르카므쉬, 알레포, 말라티아 등의 문서 참고.

8.3. 기원전 717년, 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

그러다가 기원전 717년 잔존 세력마저도 당시 오리엔트 대부분의 지역을 평정했던 아시리아에 의해 정복되어 완전히 멸망했다.

9. 민족

히타이트인들은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한 민족이었다. 따라서 아시아에서 살다가 중세에 넘어온 지금의 튀르키예인과 그다지 상관없는 역사처럼 보이지만, 튀르키예인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11세기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튀르크의 지배를 받으면서 문화적으로 튀르크화된 아나톨리아인들이기에 그들은 혈통적으로 따지면 히타이트의 직계 후손으로 볼 수 있다.[29] 튀르키예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에 존재했던 민족의 역사라고 해서 꽤나 큰 관심[30]을 보인다. 미국유럽 고고학자들과 함께 꽤 열정적으로 히타이트 유적 발굴 및 조사를 하고, 미국과 합작으로 히타이트 고대사를 다뤘던 영화나 다큐멘터리까지도 만들었다.

9.1. 튀르키예의 관심


튀르키예가 고대 히타이트의 역사에 관심을 많이 두는 이유는 현재의 튀르키예인이 실제 혈통을 따지면 튀르크족 그 자체라기보다는 11세기 이후 튀르크화한 인도유럽어족 아나톨리아 선주민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전자 조사 결과 그리스인과 튀르키예인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한다.[31] 애당초 튀르키예인과 그리스인의 구분은 종교적, 언어적인 구분이지 혈통적인 구분이라고 보기 어렵다. 따지고 보면 현대 그리스인들조차 그들이 조상으로 생각하는 고대 그리스인들과 유전적으로 꼭 같은 혈통이라 보기 어려운데 오랜 역사와 교류 및 전쟁으로 인해 민족과 인종, 문화가 뒤섞이는 인류사에서 이런 경우는 흔하다. 독일의 게르만 민족이나 이스라엘의 유대인 그리고 중국의 한족도 순수하게 혈통적으로 그들의 옛 조상과 같은 단일 민족은 아니며, 현대의 민족 정체성은 대체로 민족의식, 역사의식, 언어 그리고 국민의식과 많은 경우 종교 등과 같은 것이 중요한 요소이다.

튀르키예는 현재 자국의 영토에 있었던 나라인 히타이트를 "땅의 역사"라고 부르며 관심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현재 영토와는 거리가 멀지만 민족적으로 뿌리가 되기도 하는 돌궐(괵튀르크)의 역사도 "사람의 역사"라고 부르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10. 역대 국왕

𒌷𒄩𒀜𒌅𒊭
히타이트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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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바 피타나 피유스티 아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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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드할리야 푸사르마
고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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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바르나 1세 하투실리 1세 무르실리 1세 한틸리 1세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지단타 1세 암무나 후지야 1세 텔레피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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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제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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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제14대
아르누완다 2세 수필룰리우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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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기타

12. 대중 문화에서

12.1. 영화

12.1.1. <트로이>

네스토르가 언급한다.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 성벽의 전투에서 헥토르가 이끄는 트로이 군대에게 대패하는데, 이대로 트로이에게 쉽게 패배하고 후퇴한다면 그리스는 모든 영향력을 잃게 되고, 히타이트의 공격을 받게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12.1.2.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

초반부에 모세와 람세스가 이집트 군대를 이끌고 이들과 전투를 벌인다. 나름 카데시 전투의 일화에 충실한 면도 있지만 병사들이 바지를 입고 있는 등 복장 고증이 엉망이다.

12.2. 만화 및 애니메이션

12.2.1.하늘은 붉은 강가

만화는 상술된 최전성기의 히타이트를 배경으로 한다. 참고로 수도 하투샤 부근을 흐르는 크즐으르막(Kızılırmak) 강의 이름이 바로 '붉은 냇물'이라는 뜻이다.

12.2.2.왕가의 문장

만화에서는 이집트의 강력한 라이벌 나라로 나온다. 이즈밀 왕자라는 강력한 후계자가 있기에 주인공 멤피스에게 골칫거리이다.

12.2.3.카산드라

웹툰의 번외편인 《아베나》에서 펜테실레이아가 언급한다. 전혀 등장이 없고 언급조차 말미에 딱 두 번 나오는데 사실상 전체 스토리를 관통하는 계기가 된 국가이다. 어떤 검이나 창이든 부술 수 있는 신기한 무기로 싸우며 아마존은 조공을 바치면서도 이 무기를 탐내고 있다. 데메우스가 이 곳 출신으로 밝혀졌으며,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왕이였던 큰 형이 급사해 본인이 왕이 되어 카산드라를 도와줘 트로이를 재건 시킨다.

12.3. 게임

12.3.1. <도미네이션즈>

히타이트족 전사가 용병으로 등장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히타이트족 전사(도미네이션즈)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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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2.3.2. <문명 시리즈>

12.3.3.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선택 가능한 문명으로 등장하며, 철기의 이미지 때문인지 궁사 공격력 +1과 투석기 체력 2배[32]라는 무지막지한 보너스가 있다.

12.3.4. <Fate 시리즈>

맞수인 람세스 2세가 무지막지하게 강해지며 덩달아 파워업한다. 람세스 2세의 보구 라메세움 텐티리스 중 주신전의 외벽은 히타이트의 신철로 덮여 있는데, 범상한 대군보구는 상처 없이 튕겨내는 강도를 자랑한다.

12.3.5. <토탈 워: 파라오>

이집트, 가나안과 함께 플레이어블 팩션 중 하나로 등장한다. 기본 팩션으로 수필룰리우마 2세, 쿠룬타가 있다. 국가가 멸망한 시점이라서인지 잔뜩 분열된 콩가루 집안이다. 왕조 캠페인에선 위치상 바다 민족에게 크게 공격받진 않으나 히타이트 간 내전이 심각하며 북쪽에서 카스카[33]프리기아족들과 극한 대립을 하고 있다.

12.4. 기타

13. 둘러보기

아나톨리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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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당 문자가 표기되지 않고 깨지게 보인다면, 사진을 보자. 파일:2019/07/30 Uploaded Hittite.jpg 로 표기된다. 쐐기 문자(Cuneiform) 표기.[2] Drapkin, Israel (1989).《Crime and Punishment in the Ancient World》. p. 29. ISBN 0-669-01279-3.[3] 다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근현대의 입헌군주제와는 조금 달랐다.[4] 주신: 테슈브 또는 타르훈나, 헤바트 또는 아린나[5] 유대인이 국가를 구성하면서 체계적인 기록을 남길 때는 이미 히타이트의 잔존 세력들이 구성한 소국들만 남아서 존재감이 없었던지라 구체적으로 알기에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6] 하티는 히타이트 선주민들의 명칭이기도 하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7] 이전의 지명은 보아즈쾨이(Boğazköy).[8] 파피루스가 있었고, 이집트가 수출하기도 했지만 소량이라 당시의 책은 대부분 점토판이었는데, 점토판은 불에 타면 잘 구워져서 더 보존이 잘 되었다.[9] 그리스어로는 일리온으로 트로이의 다른 이름이다.[10] 루위어와 히타이트어는 둘다 인도유럽어족 아나톨리아어파에 속하는 친척 관계였으며, 서로 어휘를 주고받는 등 상호 영향 관계에 있었다.[11] 참고로 트로이에서 쓰던 언어도 루위어로 추측된다.[12] 다만 이와는 별개로 히타이트에서 발굴한 점토판에는 아카드어 기록물이 많이 나온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주변에서는 아카드어가 링구아 프랑카(국제 공용어) 취급이어서, 아카드어를 안쓰는 국가간에도 조약 따위를 맺을 때 아카드어로 점토판에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 아카드어로 쓴 조약문 따위의 점토판이 나올 정도였다.[13] 발췌자 주석: 1906~1912년 Hugo Winckler가 하투샤에서 발굴한 법전.[14] '총회'라는 뜻이며, 귀족들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15] 참고로 이런 혹형은 법치의 제왕이라는 로마 제국에도 존재했다.[16] 번역은 채홍식 역주의 같은 책에서 발췌.[17] 출처: 《유럽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79쪽[18] 더 정확히는 원시적인 용광로를 이용해 철광석을 녹여 철을 주조한 것이다. 철기 자체는 후술되듯 다른 문명에서도 운철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쓰인 사례가 있었지만 파라오의 예식용 단검과 같은 단순한 장식품 용도로만 활용되었을 뿐이었다.[19] 철 성분이 많은 운석.[20] 쉽게 말해 이 시기 이집트의 철기는 파라오에게 바치는 단검 정도가 철기 활용의 한계였다. 그것도 녹이고 제련해서 만들어낸 주조가 아닌 운석 덩어리를 갈고 갈아서 단검 형태로 만든 것이 고작이었다.[21] 실제로 바빌로니아의 도기 제작에 이용되었는데, 이것도 철 제련 못지않게 높은 열이 필요하다.[22] 출처1《From Bronze to Iron》 56~58p. Jane C. Waldbaum[23]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예를 들자면 통일 제국을 건국하는 진나라의 경우 대부분의 병력을 청동기로 무장시켰다. 이에 비해서 진나라에게 허구헌날 털리는 한나라의 경우 철기로 병력을 무장시켰다. 즉 초기 철기의 경우 의외로 청동기와 비교할 때 무기로서 살상력등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24] 소형 괴철로(Bloomery)에 목탄과 석회와 철광석을 혼입한 후 가열하면 철광석이 완전히 녹지 않아 스펀지 구조로 녹은 슬래그와 철이 섞인 괴 형태의 철을 말한다. 이렇게 얻은 해면상 철괴는 내부에 기공이 많고 슬래그가 다량 함유되어 있는데, 이런 기공들은 하나하나가 파단의 시발점이 되기 때문에 기공이 많은 철을 그대로 썼다간 와장창하고 깨지기 딱 좋다. 즉 해면철이란 토법고로에서 만든 정도의 웬만한 석기 만도 못한 원시적인 철이라고 보면 된다. 제대로 된 철기를 만드려면, 전통적인 대장간에서라도 해면철에서 추가적으로 두드리기(단조)와 담금질(열처리)을 반복해서 시행해서 탄소 농도를 적당히 맞추고 강도를 올려야 쓸만한 강철이 나온다.[25] 철(원소) 문서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철은 정말 내식성이 낮고 반응성이 높아 정말 쉽게 녹이 스는 물질이다. 현대야 스테인리스, 페인트칠, 스팀처리 등을 써서 녹스는 것을 방지하지만, 철기의 시작 수준인 히타이트에서 이런 기술이 있을 리가 없었고, 이에 따라 남은 철기 유물들이 녹슬어 파편 정도밖에 안남은 것이다.[26] 지금의 러시아 남부와 캅카스 지역에서 발흥한 얌나야 문화[35]원시 인도유럽인이 세운 것이라는 가설이다.[27] 왕비가 낳은 적자가 제1계승권을, 후궁이 낳은 서자가 제2계승권을 가졌다. 그리고 슬하에 아들이 아무도 없으면 사위가 계승권을 가졌다.[28] 히타이트 시대에는 '마라샨티야(Maraššantiya) 강'으로 불렸다.[29] 이는 북마케도니아에서 자신들이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언어는 동화되어 고대와 달라졌지만 혈통적으로 따지면 이어진다는 것이다.[30] 심지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도 후원한다.[31] 이처럼 한 국가의 현재 거주 민족이 자신들과 얼핏 상관없어 보이는 듯한 과거 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꽤 있다. 대표적인 예가 우즈베키스탄티무르를 영웅시하고 연구하는 것, 그리고 요르단이 자국 학자들을 우대하며 페트라를 만든 나바테아인들을 조상으로 받들며 연구하는 것 등이 있다. 다만 나바테아인은 요르단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요르단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아랍인의 직계 조상이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우즈베크인에게 정복당한 티무르 제국의 유민들은 옛 티무르 제국의 영토를 떠난 이들(대표적으로 무굴 제국의 지배층)을 제외하면 지배민족인 우즈베크인들에게 동화되면서 동시에 우즈베크인들에게 문화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32] 풀업 시 300이라는 상당한 체력을 자랑한다. 탱딜 겸용 가능[33] 히타이트 북부에서 평정되지 않던 이민족이다.[34] 현대에서 배웠던 각종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서 히타이트의 철기와 품질 면에서 비등하거나 능가하는 강철 및 다양한 개발품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트로이가 그리스 전역을 넘어 전 지중해권에서 가장 문명적으로 발달된 국가로 발전해간다.


[35] Yamnaya culture. 기원전 3400년경에서 기원전 2600년경까지 흑해 북부와 캅카스 지역에 있었던 청동기 시대 문화이며, 원시 인도유럽인이 주축이 된 쿠르간 문화의 후신으로 추정된다. 아파나시에보 문화 및 안드로노보 문화가 이 문화의 유전적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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