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제14대 파라오 아이 Ay | ||
투탕카멘의 '입을 여는 의식'을 집전하는 아이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아이(Ay) | |
출생 | 미상 | |
사망 | 기원전 1319년/1323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323년/1327년 ~ 기원전 1319년/1323년 (약 4년) | ||
전임자 | 투탕카멘 | |
후임자 | 호렘헤브 | |
배우자 | 안케세나멘 | |
무덤 | 왕가의 계곡 WV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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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13대 파라오. 일반적으로 투탕카멘의 후임 파라오로 알려져 있다.2. 통치
기원전 1352년 투탕카멘이 18살의 젊은 나이에 급사하자 대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력을 바탕으로 파라오에 즉위한 인물이나 후임 파라오이자 투탕카멘 치세 당시 같은 신하였던 호렘헤브에 의해 아케나텐, 스멘크카레, 투탕카멘과 더불어 이단으로 낙인찍혀 기록말살형을 당해 아이의 행적 대부분이 실전되었다. 재위가 4년으로 매우 짧기에 그 영향은 적은 편이며 말살된 그의 치세 4년은 호렘헤브의 통치기간으로 포함되었다.아이의 아버지는 아크민(Akhmin)의 실력자 유야(Yuya)로 그가 죽고 세력을 계승하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세력 외에도 테이(Tey)의 남매이며 아케나톤의 왕비 네페르티티의 아버지라는 설도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이는 유야의 세력과 외척을 등에 업은, 파라오조차 함부로 건들수 없는 사병을 가진 왕실의 어르신이었다는 것이 된다.
아이가 기록에 제대로 등장하는 시기는 투탕카멘의 치세부터이다. 투탕카멘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통치가 어려운 상황에 당시엔 기존의 유일신교와 새로운 다신교 사이의 대립으로 18왕조는 쓰러지기 직전까지 몰렸으며 파라오의 권위까지 실추되는 상황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투탕카멘은 오래 재위하지 못하고 후사없이 사망하니 향년 18세였다.
파라오의 급사와 계승자의 부재로 왕조가 혼란에 빠지자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투탕카멘의 왕비 안케세나멘은 히타이트의 제왕 수필룰리우마 1세에게 그의 왕자와 자신의 결혼을 추진하고자 하는 서신을 보내 히타이트라는 배경을 얻고자 했다. 수필룰라우마 제왕은 이에 승낙하여 왕자 잔난자(Zannanza)를 이집트로 보냈으나 잔난자가 중간에 암살당하자 혼란을 틈타 아이는 대신의 몸으로 제위를 접수하고 안케센나멘과 강제 결혼하여 파라오로 즉위한다.[1]
한편 왕자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수필룰라우마 제왕은 이집트를 침공해 시리아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강탈함과 동시에 수많은 이집트 군사들을 포로로 붙잡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포로로 붙잡은 이집트 군사들로부터 야토병이 도시 전역으로 퍼져 히타이트는 국력에 큰 타격을 입었고 수필룰라우마 제왕 역시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다.
아이는 고령이였기에 재위기간이 4년으로 짧은 편이다. 죽기 전 낙트민(Nakhtmin)이란 자에게[2] 제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낙트민 역시 고령이었던지 아이 사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그 뒤는 투탕카멘 생전에 정했던 후계자인 호렘헤브가 잇는다. 이집트학자들 사이에서 호렘헤브가 투탕카멘이 공식으로 정한 왕위계승자였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1975년에 호렘헤브가 관리이던 시절에 지었던 사카라의 무덤이 재발견되었는데[3]여기에는 소년 파라오의 카르투슈와 함께 호렘헤브가 역임한 여러 고위직을 새겼다. 이 중 왕위 계승자를 뜻하는 iry-pat가 있었는데 다른 직함과 달리 단독으로 많이 적혀있어서 왕위 계승자를 강조하는 의미로 보기 때문. 또한 이 무덤을 장식하던 부조 중 하나에서는 고대 이집트에서 관리에게 최고의 영예인 영예로운 황금(gold of honour, 파라오가 총애하는 신하에게 황금 목걸이를 하사하는 것)을 투탕카멘에게서 하사받는 장면, 그 다음에는 아시아인 지배자들을 복종시킨 뒤 왕과 외국 지배자들 사이에 서서 중재하는 호렘헤브를 묘사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투탕카멘의 치세에 아이와 호렘헤브가 자신의 분야에 따라 권력을 나누어 행사하다가 아이와 호렘헤브의 합의로 아이가 파라오에 즉위했는데 아이는 약속대로 호렘헤브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고, 오히려 낙트민을 후계자로 정해 호렘헤브를 배제하려고 했지만 호렘헤브는 아이가 얼마 재위하지 못할 테니 기다렸다가 그의 사후에 본래 자신이 가졌어야 할 지위를 되찾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아이에 대해 기록말살형이 엄격하게 시행되었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에 아이에 대한 적개심이 컸던 게 클 것이다.
3. 참고 항목
[1] 다른 해석도 있는데, 아이가 안케세나멘의 외할아버지이며 혈연에 의해 제위를 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현재 남아있는 아이와 안케세나멘의 족보가 애매하게 표현되어 이런 견해차가 생겼다.[2] 아이의 왕자로 추정.[3] 본래 19세기에 최초로 재발견되었으나, 발견한 이들이 미술품을 노린 도굴꾼들이라 무덤의 부조만 떼어다 유럽과 미국 각지의 박물관에 팔아버린 탓에 다시 잊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