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10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0세 Ptolemy X Alexander I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프톨레마이오스 10세 Πτολεμαῖος | Ptolemy | |
출생 | 기원전 140/139년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
사망 | 기원전 88년 (향년 51-52세)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07년 ~ 기원전 88년 (약 19년) | ||
전임자 | 프톨레마이오스 9세 | |
후임자 | 프톨레마이오스 9세 | |
부모 |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8세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 | |
배우자 |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베레니케 3세 | |
자녀 | 프톨레마이오스 11세, 클레오파트라 5세 | |
종교 | 이집트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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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10대 파라오. 형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몰아내고 파라오가 된 뒤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와 나라를 공동으로 다스렸으나, 나중에 갈등을 벌인 끝에 어머니를 살해하고 조카 베레니케 3세와 결혼했다. 기원전 88년 형에게 축출된 뒤 이집트를 되찾고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빌려서 군대를 일으켰으나, 키프로스를 공격하다가 피살당했다.2. 생애
기원전 14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는 동복형제로 평생의 숙적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동복자매로 트뤼파이나, 클레오파트라 4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가, 이복형제로 프톨레마이오스 멤피테스[1], 프톨레마이오스 아피온[2]이 있었다.기원전 116년 6월 28일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붕어했을 때, 클레오파트라 3세는 장남보다는 차남을 파라오에 선출하고 싶어했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유언으로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파라오로 세우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선택하도록 강요하자, 결국 그녀는 장남이 파라오가 되는 걸 받아들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형의 즉위 직후 키프로스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클레오파트라 3세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여러 신하를 포섭해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지지하게 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아내이며 자신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4세가 남편을 부추겨서 자신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 들자 프톨레마이오스 9세에게 당장 그녀와 이혼하고 자신에게 순종적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결혼하도록 강요해 관철시켰다.
기원전 107년 가을, 클레오파트라 3세는 자신을 모시던 하인들에게 공격당해 부상을 입었다. 그녀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이 상처들을 두루 보이며,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파우사니아스(Pausanias)에 따르면, 이 공격은 클레오파트라 3세가 아들을 축출하기 위해 하인들을 시켜 일부러 부상입히게 한 것이었다고 한다. 얼마 후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비밀리에 키프로스를 떠나 펠루시움에 도착했다. 클레오파트라 3세는 그를 알렉산드리아로 데려왔고,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공동 파라오로 선임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무사히 탈출하자 분노하여 체포 임무를 맡았던 장교들을 처형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에 남겨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어머니의 권고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재혼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키프로스로 달아났지만, 클레오파트라 3세에게 충성하는 군대가 그를 몰아냈다. 그는 다시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로 도주했고, 거기서 군대를 끌어모은 뒤 기원전 106년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정복에 성공했다. 기원전 103년 하스몬 왕조의 새로운 왕 알렉산드로스 야나이가 프톨레마이스를 포위하자,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함대를 이끌고 그곳으로 가서 야나이가 포위를 풀고 물러나도록 만들었다. 이후 갈릴리를 침공하여 요르단 강 근처의 아소폰에서 전투를 벌여 유대군을 격파하고 유대 일대를 약탈했다. 클레오파트라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유대를 발판삼아 이집트를 침공할 걸 우려하여 유대로 군대를 파견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군대는 바다를 통해 페니키아를 침공했고, 클레오파트라 3세의 군대는 프톨레마이스를 포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그들이 병력을 다른 데 보낸 틈을 타 이집트로 곧장 밀어붙이려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급히 돌아와 이를 막았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가자에서 겨울을 보낸 뒤 기원전 102년 초 키프로스로 돌아갔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안티오코스 9세가 손을 잡을 기미가 보이자, 클레오파트라 3세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를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이혼시키고 안티오코스 8세와 결혼시켰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처음에는 어머니의 간섭에 순종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를 부당하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빠져나온 뒤 군대를 끌어모아 어머니에 대항했다. 클레오파트라 3세는 두 아들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기꺼이 응하겠다며 기원전 101년 알렉산드리아에 돌아왔지만, 도착한 즉시 어머니를 체포하여 파라오 직위에서 폐위시킨 뒤 처형했다. 그해 10월,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의 딸인 베레니케 3세와 결혼하고 공동 파라오로 선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자신의 별칭을 필라델포스(Philadelphos: 형제를 사랑하는 자)로 바꾸었다.
기원전 91년, 상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테베의 지배권을 획득했고, 라토폴리스와 파트리스를 잇따라 공략했으며, 메로에 왕국은 트리아콘타스코에누스(Triacontaschoenus: 하 누비아 일대)를 공략했다. 기원전 88년 5월, 알렉산드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유대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에 그리스인들이 분노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의 황금 석관을 녹여 유리로 만든 석관으로 대체한 것에 분노했다는 설이 제기된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아내 베레니케 3세와 함께 로마로 달아났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추대로 파라오에 복귀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이집트를 탈환하기 위해 로마 공화국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빌리면서, 자신이 후계자가 없이 사망할 경우, 이집트를 로마 공화국에 맡기겠다는 유언장을 남겼다. 이후 해군을 소집한 뒤 키프로스를 침공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로마는 그가 죽었을 때, 유언장을 당장 이용하지는 않았지만, 훗날 이집트에 개입할 때 이 일을 빌미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