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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01:07:43

아르게아스 왕조

1. 개요2. 역사
2.1. 기원2.2. 페르시아의 봉신에서 그리스의 친구로2.3. 페르디카스 2세: 스파르타아테네 사이에서2.4. 아르켈라오스 1세: 그리스의 일원이 되려 노력하다2.5. 정국 혼란2.6. 필리포스 2세: 그리스의 맹주2.7. 알렉산드로스 3세: 헬레니즘 제국의 건설2.8. 몰락
3. 역대 왕

1. 개요

마케도니아 왕국의 제1왕조. 기원전 700년 경부터 기원전 310년까지 왕국을 다스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이 아르고스라고 주장했고, 이에 따라 '아르고스인'이라는 뜻의 '아르게아스'를 왕조의 명칭으로 삼았다. 헤라클레스의 후손인 테메노스를 뿌리로 여겼기 때문에 '테메노스 왕조'로도 불린다.

2. 역사

2.1. 기원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역사 기록에서 행적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최초의 아르게아스 군주 알렉산드로스 1세가 왕조의 창시자 페르디카스 1세의 7대손이라고 기술했다. 투키디데스 역시 이와 일치하는 기록을 남겼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디카스는 헤라클레스의 후예이며 아르고스의 왕 테메노스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는 두 형 가우아나스(Gauanes), 에로파스(Aeropas)와 함께 모종의 이유로 일리리아로 도망쳤다가, 다시 상 마케도니아로 건너가 르비아라는 성읍에 이르렀다. 그 곳의 왕에게 고용되었는데, 한 사람은 말을 돌봤고 다른 한 명은 소를 돌봤으며, 막내인 페르디카스는 송아지를 돌봤다. 왕의 아내가 빵을 구워서 음식을 노동자들에게 나눠주곤 했는데, 유독 페르디카스에게 주어진 빵만이 원래 크기의 2배로 부풀어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왕은 세 형제가 예삿인물이 아니라고 여기고 영지에서 나가라고 요구했다.

세 형제가
"우린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 임금을 받는다면 기꺼이 나가겠다."
라고 하자, 왕은 햇빛이 굴뚝을 타고 방에 비치는 광경을 보고 저 햇빛을 임금으로 가져가라고 했다. 두 형이 어찌할 바 몰라하고 있을 때, 소년이 방 바닥에 비친 햇살 주위에 칼로 원을 그린 뒤,
"왕이여! 우리는 당신의 지불을 받아들입니다."
라고 한 다음 햇빛을 세 번 품에 받고는 두 형과 함께 떠났다. 이때 한 신하가 왕에게 막내가 한 일은 불길한 징조라고 알렸다. 이에 왕은 사람을 보내 형제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형제들은 기병을 피해 할리아크몬 강을 건넜는데, 강이 갑자기 불어나서 기병이 건너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후 그들은 고르디아스의 아들 미다스의 정원에 이르러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이 정원에는 다른 사람이 가까이 오지 못할 만큼 스스로 자생하는 식물과 60개나 되는 꽃잎이 있는 장미가 있었다고 한다. 정원 위에는 베르미우스라는 산이 있는데, 너무 추워서 아무도 정상에 도달할 수 없었다. 형제는 여기에 거처를 마련했고, 차츰 주변의 부족을 포섭하다가 마침내 마케도니아 전역을 정복했다. 제일 현명했던 페르디카스가 그들의 왕이 되어 트라키아 부족을 물리쳤고, 고향인 아르고스의 이름을 딴 아르게아스 왕조를 개창했다. 그가 받은 햇빛은 베르기나 태양으로서 마케도니아 왕국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반면, 키오스의 테오폼포스는 테메노스의 아들 카라노스가 아르게아스 왕조의 시조라고 주장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기록을 인용하여 알렉산드로스 3세가 카라노스를 통해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기록했다. 카라노스는 테메노스가 죽은 뒤 왕위 계승을 놓고 분쟁을 벌였으나 패배한 뒤, 다른 곳에 가기로 하고 델포이 신전을 찾아가 신탁을 받았다.
"사냥감이 많고 가축을 기를 수 있는 곳에서 왕국을 건설하라"
는 신탁을 받은 뒤, 수행원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이동하다가 염소가 많이 사는 녹색 계곡이 신탁이 정한 그곳이라고 판단하고 베르기나(Vergina)라는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의 사람인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당시 마케도니아 왕국의 공식 입장을 그대로 반영했을 것이고, 기원전 4세기의 역사가 테오폼포스 역시 그랬을 것이다. 즉, 기원전 5세기경 마케도니아 왕국은 페르디카스 1세를 시조로 추앙했지만, 기원전 4세기의 어느 시점에서 카라노스로 시조를 바꾼 것이다. 그들이 시조를 변경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테메노스의 후예'보다는 '테메노스의 아들' 쪽이 왕조의 위엄을 높이기에 적합하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 역사학계는 마케도니아인들이 두 개의 공동체로 이뤄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평원의 마케도니아인은 그리스어 방언을 썼고 제우스헤라클레스를 숭배했을 것이다. 반면 고지 마케도니아인들은 일리리아와 트라키아인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 방언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들은 뱀을 숭배했고, 디오니소스를 열정적으로 숭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8세기경의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는 마케도니아인들을 그리스인들과 친척 관계라고 표현했다. 페르시아 역시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을 좀 다른 인종으로 봤다. 그들은 그리스인을 가리켜 'Yaunâ tyaiy paradrayâ'(바다 건너에 사는 자들)이라고 불렀고, 마케도니아인을 가리켜 'Yaunâ takabarâ'(태양 모자를 쓴 자들)이라고 불렀다.

2.2. 페르시아의 봉신에서 그리스의 친구로

신화 및 설화를 배제하고 역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마케도니아 왕은 아민타스 1세다. 그는 기원전 512년 또는 기원전 511년 아케메네스 왕조다리우스 1세가 보낸 사절단의 요구를 받아들여 "땅과 물"을 바치고 페르시아의 봉신이 되었으며, 딸 가이아를 페르시아 장군 부바레스와 결혼시켰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비문에도 마케도니아가 이 시기에 페르시아의 봉신이 되었다는 것이 명확히 기술되어 있다.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 1세는 기원전 496년에 열린 고대 올림픽에 참가했다. 그는 처음엔 참가 대상에서 제외될 뻔했다. 이 대회는 마케도니아인들을 야만인으로 간주하는 그리스인들만의 대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1세는 그의 왕조가 전설적인 그리스 영웅 헤라클레스의 직계 후손으로 믿어지는 고대 아르고스의 왕 테메노스로부터 기원했다는 것을 증명했고, 따라서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달리기 경주에서 우승했고, 테베의 유명한 시인 핀다르는 그를 축하하기 위해 시를 지었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핀다르를 마케도니아 궁정에 초대하여 후한 대접을 해줬다. 이후에도 바킬리데스를 후원했고, 그로부터 시를 받았다. 한편 델포이와 올림피아에 황금 조각상을 의뢰하기도 했다.

기원전 492년, 알렉산드로스 1세는 그리스를 정벌하기 위해 대규모 육군을 이끌고 온 마르도니오스에게 복종했다. 그러나 마르도니오스는 트라키아인과의 전투 도중 부상을 입었고, 그를 따라 이동하던 해군은 아토스 곶에서 폭풍우로 3분의 1 이상의 함대를 상실했다. 결국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정벌을 뒤로 미루고 철수했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군이 대규모 병력을 재차 파견해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정벌하려 했지만, 마라톤 전투에서 패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가 고대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대를 동원해 그리스를 침공했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이들에게 군사 및 병참 지원을 제공했다. 하지만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는 비밀리에 그리스인들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스 연합군이 테살리아의 템페 계곡에 주둔하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 1세는 그들에게 밀사를 보내 템페 계곡에 우회로가 많으니 위험하다고 경고하여 철수하게 했다. 또한 아테네에 몰래 목재를 공급하여 함대를 건설할 수 있게 해줬고, 아테네는 '프록세노스'(proxenos: 도시의 친구)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살라미스 해전 후, 마르도니오스의 지시에 따라 아테네에 외교 사절로 가서 평화 제의를 했으나 거절당했다.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알렉산드로스 1세는 몰래 페르시아 진영을 빠져나와 그리스 진영을 방문하여 마르도니오스의 전투 계획을 알려줬다. 다음날 벌어진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완승을 거두었고 마르도니오스는 전사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1세는 그리스 편을 노골적으로 들어 페르시아군을 몰아내는 데 일조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이러한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필헬리네'(φιλέλλην: 그리스인의 친구)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이후 그리스와의 무역을 증진하고자 노력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로부터 목재와 곡물을 수입했고, 알렉산드로스 1세는 그들로부터 막대한 자금과 질좋은 무기를 공급받았다. 이렇게 해서 벌어들인 수익을 기반삼아 군대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그리스 역사가 람파쿠스의 《아낙세메네스》에 따르면, 그는 호위기병 집단인 '헤타이로이'와 장창부대인 '페제타이로스'(Pezhetairos)를 처음으로 창설했다고 한다. 군사개혁이 완수된 뒤, 본격적으로 영토 확장에 나섰다. 채석장이 풍부한 스트리몬 계곡의 동쪽 지역을 장악했고, 테르마이코스 만의 전략적 항구도시인 피드나를 정복했다. 한편 트라키아와 할키디키(Chalkidiki)까지 확장하려 했다가 그 지역에 많은 공을 들이던 아테네와 대립하기도 했다.

2.3. 페르디카스 2세: 스파르타아테네 사이에서

기원전 451년,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1,000명의 정착민을 비살티야로 보냈고, 그들은 스트림몬에 정착지를 건설했다. 아테네는 이 정착지에서 함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목재와 송진을 채굴했으며, 광물을 채집했다. 당시 마케도니아 국왕 페르디카스 2세는 왕국의 동쪽 해안에 제멋대로 식민도시를 건설한 것이 마뜩치 않았겠지만,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의 강력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무력 대결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국과 가까운 곳에 아테네 식민지가 건설된 것을 활용하여 그들과 친분을 맺고 무역을 활성화함으로써, 경쟁자 필리포스를 무찌를 힘을 모으고자 했다. 기원전 4세기의 아테네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에 따르면, 페르디카스 2세가 다스리던 시절의 마케도니아는 아테네에 공물을 바쳤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기원전 446년 또는 기원전 445년 헤스티아에서 아테네군에 의해 추방된 망명자들을 수용했다.

기원전 440년에서 430년 사이, 페르디카스 2세와 필리포스는 무력 충돌을 벌였다. 그동안 아테네와 친분을 맺었던 페르디카스 2세는 그들의 지원에 힘입어 왕위를 놓고 경쟁하고 있었던 형제 필리포스의 영역을 모조리 빼앗았고, 필리포스는 엘리메야(Elimeya) 왕 데르다 1세의 궁정으로 도주했다. 그런데 이무렵 아테네가 새 식민도시인 암피폴리스를 건설했다. 이 도시는 에게 해로 흐르는 스트루마 강 동쪽의 고원에 건설되었다. 아테네는 이 도시를 통해 트라키아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화하고자 했고, 목재와 은광 등을 자체적으로 조달했다. 이렇게 되자 페르디카스 2세는 위협을 느꼈다. 그동안 마케도니아는 아테네에 목재와 은을 판매하면서 큰 수익을 챙기고 있었는데, 아테네가 자체적으로 목재와 은을 조달하게 되었으니 수입원이 끊겨버린 꼴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아테네가 트라키아를 지배하게 된다면, 마케도니아는 앞뒤로 아테네를 포함한 델로스 동맹에게 포위될 가능성이 컸다.

설상가상으로, 아테네는 필리포스와 엘리메야 왕 데르다 1세를 지원해 페르디카스 2세를 약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일에 방해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이에 페르디카스 2세는 스파르타코린토스에 사절을 보내 아테네의 전횡에 공동으로 대항하자고 호소했다. 여기에 할키디키 지역 주민들에게 아네테에 대항하라고 선동했다. 이러한 낌새를 눈치챈 아테네는 페르디카스 2세를 실각시키기 위해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기원전 432년, 아테네는 아르케스트라토스의 지휘하에 30척의 배와 1,000명의 호플리테스를 마케도니아로 파견했다. 그는 필리포스를 지원하고, 할키디키의 대표적인 도시인 포티데아를 공략하여 성벽을 허물고 인질을 잡는 임무를 맡았다. 포티데아는 처음엔 아테네와 평화 협상을 맺으려 했지만, 스파르타가
"만약 아테네가 포티데아를 친다면, 우린 아티카를 침공하겠다."
고 약속하자 아테네와 맞서기로 결심하고 할키디키의 부족민들과 동맹을 맺었다.

아르케스트라토스는 포티데아 방면은 쉽게 공략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페르디카스 2세를 몰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필리포스와 데르다 왕, 그리고 아테네 연합군은 마케도니아를 침공하여 여러 해안 농장을 점령했다. 페르디카스 2세는 할키디키인 일부를 볼바 호수 근처로 이동시키고, 요새화된 올린토스 주변에 진영을 세웠다. 얼마 후, 킬리아스가 지휘하는 아테네 호플리테스 2,000명이 추가로 도착하여 피드나를 포위했다. 피드나를 잃는다면, 마케도니아 해안 전체가 상실될 것이었다. 이때 아리스테오스가 지휘하는 코린토스의 호플리테스 1,600명과 400명의 경무장 부대가 포티데아에 당도했다. 이에 아테네군은 피드나 포위망을 풀고 포티데아로 진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군이 후방을 공격할 수도 있었기에, 페르디카스 2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 내용이 무엇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확실하지 않으나, 피드나를 위협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항구도시인 메토네를 마케도니아에 넘겨주는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페르디카스 2세는 평화 협정을 얼마 안가 파기하고 코린토스와 힘을 합쳐 아테네군을 협공하려 했다. 킬리아스는 필리포스에게 기병대를 줘서 페르디카스 2세의 공세를 저지하게 하고, 본인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포티데아로 진군했다. 페르디카스 2세는 올린토스에서 필리포스와 대치했지만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보이지 않았고, 아테네군은 그 사이에 코린토스-포티데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제 아테네로부터 육상과 해상 모두 공격당할 위기에 몰린 데다, 마케도니아 북동쪽의 오드리시아 왕국이 아테네와 손을 잡을 조짐을 보이자, 페르디카스 2세는 아테네에 사절을 보내 델로스 동맹에 가입하겠다고 제안했다. 아테네는 흔쾌히 수락하고, 자신들이 포티데아 원정 때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페르마 시를 돌려줬다. 이후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의 지원을 받아 에게 해의 북쪽 해안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일시적으로 강화했다. 하지만 페르디카스 2세는 은밀히 코린토스를 지원하여 아테네에 계속 대적하도록 유도했다.

기원전 429년, 페르디카스 2세는 아테네에 반기를 든 아카나니아 반군을 돕기 위해 1,000명의 병사를 파견했다. 얼마 후 시탈케스 왕이 이끄는 오드뤼사이 왕국군이 마케도니아를 침공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150,000명에 달했다고 하며,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보병 120,000명에 기병 50,000명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명백한 과장이지만, 마케도니아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월한 건 분명하다. 이 침공은 아테네의 사주로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케도니아군은 수적으로 우월한 적과 정면 대결하기 보다는 여러 요새를 사수하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적의 약점을 찌르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시탈케스의 군대는 악시아 강을 돌아 마케도니아 각지를 돌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미그도니아, 안테문트, 그리고 크레스토니아를 약탈했으며, 다수의 정착촌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안가서 식량난에 시달렸고, 아테네가 함대를 보내주지 않은데다, 마케도니아군의 거센 반격에 시달리다 1개월여 만에 본국으로 퇴각했다. 이후 페르디카스 2세가 누이 스트라토니케를 시탈케스 왕에게 시집보내면서, 마케도니아와 오드뤼사이는 화해했다. 얼마 후, 스파르타와의 전쟁이 급했던 아테네 역시 휴전 협상을 제의했고, 페르디카스 2세는 받아들였다. 이후 양자는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 않기로 했고, 페르디카스 2세는 그 틈에 내정에 전념할 수 있었다.

기원전 424년, 페르디카스 2세는 마케도니아 상부 지역의 린케스티다 왕 아르라베이와 분쟁을 벌였다. 그는 스파르타에게 이 분쟁에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스파르타는 필로스와 스팍테리아에서 아테네군에게 패배한 뒤, 아테네를 상대로 정면 대결하기보다는 마케도니아를 자기네 편으로 끌여들여서 아테네를 견제하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마케도니아는 아테네의 지배를 받는 도시들을 공격해줄 테니 병력을 보내달라고 청했고, 스파르타는 브라시다스 장군에게 병력을 맡겨서 마케도니아로 파견했다. 브라시다스가 도착하자, 페르디카스 2세는 그가 이끄는 용병대에 막대한 지원을 해주면서 린케스티다 왕을 조속히 무찔러주길 희망했다. 하지만 브라시다스는 굳이 마케도니아를 위해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고 보고, 린케스티다 왕과 협상했다. 결국 평화 협정은 체결되었다. 이 일로 브라시다스에게 원한을 품었지만, 페르디카스 2세는 평화협정에 따르기로 하고 스파르타와의 동맹 역시 유지했다.

기원전 424년에서 423년 겨울, 브라시다스는 암피폴리스를 공략했다. 이로 인해 아테네가 선박 건조에 필요한 목재를 자체적으로 구하기 힘들어졌다. 이때 페르디카스 2세가 암피폴리스에 찾아가 린케스티다 왕과의 전쟁을 재개하라고 촉구했다. 만약 이번에도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보급을 원천 봉쇄해버리겠다고 덧붙였다.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던 브라시다스는 어쩔 수 없이 이에 따르기로 했고, 마케도니아-스파르타 연합군은 린케스티다로 진격했다. 초기에는 린케스티다 왕 아르라베이를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뒀지만, 그라보스 1세가 이끄는 일리리아인들이 린케스티다와 손을 잡고 공동 대항한데다 페르디카스 2세와 브라시다스 사이에 불화가 생기면서 작전은 더 이상 성공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페르디카스 2세가 병사들을 이끌고 철수해버리자, 브라시다스는 마케도니아 하부 일대를 약탈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페르디카스 2세는 이런 상황에서 스파르타와 동맹을 이어가는 건 무익하다고 봤고, 국가의 주요 수입원인 아테네에 목재를 재판매하기로 했다.

아테네와 마케도니아 간의 동맹이 곧 성사되자, 브라시다스는 극도로 위험한 위치에 몰렸다. 그를 도우려던 스파르타 지원군은 모조리 차단되었고, 브라시다스는 에게 해 북쪽 해안에 있는 점령지에서 방어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422년 아테네 사령관 클레온이 30척의 함대를 이끌고 할키디키에 도착한 뒤 암피폴리스 탈환전에 착수했다. 이때 그는 마케도니아에 일전에 맺은 동맹 협약대로 원군을 보내라고 요구했지만, 페르디카스 2세는 군대를 보내주지 않았다. 이후에 벌어진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아테네군이 도시를 탈환했지만, 클레온과 브라시다스 둘 다 전사해 버렸다. 이후 전쟁에 지칠대로 지친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평화'를 체결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평화는 깨지고 양자는 전쟁을 재개했다.

페르디카스 2세는 양국이 서로 싸우는 걸 몇년간 지켜보면서 전쟁 물자를 판매해 수익을 챙겼다. 그러다 기원전 417년, 그는 돌연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그가 이런 결정을 한 이유가 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에게 해의 패권을 자기 것으로 돌리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테네는 그해 겨울 함대를 파견해 마케도니아 해안가를 봉쇄했고, 기원전 416년 메토네에 원정군을 상륙시켜 그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페르디카스 2세는 스파르타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스파르타군은 끝내 오지 않았고, 결국 기원전 414년 아테네와 동맹을 다시 맺기로 했다. 그 후 그는 아테네 장군 에베티온(Evetion)이 아테네에 반기를 든 암피폴리스 탈환 작전을 벌이는 걸 도와야 했다.

2.4. 아르켈라오스 1세: 그리스의 일원이 되려 노력하다

페르디카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르켈라오스 1세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지만, 아테네를 어느 정도 도와줬다. 시칠리아 원정이 참담한 실패로 끝난 뒤, 아테네는 함대를 복구하기 위해 목재를 구하려 애썼다. 그는 목재 공급을 방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의 조선소에 아테네 선박을 건조하는 것까지 허용했다. 얼마 후 피드나가 마케도니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반란을 일으키자, 아테네는 그에게 입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병력을 보내줬다. 그 덕분에 피드나를 공략한 뒤, 아르켈라오스 1세는 도시를 바다로부터 약 3.5km 떨어진 곳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그가 이렇듯 아테네를 도와준 덕분에, 금방 무너질 듯했던 아테네는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고,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전쟁에 정신이 팔려 마케도니아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르켈라오스 1세는 부왕대에 끝을 내지 못했던 린케스티다와 일리리아 부족 연합과 전쟁을 벌였지만 이번에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딸과 린케스티다 왕의 아들의 결혼을 성사시킴으로써 화해했다. 또한 부왕대에 상실했던 비샬티아를 탈환하여 풍부한 은광을 확보했으며, 서부의 오레스테다와 팀테아도 탈환했다. 이후 수도를 아기스에서 펠라로 천도했는데, 이는 항구도시인 피드나와 메토네에 군사적으로 근접한 곳이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펠라는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마케도니아 최대 도시가 되었다.

아르켈라오스 1세와 동시대 인물인 투키디데스는 그의 치세에 각지에서 펠라로 이어지는 직선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이전의 여덟 명의 왕보다 더 많은 건축물이 세워졌고, 군대와 군사 장비 준비에 더 많은 노력이 동원되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국경지대에 여러 요새가 세워져서 외세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게 했다. 한편, 그의 시대에 청동 동전이 주조되기 시작했다. 이는 마케도니아가 물물 교환에서 화페 유통 경제로 전환되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은광을 탈환한 후에는 은화를 대규모로 주조하였는데, 페르시아의 표준을 따른 걸 볼 때 동방의 국가들과 활발한 무역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잘 만들어진 주화는 대외 무역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선전용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들은 헤라클레스, 아폴로 등 신화 속의 신 또는 영웅을 어떤 식으로든 왕과 관련된 것으로 묘사했다.

기원전 408년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에우리피데스가 마케도니아로 찾아왔다. 아르켈라오스 1세는 그를 잘 대접했고, 에우리피데스는 기원전 406년 마케도니아에서 사망할 때까지 비극 작품을 4편 집필했다. 그 중 2편은 현재까지 전해지니,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와 《박카이》(Bacchae)이다. 에우리피데스는 《아르켈라오스》에서 테메노스의 아들 아르켈라오스를 아르게아스 왕조의 창시자로 제시했다. 이는 에우리피데스가 아르켈라오스 1세의 총애를 받기 위해 임의로 수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켈라오스 1세는 이외에도 당대의 유명한 화가 제욱시스를 초청하여 궁정 기둥을 그림으로 장식하게 하고, 음악가들과 시인들을 초청하는 등 그리스 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종교 축제인 올림피아를 올림피아 제우스와 뮤즈를 기리는 음악 경연과 운동 경기로 재정비하여 디온에서 개최하도록 했다. 그리스의 뛰어난 운동선수와 예술가들이 이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몰려왔는데, 아르켈라오스 1세 본인도 여기에 참가하여 올림픽과 파티아 경기 모두 우승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테네 지식인들은 친 아테네 정책을 펼치는 그를 "반 야만족 왕"이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그들은 아르켈라오스 1세에게 기용된 아테네 인사들을 야만족 왕의 통치 아래에서 부유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려고 빌붙었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아르켈라오스 1세는 소크라테스를 펠라에 초대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좋은 일과 나쁜 일에 보답하지 못하는 건 똑같이 모욕적인 일"
이라고 생각하여 거절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의 글에는 아르켈라오스 1세에 대한 악의적인 기록이 많이 있다. 그는 아르켈라오스 1세를
'정의의 최악의 적이며 마케도니아인들 중 가장 불행한 자'
라고 규정하고,
'가장 큰 범죄와 가장 큰 부정을 저지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당한 처벌을 성공적으로 피한 자'
라고 규탄했다. 그들이 이토록 아르켈라오스 1세에게 적대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는 불명확하나, 마케도니아가 자신들의 독립을 위협하기 시작할 만큼 강력해졌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트라시마코스는
"우리 그리스인들은 야만인 아르켈라오스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구절을 쓰기도 했다.

치세 말기, 마케도니아 남쪽의 테살리아를 다스리고 있었던 알레바드 왕조의 도움 요청을 받은 걸 명분삼아 테살리아에서 마케도니아로 가는 산길이 있는 잔략적 요충지 페레비아를 획득했으며, 뒤이어 라리사를 점령했다. 테살리아의 알레바드 왕조 반대자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기나긴 전쟁에 지친 스파르타는 구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르켈라오스 1세는 기원전 399년 돌연 암살당했고, 마케도니아군은 테살리아에서 철수했다. 이후 번성하던 마케도니아 왕국은 정국 혼란으로 인해 침체기를 걷게 되었다.

2.5. 정국 혼란

아르켈라오스 1세의 동성 연인이었다가 모종의 이유로 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크라테로스는 며칠 또는 몇달 만에 페위되었다. 뒤를 이어 아르켈라오스 1세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왕위에 올랐고 아에로포스 2세의 섭정을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에로포스 2세에 의해 폐위되었다. 아에로포스 2세는 기원전 394년 이오니아에서 페르시아군과 전쟁을 벌이던 중 코린토스의 반란을 진압하러 본국으로 귀환하던 아게실라오스 2세의 스파르타군을 저지했으나, 스파르타군에게 압도당하자 어쩔 수 없이 휴전 협약을 맺고 그들을 보내줘야 했다.

아에로포스 2세는 그 직후 질병에 걸려 사망했는데, 이후의 전개에 대해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페르디카스 2세의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들 아민타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가 귀족 데르다스에게 살해된 뒤 조카 파우사니아스가 뒤를 이었으나 곧 아민타스 3세에게 축출되었다고 한다. 반면 에우세비우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아르켈라오스 2세가 아버지 아에로포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사냥 도중에 피살되었고, 파우사니아스가 왕위를 쟁취했다가 아민타스 3세에게 축출되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사실에 근접한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갈려서 불명확하다.

기원전 393년 왕위에 오른 아민타스 3세는 곧 바르딜리스 1세가 이끄는 일리리아인들의 대규모 침략에 직면해야 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일리리아인들은 마케도니아를 점령하고 아민타스 3세를 축출한 뒤 꼭두각시로 삼고자 아르가이오스 2세를 왕위에 앉혔다고 한다. 아민타스 3세는 올린토스로 피신한 뒤 그들에게 마케도니아 동부의 영토인 미그도니아 또는 안트만트를 50년간 양도하고 중요한 무역 특권을 줄 테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해 동의를 얻어냈다. 기원전 392년, 아민타스 3세는 테살리아와 스파르타의 도움으로 마케도니아를 탈환했다. 이렇게 해서 왕위를 겨우 되찾을 수 있었지만, 당시 상황은 마케도니아에게 매우 불리했다. 동쪽에는 할키다키 연합, 서쪽으로는 일리리아인, 북쪽으로는 트라키아인이 마케도니아와 적대 관계였고, 오직 남쪽의 테살리아 만이 마케도니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할키디키 연맹은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를 포함해 사실상 마케도니아 전역을 점령했고, 아민타스 3세의 영역은 아이기오스 주변의 피에리아 일대로 좁혀졌다고 한다.

아민타스 3세는 이 위급한 상황을 만회하고자 스파르타에 구원을 요청했다. 스파르타 역시 올린토스가 이끄는 할키디키 연맹 중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도시 국가가 몇 개 있었기에 그들이 너무 강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또한 소아시아로 가는 육로를 확보하려면 마케도니아가 적당한 선에서 세력을 유지하면서 북쪽과 서쪽의 야만인 부족을 막아줘야 한다고 여겼다. 한편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아민타스 3세는 올린토스에게 양도한 땅을 반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고 올린토스를 합동 공격했다고 한다. 기원전 382년 봄, 스파르타 사령관 에우다마네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스파르타 연합군 전위부대가 할키디키 반도에 도착하여 포티데아를 점령하였고, 아게실라오스 2세의 동생 텔레우티아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주요 부대가 테베를 통해 육로로 마케도니아에 들어간 뒤 올린토스를 포위했다.

기원전 381년 텔레우티아스가 포위전 도중 성벽에 무리하게 접근했다가 적의 역습으로 전사하고 군대가 큰 피해를 입자, 국왕 아게시폴리스 1세가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전투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마저 기원전 380년 병에 걸려 사망했다. 뒤이어 폴리비아데스가 군대를 이끌었고, 스파르타군은 올린토스를 완전히 포위한 뒤 수개월간 공세를 벌였다. 결국 기원전 379년, 올린토스는 항복했고 할키디키 연합은 해산되었다. 아민타스 3세는 올린토스에게 양도한 영토를 포함한 모든 소유물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스파르타가 지휘관 2명을 잇따라 잃어가면서까지 최선을 다해 도와줬는데도, 아민타스 3세는 스파르타의 적수인 아테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는 아테네가 마케도니아로부터 목재를 공급받아 함대를 건설하길 희망한 데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375년 또는 373년, 양 국가 사이에 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는 아테네가 집착하는 암피폴리스에 대한 그들의 소유권을 인정했고, 아테네 장군 이피크라테스를 아들로 입양했다. 또한 할키디키 연합이 재결성되어 마케도니아와 50년간 상호 원조와 경제 협력을 하기로 했다. 기원전 370년대, 아민타스 3세는 페레아의 이아손과 동맹을 맺고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으며, 테살리아 소국가들의 맹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렇듯 아민타스 3세의 집권 후 안정을 되찾는 듯했지만, 기원전 370년 아민타스 3세가 사망한 뒤에는 정국이 또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 2세는 아직 어렸다. 이를 틈타 북서쪽에서 일리리아인들이 대대적으로 침공하였고, 동쪽에서는 왕위 참칭자 파우사니아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여러 도시를 함락하고 펠라로 쳐들어갔다. 이때 암피폴리스를 탈환하기 위해 마케도니아 해안을 따라 항해하던 아테네 장군 이피크라테스는 알렉산드로스 2세와 모후 에우리디케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았다. 그는 일찍이 아민타스 3세의 양자로 들어간 적이 있었기에, 그들을 돕기로 했다. 이피크라테스의 활약으로 파우사니아스는 격파되었고, 알렉산드로스 2세의 입지는 안전해졌다.

이후 테살리아의 알루아데 가문으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자 즉시 받아들여 페라스의 참주 알렉산드로스를 상대로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성공적으로 라리사 외 여러 도시를 장악했지만, 도와주기만 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이곳에 수비대를 두었다. 테베는 이에 적개심을 품었고, 펠로피다스 장군이 출진해 마케도니아군을 테살리아에서 몰아냈다. 테베군이 마케도니아까지 쳐들어갈 조짐을 보이자, 알렉산드로스 2세는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동생 필리포스 2세를 포함한 여러 인질을 테베에 넘겨야 했다. 급기야 기원전 367년, 어머니 에우리디케와 간통하고 있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선동으로 축제 도중 암살당했다.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페르디카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처형하고 왕권을 강화했지만, 기원전 360년 일리리아의 왕 바르딜리스 1세와의 전쟁 도중 매복 공격을 받고 4,000명의 장병과 함께 전사했다. 페르디카스 3세의 아들 아민타스 4세가 뒤를 이었고 필리포스 2세가 섭정을 맡았지만 기원전 359년 필리포스 2세에게 폐위되었다.

2.6. 필리포스 2세: 그리스의 맹주

필리포스 2세는 어린 시절에 거듭된 침략을 일삼는 일리리아인들을 달래려는 아버지 아민타스 3세의 뜻에 따라 일리리아에 인질로 보내졌고, 형 알렉산드로스 2세 대에 마케도니아를 침략하려 하는 테베를 달래려는 목적하에 다시 테베로 보내졌다. 그는 테베에서 인질 생활을 하면서 희대의 명장 에파미논다스의 활약상을 지켜봤고, 이로부터 전략전술과 군대 조직 등 많은 것을 숙달했다. 테베에서 돌아온 뒤 기원전 359년 조카 아민타스 4세로부터 왕위를 가로챘지만, 죽이지는 않고 딸 키나네(Cynane)를 아내로 삼게 했다.

필리포스 2세가 즉위할 당시의 마케도니아는 지극히 암울했다. 서쪽의 일리리아, 북쪽의 트라키아, 동쪽의 할키디키 반도 도시국가들, 남쪽의 테살리아 및 테베 모두 만만하지 않았으며, 특히 일리리아는 페르디카스 3세를 전사시킨 뒤 마케도니아에 쳐들어와서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필리포스 2세는 일리리아를 포함한 사방의 외세에 수많은 공물을 바치고 서약을 맺음으로써 그들이 만족하고 마케도니아에 더이상 쳐들어오지 않게 하였다. 그렇게 시간을 번 뒤, 그는 본격적으로 내실을 다지기 시작했다.

먼저 재위 첫 해에 린케스티다와 엘리미오티스 등 상부 마케도니아 왕국들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빠른 시일에 통합하고, 그들로부터 받아낸 병력으로 일리리아인과의 전쟁에서 입은 손실을 메꿨다. 뒤이어 대대적인 군제 개혁을 단행하여, 마케도니아군을 단번에 그리스 최강의 군대로 육성한다. 이후 마케도니아는 필리포스 2세의 지도하에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57년, 필리포스 2세는 일리리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잃어버렸던 영토를 모두 되찾았다. 그 후 동부 해안 지대로 눈길을 돌려 기원전 356년 암피폴리스, 피드나, 포티데이아를 정복했다. 암피폴리스는 아테네가 세운 식민도시였기에 이 일은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위였지만, 당시 아테네는 이웃 도시국가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서 암피폴리스 문제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그는 뒤이어 트라키아인 을 격파하고 크레니데스를 공략한 뒤, 도시 이름을 필리피로 바꾸었다. 이 도시를 얻으면서, 마케도니아는 이제 팡가이온 산맥의 풍요로운 광산을 이용할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광산에서 채굴된 광물 가치가 연간 1,000달란트에 달했다고 한다. 그는 이 광산 채굴에서 얻은 소득을 용병을 모집하고, 다른 도시의 정치인들과 사절들에게 선물을 줘서 자기 편으로 끌여들이는 식으로 사용했다.

필리포스 2세는 여러 귀족 가문들을 자신에게 묶어두기 위해 가문의 자제들을 궁정에 보내게 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인질'이었지만, 왕의 호의를 받고 고급 교육을 받으면서 점차 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인재들로 변화했다. 또한 정복한 그리스 도시들에 수비대를 남겨뒀지만, 각 도시의 정부들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은 정복된 도시 주민들이 품을 불만을 최소화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필리포스 2세는 수월하게 해안 지대를 장악할 수 있었다.

기원전 355~354년, 필리포스 2세는 아테네와 동맹을 맺은 에게 해 북부의 마지막 대도시인 메토네를 포위하여 장기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했다. 이때 앞장서서 군대를 지휘하다가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다리를 절뚝이는 등 여러 부상을 입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이후에도 여러 전장에서 군대를 친히 이끌었다. 그러던 중 포키아인들이 '델포이 신탁'으로 유명한 델포이를 점령하고 테살리아를 압박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모두 포키아의 편에 서자, 마케도니아 아르게아스 왕가와 오래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테살리아의 알류아드 가문은 마케도니아에 구원을 요청했다. 필리포스 2세는 즉시 남하했고, 기원전 352년 크로커스 평원 전투에서 포키아 사령관 오노마르코스를 격파했다. 테살리아인들은 포키아인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필리포스 2세를 테살리아 동맹의 아르콘(지도자)으로 추대했다. 아테네가 마케도니아의 남하 정책을 경게하여 테르모필레를 봉쇄하자, 그는 트라키아로 돌아가서 오드뤼사이 왕국의 왕 케르소블렙테스를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트라키아인들을 복속시켰다.

필리포스 2세는 뒤이어 동부의 할키디키 반도로 눈길을 돌렸다. 특히 할키디키 반도 도시국가들 중 가장 강한 올린토스가 주요 목표였다. 그곳에는 자신의 이복동생 두 명이 있었고,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있기도 했기에 자신의 입지에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토로네, 메키베르나, 스테이지라 등 여러 소규모 도시들을 공략하면서 뜸을 들인 뒤, 기원전 349년 올린토스에 사절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다. 그들이 거절하자 즉시 포위하였고 1년만에 함락시키고 도시를 파괴했으며, 두 이복형제를 살해했다. 올린토스 주민들은 전원 노예로 팔려갔다. 아테네는 올린토스를 돕기로 했지만 제 때에 움직이지 못했다. 이어서 기원전 346년, 마케도니아는 포키아를 병합하면서 그리스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하였다. 결국 아테네는 필로크라테스 평화 협약을 체결하여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을 종식했다.

기원전 343년 아케메네스 왕조샤한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와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뒤, 기원전 340년 비잔티움을 포위하던 중 비잔티움에 곡물을 수송하던 아테네 함선들을 포획했다. 이 일로 아테네 민심은 격앙했고, 데모스테네스의 필리포스 탄핵 연설에 따라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초기엔 마케도니아 함대가 아테네 함대의 압박을 받고 흑해로 퇴각해야 했고, 비잔티움 공방전 역시 실패로 돌아가는 등 필리포스 2세에게 영 좋지 않은 흐름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그는 도나우 강에서 이민족들을 격파해 군심을 다잡은 뒤, 기원전 339년 아테네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그리스 중부로 쳐들어가서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했다.

기원전 338년 8월 초, 아테네, 테베, 그리고 코린토스 도시 국가들의 연합군을 상대로 카이로네이아 전투를 벌였다.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도 참여한 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아테네와 테베가 전의를 상실하고 투항하자, 필리포스 2세는 마케도니아에 비해 매우 우수한 해군을 갖춘 아테네는 훗날 페르시아 원정 때 많은 도움이 될 거라 보고 아주 온건하게 대우했다. 반면 테베에 수비대를 주둔했고, 반 마케도니아 인사들을 대거 잡아들였으며, 독자적으로 외교 및 국방을 수행할 권리도 박탈했다. 기원전 337년 스파르타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가 속한 코린토스 동맹을 수립하고, 자신이 맹주를 맡았다. 그는 140여 년전 크세르크세스 1세의 침략으로 여러 도시들이 파괴된 일을 상기시키며, 페르시아 정벌이 완수될 때까지 도시 국가들끼리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맹세하게 했다.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는 아민타스, 안드로메네스, 아탈로스, 그리고 파르메니온에게 10,000명의 병력을 맡겨 소아시아로 파견했다. 그들은 초기에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쪽 해안 도시 몇개를 공략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얼마 후 필리포스 2세가 갑작스럽게 암살되자 원정군의 사기가 뚝 떨어졌고, 얼마 후 로도스의 용병대장 멤논이 이끄는 페르시아군에게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패배했다.

2.7. 알렉산드로스 3세: 헬레니즘 제국의 건설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된 뒤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 3세는 자신을 얕보고 반란을 일으킨 그리스 폴리스들을 빠르게 제압한 뒤, 트라키아와 게타이 부족, 그리고 일리리아인들의 봉기를 1년여 만에 진압했다. 그때 알렉산드로스 3세가 전사했다는 뜬소문이 그리스에서 퍼지자, 테베가 반 마케도니아 인사들을 복귀시키고, 반대로 친 마케도니아 인사인 티몰라오와 아민타스를 살해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케도니아 군대가 주둔하던 카드메이아 요새를 포위하여 본격적으로 반란을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편승해 아테네와 스파르타도 반란에 참여했다. 이를 들은 알렉산드로스 3세는 33,000여 명의 병력과 함께 신속히 남하하여 테베에 항복을 요구했으나, 테베가 받아들이지 않자 테베 공방전을 벌인 끝에 함락시키고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테베의 말로에 겁을 집어먹은 아테네 등 도시국가들은 용서를 빌며 항복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완전히 복종시킨 뒤, 알렉산드로스 3세는 전설적인 동방 원정을 단행한다. 그는 헬레스폰트를 건넌 뒤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소아시아의 사트라프들을 격파했다. 이후 아나톨리아 반도를 해안가를 따라 제압하고 시리아로 진입하던 중 이소스에서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 대군과 마주쳤다. 이리하여 벌어진 이소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 3세는 탁월한 지휘력과 전술 역량을 발휘하여 페르시아군을 대파했다. 그 후 시리아 해안 도시들을 제압해나가면서 끝까지 저항한 티레와 가자를 테베처럼 완전히 파괴했으며, 이집트에 무혈 입성한 뒤 사제들로부터
"당신은 인간이 아니라 아문의 아들"
이라는 신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때부터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이집트를 평정한 뒤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다가 기원전 331년 10월 1일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 대군을 격멸하고 바빌론에 들린 뒤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에 입성했다. 이후 동쪽으로 진군하다가 페르시아 관문 전투에서 한 달간 고전했지만 끝내 뚫어버리고, 페르세폴리스에 진입한 뒤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를 침략하여 아테네 등을 파괴한 벌을 내려야 한다며 페르세폴리스를 대대적으로 불살랐다.

뒤이어 다리우스 3세를 추격하다가 그가 죽은 걸 확인하자 다리우스 3세가 자신에게 샤한샤를 넘겨주겠다고 유언했다고 주장하며 샤한샤를 공식적으로 칭했고, 페르시아 샤한샤를 자칭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를 추격하여 붙잡은 뒤 샤한샤를 죽인 죄를 물어 공개 처형했고, 박트리아 등 페르시아의 남은 영토까지 모조리 정복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더스 강으로 진격해 파우라바 왕조의 왕 포루스를 상대로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격파했다. 뒤이어 갠지스 강을 건너 본격적으로 인도 정벌을 하려 했지만, 부하들이 이제 그만 돌아가자며 파업하자 어쩔 수 없이 철군했다.(히파시스 반란) 바빌론으로 돌아온 뒤 아라비아 반도를 정복한 후 바다를 통해 아프리카를 돌아가 고대 카르타고를 공략한 후 지중해를 정복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구상하였으나, 실행에 옮기기 전인 기원전 323년 6월 11일 향년 32세로 붕어했다.

2.8. 몰락

알렉산드로스 3세는 실로 엄청난 정복전쟁을 벌였으나, 정작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고 붕어했다. 이에 여러 장군들이 후계자를 누구로 삼을지 논의한 결과, 알렉산드로스 3세의 이복형 필리포스 3세를 일단 왕으로 세우되, 록사나가 임신한 태아가 아들일 경우 공동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이후 록사나가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를 낳으면서, 두 사람은 공동 왕이 되었다. 그러나 정신 지체가 있는 필리포스 3세와 유아에 불과한 알렉산드로스 4세는 부하들의 존경과 충성을 이끌어내기엔 역부족이었고, 결국 야심 가득한 디아도코이들이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룩한 제국을 갈라먹고 패권 경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아르게아스 왕실 인사들은 뒷전으로 밀려나 펠라로 보내졌다.

그나마 조용히 지냈으면 좀더 버텼겠지만, 알렉산드로스 3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큰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가 왕위를 독차지하길 원했던 그녀는 에페이로스 왕 아이아키데스, 옛 섭정 폴리페르콘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펠라를 공격했다. 당시 필리포스 3세를 지켜주던 카산드로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가 있어서, 필리포스 3세와 왕비 에우리디케가 그들을 직접 막아섰다. 그러나 올림피아스가 알렉산드로스 4세를 병사들 앞에 내세우자, 필리포스 3세 부부 휘하 병사들이 항복하면서 제대로 된 싸움도 벌어지지 않는다. 이후 필리포스 3세는 에우리디케 왕비, 카산드로스의 동생 니카토르와 함께 암피폴리스까지 도망가다가 붙잡혔다.

필리포스 3세는 2개월 동안 구금되었다가 12월에 처형되었으며, 아내 에우리디케 역시 남편이 처형된 직후 올림피아스에게 자살을 강요당해 죽었다. 이로써 올림피아스는 소원을 달성했으나, 이는 일장춘몽일 뿐이었다. 카산드로스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반격을 가해 올림피아스를 사로잡아 왕을 죽인 반역죄를 물어 처형했다. 그는 뒤이어 알렉산드로스 4세와 어머니 록사나마저 기원전 310년경 독살했으며, 폴리페르콘에게 뇌물을 줘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서자 헤라클레스까지 독살하게 했다. 이리하여 아르게아스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3. 역대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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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게아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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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게아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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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디카스 1세가 마케도니아 왕국의 초대 왕이다. 티림마스 이상은, 헤로도토스로부터 1세기 가량 뒤의 웅변가이자 역사가인 테오폼포스의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한다.[2] 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케메네스 왕조다리우스 1세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왕자 시절부터 아케메네스 제국에 적대적이었으며, 겉으로는 아케메네스 왕조에 협조적이었지만 그리스 국가들에게 기밀사항이나 군수품을 몰래 전해주었다. 또한 3차 페르시아 전쟁 때 페르시아군이 마케도니아 영토를 거쳐 후퇴하게 되자, 기습공격해서 거의 궤멸시키기도 했다. 그의 후손인 알렉산드로스 3세가 다리우스 1세의 후손인 다리우스 3세를 몰락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