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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09:41:40

브라시다스

브라시다스
Brasidas | Βρασίδας
파일:Silver_ossuary_and_gold_crown_of_Brasidas 1428 x 1903.jpg
암피폴리스 박물관에 있는 브라시다스의 유골함(추정)
출생 ?, 스파르타
사망 기원전 422년, 암피폴리스
주요 전투 나우팍토스 전투(기원전 429)
필로스 전투(기원전 425)
암피폴리스 전투†(기원전 422)
1. 개요2. 생애
2.1. 전쟁 초기2.2. 트라케 원정2.3. 암피폴리스 전투2.4. 사후
3. 연설
3.1. 나우팍토스 전투3.2. 아칸토스 민회3.3. 암피폴리스 전투
4. 평가5. 창작물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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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파르타의 장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2. 생애

텔리스[1]와 아르길리오니스[2]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애 초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명학한 시점은 파악되지 않았으나, 전쟁 시작이 시작되는 기원전 431년을 전후로 하여 스파르타의 에포로이[3]로 선출되었다. 당시의 스파르타에 반아테네 정서와 주전론이 만연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시기에 에포로이로 선출된 브라시다스는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부터 강경파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1. 전쟁 초기

기원전 431년 전쟁의 첫번 째 해에 아테네군이 메토네를 포위하고 있었을 때, 마침 메토네 주변에 있던 브라시다스는 100여명의 중무장 보병을 이끌고 메토네를 구해주었다. 이 공훈으로 브라시다스는 전쟁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찬사를 받은 스파르타인이 되었다.

기원전 429년에 발생한 나우팍토스 전투에서 브라시다스는 스파르타의 제독 크네모스(Knemos)와 함께 포르미온(Phormion, Φορμίων)이 이끄는 아테네 함대를 상대로 해전을 벌이게 되었다. 당시 스파르타 해군은 77척이었으며 아테네 해군은 20척에 불과했다. 수적으로는 스파르타의 함대가 더 많았으나, 스파르타인들의 해전 경험이 부족한 탓에 아테네 함대에게 패배하였다. 전투 이후 브라시다스와 크네모스는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하는 것이 두려워, 곧바로 스파르타로 귀국하지 않았다. 마침 한 메가라인이 피리아오스 지방의 경계가 취약하다며 기습 공격을 제안하였고, 패전의 책임을 무마할 수 있는 공훈이 필요했던 두 장군은 메가라인의 제안에 응하였다. 처음에는 메가라의 함선 40척을 이끌고 피리아오스로 향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막상 함대를 이끌게 되자 너무나도 대담한 계획에 겁에 질린 나머지 대신 살라미스를 기습한 뒤에 약탈을 감행하였다.

기원전 427년 코르키라에서 내전이 발발하였을 때, 스파르타의 제독 알키다스(Alcidas, Ἀλκίδας)는 40척의 함선을 이끌고 코르키라의 내전에 개입하고자 하였다. 브라시다스는 중간에 합류하여 알키다스의 조언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스파르타의 함대는 아테네의 함대보다 먼저 코르키라에 도착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서 항해를 하였다. 서두른 탓인지 코르키라에서는 스파르타의 접근을 알게 되었으며, 민주파는 스파르타가 도시의 내전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서 함대를 파견하였다. 해군 강국인 코르키라에서는 내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60척의 함선을 모을 수 있었다. 코르키라의 민주파를 지원하는 아테네에서는 곧장 출항하지 말고, 자신들의 함대가 스파르타군을 상대하는 동안 해군을 정비하여 한꺼번에 출항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코르키라인들은 내전으로 인해 군율이 제대로 서지 않았고, 아테네의 당부를 무시하여 배에 타는대로 하나씩 급하게 출항하였다. 결국 코르키라의 함대는 수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의 우려대로 하나씩 각개격파를 당하였다. 스파르타 함대가 승기를 잡을 때 즘 아테네에서 파견한 12척의 함대가 다가오자 알키다스는 아테네의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방향을 돌렸다. 살아남은 코르키라의 함선들은 스파르타 함대가 아테네 함대를 상대하는 사이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 브라시다스는 기세를 몰아붙여서 그대로 코르키라를 점령하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아테네 함대가 두려웠던 알키다스는 브라시다스의 제안을 묵살하였고, 대신 인근에 있는 레우킴메 곶을 약탈하였다. 알키다스의 함대는 아테네의 함선 60척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뒤에야 철수하였다.

기원전 425년에 발생한 필로스 전투에서는 트리에레스의 지휘관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스파르타군은 데모스테네스[4]에 의해 전술적으로 열세에 놓인 상황이었다. 브라시다스는 신속하게 적진에 상륙하고 요새를 점령하여 상황을 타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스파르타 해군은 아테네 해군을 당해내지 못하였고, 브라시다스는 큰 부상을 입은 채 배에서 떨어지고 만다. 전투가 끝난 후, 승리한 아테네군은 바다에 떨어진 브라시다스의 방패를 수거하여 해당 전투의 승전비로 삼았다.

2.2. 트라케 원정

기원전 424년, 마케도니아 왕국페르디카스 2세는 린케스티스(Lynkestis, Λυγκηστίς)의 왕 아라바이오스(Arrhabaeus, Ἀρραβαῖος)와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트라케 지방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스파르타 역시 필로스 전투와 뒤이은 스팍테리아 전투[5]에서 패배한 후, 아테네를 압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페르디카스의 요청에 응하여 브라시다스를 트라케 지방으로 보냈다. 페르디카스의 요청 때문에 트라케로 원정을 떠났지만, 브라시다스는 페르디카스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브라시다스는 아라바이오스와 전투를 하는 대신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페르디카스와의 약속을 어겼다. 페르디카스는 브라시다스의 일방적인 약속 파기에 크게 노하였지만, 트라케 원정의 지원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대신 필요한 병력의 절반을 내어주겠다고 했던 처음의 약속을 바꾸어 병력의 1/3만 내어주었다.

페르디카스의 문제를 해결한 브라시다스는 트라케 지방의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암피폴리스(Amphipolis, Ἀμφίπολις)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암피폴리스는 지리적으로도 전략적 요충지라 할수 있었고, 무엇보다 은광이 밀집해있었기 때문에 아테네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도시였다. 암피폴리스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칸토스(Akanthos, Ἄκανθος)를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아칸토스에서는 델로스 동맹 탈퇴 여부를 두고 당파가 나뉘어 있었다. 아칸토스에 당도한 브라시다스는 도시를 점령하는 대신 홀로 도시의 민회에 참석하여 아칸토스의 시민들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아칸토스의 시민들은 브라시다스의 설득에 넘어가 그에게 도시를 내어주었다.

아칸토스를 점령한 브라시다스는 본래 목표인 암피폴리스로 향하였다. 암피폴리스에 도착한 후에는 몇 차례 약탈을 감행하여 도시가 스스로 항복하게 만드려는 계획을 품었다. 한편 아테네에서도 브라시다스의 암피폴리스 점령을 손놓고 보기만 할수는 없었기 때문에 급히 투키디데스를 암피폴리스로 파견하였다. 투키디데스의 출진 소식을 들은 브라시다스는 암피폴리스의 시민들에게 재산과 생명을 모두 보장할테니 항복하라고 선포하였다. 브라시다스의 항복 권고 후에 암피폴리스의 반 아테네파 시민들은 항복 및 델로스 동맹 탈퇴에 찬동하였고, 나머지 시민들도 재산과 생명의 보존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도시를 내어주기로 합의하였다. 그렇게 브라시다스는 투키디데스가 도착하기 전에 암피폴리스를 점령할 수 있었다. 한 발 늦은 투키디데스는 인근에 있는 에이온에 상륙하였으며, 브라시다스의 약속하에 암피폴리스를 무사히 빠져나온 시민들을 받아주었다. 그러나 훗날 투키디데스는 브라시다스의 암피폴리스 점령을 막지 못한 죄로 반역 혐의로 기소되어 20년간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브라시다스의 암피폴리스 점령은 아테네에게 있어서 큰 위협이 되었다. 전략 및 재정적으로 중요한 암피폴리스를 잃은 것도 타격이 컸지만, 브라시다스가 아테네로부터의 해방을 명분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다른 도시들도 아테네를 향해 반란을 일으킬 위협이 있었다. 결국 아테네의 우려대로 이전부터 아테네의 제국주의와 델로스 동맹에 불만을 품고 있던 다른 도시들이 하나 둘씩 반란을 일으켰으며, 기회를 놓치지 않은 브라시다스는 독립을 명분으로 하여 이들을 손쉽게 정복해나갔다. 브라시다스는 기세를 몰아붙이기 위해 스파르타 본국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스파르타 정부에는 브라시다스의 활약을 시기하는 자들도 있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스팍테리아 전투에서 사로잡힌 인질들을 돌려받기 위해 아테네와의 협상을 원했기 때문에 브라시다스의 요청은 묵살되었다. 아테네는 스팍테리아 전투 이후 스파르타의 협상 요구를 계속해서 거절해왔지만, 브라시다스의 원정을 저지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휴전 협상에 응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단기적인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휴전 조약의 소식을 듣지 못한 브라시다스는 아테네를 향해 반란을 일으킨 또 다른 도시 스키오네(Skioni, Σκιώνη)를 점령하였다. 이 사건으로 브라시다스는 스키오네 시민들에게 '헬라스의 해방자'라는 칭호와 함께 황금으로 만든 월계수 관을 수여받았다. 브라시다스 개인은 영광의 절정을 누릴 수 있었지만, 스파르타 정부가 추진하는 휴전 조약에는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휴전 조약 이후에 점령한 도시들을 반환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브라시다스의 스키오네 점령은 조약 이틀 뒤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당연히 아테네 측에서는 스키오네의 반환을 요구하였지만, 뒤늦게 조약 체결 여부를 알게 된 브라시다스는 스키오네는 조약 체결 전에 점령되었다고 발뺌을 하였다. 스파르타 정부도 브라시다스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도시의 반환 여부를 두고 아테네와의 중재를 시도하였다. 분개한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중재를 거절하였으며, 민회에서는 강경파의 필두인 클레온의 주도하에 스키오네를 파괴하고 시민들을 학살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아테네의 분노가 브라시다스를 향하고 있었지만, 브라시다스는 반란을 일으킨 또 다른 도시 멘데(Mende, Μένδη)를 점령하여 아테네를 더욱 자극하였다.

브라시다스의 조약 위반 행위에 보복하기 위해 니키아스가 이끄는 아테네군이 트라케 지방으로 출진하였다. 니키아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평화를 바라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브라시다스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온건파인 니키아스의 입장에서도 아테네 시민의 여론 때문에 스키오네와 멘데를 내버려둘 수도 없었고, 니키아스는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암피폴리스를 공격하는 대신에 스키오네와 멘데를 공격하였다. 한편 브라시다스는 후원자라 할 수 있는 페르디카스의 요구 때문에 마케도니아의 원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스파르타 정부에서는 브라시다스의 부재에 대응하기 위해 스파르타의 장군들을 파견하여 브라시다스가 점령한 도시들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트라케 원정의 시작부터 피어올랐던 브라시다스와 페르디카스의 갈등은 마케도니아의 원정에서도 이어졌다. 두 사람은 군대의 지휘권을 두고 의견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였고, 결국 마케도니아의 원정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페르디카스는 스파르타와의 관계를 끊고 아테네와 협력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2.3. 암피폴리스 전투

기원전 422년 아테네의 장군으로 선출된 클레온이 트라케를 수복하기 위해 전함 30척으로 이루어진 대군을 이끌고 출진하였다. 트라케 지방에는 브라시다스가 점령하지 못한 델로스 동맹 소속의 도시들이 남아있었으며, 게다가 브라시다스와 관계를 끊은 마케도니아페르디카스 2세도 아테네군을 지원해주었다.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클레온은 스파르타의 주둔지라 할 수 있는 토로네를 성공적으로 공략하였으며, 이후에는 암피폴리스를 공략하기 위해 이전에 투키디데스가 방어하였던 에이온에 주둔하였다. 클레온은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도시를 공격하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압도적인 승리를 위해 아테네로부터의 지원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클레온의 공격을 앞둔 브라시다스도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전에 브라시다스의 지원 요청을 무시한 스파르타 본국에서는 클레아리다스(Clearidas)를 지휘관으로 하여 지원 병력을 보내주었고, 브라시다스가 이전에 점령한 도시들로부터도 군사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지원 덕분에 아테네와 비등한 수준의 군대를 모집할 수 있었지만, 브라시다스가 이끄는 군대는 아테네군에 비해 숙련도가 크게 떨어졌다. 또한 클레온의 군대는 아테네 본국으로부터 지원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브라시다스의 입장에서는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브라시다스는 병력이 적은 것처럼 위장하여 클레온을 꾀어낸 뒤, 기습을 가하여 승기를 잡는 계책을 꾸몄다.

브라시다스가 소수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아테네군을 공격하자, 적의 수를 간과한 클레온은 스파르타군의 공격에 대응하였다. 그리고 브라시다스의 계략대로 클레아리다스가 이끄는 군대가 암피폴리스에서 출진하여 아테네군을 기습할 수 있었다. 전투는 스파르타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아테네군의 사망자는 지휘관인 클레온을 포함하여 600여명에 달하였다. 반면에 스파르타의 전사자는 7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 중에는 선봉에서 전투를 지휘한 브라시다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전선에서 싸우던 브라시다스는 전투 도중 부상을 입고 실려나갔으며, 전투가 끝난 뒤에 스파르타군이 승리했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뒤에 숨을 거두었다.

2.4. 사후

브라시다스의 어머니 아르길레오니스는 아들이 죽은 뒤 암피폴리스 사람 몇이 소식을 전하려고 찾아왔을 때 자신의 아들이 스파르타인답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했는지를 물었다. 암피폴리스 사람들은 침이 마르도록 브라시다스를 칭송하며 용감한 모든 스파르타인들 중에서도 단연코 최고로 용맹스러웠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이보시오, 내 아들이 뛰어나고 훌륭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파르타에는 내 아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다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리쿠르고스편, 플루타르코스
브라시다스가 전사한 후, 암피폴리스에서는 그를 영웅으로 대우하였다. 암피폴리스의 시민들은 국고를 들여서 브라시다스의 장례식을 치렀으며, 그의 유해는 아고라에 안장되었다. 본래 암피폴리스의 창립자는 아테네의 하그논(Hagnon, Αγνων)이었지만, 하그논의 흔적을 모두 허물어버린 뒤에 브라시다스를 도시의 창립자로 추대하였다. 이후 매년 브라시다스의 명예를 기리는 경기를 진행하였다.

브라시다스는 트라케의 도시들에게 아테네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하였으나, 그가 죽은 이후 이 약속은 온전히 지켜지지 않았다.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한 브라시다스와 클레온은 스파르타와 아테네에서 전쟁을 주도하던 강경파에 속했던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죽음 이후, 아테네에서는 클레온을 대신하여 온건파인 니키아스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스파르타에서도 플레이스토아낙스[6] 를 중심으로 하여 온건파가 힘을 얻게 되었다. 당시 스파르타는 스팍테리아 전투에서 생포당한 100여명의 포로들을 돌려받기를 원하였다. 아테네 입장에서 이 스파르타인 포로들은 펠로폰네소스 동맹아티카 침략을 막아줄 방패였기 때문에 섣불리 내어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스파르타는 포로를 송환받기 위한 교섭 재료로 브라시다스가 정벌한 트라케 지방의 반환을 내걸었는데, 아칸토스를 포함한 여러 도시들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암피폴리스는 반환 대상에 포함되었다. 암피폴리스 입장에서는 브라시다스의 보장에 힘입어 독립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다시 아테네에 예속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암피폴리스 반환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는 휴전 협상에 체결한 아테네인들이 스파르타인들을 불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브라시다스가 트라케 원정을 했을 당시, 헤일로타이[7]를 병사로 소집하여 원정에 동반하였다. 이들 중 공을 세운 자들은 자유민들이 되었다. 자유민이 된 헤일로타이들은 '네오다모데이스'(Neodamōdeis, νεοδαμώδεις)로 불렸는데, 브라시다스가 해방시킨 헤일로타이들은 특별히 '브라시데이오이'로 불렸다. 이들은 휴전 협상 후 라코니케 지방과 레프레온에 정착하였다.

3. 연설

투키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는 다양한 연설이 나오는데, 스파르타 측 인물 중에는 브라시다스의 연설이 가장 많은 편이다. 명문으로 유명한 페리클레스의 연설문들처럼 유려하지는 않지만, 아칸토스의 민회에서 한 연설은 스파르타인이 연설을 통해 도시를 점령한 결과를 가져온 특이한 사례로 꼽힌다.

3.1. 나우팍토스 전투

전투 당시 동반했던 스파르타의 제독 크네모스와 함께 한 연설로 알려져있다. 둘 중 누가 연설을 하였는지는 명확하게 기술되지 않았다.
펠로폰네소스인들이여, 만약 여러분 중에 누가 지난번 해전 때문에 다음 해전이 두렵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두려움이야말로 기우에 불과하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지난번 해전 때는 우리가 제대로 준비가 안 됐고, 항해 목적이 해전이라기보다는 병력을 수송하는 일이었소. 우리는 또 운도 아주 나빴고, 첫 번째 해전이라 경험이 부족하여 몇 가지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소.

우리가 패한 것은 우리가 비겁했기 때문이 아니었소. 그러니 우리가 완전히 사기가 꺾인 것이 아니고 아직도 저항할 힘이 남아 있다면 단순히 지난번 결과 때문에 기가 죽는다는 것은 옳지 못하오. 우리는 오히려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우발적인 사고가 일어날 수 있지만 진정한 용기는 변하지 않으며,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비겁한 행동을 결코 경험 부족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오.

사실 여러분은 적군보다 상대적으로 경험은 부족하지만 용맹은 그들보다 월등하오. 여러분이 가장 두려워하는 저들의 전문지식도 용기를 겸비해야만 하오. 그래야만 위기 때 써먹을 수 있도록 배운 것이 기억날 것이오. 투지가 없다면 어떤 기술도 위기 때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배운 것마저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용기 없는 기술은 무용지물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그들의 더 풍부한 경험에 맞서 여러분의 더 탁월한 용기를 내세우고, 지나번 패전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다면 여러분이 그때는 준비가 안 됐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오.

유리하기로 치면 어러분이 더 유리하오. 여러분은 함선 수도 더 많고 중무장보병이 도와주려고 와 있는 가운데 자국 영토 앞바다에서 싸우고 있으니 말이오. 그리고 대개 수가 더 많고 준비가 더 잘된 쪽이 이기게 마련이오. 그러니 우리가 실패할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찾을 수 없소. 또한 지난번 실패조차도 교훈을 줄 수 있으니 지금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오.

따라서 여러분은 키잡이든 선원이든 자신감을 갖고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고 배치된 부서를 떠나서는 안 될 것이오. 우리는 여러분의 자난 번 지휘관들보다 더 훌륭하게 공격 준비를 할 것이고, 어느 누구에게도 비겁자 노릇을 할 구실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오. 누구든 비겁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응분의 벌을 받게 될 것이나, 용감한 자는 용기에 걸맞은 상을 받게 될 것이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2권, 투키디데스

3.2. 아칸토스 민회

아칸토스인 여러분, 라케다이몬인들이 나와 내 부대를 이곳에 파견한 것은 우리가 개전 초기에 선언한 명분을 실현하기 위해서인데, 그때 우리는 헬라스를 해방하기 위해 아테나이인들과 싸운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늦게 왔다면, 그것은 그곳의 전쟁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도 자력으로 아테나이인들을 금새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으니까요. 그러니 여러분은 우리가 늦었다고 나무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 기회가 닿는 대로 여기 왔고, 여러분과 힘을 모아 아테나이인들을 굴복시키려 애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이 나를 환영하는 대신 내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성문을 다아 건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우리 라케다이몬인들은 우리가 실제로 나타기 전에도 정신적으로 우리의 동맹군이며, 여기서 우리를 보면 반가워하게 될 백성에게 가고 있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여러 날 동안 이국 땅을 지나 행군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성의를 다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마음이 바뀌어 여러분 자신과 다른 헬라스인들의 해방을 반대한다면 이는 실로 무서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반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도 그들은 우리 편이 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맨 먼저 찾아간 여러분들이, 큰 도시를 갖고 있고 지혜롭기로 이름난 여러분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길 테니 말입니다. 그래도 나는 만족스러운 해명을 할 수가 없스니다. 그들은 내가 가져다주겠다는 자유가 불순한 것이라고 여기거나, 나는 아테나이의 공격에서 자기들을 지켜줄 병력과 능력도 없이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이곳으로 이끌고 온 부대는 내가 니사이아 항을 구원하러 갔을 때 아테나이인들이 수적으로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감히 공격하지 못한 바로 그 부대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니사이아 항에 있던 부대만큼 많은 병력을 바닷길로 보내 여러분을 공격하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는 헬라스인들을 해코지하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해방하려고 왔으며, 내가 동맹군으로 삼는 자들의 독립을 보장해주겠다는 라케다이몬 정부 당국자들의 가장 엄숙한 맹세를 받아두었습니다. 내가 의도하는 바는 무력이나 기만으로 여러분을 우리 동맹군으로 삼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이 아테나이의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가 여러분의 동맹군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 읟도를 여러분에게 충분히 입증한 만큼 나는 여러분의 의심을 받거나 여러분을 보호해줄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될 이유는 없으며 여러분은 자신감을 갖고 내 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자신의 정적에 대한 두려움에서 내가 특정 집단에 도시를 넘겨주지 않을까 우려한다면 그점에 관한 한 나를 전적으로 믿어도 좋습니다.

나는 파쟁에 개입하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며, 내가 우리 전통을 무시하고 다수파를 소수파에 예속시키거나 소수파를 다수파에 예속시킨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외국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 가혹하고, 우리 라케다이몬인들도 수고를 한 대가로 고맙다는 말은커녕 명예와 명성이 높아지는 대신 비난만 듣게 될 테니 말입니다. 우리가 아테나이인들과 전쟁을 하는 것은 그들의 악덕 때문이라고 비난하면서 우리 자신도 그런 악덕을 드러낸다면 처음부터 자신의 미덕을 과시하지 않은 자들보다 더 미움을 사게 될 것입니다. 평판이 좋은 자들에게는 공개적인 무력보다 위선적인 기만으로 이익을 챙기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경우 공격이 우연히 주어진 힘에 의해 자행되지만, 후자의 경우 악의적인 음모에 따라 진행되기에 하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원칙들이 매우 중요하며, 그래서 우리는 그런 원칙을 고수하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맹세한 바 있지만, 여러분이 우리의 말과 실제 행동을 비교해보면 내가 말한 대로 행동하는 것이 우리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을 것인데, 그보다 확실하게 우리의 맹세를 뒷받침해줄 담보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제의를 하는데도 여러분이 내 제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내게 호의를 품고 있는 만큼 제의를 거절했다고 해서 해코지를 당해서는 안 되며, 내가 제의하는 자유란 위험한 것이어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들에게 제의하는 것은 옳지만 의사에 반해 누구에게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한다면, 여러분 나라의 신과 영웅들을 증인 삼아 나는 여러분을 도우러 이곳에 왔지만 여러분을 설득할 수 없으니 여러분의 나라를 유린함으로써 여러분을 억지로라도 우리 편이 되게 하겠다고 선언할 것이오.

일이 그 지경에 이르면, 나는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내게는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오. 첫째, 여러분이 우리의 동맹군이 되기를 거부한다면 여러분이 우리에게 우호적이라 해도 아테나이인들에게 공물을 바침으로써 라케다이몬인들이 피해를 보는 것을 나는 막아야 합니다. 둘째, 여러분의 방해로 헬라스인들이 예속의 사슬에서 해방되지 못한다면 나는 이를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이렇게 행동할 이유가 없으며, 우리 라케다이몬인들에게는 공동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원하지 않는 자들을 해방할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제국주의적 야심이 없으며, 오히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제국주의를 끝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모두에게 독립을 가져다주겠다면서 여러분의 반대를 눈감아준다면 다수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셈이 될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하시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십시오. 헬라스를 해방하는 일에 여러분이 앞장섬으로써 불멸의 명성을 얻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스스로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해치는 일을 피하고, 도시 전체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을 안겨주도록 하십시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4권, 투키디데스

3.3. 암피폴리스 전투

펠로폰네소스인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용기로 자유를 지켜온 나라에서 왔으며, 여러분은 도리에이스족으로서 여러분에게 늘 지곤 하던 이오네스족과 싸우려 한다는 사실 말고 더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그렇지만 여러분이 전군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일부만 공격하면 불리하리라 믿고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내가 어떻게 공격하려는지 설명하겠소.

생각건대, 적군은 우리를 얕보고는 아무도 밖으로 출동해 자기들과 대적하지 않으리라 자신하고 지금 우리를 우습게보며 대오를 흩뜨린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소. 그러나 성공은 적군의 이런 과오를 재빨리 간파하고 자신의 힘에 맞는 전략을 선택하는 장군의 몫이며, 그럴 경우 반드시 전열을 정비하여 공개적으로 공격할 필요는 없고, 실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방법으로 공격해야 하오. 이런 것들이 전쟁의 계략이며, 적군을 완전히 속여 아군의 이익을 극대화할 때 큰 명성을 얻게 되는 법이오.

그래서 적군이 아무 준비도 없이 자신감이 넘치고, 보아하니 버티기보다는 줄행랑을 놓을 의도를 품고 있는 동안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그들이 전의를 가다듬기 전에 군대를 이끌고 가서 먼저 그들의 중심부에 돌격을 감행할까 하오. 그리고 나중에 클레아리다스여, 그대는 내가 적군을 공격하여 십중팔구 공황 상태에 빠뜨리는 것을 보면 바로 성문들을 열고 암피폴리스인들과 그대 휘하의 다른 동맹군을 이끌고 출동하되, 되도록 빨리 적군 속으로 뛰어드시오. 그렇게 되면 적군은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질 것이오. 두 번째 파상공세는 실제로 교전하는 군대보다 적군을 더 공포에 떨게 하기 때문이오.

클레아리다스여, 그대는 사람들이 스파르테인에게 기대하는 자질을 보여주어야 하오. 그리고 동맹군 여러분은 용감하게 그를 따르되, 훌륭한 전사가 되려면 전의, 명예심, 상관에 대한 복종심을 겸비해야 한다는 점과, 여러분의 미래가 오늘 이날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도록 하시오. 여러분이 사내대장부임을 버여주면 여러분은 자유의 몸이 되고 라케다이몬인들의 몽맹군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나, 그러지 않으면 아테나이인들의 노예라고 불려야 할 것이오. 여러분은 잘해야 노예로 팔려가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을 면할 수 있을 테지만, 전보다 더 가혹한 노예생활을 하게 될 것이며, 헬라스가 해방되는 것을 막는 훼방꾼이 될 것이오. 여러분은 이번 전쟁에 무엇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아는 만큼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하시오. 나도 남들을 격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한 것을 실천하는 사람임을 보여주겠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5권, 투키디데스

4. 평가

시켈리아 사건 뒤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아테나이 동맹국들 사이에 친 라케다이몬적 감정을 불러일으킨 주요 요인은 브라시다스가 당시 보여준 훌륭한 태도와 지혜였는데, 그의 이런 자질을 어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남의 말을 전해 듣고 믿었다. 그는 그렇게 처음으로 외국에 파견된 라케다이몬인으로서 자신이 모든 면에서 훌륭한 인물임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라케다이몬인들도 그와 같으리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4권,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 투키디데스는 브라시다스를 무척이나 호의적으로 평가하였다. 브라시다스가 패배한 전투에서는 스파르타인의 전형적인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용맹함을 강조하였다. 이후 브라시다스가 크게 활약하는 트라케 원정에서는 기존의 스파르타인에게서 보기 힘든 뛰어난 언변에 훌륭한 인격, 그리고 지휘 능력까지 갖춘 장군으로 평가하였다. 공교롭게도 투키디데스는 브라시다스의 암피폴리스 점령을 막지 못한 이유로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인물이다.

5. 창작물

6. 기타


[1] Tellis, Τέλλις. 기원전 421년에 니키아스의 주도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휴전 협상을 맺게 되는데, 사절단의 일원 중에 텔리스의 이름이 기술되어있다.[2] Argileonis, Ἀργιλεωνίς. 1세기의 전기 작가 플루타르코스가 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짧게 언급되었고, 이외에는 기록에 남지 않았다. 민간 전승에서 만들어졌거나 이를 바탕으로 플루타르코스가 창작한 허구의 인물일 수도 있다.[3] ephor, ἔφοροι. 스파르타의 완전 시민(Spartiates)들이 선출하는 5명의 선출직 의원. 왕을 견제하는 권한 외에도 외교 분야에서 큰 권한을 행사하였다.[4] Demosthenes, Δημοσθένης(? ~ BC 413), 아테네의 장군. 필로스 전투와 뒤이은 스팍테리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스파르타에게 위기감을 심어준 인물이다. 마케도니아필리포스알렉산드로스에 맞선 아테네의 정치인 데모스테네스(384 ~ BC 322)와는 동명이인이다.[5] Battle of Sphacteria. 기원전 425년에 발발한 전투. 필로스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퇴각한 스파르타의 전사 400여명이 스팍테리아 섬에 고립되었는데, 아테네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가 섬에 있는 스파르타 군대를 소탕하고 생포한 전투다. 당시 스파르타의 완전 시민이 3500~4000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00여명 정도가 생포되었기 때문에 스파르타 사회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전투 후 스파르타에서는 휴전 협상 여론이 조성되었다.[6] Pleistoanax, Πλειστοάναξ(BC 458 ~ 409), 아기아다이 왕조의 19대 왕.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아티카 지방을 침공하던 중, 페리클레스에게 매수당한 부관의 권유로 철군을 했다가 반역죄를 물어 스파르타에서 추방당하였다. 이후 델포이 신전의 무녀를 매수하여 다시 스파르타에 복귀하고 왕위에 올랐다.[7] Helots, εἵλωτες. 스파르타의 노예 계급. 기원전 7세기에 스파르타에 의해 정복당한 메세니아인들로 이루어져있다. 고대 그리스에는 스파르타 외에도 노예 제도가 있었지만, 다른 도시들은 대개 야만인(βάρβαροι)을 노예로 삼았다. 하지만 메세니아는 그리스 문명에 속했기 때문에 같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도 스파르타의 노예 제도는 논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