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니키아스(Nicias, Νικίας) |
출생 | 기원전 470년, 아테네 |
사망 | 기원전 413년, 시라쿠사 |
1. 개요
니키아스(기원전 470년 - 기원전 413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절 활약했던 고대 아테네의 정치인이다.2. 생애
라우레이온 은광을 채굴하던 아테네 귀족 가문의 자제로 태어났다. 신앙심으로 유명했던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인 기원전 427년에 스트라테고스(지휘관)으로 임명된다.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강경 전쟁파이던 클레온과 대립하고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클레온과 스파르타의 전쟁파 브라시다스가 사망하자, 스파르타와 평화 협정을 체결한다. 이것이 바로 니키아스 화의(Peace of Nicias)라고 불리는 일종의 정전 협정이었다.그럼에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서 소규모 국지전이 벌어졌고, 시칠리아 원정에서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면서 니키아스의 노력은 무산된다. 아테네의 젊은 야망가이자 대명문가 알크메오니데스[1] 출신 자제로 유명한 알키비아데스는 시칠리아 섬의 스파르타 동맹국인 시라쿠사를 상대로 아테네의 동맹국인 세게스타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화가 깨지길 우려했던 니키아스는 이에 반대한다. 둘의 대립이 치열해지자 히페르불로스라는 이는 둘 중 하나를 도편 투표로 추방해서 결정을 내리자고 제안하지만, 아테네인들은 니키아스도 알키비아데스도 아닌 히페르불로스를 추방시킨다. 이후 알키비아데스는 뛰어난 웅변술로 여론을 등에 업고 시칠리아 원정을 추진시킨다.
그와 알키비아데스, 라마코스는 2만 7천 명에 육박하는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착수한다. 니키아스는 자신들의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항복을 받아내는 전략을 지지하는 반면, 라마코스는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자고 주장한다. 알키비아데스는 현지인들의 지지를 얻어서 시칠리아 전체를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으로 편입시키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헤르메스 석상 훼손 사건으로 알키비아데스가 사형 선고를 받고 튀고, 라마코스는 시라쿠사 포위공방 전투 중에 사망하면서 니키아스는 시칠리아에 홀로 남겨진다.
여기에 더해 신장 쪽의 병에 걸렸으며, 병세의 위독함 때문인지 원래 무능했던지 아무튼 이후 시라쿠사 포위전에서 스스로의 무능함과 나태함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길리포스의 스파르타 원군과 주변의 시칠리아 연합군에게 시라쿠사 포위전의 주도권을 '거져 내어주고' 효과적인 대응을 전혀 하지 못하고 아테네 원정군 전체를 스스로 파멸로 이끈다. 원군으로 왔던 데모스테네스의 에피폴라이 야간 공격이 재앙적 패배로 끝난 후에, 데모스테네스의 원정 포기 및 아테네로의 후퇴를 거절하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우를 범한다.
한편 스파르타로 망명간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 왕인 아기스에게 시칠리아의 아테네군을 공격하라고 조언하고, 스파르타 군이 기습 작전으로 선박을 모두 파괴하면서 니키아스는 육탄전을 벌인다. 하지만 육상 전투에는 열세인 아테네가 스파르타의 무적 호플리테스들을 당해낼 수 없었고, 니키아스는 라토미아 협곡에서 포로로 잡혀서 아테네군 1만 2천명과 함께 사망한다.
3. 평가
너무 신탁에 의존하고 우유부단했던 탓에 니키아스는 시칠리아 원정의 패배의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결론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전체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무능한 장군으로 평가할 수 있고, 아테네의 패배와 불행의 1등 공신이지 않을까.4. 기타
플라톤의 대화편 라케스에서 비중있는 등장인물로 나온다. 실제 역사의 행보를 반영해 이론지향적인 성격으로 나오며 경험지향적인 라케스와 대립한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그는 이성에 의한 결정이 종교에 의한것보다 낫다는 주장을 하는데, 그의 인생 최악의 실패가 바로 종교적인 이유로 중요한 군사적 결정을 내린끝에 발생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의미 심장하다. 이를 놓고 플라톤이 니키아스를 변호해주기 위해 넣은 것이란 의견, 니키아스가 실제로 이성적인 인물이었으나 병사들의 신앙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의견이 존재한다.[1] 알키비아데스는 페리클레스의 조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