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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04 02:12:21

알키비아데스

<colbgcolor=#000><colcolor=#fff> 알키비아데스
Ἀλκιβιάδης | Alkibiades
파일:external/classicalwisdom.com/alcibiades_cm.jpg
알키비아데스의 조각.[1][2]
출생 기원전 450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
사망 기원전 404년 (향년 45 ~ 46세)
아케메네스 왕조 프리기아
직업 정치인, 군인

1. 개요2. 일생
2.1. 초기 일생2.2. 펠로폰네소스 전쟁
2.2.1. 스파르타로의 망명과 시칠리아의 대재앙(기원전 413)2.2.2. 아테네로의 귀환(기원전 411)2.2.3. 키지코스 해전의 승리와 복귀(기원전 410)2.2.4. 노티온 해전의 패배와 몰락(기원전 406)
2.3. 말년과 죽음
3. 평가4. 기타5. 대중매체에서

1. 개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 웅변가, 군인.

2. 일생

2.1. 초기 일생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스캄니다이 데모스 출신이며,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클레이니아스(Kleinias)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가 기원전 447년 경에 카이로네아 전투에서 사망하자, 당시 3살 정도였던 알키비아데스는 외삼촌이었던 정치가 페리클레스[3]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는 아테네 명문가 출신으로서 모자람없는 생활을 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청소년 시기에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동성연인이 되었다. 그는 외모가 아름다워 많은 이들의 구애를 받았지만, 오로지 소크라테스만을 따랐다.[4] 두 사람은 곧잘 어울려 지냈으나,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아름다움을 함부로 탐하지 않았다. 알키비아데스가 자신의 스승을 끊임없이 육체적으로 유혹하였으나, 소크라테스가 끝내 이를 뿌리친 일화는 유명하다.[5]

이후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32년, 소크라테스와 함께 포티다이아를 상대로 한 전투에 참전하였다. 당시에 10대 후반의 나이였던 알키비아데스는 용맹히 싸운 끝에 전공을 세우고 상을 받는 명예를 누리기도 했다. 이때 알키비아데스는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위기에 처했으나, 소크라테스가 곁에서 알키비아데스와 그의 무기를 지켜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기원전 424년, 델리온 전투에서도 각기 기병과 보병으로서 참전하였다.[6]

알키비아데스는 명문가의 자제인 데다가, 부유했고, 정계의 거물 페리클레스의 조카이자 당대의 현자 소크라테스의 애제자였던 만큼 그 배경이 매우 화려했다. 더욱이 그는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재능까지 겸비했다. 용맹하고 전투에 능숙해서 젊은 시절부터 전장에 나가 군공을 세운 데다가, 말솜씨와 웅변실력도 뛰어났으며, 성격은 재기발랄하고 사교성이 넘쳤다.이처럼 그는 당시 아테네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릴만한 요소를 모두 갖춘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엄청한 배경과 타고난 능력은 도리어 알키비아데스로 하여금 지나치게 큰 야망과 오만을 품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실제로 그는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성격이 오만하고 방탕해져서 그의 주변에는 적들이 들끓었다.

고대 올림픽에서는 전차 경주에 손수 출전하여 우승을 하기도 했다. 원래는 전차 경주에 출전할 경주마들을 제공하는 마주(馬主)로만 참가할 생각이었는데,[7] 올림픽을 개인 선전용으로 쓰려는 것 아니냐는 주위의 비판을 의식해서, 경주 직전에 본인이 직접 기수로 출전한 것이었다.

주변에 적이 많았지만 그는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채 정치가로서 승승장구하였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었던 기원전 431년에 아테네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가 사망하자 니키아스와 더불어 아테네 정계에서 극단적 민주파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2.2. 펠로폰네소스 전쟁

2.2.1. 스파르타로의 망명과 시칠리아의 대재앙(기원전 413)

기원전 422년,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양측의 대표적인 강경파였던 클레온브라시다스가 동시에 전사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듬해인 기원전 421년, 아테네의 니키아스는 아테네 민회를 설득하여 스파르타와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서른 남짓한 나이였던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와의 평화조약에 반대하는 아테네 호전세력의 대표적인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는 기원전 415년, 아테네 민회에 오늘날의 시칠리아에 위치한 도시국가인 시라쿠사를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시라쿠사는 스파르타의 동맹국이었을 뿐 아니라, 상업의 발달로 부를 누리고 있었으며 우수한 함대까지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스파르타와 군사적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던 아테네에게 있어서 껄끄러운 존재였다.

결국 아테네 민회는 시라쿠사를 공격하기로 결정내렸고, 알키비아데스는 시칠리아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특유의 오만방자한 성격 때문에 주변에 많은 정적들을 만들었던 것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알키비아데스의 원정 선단이 출정하기 전날 밤, 누군가에 의해 헤르메스 신의 흉상을 모신 헤르마 기둥들이 조직적으로 훼손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된 안도키데스는 자신을 살려주는 대가로 공범자들의 이름을 불었다. 공범자들은 모두 귀족 클럽인 헤타이레이아의 젊은 일원들이었고, 이 중에는 알키비아데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더욱이 알키비아데스가 평소부터 같은 아테네인들은 물론이요, 신들까지 가볍게 취급하는 등 교만한 언행을 보여준 탓에 여론 또한 알키비아데스에게 적대적으로 변해갔다.

결국 알키비아데스는 신성모독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만일 그가 재판을 받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아테네 본토에 발이 묶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그렇게 된다면 재판의 결과가 어찌되든 간에 그가 원정 함대를 지휘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는 점은 자명했다. 투키디데스는 그가 만약 아테네에 남았더라면 전례들로 보아 쉽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고까지 평가했다. 결국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를 배신하고 스파르타로 망명한다. 이때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를 "지금까지 준 피해보다 훨씬 큰 이익을 보게 해주겠다." 라는 식으로 설득했고 스파르타는 알키비아데스를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한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는 철저하게 예전 아테네 방식의 삶을 버리고 스파르타인처럼 살아갔다 한다.

스파르타와 시라쿠사는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에 따라 아테네의 공격에 대비하며 튼튼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그에 반하여, 아테네의 원정함대는 사령관이 적군에 붙어버리는 초유의 사태 때문에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더욱이 매파인 알키비아데스를 대신하여 원정 함대를 지휘하게 된 니키아스는 근본이 비둘기파였던지라 전투에서 영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기원전 413년, 아테네의 함대는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를 공격했다가 패배하면서 4~5만에 달하는 병력 및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8] 등의 주요 지휘관들이 모조리 전멸하는 등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는 일명 시칠리아의 대재앙이라고도 불린다. 이 패배를 계기로 하여 아테네의 패권도 그 근본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알키비아데스의 배신도 대재앙의 이유 중 하나였지만 사실 니키아스의 오판 탓도 있었다. 이 때 니키아스는 시칠리아 기병의 강함을 강조했지만 막상 원정군의 지휘를 맡게 되자 기병 확충에는 별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장에서도 소극적인 전술로 일관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양군이 대치할 때 지원군으로 도착한 데모스테네스는 과감하고 유능한 지휘관으로, 야습을 통해 시칠리아군의 방어진을 돌파하려 했지만 지형에 익숙하지 못해 실패하자 시칠리아를 점령할 수 없음을 시인하고 군대를 철군시키려 했다. 그러나 니키아스는 자신이 실각할까봐 철군에 반대했고 그 사이 시라쿠사군이 아테네 함대를 봉쇄해버렸다. 니키아스는 이후에도 점성술을 믿고 철군을 미적미적 미뤘는데 그 사이 시라쿠사군은 봉쇄를 더욱 공고히 한 반면 봉쇄당한 아테네군의 사기는 갈수록 땅에 떨어졌다. 마침내 아테네 함대가 시라쿠사 함대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면서, 시칠리아 원정군이 전멸하는 대참패를 맞게 된 것이다. 결국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는 모두 시칠리아 원정에서 포로로 붙잡혔으며, 결국 아테네로 돌아오지 못하고 살해당했다.

2.2.2. 아테네로의 귀환(기원전 411)

알키비아데스의 배신으로 인하여 시칠리아에서 재앙에 가까운 패배를 경험한 아테네의 정계는 크게 요동쳤다. 아테네는 남은 저력을 모두 끌어모아서 델로스 동맹이 와해되는 사태는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기원전 413~411년 사이, 페르시아 제국이 전쟁에 개입하여 스파르타의 동맹국들에게 선박 건조 비용을 지원하기 시작했고,[9] 아테네의 종속국들 또한 끊임없이 반란을 도모하였다. 그로 인하여 해외에서 들어오는 수입원이 끊어지면서 아테네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하였다.

한편 알키비아데스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자신이 망명했던 스파르타에서도 악명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초에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그들조차 놀랄 만큼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였으나, 곧 본색을 드러내어 스파르타 왕 아기스 2세의 아내인 티마이아와 간통하였다가 발각당하고 말았다.[10] 결국 그는 스파르타에서도 도망쳐서 페르시아의 사트라프였던 티사페르네스에게 의탁하고는 아테네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는 아테네인들에게 민주정을 폐지하고 과두정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아나톨리아 서부의 페르시아 사트라프(총독)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내겠다는 제안을 건냈다. 물론 이는 과두정 지지자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아테네로 귀환하려는 수작이었다. 민주정 체제하에서는 조국을 배반했던 행위를 용서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411년, 경제적으로 핀치에 몰려있었던 아테네 민회는 어쩔 수 없이 알키비아데스의 제안에 따라 4백인회에 모든 권력을 양도하였다. 그에 따라 아테네에는 정변이 일어나 정치체계가 민주정에서 과두정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모스 섬에 주둔하고 있었던 아테네의 함대가 민주정을 강력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과두정 성립은 불발되었다. 그에 따라 민주제-과두제의 절충형에 속하는 준과두정인 "5천인회"가 성립되었다.

5천인회는 이미 유능한 지휘관으로서 그 능력을 입증해보였던 알키비아데스 및 그와 함께 추방된 군지도자들을 다시 아테네로 불러들이고자 하였다. 기원전 411년에 키노세마 해전에서 아테네의 함대가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하자, 알키비아데스 또한 아비도스 해전에서 함대를 거느리고 아테네를 지원하여 그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두 차례의 해전에서 아테네는 비록 페르시아군의 훼방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상대로 판정승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2.2.3. 키지코스 해전의 승리와 복귀(기원전 410)

이후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인들에게 선전했던대로, 페르시아를 아테네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의탁했던 아나톨리아 지역의 페르시아 사트라프인 티사페르네스와의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티사페르네스는 오히려 알키비아데스를 체포하여 사르디스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탈출에 성공하였고, 아테네는 어쩔 수 없이 페르시아의 지원을 등에 업은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다시 한번 결전을 치러야 했다. 이 싸움이 바로 기원전 410년의 키지코스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 아테네의 함대는 셋으로 갈라져 키지코스를 공략하고자 하였다. 이때에 알키비아데스는 과감하게도 20척의 함대를 거느리고 키지코스에 주둔하고 있던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유인하였다. 당시 펠로폰네소스 함대의 총사령관이었던 민다로스는 이를 다급하게 추격하기 시작하여 만에 들어섰는데, 함선을 숨기고 매복해있던 트라시불로스와 테라메네스가 후방에서 이를 급습했다.

그러나 민다로스가 아테네 함대의 함정에서 빠져나와 지상에 상륙하자, 알키비아데스는 이를 뒤쫓아 지상전을 시도하는 모험을 감행하였다. 이는 그가 아테네로 무사히 복귀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눈부신 전공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트라시불로스와 테라메네스 또한 뒤이어 상륙하여 알키비아데스를 도왔다. 이들은 펠로폰네소스와 페르시아의 연합군을 공격하여 이를 크게 무찌르는 데 성공하였으며, 적군의 총사령관인 민다로스를 죽이는 등의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알키비아데스는 키지코스를 점령하고, 펠로폰네소스의 지상군까지 격퇴하여 마르마라 해의 제해권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정박해있던 펠로폰네소스 함대의 배들도 노획하였다. 이 화려한 공적 덕분에 알키비아데스는 약 2년 만에 아테네로 돌아갈 수 있었다.

2.2.4. 노티온 해전의 패배와 몰락(기원전 406)

알키비아데스가 기원전 410년에 키지코스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아테네에는 몇 가지의 변화가 일어났다. 아테네의 함대가 민주정으로의 복귀를 강하게 요구하면서 준과두정제였던 5천인회는 다시 기존의 민주정 체제로 회귀하였다. 또한 그동안 아테네 측에 절망적으로 돌아가던 전세가 차츰 역전되면서, 아테네인들은 다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자신감만 충만했을 뿐 객관적으로 상황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아테네의 재정상황은 여전히 매우 열악했고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맡은 함대를 운용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또한 스파르타라고 해서 마냥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스파르타의 명장이었던 리산드로스는 소아시아 지역에 사트라프로 파견되었던 페르시아의 젊은 왕자 키로스를 구워 삶아서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아냈고, 이를 토대로 적극적으로 해군과 함대를 육성하며 아테네에 설욕할 기회만을 노렸다.

기원전 406년 알키비아데스는 함대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카리아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자신의 키잡이이자 부장인 안티오코스에게 함대를 잠시 맡겨 두었다. 이 때 알키비아데스는 안티오코스에게 스파르타의 도발에 절대 응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이 참에 전공을 세우고 싶었던 안티오코스는 오히려 리산드로스의 함대에 선제 공격을 시도했고, 결국 아테네 함대는 리산드로스의 스파르타 함대에 참패를 당했다.

그런데 아테네인들(정확하게는 알키비아데스의 정적들)은 이 패배의 책임을 함대의 책임자였던 알키비아데스에게 전가했고, 결국 알키비아데스는 다시 아테네에서 추방당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2.3. 말년과 죽음

두번째로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갈리폴리 반도에 위치한 자기 소유의 토지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그가 망명지에 머무는 동안 아테네 함대는 아르기누사이 해전(기원전 406)에서 스파르타와 맞붙어 승리를 거두었다.

뒤이어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기원전 405)이 벌어졌고, 아테네 함대는 리산드로스가 지휘하는 스파르타 함대와 다시 맞붙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싸움이 시작되기 직전에 아테네군 진영에 들어가 장군들에게 적의 공격에 취약한 아이고스포타모이 대신에 세스토스로 기지를 옮길 것을 권하였다. 또한 그렇게만 해준다면 자신과 절친한 트라케 지역의 두 왕들로부터 지상군을 지원받아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리산드로스의 함대를 압박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장군들은 알키비아데스의 허풍 섞인 주장을 쉽사리 신뢰하지 못하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이전에도 그와 같은 병력 지원에 대한 약속을 어긴 적이 있었을 뿐 아니라 병력 지원의 댓가로 장군들에게 아테네군의 공동 지휘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덕분에 그들은 알키비아데스가 이 기회를 발판 삼아 다시 아테네 정계로 복귀하려 할 야심을 품고 있다는 점 또한 간파하고 있었다. 이들은 속이 뻔히 보이는 알키비아데스의 제안을 거절하였고,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로 돌아갈 기회를 영영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그 싸움에서 아테네의 함대는 대패하였으며 아테네는 해상 제국을 유지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결국 아테네의 항복으로 끝을 맺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전쟁이 끝난 직후인 기원전 405년,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서 페르시아의 땅인 프리기아 지방으로 피신하였으나 그 해 살해당한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가 프리기아 지역의 사트라프였던 파르나바조스에게 알키비아데스를 제거할 것을 청탁하였다고 전한다. 파르나바조스는 알키비아데스가 머물던 집에 불을 질렀고, 알키비아데스가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때에 단검을 든 암살자들이 그를 공격하였고, 화살이 날아왔다고 전한다. 아니면 전쟁에서 참패한 아테네인들이 배신자 알키비아데스를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를 보냈을 수도 있다.

3. 평가

만일 사람들이 린케우스의 눈을 사용하여 그들의 시선이 장애물을 꿰뚫어보게 된다면, 겉보기에 누구보다 아름다운 저 알키비아데스의 육신은 내면이 들여다보였을 때 누구보다도 추하게 보이지 않겠는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의 권유』 단편 10Ab [11]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의 표본이라 할 만한 인물. 문무를 겸비했으며 군사적인 식견과 능력이 매우 뛰어났지만, 인격적으로 결함이 너무 큰 것이 문제였다. 특히 고질적인 오만함과 이기심은 그 자신은 물론 자신의 조국까지 통째로 갉아먹었다. 아테네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라고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사람.

그의 유능함은 의심할 만한 여지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파르타와 아테네 양측에 빛나는 대승을 안겨다주었다는 점을 보더라도 확실한 사실이다. 물론 오만하고 허세가 심하기는 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능력을 지닌 뛰어난 지략가라는 점은 분명했으며, 필요할 때에는 놀라운 대담함과 행동력을 보여주었다.

알키비아데스는 고대 그리스의 인물들 중에서도 특히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고, 덕분에 그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살아있었던 당대뿐 아니라 그 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실 그리스의 정치가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명문가의 자제였고, 다른 사람도 아닌 아테네의 영웅 페리클레스의 혈족이었기에 기본적인 배경이 빵빵하였다. 또한 당대의 기인이자 최고의 철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소크라테스가 가장 아끼던 제자 중 한 사람이었고, 지략과 용기 및 웅변술에서 무엇 하나 뒤지지 않았다. 또한 그는 남녀 모두를 매혹시킬 만한 빼어난 외모와 재기발랄하고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아테네 대중들로부터 절대적인 인기를 얻으며, 가장 명예로운 선출직 중 하나였던 장군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또한 개인의 무력또한 상당히 뛰어났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조국을 배반하였다. 그는 성상을 파괴하고 신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처하자,[12] 그대로 스파르타 측에 붙었다. 이후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게 시칠리아의 대재앙이라 불리는 씻을 수 없는 참패를 안겨다 주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한때 해상의 패자로 군림했던 아테네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이전의 위상을 다시는 되찾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알키비아데스가 보여준 이후의 행보도 그야말로 배신과 통수의 연속이었다. 결국 조국을 버리고 선택한 스파르타에서도 왕비를 임신시키는 사고를 치자[13] 그 다음에는 페르시아로 망명하였고, 마지막에는 페르시아와 아테네의 연결을 도모하며 자신이 무참히 짓밟았던 조국 아테네의 정계로 복귀하여 정치적으로 재기하려고 하는 등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테네의 역사가였던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책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어떤 조직이나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이유는 다 사람 때문이다."라는 말을 덧붙이며, 알키비아데스를 아테네 몰락의 원흉이라 비판하였다. 그는 알키비아데스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점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충성심과 양심이 결여된 채, 오로지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그가 조국을 배신하여 결국 파멸로 몰아넣은 점은 아테네인이었던 투키디데스에게 있어 실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었을 것이다. 당장 시칠리아 원정의 참패만 아니었어도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최소한 패배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패배의 주 원인은 알키비아데스의 배신이었다.

다만 "어떤 조직이나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이유는 다 사람 때문이다." 라는 말이 오로지 알키비아데스에게로 향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책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아테네 사람들이 시칠리아의 크기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였으며 알키비아데스가 시칠리아 원정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음을 밝혔으나 "그가 공인으로서는 탁월한 전략가였음에도 시민들은 개인적으로 그의 생활 방식에 혐오감을 느끼고 그를 다른 사람들로 대치함으로써 오래지 않아 도시가 몰락하게 한 것이다.", "그들은 고발인의 됨됨이는 문제삼지 않고 어떤 고발이든 의혹의 근거로 삼으며 완전한 악당들이 제시하는 증거에 따라 가장 훌륭한 시민들을 체포하여 투옥시켰다." 라며 그보다는 아테네의 우매한 대중들을 탓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거기다가 알키비아데스가 망명하지 않았더라면 날조당한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 뻔했다고 덧붙이며 그에게 망명이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최후를 맞는 것의 둘 이외에는 선택지가 없었음을 충분히 설명하였다. 즉, 아테네를 망하게 한 사람들이란 클레온의 감성적인 선동에 놀아나 전쟁을 키우고 알키비아데스의 정적들에게 선동당해, 시칠리아 원정을 결의해놓고서도 원정 계획을 주도하고 누구보다 큰 열의를 보였으며 사령권을 쥐고 있었고 적합한 능력을 가져 원정 초기에 충분한 성과까지 내고 있었던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로부터 등을 돌리게끔 한 민중들 그 자신인 것이다.

또다른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 또한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평가가 박했다. 크세노폰가 보기에 알키비아데스는 친척인 크리티아스와 함께 과두파를 이끌면서 아테네에 정치적으로 끔찍한 혼란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일어난 아테네 시민들의 증오심이 결국 그들의 스승이기도 했던 소크라테스로 향하게 하여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때문에 크세노폰은 자신의 저서에서도 알키비아데스가 그다지 소크라테스의 정신적인 제자라고 볼 수 없다고 깠으며, 단지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되는 기술과 소크라테스의 명성을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겉돌던 인물에 불과했다고 폄하한다.

그에 반하여, 로마 오현제 시기의 철학자였던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그의 출중한 능력을 좀 더 부각시켰는데 이는 외국인으로써 어차피 알키비아데스의 매국 행위에 아테네인만큼 분노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 또한 알키비아데스 본인이 매국노로 끝난 게 아니라 계속 여기저기 붙었고,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건 제3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흥미로웠을 것이다.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5.1. 게임

5.1.1.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게임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에 등장한다. 시대 배경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로, 알키비아데스가 풍운아로서 두각을 드러내기 전인지라 작중 묘사는 기본적으로 변태 개그 캐릭터. 그야말로 작중 제일가는 음란마귀로서 이성과 동성, 심지어 동물무생물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주인공에게도 수시로 느끼한 플러팅을 시도하는 색골이지만, 그래도 악인은 아니며 오히려 주인공과 동료들을 돕는 조력자 포지션에 가깝다. 주인공 또한 그의 자유분방한 쾌락주의 기질이 싫지만은 않은지 재미있는 친구로 대해 주며, 알키비아데스가 주는 대부분의 퀘스트에 주인공이 그와 성관계를 갖는 선택지가 있을 정도로 그럭저럭 괜찮은 사이다.

메인 스토리가 암피폴리스 전투를 전후하여 끝나기 때문에, 게임상에서 그가 아테네-스파르타-페르시아를 넘나들며 대활약하는 모습은 끝내 볼 수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를 은근히 유혹하거나, 주인공에게 가지가지 어이없고 수상한 의뢰를 하는데 알고 보면 그게 다 아테네 정치판을 물밑에서 쥐락펴락하는 것이라는 묘사[19] 등, 그의 미래를 예고하는 듯한 의미심장한 떡밥들은 찾아볼 수 있다.

5.1.2. 도미네이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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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미남이었다는 생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2] 조각 하단에는 "알키비아데스 / 클레이니아스의 아들 / 아테네 인"이라고 쓰여 있다. 다만 해당 조각 자체는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세히 보면 '클레이니아스의 아들' 부분이 Κλεινιου가 아닌 κλινιου라고 쓰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대에 이미 ει 음가가 '에이'가 아닌 현대 그리스어와 동일한 '이'로 단순화 되었고, 당대인들도 혼동했다는 증거 중 하나다.[3] 정확히는 5촌 아저씨뻘. 알키비아데스의 어머니 데이노마케가 페리클레스의 사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4] 플라톤의 《향연》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에 대한 알키비아데스의 집착은 상당했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질투가 워낙 심해서, 그와 만난 이후로 잘생긴 청년과 대화를 나누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당시에 두 사람은 거의 20년이나 되는 나이차가 있었음에도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하여 그를 때리기까지 했다.[5] 이처럼 청소년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지혜로운 이에게 육체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는 대신에, 지혜와 지식을 전수받는 파이데라스티아라고 불리는 동성애적 관계는 고대 아테네 문화에서 일상적인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동성애 문서 참조.[6] 알키비아데스는 포티다이아 전투에서 상을 받을 당시, 장군들에게 소크라테스에게도 상을 내려 줄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또한 델리온 전투 당시에는 아테네군이 후퇴할 당시에 소크라테스가 침착하게 행동한 덕분에 후방이 안전해졌다고 회고하며 스승의 무공을 칭송하기도 하였다.[7] 고대 올림픽의 전차 경주는 우승마의 기수뿐만 아니라 마주에게도 월계관을 수상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규정의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 역사상 최초의 여성 올림픽 우승자로 알려진 기원전 5~4세기 스파르타의 왕녀 키니스카로, 본인 소유의 직접 훈련시킨 말과 직접 스카우트한 기수를 전차 경주에 내보내 우승하게 해서 월계관을 수상한 것.[8] 반마케도니아파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와는 다른 인물이다.[9] 이는 아테네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로 강력한 해상 제국을 건설하여 아나톨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한 아테네는 페르시아에게 있어서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10] 이로 인해 훗날 스파르타에는 아기스 2세의 유일한 아들 레오티키다스가 사실 알키비아데스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며, 그 때문에 레오티키다스는 부왕 사후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그의 숙부이자 아기스의 이복동생인 아게실라오스 2세가 왕위에 오른다.[11]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에서 재인용.[12] 그런데 실제로 이런 혐의를 날조해 정적을 숙청한 사례가 그리스에 꽤나 많은데다 알키비아데스 자체가 정적이 많은 사람이라 죽을 게 확실하다고 여겨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13] 단순히 루머란 얘기도 있다.[14]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하고 패권을 상실한 책임을 돌릴 희생양으로서 죽었던 까닭도 없지 않다.[15] 《알키비아데스Ⅱ》는 학계에서 위작으로 간주되고, 《알키비아데스Ⅰ》은 그 여부가 논쟁적이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Ⅰ》은 오랜 세월 동안 플라톤이 직접 저술한 작품으로 간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 역시도 매우 뛰어난 걸작으로, '플라톤이 직접 저술했거나' '무명의 저자가 쓴 플라톤 철학 해설서'이다.[16] 즉 알키비아데스가 생각한 방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소크라테스라는 뜻이다.[17] 초반에 절주 분위기를 주도한 이들 중 하나이다.[18] 자신의 지적 아름다움이 알키비아데스의 육체적 아름다움보다 월등하다고 말하면서 그의 갑작스런 고백을 능청스럽게 받아넘기는 것에 더 가깝다.[19] 1) 타인의 이름을 사칭하여 어느 장교에게 택배를 배달하라고 의뢰하는데, 내용물은 남근 모형이며 심지어는 '당신의 아내에게 내가 그리울 때 사용하라고 전하라'는 어처구니없는 편지가 동봉되어 있다. 사실 알키비아데스가 사칭한 사람은 자신의 정적으로, 택배를 받은 장교가 자신의 정적과 원수지간이 되어 그를 제거하게 유도하려는 차도살인지계였다. 2) 어떤 부인의 성인용품을 훔쳐다 줄 것을 의뢰하는데, 사실 이 부인의 남편이 알키비아데스와 대립하는 사이다. 그 남편 되는 사람이 부인의 욕정을 충족시켜 주느라 바빠 진이 빠져서 정치판에 신경을 못 쓰게 만들려는 큰 그림 3) 술에 취한 지인을 자기 대신 집에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는데, 도착지에서 괴한들이 나타나 '지인'을 습격한다. 이번에도 이 지인이란 사람은 사실 정적으로, 그가 괴한 습격 사건으로 사망하면 좋고 살아남더라도 겁을 집어먹고 몸을 사리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알키비아데스가 주는 의뢰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의뢰를 처음 받았을 땐 어이가 없고 진행하다 보면 어쩐지 수상하며 나중에야 그의 큰 그림을 알게 되면 다른 의미로 기가 차게 되는 구성을 하고 있다.